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950년대와 4월혁명
(1) 재건과 부흥의 시대
1950년 한국사회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 전비 지출로 인한 인플레이션, 물가폭등, 투기와 환물풍조의 확산 등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농촌은 50%가 絶糧農家이며, 임수 토지수득세(현물 징수)와 각종 잡세 그리고 저곡가 정책로 인한 파탄하고 있었다. 게다 가 미국은 공법(PL)480조에 의거 잉여농산물을 원조하고 있었다. 이것은 미국의 농업 공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입법화된 것이었는데, 한국에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공 여되었다. 1956년~1961년까지 약 2억 3백만 달러 도입되었고, 잉여 농산물을 한국 화폐로 전환해 10~20% 미국, 나머지는 한국의 경비로 충당(대충자금)하였다. 대충자 금의 43%를 국방비로 사용하고 잉여농산물은 식량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농 촌에는 치명적 타격이 되었다.
그리하여 농산물 가격 하락과 농업 생산의 위축되었다. 이 시기는 소비재산업인 삼백 (설탕, 면화, 밀)산업 중심의 산업화가 진행되었는데, 이 때문에 농촌의 면화농사와 밀 농사에는 타격이 되었다. 전체 농산물 중에서 밀이 40%, 원면․보리․쌀 등이 50%에 달하였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저곡가와 식량 수입국으로 전락하였다.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인한 대규모 실업자가 발생하고 농촌 인구인 도시로 유입되었다.
1950년대는 원조의 배분을 놓고 정경유착이 생겨남으로써 재벌 형성의 계기가 마련 되었다. 바야흐로 1950년대는 원조의 시대였는데, 원조는 시혜가 아닌 미국의 국가자 본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총생산의 13~14%는 원조였으며, 국가 재정의 50%가 원조로 유지되는 대미종속적 구조가 생겨났다. 1950년대 미국 원조는 전쟁으 로 파괴된 한국사회를 복구하여 미국 자본주의의 시장권에 안정적으로 편입시키며 대소 전진기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안보․군사적 성격의 원조였다. 그러나 달러화 위기가 나타나며 1957년 이후 무상원조가 점차 유상차관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미군정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9월 11일 불하하고 남은 귀속재산을 이 승만정권에 양도하였고, 이승만 정권은 귀속재산을 민간에 싼값에 불하하였다. 조선방 직 대구공장은 정부 사정가는 7억원이었으나, 실제 불하가 3억 6천만원이었다. 다른 경우도 불하가격은 정부사정가의 40~70% 수준에 불과하였다. 귀속재산 불하는 정치 권력과 밀착한 특정인에게 이루어지고 일반 공매에 의한 것은 적었으며, 그것마저도 이 면공작이 작용하였다. 또한 인플레 하에서 장기분할 납부가 허용됨으로써 실제로는 거 의 무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기업에 대한 정부의 자금융자는 주로 산업은행 통하여 이 루어졌는데, 1957년 말 현재 산업은행의 대출금리는 대체로 3~10%가 많고 높아도 15%를 넘지 않았다. 당시 사채 금리가 연리 20~25%이며, 금융통화위원회가 결정한
일반자금 최고 이율이 18.25%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저금리였다. 정경유착으로 인해 각종 부정부패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중석불사건과 원면사건이다.
1958년 이후 미국은 적자와 달러화의 위기에 따른 원조가 감소하자 경기가 불안해졌 고, 그 타개책으로 ‘생산재 생산공업에 투자가 시작되었다. 정부는 부흥부의 경제개발3 개년계획(1959)을 입안하였는데, 핵심 요지는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이었다. 즉 성 장 중심의 자본축적 위주의 경제개발론으로, 이 같은 기조는 1960년대 정책과도 연괸 되었다.
1950년대 한국사회는 나일론의 보급됨으로써 새로운 복장이 나오고, 구공탄의 등장 과 산림녹화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럼에도 1950년대 후반 원조삭감과 경제위기가 더욱 심각해졌다. 원조 감소에 따른 원료난은 공장 가동률 저하로 이어짐으로써 실업문제가 심각해지고 농촌은 파탄에 이를 지경이었다. 농민은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이중적 수 탈을 당하였는데, 정부는 물가안정과 군사비에 대한 부담을 농민에게 전가하였다. 또한 농민들은 조세부담, 지가상환 부담, 저곡가 정책에서 오는 부담으로 부채농 전락하였 다. 때문에 영세소농들은 농지 팔고 소작농으로, 도시로의 이농(離農이 더욱 심해졌다.
도시는 공장 가동률 저하로 실업자 급증하였다. 여기에 이농자, 월남민이 유입되어 도 시인구 급증하였다. 또 매년 20만 명의 제대군인 상당 부분 도시로 유입됨으로써 실업 문제 심각한 지경이었다. 1960년 총실업률은 34.2%이고 비농가는 42.%였으며, 이 들 중 상당수가 고등교육 실업자였다.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12~18시간)에 시달리고, 빈민들은 날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반면 권력과 손잡은 일부 노동자들은 귀족 노 동자였는데, 대한노총 간부와 마카오신사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였다. 노동자들은 또 각 종 동원조직에 속하며 친정부활동에 치우쳤는데, 1959년 10월 이러한 반노동자적 조 직에 반대하는 전국노동자협의회가 결성되었다.
(2) 4월혁명
1960년 4월혁명은 이승만정권의 실정, 부정부패, 사회문제(실업과 농촌의 파탄) 등 으로 민중들의 불만이 쌓인 가운데 초보적인 민주주의마저 파괴하는 이승만정권에 대항 한 국민들의 항쟁이었다.
4월혁명의 조짐은 2월 28일부터 발생하였다. 일요일인 1960년 2월 28일은 민주당 의 장면 부통령후보의 대구 유세가 예정되었는데,일요일에 등교해 학기말 시험을 치르 게 하자 경북고 학생들이 분노해서 시위하였다. 2월 28,29일 이틀간 지속된 대구 학 생들의 시위는 4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뒤로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격렬한 시 위를 벌였다.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선거는, 곳곳에서 사전투표․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민주당 참관인 축출 등 수많은 부정이 저질러졌다. 민주당은 이날 오후 4시
30분에 3.15정부통령선거가 불법․무효라고 선언했다. 선거 결과는 이승만 후보가 유 효 투표의 88.7%인 9,633,376표,이기붕 후보가 유효투표의 79%인 8,337,059 표,장면 후보가 1,843,758표로 발표되었다. 1956년 선거에서 장 후보가 이 후보보 다 20여만 표가 많았고, 자유당의 실정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 뚜렷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붕이 장면보다 4배 이상 득표한 것이다. 이 선거가 얼마나 심한 부정선거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산에서 격렬한 시위와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 시 30분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경남도당은 오후 1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하였다.
민주당 당원들이 중심이 된 시위에 시민과 학생들이 합세해 오후 7시 30분경에는 시위 군중이 1만여 명으로 붙어났다. 그때부터 경찰이 발포하고, 시위 군중들은 여당계 신문 사인 서울신문사와 자유당선거대책위원회 등이 입주한 건물과 파출소 등을 파괴하였다.
이날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하였다.
경찰은 시위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갔다. 4월 11일 실종된 김주열 학 생의 시체가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분노하며 다시 봉기하였다.
이날 오후 6시경 시위자가 3만 명에 이르렀다. 이 시위에는 수많은 어머니들이 가담해
“죽은 내 지식을 내놓아라”고 소리 질렀다. 밤에 다시 경찰 총격으로 2명이 사밍하였다.
시위는 12일과 13일에도 계속되었다. 이 대통령은 13일과 15일에 특별담화를 발표해 마산폭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제2차 마산시위를 보고 대학생들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려대생들이 4월 18일 교문을 박차고 나와 서울시청 부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마친 고대생 들이 학교로 돌아가는데 청계천 4가에서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십수 명의 학생이 부상당하였다.
4월 19일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1시 50분경 동국대생들이 경무대 쪽 으로 향하면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왔다. 많은 시민들이 학생 시위에 합류하 였다. 오후 1시 40분경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일제히 발사해 21명이 사망하고 172명 이 부상당하였다 2시 50분경에는 중앙청 부근 무기고에서 경찰의 무차별 발사로 8명이 숨졌다. 시위대가 이기붕 국회의장 집으로 몰려들기 직전 이기붕은 6군단 사령부로 피 신하였다. 2시 반경 시위대는 20만명으로 늘어나고 서울시내 주요 거리는 시위대로 가 득찼다. 5시 이후에도 광화문에서 세종로, 서울시청 일대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의 공방 전이 계속되었다.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에 불이 치솟는 등 건물 26개소가 파괴되었 다. 이날 시위로 서울에서 104명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부는 2시 40분경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을 홍진기 내무장관 제의로 1시로 소급해 선포하였다. 4시 반에는 부산-대구·
광주-대전에도 경비계엄이 선포되었고, 5시에는 서울 등 5개 도시에 비상계엄이 선포 되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에도 곳곳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서울 지역 출동명령을 받은 육군15사단은 밤 10시에 중앙청에 들어왔다. 계엄군은 공포탄을 지급받으면서 발
포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4월 19일에는 지방에서도 대규모 시위와 유혈사태가 있었다. 오전 10시 40분경 광 주고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오자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이 합세하였다. 금남로 일대에는 시위대가 약 5천명으로 불어나 경찰과 심한 몸싸움을 벌였다. 시민들은 이때에도 물을 나르며 성원하였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통행금지령이 내렸는데도 1만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격전을 벌였다. 9시 20분경 경찰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을 입 었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시민들의 경찰에 총격에 희생됨으로써 훗날 이날을 가리켜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학생신분이 확실한 자는 석방하고,방화·살인자만 연행하도록 지시하였다. 4월 21일 국무위원들과 지유당 간부들은 모두 사표를 냈다. 이숭만은 국 무총리 서리이던 허정과 국무총리 변영태를 불러 수습책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이기붕 의 부통령 당선 취소와 재선거,이승만의 자유당 총재직 사퇴 등을 권하였다. 4월 23 일 장면 부통령이 사퇴하고 다음날 이승만은 정당에 초연하겠다는 수습책을 발표하였 다. 4월 25일 서울대 교수회관에 3백 명의 교수들이 모여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고, 대 통령·국회의원·대법관 사퇴를 촉구하였다. 또 정부통령 선거 재실시,부정선거 원흉 처 단을 요구하였다. 교수들은 오후 5시 50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 고 시위하였다. 이 시위에 학생들이 합류해 4~5만 명이 시위하였다. 이날 이승만은 외무장관에 허정을 임명하였다.
4월 26일,통금해제 시간인 5시경부터 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은 세종 로,국회 의사당 쪽으로 모여 들었다. 9시경에는 3만여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웠다. 소년시위대원들이 계엄군 탱크 위에 올라탔다. 9시 45분경 군중들이 파 고다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려 질질 끌고 다녔다. 10시 20분경 계엄사는 이 승만 하야를 발표하고,10시 30분 라디오에서 그의 사임이 보도되었다. 이날도 시위로 24명이 사망하였다. 4월 26일은 ‘승리의화요일’로 기록되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데는 미국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주한미국대사 매 카나기는 4월 19일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당국이 폭력을 자제하고 법과 질서를 되찾아
“정당한 불만의 표출”이 해결되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 국무부 장관 허터 는 21일 매카나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각서에서 “미국 정부는 데모가 민중 의 분노의 반영”이라고 믿는다고 했으며, 부정선거에 대한 조사 및 관련자 처벌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하였다. 4월 26일 아침에도 매카나기는 “지금은 미봉책을 쓸 때 가 아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8일 이기붕과 그의 부인,이승만의 양자인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 경무대에서 자살하였다. 이날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났다. 5월 29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도피하였 다. 그의 도피는 미국이 주선하였다. 1960년 4월 26일부터 1961년 5월 16일에 이르 는 4월혁명기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활성화된 시기다.
허정과도정부는 미국의 중재로 출범하였다. 허정 자신도 과거 이승만의 심복이었으 며, 4월 혁명 직후 제기된 과거사 청산에 소극적이었다. 그는 현상유지적 정책을 추진 하였다. 1960년 6월 15일 내각제 및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치러진 7․29총선은 민주당을 위한 무대였다. 민의원 선거에서 233명 중 175명,참의원에서 58명 중 31명이 당선되었다. 혁신계는 사회대중당이 민 의원 4석,참의원 1석을 차지하고,다른 혁신정당에서 23명 당선되었을 뿐이다. 반면 자유당 출신들도 당선되고, 이중에는 옥중 당선된 자유당 간부도 있었다. 총선이 끝나 자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져 대립하였다. 구파는 신파와 결별해 독자 정당을 만들겠다고 했다. 형식적인 국가원수 대통령에는 구파와 신파가 모두 지지한 구파의 윤 보선이 선출되었다. 핵심은 국무총리였는데, 구파가 국무총리까지 차지하면 되겠느냐는 여론 등이 작용해 윤 대통령이 1차 지명한 구파의 김도연이 민의원에서 3표 미달로 탈 락하였다. 2차로 지명받은 장면은 8월 19일 찬 117표,반 107표,기권 1표로 국무총 리에 선출되었다. 장면은 구파의 입각 거부로 8월 23일 신파 단독내각을 구성, 출범하 였다. 구파는 분당하여 11월 14일 신민당을 발족하고, 다음해 2월 정식 결당하였다.
장면은 국무총리에 취임 일성으로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웠다. 건설 위주의 경제제일주 의는 장기경제개발의 필요성을 증가시켰다. 장면은 1961년 2월 시정연설에서 7개년 전원개발계획,8개년 석탄개발계획과 산업철도 및 도로·항만의 확충계획 등을 발표하였 다. 장면 정부의 종합적인 장기경제개발계획은 5개년 경제개발계획으로 구체화되어 1961년 4월 말에 완성되었다.
민주당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미 7.29총 선에서 20만 명의 감군안을 공약하였으 나 미국이 반대하였다. 결국 외원(外援)이나 외자(外資)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장 총리는 미국원조에 크게 기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도입 및 미 국․서독으로부터의 장기차관 도입을 추진하였다.
4월혁명 직후 시급한 문제는 부정부패자의 처리였다. 허정 과도정부는 이들을 기존 법률과 제도 아래 처리하겠다고 했고, 장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이들의 처벌 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60년 10월 8일 법원은 부정선거 관련책임 자와 발포 책임자들에게 경미한 처벌을 선고하거나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대 부상 학생들이 국회에 들어와 항의하였다. 뒤늦게 부정선거 원흉과 발포 책임자, 독 재정권의 협력자 등을 처벌하는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였다. 1960년 11월 23일 개헌안 이 통과되고, 12월에는 3.15 부정선거와 발포 책임자를 단죄하는 부정선거관련자 처 벌법 , 이승만 독재정권에 협력한 핵심 요인들을 처리하는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 법 , 또 이를 실행한 기구의 편성과 기능을 규정한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 이 통과되었다. 이 중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은 이승만 정부 요인과 자유당 핵 심간부 등 권력 핵심 인사의 공무담임권과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제약하고 있었다. 고 위 공직자나 자유당 간부는 자동적으로 공민권을 제한하게 되고, 그 하부의 공직자나
자유당 간부들은 심사를 받아 공민권 제한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다. 이에 600여명이 자동적으로 공민권 제한받았고, 전국적으로 약 1만 4천명이 심사 대상자로 분류되어 특별검찰부의 심사를 받았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발생하고, 군사정권은 최인규 등 일부 책임자를 처형하였으나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며 구자유당계 인물들이 대거 다시 정 치에 등장시켰다.
4월혁명 직후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김구암살사건부 터 김성주치사사건,장면 부통령 암살기도 사건,조봉암․진보당 사건 등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가 터져 나왔다. 또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였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시작된 피학살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는 폭발적이었다. 유족들 은 전국피학살자유족회를 조직하고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였고, 국회도 특별위원회 를 조직해 조사한 뒤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진상규명 요구는 5․16쿠데타로 인해 하루 아침에 무력화되었고, 오히려 진상 규명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야 했다.
4.19 직후 한국사회는 자유를 만끽하였고, 이 과정에서 통일논의와 통일운동이 활발 하게 분출하였다. 1950년대는 이승만정권의 북진통일론에 갇혀 질식된 사회였다면, 새 로운 공간이 만들어지며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7.29 총선에서 문맹퇴 치, 성인교육, 선거계몽을 하는 국민계몽대 활동을 했고, 도시지역에서 ‘양담배 퇴치, 커피 안 마시기’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학생들의 운동은 보다 근본적인 문 제를 제기하는 통일운동으로 변화하였다. 1960년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의 발기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에서 비슷한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2.8 경제협정 반대운동’, ‘2대악법 반대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4월 혁명 이후 부활한 혁신계는 비록 7.29 총선에서 참패하였으나 새로운 방향을 모 색하였다. 1960년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통일사회당, 혁신당, 사회대중당, 사회당 등이 분립하였다. 이 중 통일사회당이 혁신정당 중 가장 우파에 가까웠고, 반면 사회당 은 가장 급진적인 성향의 정당이었다. 혁신정당은 일반 사회단체와 연계하여 통일운동 을 주력하였다. 1961년 2월 통일사회당을 제외한 혁신정당과 통일운동 단체, 진보적 사회단체의 연합체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가 발족하였다.
당시 민간 통일논의는 중립화 통일론과 남북협상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립화 통 일론은 한국을 영세중립화 하여 통일하자는 주장이었다. 남북협상론은 일체의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남북협상으로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민자통에는 중립화 통일론자와 남북협상론자 모두가 포괄되었지만, 핵심 간부진들은 남북협상론을 지지하였다. 당시 통일논의는 “실업자의 일터는 통일에 있다”, “이북 전기, 이남 쌀” 구호에서처럼 경제발 전의 방향과 민중 생존권 문제와도 연계시켰다.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이 남북 학생회담을 제안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 이하였다. 남북학생회담 제안은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다는 측면에서 제안되었다. 남북
교류, 특히 이산가족들의 서신교환은 여론 조사에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일부 보수정치인들도 남북교류에 찬성하였다. 장면 정권도 전반적으로 남북교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국제적십자사를 통한 남북 이산가족 서신교류 문제를 검토 해 보기도 했다. 남북학생회담은 이와 같은 남북 교류 및 접촉의 선례를 만들어 남북교 류가 확대되는 것을 의도한 운동이었다. 특히 북한당국이 학생회담 제안에 적극 찬동하 고 나서자 반발이 심각해졌다. 보수 정치인 및 언론의 용공성 시비가 거세가 분출되자 학생 통일운동 세력들은 주춤하였다. 민자통은 1961년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남북 학생회담 개최를 지지하고,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5.16 쿠데타가 발생하여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4월혁명 제1선언문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력사의 조류에 자 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 한 박토에 뿌리려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 한 명령으로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 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 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간은 자 유이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 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 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은 료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전역은 바야흐로 풍성해 가 고 있는 것이다. …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 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 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 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구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 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1960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 일동
이승만은 정권유지의 대가가 무엇이든지간에 쉽사리 정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며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전연 그것을 내놓으려고 들지 않을지도 모른 다. 최소한도로 그 초기에는 약간의 조절이 필요하고 그 과도기에는 어느 정도의 지도가 필요할지 모른다. 현재 불법화되어 있는 진보당 등의 집단 으로 되어 있는 좌익은 아직 비교적 약하다. 이것은 아직도 뿌리깊은 한국 의 보수주의, 한국전쟁이 좌익에게 미친 충격, 정부의 억압정책 등 여러가 지 요인에 기인한다. 그러나 좌익은 언제나 약세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 다. 젊은 세대는 차차 반발적으로 나타나며 나이 많은 층 안에 있어서도 상당한 사회정치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만일 정당정부가 완전히 실 패하면 언제나 한번은 군사지배가 출현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다"
(3) 5․16군사쿠데타
한국 군부는 한국현대사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4·3사건과 여순사건, 6·25전 쟁, 민간인학살, 부산정치파동, 베트남 파병, 계엄령과 위수령 등의 주요 사건의 길목 마다 한국 군부가 있었다. 6․25전쟁기의 ‘공산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평가받지만, 6․25전쟁 전후한 시기의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 군의 정치적 중립과 정 치적 개입의 사이에서 결국 정치에 참여한 뒤부터 정치를 농단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 다. 6․25전쟁 이후 군부는 부정부패와 연루되어 자유당 정치자금의 파이프라인이 되 기도 하고, 때로는 군대 내 파벌간의 대립과 정군유착으로 인해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도 했다. 1961년 이후 정권은 군을 정치적 목적에서 동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군의 창설은 일본군으로부터 뿌리하고 있다. 일제시기 일제에 충성했던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 한국군의 지휘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본군의 특 징이 청산되지 않은 채 일본군의 문화가 남아 있었다. 일본군은 구타와 기합이 많았고 무기의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려고 정신무장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일본군의 특징 은 해방 후 고스란히 한국군의 넘겨졌다. 게다가 일본군, 그 중에서도 만주군 출신들은 일제 말기 군부의 정치 개입을 목격하면서 총력전을 몸으로 알아갔던 세대였다. 5·16 주역들 중에서 만주군 출신(박정희, 이주일, 김동하, 김윤근, 김윤근, 윤태일)들이 많았 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또 6․25전쟁 이후 일부 정치군인들은 정권의 친위부대 노 릇을 하며 정치에 개입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특무부대와 헌병총사령부가 있었다. 이들 외에도 과거 친일 경찰 출신이면서 군에 입대한 이익흥과 노덕술이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군대가 한강 다리를 건넜다. 단순히 훈련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통일운동과 장면정권 의 무능 때문에 은연자중하다 병영을 벗어났다고 했으나 그것은 이유가 아니었다.
전쟁을 겪은 뒤 한국군은 양적 팽창과 조직 재편을 달성하였고, 동시에 미국의 지원 과 지휘 아래 질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미국은 1954년 11월 17일에 체결된 한미상호 방위조약에 의거 대한군사원조를 실시하였다. 미국은 대한군사원조를 실시하며 군인들 을 미국에 유학 보냈으며, 이들을 통해 짧은 기간에 미국의 군사제도를 한국군에 이식 시켰다. 한국군 장교들의 도미 유학은 계속 확대되어 1960년까지 만여 명 넘게 유학을 다녀왔다. 한국군은 1950년대에 다른 어느 사회집단에 비해 선진문물을 많이 접하며 수용한 근대화된 집단이 되었다.
미국은 한국군의 인사에 대해서도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60년 4․19 직후 군부에서는 정군(整軍)운동이 일어났다. 정군운동은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저질러졌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는 과거사 청산운동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계속 쌓여온 진급적체 의 불만을 품고 있었던 하급 장교들이 이승만 정권과 밀착된 상급 장교들의 퇴임을 요 구하는 것이었다. 하급 장교들은 ‘중장급 이상의 장교’들의 퇴진을 요구하였고, 미국은 정군 문제에 대해서 유능한 장성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강제로 예비역에 편입시켜 한국 군 통솔에 지창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 은 미국의 입장은 ‘내정간섭’이며 정군문제는 한국군이 밟아야 할 ‘당연한 고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휘 수사권을 발동하여 강력한 정군을 전개하겠다는 방침을 표하였다.
결국 송요찬․최영희 등이 육군 참모총장의 직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미국의 요구대 로 정군이 진행되었고, 그리하여 제2군사령관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장 도영은 군대 내에서 ‘이기붕의 양자’로 알려진 인물로 직접적인 정군 대상자로 지목되었 으나 미국의 반대로 예편되기 전에 구제되어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하였다. 강력한 정 군 방침을 표명했던 최경록은 육군 참모총장에서 제2군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전쟁과 휴전을 겪으며 10만에서 60만으로 늘어난 군은 그 힘을 바탕으로 정권을 뒤 엎은 것이었다. 원래부터 정치지향적인 군인들이 군 내부의 인사적체가 쌓이며 육사 5 기와 8기 출신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이승만 정권은 사찰기구와 파벌을 조장하며 군부 를 적절하게 통제하였으나 장면 정권은 민간 출신 국붕장관이 들어서며 군부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4월 혁명기에 김종필·길재호 김형욱 등 육사 8기생들은 정군(整軍) 을 주장하던 도중 1960년 9월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통해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쿠데 타 주도세력들은 1961년 4.19를 거사일로 예정하였으나 한국사회가 안정을 찾아가자 5월로 연기한 뒤 16일에 쿠데타를 실행하였다.
5월 16일 새벽 해병대와 공수특전단이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들어와 방송국, 치 안국 및 국가 기간시설을 점거하였다. 4시 30분 중앙방송국에서는 군이 혁명을 일으켰 다는 방송이 나왔다. 뒤이어 육군본부에서 삼군 참모총장과 쿠데타 주도세력과의 협상
을 통해 군 전체가 합류하고 장면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윤보선 대통령은 5월 16일 아 침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가 발발하자 혜화동 가 톨릭 수도원으로 피신해 미 대사관과 연락하다 18일 오후 중앙청에 나타났다. 그는 구 금된 국무위원들과 함께 5월 16일 선포된 비상계엄을 추인하고 사퇴하였다. 미국은 처 음 주한미사령관 맥그루더와 주한미대사 대리 그린은 장면 정부의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케네디 정부는 관망하는 입장에서 쿠데타 지지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5월 16일 쿠데타 주도세력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 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을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 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며, 그 목표로 ‘① 반공체 제의 재정비 강화, ② 유엔헌장 준수와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 ③ 사회악 일소와 청신한 기풍의 진작, ④ 민생고의 시급한 해결과 자주경제재건, ⑤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 ⑥ 민정이양’을 이른바 ‘혁명공약’으로 제시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로 개칭)를 구성해 모든 기구와 권한을 장악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입법·사법·행정권을 장악하고, 7개의 분과위원 회와 중앙정보부, 재건국민운동본부, 수도방위사령부, 감사원 등을 통괄하였다. 또 각 도지사와 경찰을 장악하였다.
쿠데타 주도세력은 쿠데타 이후 군부를 재편하였다. 기존의 군부 상층 집단과 북한 출신 인맥을 제거한 뒤 쿠데타세력을 중심으로 재편하였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모든 정보 독점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제3공화국은 ‘정보정치’와 ‘공작정치’를 통해 권력 기반 구축하였다. 또 미국 유학파 기술 관료를 기반삼아 경제기획원을 조직하였는데, 경제기 획원은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기구였다. 군사정부는 장면정권의 계승하는 한편, 내자(內資)를 동원한 경제개발을 목표하였으나 통화개혁이 실패함으로써 결과적 으로 외자(外資)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로 선회하였다.
군사정부는 사회악 제거와 창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는 목표 아래, 폭력불량배의 근 절로 사회의 명랑화를 기한다며 총 87,487명을 검거하여 총 1,243명을 검찰과 사법기 관에 송치하고, 18,055명을 즉심에 3,246명을 국토건설사업장에 취역시켰다. 또 1961년 5월 22일 최고회의 포고 6호를 발포하여 구호․학술․종교단체와 기타 최고 회의에서 허가하는 단체를 제외한 모든 정당․사회단체를 5월 31일부로 해산시켰다.
1962년 3월 16일 군정은 구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제한하는 법률인 ‘정치활동정화법’
을 만들었다. 이 법안이 통과되자 대통령 윤보선은 3월 22일 하야 성명 발표와 고별회 견을 가졌다. 그는 ‘정치활동정화법이 국민의 인화와 단결에 금이 가지 않을까 우려된 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의 하야는 3월 24일 최고회의에서 통과되고 이날부터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수행하였다. 4,374명이 이 법에 의거, 정치활동의 제한을 받았 다. 이들 중 2,598명이 심판을 청구하여 1,336명이 적격 판정을 받았으며, 1963년 2 월 27일 3,000이 해금되었다. 언론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였다. 군정은 ‘구정권하에서
의 언론의 공기성을 망각한 방종과 난맥상을 숙정(肅正)한’다며 총 1,170개의 언론기 관을 대폭 정비하고 1961년 9월 12일 언론기관의 자율적 정화와 숙적을 목적으로 하 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를 창립하였다.
군정은 ‘인간개조와 경제재건의 과업을 성취함에 있어서 국민의 자율적인 참여와 각 성을 촉구하고 국민 한 사람이 혁명의 주체의식을 갖고 역사적인 국민혁명을 전개함으 로써 새로운 역사적 창건의 첩경을 마련한다.’며 재건국민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강 상욱이 산파역을 담당하였다. 1961년 6월 10일 최고회의는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 을 통과시키고 본부장에 유진오(유달영→이관구)를 임명하였다. 1961년 6월 12일 서 울운동장에서 열린 재건국민운동전국촉진대회를 시작으로 7월 3일까지 각도 지부별 촉 진대회를 마쳤다. 1963년 12월까지 11개 시도지부와 189개의 시군구 지부, 2,759개 의 읍면동 재건위윈회와 25,316개의 리동통 재건위원회를 두었으며 375,787명의 각 급 위원을 두었다. 재건국민운동이 관 주도로 실시되자 이 운동이 전체주의 운동이라는 비판과, 관제냐 민제냐는 논란을 비롯해 특정 정치 세력의 도구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 였다.
1963년 민정이양을 앞두고 그전부터 중앙정보부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 것을 준비하 고 있었고, 사전에 당원들을 모집하여 교육을 시켜 조직을 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 앙정보부의 ‘4대의혹사건’이 터지고 반김종필계에서 집단 반발하였다. 결국 김종필은 일 시 외유를 떠나는 것으로 봉합되었고, 중앙정보부가 기획한 헌법이 최고회의를 통과하 고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새 헌법은 대통령중심제로 환원되었으며 대통령이 국회 동 의도 없이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을 임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령한 권한을 가졌다.
정부는 9월 5일 제5대 대통령 선거를 10월 15일로 공고했다. 9월 15일 마감된 대 통령후보의 등록자는 총 7명이었다.1) 제5대 대통령 선거는 5․16군사쿠데타와 군정 평가의 의미를 띤 선거였다. 공화당의 박정희는 ‘혁명과업의 완수’를 외쳤고, 야당은 이 에 대한 비판에 맞춰졌다.2)
그런데 자유민주당의 후보와 최고위원이던 송요찬과 김재춘에 대한 압력이 가해졌다.
송요찬은 8월 11일 ‘살인 및 살인교사죄혐위와 허위사실유포혐의’로 구속되고, 김재춘 은 9월 7일 외유를 떠났다. 이 사건은 야당의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9월 20일 야 당 연합의 공명선거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3)
제5대 대통령 선거전에서는 군정 평가와 사상논쟁이 벌어졌다. 9월 23일 민정당의 1)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민정당의 윤보선, 국민의당 허정, 자유민주당 송요찬, 정민회 변
영태, 추풍회 오재영, 신흥당 장리석 등이었다.
2) 신정당 - 새사람이 나왔다. / 자유민주당 - 다 죽겠다. 갈아치라. / 민주공화당 - 새일 꾼 바로뽑아 황소같이 부려보자. / 추풍회 - 배고파 못살겠다. 죽기전에 살길 찾자. / 민 정당 - 군정으로 병든 나라 민정으로 바로잡자. / 국민의당 - 총칼로 망친 살림 내 한표 로 바로잡자. 총칼정치 때려잡자. / 정민회 - 바른사람 바로뽑아 나라일 바로잡자.
3) 그전에 군정연장 반대와 민정복귀의 조속관철을 위해 35개의 정당 사회단체가 모여 4 월 22일 ‘군정연장반대전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한 적이 있었다.
전남 순천 유세에서 찬조 연사 윤제술은 “이곳은 여순반란사건이란 핏자국이 묻은 곳이 다. 그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이 죽었느냐 살았느냐? 살았다면 대한민국에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여러분은 아는가 모르는가?”라며 사상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다음날 민정당의 대통령후보 윤보선은 전주 유세에서 “정부안에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있는 듯 하다.”며 사상논쟁을 전개했다. 최고회의는 윤보선을 허위사실유포와 후보자 비방죄로 고소하였다. 박정희는 “이번 선거는 구악에 젖은 사대주의적인 구 정치세력과 새로운 기풍을 이룩하려는 신진세력과의 싸움이라.”며 이념논쟁을 일으킨 것은 ‘관제 빨 갱이’로 몰아치던 한민당 수법의 재연“이라고 했다. 10월 15일 치러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박정희는 2위인 윤보선을 15만여 표 차로 따돌리고 당선되었다. 1963년 11월 26일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의 쟁점은 정국 안정이냐 견제냐에 있었다. 공화당에 서는 안정 세력을 구축해야만 정국 안정을 기할 수 있고 강력한 경제정책을 수행해 경 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당의장 윤치영은 야당의 지도자들 전부가 지난날 이승 만 정권 아래에서 고위직을 담당했던 사람들로서 오늘날 새로운 정책이 있을 수 없다고 비난하였다.4) 야당은 공화당의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야당 국회를 만들어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은 총 175석 중 110명(전국 구 22명과 지역구 88명)의 당선자를 냈다. 총 110명의 공화당 의원들 중에서 두드러 진 특징 중의 하나는 군 출신의 인사들이 대거 당선됨으로써 군정이 민정으로 전환하였 다.
1963년 12월 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해체되고 다음날 제5대 대통령 취임식이 치 러지면서 제3공화국은 공식 출범했다. 이렇듯 출범한 제3공화국은 이전의 이승만 정부 나 장면 정부와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군부가 정권 창출 및 유지의 기반인 까닭에 군 대식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박정희는 군대식 지배를 민간 통제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다. 민주공화당은 당 총재 박 정희의 지시(명령)에 복종하는 또 다른 군대였다. 총재의 명령에 따라 원내에서 일사분 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게 집권 여당의 초라한 단상이었다. 간혹 같은 반발이 생기면 박 정희 대통령은 이것을 군대의 ‘항명’과 같이 취급하였다. 여당 의원일지라도 중앙정보부 에 의해 고문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명령을 따르는 복종의 강요’와 물리적 억압은 야당과 국민들에게는 강도 높게 적용되 었다. “정부 정책에 비판을 하고 반대를 하면 이것을 적대시 하고 증오하고 그리하여 국회를 무력화 시키고 정보정치로 국민을 협박하고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학원에 침입 하고 이러한 군사통치 방식에 급급하고” 있다는 지적처럼5) 군대식 통솔방식이 똑같이 재현했다. 사상계의 폐간 및 장준하 암살과, 김대중과 최종길에 대한 납치 및 살해, 그
4) 윤치영, 민정으로 가는 길 1963, 문선각, 426쪽.
5)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의 학원사태 등에 관한 정무보고(질의) 중 신민당 김대중 의원의 발언. 제 8대 국회 제78회 국회회의록 제21호 1971. 10. 23.
리고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 등 각종 조직사건이 조작되었다.
역대 정권 중 박정희 정권만큼 군대를 ‘치안확보’를 위해 자주 동원한 경우도 드물다.
5․16쿠데타와 ‘6․3사태’, ‘10월 유신’과 1979년 10월 18일 부산 일대 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외에도 1965년 4월 19일과 8월 26일, 1971년 10월 15일에는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특히, 학생들의 저항이 강력해 질 때마다 발동했던 ‘위수령’은 모 법(母法)조차 없었던 ‘유령법’이었다. 헌법에는 ‘위수령’ 관련 조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위수령’을 발동하여 학원을 점령하였다.
군사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규범과 형식에 따른 획일화의 강요이다. 군대는 똑같은 색깔의 군복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한다. 이 같은 군대의 규범과 형식은 사 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1973년 2월 8일 개정된 ‘경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이 공포되었다. 다음날 치안국은 전국 경찰에 총 11개항의 단속 규정을 내렸다. 이중 에는 장발과 과다노출 및 미풍양속을 해치는 복장 등이 포함되었다.6)
박정희 정권은 경제발전도 군대식으로 추진하였다. 경제개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군 대를 동원하였다. 국토개발사업의 공사현장에 군대의 인력과 장비가 동원되었다. 1970 년대 중반까지 군대가 민간 건설 업체 보다 3배나 많은 건설장비와 5배의 기술인력을 보유하였다. 1960년대 군대는 국토개발사업에 집중 투입되었다. 특히 국토개발사업 등 에 병역기피자들을 동원하거나 도로건설의 어려운 구간에는 군대가 동원되었다. 또 군 대에서 배운 기술력은 제대 후의 사회활동에도 이어졌다.
군사문화가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경제개발의 방식에서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 대 중반까지 ‘조국근대화와 경제 자립’을 정책으로 내세웠다. 전투를 치르는 군대처럼 물러섬 없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성장 위주의 경제개발만을 추구하 였다. 그 결과는 ‘전태일 분신’, ‘와우아파트 붕괴’ 및 ‘광주대단지사건’과 같이 국민들에 게 죽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성장을 추구하는 정책 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일하며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는’ 군인이 되기를 국민들에 게 강요하였다.
박정희 정권기 군사문화의 가장 큰 유산은 폭력을 숭상하는 ‘군사주의’였다. ‘군사주 의’는 박정희 정권이 1960년대 후반 비상시국을 강조하며 만들었던 ‘향토예비군’과 ‘교 련’을 통하여 일상생활에 파고들었다. 이 과정에서 군대는 이러한 준군사조직을 지휘 훈련시켰고, 자연 군대의 교리가 민간 사회의 영역에 전파되었다. 이외에도 박정희 정 권은 민간사회에 ‘멸공’과 ‘국가주의’ 및 맹목적인 ‘애국애족’, 국가(원수)에 대한 충성 등을 강요하였다. 민족중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의 실정에 맞는 민주주의가 필요하 다며 국민들에게 국가(대통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였다. 전통문화의 계승이 라는 이름아래 충효이데올기의 강조하고, 반공이념에 기반한 자주국방론을 뒷받침할 국 6) 이외에도 쓰레기 투기행위, 타인에 대한 술주정, 단속 장소 등에 대한 규정이 있다. 경
향신문 1973. 2. 9.
수주의를 고창시켰다.
(4) 한일 국교정상화와 베트남전 참전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거리에 반비례에 할 만큼 많은 거리가 멀었다. 오랜 역사만큼 이나 교류와 협력이 있었으나 1910년 이후 식민지배 36년은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 에도 계속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는 해체되고 이 땅의 지 배자들은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일본과 만난 것은 1949년부터였다. 1949년 1월 한일간의 현안을 타결하기 위해 주일대표부가 설치되고 1950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아시아에서 반공전선의 구축을 역설하였다.
1951년 10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직후 미국의 주선 아래 제1차한일회담이 시작되었다. 1952년 2월 15일 시작된 제1차회담은 일본 수석대표 구보다 밍언,평화 선 문제,독도 문제,배상·보상과 재산청구권 문제 등으로 타결되지 못한 채 4월 25일 막을 내렸다. 그 뒤로도 이승만 정권기에 2, 3, 4차 회담이 열렸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숭만 정권이 붕괴하자 한일관계는 새로운 돌파구가 열렸다.
미국은 기시 일본수상이 야당·학생 등의 강력한 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1960년 5월 미․일신안보조약, 신행정협정을 타결하며 미-일동맹관계가 강화되자 한․일 국교 정상 화를 더욱 압박하였다. 장면 정부는 출범하면서부터 경제제일주의의 방안으로 한일 관 계개선에 적극적이고, 일본도 비슷하여 장면 총리가 취임하기 전부터 일본 고사카 외상 이 방한하였다. 1961년 봄 일본 자민당 의원단이 방한하자 한일관계의 낙관적 전망이 나왔으나 5․16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일본은 박정희 정권의 출현을 환영하였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를 나온 인물이라는 판단 때문이지만,군사정권이 한일국교정상화에 쉬울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지지부진한 한일회담을 타결하기 위해 1962년 10과 11월에 김 종필을 특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김종필은 오히라 외상과 막후회담을 진행하였다. 김 종필은 청구권에서 무상 3억 달러,유상 2억 달러,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일단 메모를 교환하였는데,일본은 이 자금을 독립축하금으로 주겠다고 밝혔다.
한․일회담은 1964년 봄에 급속히 추진되었다. 미국은 한․일국교정상화를 강력하게 압박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3월까지 타결 짓겠다며 김종필을 다시 일본에 보내자 범국민적 반대투쟁이 일어났다.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운동은 1964년 3월경부터 시작되었다. 정부는 1964년 들어 ‘3 월 타결-4월 조인-5월 비준’의 방침을 정하였는데, 이에 대해 야당 및 국민들은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야권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결성하였는데, 여기에
는 김재준(목사), 김재춘․김홍일․박병권․송요찬․손원일(군 출신)과 야당 및 재야 인사 등이 참여하였다.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의 화 형식(일본 수상 이케다(池田)와 이완용의 인형)’을 거행하고 “민족반역적 한일회담의 즉 각 중지”를 요구하며 가두시위을 벌였고, 고등학생들은 한일회담의 배후로 미국을 지목 하며 주한미대사관 앞에서 시위하였다(3․24시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민족 적민주주의장례식’을 거행하여 한일협정과 박정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5월 30일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항의하는 단식이 시작되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정점은 6월 3일이었다. 이날 서울 시내에서 시위대 1만 여명이 광화문 진출하였는데, 4월혁명 이후 최대 규모로 시민들이 모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밤 8시를 기해 서 울시 일원에 비상계엄 선포하고 시위진압에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날 1,200여 명의 학 생과 시민들이 체포, 이중 384명을 구속시켰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미 국도 군대를 동원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비상계엄령은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언론, 출판, 보도는 계엄사의 사전 검열하는 것을 규정하였는데, 이날의 군대 동원 군의 정치 적 동원의 시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중앙정보부는 8월 14일 ‘인민혁명당’사건을 발 표하고 국가보안법으로 이들을 검찰에 넘겼으나 검사들이 반발하며 불기소하였으나 다 시 기소했으나 법원에서도 기각시켰다. 정부는 다시 구속영장 신청하였으나 재판 과정 에서 고문이 폭로되었고, 결국 14명은 공소 취하, 12명은 공소장을 변경(국가보안법에 서 반공법)하였다. 1965년 1월 20일 1심 선고에서 2명만 유죄였으나 5월 29일의 항 소심에서 전원 유죄가 선고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한일국교정상화틀 타결지었다. 일본에서 새로 사또 내각이 등장한 1964년 12월 한일회담이 다시 열려, 다음해 2월 20일 한일 기본조약이 가조인되고, 3월에는 청구권 자금을 무상공여 3억 달러,유상공여 3억 달 러,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로 합의하였다.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일본외상이 한일기본조약에 조인하고, 30여 개의 협정 및 부속문서에 사인하였 다. 한일협정에서 한․일국교정상화의 전제가 돼야 하는 과거사 사죄 문제는 제대로 처 리되지 않았다.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을 때 이 외 무장관이 “과거의 어느 기간에 양 국민에게 불행한 관계가 존재”했다고 밝히고 일본의 시이나가 유감이며 깊이 반성하 고 있다는 정도에서 타결되었다. 청구권은 강제연행 등에 대한 명확한 일본의 책임이 생략된 채 한국의 경제발전에 쓰라고 일본이 소위 독립축하금으로 무상공여한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민간인의 강제연행에 대한 일본의 책임회피인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자 대학과 고교에서 4월초부터 성토대회와 시위가 잇달았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대학과 서울에 조기방학을 실시하였다. 7월 초 개신 교 목사 1백여 명이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을 벌였고,7월 중순에는 재경 대학교수 354명과 김홍일·김재춘·박병권·송요찬 등 예비역 장성 11명이 한·일협정에 반대하였 다. 7월 말에는 대학교수단·예비역 장성·종교언·법조인·문인·여성계 등각계 인사 3백여
명이 조국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윤보선 등 야당 의원들은 탈당계를 제출하고 야당 해체를 주장하였다. 야당인 민중당 의원들은 의원 사퇴서를 제출한 다음날인 8월 13일 공화당은 단독으로 베트남 파병안을 통과시키고 14일에는 역시 공화당 단독으로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베트남공화국(남 베트남)으로 분단되었으나 1956년 남북 통일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지만, 남베트 남 정부는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고 통일선거를 거부하였다. 남베트남에서는 이에 반대 하는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고, 게릴라 전술로 정부군과의 교전이 계속되었다. 미국이 군사원조, 특수부대 파견, 경제원조를 실시하였지만, 민족해방전선의 활동은 더욱 적극 화되었다.
미국은 1963년 남베트남 정부가 쿠데타에 의해서 교체되자,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 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직접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듬해에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다.
미국은 보다 많은 국기(more flag) 정책을 실시하며 동맹국들에게 베트남 전쟁 에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들이 베트남전 참전을 반대하는 가운데 한국과 태국, 필리핀,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만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참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한국군은 가장 많은 수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1963년 말 미국은 한국 정부에 한국군의 파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고, 1964년 9 월 22일 제1차 파병단(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교관단)을 시작으로 1973년 3월 23 일 주월 한국군 후발대 철수 완료까지 베트남을 지원하였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은 총 2 억 3556만 달러 중 1억 9511만 달러(82. 8%)를 국내로 송금하였고, 이것은 경부고 속도로 건설 등의 재원으로 사용되었다. 또 군수물자를 납품(예 : 김치와 통조림)하거 나 베트남애 진출하는 것으로 민간 기업이 활발하게 진출하였다. (예 : 현대와 한진 등), 또 이전까지 M-1소총에서 베트남 참전을 계기로 M-16소총으로 바뀌게 된 것에 서처럼 국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맹호부대․백마부대․청룡부 대 등의 전투부대와 십자성부대(100군수사령부)와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 등의 지원 부대 및 백구부대(해군수송전단)과 은마부대(공군지원단)의 수송부대로 구성되었다.
1965년 2월 본격적으로 후방지원부대 2,000명을 파병한 것을 시작으로, 이해 7월에 는 2만 명 규모의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건으로 2 만 명 규모의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되었다.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한 총인원은 5만 5,000여 명이며, 이 숫자는 나머지 태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등의 동맹국이 파견 한 인원을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한국은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견할 것을 미 국에 요청하였고,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케네 디 대통령에게 베트남에 파병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군대를 파견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박정희 의장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정희는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면서, 우리가 파병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이 베트 남으로 갈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또 베트남 전쟁 특수를 통해서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자본을 얻는 것 역시 중요한 목적의 하나였다. 브라운 각서는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중요한 문서이다. 이 각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조건으로 주한미국 대사였던 브라운이 한국 정부에 전달한 14개 항의 문서였다.
1. 추가파병에 따른 비용은 미국 정부가 부담한다.
2. 한국군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를 현대화한다.
3. 베트남 주둔 한국군을 위한 물자와 용역은 가급적 한국에서 조달한다.
4. 베트남에서 실시되는 각종 건설, 구호 등 제반 사업에 한국인 업자들을 참여시킨 다.
5. 미국은 한국에 추가로 AID 차관과 군사원조를 제공한다.
6. 베트남과 동남아시아로의 수출증대를 가능케 할 차관을 추가로 대여한다.
7. 경제개발계획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한 신규차관을 제공한다.
8. 한국이 탄약생산을 늘리는데 필요한 자재를 제공한다.
한국군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함으로써 베트남 특수를 얻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한 국군의 파견 비용 뿐 아니라 민간인들에 대한 비용도 포함한다. 1966년에 베트남에서 국내로 송금된 외화는 총 6,949만 달러에 이르렀다. 1967년의 수출액이 3억 2,000만 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966년 전체 수출액의 25%를 넘는 금액이었다. 1966 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의 송금 총액은 6억 2,502만 달러에 달하였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의 수출 총액은 22억 달러였다.
브라운 각서에는 베트남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수출을 늘릴 수 있는 차관을 제공한다 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동시에 정부는 1965년부터 수출 진흥 확대회의를 개최하며, 수 출에 대한 특혜지원을 확대하였다.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1967년 부터 1970년까지의 수출은 매년 40% 이상의 초고속 성장하였다.
베트남 전쟁의 참전은 노동집약적 공업제품에서 중화학, 건설 산업으로 나아가는 전 환점을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한국은 군수산업에 진출할 수 있었다. 또 베트남 지역의 건설 산업에 참여함으로써 해당 분야의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곧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의 진흥에 기여하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베트남전쟁은 부정적인 면도 남겼다. 무엇보다 국가의 위신 문제이다. 베트남 전쟁 참전은 곧 ‘미국의 용병’이라는 오명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 다. 미국과 함께 참전한 국가들이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한국군의 파견비를 미국이 모 두 부담했다는 점은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편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였다. 그로 인해 베트남 민족에 한국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반면 베트남전쟁의 참가자들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등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다. 또 고엽제로 인한 피해는 유전되어 심각한 육체 적 고통을 주고 있다. 고엽제는 미군이 정글 전투를 쉽게 하려 나무 잎을 모두 말라 죽 이는 화학약품으로 인체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인들은 고 엽제로 인한 피해에 대해 보상을 받았지만, 한국인은 지금까지도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 루어지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참전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보상할 의 무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한국 정부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 고 있다.
대기업의 베트남 진출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진빌딩 노동자 난입 사건이다. 한진해운은 베트남에 진출하여 운송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한진해운이 노동 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자, 1971년 9월 15일 이들이 임금 지불을 요구하 면서 한진 빌딩을 점거하였다. 노동자들의 점거는 1966년 5월 이후 149억 원에 달하 는 임금이 체불된 사실에 항의하기 위해서였지만, 한진빌딩 방화에 이은 66명의 노동 자들이 구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베트남 전쟁은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 을 하면서 북한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전개하였 다. 1968년에 북한은 제2전을 목적으로 많은 군사적 도발과 충돌이 발생하였다. 1월 21일 북한이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다음 날 북한은 미 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동해 상에서 억류하였다. 또 같은 해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울진․삼척 지역에 무장한 북한 게릴라들이 내려오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북 한은 3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 게릴라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 켜 군복․신사복․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펴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는 또 다른 군대와 같은 구조로 바뀌었다. 정부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주민등록 증을 만들며, 학교에서 학도호국단을 창설하고 교련을 실시하였다. 정부는 총력전체제 를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군인과 같이 생활하도록 강제하는 ‘병영국가’의 길을 선택하였 다.
김정남, 2004,『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태균, 2015, 『베트남전쟁』, 한겨레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