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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딩과 선교사의 사역 소속감의 확립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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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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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딩과 선교사의 사역 소속감의 확립에 대하여

Bonding and The Missionary Task (Establishing a Sense of Belonging)

우리 가정에는 최근에 태어난 사내아이가 있다. 이 제드(Jed)의 자연분만을 집에서 준비하면서, 우리는 긴밀한 유대관계 혹은 본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각인(imprinting)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대학 심리학 교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벨상을 탄 자연과학자 콘래드 로렌츠(Konrad Lorenz)를 따라다니는 오리새끼들 그림을 기억할 것이다. 부화되는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로렌츠와 그 오리새끼들만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그 이후에 그 오리새끼들은 그가 마치도 자신들의 부모인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

“각인된” 오리들은 사람과 유대관계를 갖는 경험을 한 것이다.

최근에, 염소, 소 및 원숭이와 같은 여러가지의 동물들을 통한 실험에서 이와 같은 유대감에 대한 이론을 지지하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갖난 새끼와 어미는 출생 직후에 초기의 민감한 시기를 갖는다는 것이다. 만일에 어미와 그 새끼들이 그 시간에 함께 있었던 경우에는 친밀한 유대가 이루어지고, 그 이후에는 서로가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갖난 새끼를 출생 직후에 갈라 놓게 되면, 인형이라든가 다른 동물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그 대리모 역할이 되어 들러 붙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 갖난 새끼와 어미가 다시 만나게 되어도 그들 중 하나 혹은 둘 다 거부 반응을 보이거나, 최소한 다른 상대방에게 정상적인 결합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갖난아이와 그 모친에 대한 실험에서 이와 같이 본딩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얼핏 보기에, 출생 직후에는 무언가 섭리적으로 고안된 심리학적이고 생리학적인 인자들이 그 새로 태어난 상태에서 작동하여 그 부모와 결합되게 하는 것 같다. 이 때에는 확실히 그 아기와 부모의 흥분지수와 아드레날린 수치가 최고조에 달한다. 갖난아이의 감각들은 복합적인 새로운 지각들에 의하여 자극 받는다. 출생이란 본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시각, 새로운 소리, 새로운 냄새, 새로운 위치, 새로운 환경, 그리고 새로운 돌봄의 방법이 적용되는, 전혀 새로운 문화의 세계 가운데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특별한 순간에, 그 아이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주위의 환경 가운데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지 비범한 능력을 부여받는다.

가정 출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부모와 아이가 본딩을 이루는 과정을 중시한다. 클라우스와 켄넬(Klaus & Kennell)이 “갖난아이의 모친적 본딩(Maternal Infant Bonding)” (Mosby Cp., St. Louis, 1976) 가운데에 펴낸 일련의 주요 연구결과가 널리 읽혀지고 있다.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 막태어난 아이는 그 탄생 후 일주일이나 2주일 이후의 그 어떤 때 보다도 첫 날 가장 깨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도 바로 이것인데, 아이는 태어난지 6 시간동안 온갖 관심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이후에 밤새도록 잠을 잔 다음, 그 이후 몇 시간동안 그렇게 더 깨어 있더니, 그 다음 2 주 동안은 주로 많은 잠을 잤다.

출생 직후에 이렇게 깨어 있는 시간들은 본딩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시간인 것이다. 이 때에 바로 소속감이 형성된다. 전형적인 미국 병원 출산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정상적인 유대관계 형성이 어렵다.

이 글의 원저자: E. Thomas Brewster & Elizabeth S. Brewster. 번역자: 김요한

이글은 Paul G. Hibert, Ralph D. Winter, Don Richardson, Charles Van Engen, 및 Loran D. Long등이 추천한 것으로, 개척사역/미전도 종족 사역에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지인과의 유대관계에 대한 통 찰력을 제공하는 귀중한 네용을 담고 있다.

Bonding은 유대관계, 소속감, 혹은 밀착됨 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특별히 선교지에 들어 가는 초기의 독특한 조건 가운데에서 현지의 상황 및 사람들과 착 들러 붙는것을 나타내므로, 그냥 “본 딩”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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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출산 아이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산모를 돕기 위해서 보통 여러 종류의 약물이 사용된다. 이러한 경우에 아기나 그 엄마 모두에게 태어난 직후의 결정적인 시간에 정확이 깨어있는 시간을 경험하기가 어렵다. 병원 출산에서 정상적인 유대관계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로, 그 아이를 부모 손에서 나꿔채서 격리된 신생아실로 보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본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거절감이 생길 수 있다. 미숙아로 태어난 경우에 어머니로부터 격리되어 인큐베이터 안에 단 며칠간이라도 둔 아이에게 아동학대가 훨씬 더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 이 사실을 보여준다. (Klaus and Kennel의 책, 2-10 페이지)

우리는 가족으로서의 즉각적인 본딩과 그 유대관계를 최대로 형성하는데에 방해가 되는 어떤 제도적인 것이라도 멀리하기 위하여 세 아이 모두 다 가정분만을 하였다.

선교사와의 비유 (The Missionary Analogy)

갖난아기가 새로운 문화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어른으로서 전혀 새로운 외국 문화에 들어가는 것 사이에 중요한 유사점들이 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어른의 감각들 또한 시각적으로, 음향적으로, 그리고 후각적으로 뒤섞인 새로운 감각들의 폭격을 당하지만, 어른들도 이러한 새로운 경험에 반응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것들을 즐길 수도 있다. 출생시에 이미 경험한 것과 같이, 그의 아드레날린이 증가하고 흥분수치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도착하는 그 순간은, 그에게 있어서 심리적으로 감정적으로 그가 발을 들여 놓을 그 환경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과 처음으로 유대관계를 이루는 독특한 상황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마치 갖난아이를 병원의 규칙에 의하여 신생아 양육실로 가로채 데리고 가듯이, 새로 도착한 선교사는 일반적으로 그와 안면이 있거나 가까운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서 그 곳의 현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와는 격리된 곳으로 잡아채듯이 가게 된다. 실제로 이 신임선교사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복된 소식이 되라고 대상으로 부르신 그 사람들과 연대될 준비가 갖추어져 있음에도 말이다.

타이밍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오리들이 과거 시점의 아무 때나 그렇게 각인된 것이 아니다.

각인이라는 것은 결정적인 그 시점에만 일어난다. 본딩이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기 위하여 고유하게 준비된 상태일 때에만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신임선교사가 새로운 나라에서 현지인들과 진정한 소속감을 일으키기 원한다면 처음 2주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갖난아이가 자신의 부모 대신에 병원에서 일하는 그 누군가와 본딩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호원에 의해서 익숙하여진 아이는 부모를 만나게 될 때에 운다.

새로운 선교사들 또한, 들어가고자 하는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외국인과 본딩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일은 보통 현지에 도착한 신임 사역자에게 행하여지는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비유에 대한 과학적인 타당성은 널리 받아들여진다. 재미있게 도, 콘래드 로렌츠는 1973년도에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지식원으로서의 비교유추의 가치”(The value of analogy as a source of knowledge)라는 제목을 택하였다. 그의 책 “공격에 대하여”(On

Aggression)(Court, Brace & World, 1963)에서 그는 인간과 동물의 행동 사이의 유사점을 연구하는데 에, 비교유추(Analogy)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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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만일 다른 외국인과 먼저 그의 소속감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 선교사가 자신의 사역을 소위 침략적 (foray) 방법으로 수행하리라는 것은 짐작할만하다. 즉, 그는 다른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그러하듯이 현지인들과는 격리되어 살아갈 것이며, 매주 사회에 침투를 시도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역을 수행하고는 안전이 보장되는 집이나 격리된 선교사의 모임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본딩이 없이는, 그 지방의 현지 문화 가운데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사회 내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정상적인 본딩이 형성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당하거나, 심지어는 그릇된 취급을 당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역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이구, 무슨 사람들이 이래! 왜 저들은 이런식으로 일을 하지?” 혹은, “누군가 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지 가르쳐야 하는데….”라든가 “이 사람들은 도대체 교육도 안받았나?”와 같은 생각들로 가득차게 된다.

선교사의 임무에 본딩이 내포하는 점들

(Implications of Bonding for the Missionary Task)

선교사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소속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가장 의미 있는 관계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가게 된다. 그는 삶에서, “새 삶을 주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요. 이제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가 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통하여 당신에게 여러분들도 초청하십니다”라고 선포하여야 한다.

따라서 선교사의 임무는 하나님과의 소속관계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하늘나라를 떠나서인간과 동일시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모델에 비교할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하건데는, 일반적인 신임 선교사는 자신이 나아가는 새로운 사회의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일으킬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감성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준비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준비상태가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바로 도착 시점부터 그것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타이밍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처음 2주 동안, 그 새로운 사역자는 독특한 방법으로 적응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새로운 나라의 새로움과 언어 자체를 즐길 수 있다. 그가 그곳에 오기까지 수 많은 계획 속에서 얼마나 많은 해와 달들을 보내었는가. 따라서, 그에게는 기대와 흥분과 아드레날린이 최고치에 이르게 된다.

즉각적으로 새로운 사회 가운데에 스며들어간 신임 사역자는 많은 기회를 얻게 된다. 만일 그가 지역의 현지 가정과 함께 살게 되면, 그는 그 사회의 내부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생활을 꾸려가며, 어떻게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지에 대하여 직접 배우게 된다. 처음 몇 달 동안, 그는 내부자들이 외국인들에 대하여 갖는 전형적인 태도가 어떠한 지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그는 다른 생활양식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원들에게 적용시키는 가운데에 그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반면에, 처음에 정착에만 신경을 쓴 선교사는 자기 가족의 서구식 삶의 양식내에서만 그 정착을 이룰 것이며, 일단 그렇게 정착된 이후에는 다른 현지인들의 눈에 외국인으로 간주되는 자물통을 설치한 셈이 되는 것이다.

문화충격(Culture Shock)은 새로운 사회내의 사람들과 소속감을 가지지 못하는 선교사에게는 뻔히 예상되는 것이지만, 본딩을 형성한 선교사에게는 훨씬 덜하다, 집안처럼 편안함을 느끼는 분위기에서 문화충격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문화권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이 진행되는 방법대로 살아왔다. 교통이 막히면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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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공공 버스가 서는 지, 상품이나 용역을 위하여 어떻게 가격을 흥정하는 지, 어떻게 필요한 정보를 얻는 지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 가운데에서는, 어떻게 일을 해야 할 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온 사람은 문화충격으로 이어지는 무질서를 경험할 수 있다.

다른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과 본딩을 형성한 신임 선교사는 이들 외국인들에 의하여 그 충격이 완화될 수 있다. 이렇게 충격을 완화하는 것이 신임선교사의 정착을 돕는 방법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도착하는 시기를 필드 멤버들의 회합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골라서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안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방법으로 충격을 완화하고자 하는 것은 불필요한 서비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첫 주 내지 두 주간이야말로 새로운 선교사가 새로운 문화권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예측 불가능한 것들에 대하여 특별히 대처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는 이러한 모든 다양성들을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즐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그 기간은 바로 처음의 일, 이 주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의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이 기간 이후에 필요하다면, 마지막으로 문화충격의 완화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문화충격 완화를 경험한 선교사는 필드에서 보내는 첫 기도 편지에서, 그 지역의 선교사들이 공항으로 마중나온 이야기와 그들이 제공한 숙소 이야기, 그리고 외국 사역자들이 제공한 오리엔테이션이 그 전형적인 내용으로 등장한다. 다른 사역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환영하였는 지 기록한 이후에(아마도 사실 이부분은 그의 가장 우선적인 것일 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선교사는 예외없이, “이 시점에서 우리의 기도제목은, 앞으로 선교지 사람들이 우리를 잘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으로 기도편지를 마무리 짓는다. 물론, 참으로 귀한 바램이 분명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주 이후에 이와 같은 관심을 표명하였다면,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그래서, 이제는 사역의 목표를 이루고자 하지만 그 생명력을 잃은 채, 너무 늦었을 지 모른다. 즉, 새로운 환경의 초기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독특한 상황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점진적인 방법으로 타문화권 가운데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각 개개인은 그것을 실패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과의 본딩이나 그 사람들이 그를 돌보아 줄 기회를 통한 즐거움을 결코 맛보지 못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곧 바로 뛰어들어 내부자의 관점에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다. 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예배드리며, 함께 시장에 가고, 함께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기 바란다.

도착한 바로 첫 날부터 그 지역의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가능한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신임 사역자는 자신의 필요를 초기부터 나누고, 자신이 배우는 자가 되기 원한다는 것을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것이다. 그리하여, 어려운 상황에 부딛치게 되면, 배우는 자로서, 그들 내부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답을 구하고, 통찰력을 구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외부인들과 관계함으로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이 주어지면, 결국 도피나 격리의 방법을 찾는다.)

한 무슬림 상황 가운데에서 처음 한 달 동안 서양 사람들과는 떨어져 지낼 것을 결심한 한 선교사 부부가 그들이 경험하였던 승리와 좌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남편과 나는 출 발하기 전에 이미 일반적인 방법과는 다른 방법의 적응 과정을 겪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먼저 어려운 순 간을 경험하고 그 는 나중 에 그 러리 라 생각을 하였는 데, 그 는 이곳 에 얼마간 지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 것은 실제로 그 랬다. 나는 가족 을 떠나는 것이 무 척이나 힘들 었다. 그 러나, 현지 사람들 과 함께 나가기 시작하면서, 향수 증 세는 금 방 희미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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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주 민들 은 우 리를 정말 환대해주 었다. 크 리스 마스 가 되자, 125명의 현지인들 이 우 리 짐으 로 성탄절 축 하파티에 참석하였다. 이 시기 동 안, 나와 남편의 개인적인 친밀감도 놀 랍게 향상되었다.

주 님께서 우 리 사역을 축 복 하셨다. 남편은 두 명의 무 슬 림 회심자를 제자화 시키고 있다. 우 리 는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외로 운 처지에 놓 여 있었다. 우 리는 서로 가 서로 를 격려하였지만, 때때로 그 짐이 너무 큰 것으 로 여겨졌다. 우 리는 그 누 구 와도 서로 이야기 하거나 충 고 를 구 할 수 도 없었다.

그 러나, 바로 그 러한 이유 때문 에 우 리는 그 토 록 많은 현지인 친구 들 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본딩이라는 것은 신임 사역자로 하여금 그토록 많은 현지인 친구들과의 소속감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인자이다. 물론 스트레스 받을 상황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게 본딩이 이루어진 신임사역자는 친밀한 관계의 경이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지역의 친분관계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내부인들의 방법들을 더욱 더 잘 인지할 수 있게 되고, 고향같은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편안함을 갖는 사역자도 이따금 좌절감을 맛볼 수도 있고, 때로 우울함을 느낄수도 있지만, 그러한 문화적인 스트레스가 반드시 문화충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문화충격은 때때로 개인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오히려 구조적인데에서 오는 기대치 문제일 경우가 많다.

위의 편지에서 언급한 새로운 무슬림 회심자들은 상대적으로 얼마되지 않은 신참 사역자에 의한 사역 열매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러한 시기에 다른 외국 사역자들의 경우,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을 찾거나, 언어학원의 격리된 곳에서 생활하거나 한 반면, 이렇게 본딩이 이루어진 사역자들에게는 새로운 사회내에 형성된 관계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언어공부도 그 처음부터 사역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몇 해 전에 필자들은 볼리비아에서 11명의 신임사역자 팀의 언어과정 감독 역할을 한적이 있다. 이 일을 보고한 아티클을 1978년 4월 EMQ(Evangelical Mission Quarterly)에 발표하였는데, 그내용의 일부가 아래와 같다:

… 처음 세달동 안 이 언어 배우 는 과정 가운 데에 있는 사역자들 이 본 딩 방법을 적용 하였더니 30명의 사람들 을 주 님께 인도 하였다. 이들 중 많은 이들 이 그 들 이 본 딩을 이루 기 위하여 기거한 집의 가족 식구 들 이거나 그 들 을 통 하여 규 칙적으 로 만날 수 있던 사람들 이었다. 어느 경우 든 지,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그 결과로 지속 적인 관계속 에서 새로 운 회심자가 되어 제자화까지 이루 어 갈 수 있었다. 이들 언어배우 는 과정 가운 데에 있던 신임 사역자들 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는 경이로 움 이었다.

(103 페이지에서)

관계를 통하여 얻어진 통찰력들은 바로 시작부터 사역의 바퀴가 굴러가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사역 현지에서 현지인들이 볼 때에 타당하게 생각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확실하게 해줄 수 있다.

본딩과 효과적인 관계중심의 사역은 단기사역자에게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권장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몰몬교의 빠른 세계적인 확산이 단기사역자에 의하여 이루어져가는데, 여기에는 대부분이 지역주민의 가정에 곧 바로 이사하여 그 사회에 소속되는데에 연유한다. 우리는 최근 홍콩의 광둥어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홍콩의 사역자들 가운데에 광둥어를 가장 잘 하는 부류가 몰몬교 선교사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대관계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의 단지 최소한의 언어가 필요할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린 최근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은 바 있다: “나에게 일어난 최고의 일은 우리가 아는 최소한의 그 언어만을 가지고 도착한 첫날 나가서 50명의 사람들과 이야기 하라고 당신이 우리에게 한 그 도전과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50명과는 이야기하지 못하였습니다. 44명과 이야기하였을 뿐이지요.

그러나, 제가 44명과 이야기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녀가 도착 한 첫날 이야기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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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문장은, 단지 인사말과 언어를 잘 배우고 싶다는 표현 정도였다. 그녀는 이러한 말을 한 이후에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 지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들과 같이 있을 수 있었고, 그 이후에 인사말을 하고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의 마음의 빙벽이 이러한 방법으로 녹아 내려가면서, 그녀는 도착한 첫 날부터 새로운 사회 가운데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현지인과의 친분관계는 편안한 감정의 필수요건이다. 최근에 우리에게 언어과정 프로젝트를 담당하도록 한 단체에서 계발한 보고서는, 언어학교 과정에만 국한되었던 사람들을 최대한의 유대관계를 이루어낸 다른 18명의 언어과정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언어학교 과정만을 따라가던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보통 1명씩의 친한 현지인 친구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사회 가운데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단지 11 주가 지났을 뿐인데, 평균 15명의 절친한 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각각이 십 수 명의 현지인 친구를 사귀게 되어, 전체적으로 1000여 명의 현지인들이 프로젝트가 진행된 수 주간 동안 이들 언어 배우는 사람들과 긍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보고서는 이어 보고하기를, “이렇게 낮은 수준의 관계형성이 결국 선교적 유익을 이루어 내리라고 그 누가 생각할 수 있었던가. 그러한 일은 꺼림직하여 절대 있을 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언어배움에 있어서, 최대한의 사회참여 및 관계형성이 바로 그 핵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언어의 획득은 학문적인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경험을 통하여 필수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회적 상황에 깊이 들어간 사람이나 그 사회의 소속감을 깊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 언어에 능통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외국 사역자들과의 유대관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때로 짐이 되며 좌절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임 사역자가 그 새로운 환경의 사회 가운데에 본딩을 이루어 거기에 속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신임사역자들은 본딩을 이루는데에 도전적이어야 하며, 소속감을 이룰 수 있는 기회들에 반응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사역을 준비하는 과정에 본딩의 중요성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포함시켜 기꺼이 그렇게하겠노라는 헌신을 하도록 해야 한다. 엔트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가지의 단순한 언어를 배우도록 하는 것이 좋다. 또한, 사회관계를 이루는 상황 가운데에서 어떻게 언어 습득을 지속하는 지에 대한 기술도 개발되어야 한다. [스티븐(Stephen M. Echerd)의 최근 연구에서, 사전에 언어공부에 대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과 도착한 이후에 그 기술을 개발한 사람들을 비교한 바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LAMP(Language Acquisition Made Practical)를 사전에 인지한 사람들은, 사전에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5.82 시간 단위를 나가는 동안 11.78 시간 단위를 나갈 수 있다. 이는 두배 이상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역자가 도착한 첫날부터 현지의 새로운 사회 가운데에 자신을 들여 넣을 수 있도록 하는 격려이다. 사역자 자신은 처음 몇 달 동안은 다른 사역자들과는 격리된 상태에서 지낼 것에 대하여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선교사가 인도하는 교회나 회중에서 예배드리기 보다는 그 현지인들과 함께 모임을 강구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관찰한 바로는, 실제로 본딩을 이루지 못한 기존의 오랜 경험을 가진 사역자 자신들이 본딩을 이루고자 하는 신임 사역자들에게 주된 장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지어 정책적으로 다른 선교사들이 예상하는 그 시기보다 3주 전에 미리 신임 사역자들을 도착하도록 추천하기도 한다. 한 언어배우는 사역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본 딩의 개념 때문 에 사전 접촉 이나 집을 마련 하지 않고 싱가폴 로 일찍 날아갈 수 있었다. 나는 다음 의 내용 을 나의 간행물 에 보 고 하였다:

‘새로 운 문 화권 가운 데에 들 어갈 때에는 다른 사람의 도 움 없이 홀 로 하는 것이 좋 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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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였다. 그 렇게 함으 로 서 특 히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해준 다. 비록 때때로 두 려움 과 외로 움 이 있었지만, 나는 하나님 음 성을 듣 고 그 뜻 을 분 별하는 데에 훨씬 갈급 하고 열정적이 되었다. 그 리고 , 물 론 나는 기꺼이 나를 도 와주 려는 많은 사람들 을 발견하게 되었다’.

만일 신임 사역자가 성공적으로 소속감을 이루어가고 현지인들과 같이 더불어 살아가며, 길거리에서 관계형성하는 것들을 배워가려면, 사전에 마음에 그렇게 하겠다는 헌신을 해야 한다. 이러한 사전의 헌신된 각오 없이는 진정한 본딩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로 사역하러 들어 가려고 하는 시점의 언어 배우는 사역자를 만나게 되는 경우에, 이들에게 사전에 타당한 관점과 기대감을 갖는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감독하였던 언어과정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네가지 조건에 따를 것을 주문하였다:

1) 현지 가정과 기꺼이 같이 살 것.

2) 개인적인 짐으로 20 kg을 초과하지 않을 것.

3) 그 지역의 대중 교통수단만을 이용할 것.

4) 언어 과정의 사역자 자신이 개발하고 유지할 수 있는 그러한 인관관계를 이룰 수 있는 상황 가운데에서 언어과정을 수행해 나갈 것.

이러한 조건을 기꺼이 수락한다는 것은 각각의 태도와 유연성에 대한 많은 것을 말하여 준다.

마음에 준비된 신임 사역자는 본딩과 자신 주위에 있는 배움의 기회들에 창의적으로 자유롭게 반응한다. 우리는 이렇게 사전 준비를 통하여 마음에 결심을 이룬 사역자들 대부분이 현지 가정에서 같이 살 수 있었음을 보게 된다.(비록, 이러한 본딩을 이루지 못한 시니어 사역자들은 비관적으로 볼지언정 말이다.) 우리의 경험으로, 사역자가 싱글이건, 결혼 하였건, 심지어 아이들이건 간에, 신임 선교사의 경우에는 도착한 즉시에 현지의 가정과 같이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많은 신임사역자들이, “우린 당신들의 언어를 배우고 싶어요. 우리는 한 세 달 동안 같이 살 수 있는 한 가정을 찾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 쓸 것들을 지불하겠습니다. 혹시 아는 가정이 있겠어요?”라고 말함으로서 자신들의 가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을 본다. 그러나 사실상, 어느 돕는 사람이 없이 혹은 같이 사는 가족의 최소한의 긍정적인 설명 없이 최소한 50여명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을 이야기 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여기서 새로운 문화 가운데에 완전히 잠복해 들어 가는 것에 위험이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출생하는 순간만큼 스트레스와 위험이 많은 순간은 없다. 이와 같이 새로운 상황 가운데에 들어가는 그 자체에 그에 동반하는 스트레스와 위험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스트레스와 위험 요소들 자체가 각인과 본딩을 가능하게 하는 독특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데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측면의 더 위험한 것은, 만일 한 사역자가 새로운 사회 가운데에서 이러한 초기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안전을 찾는다면, 결국 그는 장기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둘 중에 하나는 결국 피할 수 없는 국면일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의 재난 가운데에는 사실 그들이 그 사회 가운데에 소속되지 못하였을 때에 지불해야 하는 엄청난 대가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에 절반이 두번 째 텀에 사역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실, 비효율적인 상태로 사역지에만 장기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도 더 큰 손실일지 모른다.

진실로, 수 많은 이방인들과 친구를 사귀고 한 가정 가운데에서 같이 살면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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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친한 친분관계의 사람들 없이, 문화적 이해를 가지지 못한 채, 언제나 외국인으로서 생활하며 애쓰면서 괴리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신임 사역자가 일단 소속감을 현지 주민들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오직 현지의 사람들과만 너무 극단적으로 관계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이중 문화적 생활을 한 바울을 보면, 자신의 주 사역이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지만, 돌아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만날 때에는(행 21), 그들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머리를 깍고 희생제를 준비하는 결례를 행하였다.) 본딩을 이룬 선교사는 그 현지인들과 같이 지속적으로 살아가면서 사역을 해 나갈 것이다. 또한 처음 도착 후 몇 주간이 지나면, 때때로 다른 외국의 사역자들과 동역을 해 나간다고 해도, 처음에 필요하였던 본딩의 관점이 그토록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다. 이따금 토요일 저녁에는 다른 초기 언어 사역자들이나 슈퍼바이저 등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만일 사역자들이 팀으로 필드에 나가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팀이라는 말은 팀원들이 어떤 약속들을 공유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한 그룹으로서 각자가 지역 문화에 소속되자고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다. 처음 몇 달간은, 몇 주 간격으로 서로 나눔의 시간 등을 갖는 것이 각자가 헌신한 부분들을 서로 확인하는데에 도움이 된다.]

본딩의 개념은 건강한 자화상을 가진 이중 문화적인 개인이 됨을 위미한다. 따라서, 본딩을 이룬다는 것과 현지화된다는 것과는 같지 않다. 현지화된다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감성적으로 안정을 추구하는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 드물기는 하지만- 보통 처음의 문화를 거부하는 것을 포함할 수 있다.

이중 문화적이 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분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열은 자아가 깨어지거나 조각난 상태이다. 그러나, 이중 문화적인 사람은 새로운 자아 즉, 새로운 인격을 이루어 간다.

이러한 본딩의 전략 및 새로운 문화에 적합한 인격개발에 있어서 내부자의 이름으로 이름을 새롭게 갖는 것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들에게 이름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 즉 우리 자화상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문화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중 문화적인 새로운 자아를 이루어 가려고 해야 한다. 새로운 문화권의 그 사람들과 함께 편안함을 느끼는 새로운 자아가 필요하다. 그러한 자아는 우리의 기성화를 막아줄 것이며, 우리의 새로운 역할과 책임들에 대한 잠새성을 자유롭게 채워갈 것이다.

성경 가운데에서도 자신들의 이름이 새로운 문화에 적합하게 바뀐 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바꾸신 경우가 있는데, 아브람 (Abram), 사래 (Sarai)의 예와 함께, 야곱 (Jacob)이 이스라엘 (Israel)로, 솔로몬 (Solomon)이 여디디아 (Jedidia)로, 바스훌 (Pashhur)이 마골밋사빕 (Magor-Missabib: 렘 20:3 / 테러의 위협 가운데에 살고 있었다)으로, 시몬 (Simon)이 번역하면 반석(Peter)인 게바(Cephas)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바벨론의 이름을 따랐고, 나오미 또한 마라라고 불리웠으며 사울은 바울이 되었다.

여러가지 부분에서, 우리는 바뀐 이름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한 여인이 남편의 성을 따라감으로서 혼인관계에 있음을 나타내고(성차별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부부는 둘 다 모두 종이라는 뜻의 헬라어인 둘로스(Doulos)를 새로운 가족명으로 채택한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무비스타들도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새로운 이름을 개발하며, 정교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맹세와 함께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이후에는 심지어 도시나 나라도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운 관점을 가진 정체성을 택한다. 이러한 예로서, 자이레(Zaire), 짐바브웨(Zimbabwe), 가나(Ghana), 방글라데쉬(Bangladesh), 스리랑카(Sri Lanka), 이스탄불(Istanbul), 하라레(Harare) 등이 있고, 영국인들이 포크랜드(Falklands)라고 부르는 섬이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비나(Malvinas)라고 불리우는 것과 같은 예 등 수 없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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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많이 있다. 어떤 선교사들은 회심자들에게 프레드, 마리아와 같은 크리스천 이름을 권장하기도 한다. “Mzee Jomo Kenyatta”은 본래 그 이름이 “Kamau Ngengi”였다.

기독교 학교 학생이 되기 위해서 서양식 이름이 필요하였던 그는, “John Peter”라는 이름을 원했지만, 두 개의 이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 실정에 맞게 “Johnstone”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어쨓든 “Peter”(반석)이라는 뜻이 들어갔다. “Kenyatta”라는 이름은 나중에 첨가 된 것인데, 그가 신생독립국의 국부가 되어서 얻어진 이름이다.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면, 이중문화적인 자아상을 개발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이러한 이름으로 그의 새로운 개성이 형성되어 갈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 이후에, 지역 이름을 갖게 된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는 여러 선교사들이 있다. 우르드어로 “라픽”(Rafik: Friend)이라든가, Tsawana어로

“디마카쵸”(Dimakatso: Wondeful Surprise), 그리고 사라(Sara)의 “Sara Child”(우리에게 속한 자라는 뜻)과 같은 이름이 그 예들이다. 새로운 사회에서 내부자의 관점에서 토마스라든가 마르코스와 같은 이름이 적절한 경우에는 서구식 이름을 적용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지역의 친인척 관계를 나타내는 그러한 이름을 적용하는 것이 최상일 수도 있다.

새로운 이름이 지어졌을 때에, 그 이름으로 자화상을 개발시키며 개성을 이루어 가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어린 아이처럼 창의적으로 반복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자아로 말미암아, 그는 두번 째의 문화에서도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이중 문화권을 이루어 가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우리를 한 민족 가운데에 태어나도록 하셨다는 인식과 함께 출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라고 우리의 어깨를 다정스럽게 만지시며 간섭하시는 것도 포함된다.

법률적인 의미의 소속이 되기 위하여 어떤 선교사들은 공식 절차상의 이민을 깊이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민이 반드시 자신의 본국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혹은 결혼 문제 때문에 보통 이민이 이루어졌다.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고자 하는 도전이야말로 그리스도와 결합된 하나님의 종들에게 다른 이유들처럼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선교사의 하늘나라 시민권이야말로 모든 나라와 종족으로 하여금 우리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나라와 종족을 초월할 수 있는 우리의 소속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회복된 순례정신”(recovered pilgrim spirit)이야말로 죠셉(Joseph F. Conley)으로 하여금 최근에 “Regions Beyond”(December 1979)라고 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책을 쓰게 한 도전이었다:

대부 분 북 미 출 신의 선교 사들 에게 북 미가 고 향입니다. 그 래서, 그 가 아플 때에 찾아가는 곳 이 거기에 있습 니다. 일들 이 어렵 게 돌 아갈 때에는 그 곳 에 있는 경치에 몸 을 담글 수 있습 니다. 내일이면 짧았던 휴 식도 끝 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 리는 과거에 선교 사들 이 해외로 나갔을 때에 다시 돌 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고 나갔던 그 러한 때같이 그 렇게 다시 살아야 할지도 모 르 겠습 니다. 외국 의 선교 사들 에 대하여 입국 을 거부 하는 많은 나라들 이 식민지화 하였던 사람들 이나 자연스 레 시민권을 갖게 된 사람들 에 대해서는 여전히 문 을 개방시켜 놓 았습 니다. 모 라비안들 은 세계 도 처에 이러한 기독 교 식민지를 구 축 하였을 때에 이와 같은 방법으 로 선교 를 리드 하였습 니다.

다양한 헌신의 방법들 가운 데에, 더 없이 소 중 한 미국 이나 캐나다 시민권을 순 순 히 포 기하는 것과 같은 방법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습 니다. 그 러나, 그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볼 수 는 없을 까요 ? 이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은 우 리 주 님의 말씀 을 깊이 묵 상하면서 말입니다: “나를 위하여 그 나라(lands)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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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자는 … 백배나 받을 것이요 영생을 물 려받을 것이다”.

뒤늦은 본딩 (Belated Bonding)

현장에 소속되지 못하고 언어를 잘 배우는 과정이 없이 외국에 얼마 기간동안 산 경험이 있던 선교사도 그의 가는 길을 바꿀 수 있을까? 처음의 결정적인 몇 달간이 지나간 이후에도 본딩이 가능할까?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는 사역 관계로 70여개국을 넘나들게 되었고, 여러 곳에서 선교사역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극히 적은 퍼센트만이 현지인들과의 실제적 본딩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본딩과 일체화(Identification)는 다른 것임을 먼저 분명히 하기 원한다. 아마도 모든 선교사들의 90% 이상이 그들이 현지인들과 일체감을 느낀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현지인들과 더불어 진정으로 편안한 감정을 느끼는 사역자들은 매우 적은 것 같다. 그 차이를 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 전형적으로, 본딩을 이룬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회적인 필요가 비록 현지인들과의 관계 그 자체에서 있어도 평안함을 느낀다. 즉, ‘그 소속자체(belonging)가 행복한 것이지 소유하게 된 것들(belongings)이 행복이 아니다.’ 그러나, 서구 선교사들 대부분의 생활방식이 본딩을 방해한다. 관세 문제, 짐 정리하는 문제, 정착하는 문제 등 수 많은 걱정거리를 가지고서는 현지인들과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할만한 시간을 찾기가 무척이나 힘들어 진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속감(소유의식)은 오히려 더욱 좋지 않은 형태의 본딩으로서 속박(bondage)라고 부른다. 불행하게도 이것들은 참 내던지기 어려운 난해한 속박이 된다.

“한 농부가 자신의 집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 더 부유해지기 보다는 그것 때문에 더 가난할 수 있다.

그가 집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집이 그 사람을 속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버릴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그 숫자가 많은 만큼 그는 부유하다.” (Thoreau Walden)

본딩을 이루지 못한 선교사가 뒤늦은 본딩을 경험하여 그의 삶과 사역이 현지인들과의 유대감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는 것이 가능할까? 소속관계 (혹은 연대관계: belonging relationship)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과정이기 때문에 그 대답은 “예”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건데는, 외국의 미국인들이 그들의 외국인으로서의 사회생활에서 지역 문화사회로 소속감을 변화시킨 예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본딩의 인자들과 진정한 이중 언어구사 및 이중 문화를 추구하는 것이 선교사들의 잠재적인 사역 효율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 믿는다.

나이가 든 선교사들은 젊은 이들에 비하여 유연성이나 모험성에 있어서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가 버린 시간들 가운데에서, ‘추수할 일터에서 전 생애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그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는 것과 같은 인생의 경륜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 남은 그 시간들에 대하여 더욱 헌신적이 될 수도 있다.

이미 기성이된 선교사들에 대한 진정한 본딩 전략은, 결혼 관계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기름부음을 받은 친밀한 관계의 비유에서 찾아야 한다. 이 결혼 모델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이 결혼안에서 서로간에 소속감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혼 문화에 있어서, 본딩 준비는 구애기간에 이루어지며, 신혼여행을 통하여 완전해진다.

이러한 비유에서, 이미 사역이 확립되었지만 본딩을 이루지 못한 선교사는 결혼 모델로부터 사역의 잠재성을 일구어 내어야 한다. 즉, 현지인들과의 소속연대감의 잠재력과 그 바람직함에 대하여 인지하여, 사역 자체보다도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을 쏟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관계하는 잠재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어떤 누구에게든 지, 날을 정하여 관계를 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문화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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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식, 졸업, 결혼, 그리고 장례와 같은 감정의 최고치에 이루어지는 의식을 통하여 인생의 주요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러한 페스티발 자체가 감성을 강화시키기 때문에 생의 전환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페스티벌에서 영향 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초청함으로서, 뒤늦게 새로운 사회에 합류하고자 하는 시도가 성공적으로 주도될 수도 있다. 이제 그 페스티벌 날을 맞이하는 것은 신혼여행에 비교할 수 있는데, 그것은 현지 가정들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요 거기서 배우는 자의 역할을 수용함으로 현지인과의 관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한 결혼한 부부의 공동 재산 소유권은 젊은 부자 지도자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마음에 둘 필요가 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이 말은 현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최소한 상호관계를 위한 수단의 필요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본딩은 결혼과 같이 생활양식에 있어서 급진적인 조정을 의미한다.

본딩을 이룬 선교사의 딜레마

본딩에 목표를 둔 신임 사역자가 마주칠 수 있는 딜레마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본딩을 이루지 못한 동료나 선임자들이, 그 신임 사역자가 현지인들과 관계하는 생활양식의 사역을 추구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현장에 완전히 들어간 사역의 형태가 다른 선교사들의 침투 여행과 같은 사역과 너무나 강하게 대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 그가 북미에 있는 동안 친구가 된 아프리카인이 있었다. 얼마후 케냐의 미션 스테이션(선교기지)에서 그가 일하고 있을 때에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대화하는 중에 그가 경험한 딜레마 이야기가 나왔다. 그가 도착하기 얼마전 케냐인들을 사랑하는 한 신임 선교사가 왔는데, 그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통하여 그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 지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친구인 이 아프리카 형제는 그 신임 선교사를 좋게 보고, 케냐 사람들과의 관계하는 것을 격려하였는데,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을 오히려 염려하였다는 것이다. 여러해 동안, 그가 관찰한 바로는 스와힐리어나 부족어를 배우지 못한 – 그래서 현지 아프리카 사람들과 관계를 잘 하지 못하는 선교사들이 그 선교기지와 선교단체 내에서 주요 행정임무를 감당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캐냐 사람들을 사랑하는 신임선교사들이 이들 행정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도의 위협거리가 되는 것을 경험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있게 여기는 그러한 방법으로 사역하는 한 사역자의 사역중단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본딩을 이룬 선교사는 그렇지 못한 동료들로부터 예외 없이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았다. 잘 생각해서 그를 독불장군 정도로 여겼고, 심지어는 배신자 같이도 여겼다. 우리는 사실, 현지인들의 눈에 의미 있도록 행동하고자 하는 사역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신앙이 흐려졌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본적이 있다. 전인적 삶을 통하여 언어과정과 사역을 하고자 하는 사역자들이 다른이들의 반감을 경험한다는 보고를 반복적으로 듣게 된다. 이러한 저항은 서로 다른 선교사들 간에 다음의 최소한 네가지 종류로 묘사된다: 즉, 거절(rejection), 질투(jealousy), 죄의식(guilt), 및 두려움(fear)가 그것이다.

- 거절(Rejection)은 새로운 사역자의 본딩 행위나 그 동기가 오해되거나 잘못 알려졌을 때에 생긴다. 선교사회는 이들 신임사역자가 자신들을 거절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신임 사역자가 거절한 것은 침략식 접근(foray approach)인 것이다.

- 질투(Jealossy)는 이미 정착된 사역자가 자신도 가지지 못한 많은 현지인 친구들을 가지게 될 때에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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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의식(Guilt)은 정착된 사역자가 새로운 사역자의 접근 방법이 효과면에서 더 잠재성이 클 때에 특히 자신도 신임사역자 처럼 그렇게 본딩을 이루어야 하지 않는가 느끼게 되지만 아직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 보통 일어나게 된다.

- 두려움(Fear)은 자신이 지금까지 익숙하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지녀왔던 방법이 새로운 관점등으로 혼란스럽게 될 때에 수면에 떠 오르게 된다. 기존의 사역자가 전통적으로 현지인과 관계하였던 그 방법을 바꾼다는 것은 불안정하고 위험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이 보일 수 있다.

변화란 위험을 내포하고 있고 그 말은 실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신임 사역자가 잘되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현지인들과 관계를 깊이 맺음으로써, 그들 그룹의 신학적인 구별됨이나 정통성 내지는 신앙까지도 잃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현지인과 가까이 하고 너무 멀리 나아가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그들의 이러한 두려움의 일부는 사실일 수 있다. 본딩을 이룬 신임사역자는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선교계의 눈쌀을 찌푸리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본딩 때문에 또한 그의 꿋꿋함 때문에 이 이중문화적 사역자는 문화적 민감성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잠재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문화 내부에 존재하는 구속적 비유(Redemptive Analogy)를 발견하여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있게 된다.(돈 리챠드슨의 “화해의 아이”를 보라.) 그의 내부자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새로운 회심자들에 있어서 혼합주의와 같은 위험성을 줄일 수 있도록 해준다.

개척자적인 선교사들은 대부분의 필드에서 현지인들과 소속관계를 이루는데에 성공하지만, 그들 다음에 오는 사역자들은 그들의 예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젊은 사역자들이 특히 따라갈 만한 좋은 모델을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만일 본딩의 개념이 현재 진행하는 사역을 위하여 타당하다면, 기존의 선교에서 현지인들과 본딩을 이루어 사역하고자 하는 신임사역자들을 격려하고 확증해주는 방법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신임 사역자들과 그들의 선임 동료들간에 질적인 관계의 문제는 양자간에 모두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이다. 개방적인 대화의 창구가 있어야 한다. 본딩 이슈들에 대한 토의는 아마도 사역자 후보자들에게 이러한 관계의 형성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적절한 선교단체를 선택하는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따라서, 후보 선교사들은 가담하고자 하는 선교단체의 홈 및 필드의 리더쉽들과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주도적으로 의견을 교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임 선교사는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그동안 신실하게 사역해온 선임자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자세를 멀리하고 사랑의 자세로 자신의 우려하는 부분에 대하여 대화하여야 한다. 사실상, 그들도 신임 사역자처럼 그렇게 동일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각이 이제야 그들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한가지 가능한 것은 그로 하여금 이러한 본딩을 이루는 접근 방법에 대하여 실험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책이 두번째 출판에 들어간 지금에는 이제 막 본딩 전략을 통하여 실험적 사역을 해 보라는 허락을 받은 사역자들부터 많은 소식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경험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라는데에 기쁨을 감출 수 없다. 많은 예들을 소개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두가지만을 살펴본다:

카메룬으로 향하던 한 부부는 프랑스에서 언어공부 하는 중에 이 본딩이라는 소책자를 읽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을 요청하였고, 자신들의 초기 사역을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사람들과 같이 보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다.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약 40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마을로 이동되어 그들의 두 어린 아이들과 함께 떨구어졌다. 그들의 촘촘하게 3페이지에 걸쳐서 기록한 편지에서, 그들의 경험이 얼마나 흥분된 것이었는 지를 묘사하고 있다.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섬기라고 자신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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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 그 사람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준 그 본딩의 개념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명하였다. 또 다른 부부가 남아프리카의 구석진 곳에 있는 “총가”(Tsonga) 마을에서 처음의 세 달간을 지내었다. 8개월 후에는 언어 구사를 편하게 할 수 있었고, 선교 본부에서도 장기 사역을 위하여 그들이 처음 세달을 보낸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 연이어 사역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새로운 사회에 본딩을 이루는 방법으로 사역하기를 원하는 사역자들은 이미 기존에 전통적으로 사역이 세워져 있는 곳 보다는 미전도된, 숨겨져 있는 종족들 가운데에서 일하는데에 자원함으로서 자신들의 선교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이러한 본딩의 개념을 받아들인 기존의 선교단체들은 수 천의 남아 있는 미전도종족들 안으로 북미의 수 많은 젊은이들을 동원하는 견인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우리가 획일적으로 그렇게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본딩전략을 세움에 있어서도 선교사들에 따른 다양한 인자들에 가중치가 적용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실험정신이다. 이러한 시도를 하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그 선택에 대하여 개방을 해주어야 한다. 한 선교사 가정이 처음부터 서구식 주거환경 가운데 안락한 정착을 시도함으로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좀 낙후된 지역이나 지방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택에서 접어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을 본딩을 위하여 보내게 된다면, 그 이후에 사역지 선택은 어느 지역에 살든지, 어떤 생활 수준으로 사는 지, 훨씬 더 유연성을 갖게 될 것이다. 행동에 옮겨야 하는 이러한 선택에 있어서 그 경로는 절대 순서가 바뀔수 없음을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딩을 이룬 사역자에게 있는 다른 장점으로는, 결정이나 어떤 행동을 이루게 될 때에 그것을 고려하는 과정이 현지인의 관점에서 영향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지인들이 고려하는 것과 현지인들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본딩을 이룬 선교사는 사회에 소속된 사람이기 때문에, 내부자들의 방법, 관점과 갈망, 태도 및 두려움 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그들에게 더욱 관심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숨겨진 가치들, 걱정거리들, 그리고 그 동기까지도 민감하게 귀 기울일 수 있다. 그리하여, 통찰력을 얻게 되고, 현지인으로 하나님과의 소속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이 현지인의 눈에 좋은 소식이 되는 생활양식과 사역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본딩은 많은 선교사들에게 어디에 가치를 두는가 그리고 어디에 목표를 두는가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관(Perspective)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문화적응을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나, 가능한 일이며, 특히 사역의 결정적인 시기인 초기에 유대관계가 이루어짐으로서 가능하다.

요약하면, 우리가 관찰한 바로, 신임선교사는 새로운 사역지의 처음 몇 주 동안 자신의 정체성 및 소속감을 확립하기 위한 결정적인 시간을 지나간다. 만일 그가 외국 사람과 소속관계를 먼저 이루게 되면, 그는 언제까지나 외국인이요 외부인으로 남겨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적인 시간에는, 현지인들이 사는 사회적 상황 내부에서 살아가면서 배우고 사역할 수 있도록, 내부인들 가운데에 소속을 이룰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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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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