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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correlation of tourism development with conservation activities in the 1930s through the repair work on the main building of J angan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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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20.29.3.025

장안사 대웅전 보존 수리공사와 1930년대 금강산 개발 - 근대기 건축문화유산 보존과 관광지 개발의 영향관계 연구

A study on the correlation of tourism development with conservation activities in the 1930s through the repair work on the main building of Jangansa temple

서 효 원*1) Seo, Hyowon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analyze the correlation between conservation activities and the development of tourism in the modern period in the Korean peninsula. The main building of Jangansa Temple, located in Mt.

Geumgang, was repaired in the 1930s. During the repairs, the Japanese General-Government actively engaged in the development of Mt. Geumgang and raised funds for the oper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through tourism revenue. The repair work was carried out under the influence of the Mt. Geumgang development project. And its influence is revealed by reviewing official documents recording repair work. This study tried to clarify the relationship between development and repair work through official documents.

주제어 : 일제강점기, 북한, 금강산, 장안사,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 관광, 개발, 건축문화유산, 보존, 국립공원계획 Keywords : Japanese colonial era, North Korea,

Geumgangsan

,

Jangansa Daeungjeon

, repair works, tourism, development, architectural heritage, conservation, national park

1. 서 론

근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각국은 근대국가로 나아가 기 위해 주력하였다. 근대국가로 거듭나려는 각국의 노력 속에서 문화유산은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 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다. 또 한, 국가 간 경쟁이 치열했던 근대기 자국 문화의 우 수성을 선전하는 방편이기도 했다.1) 따라서 근대국가 들은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은 조 사·지정·수리라는 세 가지 절차로 제도화되었다.2)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이 논문은 2019년도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재원으로 통일기 반구축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결과물임.

1) 근대국가 탄생기에 형성된 문화유산 개념과 의미에 대해서는 앙 드레 샤스텔, 장 피에르 바블롱, 김예경 역, 『문화재의 개념(La Notion De Patrimoine)』, 아모르문디, 2016을 참고.

2) 일제강점기 건축문화유산 보존제도의 흐름에 대해서는 서효원,

이러한 흐름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던 근대 한반도 에서도 이어졌다. 일제는 1916년 「고적급유물보존규 칙」을 제정하여 식민지 한반도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3년 제정된 「조선보물고적명 승천연기념물보존령」(이하 보존령)을 통해 조사·지정·

수리라는 보존 활동 절차를 제도화하였다. 특히 「보 존령」은 그동안 모호하게 보존해오던 개별 건축문화 유산을 법적 보호 체제 아래 명확하게 둔 법령이었 다.3) 이후 개별 건축문화유산이 “보물”로 지정되기 시 작하였고, 지정된 보물건조물을 보존하기 위한 수리공 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4)

「일제강점기 보물건조물 수리공사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18, 2장을 참고.

3) 일제강점기 건축문화유산 보존제도의 흐름에 대해서는 서효원,

「일제강점기 보물건조물 수리공사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32쪽

4) 1930년대 건조물 수리공사가 적극성을 띠는 경향은 사찰 건축 수 리공사 보조금 지출을 기록한 「고적보존보조비대장」을 통해 확인할

(2)

당시 보물건조물 보존에 대한 일제의 적극성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이 시기에는 동화정책이 본 격적으로 시행되어 조선과 일본이 하나라는 논리가 사 회 전반에 퍼졌고, 한반도의 문화유산일지라도 보물로 선택된 문화유산을 통해 일제의 우수함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인식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한반도 문화 에 대한 일제의 평가가 우호적으로 선회하였고, 문화 유산 보호에도 적극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5)

또한, 이 시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관광산업 육성 정책 역시 건축문화유산 수리공사가 적극적으로 이루 어진 요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재정난에 시달 린 조선총독부는 관광산업 육성을 통해 자금난을 해소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식민통치가 안정기에 접 어든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전역에 보급된 철도망을 따라 이름난 관광지에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 한 개발과 정비를 적극적으로 시행해 나갔다.6)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건축문화유산 보존 활동과 관 광지 개발의 관계를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를 통해 조 명하고자 하였다.7) 장안사는 한반도 최고 명승으로 꼽 혔던 금강산에 자리 잡은 사찰이었고, 장안사 대웅전은 금강산 개발에 적극적이었던 1930년대에 총독부 보조를 받아 수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금강산 개발과 대웅전 수리공사의 관계를 살펴보기에 적합한 대상이다.

논문에서는 먼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까지 급물살을 탄 금강산 개발 경과와 이 시기에 시행된 장 안사 대웅전 수리공사 경과를 정리하였다. 두 경과가 드러내는 시기적 밀접성을 통해 개발사업과 수리공사 가 서로 영향 관계에 있음을 밝혔다. 나아가 드러난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수리공사 기록문서를 검토하였 다. 수리공사 청원서와 자문 의견서, 사양설계서, 설계

수 있다. 1931년 이전 보조금이 지출된 수리공사는 8건(1914년∼1930 년)뿐이지만 31년 이후(1931년∼1942년)에는 30건으로 3배 이상 증가 하였다. 서효원, 「일제강점기 보물건조물 수리공사에 관한 연구」, 서 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67∼70쪽, 부록 6, 두 번째 장을 참고.

5) 이 시기 동화이데올로기의 정착과 한반도 문화유산의 위상변화 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효원, 「일제강점기 보물건조물 수리공사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98∼105쪽을 참고.

6) 대표적인 관광지의 볼거리는 사찰 건축물이었다. 사찰 소유 보물 건조물 수리공사는 철도가 지나는 지역에 계획되거나 시행된 사례 가 많았다. 서효원, 「일제강점기 보물건조물 수리공사에 관한 연 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98∼105쪽을 참고.

7) 본 논문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 번호 A087 「장안사 건물 보존시설 서류」중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 사 관련 공문 및 공문첨부문서 225매를 분석하였다. 장안사 사성전 수리공사 문서는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 호 A095-003, A121-002, A121-003 등으로 공문 및 공문첨부문서 230매가 공개 되었다.

변경 공문 등의 내용을 분석하였으며, 이를 통해 금강 산 관광 개발과 정비가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에 미 친 영향을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 금강산 관광 개발과 장안사의 위상변화

일제는 경제공황을 타개하고 지방경제를 부흥하고자 1910년대부터 국립공원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논의를 구체화하였다.8)「국립공원법」제정(1931)을 위해 내지 와 식민지 국립공원 후보지들에 대해 조사와 검토가 이루어졌고, 금강산 역시 후보지로 선정되었다. 당시 금강산은 이미 일본과 한반도에서 전통적인 명승으로 이름나 있었고, 철도를 이용한 근대 관광이 시작되자 곧 한반도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금강산 방면으로 놓인 철도는 1914년 완공된 경원선 이 처음이었다. 경원선을 이용한 금강산 관광 경로는 경성역에서 원산역까지 철도로 이동한 후, 원산항에서 동해안을 따라 배편으로 이동해, 장전항을 통해 차로 외금강에 도착하는 경로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해안 쪽에 있는 외금강에서 내륙 쪽에 있는 내금강 방면으 로 금강산 탐방 경로가 정해지게 되었다.9)

한편, 당시 국립공원 후보지 선정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타무라 츠요시10)(田村剛, 이하 타무라)는 1915 년 금강산을 방문한 뒤, 이듬해인 1916년 『대일본산 림회보』에 「금강산과 그 풍경개발책」을 게재하였 다.11) 이후 타무라는 금강산을 국립공원에 합당한 사 례로 꾸준히 언급하였고, 1920년 일본 내무성 위생국 의 촉탁으로 임명되어 국립공원 후보지를 조사하는 임 무를 맡게 되었을 때, 내지의 16개 후보지와 함께 금 강산을 국립공원 후보지로 추천하였다.12)

8) 성나연, 서효원, 전봉희, 「1930년대 금강산 국립공원 계획에 의 한 금강산 영역의 재편과 변천」, 『한국건축역사학회 2019년도 추 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19, 44쪽

9) 서효원, 「일제강점기 금강산 장안사 수리공사의 경과와 시행배 경」, 『한국건축역사학회 2019년도 춘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19, 90쪽

10) 타무라 츠요시(田村剛, 1890-1979) 도쿄제국대학 출신, 조원가, 조경 학자. 임학자. 일본의 국립공원, 해양공원 제도의 확립과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오카야마 현 출생. 국제 자연 보전 연맹 명예 회원. 일본 자연 보호 협회 초대 이사장, 일본 조경 학회 회장 등 요직을 다수 역임하였 다.(ja.wi kipedia.org, 2020.03.09. 검색)

11) 田村剛, 「金剛山と其風景開發策」, 大日本山林會報, 408, 1916, pp.10∼22 ; 성나연, 서효원, 전봉희, 「1930년대 금강산 국립공원 계 획에 의한 금강산 영역의 재편과 변천」, 『한국건축역사학회 2019 년도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19, 44쪽에서 재인용.

12) 水谷知生, 「大正記の16國立公園調査地と選定經過と田村剛の國 立公園觀」, 『ランドスケ-プ硏究』, 7, 2014, pp.67∼74 ; 성나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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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금강산 전기철도 노선도 및 개통일 타무라에 의해 금강산이 국립공원 후보지로 거론되

던 때, 금강산 관광은 금강산 전기철도 개설로 큰 변 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금강산 전기철도는 금강산전기 철도주식회사13)가 1919년 착공하여 1931년 준공한 철 도로 철원역에서 내금강역까지 부설된 철도였다.14) 원역은 경원선이 지나는 역이었으므로, 이 철도가 부 설되면서 경성과 금강산을 오가는 가장 빠른 경로가 만들어졌다.15) 기존 경원선을 이용해 원산을 거쳐 배 편으로 이동하는 경로는 금강산을 크게 우회하는 데다 가 금강산에 도착하는데 이틀 이상을 필요로 하였다.

금강산전기철도는 이 소요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는 데, 금강산을 방문하려는 관광객은 경성에서 토요일 저녁 기차를 이용하면 일요일 새벽에 내금강역에 도착 할 수 있었다.16) 금강산 관광객은 전기철도 부설과 함 께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17)

하지만 관광객 증가는 철도부설로 인한 금강산 영역 재편에 비하면 부수적인 변화였다. 철도부설 전까지 금강산 탐승의 중심거점은 외금강 영역의 온정리 한 효원, 전봉희, 「1930년대 금강산 국립공원 계획에 의한 금강산 영 역의 재편과 변천」, 『한국건축역사학회 2019년도 추계학술발표대 회 논문집』, 2019, 44쪽에서 재인용.

13) 일본의 정치인이자 토목기술자, 실업가인 쿠메 타미노스케(久米 民之助, 1861-1931)가 1919년 설립하였다. 그는 1918년 금강산을 시 찰하고 이듬해 회사를 설립하였다.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는 유 역 변경식 수력발전 시설 운영업과 철도 운수업을 겸업하는 회사였 다. 수력발전을 통해 생산한 전기는 전기철도 운행과, 철도 주변지 역 및 경성의 전등 전력 공급용을 판매되었다. 표준궤를 도입하여 철원과 내금강을 잇는 철로를 부설하여, 국철과 화물 직통 연락을 추진하였고, 창도 인근 지역에서 나는 유화철 등을 운송하였다. 주 말에는 경성과 내금강을 잇는 야간 직행열차를 운행하여 금강산 관 광객 유치에 주력하였다. 관광객의 편리를 위해 인근역과 금강산 관 광지를 연결하는 운수업과 숙박업을 겸하였다. 한편 수력발전은 북 한강 상류인 화천강의 수리권을 취득하여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한 유역변경발전방식을 도입하여 이루어졌다. 1924년 중대리 발전소, 1927년 판유리 발전소, 1928년 향천리 발전소, 1936년 신일리 발전 소를 시설하여 운영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 과사전』,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 항목의 내용을 정리.(

encyko rea.aks.ac.kr, 2020.03.09. 검색)

14) 동아일보, 1927.09.04. 4면,「금강산 순환 전철(金剛山循環電鐵)」

15) 경성에서 철도를 이용해 금강산을 가지 위해서는 경성역에서 용산역, 청량리역, 의정부역을 거쳐 철원역에 도착해 금강산전기철 도로 환승해야 했다. 청량리역에서 철원역까지 급행열차로는 2시간, 완행열차로는 3시간이 소요되었다. 철원역에서 내금강역까지는 급행 의 경우 3시간 43분, 완행의 경우 4시간 48분이 소요되었다. 김한태,

「금강산 전기철도(Ⅰ)」, 철도시설 71, 1999, pp.71~79(원두희,「일 제강점기 관광지와 관광행위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 위논문, 2011, 44쪽에서 재인용)

16) 일요일 관람을 마치고 저녁기차를 타면 월요일 새벽에 경성에 도착할 수 있었으므로 이론적으로 금강산을 무박 3일로 관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원두희,「일제강점기 관광지와 관광행위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45쪽

17) 원두희,「일제강점기 관광지와 관광행위 연구」, 한국교원대학 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31, 44쪽 참고.

곳이었다. 하지만, 철도가 내금강까지 연결되자 내금강 영역에 위치한 장안사 일대가 온정리와 더불어 금강산 탐승의 중심거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18) 내금강 영역 은 금강산 관광객의 주요 유입로가 되어, 외금강에 버 금가는 영역으로 변모하였다. 원래 관광 경로의 끝 지 점에 있던 장안사는 어느새 관광 경로의 시작 지점이 되었고, 장안사 앞으로는 호텔과 상점 등 상업 시설이 새롭게 들어섰다.19) 이로 인해 장안사는 금강산 관광 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심거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장안사가 중심거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무렵인 1927년, 고성군은 금강산 국립공원지정을 총독부에 청 원하였다.20) 이 시점은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가 철원과 창도를 잇는 구간을 개통하고, 창도역과 내금 강을 버스로 연계하여 본격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던

18) 성나연, 서효원, 전봉희, 「1930년대 금강산 국립공원 계획에 의 한 금강산 영역의 재편과 변천」, 『한국건축역사학회 2019년도 추 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19, 43∼46쪽

19) 장안사 인근이 개발되기 전에는 장안사 내 극락전을 숙박시설 로 사용하였다. 숙박시설 등 관광편의 시설 설치와 관련해서는 원두 희,「일제강점기 관광지와 관광행위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52∼55쪽을 참고.

20) 동아일보, 1927.07.04. 4면,「금강산(金剛山)을 국립공원(國立公 園)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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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장안사 지역 개발계획 기사와 장안사 일대가 묘사된 관광지도 때였다. 금강산 관광 사업은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

사의 수익과도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사 중역들 은 고성군의 청원에 호응하여 금강산 국립공원화에 주 력하였다. 고성군이 금강산 국립공원지정을 촉구한 1927년,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사는 조선총독부로부 터 국유지 5만 평을 불하받아 장안사 인근에 골프장, 경마장, 야구장 등의 위락시설 단지를 조성하는 계획 을 발표하였다.21)(그림2)

내금강 개발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철도 노선 이 내금강 바로 앞 말휘리까지 개통되자, 1930년 금강 산 탐승객은 4만 돌파를 바라보게 되었다.22) 관광수익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23)하였고, 1930년에는 총독부가 직접 나서 산림부, 철도국, 학무국을 중심으로「금강산 보승회」24)를 조직하여 금강산 국립공원계획을 추진하 21) 동아일보, 1927.08.06. 2면,「금강산(金剛山)을 세계낙원(世界樂 園)으로 제반시설(諸般施設)에 백만원 투자(百萬圓投資)」

22) 매일신보, 1930.02.21.「금강산 탐승객(金剛山探勝客) 신청답지(申請 遝至) 금년은 사만여명을 돌파할듯」

23) 원두희,「일제강점기 관광지와 관광행위 연구」, 한국교원대학 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46∼47쪽

24) 일제강점기 고적보존회나 고적보승회는 일반적으로 지역 문화유산 보호활동을 한 총독부 지원 민간단체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각종 사료의 공개로 지역 보승회 활동 내용이 상세하게 밝혀지면서, 그 활동이 보존활동 나아가 엽서, 팜플렛 제작 등 홍보 활동을 비롯해 유 적을 중심으로 한 공원건설, 수도·도로·배수로 정비, 기념탑비 건설, 여 관·매점·찻집·휴게소 건설과 같은 적극적인 정비 사업에까지 다양할 활

였다.25) 금강산보승회는 조직된 바로 그 해에 발 빠르 게 금강산 국립공원설계26)를 위한 조사를 타무라에게 의뢰하여 국립공원계획의 초안을 잡았다.27) 타무라는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금강산을 직접 조사하여 「금강 동을 한 단체로 조명되고 있다. 최석영(「식민지 시대 ‘고적보존회’와 지 방의 관광화-부여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아시아문화 18호, 2002)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부여고적보존회의 활동을 관광과 연결하였는데, 그 는 보존회 활동에 개입한 총독부의 적극성을 조명하고, 보존회 활동의 목적이 관광화를 통한 식민통치이념 전파에 있었음을 밝혔다. 한편, 평 양고적보존회의 활동을 고찰한 최혜정(「일제하 평양지역의 고적조사사 업과 고적보존회의 활동」, 부산대학교 석사논문, 2006)은 평양 지역 보 존회의 예산내역과 활동내용, 사업관계자 등을 살펴, 그 목적이 관광사 업의 일환으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 기하였다.(최혜정의 석사논문 32쪽)

금강산보승회는 설립 당시(1916년 8월 11일) 회원(會員)과 지지자(持志 者)의 기부금으로 운영된 단체로 금강산내 도로 수축, 탐승유람자 편의 도모, 금강산 내 숙박자 설비알선, 평강-말휘리 간 자동차 운전 등 대부 분 관광객 편의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 독부박물관 문서. 관리번호 A066-022-002). 1930년 총독부는 금강산보 승회를 학무국 등이 직접 참여하는 기구로 새롭게 발족시키고, 10년간 500만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동아일보, 1930.02.12. 각 주25의 기사). 이는 선행연구가 밝힌 총독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부여, 경주, 평양 등의 여타 보존회 활동과 같이 금강산보승회의 활동이 금강 산 지역의 관광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25) 동아일보, 1930.02.12. 2면,「세계(世界)의 절승(絕勝) 금강산(金剛山)- 경치와 사찰 보존에 주력」

26) 동아일보, 1929.07.11. 5면,「세계절승금강산(世界絕勝金剛山)에 국립 공원설계(國立公園設計)」

27)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관리번호 F171)에 타무라 박사의 조사보고서와 계획서가 남아 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금강산 보 승회의 네 번째 회의에서 의논되었다. 朝鮮鉄道協会会誌 9.9(1930): 25-26.

(5)

그림 3. 금강산 개발 경과와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 경과 산 조사보고서」28), 「금강산 탐승 계획안」29), 「금강 산 풍경 계획안」30) 등을 작성하였다.31) 그의 계획안 을 살펴보면, 장안사가 위치한 탑거리(塔巨里)가 중심 개발거점의 하나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곳에 관광객 유치를 위한 시설을 집중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렇게 발 빠르고, 거침없이 금강산 국립공원화 계 획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은 세입과 수입의 증대를 노 린 총독부가 민간 철도업계를 지원하여 진행 중이었던 위락단지 개발사업과 무관하지 않았다.32) 금강산 지역 에서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도 전에 몰려드는 관광 객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려는 총독부와 철도업계의 개 발사업이 먼저 수행되었다. 그 개발사업이 한창인 가 운데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가 시행되었다.

3. 대웅전 수리공사의 경과와 내금강 개발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는 고성군이 금강산 국립공 원화를 청원하고, 장안사 앞 위락단지 유치계획이 발 표된 1927년 결정되었다. 이후 수리 계획서에 해당하 는 사양설계서 작성을 위한 조사를 거쳐, 1928년 5월

28)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관리번호 F171-001 29)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관리번호 F171-002 30)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관리번호 F171-003 31) 이상의 문서 중 금강산조사보고서에만 타무라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32) 각주 20의 기사 참고

공사를 시작하였고, 1932년 2월 준공되었다.33) 구체적 인 수리공사 경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장안사 대웅전 수리는 1926년 8월 1일 장안사 주지 현의룡(玄懿龍)에 의해 청원 되었다.34) 이에 따라, 수 리비 산정을 위한 학무국 기수 오가와 케이키치(小川 敬吉)의 출장35)이 그해 9월에 이루어졌다. 11월 3일 대웅전 상층 지붕 부연 13개소가 자연 탈락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다시 한번 청원36)이 접수되었다.37) 조선 총독부는 1926년 12월 6일 학무국을 통해 장안사로 보 낸 지령38)에서 수리계획서 작성을 위한 보조금 지급을 결정39)하였다. 오가와는 조사와 계획서 작성을 맡아, 수리비 총 4,244원 45전을 책정하였고, 이 금액이 보조 금으로 결정되었다.40)

1927년 책정된 보조금이 모두 하부41)되었고, 그해

33)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04 34)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13-003 35)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13-001 36)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12-002 37) 파손 사진(그림2)을 보면 장안사 대웅전은 이미 수리되어야 할 시기를 한참 지나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사와 현장지 휘를 맡았던 오가와는 조사보다 먼저 응급 수리를 시행하였다. 국립 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21-003 38)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09 39) 보조금 총액은 4,244원 45전으로 결정되었으나, 2회에 걸쳐 나 누어 지급되었다. 1926년 12월 6일 지급공문을 통해 2500원이, 1927 년 7월 13일 지급공문을 통해 1,744원 45전이 지급되었다.

40)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09

(6)

그림 4. 수리 전 장안사 및 대웅전 전경, 지붕 파손 현황 10월에 조선총독부 촉탁 고적조사위원 세키노 타다시 (關野貞)가 현장을 시찰하고, 자문의견서42)를 수리계획 을 수립 중이던 오가와에게 전달하였다. 당시 오가와 는 수리 계획서에 해당하는 사양설계서를 직접 작성43) 하고 있었는데, 그 설계서에는 세키노가 자문한 의 44)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오가와가 작성한 설계서에 따라 본격적인 공사는 1928년 5월에 시작되었다. 공사기간은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진행하고 각 년도마다 5월에서 10월까지 6 개월씩 공사를 수행하여 총 18개월 동안 추진하는 것 으로 계획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총예산액은 36,431 원 83전으로 결정되었으며,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해 마다 보조금이 표 1과 같이 하부 되었다.45)

공사비는 공종에 따라 구분되어 있는데, 가설공사

41)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07 42)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22 43) 장안사대웅전수리사양설계서(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관리번호 A087-021-004)에는 작성자의 이름은 적혀져 있지 않지 만 오가와 특유의 필체로 작성되어 오가와가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44)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22-002 세키노가 제출한 의견서인「대웅전수리방침각서」에 기술된 수리방침은 다음과 같다.

1. 네 모서리의 기둥은 좌굴 손상되었으므로 이를 교체하고 다만 이 를 교체하기 위해서는 상층 전부의 해체가 필요함

2. 측면 기둥들을 해체하는 수리를 더 할 것

3. 천정의 중앙부는 후세의 졸렬한 보충으로서 이를 당초와 같이 우 물 천정으로 복구할 것

4. 건물 배면 처마는 당초 겹처마로 된 것을 홑처마로 변경한 것으로 단지 외관을 손상하는 것 뿐만 아니라 건물의 보존상에도 불리하 므로 당초와 같이 겹처마로 복구할 것

5. 지붕전부 수막새와 암막새의 부족을 보충할 것

소화 2년 12월 16일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 세키노 타다시 45)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25-004

(假設工) 및 칠공사(塗工), 기초공사(基礎工), 목공사 (木工), 지붕공사(葺工)로 나누어 공사비를 책정하고,

비목 합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總工費 36,431.83 3,325.00 9,650.00 12,000.00 11,456.83 假設工 及 塗工 3,750.00 1,910.00 - - 1,840.00 基礎工費 941.50 - - - 941.50 木工費 21,367.02 - 8,420.31 10,103.00 2,843.71 葺工費 3,933.31 - - - 3,933.31 監督雜費 6,440.00 1,415.00 1,229.69 1,897.00 1,898.31

*1927년 보조금은 1928년 3월 하부됨

표 1. 공사 비목별·년도별 보조금 내역(소수점 뒷자리는 錢)

여기에 감독비와 잡비를 더해 총공사비를 산정하였 다.(표 1) 보조금 사용내역을 보면 1927년에는 가설공 사에, 1928년과 1929년에는 목공사만 보조금이 투입되 었고, 1930년에 모든 공종에 보조금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년도 별로 보조금이 사용된 내용을 수리 진행을 보 고한 공문서를 통해 살펴보면, 우선 1927년에는 파손 현황에 대한 응급조치가 이루어졌고, 앞서 언급한 설 계사양서 작성을 위한 실측조사가 있었다.46) 1928년에 는 공사재료와 도구 준비, 본공사에 사용할 소옥 건설, 직공의 식사와 휴식에 사용할 가소옥 건설, 지붕을 덮 을 기와 조성 등의 준비공사가 이루어졌다.47) 1929년 에는 대웅전 해체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공사는 해체 와 조립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조립 공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해체하면서 발견된 문제들로 수리범위가 달라지면서 공사에 사용한 자재가 증가하 는 등 공사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해체과정에서 제기된 사항들은 1930년 공사에 반영 되었다. 1930년 공사 시작 직전인 4월 30일, 오가와는 설계변경을 신청하는 상신서(上申書)를 강원도 도지사 에게 제출하였다. 상신서는 대웅전 상층 공포를 2출목 에서 3출목으로 변경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였으 며, 예상보다 부식이 심한 부재가 많아 목재 물량을 재조사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48) 여기에 드는 추가 자재구입 비용(총 2,064원 40전)은 장안사가 직접 부담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대웅전 건물에 대한 수리공 사는 한차례 설계변경과 공사비 증액을 거쳐 1930년에

46)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22-001 47)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19-004 48)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29-004

(7)

철도국, 조선철도여행기,1934

그림 5. 장안사를 출발점으로 한 내금강 탐방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1932년 2월이 되 어서야 공사 완료가 보고49) 되었는데, 1931년 석축공 사가 추가로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다.50)

장안사 대웅전 수리가 시작된 1927년은 창도역과 금 강산을 연결하는 금강산 연락버스 운영이 시작되어 장 안사로 유입되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조선총독부가 장 안사 앞 5만평의 대지를 민간 기업에 불하하여 대규모 위락시설 건설 계획을 발표한 시점이었다. 또한, 공사 가 완료된 시점은 금강산 전기철도가 내금강역까지 개 설 완료(1931년 7월 1일)되어 장안사가 금강산 관광의 중심거점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때였다. 대웅전 수리 기간 관광객 수는 폭발적인 증가 추세를 보였고, 장안 사 인근에는 숙박 시설과 같은 관광기반시설이 확충되 었다.51) 특히 이후 개설된 장안사를 출발점으로 하는 다양한 탐방로들은 장안사가 금강산 관광의 얼굴이 되 었다는 사실과 함께 장안사의 건축물들이 대표적인 볼 거리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그림 5) 이러한 개발 경과와 수리 경과가 가진 시기적 밀접성은 장안 사 대웅전 수리공사가 금강산 국립공원화라는 거대 개 발사업의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

49)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04-003 50) 석축공사는 수리계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석축공사를 위한 입찰서류가 남아 있어 공사가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 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16-002

51) 원두희,「일제강점기 관광지와 관광행위 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대 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 41∼59쪽

4. 수리방침 결정의 융통성과 개발 논리

앞서 밝힌 것과 같이,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는 금 강산 관광을 위한 개발과 정비가 한창인 시기에 조선 총독부 학무국의 보조를 받아 수행되었다. 당시 장안 사 일대에 대한 정비는 민간기업과 조선총독부가 자금 을 투입하고 기반시설을 조성하였던 대규모 사업이었 다. 이는 금강산 개발 과정이 장안사 대웅전 수리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게 한다. 당시 대웅전 수리를 주관한 학무국이 국립공원계획을 추진 한 금강산 보승회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와 금강산 개발의 관 련성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에 자금이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금강산 관광지 “개발”사업에 힘입은 바가 컸 다. 대웅전은 지붕 부재가 자연 탈락할 정도로 부식이 심한 상태가 될 때까지 방치되다가 내금강 개발이 한창 인 시기에 이르러서야 보조금이 투입되었다. 금강산 연 락버스가 개설되어 장안사 지역으로 본격적인 관광객 유 치가 시작된 1927년에 투입된 보조금은 “보존” 공사에

“개발” 목적의 자금이 투입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가 개발사업 영향 아래 시행 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는 공사를 기록한 문서 곳곳에 서 드러난다. 장안사 대웅전 수리계획은 1927년 10월 현장을 방문한 세키노 타다시가 작성한 자문 의견서52) (그림6)에 기재된 수리방침을 수용하여 수립되었다. 자 문 의견서는 12월 16일 작성되어 오가와 케이키치에게 전달되었는데, 아래는 의견서 앞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소화2년 10월 장안사에 출장하여 대웅전 파손의 상태를 시찰하고 주요 부분의 파손이 심해 일시적 변통으로 수 리한다면 후일 더 큰 우환이 이어질 것이므로 주요부를 해체하고 근본적 수리를 하는 것이 필요함. 나아가 근 년 교통의 편개로 내외의 관람자가 수년 증가의 경향에 있으므로 일층 유감없는 수복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다음과 같이 수리에 관한 소관의 소견을 개진함53)

위 내용은 수리공사 방침을 정한 취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세키노는 교통 상황이 좋아진 점과 관광객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의견서

52)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19-002 53)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22-002

「대웅전수리방침각서」,의견서 후반에 기술된 수리방침은 각주 41을 참고

(8)

그림 6. 세키노 타다시 자문 의견서

의 이러한 주장은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의 타당성을 피력한 것인데, 이와 같은 견해를 1926년 장안사 주지 현의룡의 청원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사는 내금강의 명구(名區)의 지위를 점한 산수가 아름 답고[明媚) 꾸밈이 웅대한 가람으로서 여름부터 겨울에 이르는 사이에 관광객(觀光の客)이 특히 군집하므로 당 우의 청소, 경역의 불진(拂塵)에 항상 주의하는데도 사 찰의 재산이 풍부하지 않아 만사 뜻과 같지 않습니다.

특히 당사의 중심인 대웅전과 사성전은 대정원년에 본 부고적조사 촉탁원 공학박사 관야정 외 2명의 조사에 의해 둘 모두 을종(乙種)에 속한 품위를 가진 것으로 검 정 받았으므로 보호(格護)에 특별 유의해야 함에도 다년 우설에 노출[曝露]되던 중 파손이 각소에 생겨 당사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관의 유지에 필요한 수리를 수행하 는 것이 어렵습니다. 실지조사 하시어 시업방안을 확정 하여 본년도 수리하옵기를 청합니다.54)

청원서 역시 장안사가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소임을 첫 문장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다. 이는 건축 문화유산 수리공사에 대해 당시 조선총독부가 가졌던 인식에 대 한 단서를 제공한다. 유명 관광지라는 점이 총독부가 보조금 하부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는 사실 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55) 특히 대표적인 관학자 로서 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해온 세키노가 수리가 성실 히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로 관광객의 규모 증가를 언 급한 사실은 총독부가 지원하는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 사가 금강산 정비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56)

54)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13-003 55) 당시 작성된 다른 수리 보조금 청원서들을 살펴보면,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 청원서처럼 관광지임을 피력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사실은 현대에도 수리공사와 관련된 공문서에 건축물 보존 외에 다른 사항이 언급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총독부 의 개발의지나, 금강산 개발 분위기가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 보조금 하부에 호재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림 7. 오가와 케이키치 설계변경 상신서

한편, 관광지 개발 기조는 수리방침에도 영향을 미 쳤던 것으로 보인다. 오가와는 세키노의 자문 의견과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32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사양설 계서를 작성하였다.57) 이 조항 중 대웅전 외관에 큰 변화를 가져온 대표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내진 천정 을 우물반자(格天井)로 하는 사항58), 배면 처마를 홑처 마에서 겹처마로 변경하는 사항, 지붕에 수막새와 암 막새를 설치하는 사항 등이다.59) 이 조항들은 모두 세 키노가 자문 의견서를 통해 지시한 내용이었다.60) 리고 그 내용은 일관되게 격식을 높이고, 외관을 반듯 하게 만드는 방향성을 지녔다. 세키노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견서에 대웅전 수리가 관광지 정비의 일 환임을 명확히 기술한 인물이었다. 그가 설정한 수리 방침이 사영서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피력한 수리취지 역시 함께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56) 세키노의 입장이 관광객의 안전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든, 관람을 돕 기 위한 것이었든, 그가 설명하는 수리타당성이 관광객을 겨냥한 것임 에는 틀림없다. 이는 수리의 목적이 대웅전 보존과 관광지 정비 사이에 어디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느냐는 판단과 별개로 장안사 대웅전이 금 강산을 방문한 관광객이 많이 찾는 볼거리였고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 했다는 사실만은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57) 이 중 전반 23개 조항이 대웅전 수리공사와 관련된 직접적인 지침 이다 후반 9개 조항은 가설덧집, 비계설치, 오름잔교설치, 재료적치장, 공작소, 직공휴게소, 감독원 힐소 등에 관련된 내용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문서, 관리번호 A087-021-004)

58) 내진 천장이 졸렬하다는 표현이 있을 뿐 본래 천정의 종류는 밝히 고 있지 않다.

59)이 사항들은 모두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장안사 대웅전 수리 전 사 진에서는 와구토를 사용해 처마 끝을 마감했지만, 준공 후 사진에서 막 새기와로 변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림 7 참고) 또한 양 식변경 뿐만 아니라 구조변경도 있었다. 지붕 보토 대신 덧집을 만들어 하중을 경감시키는 구조변경 역시 명시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지붕 속은 구조 불충분함. 보토(上瓦土)가 많아 보존상 불리가 인정되 므로 직접 규정하여 덧도리(土居桁), 덧집 기둥(母屋束), 덧집 서까래(野 地棰), 개판(屋根板) 등을 내역서와 같이 충분히 견실하게 만들 것 60) 각주 41을 참고

(9)

타당하며, 이를 반영한 오가와 역시 세키노의 취지에 동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오가와의 변경은 세키노가 지시한 방침에 그 치지 않았다. 그는 해체공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조립 공사에 들어가기 직전인 1930년 4월 30일 설계변경을 알리는 상신서를 강원도 도지사에게 제출하였다. 설계 변경의 내용은 대웅전 상층 공포를 2출목 다포에서 3 출목 다포로 변경한다는 것이었다. 상신서에는 변경 이유를 함께 적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그림7)

선종(禪宗)의 중층조 불전건축은 상층 가구가 주(主)이 고 하층은 간단한 것이 보통이지만 장안사 대웅전의 처 마 공포는 상층 2출목[이수선 二手先] 다포[힐조詰組]로 되어 있고 하층은 반대로 3출목 [삼수선 三手先] 다포 [힐조詰組]로 되어 있음. 종전의 수선공사가 조잡하여 상층 공포 일부가 소략하게 된 것이 해체에서 명료하게 드러남. 따라서 상층 공포[斗栱]의 1출목[一手]를 증가하 고 3출목 [삼수선 三手先] 다포[힐조詰組]로 가구상의 부 자연스러움을 바르게 하여 외관의 미(美)를 복구하도록 함.

상신서의 내용에 따르면, 오가와는 장안사 대웅전을

“선종 중층조 불전” 건축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 “선종 중층조 불전” 건축이 하층 가구가 상층 가구보다 간단 한 의장이나 구조를 지닌다고 설명하면서, 이런 특징 이 “보통”인 것이라고 기술하여 그의 주장을 일반화하 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이 대목은 상신서에서 네 줄 남짓의 짧은 기술이지만 행간에서 오가와의 설계변 경 기준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장안사 대웅전을 포함하는 어떤 건축유형을 지 목하고, 그 건축유형이 가지는 특징이 장안사 대웅전 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러한 논 리는 유물 조사와 연구에서 오랫동안 사용돼왔다. 예 를 들어 유적지에서 출토된 기와는 제작기법과 형상, 문양 등을 기준으로 먼저 분류된다. 이후 유사한 것들 이 충분한 수량으로 발견되면, 유형화하여 향후 출토 된 기와들을 분류해 나가는 기준으로 삼는다. 한번 유 형화되면 전체를 분류해 나가는 기준이 되므로, 대표 유형이 되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세밀한 연구 과정이 필수적이며, 오랫동안 관련 연구자들의 검증이 이어지 게 된다.61)

61) 이러한 유형화 과정에서 발견된 특징들이 모여 일정한 시기와 지역 에 집중적으로 발현되면 그 유형은 양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설계변경서의 내용은 오가와가 “선종 중층조”를 양식화하여 계획서를 작성해 나간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오가와가 기술한 “禪宗の 重層造”

오가와가 대웅전을 단지 중층건축이라고 지칭하지 않고 “선종”과 “불전”을 붙여 의미를 한정한 사실은 그가 “선종 중층조 불전” 건축이 다른 중층건축과 구 별 된다는 인식을 가졌음을 알려준다. 나아가 “선종 중층조 불전”건축이 가지는 특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 고 있는 만큼, 당시 오가와의 인식 속에서 “선종 중층 조 불전” 건축은 가정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하나의 유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만약 그의 설명대로 상층구조에 비해 하층구조가 간단한 특징을 지닌 “선종 중층조 불전”이 조사와 연구를 거쳐 충분 한 수량으로 존재하고, 또 검증되었다면 그의 주장은 설계변경 사유로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한반도 중층건축을 유형화하고 그 특징을 일반화하기에 조사나 연구가 상당히 부족한 시 기였다. 당시까지 수리된 중층 불전은 금산사 미륵전 이 유일했기 때문에 한반도 중층 불전 건축에 대한 정 밀하고 구체적인 조사가 충분치 않은 상황이었다.62) 또한, 공포 출목수를 겨냥해 하층 가구가 간단한 것이 보통이라는 그의 주장에도 오류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중층 불전들은 무량사 극락전을 제외하면 대부분 출목수가 같기 때문이다.63)

한편, 오가와는 변경의 또 다른 이유로 상층 공포가 소략해진 증거를 해체과정에서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

그림 8의 설계변경 전 공포 계획도를 보면 3제공 쇠서 상부에서 소로가 빠진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에서 “중층조”를 구조로만 풀이한다면 지붕이 두 개인 구조로 읽힐 것 이다. 하지만 오가와는 “중층조” 앞에 “선종”을 두어 범위를 한정하였다.

또한, 이에 대해 지목한 특징은 구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층과 하층 의 공포 출목 차이에 관한 것으로 의장적 특징이었다. 따라서 그가 “선 종 중층조”라는 단어를 구조 이상의 의미를 담아 양식적으로 사용한 것 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한편, 이 용어에 사용된 “-造(-づくり)”는 건물의 평면이나 입면, 지붕 모양, 외관의 형태, 세부나 부재 가공법, 구 조를 뜻하는 용어이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大社造・住吉造・神明造・

春日造・権現造와 같이 신사(神社) 본전(本殿)의 건축양식에 붙이는 용 어이기도 하다.

62)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보조하여 수리한 중층 불전건축은 장안사 대 웅전, 금산사 미륵전,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 장안사 사성전이 전부이며, 이중 1926년 예산부터 보조금이 투입된 장안사 대웅전과 금 산사 미륵전의 수리가 가장 빨랐다(총독부 보조금 하부 수리공사 목록 과 내용에 대해서는 서효원, 「일제강점기 보물건조물 수리공사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8, 부록3. 고적보존비보조대장 정 리를 참고). 다만 그가 주장한 선종 중층조 불전의 양식적 특징이 한반 도 건축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불전 건축까지를 포괄하여 지 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한 검증은 향후 오가와 케이키치가 남 긴 사료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63) 출목수가 같은 건축물은 화엄사 각황전(상하층 3출목), 금산사 미륵 전(상중하층 2출목), 법주사 대웅보전(상하층 3출목), 마곡사 대웅보전 (상하층 3출목)이다. 무량사 극락전은 하층 3출목, 상층 4출목으로 상층 의 출목이 더 많다. 또한, 금산사 미륵전의 경우 하층 정면에 베푼 살미 초각이 가장 화려하다.

(10)

그림 8. 장안사 대웅전 수리전후 전경(위, 왼쪽이 수리전)과 설계변경 전후 공포계획안(아래, 왼쪽이 변경전) 이것이 오가와가 발견한 증거일 가능성이 크다. 3제공

끝의 비어있는 소로 자리는 3제공 위의 살미가 교체되 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원래 3제공 위의 살미는 빠 져버린 소로에 의해 지지 될 정도의 길이를 가진 것이 었다. 오가와는 이를 근거로 기존 공포에 새로운 살미 를 삽입하고 출목수를 조정하는 등의 변경을 가한 것 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가와의 공포계획 변경은 지붕 계획에 대대 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보의 형상이 바뀌었을 뿐만 아 니라 지붕물매와 처마 내민 길이까지 변경되었다. 나 아가 오가와의 계획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구조까지 적극적으로 변경하였다. 설계변경 전 구조는 장연과 단연을 사용하고, 보토를 채워 기와를 시공하는 전통 적인 재래식 구조였다. 오가와는 설계변경을 통해 재 래식 구조를 단연을 설치하지 않고, 덧집을 만들어 지 붕틀을 만드는 구조로 변경하였다.

공포는 여러 단위 부재가 조립되어 대(帶)를 형성하 며 구성되고, 보와 도리 같은 주요 구조재가 함께 복 잡하게 조립되는 부위이다. 목조건축 구조특성 상 공 포의 출목만을 조정하는 소규모 수선은 일어나기 힘들 다. 적어도 상층 가구 전체가 해체되어 다시 조립되는 대규모 중건공사라야 출목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가와의 설계변경이 공포계획 변경에 한정되지 않고 지붕물매와 처마 내밀기 계획변경으로까지 이어진 것 도 이러한 공포와 지붕가구의 관계에서 기인한다.

당시 장안사 대웅전 상층 지붕에 계획된 2출목 공포 는 대웅전이 겪은 대규모 중건공사의 결과물이었을 가 능성이 크다. 불전과 같은 권위건축에서 중건공사는 건축구조와 외형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고, 대규모 공사는 적어도 50년에서 100년 정도의 시기적 차이를 두고 일어나므로 공사과정이 사회변화나 역사적 사건 을 반영하는 등 의미 있는 기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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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장안사 사성전이 상층 2출목 공포와 원래 구조만 으로도 원형으로서 가치를 충분히 가질 수 있음을 의 미한다. 그럼에도 오가와는 2출목 공포를 유지하는 대 신 지붕 구조 전체를 변경하는 대규모 변경을 감행하 였다. 더욱이 오가와가 발견한 것은 공포 변경의 증거 였을 뿐, 지붕형상과 구조 전체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오가와의 변경은 발견한 증거에 비해 그 범위가 매우 큰 것이었다.

와가와의 설계변경 상신서에서 엿보이는 인식과 변 경범위 설정에서 보이는 그의 결정방식은 융통성이 상 당히 큰 유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오가와가 수리지침 을 결정해 나가는 태도와 방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는 당시 수리공사가 관광지 정비의 일환으로 수행되었 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시기 금강산 장안사는 금강산 관광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관람자가 많아지는 추세 속에서 중심 불전인 대웅전은 가장 큰 볼거리이므로 반듯하게 정비될 필요가 있었다. 뚜렷한 근거 제시나 정밀한 고증작업 없이 전문가의 견해에 의존하는 지침 결정은 거대규모 사업이 가진 개발 논리에 상대적으로 동화되기 쉬운 방식이다. 특히 수리지침을 결정하였던 세키노나 오가와는 총독부 관원으로서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위치에 있던 인물들이었다.

5. 결론

한반도 경영을 위한 자금조달을 위해 관광산업을 육 성하였던 조선총독부는 금강산 개발에 적극적이었다.

금강산전기철도 개통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이 대중화 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총독부는 학무국 등의 산하 기구로 금강산보승회를 조직하여 금강산 국립공원계획 을 수립하였다. 또한, 금강산전기철도 주식회사에 장안 사 인근 대지 5만평을 불하하여, 민간기업의 위락단지 개발 사업을 보조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금강산 개발을 지원하였다.

한편, 경성역과 내금강역이 하루거리로 연결되자, 내 금강 지역은 금강산 영역을 대표하는 영역이 되었다.

장안사는 내금강의 가장 큰 볼거리로 내금강 관광코스 의 출발점이 되었고, 장안사 인근 지역은 금강산 관광 의 중심거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대지 5만평을 불하하여 힘을 실었던 개발 분위기가 장 안사 지역 전반에 퍼졌고,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는 이 개발 분위기 한가운데에서 시행되었다.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 방침과 계획을 수립한 세키

노와 오가와는 총독부 관원으로서 총독부의 개발 기조 에 호응하였다. 수리공사 과정에서 작성된 장안사 주 지의 「청원서」, 수리공사의 방침을 정한 세키노의

「수리방침각서」, 수리공사 계획을 수립한 오가와의

「사양설계서」등은 장안사 수리공사와 금강산 개발사 업이 영향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리공사 보조를 청원한 주지 현의룡은 보조금을 하부 받기 위 해 장안사가 이름난 관광지임을 부각하였다. 수리방침 각서에서 세키노 타다시는 유감없는 수복이 이루어져 야 하는 이유가 금강산 관광 규모가 커지고 있기 때문 이라고 했다. 이는 관광지 개발이라는 실리적 목적이 총독부 보조금 투입의 명분이 될 수 있었음을 알려준 다.

수리공사 과정에서 진행된 의사결정이 관광지 개발 논리에 호응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정황은 수리 방침과 그 방침을 결정한 방식에서 드러난다. 수리방 침은 총독부 소속 관원이었던 세키노와 오가와의 견해 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들의 견해 속에서 설계변경의 방향성은 일관되게 건물의 격식을 높이는 것이었다.

특히 현장을 직접 지휘한 오가와는 장안사 대웅전의 현재 상태가 가지는 가치를 인정하기보다, 더 반듯하 고 격식이 높은 건축유형을 원형으로 제안하여 수리의 결과물로 설정하였다. 또한, 그는 그가 발견한 증거가 증명하는 것 이상의 수리범위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현상변경 사안에 대한 오가와의 유연한 인식과 태도는 현상변경 결정 과정에서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문가의 의견에 의 지하는 수리방침 결정방식이 가지는 유연성은 거대 관 광산업이 가진 개발 논리와 만나 장안사 대웅전을 유 명 관광지의 볼거리로 단장하는 데 일조하였다.

본 논문은 내금강 개발 시기와 맞물려 시행된 장안 사 대웅전 수리공사를 통해, 당시 관광지 개발사업과 보존수리공사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두 사건의 시기적 밀접성과 같은 정황이 주요 근거로 제 시되어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명백하다. 보존활동을 기록한 공문서가 관광지 개발이 나 경제적 이익을 보존활동의 목적으로 기재하지 않는 다는 점을 생각하면 본 논문의 한계는 논문이 다루는 사료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향후, 금강산 개발과정 을 더욱 구체화하여, 관련 인물들 간의 관계나 건축물 의 이전·변용 등이 세밀하게 드러나 금강산 소재 건축 문화유산 보존활동과 개발사업 간의 관계가 조금 더 입체적으로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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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2020. 03. 16) 수정(1차:2020. 05. 26) 게재확정(2020. 06. 03)

수치

그림 1. 금강산 전기철도 노선도 및 개통일타무라에 의해 금강산이 국립공원 후보지로 거론되던 때, 금강산 관광은 금강산 전기철도 개설로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림 2. 장안사 지역 개발계획 기사와 장안사 일대가 묘사된 관광지도 때였다. 금강산 관광 사업은 금강산 전기철도 주식회 사의 수익과도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사 중역들 은 고성군의 청원에 호응하여 금강산 국립공원화에 주 력하였다
그림 3. 금강산 개발 경과와 장안사 대웅전 수리공사 경과 산 조사보고서」 28) , 「금강산 탐승 계획안」 29) , 「금강 산 풍경 계획안」 30) 등을 작성하였다
그림 4. 수리 전 장안사 및 대웅전 전경, 지붕 파손 현황 10월에 조선총독부 촉탁 고적조사위원 세키노 타다시 (關野貞)가 현장을 시찰하고, 자문의견서 42) 를 수리계획 을 수립 중이던 오가와에게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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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