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읽기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 길게 부는 한지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
지전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 정박 중의 어두운 용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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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항지’의 이해
이 시는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차가운 겨 울날의 항구 모습과 눈송이를 통해 차분하게 묘사해 낸 작품이다 . 화자의 감정 이나 사상은 배제되어 있으며 ,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만 일관하고 있어 한 폭 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 중심 이미지는 정박해 있는 배이며 , 그 배의 앙상함이 주는 쓸쓸함과 겨울밤 흩날리는 눈송이가 주는 황량함이 전체적 으로 우울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
화자는 '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 도착한 항구는 화자가 머문 곳이자 배가 정 박한 곳이다 . 항구는 떠나는 배와 도착하는 배가 머무르는 곳으로 , 여행의 끝 인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곳이다 .
따라서 이 시에서 항구는 화자의 방랑과 안주가 접합된 장소로서의 이중적 역할 을 한다 . ' 길게 부는 한지의 바람 / 바다 앞의 집들을 흔 ' 드는 스산한 겨울밤 , 마치 눈이라도 내릴 듯 불빛이 낮게 느껴지는 항구에서 화자는 우울한 마음으로 밤 풍경을 바라보며 서 있다 . 화자의 막막한 심정은 ' 구겨 넣고 ', ' 꺼 버리
고 ' 와 같은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되어 나타나 있다 .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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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항지’의 이해
항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화자는 이제 ' 조용한 마음으로 / 배 있 는 데로 내려간다 '. 화자는 그 곳에서 정박중인 배들이 모두 항구 쪽으로 뱃머 리를 향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 멀리 바다를 항해하던 배들이 지친 항해를 끝내고 항구로 돌아와서 편안히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한 화자는 자신 도 오랜 방랑을 끝내고 정박 중인 배처럼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 그 때 , '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의 눈송이 ' 가 ' 하늘의 새들 ' 과 함께 날아오른다 . ' 눈송이 ' 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속성을 가진 것으로 화자의 방 황하는 젊음을 표상한다 .
그러므로 마지막 구절은 바람에 흩날리며 내리는 눈발을 현란한 이미지로 그려 냄으로써 화자의 암울한 의식을 자극하는 동시에 , ' 하강 ' 의 이미지를 ' 상
승 ' 의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이룬다 . 막연함 , 차가움 , 덧없음 등의 정 자신도 오랜 방랑을 끝내고 정박 중인 배처럼 안주하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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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항지’의 이해
즉 , 거대한 용골의 모습으로 정박해서 ' 항구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 ' 는 배의 이미지는 어둡고 암울한 현실을 버텨 이겨내는 견고함의 의미를 화자에게 떠올 려 준 것이다 . 그로부터 비로소 화자의 암울했던 의식은 하늘을 나는 새를 통해 정화되고 오랜 방황을 끝낼 수 있게 된 것이다 .
암울한 현실을 버텨 이겨내는 견고함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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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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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이거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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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무’의 이해
신경림 시인은 , ` 농무 ' 란 원래 없는 말인데 이 시를 쓰면서 지어낸 것이라 했 다 . ` 농무 ' 란 농악을 할 때 추는 춤을 가리키는 것일텐데 , 말은 시인이 지어낸 것이지만 그 몸짓은 이미 있던 것이다 . 이 시에는 1960 년대의 농촌 모습이 잘 담겨 있다 . 사실 그 모습은 여러 정황을 볼 때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놀이의 분위기가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그 놀이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다 . 놀이와 춤이 분풀이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 농부들은 학교 운 동장에서 무슨 약식 공연을 했던 모양이다 . 공연은 끝났고 , 학교 앞 소주집에 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허탈감이 밀려왔고 , 그들 모두 장거리에서 다시 춤 판을 만드는 과정이 찬찬히 그려지고 있다 .
1960 년대의 농촌 모습이 잘 담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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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무’의 이해
아이들과 처녀애들만이 춤판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지만 보름달 아래 농부들은 임꺽정의 주인공들처럼 신명을 낸다 . 술자리에서 장거리의 춤으로 이어지는 춤판의 과정 묘사에 끼어드는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 라는 구 절이나 , ‘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 라는 구절은 농촌의 현실과 농부들의 심정을 잘 전해 준다 . 그래서 현실의 불우한 조건을 넘어선 흥 겨운 축제를 표방하고 있는 이 시의 표면적 주제는 , 뒷면에 숨겨진 당대의 사회
정치적 현실을 다분히 문학적인 방식으로 고발하
․ 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 고발의 방식은 문학을 압도하지 않으며 , 독자들에게 충분히 자발적인 참여 를 유도하고 있다 . 시상의 진전과 더불어 나아가다 보면 , 우리도 어느새 시 속 의 농무와 함께 ` 한 다리 들고 날나리를 불 ' 고 , `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
들 ' 게 된다 . 그리고 그 공감과 참여가 현실을 잊고 얄팍한 위로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 그 현실의 착잡함을 이겨내는 민중의 생명력을 확인하는 일에 귀 결됨을 깨닫기란 어렵지 않다 .
현실의 불우한 조건을 넘어선 흥겨운 축제를 표방
한국 현대시 읽기
‘ 농무’의 이해
이 시는 좋은 민중시 , 농촌시의 전범으로 손색이 없다 . 장르의 특성상 시는 사 실주의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편이 아니다 . 그러나 그 가능성을 아예 부정할 수 없다면 그 방도는 신경림이 개척한 시의 영역과 매우 가까이 있을 것이다 .
좋은 민중시 , 농촌시의 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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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5 가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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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오는 날 ,
종로 5 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울 물었다 .
밤 열한시 반 ,
통금에 쫓기는 군상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
초등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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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
그렇지 .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 그의 누나여을까 .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 때 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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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사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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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없었다 .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
봄이면 쑥 , 여름이면 나무뿌리 ,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 변한 것은 없었다 .
이조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 도시락 차고 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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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오는 날 ,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
그 소년의 죄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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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 5 가’의 이해
이 시는 시적 화자가 종로 5 가 신호등 앞에서 동대문을 묻는 한 소년과의 만남 을 계기로 당대 민중들의 운명을 서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
즉 , 산업화와 근대화를 부르짖던 1960 년대 사회적 상황 속에서 도시의 노동 자나 창녀로 변해 가는 농민과 민족의 모습을 역사적 시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 농민의 희생과 농촌의 붕괴를 담보로 해서 이루어진 산업화 정책으 로 인해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피폐된 농촌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도시 의 노동자나 창녀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었다 .
그러므로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의 화자 의 눈에 비친 현실은 ‘이슬비 오는 날’로 시작하여 ‘비에 젖고 있었다’로 끝나는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만큼 침울하고 고통스럽다 .
한 소년과의 만남을 계기로 당대 민중들의 운명을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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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 5 가’의 이해
전 9 연의 이 시는 내용상 크게 5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 ~ 2 연으로 한 소년과의 만남이 제시된 부분이다 . ‘ 이슬비 내리 는 날’과 ‘통금에 쫓기는 밤 열한 시 반’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종로 5 가 서시오 판 옆’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자아내는 절박한 상황은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대비됨으로써 더욱 고조된다 . 한편 , ‘ 서시오판’은 신호등을 뜻하는 것으로 소년의 운명의 갈림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
둘째 단락은 3 ~ 4 연으로 소년의 모습과 , 그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소년의 운명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 ‘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에서 때묻 지 않은 동심을 엿볼 수 있으며 , ‘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는 / 먼 길 떠나온 고구 마’는 따스한 온정을 지닌 존재임을 알게 해 준다 .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한 소년과의 만남을 계기로 당대 민중들의 운명을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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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 5 가’의 이해
셋째 단락은 5 ~ 6 연으로 언젠가 보았던 창녀와 막노동자의 모습을 회상하는 부분으로 , 화자는 그들을 소년의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 . 화자는 ‘양지 쪽 기 대 앉아 /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는 ‘부은 한쪽 눈의 창녀’
와 ‘고층 건물 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는 ‘등짐하던 노동자’가 겪는 개인적 비극을 세 개의 외세 ― ‘대륙’ , ‘ 섬나라’ , ‘ 새로운 은행국’에서 그 원인 을 찾고 있다 .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민족의 고난을 ‘대륙’과 ‘섬나라’로 나타내고 있으며 , 미국 자본에 의존하여 수 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을 펼치고 있는 60 년대 경제 정책을 ‘새로운 은행국’으로 제시하고 있다 . 이와 같은 시인의 투철한 현실 인식은 결국 화자로 하여금 현실 은 ‘이조 오백 년’과 다를 것이 없으며 , 8 연의 ‘북간도’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일제 시대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민족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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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 5 가’의 이해
넷째 단락은 7 ~ 8 연으로 농촌의 황폐한 현실과 , 그로 인한 농민들의 이농 ( 離農 ) 현상을 요약적으로 보여 주는 부분이다 . ‘ 남은 것은 없었다’ , ‘ 변한 것 은 없었다’ , ‘ 이조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로 이어지는 화자의 애환 어린 탄식 과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라는 자조 섞인 독백에서 당시 농촌 현실의 궁 핍화를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 .
마지막 단락인 9 연은 1 연의 시상을 변형 반복하는 부분으로 , 화자의 신분을
‘노동으로 지친 나’라는 구체적 표현으로 알려주고 있다 . ‘ 낯선 소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지식인의 시각이 아니라 , 같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의 고통 을 바라보는 화자의 동정심은 마침내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 비에
같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소년의 고통을 바라보는 화자의 동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