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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남은 1년의 기간 동안 이 커다란 산을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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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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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길지 않은 생애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낸 재외 교포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부모님께 한국인으로 교육을 받았고 또 한국인 학교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제 마음 속에는 한국인이라는 인식이 적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보면서나 잠시 어렴풋이 그 런 느낌을 받았을 뿐, 평소에는 내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만나는 외국인 친구들이“Where are you come from?”이라고 물어보면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에서 살았고 고향도 인도네시아인 한국인이라고 주절주절 길게 설명을 늘어놓고 는 멋쩍어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저를 걱정하신 부모님은 중학교 때 각국의 재외교포 2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민족 캠프에도 참가하게 하시고 많은 한국의 국회의원 분들과 재계 인사들도 만나게 하시는 등 제게 올바른 국가관 과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다양한 노력을 하셨지만 제 마음 속에서 그리 큰 변화는 일어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국가관이 모호한 상태로 저의 고등학교 시절은 지나가고, 대학교를 다니기 위하여 한국으로 입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에 와서도 이런 상태는 계속 지속되었습니다. 아니, 한국에 와서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2006년 11월 14일, 며칠 동안 계속 흐렸던 하늘은 그날따라 더욱 맑고 상쾌하였고 겨울 날씨 치고는 평소보다 매우 따뜻했습니 다. 하지만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부모님과 함께 의정부에 있는 306보충대로 향하는 저의 마음은 사실 그렇게 맑지만은 않았습니 다. 비록 이전부터 군입대를 결정하고 있었고, 또 기꺼이 조국을 위해 헌신해 보리라 나름대로 다짐도 해 보았던 저였지만, 정말로 머리를 자르고 부모님과 헤어지는 그 순간에는 가슴 한 편이 아릿하게 저려오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낭비”가 아닌“투자”의 시간이었습니다

6포병여단 ○○대대 상병|김 민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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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습니다. 비록 혼혈도 아니고 다른 재외교포들처럼 한국말에 서툰 것도 아니 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힘들었던 것입니다. 겉모습을 봐도, 또 말하는 것을 들어봐도 영락없는 100% 한국인,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한국인과 전혀 달랐던 저로서는 내 자신의 모호한 정체성과 다른 한국인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근거 없는 압박감에 점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2006년 여름, 저는 드디어 휴학을 결심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군입대와 집안 사정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이렇게 애매모호한 상태로는 내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가장 컸기 때문입니 다. 내가 어디 사람인지, 나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성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다시 인도네시아로, 중동으 로, 그리고 유럽으로도 떠나 보았지만 그 속에서도 어렴풋하게 느낌으로만 다가올 뿐, 나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군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국방일보나 신문에 나오는 다른 자원입대자들과 달리 당당 한 자부심이나 뚜렷한 주관 없이, 정신없이 입대하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그것이 현 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보충대에서도 당당하게 하지 못하고 우물쭐물하며 소심한 자신을 탓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3일 후, 훈련소가 정해졌고, 의정부에서 떠나 연천으로 갈 날이 다가왔습니다.

306보충대에서 5사단 훈련소로 배치를 받고 처음 대광리에 도착했던 날, 말로만 듣던 조교들의 무서 운 모습과 아직은 낯설기만 한 훈련소 동기들의 모습, 그리고 그속에서 잔뜩 얼어있는 저의 모습은 지금은 추억의 사진 한 장으로 밖에나마 남아있지 않지만, 그 날 그 긴장되던 느낌을 아직도 지울 수 가 없습니다. 평소 예민하고 소극적이었던 저로서는 과연 내가 2년 동안의 군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고 또다시 가족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괜스레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게 되었습니 다. 훈련소의 낯설고 낡은 침낭안에서 눈물을 삼키며 그렇게 저의 첫 훈련소의 심란한 밤은 지나갔습 니다. 하지만 당장 다음날부터 이어진 고된 훈련과 처음 맛보는 혹독한 추위는 제가 이러한 감상에 계속 빠져있을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잡아 본 총의 서늘한 감촉과 머릿 속이 온통 웅웅거릴 정도였던 첫 번째 사격의 충격, 양 쪽 팔꿈치가 다 까지도록 훈련장을 기어 다녔던 각개전투 교장에서의 훈련, 그리고 정말 죽을 것만 같이 고통스러웠던 화생방실에서의 시간들은 하루를 1초와도 같이 짧게 만들었고, 저에게 있어 밤이 란 단지 내일을 위한 휴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영하를 넘나드는 추운 겨울밤 밝은 달을 보며

Ⅰ.대한사람 대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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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난 후의 모습을 그려보거나 나의 미래 계획을 세우며 그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길지 않은 5주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드디어 지금의 자대로 배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금이 라도 서울에 가까운 자대로 배치받기를 희망했었지만 야속하게도 저는 경기도 연천 근처의 전방으로 배치를 받게 되었고 2006년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추운 겨울날 밤, 저를 태운 작은 트럭은 지금의 3287부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참 달려와 산골짜기 깊숙이 자리 잡은 부대 를 보면서 처음 느낀 것은 사실 답답함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루에 네번 밖에 버스가 없다는 사실은 저를 더욱 좌절하게 했습니다.』

자대

에 도착하면서 저의 군생활의 2부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도착한 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게 맞아주던 선임들이었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도 무서워 보 일 수가 없었습니다. 훈련소에서 들은 왜곡된 말들과, 사회에서 들었던 군대 문화에 대한 자조 섞인 헛소문들을 믿고 있었던 저는 선임들의 친절과 따뜻한 환영에도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고 있었습니 다. 상처받은 고양이 새끼처럼 털을 곤두세우고 눈치만 살피며 웅크리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호의를 호의로 알지 못하는 긴장의 나날들은 계속 이어졌고, 그렇게 저는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선임병과 이런 저런 고민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다가 그동 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들로 스스로를, 또 주위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사람들에게 점점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서 군생활의 보람과 의미를 찾아보고자 노력하게 되 었습니다. 일단 스스로 오게 된 군대, 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냥 후회만 하면서 허송세월하 기보다는 현실에 집중하며 무언가 의미를 찾자, 그리고 그 속에서 나 스스로를 완성하자는 생각도 갖 게 되었습니다.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도 해보지 못했던 혹독한 겨울의 혹한기 훈련을 하고, 사진으로나 보던 장갑차를 타고 여러 번의 훈련을 겪으면서 강인한 체력을 기를 수 있었으며, 다양한 환경에서 자라 온 전우들과 매일매일 대하면서 때로는 의견충돌로 인해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힘든 고민 들을 나누며 보듬어 주면서 나 혼자만을 생각하기보다는 집단 전체를 생각할 수 있는 넓은 안목을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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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도록 교육받고 자랐기에 개인주의에 익숙해진 저 에게는 이것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으며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타인에게 좀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동안 한국에서 잠시나마 지내면서 한국인들은 이런 상황에 서 왜 이런 행동을 할까 궁금했던 점들도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한 궁금증은 군대에 들어와 생활하고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다소나마 해결되었고, 한국 문화에 전반적으로 자리 잡은 군 문화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 7월, 저는 더더욱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07년 UFL 훈련과 BCTP 훈 련에 참가한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 파견을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상당히 고민도 많이 했습니 다. 무슨 훈련인지, 또한 가서 어떤 것을 하는지 명확히 알지도 못한 채 가야했기 때문에 혹시나 자대 에서 나를 귀찮아해서 보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도 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 작 파견을 가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마치고 난 후에는 이러한 나의 생각이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 다. 이 훈련들에 참가함으로써 2년이라는 군복무기간 동안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군복무를 마치기보 다는 나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조국에 대한 사랑을 더욱 넓혔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 다. 더불어 평소 자대에서는 쉽게 자주 볼 수 없었던 중령급 이상의 많은 고위 장교들과 은퇴하신 예 비역 교관님들을 바로 곁에서 보면서 윗사람을 대하는 예의와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기회 또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밖에 있을 때 군에 대하여 접한 소식들은 부정적인 소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군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2003년 이후로 군대 자체적으로는 병영문화와 생활공간의 개선을 통해 가히 혁신이라 불릴만한 변화를 시도하였고 또 이러한 혁신이 안정적으로 정착되어 감 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홍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의 어두운 기억만 가지고 군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정보의 부족은 육군의 홍보가 일반 신문이나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가 아닌, 일반인의 접근성이 낮은 군사 잡지나 육군방송을 통해서만 이루어 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몰랐던 저 또한 군입대 전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 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입대를 하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군대에 일단 오고 나서 본 것은 이제까지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밖에 있을 때는 아무도 군대에 가면 한국 사회를 이해하

Ⅰ.대한사람 대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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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한다고들 하였지만, 역설적으로 어디에 있든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그 보답 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진리 또한 절대 틀리지 않음을 확인시켜 준 곳도 바로 군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소중한 인연이란 공기와도 같아서, 항상 곁에 있을 때는 모르다가 그것을 잃었을 때 에만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사실도 군대에 와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만약 제 가 입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알 수 없었던 사실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입대를 한 지 약 1년이 지난 지금은 군입대를 더욱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2년 동안의 군 복무를 등산에 비유하곤 합니다. 1년 동안 오르막길을 오르며 넘어져 다치기도 하고, 길을 잃고 한참 동안이나 헤매기도 하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느새 정상에 올라섰다고 느낍니다.

이제는 남은 1년의 기간 동안 이 커다란 산을 내려가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에는 더더욱 큰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끄러운 비탈길도 있을 것이고, 까마득한 천 길 낭떠러지도 있을 것이며, 혹시나 무서운 산짐승이 나와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날씨도 저를 괴롭힐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는 힘든 그 길을 같이 걸어가 주는 소중한 전우들이 있습니다. 제 목숨을 기꺼이 맡길 수 있는 그들이 있기에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 음과, 그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제는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안락하고 안전하지만 도전이 없는 가족이라는 둥지를 떠나 위험하지만 저 스스로의 그릇을 깨고 더 크게 빚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줄, 군 입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만일 군에 입대하지 않고 사회에 있었더라면 정말 많은 것을 할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영원하지 않고 유한한 우리 인간의 삶이기에 시간이라는 자산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큰 지는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군 복무를 반 정도 하면서 2년 동안의 군 복 무는 절대‘낭비’가 아닌‘투자’이며, 더 큰 세계로 날 수 있도록 자신을 절차탁마하는 인고의 시간임 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고의 시간 뒤에는 더욱 찬란한 영광의 날이 있을 것임을 이제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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