1장
해방 공간에서 사법 기구의 재편 과정
1. 헌정사로서의 사법사
해방 공간에서 사법 기구의 재편 과정은 대한민국 헌정 체제의 체제적 본질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 바로 헌정사로서의 사법사 연구의 방법론 혹은 그 서술의 초점에 관한 문제다. 나는 이 점에 관해 두 가지 핵심 변수를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해방 공간의 실질적 기획자요 연출자였던 ‘미군정(美軍政)의 규범적 선도 역할’이다. 미군정의 결정적 역할은 해방 공간의 다양한 국면들에서 거듭 확인되고 있으나, 이 글의 대상인 사법 기구의 재편 과정에서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미국 또는 미군정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실현하는 과정만 이 아니라, 미국 또는 미군정에게 당연한 것 또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을 실현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마 치 일제의 총독 정치가 그들에게는 당연한 천황 중심 체제의 이식을 목표로 했던 것처럼, 해방 공간에서 사법 기구의 재편 과정은 미군정의 입장에서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그들로서는 미국식 헌정 체제의 핵심에 해당하 는 교의를 확립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1) 이론적으로 ‘미군정의 규범적 선도 역할’은 ‘사법권의 우위와 법률가 독점’을 내세우는 자유주의적 법치주의의 관점과 ‘사법의 민주화와 시민적 참여’라는 공화주의적 입헌주의의 관점에서 모두 추적이 가능하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전자에 비해 후자에 관한 미군정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 었으며, 그 결과 미국식 헌정 체제의 이식은 매우 선택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해방 공간에 서 사법 기구의 재편 과정이 이처럼 편향되게 진행되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은 두 번째의 핵심 변수로서 해방 공간에서 사법 기구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재조직되었던
‘조선인 법률가 집단의 직업적 이해관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미국식 헌정 체제는 법률가 집단으로 하여금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핵심 교의를 자신들의 직업적 이해관계와 직결시켜 이해하도록 방임하는 경향이 있고, 그 때문에 법률가 집단은 쉽사리 ‘사법권의 우위와 법률가 독점’을 기조로 하는 자유주의적 법치주의의 강력한 옹호 집단으로 변신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2) 따라서 하나의 이론적 가능성으로서 조선인 법률가 집단 이 미국식 헌정 체제의 이식 과정에서 일종의 수용 인자(受容因子)로 작용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고 볼 1)_이에 관한 문헌은 부지기수이지만, 그 정당화 및 다양한 비판론 등을 포괄하고 있는 최근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Griffin(1996)을 볼 것.
2)_이 책의 2장 참조.
수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해방 공간에서 조선인 법률가 집단은 바로 이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식민 지 조선의 주변부 변호사들로부터 새로운 헌정 체제의 판검사들로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이루어 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법의 민주화’의 제도적 표현이라 할 ‘시민의 사법 참여 논의’나 ‘고위 법관 선출 논의’ 등은 제 대로 부각되지 못한 대신, ‘사법권의 독립’을 특권적으로 강조하면서도 독재적인 행정 권력과 부패한 입법 권 력의 위협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는 소극적 관료 사법의 전형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핵심 변수, 즉 미군정의 규범적 선도 역할과 조선인 법률가 집단의 직업적 이해관계 사이의 상호 연계는 해방 공간의 정치적 소용돌이 한쪽에서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졌다. 비록 그 결과로 형성된 사법 기구는 곧이어 전쟁과 독재의 틈바구니에서 좌충우돌하게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양자의 상호 연계는 대한민국 헌정 체제의 저변에서 일종의 규범적 전제를 제공해 왔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극적으로 헌법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2. 미군정과 조선인 법률가집단의 조우
1945년 8월 15일 이전, 양자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했다. 공식적으로 대일본 제국의 법률가들이었던 식민지 조선의 조선인 법률가들은 기본적으로 식민지 사법 기구의 부속 인원들에 불과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법정에 출석할 때면, 재판관 검찰관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덜 화려한 법복을 입어야만 하는 제3순위 사법 관료 들, 즉 변호사들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사법부(司法部를 위시해 식민지 사법 기구의 중심을 차지했던 일본인들 에 비해 조선인 법률가들은 항상 핵심에서 밀려나 주변을 맴도는 아웃사이더들일 뿐이었다. 재판관과 검찰관 중에는 매우 소수의 인원만이 그것도 하위직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변호사 집단 내부에서도 일본인 변호사들 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대체로 말단으로 밀려나는 신세였다. 아울러 제도적으로도 조선인 법률가의 입신양명 은 이중 삼중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조선인 법률가들의 의뢰인 집단인 조선 민중에게 이들은 어떤 점에서 애증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비운의 사법 적 대표들이었다. 고등문관시험 등에 합격한 수재 집단으로서 이들이 가진 이미지는 일본법이 적용되고 일본 어로 진행되는 법정에서 조선 민중의 이익을 수호하는 용감한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현실적인 지위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사법 기구의 말단이었으며, 그들의 직업적 감수성은 일본인 법률 가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열등감과 굴욕감에 지배받고 있었다.3) 이에 더해 일제 치하에서 법원 검찰 등의 사법 기구가 경찰을 비롯한 직접적인 억압 기구들에 비해 현실적으로 정치적 중요성이 낮았다는 점 역시 주목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점령 과정에서 미군정이 치안 확보를 위해 복원을 용인했을 만큼, 일제하의 경찰 조직 3)_대다수의 조선인 법률가들이 친일 노선의 개인적인 입신양명으로 인생의 진로를 개척하는 가운데, 법률적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소수의 ‘민족 변호사들’(허헌 김병로 이인 등)이 대중의 선망을 받게 되었던 것도 이런 이중적 상 황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식민지 조선의 대중에게 그들은 ‘일제에 맞서는’ 민족 지도자들인 동시에 ‘일 본인보다 뛰어난’ 변호사들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은 식민 통치의 현실적인 기축이었다. 요컨대 식민지 사법 기구는 그 자체로서 권력의 중심에서 한걸음 비켜 있었으며, 그 속에서 조선인 법률가들은 또 다시 제한적 효용만을 갖는 말단의 부속 인원들로 취급되고 있었 던 것이다.4)
해방 공간이 열리기까지 조선인 법률가들이 ‘사법의 민주화’라는 이념을 정면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 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조선인 법률가들에게 사법 개혁의 담론으로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대일본 제국 내부에서 군국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명맥을 유지했던 자유민권법 학파의 ‘법조일원화(法曹一元化)론’이 유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개업 변호사들로부터 판사와 검사를 충원함으로써 변호사 집단을 판검사 집단과 동 등한 자격으로 격상시키고, 나아가 이러한 법조일원화를 통해 국가 관료제 내부에서 사법 기구의 제도적 독자 성을 확보하자는 주장으로서, 식민지 사법 기구의 말단을 차지한 조선인 변호사들의 직업적 이해관계와 상통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갑자기 형성된 새로운 정치 지형은 조선인 법률가들에게 기회 구조로 작 용했다. 기존 사법 기구의 중심을 형성하던 압도적 다수의 일본인 재판관 검찰관 변호사들의 입지가 하루아침 에 사라져 버림으로써 사법권의 현실적인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다른 행정 기구도 마찬가지였지만, 사법 기구의 경우 건국준비위원회 등 조선인으로 조직된 과도기 치안 조직들이 이를 대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존재했다. 그것은 사법 과정 전체에 여전히 일본법이 적용되고, 재판 과정에 일본어가 사용되는 등 소위 ‘절차적 전문성’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 공간의 사법 기구 재편 과정에서 문제의 관건은 ‘미군정의 긴급한 필요였던 사법 기구의 기능 회 복을 누가 제공할 것이며, 또 그것을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미국식 헌정 체제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해방 공간의 사법 기구 재편 과정에서 조선인 법률가들과 미군정이 서로에게 유리한 정 치적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4)_일제강점기 식민지 법제 일반에 관해서는 김창록(1995, 49-78), 문준영(2001, 97-134)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