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가 를 위 한 문 학 론 의 형 성
1. 신라의 언어관·문학관과 향가의 상호작용
1) 종교적 텍스트는 傳道와 布敎를 위한 소통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고, 현실 문제(삶의 욕망, 죽음에의 공포)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이와 환상을 활용한다.
→ 따라서 초기의 시가·산문은 종교적 감성과 인식으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음.
2) 종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두 가지 길
① 漸 : 점진적 과정을 모두 세분하여 설명하고자 함.
→ 현재 위치를 자각, 반성하기 위함. 그러나 그 자체가 집착이 될 여지가 있음.
② 頓 : 간절함을 통해 순간적으로 다다를 수 있음.
→ ‘순간적’ 통합이라는 점에서 서정성과 통할 가능성이 큼.
/ 이 방향을 추구한 관점으로부터 詩語의 형성, 발전 과정을 도출할 수 있을까?
2. 圓測과 ‘識’, 그리고 대칭
오직 ‘識’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식’을 관찰함으로써 바깥 경계를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다. 바깥 경계를 버리면 헛된 마음이 가 라앉게 되고, 헛된 마음이 가라앉게 되면 中道를 깨닫게 된다. … 어리석은 자는 경계의 즐거움에 집착하여 여러 욕락을 취할 뿐 버리고 떠나고자 하지 않으므로 三界에서 生死輪回를 되풀이하며 온갖 괴로움을 겪을 뿐 해탈하지 못한다. 자비로운 여래는 方便 으로써 모든 것이 다만 識이라는 것을 설하여 바깥 경계를 버리게 한다. 바깥 경계를 버리면 헛된 마음이 소멸하고 헛된 마음이 소멸하면 곧 열반을 증득하게 된다.
唯有識者, 爲令觀識, 捨彼外塵. 旣捨外塵, 妄心隨息, 妄心息故, 證會中道 … 愚夫異生, 貪著境味, 受諸欲樂, 無捨離心, 生死輪廻, 投三有海, 受 諸劇苦解脫無因, 如來慈悲, 方便爲說, 諸法唯識, 令捨外塵, 捨外塵已, 妄識隨滅, 妄識滅故, 便證涅槃. (圓測, 解深密經疏 卷 6. 韓國佛敎全書 1 308면 上).
· 觀 : 唯識學의 본질로서 내면에 대한 성찰을 뜻함.
· 識 :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 형성을 통한 인식과 소통의 작용.
- ‘식’을 ‘관’함으로써 식에 영향을 끼치는 바깥 경계[外塵]를 벗어나 깨달음을 얻음.
(결국 식을 버리거나,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식을 관하는 셈이 됨 → 언어를 통해 언어의 질서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의 본질과 통함).
淸辨과 護法 두 보살이 일시에 세상에 나와 중생으로 하여금 불타의 가르침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각각 空宗과 有宗을 세웠으 나 모두 부처님의 뜻을 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청변은 空을 위하고 有를 버림으로써 有에의 집착을 없애주었고, 호법은 有를 세우고 空을 버림으로써 空에의 집착을 없애주었다. 그러므로 (청변이 세운) 공은 유가 곧 공이라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호법이 세운 유인) 非無는 공이 곧 색이라는 교설에 어긋나지 않는다. 공이면서 유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두 가지 진리[二諦]를 얻는 것이요,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中道를 터득하는 것이니 불교의 핵심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청변과 호법은 서로 영향을 주어 중생에게 불교를 이해시키려고 한 것인데 어찌 붓다의 뜻과 어긋나겠는가? (圓測, 般若波羅密多心經 贊 韓國佛敎全書1 3면 上)
· 中觀[有]과 唯識[無;空]의 논쟁 : 단독으로는 의미가 없고, 상대편이 있어야 가치를 지닌 상대적 논쟁.
→ 이들의 논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위한, 상대편을 긍정·존중하며 비판하는 관계[中道]임.
[참고] 아도르노, 부정의 변증법.
3. 義相과 華嚴一乘의 시어 – 錐洞記(華嚴經問答)
· 방편설의 심화
“묻습니다. 이런 말이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답하겠다. 무릇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이 담긴 말은 모두 그 志趣가 근기와 인연에 맞추어서 있는 것이어서, 약으로서 능히 중생의 병을 다스릴 수 있다. 만약 生으로써 다스릴 수 있으면 곧 生으로써 하고, 만약 不 生으로써 다스릴 수 있다면 곧 不生으로써 하는 것이다. 만약 法空이 生하거나 不生하다면, 生이 옳고 不生 이 그르거나, 非生이 옳고 生이 그르다. 법이라는 것은 불생과 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 한즉 생과 불생이 병을 고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을 수 있다.” (大正新修大藏經 권45, 609면 a20 행. 이하 관례에 따라 “0609a20”과 같이 略稱한다).
· 깨달음의 의미
“묻습니다. 그 법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하겠다. 이것은 곧 모든 존재의 참다운 본성으로서 머묾이 없는 본래의 도리이다. 머묾[住]이 없 는 본래의 도리이기 때문에 곧 가히 매임[約]이 없는 법이며, 가히 매임이 없는 법이기 때문에 곧 分別相 이 없고, 분별상이 없기 때문에 곧 마음이 움직인 곳이 아니다. 이것은 오직 증득한 자의 경지이고 아직 증득 치 못한 자가 알 바는 아니니, 이것을 존재의 實相이라 부른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니, 여기가 十佛의 普賢境界이다.” (大正新修大藏經 0609b07).
· 일승·삼승의 언어와 그 본질적 차이
“묻습니다. 이미 보현의 경계라 한다면, 보현은 곧 상황[機緣]을 대함에 있어서 남기는 바가 없습니 다. 이러한데도 또한 모든 존재의 實相이 곧 다른 사람들의 경계일 수 있습니까?”
“답하겠다. 또한 그럴 수 있다. 보현은 자신이 증득한 법과 같이 상황에 남기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正義 가운데는 義語를 따르고, 正說 가운데는 語義를 따른다.’고 하는 경전의 말이 그 뜻을 말하는 것이다.”
“묻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답하겠다. 正義라 하는 것은 一乘의 뜻이고, 正說이라 하는 것은 三乘의 뜻이다. 삼승의 뜻에서는 情識에 따 라 安立하기 때문에 그 뜻이 단지 말 가운데 있을 뿐이다. 말로써 뜻을 포섭하기 때문에, 뜻이 곧 말 에 있다. 일승에서는 언어가 곧 뜻의 언어[義語]이기 때문에 모든 언어가 뜻의 언어[義語]이고, 뜻이 곧 언어의 뜻[語義]이기 때문에 모든 뜻이 언어의 뜻[語義]이다. 언어가 곧 뜻이기 때문에 뜻치고 언 어가 이르지 못하는 것이 없고, 뜻이 곧 언어이기 때문에 언어치고 뜻이 이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뜻 과 언어, 언어와 뜻이 無碍自在하고 圓融無碍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 緣起의 머묾 없음을 나타 낼 수 있게 말을 함에 있어, 종일토록 말하여도 말한 것이 없다. 말한 것이 없으므로 말하지 않은 것 [不說]과 다름이 없는 말이다. 말이 이미 이러하니, 능히 듣는 것도 또한 이러하다. 하나를 듣는 것이 곧 일체를 듣는 것이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大正新修大藏經 0609b12).
구분 의 상 원 효
依言․離言의 관계 依言을 부정하고 離言을 긍정한 것으로 평가받음. 依言을 통해 離言에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봄 (대승기신론소).
能詮․所詮의 관계 삼승에서는 괴리, 일승의 언어에서만 분별을 벗어날 수 있음(<추동기>).
진여는 능․소의 분별과 상응하지 않음 (대승기신론소).
一乘․三乘의 역할 주종 또는 서열관계로 파악
(<추동기>․<법계도>). 文語와 義語를 하나로 아우름 (금강삼매경론).
卽․中에 대한 인식 일승의 언어가 갖추어야 할 요건
(<추동기>․<법계도>). 기본적인 차이는 없음.
언어관 華嚴一乘의 시어 중심
(서정성 중심). 和諍을 통한 논쟁적 상황의 합일
(서정성과 효용성의 병존).
- 正義(一乘; 義語) :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언어(의미의 초월·중첩이 자유로움).
→ 시어의 비유·상징, 반어·역설과 통용되는 기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 正說(三乘; 語義) : 사전적 의미에 충실함. 언어의 이론과 형식을 충실히 따름.
cf. <노힐부득 달달박박>, 孝不孝敎.
“묻습니다. 이와 같이 능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를 듣는 것이 곧 일체를 듣는 것이고 일체 를 듣는 것이 곧 하나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三乘의 법이 단지 언어만 있는 것이라면, 곧 나 타내는 뜻이 없는 것입니까?”
“답하겠다. 나타내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나타내는 뜻은 단지 언어로 나누어놓은 것에 만 있다. (삼승의) 一相法門이 말하는 있음[有]이란 것은 단지 있음 가운데 끝나니 있지 않음[不有]은 아니며, 있지 않음[不有]이란 것은 곧 있지 않음 가운데 끝나니 있음의 뜻은 아니다. 이와 같은 一相 法門은 비록 二諦가 없고 相卽相融하지만 그 事法에 卽하여 서로 圓融自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 서 언어와 뜻의 나타내는 것과 나타내지는 것이 나뉘어 섞이질 못한다. 그런데 一乘의 正義에서는 이와 같지 않다.
一法을 거론함에 따라 일체법을 남김없이 포섭하기 때문이며, 卽과 中의 관계 속에서 自在롭기 때문이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大正新修大藏經 0609b27).
4. 元曉와 和諍의 수사
· 언어의 생명은 다양성 자체에 있음 : “대승의 體는…오히려 백가의 언설 안에 있다”(대승기신론소) 마치 장님들이 각각 코끼리를 말하는데 비록 사실대로는 얻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코끼리를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닌 것처럼, 佛性을 말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여섯 가지 진리[六法] 그대로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여섯 가지 진리를 떠난 것도 아닌데 여기 여섯의 주장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원효, 열반경종요, 한국불교전서 1책, 539a)
※ 의상과 원효의 비교
· 원측을 계승한 원효의 언어관
“언설의 궁극이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였고, 양면의 대립에 집착하기보다 “능․소의 분별과 상응하지 않는” 방식의 상대하여 성립하는 존재의 원리에 더 치중하였다. 원효에게 참되고 한결같은[眞如] 진리란 의언과 이언의 측면을 함께 지닌, 요컨대 문어[삼승의 언어]와 의어[일승의 언어]를 하나로 아우른 본질인 것이다.
말하자면 삼승의 언어가 일승의 언어에 비해 다소 제약이 있음에도 나름대로 효용성을 발휘할 만한 영역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 원효가 의상에 비해 갖는 차이점이라 하겠다.
[참고] <蛇福不言>에서 사복의 언어관과 원효
元曉로 하여금 布薩授戒를 행케 하고 그 시체 옆에서 빌어 가로되, “나지 말지어다. 죽음이 괴롭도다. 죽지 말지어다. 태어남이 괴롭도다.” 하였다. 蛇福이 “그 詞가 번거롭다.” 하여 고쳐 이르되, “死生이 모두 괴롭도다.” 하고 二公이 메고 活里山 東麓에 갔 다. 원효가 이르되, “智惠虎를 智惠林에 장사함이 좋지 아니하냐?” 하였다. 사복이 偈를 지어 “옛날 석가모니불이 沙羅樹 사이에 서 열반에 들어갔더니, 지금 또한 저와 같은 자가 있어 蓮花藏界寬에 들어가고자 하노라.” 말을 마치고 풀뿌리를 뽑으니 그 아래 에 明朗하고 淸虛한 세계가 있어 七寶欄干에 樓閣이 莊嚴하여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체를 지고 함께 들어가니 그 땅이 금방 합하여졌다.
令曉布薩授戒, 臨尸祝曰: “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 福曰: “詞煩.” 更之曰: “死生苦兮.” 二公轝歸活里山東麓. 曉曰: “葬智惠虎於智惠林 中, 不亦宜乎?” 福乃作偈曰: 往昔釋迦牟尼佛, 裟羅樹間入涅槃. 于今亦有如彼者, 欲入蓮花藏界寬. 言訖拔茅莖, 下有世界, 晃朗淸虛, 七寶欄楯, 樓閣莊嚴, 殆非人間世. 福負尸共入, 其地奄然而合.(三國遺事 권4 義解 제5 <蛇福不言>).
· 뒷동산에 풀을 뽑으면 연화장세계가 있다. = 저승 그리고 이상향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깨달음의 세계는 ‘순간’을 통해 도달하는 것)
· 우리 곁에 있는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 번거로운 말을 줄이고, 압축적 언어를 사용해야 함.
· ‘更之’의 주체는 원효/사복 가운데 누구로 보아야 하는가?
· ‘사/생’을 초월하기 위해 일단 분별하는 관점이 필요함
→ 언어를 초월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언어를 통한 분별이 반드시 필요함.
5. 崔致遠과 風流의 세계
· ‘풍류’의 수수께끼
崔致遠의 <鸞郎碑序>에, “우리 나라에 玄妙한 道가 있으니 風流라 이른다. 그 가르침[敎]의 기원은 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三敎[佛․仙․孔]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한다. 그리하여 ①집에 들 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魯司寇[孔子]의 主旨 그대로며, ②또 그 함이 없는 일 에 처하고 말없는 敎를 행하는 것은 周柱史[老子]의 宗旨 그대로이며, ③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 한 일만을 행함은 竺乾太子[釋迦]의 교화 그대로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
· 문학 작품의 가치와 생명력
중국에 들어가 배운 것은 대사나 내가 피차 다름이 없건만, 스승으로 추앙 받는 이는 누구이며 일꾼 노릇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찌하여 心學者는 높고 口學者는 수고롭단 말인가? 그러므로 옛날의 군자 는 학문하는 것을 삼가서 하였다.
왕명/작가명 (연대)
작 품 명
역사적 배경 서정성
효 용 성
종교성 정치성 주술성 수사학
(설득․감화)
7 세 기
진평왕 (579~631)
혜성가
통일전쟁의 시작기, 불교미술의 발흥기 서동요
선덕여왕
(632~646) 풍요
문무왕
(661~680) 원왕생가
통일신라 문화의 효소왕 형성기
(692~701) 모죽지랑가
8 세 기
성덕왕 (702~736)
헌화가
원가 (원가) 전제왕권 실현기
경덕왕 (742~764)
월명 제망매가 도솔가
정치적 격동기, 미술사의 황금기
충담 찬기파랑가 안민가
도천수관음가
9 세 기
이 후
원성왕
(785~799) 우적가 독서삼품과 설치
헌강왕
(875~885) 처용가 빈공제자(賓貢諸子
) 귀국 고려 광종
(949~975) (보현시원가) 보현시원가 전제왕권 실현기
그러나 심학자가 덕을 세웠다면 구학자는 말을 남겼을 것이니, 저 ‘덕’이란 것도 혹 ‘말’에 의지하고서 야 일컬어질 것이요, 이 ‘말’이란 것도 혹 ‘덕’에 기대어야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할 것이다. 일컬어질 수 있다면 ‘마음’이 능히 먼 後來者에게 알려질 것이요, 썩지 않는다면 ‘말’ 또한 옛사람들에게 부끄러 움이 없을 것이다. (최치원, <朗慧和尙碑銘>, 최영성 역, 최치원전집 1 : 사산비명, 아세아문화사, 1998), 6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