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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and Works of Professor Sung H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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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KISEP Special Contribution 精 神 分 析 :第 17 卷 第 1 號 2 0 0 6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 17, No. 1, Page 135~141, 2 0 0 6

金性熙 敎授의 生涯와 思想

李 武 石

*

Life and Works of Professor Sung Hi Kim

Moo-Suk Lee, M.D., Ph.D.*

머 리 말

김성희 교수는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23세에 일본 동북제 대(센다이 의대) 정신과에서 5년간 정신과 수련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에 마루이 교수에게 카우치에 누워 자유연상을 하는 개인분석을 받았다. 그리고 동경의 고사와 헤이사꾸 선 생에게 주 일회 정신분석 이론을 배웠다. 한국인으로서는 최 초로 정신분석 수련을 받은 분이다. 1952년에 전남의대 정 신과를 창설하고 1976년까지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했다.

저자는 1966년 의과대학 1학년 학생일 때 김성희 교수를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다. 1972년부터 전남대학 병원 정신과 에서 정신과 수련 받으면서 김성희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20대 초반에 김성희 교수를 만나 50대 후반인 2003년 12 월 31일 교수님이 별세하기까지, 그리고 지금도 그 분은 저 자의 의식과 무의식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성희 교수의 생애와 사상을 그분의 말씀을 중심으로 소 개하고자 한다.

본 문

1. 출생과 의과대학 졸업(1917-1940년, 23세)

김성희 교수는 1917년 평안도에서 태어났다. 재상의 가문 이었고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에 대한 좋 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7살 때 기와 지붕에 올라가 추녀의 기왓장을 들 추고 그 속에서 새가 알을 까는 것을 보곤 했다. 덮어 놓고 내려왔다가 생각 날 때 다시 올라가서 새알이 부

화 된 것을 보았고, 그 후 자라서 날아가는 것도 보았다.

한번은 어린 새를 잡아다가 키우는데 열심히 먹이를 주 어도 새가 자꾸 죽어 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10살 되 던 때에 어머니와 이웃집 아주머니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내가 지붕에 올라가면 할아버지께서 그것을 아시고 마당에 있던 사람은 모두 집안으로 들 어가게 하셨고,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체 마당으로 내 려오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나무 아래서 지붕에 올라가 있는 나를 쳐다보시면서, 내 가 위험한 곳으로 내려올 때 마다 기침 소리를 내셨다 고 한다. 그래서 내가 자꾸 지붕에 올라가는 바람에 기 와가 깨져서 비가 새곤 했지만, 할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지시하시기를“일체 성희가 지붕에 올라가기 때문에 비 가 샌다고 성희를 꾸중하지 말라” 고 하셨다고 했다. 이 렇게 나의 어린 행동이 통제 받지 않고, 어른들의 의지 로 내가 위협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관심한 것은 아 닌, 그런 식으로 양육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나의 성격 이 형성되었다. 나의 집 주변에는 그대로 산과 들이 있 어서, 그 곳에서 마음껏 뛰어 놀았고 자연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에게 자연이 생소한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 내가 있고, 내가 자연 속에 있는 것을 그저 자연스 럽게 그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인정되었다.

김성희 교수의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의사였다. 도 산 안창호 선생의 제자였다. 청소년기의 김성희는 물리학에 심 취하여 물리학도가 되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의과대학에 진학하 라고 하셨다.“ 나라를 잃은 백성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수 없다. 지금 조선에는 지식층이 민중을 만날 수 있는 길이 모두 차단되었다. 그나마 의사는 민중을 만날 수 있으니 너는 의 사가 되어 민중을 일깨워주어라 ”아버지의 말씀이 민족 때문이라 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평양의전에 진학했다. 의과대학 생 때는 틈날 때마다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보았다. 그런데 회의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교실

Department of Psychiatr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Me- dical School, Gwangju,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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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생겼다.‘도둑놈이나 매국노도 의사가 몸을 치료해 주면 다 시 가서 매국노 노릇할 것인데 치료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래서 몸을 고치는 의사 보다는 마음을 고치는 의사가 되기로 마 음을 먹었다. 정신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만남 그리고 일본에서 정신분석 수련 받음(1940년, 23세-1945년, 28세)

어느 날 의대생 김성희는 평양의 한 헌책방에서 프로이트가 쓴‘꿈의 해석’ 을 발견했다(Freud 1900). 크게 감동했고 정신 분석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1940년 평양의전을 졸업한 후 김성희는 일본인 교수의 소개로 동경에 가서 고사와 선생을 만났다. 고사와 선생은 김성희에게 대학병원에서 정신과 수련 받기를 권했다. 센다이(東北) 제국대학병원 정신과의 마루이 교 수에게 소개 시켜 주었다. 김성희는 1940년 4월 6일부터 1945 년 1월 25일까지 일본 동북 제대 정신과에서 마루이 교수에게 지도 교육을 받았다. 정신과 수련이 시작되었을 때 마루이 교수 는 23살의 김성희에게 개인 분석을 받을 것을 권유했다.“ 친해 진 다음에는 분석하기가 어려우니 지금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 다. 전이관계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었던 것 같다. 마루이 교수에 게 개인 정식분석을, 정통 정신분석의 방법으로 3개월간 받았다.

카우치에 누워 자유연상 하는 방식이었다. 1회 60분, 일주에 6 회씩 받았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 이 당시 김성희의 경험 은‘김성희 교수의 생애와 사상 제 2 권(2005)’ 에 자세히 기록 되어 있다. 마루이 교수는 젊은 김성희를 총애 했고 정신과 교실 에 선임 일본인 의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희를 동북제대 정신과의 조수(현 조교수 급, 문부성 발령)로 추천하였다. 동북 제대에서 수련 받는 동안 고사와 선생에게 정신분석 이론에 대 한 지도를 매주 센다이에서 동경까지 다니면서 수년간 받았다.

3. 일본에서 귀국,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고문당함, 월남 후 생활 (1945년, 28세-1952년, 35세)

동북제대에 재직 중 태평양 전쟁이 극심할 때 김성희는 귀국 을 결심했다. 안락하고 안전한 대학 교수 생활을 버리고 전쟁 통 에 고난 받는 동포들 곁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 을 것이다. 마루이 교수는 귀국을 만류했으나 마침내“ 당신이 조국과 민족 때문에 귀국한다니 더 이상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때가 되면 박사 논문은 내가 주게 해 달라 ”고 하셨다고 한다. 마 루이 교수와 김성희의 관계를 보여 주는 대화였다. 지배국 일본 의 교수와 식민지 조선 청년의 대화가 아니다. 김성희는 수련 받 기 시작할 때 마루이 교수에게“ 당신이 나를 식민지 조선인으로 취급한다면 이미 정신과의 기본 정신이 아니므로 나는 수련 받 지 않겠다 ”고 했고 마루이 교수는 편견을 갖고 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젊은 김성희의 당당함과 민족적 주체성을 보여 주는 일화이다. 그 후 1960년대에 전남의대 재직 중에 박사학위가

필요하여 마루이 교수에게 연락했으나 이미 작고하신 뒤였다.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김성희 교수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고 했다. 의식적으로는 그렇게 큰 슬픔을 느낀 것도 아닌 데 계속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두 분의 관계가 얼마나 인간적으 로 깊은 관계였는가를 보여 주는 감정 반응이었다. 김성희 교수 는 그 후 누구에게도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다.“나의 박사학위 는 마루이 교수에게 바쳤다 ”고 했다. 박사학위 없는 교수로서 박사학위 심사를 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에 약 일 년간 재직했 다. 1946년 8월부터 약 4년간 평양의대 부속병원 정신과에 재직했으며 공산치하에서 정신분석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어릴 때 김성희는 고문을 두려워했다.

독립 운동가들이 고문을 못 이겨 조국을 배신했다는 이야기 를 듣고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었을 때 자신의 뜻을 지킬 자 신이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공산당에게 고문을 당할 때 김 성희는“고문하는 것은 너희들의 일이다. 너희는 너희 일을 해라 ”고 했다. 고문이 인내의 한계에 달했을 때 의식을 잃었 다. 깨어나면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김성희는 고문 때문에 자기주장을 굽힐 필요가 없었다.

1950년 김성희는 이북에서 단독 월남하였다. 가족들이 곧 뒤 따라 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부인과 외아들은 원산에서 배 가 끊겨 월남하지 못했다. 김성희는 87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재 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이북에서 월남하신 의사 중 장기 려 박사와 김성희 교수만 재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김 성희 교수가 재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정신이 이상하기 때문 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성희 교수는 이북에 부인이 살아 있고 비 록 곁에 부인이 없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부인이 있기 때문에 재 혼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램수면(REM sleep)중에도 발기 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성욕이 조절 되었다.

4.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정신과 창설(1952년, 35세-1976년, 59세)

1952년 당시 전남의대 학장이신 이종윤 박사님의 초빙에 의하여 35세의 젊은 나이에 정신의학의 선각자로서 광주에 내 려와 전남의대 정신과학교실을 창설하였다. 거처는 전남대병 원 제 7 병동(정신과 병동) 2층의 한방을 쓰셨다. 여기에 한 가 지 일화가 숨어 있다. 1950년대에 정부는 일제시대의 적산가 옥(총독부 소유의 집)을 의대 교수들에게 불하해 주었다. 의대 교수들의 봉급이 너무나 적었고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성희 교수는 이 집 받기를 사양했다.“나는 혼자 사

는 사람이므로 넓은 집이 필요 없습니다. 집이 필요한 분에게

드리십시오 ”그리고 김성희 교수는 정신병동의 방 한 칸을 빌

려 사셨다. 1976년 김성희 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되시고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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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채 없는 가난한 입장이 되었을 때 저자는‘그 적산가옥이

라도 가지고 계셨더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1) 개방병동 체재의 정신병동 운영

김성희 교수는 전남대병원 정신병동을 개방병동 체재(open ward system)로 운영했다. 개방병동의 정신은 김성희 교수의 인간관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환자를 가두지 않았다. 환자의 결정을 존중했다. 환자는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자기 결 정에 대한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한다.“ 나는 당신에게 병동에 있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병동을 나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당신이 져야합니다. 그것이 사 람이 사는 도리입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존중해 주 는 사람들이 있는 안전한 병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문 이 열려 있어도 병원을 떠나지 않는다. 김성희 교수는 개방병 동에 대한 오해를 지적했다. 정신병동의 문만 열면 개방병동이 된다고 생각하는 오해였다. 열쇠를 제거하고 문을 열어 두어도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있는 마음의 문이 닫혀 있으면 폐쇄병 동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볼 때‘너는 정신병자 고 나는 정상적인 의사다. 나와 너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거야 말로 철문보다 더 강력한 벽 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의사가 병동의 문을 열어 놓는 다고 해도 그것은 개방병동이 될 수 없다. 환자들은 오히려 혼 란스럽다. 김성희 교수는 참새의 예를 들었다.

참새를 새장에서 풀어 주었다. 그러나 방안의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참새는 자유를 얻은 줄로 알고 힘차게 날았다. 그러나 창문에 부딪쳐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 날 아 보고 또 날아 보았지만 거듭 실패했다. 참새는 기진맥 진했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차라리 새장 안에 가두어 두었더라면 포기하고 좁은 공간을 받아 들였을 것이다.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정신병동에서 폐쇄병동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가두어 둔다면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포기하고 적응할 것이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자유를 인정 하는 듯하고 인간적으로 보이는 병동에서 환자는 참새처 럼 자유를 갈망하다가 더 심한 실망과 상처를 받게 된다.

김성희 교수는 환자의 인격을 존중하고 병동을 개방하는 개 방병동 만이 치료적 환경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많은 병원 들이 개방병동을 찬성하고 있지만 1950, 60년대의 한국사 회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이 심하여 김성희 교수의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미친 사람들을 가두지 않 는 것은 김성희가 미쳤기 때문이다. ”라고 비난 받기도 했다.

환자에게 자유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 결정에 대한 책임도 지게 하는 인간 존중의 정신은 피넬의 개방병동 정신과 맥을

같이 할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자유연상 규칙과 도 통한다. 정신분석에서는 강요하는 사람도 없고 강요받는 사람도 없다. 분석가와 피 분석가가 평등하다. 암시나 지시 도 하지 않는다. 환자는 떠오르는 생각 중 어느 것이라도 선 택해서 말하거나 혹은 말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이렇게 평 등하고 자유가 존중 되는 분위기에서 만 자유연상이 가능하 다. 따라서 인간 존중의 마음이 없는 정신분석이란 존재할 수 없다. 개방병동 정신과 자유연상의 심경은 모두 그 기초에 인 간 존중의 심경이 있다. 인간은 존중 받는 자리에서 심경이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연상의 심경은 인간 공통의 심경이기 때문에 정신분석실에서 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거나 강의할 때, 병실에서 환자를 볼 때 나 복도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했다.

김성희 교수가 의과대학 4학년 학생들에게 자유연상의 심 경으로 강의한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내(김성희 교수)가 전남의대 재직 시에 학생들 중에 나 의 강의를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었다. 그런데 한 번은 학생들이 찾아와“큰일 났습니다. 정신과가 국가고시 과 목에 채택되었는데, 우리가 정신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니 교수님이 살려주십시오.”했다. 그래서 그들을 앉 혀 놓고 약속하기를“너희들은 내 강의를 듣는 중에 노트 하지 말아라.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다. 지금부터 내가 하 는 강의를 꼭 외우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듣고만 앉아 있어라.”그렇게 말한 다음에 그대로 정신과 강의를 했다.

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굉장히 많이 나와서 학생들이 당황했는데, 두 사람을 빼놓고는 거의 다 정신과 시험에 아 주 좋은 성적으로 패스했다. 학생들이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면서“교수님 덕분에 좋은 성적을 얻었으니까 파티 를 열겠습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그럼 그 자리에 누구누 구가 오는가?”하고 내가 물어보니까“교수님만 초청합니 다.” 라고 했다. 그래서 그것을 거절했다. 그랬는데 그 뒤로 두 학생이 나를 찾아 왔다.“교수님 때문에 국가고시 때 정 신과에서 나쁜 성적을 받았으니, 책임을 지십시오.” 라고 추 궁했다. 그런데 사실 두 학생은 내가 그렇게 강의하는 것이 못미더워서 그 강의를 듣지 않았고, 서울대학에서 나온 문 제집·예상문제집 만을 풀었던 학생들이었다.

국가고시를 보러 올라가는 학생들이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되겠으니까“교수님이 같이 좀 가주십시오. 우리 옆에 있어

만 주십시오.”그래서 같이 가주었다. 학생들이 몹시 불안해

하고“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정신과를 어떻게

할까요?”하며 아주 불안해했다. 그러나 실제로 시험을 볼

때는 전남의대 학생들이 가장 잘 쓰고 좋은 점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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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의 자유연상기법을 집단에게 적용한 김성희 교수 의 사례였다.

2) 전공의 교육의 특징

김성희 교수의 전공의 교육은 특이했다. 우선 전공의 1년 차에는 정신과 교과서를 읽지 못하게 했다. 환자를 이해하 기 전에 이론을 먼저 읽으면 이론에 사람을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부 정신분석 연구소에서도 일학년 때는 이 론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론이란 현상을 일반화해 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환자 개인이 무시되기 쉽다. 같은 이유로 김성희 교수는 정신과적 용어(term)의 사용도 금하 셨다. 예컨대“환자가 피해망상을 갖고 있다” 고 말할 때‘피 해망상’ 이라는 용어는 지구상의 수 없이 많은 환자들의 피 해망상 중의 하나가 되고 만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나를 죽 이려고 국에 독약을 탔어요. ”라고 말하면 개인이 드러난다.

정신과 의사는 개인을 치료한다.

김성희 교수는‘환자’ 라는 용어도 좋아하지 않았고 정신과 적 진단을 붙이는 것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는 금하셨다.

“정신과적 진단은 신체의학적 진단과 다르다. 육체는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고 세포의 이상을 증명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의 현상은 매우 역동적이다.

순간적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객관화 시킬 수 없다.

한 시간 전에 병적이었다고 해서 지금도 병적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 현상이다. 당신 자신의 마 음을 들여다보아라. 때로 당신 자신에게서 정신분열증 의 증상을 볼 수 있고 불안 신경증의 증상을 볼 수 있 을 것이다. 정신분열증이란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경험하는 마음의 현상일 뿐 진단 부칠 병은 아니다.”

김성희 교수는 약물을 거의 쓰지 않고 치료했다. 전공의가 처방하는 경우에도 아주 소량(클로르프로마진 100mg 이하) 만 처방하도록 지도 했다. 정신병적 상태에 빠진 환자는 인 생의 가장 심각한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가장 예민한 상태 이다. 이 예민함은 환자가 자기를 괴롭히는 인생의 문제를 푸는 심리적 동기와 배경이 된다. 약물로 이 예민함을 제거 하는 것은 반치료적이다. 김성희 교수는 전공의들에게 환자 의 증상을 약으로 없애 버리면 치료 받고자 하는 동기가 사 라진다고 가르쳤다. 인간은 고통을 느낄 때 그것을 해결하고 자 하는 동기가 생긴다고 했다. 이것은 프로이트(1919)가“ 환 자의 증상이 호전되면 정신분석을 받고자 하는 동기가 약해 진다 ”고 한 말과 같은 가르침이었다.

김성희 교수는 당시 유행하던 전기치료를 반치료적이고 비 인간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전기충격요법’ 이라는 용

어 대신에‘전기충격’ 이라는 말을 썼다. 치료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기충격을 받은 환자들의 뇌에 점상출혈 (petecheal hemorrage)이 온다는 것과 고도의 정신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이었다. 이 고도의 정신기능은 지능검사로 측 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고전 음악을 들으며 감동하는 기능이나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며‘좋다’ 고 느끼는 정신기능 이 고도의 정신 기능이다. 전기충격을 많이 받은 여자 환자 가“전기치료를 받고 하늘이 푸르다는 것은 알지만 푸른 가 을 하늘을 보며 느꼈던 느낌이 사라졌어요 ”라고 호소했다.

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해도 지능검사는 정상으로 나온다. 그 래서 전기충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능검사가 정상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해가 없는 치료법이라고 주장한다. 김성희 교 수가 한 남자 환자를 정신분석하고 있었다. 자유연상이 계속 되다가도 전기충격 시점에 도달하면 환자는 소스라치게 놀 라며 연상이 중단되곤 했다. 이 환자를 보며 김성희 교수는 환자들이 그들의 무의식에서 전기충격에 얼마나 큰 공포감을 느끼는지 확인했다고 했다. 전기충격이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기충격을 받을 때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환자들의 공포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필자도 전공의 시절에 이런 경험을 했다. 전기충격이 있는 날 아침에 내가 병동에 나타나면 환자들은 나를 두려워했다. 병동 에는 기분 나쁜 정적이 흘렀다. 전기치료가 끝난 한 환자는 내게 달려와서“나는 이제 전기치료 안 받지요? ”라고 반복해서 확인 하기도 했다. 환자들이 두려워하는 치료를 하면서 회의를 느꼈 다. 김성희 교수는 전공의들에게“ 네 아버지, 어머니에게 하지 못할 치료를 환자들에게 하지 마라 ”고 가르쳤다. 전기 충격은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그의 정신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김성희 교수는 환자치료에서나 전공의 교육에서도‘지금- 여기서 here-and-now’ 를 강조하셨다. 다시 말하면 환자 를 치료할 때‘너와 나의 관계’ 로 해석했다.

환자에게“네 어머니에게 효도해라.” 라고 가르치는 것은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 아니다.‘너와 나의 관계’ 만을 얘기 하는 것이다. 끝까지 환자와 나의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 어 환자가 다른 환자에게 행패를 부린다고 하자. 정신과 의 사는 행패부린 환자에게“그런 짓하면 안 된다. 사이좋게 지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 사건을 나와의 관계 속에서 말한다.“너도 내 환자고, 저 환자도 내 환자이다. 네 가 저 환자를 때린 것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관계된 일이니 나와 얘기 좀 해야겠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컨대, 정신분석 상황에서 환자가 치과의사에게 화

났던 이야기를 할 때 분석가는 분석가와 관계된 이야기로 해

석하는 것과 같다. 김성희 교수는 나의 성격문제를 다룰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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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재임용 탈락 때 내가 보여준 행동, 즉 당신과 관련지

어 말했다.“당신이 밖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그것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요. 내게 한 행동만 나는 말할 수 있소” 김성희 교수의 재임용 여부의 문제가 아니고 나와 김성희 교수 간에 해결해야할 문제가 되었다. 나를 포함한 제자들은“재임용에 서 탈락 시킨 것은 교수들이나 당국인데 왜 이 어른은 나만 가지고 이러시는가?”하고 괴로워했고 만나기를 피했다. 그 러나 그것은 나의 철없고 비겁한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저항 이었다. 결국 김성희 교수의 문제가 아니었고 나의 문제였다.

저자가 전남대병원 정신과에 입국한 후 첫 지회에서 김성 희 교수는 나에게“ 이 선생은 나를 보고도 인사를 안 했다.

다음 내 세미나에 참석하지 마라 ”고 했다. 나는 몹시 당황 했다.“그런 기억이 없는데 나도 모르는 행동에 대해서도 책 임져야 합니까? ”하고 항의했다. 김성희 교수는“여기 있는 사람은 다 안다” 고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했다. 나는 밤새 잠을 못자고 고민했다. 소외당한 기분이었고 버림받은 것 같 은 불안이 엄습했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날 의대 3학년 강 의실 앞을 지날 때 김 교수가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어서 나 를 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인사하지 않았던 장면이 떠 올랐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성희 교수는 내게 무의식을 이런 식으로 가르쳐 주었다.

다음 세미나 시간에 눈치 보며 참석했지만 아무 말씀도 없어 서 안심했다. 생각해 보면 일반 사회적 관계에서“ 당신이 내 게 인사하지 않았소 ”라고 대 놓고 말하기는 어렵다. 굳이 그 럴 필요도 없다. 김성희 교수의 교육은 철저하게 자기와의 관 계 속에서, 지금-여기라는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프로이트(1914)도 그의 논문‘기억, 반복 그리고 훈습’

에서“ 우리는 환자의 병적 상태를 다룰 때 정신분석으로 도 달할 수 없는 과거의 사건으로 다루는 대신에 현재의 사건 (present-day force)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고 하여 지금-여기 상황으로 다루어 주는 것을 강조 했다.

5. 교수 재임용 탈락(1976년, 59세)

1976년 김성희 교수는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 당했다. 1970 년대는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항하는 학원의 민주화 운동이 거셀 때였다. 교수 재임용 제도는 명목상으로는 무능 교수를 제거하는 제도였지만 내용을 보면 학원을 길들이기 위한 제 도였다. 이 당시 축출 당한 교수들 대부분이 민주화 후에 복 권되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전남의대의 어떤 보 직자도 김성희 교수의 학문적 깊이와 교육에 대한 열성을 부 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의 편수 같은 지엽적인 평가기준을 적용하여 부적격 교수로 평가하였다. 김성희 교수 는 평생에 단 한편의 논문 밖에 쓰지 않았다.‘정신분열증 망 상의 이해와 치료’ 가 그것이다(김성희 1975). 김성희 교수는

“정신과의 논문이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인데 새로운 발견이

라 생각하고 쓰려고 보면 이미 선현들이 다 말씀하신 것이었 다 ”고 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치료의 경험은 마음으로 전 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글로 전하기 어렵다는 말씀도 했다. 사 실 교수의 학문의 깊이를 논문 편수로 측정하는 것은 궁여지 책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불합리한 것이다.

김성희 교수의 재임용 탈락의 배경에는 그 당시 의과대학 실 세 교수들의 정신과에 대한 몰이해와 개방병동 체제에 대한 몰 이해가 있었다고 본다.“ 미친 사람을 왜 가두지 않는가? ” ,“ 병원 운영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지, 왜 수입을 올리지 못하는가? 입원 환자 수를 올려라. ”“왜 간호원의 인격을 무시하는가? 그런 식 으로 나온다면 정신과에 간호원을 줄 수 없다 ”고 했다.

정신병동의 간호사가 화장을 진하게 하고 출근했다. 김성희 교수는 환자들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행동이라고 꾸중했다. 부인 과 격리되어 성생활을 못하고 있는 입원 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화려하게 화장한 젊은 간호사는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불필요한 자극으로부터 환자를 보호하자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간호원은“ 김성희 교수가 화장도 못하게 한다 ”고 병원 당국에 보고했던 것이다. 병원장과 간호부장은 김성희 교수의 말은 들어 보지도 않고 간호원의 말만 듣고 김성희 교수를 인격 모독자로 매도했다.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혹자는 김성희 교수가 전남의대 졸업생이 아니고 타지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텃세에 밀렸다고도 한다. 그가 전남의대 출신이고 호남 사람이었다면 그런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시대 한국 사회의 어느 구석 을 들여다보아도 유아기적 지역감정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김성희 교수의 성격적인 문제가 인간관계를 악화 시켰을 것 이라는 의견도 있다. 타협을 모르고 고집 센 성격이 문제라 는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사건을 통해서 그가 왜 그런 평 가를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1950년대에 있었던 일이다.

미생물학 교수 중 한분이 논문을 공개 발표했다. 고아원에 수 용된 고아들에게 Shigella(이질)균을 투여하고 발병을 조사하 는 인체 실험이었다. 우연히 이 자리에 참석했던 김성희 교수 는 분개했다.“불쌍한 전쟁고아들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무슨 권리로 이런 실험을 하는가? ”라고 항의했다. 발표자인 교수는

“고아원 원장에게 허락 받았다. ”고 대답했다. 김 교수는“고아

원 원장은 아이들을 잘 돌봐주라고 위탁 받은 사람이다. 아이

들을 실험대상으로 내줄 권리가 없다. ”고 말했다. 이때 김 교

수의 옆에 있던 소아과 교수가 김 교수를 말렸다.“ 이봐요. 김

교수, 남의 과 일을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때까지 김

교수와 그 소아과 교수는 비교적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김

교수는 그에게 크게 실망했다.“ 당신은 소아과 의사요. 아이들

이 저런 일을 당한 것을 보면 누구보다도 소아과 의사인 당신

이 분개해야 할 것이요. 그런데 오히려 내 입을 막으려하다니

당신은 소아과 의사가 아니요. ”그 후 김 교수는 그 소아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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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性熙 敎授의 生涯와 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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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인체 실험한 미생물학 교수는 그 논문을 학회에 발표하지 않았다. 4.19 혁명이 난 후에 학생들 의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다. 비인간적인 실험을 보고 분개하는 김 교수와 소아과 교수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전남의대의 분위기는‘김 교수가 남의 과의 일에 너무 간섭하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뿐만 아니라 충고하는 소아과 교수에게 까지 화를 냈다. 괴팍한 사람이다.’ 는 것이었다.

6. 뇌출혈(1989년, 72세)

재임용 탈락 후 김성희 교수는 서울로 이사했다. 미아리의 작은 서민 아파트에서 홀로 살았다. 퇴직금 이자로 생활 했 다. 가난하고 외로운 생활이었지만 주민들에게 좋은 스승의 역할을 했다.

1989년 72세에 뇌출혈이 왔다. 좌측 마비가 왔다. 조카 따님 내외가 큰 아버지인 김성희 교수를 모셨다. 그해에 전 남의대 출신 정신과 의사들을 중심으로 김성희 교수 명예회 복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났다. 병이 점점 악화되 어 휠체어를 탈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관절이 굳었고 하지는 순환장애로 괴사가 오고 있었다. 1998년 고인이 되신 나주 국립정신병원의 강진상 선생과 뜻을 함께하는 김성희 교수 의 제자들을 중심으로‘김성희 교수 후원회’ 가 만들어 졌고 1998년 9월 김성희 교수를 서울로부터 광주로 모셔왔다.

광주에 계신 동안 정신과 실습학생들에게 강의했다. 정신 과 전공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인간성의 본질과 의사의 역 할, 환자를 존중하라는 말씀이 주된 가르침이었다. 김 교수 는 침대에 누워서 강의했다. 신체의 모든 관절은 굳었고 유 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지체는 오른 손 뿐이었다. 눈도 한 쪽 눈 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호령하는 음성이나 권위는 변함없이 제자들을 압도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해지지 않는 자존심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광주에 계신 6년여 기간 동안 저자에게 들려주신 말씀 중에는 보노보(Bonobo) 원숭이 사회(Waal과 Lanting 1997)에 대한 말씀이 많았다. 보노보 사회는 침판지 사회와 달리 모계 중심 사 회이고 대단히 평화로운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진화론적 으로 보노보는 인간에 가장 가까운 영장류이기 때문에 인간 가 족 구조의 원형도 보노보 사회처럼 모계 중심사회이고 평화를 존중하는 사회일 것이라고 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모계 중심 사 회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인은 그 근본이 평화 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했다. 일본 민족은 침팬지 사회처럼 힘 을 중요시 하는 부계사회의 특징을 보인다고 했다(Lee 2000).

그리고 김성희 교수가 마루이 교수에게 개인분석 받은 경험을 자세히 들려주기도 했다. 개인분석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1982 년에도 저자에게 말해 주었다. 그때 김성희 교수는“ 이 이야기 는 내가 누구에게도 한 일이 없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하려 고 하니까‘내가 이제 죽을 날이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일생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죽을 때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7. 서거와 그 후(2003년 86세)

2003년 12월 31일 아침에 간병인이“할아버지 저 왔어 요 ”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방안에서 아무 응답이 없 었다. 라디오는 켜져 있었고 오른 손에 안경을 걸치신 채 김 성희 교수는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십자매가 교수님의 임종 을 지켰다. 김성희 교수의 장지는 부인과 가족들이 있는 이 북이 잘 보이는 임진강 변의 공원묘지이다.

묘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생전에 김성희 교수가 제 자들에게 했던 말씀이다.

“네가 나와 뜻을 같이하고 환자를 위하여 살고 있다면 세상 끝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너와 나는 동지다. 그러 나 뜻이 다르다면 아무리 같이 모이고 함께 있다 하더 라도 너와 나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다”

‘전남의대 정신과의 스승을 위한 모임(내용 상은 김성희 교 수 후원회였다)’ 을 토대로‘고 김성희 교수 기념사업회’ 가 발족되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제자들이 받아 적은 김성희 교 수의 말씀들을 모아‘김성희 교수의 생애와 사상’ 제 1, 2, 3 권을 발간하였다.

요 약

한국 최초의 정신분석가라고 말할 수 있는 김성희 교수의 생 애와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는 20대 초인 1930대 말에 프로이 트의‘꿈의 해석’ 을 통하여 정신분석을 만났다. 의대 졸업 후 일본에 건너가 센다이 제국대학 정신과에서 마루이 교수에게 수 련 받았다. 특히 수련 초기에 3개월간, 1회 60분씩, 주 6회 카우 치를 이용하는 개인 정신분석을 받았다. 그리고 동경의 고사와 선생에게 주 1회씩 정신분석 이론교육을 받았다. 마루이 선생은 아돌프 마이어의 제자이고 고사와 선생은 비엔나에 가서 개인분 석을 받은 분이다. 이 두 분은 일본 정신분석학회의 창설자이다.

1952년 한국 전쟁 직후 김성희 교수는 전남의대에 정신과 를 창설하고 1976년 까지 교직생활을 했다. 불행히도 한국 전쟁과 정국의 혼란으로 김성희는 국제 정신분석학회와 교 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정신분석의 기본 정신을 제자들 에게 온 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는 프로이트의 논문 중 1912년에 출판된‘정신분석의에

대한 정신분석 치료 상의 주의(Recommendation to the physi-

cian practising psychoanalysis)’ 를 가장 인정했다. 그는‘자

유로운 주의력(free floating attention)’ 에 대해서 인간성의 본

질을 이해한 사람만 이런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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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武 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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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이것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 논문을 번

역하기도 했다. 그는 정신분석의 기법은‘only free association, no interpretation’ 이라고 주장했다. 분석가의 해석은 환자의 자 유연상을 방해한다고 했다.‘provoked association’이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1923)의‘구조론(structural theory)’에 대 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인간정신을 이론의 틀 속에 가두려했다는 것이다.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적 틀을 씌우려는 것은 서양 사람 들의 공통된 특성인데 프로이트도 이런 서구인의 특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했다. 정신분석의 기법 면에서 김성희 교수는 지정 학적 모델의 자유연상을 고수 했다고 말할 수 있다.

2003년 12월 31일 그는 홀로 세상을 하직하셨다.

References

김성희(1975):정신분열증 망상의 이해와 치료. 전남의대 잡 지, 12:699-711

김성희 교수 기념사업회;이순규, 이무석, 정광현 편저(2004):

‘김성희 교수의 생애와 사상’ 제 1 권. 서울, 이유출판사 김성희 교수 기념사업회;이순규, 이무석, 정광현 편저(2005):

‘김성희 교수의 생애와 사상 제 2 권(대화)’서울, 이유출판사 Freud S(1900):Interpretation of Dreams. SE 4-5, London:

Hogarth Press.

_______(1912):Recommendation to the physician practising psychoanalysis. SE 12, London:Hogarth Press. pp111-120 _______(1914):Remembering, repeating and working-through.

SE 12, London:Hogarth Press. p151

_______(1919):Lines of advance in psycho-analytic therapy.

SE 17, London:Hogarth Press. pp159-168

_______(1923):The Ego and the Id. SE 19, London:Hogarth Press.

Lee MS(2000):The father figure in Korean mind and psycho-pa- thology in terms of father-son relationship. J Korean Psy- choanalytic Soc, 11:282-288

Waal FD, Lanting F(1997):Bonobo, The Forgotten Ape. Lon- 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ABSTRACT

Life and Works of Professor Sung Hi Kim

Moo-Suk Lee, M.D., Ph.D.

The author introduced professor Sung Hi Kim’s life and works who thought to be the first Korean psychoanalyst.

He met the Freud’s psychoanalysis in the book of ‘Interpretation of Dreams’ when he was a medical student in his early twenties, late 1930s. He had the chance of psychiatric training in Sendai Imperial University Hospital in Japan with professor Marui who was one of the students of Professor Adolf Meyer and also one of the founders of the Ja- panese Psychoanalytic Society. In the beginning of training, professor Marui suggested Dr. Sung Hi Kim the personal analysis which was 6 times a week, 60 minutes a session using couch. The analysis was terminated 3 months later.

And Dr. Sung Hi Kim had didactic training of psychoanalytic theory with Dr. Kosawa Heisaku in Tokyo every week.

Dr. Kosawa is another founder of the Japanese Psychoanalytic Society.

In 1952, just after the Korean War, professor Sung Hi Kim established psychiatric department of Chonnam National University Medical School in Gwangju Korea. Unfortunately, he could not have contact with international psychoanalytic association due to social chaos by the Korean War and political revolutions in Korea. He, however, taught and practiced the psychoanalysis in the university sincerely for 24 years as a professor until 1976.

Professor Kim appreciated Freud’s papers recommendation to the physician practicing psychoanalysis(1912)’

the most. He told that only the man who experienced the essence of mind as free floating attention could write it.

Freud himself experienced it.

Professor Kim translated the paper into Korean. He strongly insisted only free association, no interpretation.

Sometimes analysts’ interpretation may analysands’ association. It could induce provoked association. Professor Kim assumed a critical attitude toward Freud’s structural theory. The structural theory may confine human mind to narrow frame of theory. It is common nature of western people to try to analyze a phenomenon and to make a theoretical frame. Professor Kim told the author that as one of the western people, Freud also could not avoid the nature of western people. Therefore, Professor Kim stayed at free association of topographical model.

Professor Kim passed away last December 31, 2003.

KEY WORDS

: Sung Hi Kim·Psycho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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