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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사 강의안 ● 11주차: 세도정치의 전개 세도정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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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사 강의안 ●

11주차: 세도정치의 전개 세도정치의 시작

1) 순조의 즉위와 세도정치의 시작

1800년 조선후기 개혁정치와 문예중흥을 이끌던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선의 중흥을 이끌던 개혁군주 정조의 급서는 이후의 조선 정국에 큰 파란을 몰고 왔다. 정조 가 1800년 6월에 죽고, 11세의 순조가 뒤를 이으면서 시작된 영조, 정조와 같은 강력한 군주의 정치 권력의 공백은 대왕대비와 외척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른바 세도정치기의 서막이 열린 것 이다. 19세기 전반 어린 군주인 순조(1800~1834), 헌종(1834~1849)과,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철종(1849~1863) 등 허약한 왕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왕실의 외척 가 문은 대왕대비나 왕대비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아 확고하게 권력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왕이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하고 정치가 소수의 외척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조선왕조 는 점차 몰락의 나락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1801년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의 소생인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15세의 어린 나이로 영조의 계비로 들어왔던 경주 김씨 정순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사도 세자의 죽음에도 깊이 관여했던 노론 벽파 정치적 입장을 띠었던 정순왕후와 그의 친정 경주 김 씨 세력은 정조와 무척이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조 재위 기간에는 이렇다 할 세력을 형성하 지 못했지만 증손자 뻘 되는 순조의 즉위는 정순왕후와 그의 측근들에게는 정조대에 펴지 못했 던 정치적 야심을 단번에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후 곧바로 정 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혁파와 개혁정치의 진원지인 규장각이 축소된 것은 정치적 변화의 신 호탄이었다. 이어 반대파인 남인 세력의 탄압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1801년 정순왕후와 그의 친척인 김구주, 김관주 등은 1801년 천주교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남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는데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등은 처형되었고, 정약용은 장기 로 유배되었다가 강진으로, 정약전은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1805년 정순왕후가 사망한 후에는 순원왕후를 구심점으로 하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본격 적으로 전개되었다. 순조는 정조를 도왔던 노론 시파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 서 안동 김씨 가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당시 안동 김씨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과 척화 파의 대표자인 김상헌 이후 17~18세기를 통하여 수많은 재상을 배출한 서울의 명문대가로 성장 하였는데, (도판: 정선의 청풍계(김상용의 집) 그림) 순조의 즉위는 안동 김씨의 권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되었다. 세도 정권은 안동 김씨 이외에도 남양 홍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대구 서씨, 반남 박씨 등 명문 양반가문이 혈연적으로 깊은 연결을 맺으면서 정권에 참여하여 서울 양반의 연합정권과 같은 성격도 띠고 되었다. 국왕은 그야말로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로 전락했 다.

2) 잊혀진 왕세자 효명세자

1815년 이후, 20대 중반이 된 순조는 기존의 노론 벽파를 제거하고 시파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국정을 직접 챙기고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등 국왕의 국정주도권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만기요람을 편찬하고, 정조의 홍재전서와 같은 형태의 국왕 문집 순재고를 저술하고, 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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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담은 동궐도를 국가 사업으로 제작한 것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처가 안동 김씨 세도가들의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안동 김씨의 외 척 세력은 지방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자파의 인물들을 권력에 포진시켰고, 왕권은 점차 허약해져 갔다. 외척 세도가의 권력의 집중과, 견제세력 약화는 매관매직의 성행 및 삼정의 문란과 향리층 의 폐단을 불러왔고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1811년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홍경래난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세도정치가 일차적인 원인이 되었다.

순조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자신의 아들이자 개혁 성향을 지녔던 효명세자 (1809-1830:후에 익종으로 추존됨)로 하여금 정치의 실무를 맡게 했다. 이른바 대리청정을 통 하여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는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로서 풍양 조씨 가문은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기도 했다.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4년간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 세도가문 견제, 왕실의 권위 회복에 힘을 쏟았 다. 순조가 즉위한 후 30주년을 맞아 숙종대와 영조대의 전례를 논하면서 순조의 진찬(進饌)을 주관하면서 국왕권의 강화를 추진하였고, 궁중 무용의 창사(唱詞)를 직접 지을 정도로 문화면에 도 관심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세도정치의 그늘을 뚫고 정치와 문화면에서 왕권의 강화를 꾀하던 효명세자 역시 요절하고, 그의 아들인 8세의 헌종(1834~1849)이 즉위하면서 왕 실의 권위는 더 없이 추락하였다. 19세기 전반 조선왕조의 불운이 연속되는 순간이었다. 효명세 자는 그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하는 의식을 그림으로 정리한 「왕세자입학도」(도판: 왕세자 입학 도, 규장작명품도록 참조)에 잠시 그의 모습만을 남겨둔 채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3) 19세기 세도정치의 주역, 안동 김씨

8세에 즉위한 헌종을 대신해서는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가 6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효명세자 의 부인이자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풍양 조씨)가 있었지만, 헌종의 비 효현왕후를 안동 김씨 김조근의 딸로 맞이하는 등 안동 김씨 세도의 위세는 보다 강력해졌다.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 하는 철종의 비 역시 김문근의 딸로서 안동 김씨 출신이었다. 우리가 흔히 19세기 세도정치를 떠올릴 때 안동 김씨를 빠뜨리지 않는 것은 19세기 60여년간 그만큼 안동 김씨의 위세가 대단 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세도정치의 전개에 대해 대부분 어린 왕의 즉위에 대해 그 원인을 찾고 있지만, 순조 이전에도 어린 왕이 즉위한 사례는 꽤 있었다. 단종이 12세, 성종이 13세, 명종이 12세, 숙종이 14세에 즉위한 왕들로, 단종과 명종의 경우에는 숙부와 어머니가 권력에 강하게 개입했지만 성 종이나 숙종과 같은 경우는 신하들의 보필을 받아 왕권이 외척의 힘에 결코 휘둘리지 않았다.

그런데 19세기에만 유독 세도정치가 극성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만큼 세력있는 가문이 정치 집단화하고, 17, 18세기에 행해졌던 붕당간의 견제와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과의 정략적인 혼인은 이들 외척 세력에게 권력의 날개를 달아주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철종(1849-1863)의 즉위에서 절정을 이룬다. 헌종 사후에도 여전히 생존했던 순원왕후는 사도세자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후손인 강화도령 이원범을 철종으로 왕위에 올렸다. 철종의 선조들은 정조대에 정순왕후 세력에 의해 역모에 연루되었고, 1844년에는 형 회평군이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집안 모두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철종은 겨우 목숨만을 유지한 채 농사꾼으로 근근히 살고 있었지만 항상 신변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 다. 그러다가 1849년 조정에서는 그를 왕으로 모시러 왔고 불안감이 교차한 채로 그는 얼떨결 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철종을 왕위에 올린 것은 허수아비 왕을 대신하여 안동 김씨 세도가 들이 마음대로 정치를 좌지우지하겠다는 계산과 이들을 대표하는 순원왕후의 입장이 절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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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떨어진 희대의 해프닝이었다. ‘능력이 없는 국왕 추대하기’. 이것이 19세기 중반에 벌어진 엄 연한 현실이었고, 세도정치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세도정치에서 파생된 정치기 강의 문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들의 몫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철종대에 진주 등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대규모 농민항쟁이 일어나는 것은 세도정치에서 파생된 정치의 부패와 타락상이 백성들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