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문제 ‘공유’로 푼다 12
유럽을 여행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 중에는 오랜 역사 와 전통을 가진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세계적인 공연도 있 지만 거리에서 이름 모를 악사를 에워싸고 함께 노래하며 박수치는 거리 공연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문화기획자나 예술가들이 한번쯤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도시의 이미지이 기도 하다.
일상의 문화 풍경은 축제나 이벤트로 연출되거나 인위 적으로 만들어질 때 감동이 사라진다.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 우연히 마주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공간에서 뜻밖의 경험을 누리게 될 때 감동적이고, 그 감동이 오랫 동안 각인되기 마련이다.
4년 전, 나는 유튜브에서 뉴욕 거리에 놓여 있는 피아노 한 대를 중심으로 호기심과 감동, 예술을 통한 일상의 여 유를 즐기는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래, 우리가 만들려는 도시의 모습이 이런 거였지!’라며 이 프로젝트를 해봐야겠다고 즉흥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달려라피 아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피아노의 일생
달려라피아노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번 설치 하고 끝나는 이벤트가 아닌 일상에 뿌리를 내리는 문화가
되는 것이었다.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도시의 일상 에서도 뭔가 숨 쉬는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400만 원이 넘는 고가의 피아노를 거리에 설치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누구나 원하는 사람이 연주할 수 있 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수였다.
다양한 문화기관과 공연장에서 근무한 경험을 갖고 있 지만 피아노의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거나 어떤 단계를 거 쳐 유통되는지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수십 년 동안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분들조차 도 피아노의 내부를 자세히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우선 우 리나라에 피아노가 몇 대나 팔리고, 누가 어떤 용도로 구 입하는지, 수명이 다한 피아노들은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아보기로 했다.
각자의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자. 학교가 끝나고 골목 길을 걷다 보면 창문 너머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 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요즘은 초등학교 입학 때 교육용으 로 피아노를 구입하였다가 4~5학년이 되면 예체능보다는 국영수 중심으로 사교육을 시키고, 미래 대학 전공으로 음 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부모들이 피아노를 못 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비싸게 구입한 피아노가 거실 한쪽 벽면에 장식품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푸대 접을 받다가 이사를 할 때면 골칫거리가 된다. 버리자니 아
공유로 도시에 음악을 입히다:
달려라피아노 프로젝트
정석준│아트앤퍼블릭 대표([email protected])
기증–축제–공유의 선순환
서울 인구가 천만이라고 치자. 대략 200만 명은 피아노를 가지고 있고 그중 절반이 중간에 피아노를 팔았다 하더라 도 100만 명이 피아노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놀라운 숫자 다. 만약 0.1%인 천 대의 피아노가 공유된다고 가정하면, 서울지역에 있는 지역아동센터에서 모든 형태의 음악 교 육이 가능해진다는 결과가 나온다.
달려라피아노는 ‘이 100만 명 중에 피아노를 기증하겠 다는 사람이 설마 없겠어?’ 하는 순진한 생각에서 시작했 다. 국내에서 최초로 진행되는 방식의 프로젝트다 보니 자 문을 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안 되어, 결국 직접 실행·보완 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선 달려라피아노는 피아노 기증-수리와 조율-페인 팅-재기증의 절차를 거친다. 시민들에게 피아노 기증을 알리기 위해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을 운영하고 있지만 가 장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경로는 매해 가을 서울 시내
에서 펼쳐지는 축제형 캠페인이다. 2013년 선유도공원을 시작으로, 2014년에는 광화문광장, 2015년에는 신촌, 대 학로 등 다양한 공간에서 기증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축제 형 캠페인은 보통 5일 정도 진행하는데, 이때 거리에 설치 하는 피아노는 15~20대 정도다. 모두 시민에게 기증 받은 피아노다. 아티스트들이 피아노에 특별한 페인팅으로 멋 지게 꾸며 거리에 설치한다. 캠페인 기간 동안 이 피아노 들은 시민들의 열린 피아노가 되기도 하고, 아티스트들의 거리 공연을 위한 중요한 악기가 된다. 캠페인이 끝난 뒤 이 피아노들은 다시 조율되어 지역아동센터나 복지시설에 기증되고, 일부는 공공장소에 설치된다.
199대 1,521억 원
2000년
<표 1> 가구당 피아노 보유현황 및 시장 규모
출처: 통계청, 하나금융연구소.
250 (대, 10억 원) 200
150 100 50 -
174대 1,873억 원
1996년
1천 가구당 피아노 보유현황 신규 피아노 시장 규모
도시문제 ‘공유’로 푼다 12
시민들의 나눔이 축제가 되고 예술가들이 거리에 음악 을 입히고, 다시 공유되어 소외계층 어린이들의 일상을 예 술로 만드는 달려라피아노 축제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제다. 많은 분의 도움으로 현재 연간 40대가 넘는 피아노가 거리에 기증되고 있다.
도시의 활력을 책임지는 음악
디자인이 도시의 편리함과 시각적 아름다움을 만든다면, 음악은 도시에 활력을 만들어 낸다. 지하철 게이트를 나오 는 순간 들리는 음악소리를 따라가 보니 정말 피아노가 있 었다는 이야기, 매일 오후가 되면 선유도공원에 빛바랜 피 아노 악보집을 가져와 연주하는 아주머니, 달려라피아노 를 통해 거리의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을 갖게 된 피아니스
트, 주말이 되면 달려라피아노가 설치된 곳을 찾아 연주하 는 아마추어 연주자들. 지금도 달려라피아노가 있는 주변 에선 아름다운 음악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도시에 음악이 흐르면, 사람들은 리듬을 갖 고, 리듬으로 경계의 벽을 허문다.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일상을 되돌아보는 여유를 갖기도 한다. 때로는 생면부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미소 짓는다. 흔 히 말하는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도시의 활력이 만들 어지는 순간이다.
신촌 홍익문고 앞에는 차 없는 거리의 명물인 달려라피 아노가 있다. 저녁이 되면 다양한 연주자들이 피아노를 연 주한다. 바이올린을 켜는 이도 있고, 색소폰을 부는 할아 버지도 가끔 나타난다. 이 시간이 신촌거리가 가장 활력을 띠는 시간이다. 자연스럽게 피아노 주변으로 시민들의 발 걸음이 향하고, 어떤 음악이 또 흘러나올지 호기심을 갖 고 귀를 기울인다. 피아노가 설치된 지 1년이 지난 지금은 달려라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연주자들의 커뮤니티가 생겼 다. 이 커뮤니티를 통해 매일 저녁 다양한 분야의 음악가 들이 새로운 무대와 꿈을 펼치고 있다.
필자는 도시를 설계하는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도시 를 설계할 때 시각적인 디자인뿐 아니라 청각적인 디자인 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각 공해보다 먼저 사 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소리 공해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사람들에게 쉽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소리일 것이 다. 현재 우리나라는 소음을 규제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방 식으로 도시의 소리를 관리하고 있지만, 관리를 넘어 어떻 게 좋은 소리,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생각 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때가 된 것 같다.
축제와 같은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니라면 더 좋을 것이 다. 음악 계단, 음악 화장실 같은 기계적인 방식보다는 공 간마다 특색 있는 소리, 일상의 인간적인 소리라면 더 좋 을 것이다. 뉴욕, 밀라노 등 세계의 문화 도시들이 거리 곳
우리는 이벤트가 아닌 문화를 꿈꿔야 한다. 이벤트는 압축 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예산이 소 요되고,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할 때 도시도 피로를 축적 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참여하고 즐기기보다는 고객처럼 서 비스를 제공받으려고 한다. 우리가 노력해 만들어가는 도시 의 모습이 이 방향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리와 공원에 피아노를 설치하는 일은 도시에 새로운 소리 문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리 곳곳, 공원 곳곳에서 들려오는 각양각색의 음악들. 퇴근시간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더 경쾌하게 들리는, 지금 자신이 보는 도시의 풍경이 한결 더 유쾌하게 느껴지는, 달려라피아노가 만드는 소리 문화 다. 지난 4년간 달려라피아노가 이것을 만들기 위해 투입 한 예산을 고려한다면 가장 적은 예산으로 가장 큰 성과를
첫째, 보이는 것에 대한 귀찮음이란, 야외에 피아노를 설치할 경우 발생하는 관리의 문제다. 야외에 피아노 설치 가 의미가 있으려면 누구나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개방된 공 간이어야 한다. 하지만 피아노 특성을 고려하면 비를 맞는 곳에는 설치할 수가 없다. 신촌거리처럼 지붕이 없는 거리 에서는 매일 비닐을 덮고, 걷고, 때로는 이동도 하는 일들 을 맡아서 해줄 사람들이 필요하다(신촌거리의 피아노는 홍익문고에서 손수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주고 있다). 대부 분 이런 이유로 특정 장소에 설치되지 못하곤 한다. 지붕이 있는 곳이라도 너무 외진 곳에 설치되면 시민들이 쉽게 찾 지 못하고, 방치되어 아예 관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생각대로 서울 곳곳에 설치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둘째,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문화 는 이벤트와 달리 일상의 삶에 더 밀착되어 있다. 이벤트
도시문제 ‘공유’로 푼다 12
처럼 크게 도드라지지도, 사람들이 시끌벅적 몰려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연주공간이고, 누군 가에게는 잠깐의 쉼터가 된다. 때로는 우울한 하루의 가장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곳에 가면 음악이 있다는 것, 그 래서 자꾸 찾고 어울리게 되는 것, 그것이 문화다. 그리고 문화는 도시의 시간과 공간, 사람의 역사를 담아야 한다.
기업이나 국가의 후원을 받아 새 피아노를 구입하여 공원 에 설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민들이 기증한 중고 피아 노를 아티스트와 함께 페인팅하여 공원에 설치하는 이유 는 앞서 이야기한 시간과 공간,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그 과정에서 녹아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달려라피아노 의 보이지 않는 가치다. 그것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의 시 간과 노력이 더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려라 피아노를 중고피아노로 보거나, 피아노의 품질과 연주자 들의 품질을 평가한다. 기증 받은 피아노라고 설치하고 관 리하는 데 비용이 전혀 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거리의 달려라피아노를 보며 피아노가 낡았다고 투덜대기 도 한다. 아직 우리 사회가 이런 가치에 비용과 마음을 지 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 같다.
언젠가 좋아하는 미술작가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 다. 해외에서 설치 전시를 하고 설치된 작품들을 기념품으
로 판매하자, 해외에서는 전시작품을 소장하게 되어서 너 무 기쁘다는 반응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이 고무 조각이 무 슨 몇 만 원이냐고 하면서 한마디씩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 고 한다. 그 조각을 구입한다는 것은 예술의 일부를 소장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단순히 고무 소재의 사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국내 여건에도 불구하고 달려라피아노는 피아노를 선뜻 기증해주신 시민, 연주자, 페인팅 아티스트, 자원봉 사자, 훌륭한 공무원, 달려라피아노 시민 기획단 등 많은 분들의 시간과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여전히 기증된 피아노 보관 공간이나 상주 운영 인력 등 아직까지 해결해 야 할 숙제들이 남아 있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프 로젝트에 도전할 엄두도 낼 수 있게 되었다.
달려라피아노를 진행하는 비영리단체 아트앤퍼블릭은 8월, ‘뮤직 인 모션(Music in Motion)’이라는 새 프로젝트 를 시작한다. 피아노를 설치할 공간은 없지만, 음악을 통 해 더 풍요로운 감정과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공간과 사람 들이 있다면, 직접 피아노를 싣고 그곳으로 찾아가는 음악 프로젝트다. 우리는 믿고 있다. 음악을 움직이게 하는 순 간 음악이 무엇인가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 과 사람의 마음을, 공간의 역사를, 때로는 수만 가지 마음 속 감정들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 일상의 공간과 사람 들을 더 사랑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