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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R I H S 서 평
길, 삶을 말하다
박화권|국토연구원 연구원(서평)
역사, 길을 품다
최기숙 외 9인 지음 | 글항아리 | 366쪽 | 값 16,000원
조선시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조선은 어떠한 시대인가. TV 역사 드라마의 과장됨을 입고 있는 모습일까? 돌아보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한 유적을 통해서 알게 된 조선인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조선은 조상들 이 살았던 옛 시대의 단편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 만 그 과거 속에도 우리와 똑같은 삶이 있었다. 조 선시대의 모습을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을 통하여 그 실체를 있는 그대로 쓴 글이 바로「역사, 길을 품다」다. 이 책은 연구자 열 명이 모여‘길’이라는 공통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조선의 생활상을 구체 적인 사료와 일지를 바탕으로 서술해 엮었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은 점은‘길’을 소재로 삼 았다는 것이다. 계획가의 입장에서‘길’은 넓히고,
주변을 발전시켜야 하는 것, 즉, 건설적인 대상으 로 여겨진다. 하지만 길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다.
이 책은 누군가 걸어왔고, 걷고 있고, 앞으로 걷게 될 길을 보라고 말하면서, 더 나아가 그 길을 어떻 게 걸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저자들은 열 개의 길을 통해 조선시대의 삶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밀명을 받은 세 명의 장수가 정탐을 위 해 떠나야했던 첩보길. 압록강을 건너 대안지역의 사정을 파악하고 더불어 조선인들이 압록강을 통 해 월경하는 이유를 정탐하기 위해 떠났던 길이다.
두 번째, 회한과 그리움으로 아내를 떠나보낸 장례길. 아내를 잃은 슬픔을 시와 문으로 표현한 심노송이 떠났던 장례길은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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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조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서원의 철거를 막기 위한 상소길. 안동의 후손들이 상소 문을 올려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게 되는 과정 을 담고 있다.
네 번째, 예순이 넘은 나이에 임자도로 유배를 떠나는 조희룡의 유배길. 정치적 다툼에 억울하게 휘말려 떠나는 청천벽력과 같은 그 길은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는 중요한 것은 남을 탓하 는 것도 장소나 환경이 아니라 시간의 알맹이라고 생각했다.
다섯 번째, 업무로 인해 타지인 한양에서 고달 픈 생활을 하다 가족을 보기 위해 떠난 휴가길. 하 급관리 황윤석이 노잣돈을 빌려 집에 도착하기까 지의 긴 여정을 담은 길이다.
여섯 번째, 민심을 파악하고 부패를 척결하며 걸어야 했던 암행어사길. 남의 눈을 속이면서 걸 어야 했던 박내겸은 이상과 현실이 어긋날 때마다 자신과 지배질서를 합리화하면서 걸어야 했다. 박 내겸의 길은 나라와 백성의 중간을 연결해 주어야 하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길이었는지를 생각하 게 한다.
일곱 번째, 자신을 괴롭히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떠나는 요양길. 한강 정구는 부와 명예를 뒤 로 한 채 길을 나선다. 단순한 요양길에 불과할 수 있었지만 그의 길을 배웅하고, 따라나서 병수발을 한 많은 제자들의 모습은 교육의 참길 속에 피어 나는 향기로움이리라.
여덟 번째, 제주도 유생 장한철이 출세를 향해 떠나게 되는 과거길. 소수의 급제자들보다 먼 길 을 다시 돌아 고향으로 가는 다수의 낙방자들의
길이 더 깊고 멀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홉 번째, 매일매일 손님 치르기 바빴던 지방 수령의 마중길. 천안 수령 이유간의 일상은 업무 와 동시에 여러 이들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상대 에 따라 다른 격식을 갖고, 개인적인 청탁을 하러 오는 사람 등을 마중하는 길이 무엇이 그리 복잡 하고 어려운 것인가 하겠지만“그게 우리네 사는 예인 것을”이라 답하는 그의 모습은 현대에서도 지켜야 할 덕목이라 생각된다.
열 번째, 팔도를 횡단하며 마을과 마을의 소식 을 덤으로 전해주던 보부상길. 이 길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생존의 길이기도 하였고, 밤낮 을 가리지 않으며 위험을 감수하고 물건을 팔아야 하는 생존의 길이기도 하였다. 보부상들의 터전인 장터는 서민들의 생활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은 길의 여정에 따라 그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그림과 서책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시대의 생 활길을 엿보는 데 충분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또 한 이 책은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우리가 언젠가 는 겪게 될 삶의 과업들을 어떻게 맞이하고 대해 야 하는지에 대한 길잡이 역할도 하고 있다.
길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따라 길을 걷 는 동안 보이는 것이 다를 것이다. 도달하는 것만 이 목적이라면 빨리 갈 수 있되 많이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잠시 개발의 속 도를 멈추고 역사가 담긴 길을 보라고 말한다. 천 천히 역사의 길을 따라 걷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