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영상론 3.
원근법
원근법의 기원
광학을 기하학적으로 확립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을 고대 그리스의 유클리드였다. BC 4세기에 유클리드는 광학에 최초로 일관된 수학적 모델을 부여했는데, 그의 <<광학>>은 거의 전적으로 기하학의 한 연습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
다.(Edgerton, 1975, 68)
유클리드는 시각의 힘이 항상 시각광선(visual rays)로서 눈으 로부터 앞으로 나가며, 이 광선은 ‘직선’으로 도해될 수 있다 고 믿었다. 이 광선들은 분기되어 관찰자의 눈에 꼭지점을 두 는 상징적인 원뿔을 형성한다. 그는 이 시각원뿔(visual cone) 은 도해될 수 있기 때문에 기하학에서 추상적인 형상들을 관 장하는 것과 동일한 법칙에 종속된다고 생각했다.
유클리드가 기하학에 광학을 기초하려 한 것은 자연적인 시각 현상에서 평행선이 멀어질수록 수렴되는 현상과 멀리 있는 대 상이 작아 보이는 현상, 즉 이른바 ‘자연 원근법(perpectiva naturalis)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유클리드는 시각적 크기는 시각의 각도(visual angle) 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각도는 불변하므로 거리에 따라 크 기가 달라지는 물체의 객관적인 크기를 시각의 각도에 의해 측정하고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Pirenne, 1970 60)
그러나 유클리드는 후대 르네상스인들이 인지하기 시작했던 소실점이란 것을 몰랐고, 따라서 시각의 장에서 눈이 위치하 는 지점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에 따라 크기가 달라 진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이 현상의 법칙을 발견할 수는 없 었다.
거리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환영은 시각 각도에 의해 결정 된다는 그의 규칙 역시 후대의 르네상스인들처럼 평행선이 수 렴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코 수렴되지 않는 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소실점 현상과는 상관 이 없었다.(Edgerton, 1975 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클리드 의 기하학적 광학은 이후 르네상스 원근법의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원근법적 시각양식의 확립에 또 하나의 기여를 한 것은 프톨 레마이오스(Ptolemy)의 광학논문이다. 그의 논문은 색채와 시 각적 환영 및 대기원근법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가까 이 있는 것은 밝은 색으로, 멀리 있는 것은 더 어두운 색으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상의 크기를 지각하는 문제 에 있어서 유클리드와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후대 원근법 이론 확립에 매우 중요한 기 여를 하였다.
즉 원근법에서 사물의 크기는 거리의 문제이기 때 문이다. 즉 멀리 있는 것일 수로 크기가 작아진다
이 크기 축소의 문제는 보는 사람의 위치와 관련되
어 있다. 거리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현상은 시점
이 고정되어야 일관성있게 파악되고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을 그림에서 소실점에 대응된다.
선원근법과 소실점
좌안, 우안, 소실점
원근법 사진들
반 고흐, 아를르의 침실
살바도를 달리, 초봄의 나날들
레오나르드 다빈치, 최후의 만찬
시슬리의 인상주의풍그림, 파티느의 유화
(브리태니카 사전 그림)
동양의 원근법
-고원법: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 처 럼 그림
-평원법: 평행된 시각으로 멀리 바라보는 것 처럼 그림
-심원법: 아래를 내려보는 것 처럼 그림.
원근법의 창안
원근법은 15세기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 창안되고 최초의 체계적인 이론화 작업 이 이루어졌다. 1425년 건축가였던 브 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의 실험은 기하학적 원근법 의 탄생에 있어서 결정적이 계기였다. 거울을 이용한 그의 실 험은 소실점의 효과를 논증하는 것이었고, 15세기 플로렌스 시민들의 눈에는 그이 실험이 낳는 리얼리즘 효과는 거의 마 법과도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건축가였던 브루넬레스키는 이로써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성취의 하나인 원근법의 창시자로 자리매김된다. 그리고 10년 뒤 플로렌스의 주요한 인문주의적 교양인 알베르티(Leon
Battsta Alberti)는 << 회화론Della pittura>>(1434~6)을 출간 함으로써 이 원근법을 최초로 이론화하고 체계화하였다.
회화의 원근법과 사진의 원근법
브루넬레스키가 창안하고 알베르티가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원근법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여기에는 15세기에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힘입은 바 크다. 마샬 맥루한이 지 적한 바와 같이 활판 인쇄술은 지각의 영역을 청각적인 공간 에서 시각적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원근법의 빠른 확산과 수용은 이러한 지각장의 변화 및 인쇄 술이라는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의해 더욱 용이해졌다. 인쇄술 의 혁신과 서적 출간의 증가는 원근법의 체계화된 원리가 전 달되는 것을 촉진시켰고 원근법의 회화 역시 판화의 형태로 많은 수용자들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Edgerton, 1975 164, Iviss, 1973 9, Jay, 1993 66-69).
기하학의 논리에 의해 원근법은 시각 공간을 합리화하였다. 이 합리화는 시각의 장에 수학적 공간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차원적 ‘평면’에 삼차원적 ‘공간’을 재현하려는 시도였 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기하학의 원리가 규제하는, 평면적이면서도 삼 차원의 깊이성을 실현하는 수학적 공간을 구축한다.
이러한 원근법은 그 이전 시대의 시각 양식과는 근본적으로 상이 한 것이었다. 대상에서부터 이끌려 나와 실재가 전사되는 창문인 이차원적 공간을 통해 눈으로 수렴되는 선을 가정하는 기하학적 시각을 담지한 ‘알베르티의 원근법은 중세 회화의 평평한 시각이 나 왜곡된 비율, 다중심적 화면 구조를 과학적 원리로 대체(lash, 19970 7)"하기 때문이다.
이 “기하학적으로 등방적이고 직선적이며 제일적인(Jay,1988 6)" 새로운 공간 개념과 그것이 담고 있는 ”객관적이라고 주장 되는 광학적 질서“는 인간이 그 속에서 가시적인 것들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조화하다. 즉, 그것은 새로 운 개념의 시각적 주체를 함축하는 것이다.
이 시각적 주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압축 요약되는 서구의 현대성의 주체와 상응한다. 원근법의 합리화된 시각 공간은 동질적이고 무한한 데카르트의 연장으로서의 공간과 부합하 며, 이 시각 공간에서 소실점에 자신의 눈이 위치되는 주체는 확실성의 유일한 근거이자 보편수학의 원리에 의해 세계를 측 정하고 자신의 사유와 의지에 따라 세계를 통제하려는 코기토 의 기획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원근법의 공간은 그것이 과학과 철학에서 체계화되기 전에 시 각예술의 영역에서 선취된 무한한 공간이었다. 이 점을 단적 으로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실점이었다.
소실점은 말 그대로 사라지는 점, 원근법 화면에서 직교선이 무한대로 진행하면서 마치 수렴되는 듯이 나타나는 점이기 때 문이다. 물론 그 선들은 결코 수렴되지 않고 평행하게 무한대 로 달릴 뿐이다.
파노프스키는 “모든 직교선들의 무한히 멀리 떨어진 점의 이 미지로서의 소실점의 발견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한 자체의 발 견에 대헌 구체적인 상징이다. 무한을 상징하는 이 소실점이 원근법의 무한한 공간을 조직한다는 바로 이 때문에 소실점이 야말로 원근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초창기 영화를 통해 본 원근법의 문제
1895년 프랑스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상영회 가 열렸다.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약 1분 정도 되는 10여 편의 영화 를 상영하였고 그 목록에는 열차의 도착(The Arrival of a Train), 공 장을 나서는 노동자들(Workers Leving the Factory), 물 뿌리는 사 람(Arroseur arrose) 등이 차례로 상영되었다.
우리에게 세계 최초의 영화의 알려진 열차의 도착을 살펴보자. 총 52초 분량의 이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단순한 움직이는 동영상이 었다. 소위 활동사진이라고 불리는 편이 적합한 형태였다. 파리의 리 오타역에 도착하는 검은 증기기관 열차와 그 열차를 타고 내리는 사 람들에 관한 아주 짧은 기록물이었다.
이 영화는 고정된 카메라에 의해 한 컷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여기 서 카메라의 눈은 인간의 눈과 동일시 된다. 단일 시점이다.
이런 단일 시점은 1902년 달나라 여행(A Trip to the Moon)에 서 달라진다. 총 12분 분량의 이 영화는 10개의 시퀀스로 이 루지고 화면의 합성과 편집의 개념을 사용한 작품이다. 인간 은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실재가 아닌 비현실의 세계 를 화면 속에 창작내기 시작했다.
이후 영화는 1915년 미국의 D.W. 그리피스에 의해 서사체계 를 갖춘 극영화의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1929년 러시아의 지 가 베르토브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A Man With A Camera) 를 발표하면서 카메라의 눈이 인간과 결별했다고 선언하고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