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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년 월 2010 8

교육학석사 역사교육 학위논문( )

과 의 강화 淸初 皇位繼承 皇權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김 주 희

(3)

과 의 강화 淸初 皇位繼承 皇權

The Succession of Emperorship and the

Reinforcement of the Emperor’s Power in the Early Qing

년 월 2010 8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김 주 희

(4)

과 의 강화 淸初 皇位繼承 皇權

지도교수 : 김 성 한

이 논문을 교육학석사 역사교육 학위 ( ) 청구논문으로 제출함.

년 월 2010 4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김 주 희

(5)

김주희의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심사위원장 조선대학교 교수 최 진 규 인

심사위원 조선대학교 교수 김 성 한 인

심사위원 조선대학교 교수 김 경 숙 인

년 월 2010 6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6)
(7)

ABSTRACT

The Succession of Emperorship and the Reinforcement of the Emperor’s Power in the Early Qing

Kim Joo he

Advisor : Prof. Kim Sung han Major in History Education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Chosun University

The Qing Dynasty did not adopt the tradition of previous dynasties founded by the Han people, which appointed the eldest among the empress’

sons as the crown prince and educated him as the future emperor.

However, as the Qing Dynasty rose from a local regime in the northeastern region and expanded its sovereign power over the entire continent of China, not only the range of ruling but also the way of designating the emperor’s successor was changed. Nurhachi mentioned the joint agreement system as a governing system after his death, and the ruler elected through the agreement system shared his sovereign power with other influential powers.

After the death of Nurhachi, Hongtaiji succeeded to the imperial throne.

The development of the Houjin society and the expansion of the territory during the days of Hongtaiji revealed the contradiction of power and the limitation of the government. Thus, Hongtaiji ceased gradually the eight king‐ agreement system ordered by Founder Nurhachi and monopolized power, and through this, he laid the base for the rise of ‘Great Qing.’

(8)

Hongtaiji died suddenly in August 1643. As he did not designate his successor and even did not mention any name, severe struggles for power occurred inside the ruling group of the Qing Dynasty in order to hold the imperial throne after the sudden death of Hongtaiji. At that time, it was Dorgon, the King of Yechin, who settled internal and external problems with initiative. As h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mperor Shunzhi’s ascending to the imperial throne after the death of Hongtaiji, he acted as the regent of Emperor Shunzhi.

As Dorgon expanded his control over armed forces while strengthening his power, he owned more armed forces than Emperor Shunzhi at the end of his regency. As Emperor Shunzhi began to rule the country directly after the death of Dorgon, Dorgon’s military power was also absorbed to Emperor Shunzhi and this reinforced the emperorship. Such a shift of power over military forces is considered a critical process for the development of emperorship just after enthronement.

Since the age of Emperor Shunzhi, the imperial throne succession system was changed gradually. That is, according to the will that Emperor Shunzhi left just before his death, the succession to his throne was different from the previous cases in two aspects. One is that, different from the convention, Emperor Shunzhi himself ordered the designation of Emperor Kang xi as his successor, and the other is that the emperor ordered four of‐ his subjects to support the new ruler in his governing of the country.

The ruling system with assistant rulers during the age of Emperor Kang‐

xi can be regarded as a transitional system in the cours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imperial government in the early period of the Qing Dynasty. However, Emperor Kang xi, who ascended the throne at a young‐ age, had to go through formidable contests with the assistant rulers. Thus,

(9)

he tried a different way of deciding the successor. That is, he appointed one of the empress’ sons, who was only one years old, as the crown prince. However, Emperor Kang xi decrowned the crown prince twice, and‐ after that, fierce feuds occurred among the emperor’s sons over the imperial throne. Emperor Yongzheng, who ascended the imperial throne at the end of the feuds, created a system called Milgeonbeop (密建法). The first reason that the emperor introduced this system was probably the expression of his wish to cease the turmoil in the process of his enthronement. In addition, we may understand the system as an extension of the imperial throne succession system originating from the beginning of the Qing Dynasty.

The origin of the Emperor’s inability to exercise his full sovereignty was the system that the Emperor was elected through agreement. The Emperor, who was enthroned through agreement, attempted to change the succession system based on his experience, and the most radical reform was that Emperor Kang xi appointed the Crown Prince openly. However, his attempt‐ ended in failure and the last days of his reign were drawn into a vortex over how to appoint the successor. Having these direct and indirect experiences, Emperor Yongzheng set the principle that the Crown Prince would be appointed in secret in order to avoid such a situation and take initiative in deciding the successor. Milgeonbeop was designed to meet Emperor Yong zheng's will and desire to choose one qualified for the next‐ emperor among many princes rather than appointing the Crown Prince.

However, Emperor Ch’ien lung, who was enthroned by Milgeonbeop, reacted‐ to Milgeonbeop negatively because of disturbances in the process of his accession to the throne, and as a result, the tradition was ceased.

However, the influence of Milgeonbeop on the succession system in the

(10)

Qing Dynasty is not insignificant.

As Milgeonbeop combined the Manchurian’s traditional tribal system, which did not appoint the successor while the ruler was alive, with the Chinese Crown Prince system in which the Emperor decided his successor during his lifetime, it is considered a unique emperorship succession method symbolizing the Qing Dynasty as a multi racial country.‐

(11)

Ⅰ 머리말 .

전통시대에 皇帝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어떤 인물이 황제가 되느냐는 그 왕조의 운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어느. 왕조나 君主의 후계자를 결정하고 교육하는 일을 중시하였고 이는 중국 역사상 마, 지막 왕조였던 淸朝도 예외는 아니었다. 滿洲族1)의 왕조라는 특성을 지닌 청조의

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皇位繼承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문명을 가진 다수의 을 정복하는데 성공하였다 태조 누르하치에 의한. 건립은 당시의 동아시

漢族 後金

아의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새로운 판도를 형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누르하치의 汗位를 계승한 태종 홍타이지는 만주와 요동일대를 안정시키면서 만주 족만의 국가단계에서 벗어나 滿 蒙 漢‧ ‧ 등의 여러 종족을 포괄하여 지배하는 전제적 군주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세조 순치제는. 6세의 나이에 황위에 올라 섭 정왕 도르곤이 점령한 북경에 입성하였다.

청조는 한족이 주체가 되어 세운 왕조들처럼 皇后의 아들 가운데 長子를 공개적 으로 皇太子로 결정하여 후계자로 교육하는 전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청조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지방정권으로 출발한 왕조였고 북경으로 입성한 후 강희제가, 三藩의

1) 만주라는 국호는 종래 太宗의 僞作說 즉 청태종이 숭덕으로 개원할 때 그 이전의 국호였던, 이라는 명칭을 없애고 그 대신 그때까지의 국호는 라고 위작했다는 것이었으나

後金國 滿洲

나 은 의 기사를 들어 만주국이 Ehe Hada 의 나라

三田村泰助 神田信夫 等 滿文老檔 ‧ 等 女眞族

들과 상대하여 실재로 형성된 국가명인 것을 증명하고 있다 만주라는. 國名은 누르하치가 建 을 통합한 것이 manju gurun( )이라는 것이다. manju라는 명칭은

州女直 滿洲國 滿洲‧滿珠‧萬朱

등으로 쓰이는데 그 유래는 여진민족 사이에서 위대한 酋長에 대한 존칭에서 예부터 전해오 고 있고 또 이것이, 文殊菩薩의 轉音이라고도 하였다 다른 한 가지 설은. 滿洲라는 명칭이 으로서 시대부터 있었고 태종 개원 때에 이를 부활했던 것이라 한다. jusen 이란

部族名 太祖 「 」

말은 全女直을 포함하는 民族名으로서 monggo , nikan( )國 漢 國 등의 명칭과 상대되는 것이어 서 정식의 국호라기보다는, 女直民族의 國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天聰 9 (1635) 10년 월 이후 는 manju라고 불리우게 되고 이후 manju는 민족명으로서 후세까지 사용되게 되었다 서정. 흠, 「청초의 국호문제」 ( 대구사학 28, 1985), pp.23-24.

(12)

난을 평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중국 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재위기. 간 동안 안정된 통치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옹정제가 여러 가지 개혁, 조치들을 실행하면서 건륭제의 통치 시기까지 청조의 전성기를 연장하여 이른바

를 가능하게 하였다.

康乾盛世

이렇게 청조가 동북 지방의 지방정권에서 성장하여 중국 전 지역으로 통치력을 확대하기까지 통치범위만 변화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방식도 변화하였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사후의 통치체제에 대하여 공동합의제를 언급하였. 고 그 합의제를 통해 선출된 군주는 영향력이 있는 세력과 권력을 공유하였다 누, . 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와 순치제 또한 그러한 합의의 전통을 통해서 즉위한 황제들이었다 그러나 합의제는 황위계승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격렬한 권력투쟁을. 낳았으며 결국 합의제라는 만주족 고유의 전통도 점차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순치제가 즉위하였을 당시 황제라고는 하나 나이가 어려 직접 나라를 다스릴 여 건이 되지 않았고 순치제가 황위를 계승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숙부 도르곤이 섭, 정왕으로 군림하며 황제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다 도르곤이 사망한 후 비로소 친정. 에 나선 순치제는 임종시 내린 遺詔에서 황자 玄燁을 후계자로 언급하였다 순치제. 의 뒤를 이은 강희제 또한 보정체제를 겪어야 했다 강희제는 친정 이후 황후가 낳. 은 적자 允礽을 공개적으로 황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황태자가 두 번이나 폐위되는 시련 끝에 황자들 간의 격렬한 황위다툼이 일어났으며 강희제 서거 후 황위는, 允

에게 돌아갔다 수많은 잡음 끝에 즉위한 옹정제는 밀건법.

2)이라는 독특한 방식

의 황위계승제도를 만들었다.

청조의 황위계승에 대한 연구는 ① 홍타이지 즉위까지를 다룬 것3), ② 순치제의

2) 밀건법은 황제가 황워계승자를 독자적으로 결정하였지만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비밀문서 로만 남겨둔 것을 死後에 열어보고 확인한 후 다음 황제가 즉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모든皇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3) 이들 연구 성과들은 楊珍, 淸朝皇位繼承制度 學苑出版社( , 2001) 참조. 趙光賢, 「淸初諸王爭 ( 12-1·2, 1943); , ( 6-5, 1953); , 國記」 輔仁學誌 李光濤 「靑太宗奪位考」 大陸雜誌 李學智

( 8-2, 1970); , (

淸太祖時期建儲問題的分析 思與言 金承藝 皇太極的繼承汗位 大陸雜誌

「 」 「 」

61-1, 1980); 周遠廉, 「後金八和碩貝勒 共治國政 論“ ” 」 ( 淸史論叢 2, 1980); 李鴻彬, 「皇太極

( 1981. 3); , (

繼嗣幾個問題」 歷史檔案 王思治 「皇太極繼位與諸大貝勒的矛盾」 歷史檔案

(13)

즉위와 도르곤의 섭정을 다룬 것4), ③ 옹정제의 즉위를 다룬 것5)으로 세분할 수 있다 황위계승을 제도적인 측면에서 고찰하며 밀건법의 성립배경에 대해서 연구한. 것6)이 있다.

청조의 황위계승제도의 변화는 청제국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기본적으로 황제권의 확립과 관련이 되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청 초기 황위계승과 권력투. 쟁 양상을 당시의 정국을 토대로 면밀히 살펴보고 순치제 이후 황위계승제도가 변, 화하게 된 배경과 옹정제 시기에 등장한 밀건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황위계승제 변천이 청초 황제지배체제 확립에 끼친 영향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1984. 3); 杜家驥, 「靑太宗繼位與大妃殉葬及相關問題考辨」 ( 淸史硏究 1997. 3)

4) 최소자, 「淸初의 王位繼承과 多爾袞」 ( 이대사원 9, 1970); 李格, 「關于多爾袞擁立福林問題的

( 2, 1980); , ( 1984.1); ,

考察 淸史論叢」 張玉興 「多爾袞擁立福林考實」 故宮博物院院刊 王思治 ( , , 1987).

多爾袞攝政后滿洲貴族之間的矛盾與衝突 淸史論考 巴蜀學社

「 」

5) 孟森, 「淸世宗繼承大統考實」 ,( 淸代史 , 臺北正中書房, 1966); 莊吉發, 「淸世宗入承大統與皇十 ( 67-6, 1983); , ( 36, 1950);

四子更名考釋」 大陸雜誌 王鐘翰 「淸世宗奪嫡考實」 燕京學報

, ( 4 , 1983); ,

許會重 「淸世宗胤 繼承皇位問題新探禛 」 淸史論叢 第 輯 金承藝 「從胤禔問題看淸世

( 6, 1977); , (

宗奪位」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集刊 金承藝 「 禛胤 非淸世宗本來名諱的探討」 8, 1979); ,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集刊 金承藝 「一項有關淸世宗是否奪位的重要問題之探討」 ( 漢學硏究 2-1, 1984); 楊珍, 「關于康熙朝儲位之爭及雍正繼位的幾介問題」 ( 淸史論叢 6, 1986); 張羽新, 「康熙因寵愛乾隆以傳位于雍正考」 ( 故宮博物院院刊 1992. 1); 陳捷先, 「淸世

( 3, , 1978); ,

宗繼統與年羹堯之關係」 淸史雜筆 臺北學海出版社 馮爾康 「康熙朝儲位之爭和胤

( 1981. 3); , ( , 1991).

勝利 故宮博物院院刊 馮爾康 雍正繼位的謎惑 臺北雲龍出版社 禛 」

6) 李鵬年, 「雍正創建秘密立儲制度」 ( 淸宮史事 , 紫禁城出版社, 1986); 張玉芬, 「乾隆建儲始末」 ( 遼寧師範大學學報 1988. 2); 朱誠如, 「乾隆建儲與訓政述評」 ( 故宮博物院院刊 2000. 4);

, ( 1989. 2).

白新良 「論乾隆帝秘密建儲」 故宮博物院院刊

(14)

의 황위계승과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 皇太極

천명 11 (1626) 8년 월 11일 누르하치가 병사한 후 황위를 계승한 홍타이지는 만, 주와 요동일대에서 통치적 안정을 이루면서 새로운 지배체제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族制國家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후금정권의 통치체제는 八和碩貝勒이 공동으로 執政하는 집단지배체제였다.

후금사회의 발전과 지배영역의 확대로 집단지배체제의 권력적 모순과 통치의 한 계를 드러나자 홍타이지는 태조 누르하치가 정한 八旗諸王의 八王合議制를 점진적 으로 종식시키면서 정권을 장악하여 大淸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홍타이지 시기 국정의 변화는 청조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에 본. 장에서는 누르하치가 팔왕합의제를 실시한 배경을 살펴보고 후금정권의 이러한 분, 권적 성격이 홍타이지 시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집권적 군주체제로 변화하게 되었 는지 홍타이지의 황위계승과 권력재편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실시배경과 그 목적 1. 八王合議制

후금은 중요한 정책 결정은 물론 최고통치자의 後嗣를 결정하는 일도 여러 왕들 이 함께 논의하는 합의제를 취하였으며 천명, 6 (1621)년 누르하치가 자신이 사망 한 뒤의 국정을 八王合議制로 결정할 것을 공표하면서 공식화되었다. 천명 7년 월 일 강력한 통치를 행하는 이가 자신의 뒤를 잇지 않기를 바란다는 전 (1622) 3 3

제와 함께 보다 자세한 언급을 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여덟 명의. , 버일러(Beile, 敗勒)7) 아래 滿 蒙 漢人‧ ‧ 암반(Amban, 大臣)8) 각각 8명씩 두고 그,

7) 버일러는 만주족과 몽골족의 수령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되다가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하면 서 여러 아들들과 조카들에게 팔기의 사무와 總管의 일을 맡기면서 그들을 버일러라고 부르 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버일러는. 和碩親王多羅郡王‧ 다음의 작위 명칭이기도 하다.

8) 암반에 대한 논의는 노기식, 「누르하치의 암반(amban)에 대한 組織化와 統制」 ( 明淸史硏究 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16, 2002) .

(15)

밑에 滿 蒙 漢人‧ ‧ 각각 8명의 두이러시(Duilesi, 審判官)를 두게 하였다 누르하치가. 언급한 국정을 논의하는 순서는 먼저 24명의 두이러시들이 논의한 후 암반들에게 보고하고, 24명의 암반들이 다시 擬定하여 여덟 버일러에게 보고한 후 버일러들이, 하는 3단계의 논의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체제하에서는 정책결정. 審斷

등에서 지위를 확보한 여덟 명의 버일러가 국정을 논의하는 것뿐만 아니라 군주가 자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다른 인물을 군주로 세울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이러한 지시에 따라 홍타이지. (Hongtaiji, 皇太極)를 비 롯한 다이산(Daisan, 代善), 아민(Amin, 阿敏), 망굴타이(Manggultai, 莽古爾泰) 등 명의 버일러들은 한 달씩 번갈아가면서 국정을 처리하고 칸은 한 달에 두 번

4 大 ,

에 나온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누르하치 생전부터 이미 후금의 정치체제는 4 御殿

명의 대 버일러들이 이끌어 간다는 것이 예견되었다.9) 누르하치가 제시한 통치체 제는 4명의 버일러들이 권력을 공유하게 하여 汗의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를 막고, 여러 단계의 논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여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하도록 한 구조였 다.10)

그러나 누르하치가 처음부터 共治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두 차례에 걸. 쳐서 추엔(Cuyen, 褚英)과 다이산을 후계자로 결정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성공하 지 못하였고 누르하치의 장자였던 추엔은 처형되었다 그가 도량이 편협하여 형제, . 들이나 대신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누르하치를 저주했다는 것11)이 이유였다 그러. 나 이는 추엔 개인의 문제로 파악하기보다는 당시의 권력분산 상황을 반영하는 것 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팔기제도를 만들고 각 기의. 旗主들을 통제하면서 군주권을 확대해가던 누르하치가 돌연 팔왕합의제를 결정하고 군주 1인의 독재가 아니라 군주를 포함한 4명의 버일러가 동시에 南面하면서 통치할 수 있도록 한 배 9) 누르하치가 공동합의제를 통한 통치를 주장한 이유로 多爾袞阿濟格多鐸‧ ‧ 등 어리고 세력이 약한 버일러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白新良, 淸代中摳決策硏

( , 2002), pp.32-33; , ( ,

究 遼寧人民出版社 楊珍 「後金八王公治國政制硏究」 中國史硏究 2000), p.123.

10) 송미령, 「天聰年間(1627~1636)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 동양사연구 54, 2008, pp.165-166.

11) 楊珍, 淸朝皇位繼承制度 學苑出版社( , 2001), pp.29-32.

(16)

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누르하치의 통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 다 누르하치가 요동에 진출한 이후 한족들에 대한 지배는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 정치 체제 또한 위기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천명 6년 3월 21일 요양성으로 천도함으로써 요동으로 근거지를 이, 동하였다 요양성 천도는 이 지역에 대한 일시적인 점령이 아니라 요동의 경제력을. 장악하여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만주족뿐. 만 아니라 이민족인 요동의 한인까지도 동시에 지배영역 속으로 흡수할 필요가 있 었다 누르하치는 요동의 한인을 각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책. 12)과 만주고토에 서 이동한 만주족과 요동의 한인을 함께 거주시키는 만한합주책을 시행함으로써 한인에게 토지를 분여하고 그에 따른 국가적 부담인 노동력 곡물 병역 등의 의무를‧ ‧ 부과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누르하치는 요동의 한인에 대해서는. 계정수전책13)을 통하여 지배를 관철시키려고 한 반면 만주족에 대해서는 니루조직 을 통하여 지배함으로써 만한을 구분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누르하. 치의 요동지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동의 한인은 누르하치의 요동진출 이후 전 시, 기에 걸쳐 그에게 저항하였다.

누르하치는 천명 10 (1625) 3년 월 4일에 심양성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심양천. 도는 단순히 군사적 경제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한인의 저항에 따른 요‧ 동진출 이후의 對한인지배의 실패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14) 즉 누르 하치는 계정수전책을 기조로 한 對한인정책이 실패하였다고 파악하여 지배의 근거 지를 새로운 지역인 심양으로 이동시켜 재차 요동의 지배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천명 10 (1625) 10년 월의 한인학살도 심양천도와 마찬가지로 대한인정책에 실패 에 따른 새로운 요동지배를 위한 기반조성의 하나로 행하여졌다고 볼 수 있다 이. 학살의 대상자는 주로 紳衿들로 이들은 명조와 내통하여 반란을 선동한 주동자이

12) 松浦茂, 「ヌルハチ(淸太祖)の徙民政策」 ( 東洋學報 67-3·4, 1986).

13) 計丁授田策에 대한 논의는 김두현, 「遼東支配期 누르하치의 對漢人政策」 ( 동양사학연구 참고

25, 1987) .

14) 石稿秀雄, 「淸太祖 遼東進出前後 關の に する一考察」 ( 和田博士古稀紀念東洋史論 , 東京講談社, 1961), p.80.

(17)

며 누르하치의 요동진출 이후 실직한, 官人 秀才 大人‧ ‧ 들이었으며15) 요동의 한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누르하치는 이렇듯 대규모의 학살을 단행한 동시에 對한인정책의 개혁을 시도하 였으니 그것이 이른바 편정입장책이다 이 정책은 과거 학살에서 구제된 한인을, . 대상으로 한 것으로 만주족에 대한 한인의 예속은 더욱 심화되었다 편정입장책은. 일정한 토지를 중심으로 한 톡소 조직을 통하여 자신의 지배력을 관철시키려는 시 도였던 것이다.16)

또한 한족을 지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체제도 위기를 맞이하였다 누르하치는. 요동에 진출한 이후에도 팔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으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군사제, 도로 이를 국가행정기구로 사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상층부터 하층까지 모, 두 만주족이 장악했고 한족은 참여할 수 없었다 팔기 사이에도 서로 구분이 분명. 하여 각 旗마다 버일러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衙門이 설치되어 분권적인 형태를 취 하고 있었다 후금의 체제가 분열될 것을 염려한 누르하치는 자신의 사후에 채택할. 정치체제로 8명의 버일러가 공동으로 집행하는 팔왕합의제의 규정을 발효한 것이 었다 이는 분권과 분치를 통해 새로운 집단 권위를 창출하여 통일을 강화시킨다는. 구상으로 이제까지 누르하치가 추진해 왔던 군주권의 집중 강화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군주권을 강화해 나가던 누르하치가 합의제를 수용한 것은 당면한 현실. 속에서 내린 불가피한 결정이었다.17)

의 황위계승에 따른 권력재편 2. 皇太極

누르하치는 자신의 근거지를 요동으로 옮겨 그곳의 지배를 도모했지만 그것은 모색의 과정으로 끝나고 말았다 누르하치를 계승한 홍타이지는 즉위 이후 요동지. 배를 확고히 함과 동시에 많은 한인관료를 유인하여 국가조직을 군정과 민정으로 15) 滿文老檔 3, pp.989, 992-993.

16) 김두현, 1987, 앞의 논문, pp.100-107 참고.

17) 송미령, 「合議에서 指名으로 청대 황위계승방식의 변화- - (」 이화사학연구 32, 2005), pp.184-185.

(18)

분리하여 다른 버일러의 권한을 제한함으로써 전제군주 관료국가체제를 확립하여 갔다 또한 계속하여 팔기제도를 정비하고 항복한 명의 관료 군인들을 포함하여 몽. ‧ 고의 여러 부족들을 지배하면서 다민족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1636년 홍타이지는 후금에서 대청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는데 이는 요동 지배를 기반으로 한 정복왕조, 체제의 완성이자 명조 중심의 국제질서에 대립되는 만주 중심의 국제질서의 형성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천명 11 (1626) 8년 월 11일 누르하치가 서거하였을 당시 후금의 통치체제 형태 는 八和碩貝勒18)이 공동으로 집정하는 집단지배체제였다 누르하치는 임종시 국가. 의 정사나 자손에 대한 유훈을 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후계도 정하지 않았기 때 문에 후에 많은 억측과 논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내분까지 일으키게 된다.

누르하치의 서거 다음날인 12일 大妃 烏喇納喇氏가 순사당하였다 대비는 생존. 해있던 누르하치의 유일한 정비이자 아지거(Ajige, 阿濟格), 도르곤(Dorgon, 多爾

도도 의 모친임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의 유언이라는 명목하에

), (Dodo, ) 4

袞 多鐸

대 버일러에 의하여 순사를 강요당하자 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누르하치의 제. 자인 도르곤이 사실상의 계승자였고 홍타이지가 탈위하다는 설이 유력하였지만

14 ,

여진의 풍속에 의하면 순사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 경우, 대비가 순사를 강요당한 점이 문제였다 그러나 후계자의 모친이었기 때문에 순사. 를 강요당했다고 단정하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누르하치의 사망 전후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은 그의 아들 열다섯과 조카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이중 다이산 아민 망굴타이 홍타이지로 이루어진. ‧ ‧ ‧ 4대 버일러와 생존한 유일한 정비를 배경으로 한 도르곤 형제가 중심적인 인물이다 더욱이 정비. 는 재능과 지모가 있고 어리기는 하나 영리한 세 아들이 있다는 점에서 버일러들 18) 이 시기의 여덟 명의 호소이버일러(和碩貝勒)는 四大貝勒과 四小貝勒을 말하는 것으로, 四 는 전술한바와 같이 홍타이지다이산아민망굴타이이다 그러나. 의 경우 누

大貝勒 ‧ ‧ ‧ 四小貝勒

구누구를 이른 것인지 실제로 정해져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누르하치의 말년에 비교? . 적 활동하고 있던 諸王을 볼 때 四大貝勒을 중심으로 阿巴泰(Abatai, 누르하치의 제 7 ),자

제 자 제 자 조카 를 위시하여

(Degelei, 10 ), (Ajige, 12 ), (Jirgalang, )

德格類 阿濟格 濟爾 郞唅

추엔의 다이산의 다이산의 제 자

(Dudu, ), (Yoto, ), (Soto, 2 ).

杜度 長子 岳託 長子 碩託 薩 廉唅

다이산의 제 자 등이다 (Sahaliyan, 3 ) .

(19)

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한편 대비의 순사가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지 결정하. 기 이전인 12일 辰時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녀의 순사가 황위계승의 문제와 직 접적인 관련성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순사 강요의 이유는 그 가능성을 두 가. 지로 생각할 수 있다 우선. 滿洲實錄의 내용대로 누르하치가 사전에 버일러들에게 대비의 성격상 후에 국가에 혼란을 초래할지 모르므로 순사하도록 유언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金代 淸代‧ 를 통틀어 이와 같이 황제의 서거시에 적어도 정 비를 순사시킨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일반적 순사의 경우 순사를 원하는 상태. 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례이고 부부가 평생 함께하던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했을, 때 대체로 그 처가 순사하게 된다 따라서 대비의 성격이 기지는 있으나 투기심이. 강하고 황제를 별로 기쁘게 하지 못했다는 점이 원인이 될 경우 일반적으로는 폐, 비되거나 살해당하게 되며 순사할 자격조차도 없다 따라서 누르하치가 사전에 버. 일러들에게 유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두 번째의 가능성은 대 버일러들이 어. 명을 빌어 대비의 순사를 강요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4대 버일러 중심의 누르하 치적 국가체제가 이루어진 당시의 상황에서는 누르하치의 보좌를 담당했던 그들이 공통적으로 강한 성격을 가진 단 한사람의 정비 그녀를 중심으로 충분히 급격한, 성장을 할 수 있는 아지거 도르곤 도도 형제의 세력에 대해 우려했다는 것은 당연한‧ ‧ 일이며 이들에 의하여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누르하치가 사망하. 였을 당시 도르곤은 15세에 불과했으며 모친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홍타이지를 비롯한 대 버일러들과 세력을 견줄만한 위치가 되지 못하였다.19) 대 버일러들은 차후에 있을지 모르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하여 대비를 순사시킨 것이 지 도르곤의 자리를 빼앗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소위 홍타이지의. 탈위설은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20)

홍타이지의 즉위는 대 버일러 다이산이 누르하치의 서거 다음날인 1626년 8월 일 에서 서열 위의 버일러인 홍타이지를 칸으로 추대하는 일을 거론하며

12 朝議 4

이루어졌다.21) 누르하치의 제 2자로서 사실상 칸위 계승에 가장 유력했던 다이산 19) 도르곤이 동생인 도도와 더불어 버일러의 작위를 받은 시기 또한 홍타이지 즉위 이후인 天

이다.

聰初

20) 최소자, 「淸初의 王位繼承과 多爾袞」 ( 이화사학연구 9, 1970), pp.2-8 참고.

(20)

이 스스로 홍타이지를 적극 추대한 것이다 다이산의 이 제안에 아민 망굴타이 아바. ‧ ‧ 타이 지르갈랑 아지거 도르곤 도도 두두 더거레이 호거 등이 동의하여 홍타이지에게 고‧ ‧ ‧ ‧ ‧ ‧ ‧ 하니 사양하다가 결국 받아들여 같은 해 9월 1일 심양에서 즉위하였다.

홍타이지는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다이산 아민 망굴타이와 함께 남면하고 앉아 조‧ ‧ 배를 받고 국사를 논의하였으며 신년에, 當子22)에 제사를 지낼 때에도 한은 먼저 당자를 향해서 그 다음은, 神祇에 절을 하였고 마지막으로는 숙부들과 형제들에게 머리를 숙인 후 자리에 앉았다 또한 다른 대 버일러에게 소속된. 旗에 대한 지휘권 이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명목상의 군주일 뿐이었다.

통치자로서의 권한을 이처럼 다른 세 명의 대 버일러들과 공유하고 있었던 홍타 이지는 정권장악을 위하여 먼저 자신이 관할하고 있던 正黃 鑲黃‧ 2기의 무력을 증 강시켜 나갔다 즉 양구리. (Yangguri, 揚古利) 등의 개국 원훈으로 하여금 자신의 2 기를 이끌도록 함으로써 전투력을 상승시켰다 뿐만 아니라 도르곤 도도 등을 중. , 용하여 아지거의 실책을 빌미로 도르곤으로 하여금, 鑲白旗를 장악하게 하는 등의 방법을 통하여 正黃 鑲黃‧ 2기뿐만 아니라 正白 鑲白‧ 2기까지도 실질적으로 장악하 였다.23) 또한 천명 11년 9월 丁丑日, 팔대신(固山額眞)과 左管 16大臣 調遣, 16大 을 설치하여 팔기제도를 확대 개편하였다 팔대신은. 으로 홍타이지

臣 總管旗務大臣

는 이 자리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여 대 버일러와 함께 의정에 참여하게 하고 旗

21) 다이산의 아들인 요토와 사할리얀 형제는 홍타이지의 즉위 문제를 둘이서 먼저 상의하였고, 부친인 다이산에게 “國不可一日無君”하니 마땅히 하루속히 大計를 정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홍타이지를 추천하였고 다이산 역시 이에 동의했다, . 大淸太宗文皇帝實錄 卷1, 天命 11年 누르하치 사망후 요토와 사할리얀이 앞장서서 홍타이지의 즉위를 주장한 이유는 8月庚戌條.

당시 후금의 경제적인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심각한 기근으로 경제적인 상황이 계속 악화. 되면서 도망자가 늘어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성향의 다이산보다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의 홍타이지가 한으로서 적합하다고 판단하였고 당시 군대를 통솔하는 능력, 도 홍타이지가 우월하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陳文石, 「淸太宗時代的重要政治措置」 ( 明淸政

, , 1991), pp.431-432.

治社會史論 學生書房

22) 만주족이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일컫는 용어이다 만주족은 하늘신조상에게 고유의 제사를. ‧ ‧ 지냈는데 처음에는 일정한 장소가 없었다가 점차 그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이를 당자라 하, 였다.

23) 蕭一山, 淸代通史 1(臺北商務印書館, 1963), pp.181-201.

(21)

의 행정사무 일체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을 구축하였다.

기인에 대한 권한을 칸이 파견한 총관기무대신과 함께 공유하게 되자 대 버일러 들은 홍타이지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특히 대 버일러 서열.

위인 아민

2 24)의 반발이 심하자 홍타이지는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天聰 4년 월 초순 홍타이지는 등 성으로부터 퇴각한 아민에게 (1630) 6 永平 遵化‧ ‧灤 ‧州 遷安 4

개 죄상을 물어 감금시켰다

16 .

아민의 실각은 팔기의 분권적 권력구조가 홍타이지를 중심으로 한 재편의 시작 이었는데 아민이 감금된 이후 홍타이지가 집권에 가장 큰 장애로 생각했던 인물은, 둘째형 망굴타이였다 천총. 5 (1631) 8년 월 13일 大凌河城을 공략에 관한 문제로 홍타이지는 망굴타이와 언쟁을 하게 되었고 이 때 망굴타이가 흥분하여 그를 향해

를 5 뽑아든 사건이 일어났다.

佩刀 寸 25) 홍타이지는 이 일을 구실로 망굴타이를 대 버일러에서 일반 버일러로 강등시켰으며 망굴타이의, 正藍旗 세력을 삭감하는 조치 를 취하였다.

망굴타이가 세력을 잃은 후 천총 5 (1631) 12년 월 팔기제의 권력관계가 변화하 였음을 상징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홍타이지는. 禮部參政 李伯龍의 건의26)에 따 라 國中 朝賀行禮時 대 버일러와 竝坐하는 문제의 가부를 의정대신회의에서 결정 토록 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한 다이산은

우리가 이미 황상을 임금을 받들고 또 상과 함께 병좌하는 것은 국민들의 논의를 자아내 우리들이 상을 받들어 대위에 모시고 다시 상과 열을 나란히 하여 앉으니 매우 예가 아니

다 라고 할까 두렵습니다’ ‥‥지금 이후에는 상께서 남면하여 가운데 앉아 지존의 예를 밝히 시고 저와 망굴타이는 상의 옆에 시좌하겠습니다.27)

24) 아민은 수르하치의 번째 아들로 부친의 사망 이후 누르하치의 휘하에 소속되었고6 1608년 과 1613년에 울라(Ula)部와의 전쟁에서 공적을 세워 타이지(Taiji, 台吉)의 지위에 올랐다. 년 누르하치가 을 칭하면서 대 버일러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는 명중 서열 위

1616 汗 4 . 4 2

의 지위를 확보하였고 鑲藍旗를 받았다. 1629년 홍타이지가 베이징 근방까지 진격하였을 때 심양에 남아서 통치를 담당하였다.

25) 滿文老檔 40 ,冊 天聰 年 月5 8 13日條. 26) 大淸太宗文皇帝實錄 卷11, p.1.

(22)

이라고 하며 스스로 南面竝坐의 儀制를 개선함으로서 명실공히 홍타이지 1인만이 하는 지존임을 밝혔다 그러나 다이산이 스스로. 로 지위를 낮추었

南面正坐 上側侍坐

다고 해서 팔기의 대 버일러로서 자신의 기주권이나 영향을 포기했다는 것은 아니 었다 홍타이지가 형식적인 지존체제를 실질화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대 버일러 다. 이산의 세력을 삭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천총 9 (1635) 9년 월 다이산이 평소 홍타이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哈達公主 莽古濟格格28)을 초청하여 大宴을 베풀고 財帛을 증여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홍타이지는 대노하여 다이산과 다이산의 제 3자 샤할리안(Sahaliyan, 薩 廉唅 ) 에게 사람을 보내

너는 스스로 본기인을 이끌고 멋대로 행동하고 또 짐을 원망하는 哈達公主를 군영 안으 로 불러 연회를 열고 선물을 주며 다시 말을 내어 배웅케 하니 이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너 샤할리안은 몸소 예부를 맡으면서 너의 아버지가 함부로 행동하고 짐을 원망하는 사람 을 초대하였는데 너는 이미 이를 알고도 어찌하여 끝내 한마디의 간언이나 저지함이 없었 는가.29)

라고 힐문하였다 다음날. 內殿에서 여러 貝勒 大臣 侍衛‧ ‧ 등을 소집한 홍타이지는 다 이산의 불준제령과 패난을 열거한 후 입궁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여러貝勒 大臣‧ 들은 회의를 열어 다이산의 4大 罪狀을 규정짓 고 그에게서 대 버일러 칭호와 和碩貝勒의 작위를 박탈하는 동시에 10니루의 속인 을 몰수하고 벌금으로서 雕鞍馬 10 ,필 甲胄 十副 銀 萬兩, 을 배상하는 조치를 취하 였다. 또한 다이산의 아들인 요토, 샤할리안 및 망굴타이의 同母弟 더거레이

에 대해서도 치죄하였다

(Degelei, 德格類) .30) 다이산의 혁호와 파직 및 10니루의 몰수는 홍타이지에 의해 사면되었지만 이 사건의 결과는 홍타이지가, 八旗 여러 貝

27) 大淸太宗文皇帝實錄 卷10, pp.36-38.

28) 망굴타이의 동생이자 홍타이지의姊. 29) 앞의 책 卷25, p.11.

30) 앞의 책 卷25, p.11.

(23)

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집권을 공고히 하게 된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지 3개월 후 망굴타이가 생전에 그의 여동생 莽古濟格格, 그녀의 남편인 瑣諾木杜稜, 망굴타이의 同母第이며 버일러인 더거레이 및 屯布祿‧

등과 하여 을 찬탈하고자 했던 음모가 드러났다.

愛巴禮 冷僧機‧ 共謀 汗位 31) 冷僧機

의 밀고로 발각된 이 역모사건으로 인하여 모의에 직접 가담했던 莽古濟 屯布祿 愛‧ ‧ 등을 비롯해서 이들과 가까웠던 등이 처형되고 사건과는 직접 관련,

巴禮 兄弟子姪

이 없지만 평소 홍타이지에 원한을 품고 있는 말을 했던 망굴타이의 아들 額必倫, 홍타이지의 아들인 호거(Hooge, 豪格)의 부인이자 망굴타이의 차녀 및 다이산의 아들인 요토의 처로서 망굴타이의 장녀 昻何喇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32)

그리고 역모에 직접 가담하였으나 자수를 하였던 莽古濟格格의 남편 瑣諾木杜 은 사면을 받았고 나머지 망굴타이의 여섯아들 즉,

稜 邁達里 光袞 薩哈廉 何克達 舒‧ ‧ ‧ ‧

와 더거레이 망굴타이의( )의 아들 등은 으로 강등되었

孫 喝納海‧ 同母弟 鄧什庫 庶民

으며 이들의 재산과, 屬人들은 모두 官에 예속시켰다 또한 망굴타이가 거느렸던. 는 홍타이지에 귀속되어 에 편제되었다.

正藍旗 正黃 鑲黃旗‧ 33) 홍타이지에 귀속된 正

는 소속기인들을 곧바로 분산시켜 에 편입하지 않고 원래의 와는

藍旗 兩黃旗 兩黃旗

구분되게 正藍旗 기인들을 양분하여 新兩黃旗로 편제된 양상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홍타이지는 離主條例를 제정함으로써 버일러들에게 더욱 타격을 주 었다 이 조례에 따르면 팔기에 소속된 노복은 주인의 비리를 칸에게 보고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 비리란 사적인 수렵 전리품은닉 살인 소속 부녀 희. , , , 롱 공을 세운 전사에 대한 미보고 기인에 대한 숙청과 탄압 등의 행위들이었다, , . 이로써 버일러들은 자신 휘하의 기인들로부터 감시를 당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 다.

홍타이지는 또한 대한인정책을 변화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대한인정책의 변화. 는 홍타이지의 지배권 장악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무력의 증강이나 경쟁자에 대한, 직접적인 약화뿐만 아니라 대한인정책을 변화시켜 요동의 지배를 안정시킴으로써 31) 大淸太宗文皇帝實錄 卷26, pp.5-6.

32) 앞의 책 卷26, pp.8-10.

33) 東華錄 , 天聰 年9 12月 辛巳條.

(24)

궁극적으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시켜 나갔던 것이다 또한 지배층 출신의 투항 한. 인관료에 대한 우대도 홍타이지 시기의 중요 특징 중 하나이다 한인의 투항에 대. 한 홍타이지의 구체적인 방침은 첫째 현직의 명조관원이 투항하는 경우 그 관직을, 그대로 세습시키며 둘째 일반민이 관리를 사살하고 투항해 오는 경우 그 공과에, 따라서 관직을 수여하며 셋째 단신으로 투항해오면 생활의 방편을 제공하며 넷째, ,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는 경우 그 인원에 따라서 관직을 수여하는 것이었다.34)

그리하여 이미 范文程 李永芳 洪承疇‧ ‧ 등의 武將의 투항으로 인해 강력한 무력을 소유하게 되었으나 大陵河戰 이후 일련의 한인무장이 대거 투항하였다 이들이 투. 항해 온 이후 대릉하전 이후의 전투에서부터 이들 투항 한인무장들이 전면에서 전, 쟁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이후의 명조와의 전쟁도 엄밀한 의미에서 만 한전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35) 또한 이후 투항한 일련의 한인무장집 단은 이전의 무장집단과는 여러 면에서 성격이 달랐다 이들은. 商可喜 孔有德 耿仲‧ ‧ 등으로 이른바 로서 모문룡 휘하 출신으로 해전의 경험이 있으며 상,

明 山東三所徒

호간 깊은 연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세 사람은 이후 삼번의 난에 참가한 공. 통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모문룡 휘하의 무장출신이라는 점은 명조에 대. 한 그들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으며 이들의 투항으로 인하여 북방의 해안은 명조, 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36)

이러한 한인관료에 대한 우대는 국가조직의 정비로 연결되면서 만주사회는 또 한번의 변모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제까지는 군정과 민정이 합일된 형태의 관제, 였다 하지만 많은 한인관리의 유입으로 인하여. 官制에서 문 무의 구분이 나타나게‧ 되었다 홍타이지는 천총. 3 (1629)년 에 문관을 설치하여 서적의 번역과 정사의 기 록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업은 그가 유일군주로서의 면모를 가지는 작용을. 하게 되었다.37)

34) 孫文良, 淸太宗全傳 吉林人民出版社( , 1983), pp.107-148.

35) Frederic Wakeman, Jr., The Great Enterprise :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Univ. of California Press, 1985, pp.157-224.

36) Frederic Wakeman, Jr., 1985, pp.228-310.

37) 神田信夫, 「淸初 文館の につぃて」 ( 東洋史硏究 19-3, 1960).

(25)

그리고 천총 5 (1631)년 에는 중국의 행정조직을 답습하여 6부제를 도입하였다.38) 육부는 吏 戶 禮 兵 刑 工‧ ‧ ‧ ‧ ‧ 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부의 장관은 버일러가 맡았고 그 아, 래 滿人丞政 2 ,명 蒙古丞政 1 ,명 漢人丞政 1 ,명 參政 8 ,명 啓心廊 1명을 두었는데, 참정 이하 관원의 수는 일정하지 않았다 주목할 점은 비록 여러 버일러를 각 부의. 장관으로 임명했지만 그들의 직위는 명목상의 것이었을 뿐 실권은 모두 홍타이지 가 임명한 각 부 관원의 수중에 있었다는 것이다.39)

천총 10 (1636)년 에 이르면 문관은 다시 內三院으로 개편되는데, 內國史院은 군 주의 起居 詔令‧ 등의 기록을 담당하였으며, 內秘書院은 외교문서와 奏疏 등의 문서 를 관장하였으며, 內弘文院은 史書와 經書를 황제와 황자 및 친왕에게 해설하고 정 책입안을 자문하였다 각 원의 장관에는. 大學士를 임명했고 그 밑에 學士와 主事 등의 관원을 두었다 이들은. 滿人 蒙人 漢人‧ ‧ 으로 골고루 구성되어 있었고 직접 국가 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40) 홍타이지는 특히 자신의 아들들을 교육하는 홍 문원을 중시하고 그 관원들을 황제의 전속막료로 임명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감찰. 기관인 都察院을 설치하여 관원들에 대한 감찰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1638년에 는 내외몽고 민족의 업무를 관장하는 몽고아문을 理藩院으로 개칭하여 만몽연맹을 공고히 하였다.41)

새로 설립된 행정기구인 육부 내삼원 도찰원 그리고 이번원의 관료들은 대부분 팔‧ ‧ 기 출신 관원들이었다 따라서 홍타이지의 통치시기부터 귀족통치의 요소가 점차. 관료통치의 성격으로 전환되어 황제와 그의 충성스러운 관료가 통치기구를 장악하 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팔기조직이 가지고 있던. 民事에 대한 행정기능이 상실되었다 팔기조직은 더 이상 모든 것을 망라하는 광범위한 정치기구가 아니었. 고 단지 기인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기능만을 행사하는 군사조직이 되었다, ‧ ‧ .

이와 같은 정책의 결과로 군정과 민정은 분리되었으며 중국적인 군주독재의 관,

38) 蕭一山, 淸代通史 1(臺北商務印書館, 1963), pp.206-210.

39) 大淸太宗文皇帝實錄 卷9, pp.11b-12a,

40) 앞의 책 卷28, pp.2a-3a; 淸史稿 卷2, 「太宗本紀」1, p.52; 李鵬年外著, 淸代中央國家機 ( , 1989), pp.9-10.

關槪述 北京紫禁城出版社

41) 앞의 책 卷29, pp.6a-7a; 滿文老檔 卷2, pp.908-909; 李鵬年外著, 앞의 책, pp.22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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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국가체제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는 만주족의 국가로서의 성격을 탈각하는 계기를. 이루게 되었으며 후금의 배타적이고 국수적인 체계에서 벗어나 한족과 몽고족도, 적극적으로 포괄하는 다민족 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다.42)

홍타이지는 이상과 같이 內政을 변모시켜 한편으로는 절대군주로서의 지위를 확 보하면서 한편으로는 요동의 지배를 안정시켜 나갔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정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대외관계에도 주력하였다 먼저 대명관계에서는. 천총 원 년(1626) 이래로 7번에 걸쳐 대명화의의 서신을 보냈으나 원숭환의 화의 주장에, 도 불구하고 명조 측에서 이러한 화의제안을 거절하자 錦洲와 寧遠을 공략하였지 만 패퇴하였다 영원과 금주에서의 패퇴는 대명전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데 전자의 경우는 영원을 중심으로 한 명조측의 북방수비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고 후자의 경우는 영원과 금주를 잇는 수비선의 공고성을 확인한 것이었다.43) 그 러나 방어 위주의 전략을 주장했던 원숭환이 파면된 후 서양식 대포인, 紅夷砲로 무장한 만주 측에서 천총 5년 대릉하를 공략하여 성공하였다.

또한 홍타이지는 명조를 고립시키고 경제적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하여44) 두 차 례에 걸쳐 조선을 정벌하여 대명견제를 이루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원조해준, . 명조와 대단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만약 후금이 명조를 공격할 경우 배후에 서 공격할 가능성이 높았다.45) 홍타이지는 천총 원년(1626), 숭덕 원년(1636) 두 차례에 걸쳐 조선정벌에 나섰다. 1626 (년丁卯)의 胡亂은 丁卯講和條約을 조인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으나, 1636 (년丙子) 12월 홍타이지는 조선이 조약를 제대로 이 행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10만 대군을 친히 이끌고 다시 침략하였다. 椵 ‧島 雲從島 大‧ 일대와 평양이 차례로 함락되자 남한산성으로 몽진했던 인조는 1637년 花島 鐵山‧

정월 결국 항복하고 맹약을 맺었다 군신관계와 무역관계를 골자로 하는 이 맹약의. 내용은 명조와 국교를 완전히 단절하고 세자를 비롯한 인질들을, 盛京 瀋陽( )에 거

42) 戴逸, 簡明淸史 1 (冊 人民出版社, 1980), pp.78-86.

43) 孫文良, 明淸戰爭史略 瀋陽遼東人民出版社( , 1986), pp.221-272.

44) 金鐘園, 「初期朝淸關係에 대한 一考察」 ( 歷史學報 71, 1976); 金鐘園, 「丁卯胡亂期의 後金 의 出兵動機」 ( 東洋史學硏究 12·13, 1978).

45) 全海宗, 「女眞族의 侵寇 國史編纂委員會」( 편, 한국사 12 , 1981), pp.330-3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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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도록 하며 명조를 공격할 때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매년 많은 양의 다양한 물, , 품을 조공으로 바친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견제세력이었던 내몽고가 察 爾部唅 의 링단 칸의 자칭을 계기로 하여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였다 그

(Lingdan, 林丹) 蒙古大汗 .

는 1628년에 링단 정벌을 명분으로 출병하여 반링단 몽골 연맹과의 연합 출병 가 능성을 확인하고, 1632년에는 링단칸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하였다가 도중에 링단 칸이 西遷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歸化城을 점령하고 이어 명에게 강화를 요구하면 서 링단칸이 갖고 있던 경제권을 요구하여 국지적이고 일시적이나마 명과 교역을 하였다 홍타이지는 몽골이. 長城 지역에서 행사하던 경제활동을 주도하면서 察唅爾 에서 이탈한 몽골 세력을 수습하여 후금의 체제 안에 편입시켰다 그 후 링단칸. 部

이 사망하자 천총 8 (1634)년 察 爾唅 의 잔여 세력을 복속시키고 그 다음해인, 1635 년에는 링단 의 아들을 투항시켜汗 傳國玉璽를 획득함으로써 마침내 몽골 칸의 권 력을 완전히 병합하였다.46)

이상과 같은 대내외적인 기반의 확보를 바탕으로 하여 홍타이지는 1636년 5월 일에 칸대신 칭제하였으며 연호를 천총에서 숭덕으로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으

15 , ,

로 개칭하였다 이러한 대청으로의 발전은 만주국으로서의 후금을 탈각하여 만 한. ‧ ‧ 몽의 3종족을 지배하는 다민족국가로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며 청조의 통치체제, 가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47)

46) 노기식, 「후금시기 만주와 몽고 관계 연구 고려대학교박사학위논문」( , 1999), pp.128-138.

47) 김두현, 「淸朝政權의 成立과 發展」(서울大學校東洋史硏究室編, 講座中國史 Ⅳ, 지식산업사, 참고

1989), pp.154-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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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기의 정국과 황위계승제 개혁 . 多爾袞

만주족의 입관은 요동지역의 지배를 안정시켜 大淸으로 발전한 만주족 통치집 단의 역량과 명조의 내분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중, . 국 진입 이후 청조는 일면으로 전역에 산재한 명조의 잔존세력을 제거하고 또 다, 른 면으로는 중원의 한족 지배를 어떻게 관철시키는가?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조는 갑작스러운 홍타이지의 서거로 혼란한 정국에 접어들. 었다.

누르하치 사망전후를 계기로 세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도르곤은 홍타이지 재위기 에 급격한 성장을 하여 홍타이지 서거시 제일의 실권자로서 순치제의 즉위에 중요, 한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섭정왕으로 군림하며 청조를 통치하게 된다 도. 르곤 섭정기는 홍타이지에 의해 확립되었던 황제권이 유명무실화되어 통치체제가 도르곤의 독주에서 파생된 일인지배체제로 전환된 시기였으나 결과적으로 순치제, 친정 이후 황제권이 강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르곤 사후 친정을 시작한 순치제는 친정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나름대로의 귀결을 보았다 또한 서거하기 전에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 자를 직접 지명함으로써 그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청조의 황위계승의 전통에서 변 화를 꾀하였다.

이에 본장에서는 홍타이지 재위시기 도르곤의 성장을 간략히 논하고 홍타이지, 사후 순치제의 즉위결정이 이루어지기까지 도르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자세 히 살펴보겠으며 도르곤 섭정기 중앙권력의 변화과정을 통하여 당시의 정국을 구, 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순치제가 친정시기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고. 찰함으로써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황위계승제 개혁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알 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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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성장과 의 즉위

1. 多爾袞 順治帝

으로 국호를 정하고 요동지배를 안정시킨 청태종 홍타이지는 이후 중국으로 大淸

남하하여 하북과 산동 지역을 유린하고 1641년을 전후하여 松山과 錦洲를 공략한 뒤 산해관에 대한 공격에 임하였지만 명의 방비가 견고하여 정면공격을 가하는 계 획은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643년 8월 홍타이지는 盛京에서 함으로써 중원에 대한 공격은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더구나 홍타이지는 살아서. 急死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론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조의 통치집 단 내부에서는 급작스러운 홍타이지의 사망에 따른 제위의 계승문제를 놓고 심각 한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인. 물은 예친왕 도르곤이었다.48)

도르곤의 세력은 1630년대에 홍타이지의 신임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 작하였다 그는 동생인 도도. (鑲白旗 소유 와 더불어) 正白旗를 소유하였으며 초기부 터 여러 전역에 참가하였고 1631년 중국적인 육부의 설립시 吏部의 일을 맡아서 관리하였다 많은 정복 전쟁 중 특히. 察 爾唅 원정시 호거 요토와 더불어 세운 공, 로 및 역대 전국옥새의 획득은 睿親王의 칭호를 받게 하였고 1636년 조선정벌(丙 에 참여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년에는 다시 봉명대장군으로 명정

) . 1638

子胡亂

벌에 앞장서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전역에 참가 공로를 세웠다.49) 특히 1630년대의 급격한 성장과 관련하여 그 후반 조선 측 기록을 통하여 청황실의 동정을 볼 때,

에 의하면 1637년 5월 황제의 근황을 전함에 있어 황제를 중심으로

瀋陽日記 九王

은 그 에 는 에 각각

(多爾袞 十王 多鐸)‧ ( ) 東壁 , 虎口 豪格 要土 岳託 頭頭 杜度( )‧ ( )‧ ( ) 西壁

그 자리를 정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으며, 163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황실의 제반

48) 이 시기에 다이곤이 세조의 즉위와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일부 버일러에 의한 다이, 곤 추대설은 그가 누르하치의 계승자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이는. 도르곤이 사실상의 상속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실질적인 면에서 황제 다음의 권력자였기 때문인 것으로 고려된다 최소자. , 「淸初의 王位繼承과 多爾袞」 ( 이화사학연구 9, 1970), p.9.

49) 淸史稿 列傳 「 」 5, 諸王列傳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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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를 함에 있어서 황제 다음의 위치를 점하는 인물이 도르곤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홍타이지 재위시 기타 諸王들의 경우를 보면 천총 초기 팔기소유자는 황제 를 위시하여 도르곤 도도 다이산 요토 아민 망굴타이 등이다 이들 중 대 버일러였던‧ ‧ ‧ ‧ ‧ . 아민 망굴타이는, 1630년대 초에 세력을 잃거나 사망하였고 다이산 역시 점차적으 로 권한이 축소되어 1633년에 이르러서는 황제 중심의 독재가 형성되기 시작하였 다 따라서 도르곤과 비교가 될만한. 팔기의 소유자는 요토이며 그들과 더불어 고 려되어야 할 인물이 홍타이지의 장자인 호거이다 요토는 다이산의 장자로서 홍타. 이지 즉위를 부친에게 건의한 인물이다 그는 천명 말부터 전역에 참가하여 버일러. 가 되었으며 조선정벌(丁卯胡亂)에 참가 및 대명정벌 특히 寧遠城 정벌에서 공을 세웠다. 1632-35년 많은 전역에서 세운 공로로 1636년에 成親王에 봉해졌으나 망굴타이의 반역사건에 연관이 있었다는 혐의 등으로 강직되었고, 1638년 대명정 벌도중 전사하였다.50) 또한 호거는 홍타이지의 장자로 천명 말기에 전역에 종사한 공로로 버일러가 되었으며 천총 초에 명과 몽고정벌에 참가, 1636년 숙친왕에 봉 해졌으나 곧 요토와 더불어 모반사건에 연관되어 면직되었다가 조선정벌 및 대명 정벌에 다시 참여하여 어느 정도의 지위를 회복하였다.51)

이상에서 볼 때 1630년대에 도르곤과 비교될만한 인물은 호거라고 할 수 있겠지 만 호거의 경우 나이는 도르곤보다 많지만 숙질의 관계가 항상 앞섰고 도르곤에, 비하여 홍타이지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으며 실제의 활동 역시 지도적인 역할은 담 당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태종 년간에 활동을 통하여. 諸王들중 가장 큰 세력을 형 성한 인물은 도르곤이라 하겠다.

홍타이지가 갑자기 서거한지 5일 이후인 1643년 8월 14일 新君을 세우기 위한 팔기 왕공대신 회의가 盛京 瀋陽( ) 황궁내 숭정전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당년. 6 세에 불과했던 홍타이지의 제 9자 푸린(Fulin, 福臨)의 즉위가 결정되었다 훗날 순. 치제가 되는 푸린의 계위는 도르곤에 의해 주도된 공의에 의한 것으로 이는 당시 청조의 지배계층 내부에는 아직도 팔기연합통치에 의한 권력적 작용이 내재하고

50) 淸史稿 列傳 「 」 3, 諸王列傳 2.

51) 淸史稿 列傳 「 」 6, 諸王列傳 5.

(31)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홍타이지의 서거 당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우선적인 인물은 홍타이지의 아 들 열 한 사람으로서 별 활동이 없는 서비 소생을 제외할 경우 장자인 호거와 제 자인 푸린 및 제 자인 이며 홍타이지의 형제중 당시까지 활약자가

9 11 博穆博果爾

다이산 아지거 도르곤 도도 등이었다.‧ ‧ ‧

푸린의 즉위 경위에 관한 사료를 종합해 보면 숭정전 회의는 홍타이지의 아들을 추대하고자 하는 兩黃旗 將領들의 무장 시위 속에서 진행되어 다이산의 호거 추대, 와 호거의 고사, 兩黃旗 將領의 위협적인 발언과 도르곤의 저지 영친왕 아지거 예, ‧ 친왕 도도의 예친왕 추대와 사양 도도의 자천과 부동의 그리고 다이산의 결단에, , 따른 도르곤의 푸린추대의 순서로 나타나고 있다.

푸린의 즉위 전후의 경위에 대하여 조선 측의 사료를 보면 14 (일 홍타이지의 서 거는 9 )일 諸王들의 회의에서 다이산은 호거가 홍타이지( )帝 의 장자로 마땅히 대통 을 이어야 된다고 하였으나 호거는 일단 사퇴하였으며 홍타이지의 수하 장령들이 다시 홍타이지의 아들 중에서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아지거 도도 등은 별‧ 의견을 내놓지 않았으며 도르곤은 호거가 이미 사양하고 퇴출하였으니 계통의 뜻, 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 제 9자인 푸린을 세우고 자신의 보정 의사를 밝힌다 또한. 도르곤이 장자 호거를 폐하고 그 셋째아들 푸린 을 세웠는데( ) 群情이 자못 不悅하였 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52)

이나 에 의한 당시의 상황을 보면 다이산을 위시하여 大淸世祖章皇帝實錄 東華錄

아지거 도르곤 도도 아바타이 지르갈랑 및 그들의 자손들이 참석한 諸王 貝勒 貝子 公‧ ‧ ‧ ‧ ‧ ‧ ‧ ‧ 의 회의에서 푸린의 즉위가 결정되었다.

文武君臣 53) 특히 당시의 상세한 경위는 조

선측 사료에 보인다 다이산의 호거추대 및 후계는 선제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兩黃 장령들의 주장은 은연중에 이 범주를 넘어설 수 없음을 설정하게 되었고 도르, 旗

곤은 이 범주 내에서 호거의 세력배제를 전제로 정비소생의 年幼한 푸린을 추대하 였고 결국 그의 뜻은 관철되었으며 이같은 결과는 진행 과정상의 자연적인 것이었,

52) 朝鮮王朝仁祖實錄 卷44, 仁祖 21年 月 壬辰條9 . 53) 大淸世祖章皇帝實錄 卷1, 崇德 年 月 乙亥條8 8 .

(32)

다 푸린추대와 더불어 자신의 보좌의사를 밝힌 것은 도르곤이 사실상 그 이상의. 야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푸린의 즉위 결정 이후 阿達禮(다이산의 손자 와) 碩託(다이산의 제 2 )자 의 모반사건에 대하여 瀋陽狀啓에 실려 있는 내용을 보면 阿達禮와 碩託이 다이산에 게 가서 「今立稚兒 國史可知 不可不速爲處置云」라고 하여 푸린의 즉위를 반대하였 으나 다이산은 이미 결정된 사실에 대하여 타의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며 이, 들은 도르곤 으로부터 역시 牢拒를 받았고 도도로부터도 찬성을 얻지 못하였으며 거듭 다이산에게 물었으나 어찌 재차 망언을 하느냐고 힐난을 받았고 16일 결국 체포되기에 이르렀다.54) 이 조선 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푸린추대를 반대한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누구를 추대하려고 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모, . 반에 대하여 世祖實錄에서는 阿達禮 碩託‧ 에 의하여 睿親王 도르곤 추대의 움직임 이 보이고 있다. 阿達禮와 碩託이 푸린의 즉위를 반대하고 도르곤의 추대를 계획함 에 있어서 적어도 푸린을 반대한 이유는 그가 年幼하여 국사를 모르니 나라를 통 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55) 그러나 왜 도르곤을 추대하려고 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대체적인 지금까지의 상황을 통하여 보면 도르곤이 당시의 실권자 즉, 순치의 섭정으로까지 등장할 수 있었던 실력자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또. 한 도르곤이 그들의 추대설을 묵살하여 버린 것은 시기적으로 푸린의 즉위가 결정 된 직후라는 적당하지 않은 때에 실권없는 諸王에 의하여 발설되었고 다이산을 위, 시한 강력한 諸王에 의하여 무시되어질 정도였다는 점은 도르곤의 입장에서는 오 히려 그들을 처벌하는 편에 서지 않았나 생각된다.56)

순치제의 즉위는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당시 청조 통치집단의, 권력투쟁을 방지하고 出師於中原을 위하여 도르곤이 선택한 최선의 정책적 결정이 라 할 수 있다 숭정전회의에서 가장. 衆人의 주목이 되었던 제일의 실력자 도르곤 이 제위를 사양하고 정친왕 지르갈랑과 더불어 좌우보정을 자임하며 사실상의 실 권을 장악하는 과정은 도르곤의 정치적 안목과 지모를 짐작하게 하여 준다.

54) 瀋陽狀啓 京城帝國大學法文學部( , 1935), p.602.

55) 大淸世祖章皇帝實錄 卷1, 崇德 年 月 丁丑條8 8 .

56) 최소자, 「淸初의 王位繼承과 多爾袞」 ( 이화사학연구 9, 1970), pp.9-14 참고.

(33)

의 섭정과 중앙권력의 변화 2. 多爾袞

도르곤이 섭정왕으로 재임하던 순치 원년부터 7년까지의 시기는 중앙정치제제의 양상이 일단 굴절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태종 년간에 이룩되었던 청. 초통치제도의 발전이 섭정체제로 말미암아 황제지배 중심이 아닌 섭정왕 중심의 권력체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년 월 일 푸린 즉 순치제가 황제로 즉위하고 화석정친왕 지르갈랑과 화

1643 10 8 ,

석예친왕 도르곤이 輔國理政의 중심을 담당한지 4개월 후 두 왕은 諸王貝勒의 부 원사무관리를 혁파하는 중대한 조치를 취하였다 두 왕이. 輔理國政을 하고 있는 상 황에서 부무를 겸리하는 것은 불편하며 또한 두 왕이 부사를 포기하였는데, 諸王이 부사를 계속 담당하는 것은 불편하므로 諸王貝勒의 부원사무판리를 정지한다는 것 이다.57) 이는 諸王의 직권이 삭감되고, 各部貝勒들이 중심이 된 合議政體가 2王에 의한 獨任體制로 변화되는 조치였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변화는 도르곤 섭정시기. 중앙권력의 양상에 대해 만주족에 의한 부족적 합의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황제독 재의 중국식 지배체제로 진행되는 과도기적 형태로서 특정지을 만한 것이다.

정친왕과 예친왕에 의한 두 왕의 보정체제로 시작된 순치초기의 중앙권력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예친왕 도르곤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모든. 衙門의 사무나 에 기재하는 일이 있을 경우 도르곤이 먼저 알도록 하고, 의 서명 또한 도

檔案 檔子

르곤의 왕명이 먼저 기재되도록 하라는 지르갈랑의 諭가 있었던 것이다.58) 그 내 용은 두 왕의 권력관계에 이미 우열이 있었음을 가늠하게 한다.

한편 순치 원년(1644) 4월 1일 正黃旗 固山額眞 河洛會는 숙친왕 호거가 亂政‧

등의 일곱가지 망동으로 를 도모했다 하여 섭정 두 왕에게 했

悖政 爲亂‧ 不軌 告託

다 도르곤은 이를 계기로 자신의 최대 정적인 호거와 그의 추종세력을 거세시켰. 다.59) 八旗諸王 貝勒‧ 이 참여한 의정왕대신회의를 거쳐 호거의 심복이었던 俄莫克

57) 大淸世祖章皇帝實錄 卷2, pp.17-18.

58) 앞의 책 卷3, p.4.

59) 周遠廉, 順治帝 吉林出版社( , 1992), pp.16-19.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