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資料
「戶長 嚴興道傳」 國譯
屛溪 尹鳳九1)原作 姜求律* 譯
호장의 성은 엄이요 이름은 흥도이니 영월군 사람이다. 호장 은 고을 아전의 으뜸가는 칭호이다. 그 선대는 증거가 없어서 전해지지 않는다. 단종대왕(端宗大王) 3년 을해에 대왕이 왕위 를 양보하고 이듬해 병자년에 영월에 거주하였으며 또 그 이듬 해 정축년에 마침내 참화를 당하였다. 참화가 일어남에 흥도는 저자의 길거리를 달리면서 울부짖고 통곡하였으며 관을 수습하 여 장사를 지내려고 꾀하니 그 일가 사람이 흥도를 위해서 겁 을 내거늘 흥도가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는 것은 진실로 달고 즐겁게 여 길 것입니다.”
* 동양대학교 교수, 택민국학연구원 한문국역연구실장
1) 윤봉구(1681~1767)는 본관이 坡平으로 자는 瑞膺이요 호는 屛溪·久菴이며 시호 는 文獻이다. 1714년(숙종40) 進士試에 급제하여 1725년(영조1)에 淸道郡守가 돠고 1738년 執義를 지냈다. 1741년 朱子를 宋時烈의 影堂에 追奉하게 하여 削 職되었다가 再登用되어 諮議·贊善 등을 거쳐 判書가 되었다. 南塘 韓元震과 함 께 湖洛論爭에서 湖論을 주장하였다. 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문집에 뺷屛溪 集뺸있고 저서에 뺷華陽尊周錄뺸이 있다.
라고 하였다.
슬프다! 그 얼마나 위대한가?
혹자는 말하기를
“왕의 시신이 폭시(暴屍)1)됨으로부터 영월읍을 맡은 관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또한 감히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흥 도는 곧 시신에 다가가 통곡을 하였다. 대개 이때를 당하여 간 사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이 사방을 둘러싸서 왕에게 일이 있는 사람은 문득 곧바로 죽여서 위엄을 보이고 읍을 맡은 관리로서 왕에게 녹봉을 받거나 따르는 사람으로서 왕에게 사사로이 은 혜를 받은 사람은 모두 변고의 즈음에 능히 목숨을 버리지 아 니하였다. 하지만 흥도는 한 군의 아전으로서 일찍이 임금에게 녹봉을 받은 의리도 없고 또한 사사로이 친압(親狎)한 은혜도 없으면서 마침내 능히 흰 칼날 밟기를 탄탄대로와 같이하여 목 숨을 바치는 의리를 잃지 아니하니 혹시 이른바 목숨을 버려서 의리를 취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흥도는 다른 논란이 있을까 저어하여 곧 시신을 장사지내니 그 시대를 헤아리고 형세를 살핌에 보는 것이 밝고 생각하는 것이 깊으니 능히 이와 같다면 곧 저 높고 높은 의열(義烈)이 실제로 한 때에 강개한 것이 아니고 마침내 잠깐 사이에 우연 히 성취한 것이 되니 어찌 세상의 교화에 더욱 소중한 것이 되 지 아니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214년이 흐른 뒤는 우리 현종 무신년이다. 우암(尤菴) 송시열 (宋時烈) 선생께서 경연의 자리에서 진언하여 말하기를
“도리가 쇠퇴한 세상에는 더욱 마땅히 절의를 숭상할 일이니
1) 暴屍는 형벌을 받아 죽은 죄인의 시신을 수습하지 아니하고 길거리에 노출시 키는 것을 말함.
청컨대 흥도의 후손들에게 벼슬을 주어서 세상의 도리를 권장 하는 일을 해주십시오.”
라고 하니 상께서 이것을 허락하셨다. 그 자손들을 방문해봄 에 곧 남아있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천도가 아는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 그러나 사람의 피붙이는 혹 은 끊어지고 혹은 이어지는데 그 이어지는 족속도 또한 혹시 여러 세대에 이르러 끊어지기도 하지만 흥도의 이름은 장차 산 과 큰 산으로 더불어서 아울러 높고 해와 별로 더불어서 아울 러 빛나 만세에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니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허여(許與)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러 두텁지 않다고 말하지 못 할 것이다. 숙종 을축년에 이르러 사림들이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하여 제사지내기를 상의하여 도모함에 송선생도 또 한 특별히 붓을 들어 그 사실을 기록하여 말단 읍의 보잘것없 는 아전으로 하여금 여섯 충신과 더불어 한 사당에서 형식(血 食)을 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죽은 뒤에 빛이 나도록 한 것이 과연 어떠한가?
지금 단종대왕의 지위와 묘호(廟號)가 이미 회복되고 왕릉의 석물이 빛나지만 만약 당시에 흥도가 왕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 례지내지 아니했다면 비록 백년 세월의 공평한 논의가 이미 정 해져서 귀신과 사람의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고자 해도 장차 한 봉분의 무덤도 없을 것이다. 그 늠연(凜然)한 뜻과 절 개가 이미 육신의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단종대왕이 오늘의 처 지가 있게 된 것을 혹시 지나침이 있다고 말해도 거짓말은 아 닐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고귀하고 비천한 것은 비록 다르지만 한 사당에서 같이 제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어찌 흠 결이 될 것이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지만 송선생이 문장으로 표현하여 경연에서 요청하지 아니했다면 어찌 능히 추중(推重) 하여 육신사에 배향하는데 이르겠는가? 특별하게 그 사실을 기 록하지 않았다면 곧 어찌 능히 다음 세대에 전달하여 불후(不
朽)하게 하겠는가? 이것은 흥도가 선생을 얻은 것이 마치 당위 사(唐衛士)2)가 주자(朱子)를 만난 것처럼 행운을 함께 하고 선 생이 여기에서 흥도의 일을 잊지 않고 선양한 것이 또한 주자 가 세상을 상심하는 뜻과 같음을 알겠노라. 슬프다!
파평 윤봉구(尹鳳九)가 말하기를
“세상의 도가 쇠퇴하고 인심이 이익에 함몰되어 지금에 선비 가 된 사람들이 평소에 독서를 하면서 의리를 담론하다가 작은 이해를 당면하여 의리를 버리고 몸을 상실해도 비난하지 아니 하니 그들이 흥도를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뺷시경(詩經)뺸에 말하기를 ‘하늘이 많은 사람들을 출생함에 사물이 있고 법칙이 있다.’ 라고 하였으니 흥도와 같은 사람은 그 법칙을 상실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라고 하였다.
추기
숙종(肅宗)의 시대에 부사인 임진원(任震元)이 옛날 호적을 열람하다가 호장의 호적을 얻었는데 여러 호적을 살펴보니 호 장으로부터 다섯 세대를 지나 응탄과 응평과 응일이 있었는데 기병으로 도망을 가서 다시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를 못하겠 다. 슬프다! 당나라 노동(盧仝)3)은 한 세상의 기이한 선비에 불 과하지만 당나라 한유(韓愈)는 그를 열 세대나 마땅히 용서해 야 한다4)고 했는데 죄가 있어도 오히려 용서할 수 있는데 하물 며 호장의 성취가 저와 같이 훌륭한데 다섯 세대가 천역(賤役)
2) 혹 衛士를 지낸 唐琦가 아닌가 함.
3) 盧仝(?~835)는 호가 玉川子로 湖北省 范陽 출생이다. 고고하고 청절한 성격으 로서 처음에는 嵩山에 숨어 살다가 나중에 洛陽에 정주하였다. 극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청렴한 인품을 굽히지 않았기에 조정에서 감탄하여 기용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그의 시는 청렴한 인격을 반영하여 신비한 풍격을 갖추 었는데 한때 河南令으로 있던 韓愈가 높이 평가하여 그의 知遇를 입었다. 특히 붕당의 횡포를 풍자한 장편시 「月蝕詩」가 유명하다. 재상 李訓 등이 宦官 掃蕩 을 도모하다가 실패한 ‘甘露의 變’에 휩쓸려 殺害되었다. 저서에는
뺷玉川子詩集뺸(2권)과 外集이 있다.
4) 韓愈가 「寄盧仝」이란 七言古詩에서 “苗裔當蒙十世宥”라고 노래하였음.
을 면하지 못하고 옛날 거처도 보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즉 성인께서 그 후손들에게 벼슬을 내리는 성대한 의미를 마침내 또한 베풀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후대와 한 세상을 권장하는 것이겠는가? 아아! 상심이 되도다! 응자 항렬을 가진 사람의 후손으로 반드시 세대를 이을 사람이 있을 것이니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사람들은 만약에 엄씨 성의 호적을 본다 면 근원을 거슬러 찾아서 거의 조상을 찾아줄 것이며 어느 누 군들 여기에 뜻을 두지 아니하겠는가?
숙종 무인년에 능으로 봉하고 그 뒤에 경연에서 신하의 건의 를 받아 호장과 공조좌랑을 증직했다.
지금 임금 병오년에 이진(李榗) 공이 장릉(莊陵)의 참봉이 되 어 개연하게 호장의 절의를 사모하여 그의 사적을 찾아서 그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 나무하고 소를 먹이는 아이들로 하여금 모 두가 호장의 무덤인 줄 알게 하고자 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 하여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시에 참판인 윤양래5) 공이 마침 논척(論斥)을 당해 외보(外補)로 영월부사가 되었으나 즐겁게 일을 완성하였다. 드디어 비석을 다듬어 비명을 새기고 묘소를 지키는 사람 두 명을 배치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받들었다.
이공은 내 외숙이다. 어느 날 엄호장의 사실로써 부탁을 하
5) 윤양래(1673~1751)는 본관이 坡平이고 자는 季亨으로 호는 晦窩이며 시호는 翼 獻이다. 1699년(숙종25) 진사가 되고 1708년 式年文科에 급제하여 注書·正言 등을 지냈다. 1716년 司諫 등을 거쳐 이듬해 慶尙右道暗行御史로 나갔다. 1720 년 兵曹叅議 등에 이어 1721년(경종1) 忠淸道觀察使 때 죄인 朴世明을 즉시 梟首하지 않은 죄로 鞫問을 받았다. 곧 풀려나 冬至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 녀왔다. 그러나 경종의 지병을 발설하였다 하여 파직되어 甲山에 圍籬安置되었 다. 1725년(영조1) 老論의 득세로 풀려나 承旨로 복직하였다. 大司諫 때 蕩平 策을 건의하여 英祖의 신임을 얻었다. 이때 다시 尹心衡의 論斥으로 寧越府使 로 좌천되었으며 곧 兵曹叅判이 되었다. 1729년 禮曹叅判 등을 지내고 1732년 漢城府右尹과 都承旨 및 刑曹·工曹·戶曹의 判書를 역임하였다. 이어 大司憲을 지내고 1738년 左叅贊이 되고 1743년 敦寧府判事가 되었다. 1746년 中樞府知事 로 辛壬士禍 때 少論을 통박한 聯疏文을 올려 삭직되었다. 돈령부판사에 복직 하여 奉朝賀가 되었다. 詩文과 글씨에 뛰어났다. 글씨에 「領相尹仁鏡碑」와 「嚴 興道墓碣」 등이 있다.
며 나에게 전을 지으라고 함에 내가 평소에 호장을 사모하는지 라 감히 문장을 짓지 못한다고 사양하지 못하겠다. 외숙이 또 한 이 세 단락으로 부쳐 보여주셨는데 전은 곧 편이 이미 원만 하여 뒤섞어 넣을 수가 없으므로 그 사실을 추가로 기록하여 이에 전의 뒤에 부치노라.
당시는 숭정 갑신 후 두 번째 정미년 8월 아무개 날이다.
戶長嚴興道傳 原文 6)
屛溪 尹鳳九 原作
戶長.姓.嚴.名.興道.寧越郡人.戶長.邑吏之首稱也.其先.無徵.不傳 焉.端宗大王三年乙亥.遜位.明年丙子.居于寧越.又明年丁丑.卒被禍.
禍作.興道.走街市號哭.斂棺以營葬.其族人.爲興道懼.興道曰.爲善被 禍.誠甘樂之.噫其偉矣.或曰王自盡暴於外.邑宰及從人.亦莫敢收斂.
興道.卽臨哭之.蓋當是時.姦諛堵立.有事於王者.輒立殺以威之.邑宰 而食於王者.從人而私於王者.皆不能委命於變故之際.興道.以一郡吏.
曾無食君之義.又非有私昵之恩.終能蹈白刃如坦道.不失致命之義.儻 所謂捨生而取義者非耶.又曰興道.恐有異論.卽葬之.其量時審勢.見之 明.慮之深.能若是則彼義烈之卓卓.實非一時慷慨.卒乍間偶然而成就 者.尤豈不爲世敎重者耶.後二百十四年.我顯廟戊申也.尤齋宋先生.進 言於筵席曰衰世.尤當崇尙節義.請官興道之後.以作世道勸.上許之.訪 問其子孫則無有.豈天道無知者耶.此何理哉.然.人之血屬.或絶或嗣而 其有嗣屬者.亦或至累世而絶焉.興道之名.將與山嶽並高.日星並昭.傳 萬世無窮矣.天之與善人者.至此而不可謂不厚也.至肅廟乙丑.士林.詢 謀腏食於六臣祠而宋先生.又特筆記其事.以下邑鶩吏.得與六忠臣而 血食一祠.其光耀身後者.果何如也.今者.王之位號已復.陵崗之象設煥 然.若使當時.不有興道收斂而葬之者.雖百年之公議已定.欲伸神人之 寃鬱.將無地封一抔矣.其志節之凜然者.旣不在六臣之下而爲端宗今 日之地則或謂之有過焉.非誣也.由是觀之.貴賤雖殊.同享一祠.豈有歉 之哉.雖然.不有宋先生表章而筵請之則其何能引重而至享於六臣祠 也.不有特筆之記其事則又惡能傳之來世而不朽之哉.是知興道之得 先生.其與唐衛士之遇晦翁.同其幸而先生之於此眷眷.亦晦翁傷世之
6) 屛溪集 卷之 六十에서 轉載, 본문의 방점과 번역은 역자가 한 것임
투고일 2012. 2. 10.
심사시작 일자 2012. 5. 11.
심사완료일 2012. 6. 10.
意.悲夫.
坡平尹鳳九曰世衰道微.人心陷溺.今之爲士者.平居讀書.談義理.臨小 利害.棄義失身.無難也.其視興道.何如哉.詩曰天生烝民.有物有則.若 興道者.可謂不失其則者也.
附追記
肅廟時.府使任侯震元.閱舊籍.得戶長籍.推及累籍.戶長後五世而有應 坦應平應一.以騎兵逃.不復知其所在矣.嗚呼.盧㒰.不過一世奇士而韓 文公.謂之十世當宥之.有罪猶可宥之.况戶長之所成如彼而使其後五 世而不得免於賤役.以至於不保其舊居則聖考官其後之盛意.終亦無 可施之地.此豈可以奬來後勸一世哉.吁可傷也.三應之後.必有繼其世 者.諸邑之爲宰者.若於姓嚴之籍.溯而求之.庶幾有可推之道而孰肯留 意之者.
肅廟戊寅.封陵.後因筵臣陳白.贈戶長工曹佐郞.
今上丙午.李公榗.爲莊陵齋郞.慨然慕戶長之義而求其事迹.欲立石於 其墓.使樵童牧竪.皆知爲戶長之墓.事力有不逮者.時叅判尹公陽來.適 斥補本邑.樂與成事.遂伐石刻銘.置守塚二人.爲文以祭之.
李公.余之內舅也.一日.以嚴戶長事實.托之.俾余立傳.余尋常慨嚮於 戶長矣.不敢以不文.辭.內舅.又以此三段.寄示而傳則篇已圓矣.不可 攙入.追記其事.玆附之傳後.時崇禎甲申後再丁未八月日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