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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 김용준의 수필 연구 - 김용준의 예술관과 ‘문인화식 글쓰기’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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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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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

1)강정화

*

목 차 1. 들어가며

2. 예술의 의미와 강직한 철학의 발현

3. ‘동양적인 것’으로의 회귀와 ‘문인화’식 글쓰기 4. 나가며

<국문초록>

본 연구는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김용준의 수필을 중심으로 그의 예술세계를 가 로지르는 의식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김용준은 근대화가 이루어 지던 시기 문예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그의 수필에 관한 단독의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수필은 작가의 의식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준의 수필에서 는 화가이자 미술이론가였던 김용준의 예술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술을 예술 로써 대하고자 했던 예술 지상주의적 태도와 예술가가 지녀야 할 강직한 태도, 그 리고 우리 화가가 지향해야 할 동양주의의 예술까지, 그의 예술세계를 아우르는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수필을 살펴보는 것은 김용준의 예술 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우리 예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점철되었던 근대화 시기 예술인들의 고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이 된다. 미술인이었던 김용준의 문인으로서의 면모를 살핌으로써 우리 문예사의 외연이 확장되기를 기대해본다.

주제어 : 김용준, 수필, 예술 의식, 글쓰기, 예술 정체성

* 경기대학교 융합교양대학 초빙교수

(2)

1. 들어가며

근원(近圓) 김용준(金瑢俊, 1904-1976)은 근대 미술사가 요동치던 1920 년대부터 활발하게 활동한 서양화가, 동양화가, 미술이론가이자 교육자, 장 정가, 수필가였다. 김용준은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 <동십자각(東十字閣)>1)으로 입선하며 화가로 데 뷔한다. 졸업 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를 수학하고 돌아와 미술 교 사로 활동함과 동시에 녹향회(綠鄕會), 동미회(東美會), 백만양화회(白蠻 洋畵會), 목일회(牧日會) 등 다양한 그룹을 조직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2) 하지만 1939년에는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 문인화를 기반으로 한 새로 운 감각의 표지화로 신문인화(新文人畵)3)의 세계를 열며 작품 세계의 변 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후 그는 창작 활동뿐 아니라 미술평론에서 미술사학 까지 영역을 넓히게 된다.

특히 김용준의 장정 활동은 1933년 뺷신가정뺸 2월호를 시작으로 1950년 월북 전까지 계속되는데, 단행본과 간행물 장정을 합한 작품 수가 무려 45점 이 넘어 당시 장정 화가의 대표인 길진섭, 정현웅과 더불어 직업적인 성격의 장정가4)로 인쇄 미술을 이끌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용준에 관한 연구는 비교 적 늦게 시작되었는데, 월북 화가로 해금(解禁) 조치가 있었던 1988년 이후에 야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금된 1988년에는 1948년에 발표 했던 수필집인 뺷근원수필(近園隨筆)뺸이 재출간5)되고, 김용준의 예술세계에

1) 이 작품의 제목은 원래 <건설이냐? 파괴냐?>였지만 일제의 검열로 <동십자각>으로 바꾸어야 했다. - 최태만, 「근원 김용준의 비평론 연구」, 뺷한국근현대미술사학뺸 7, 한국 근현대미술사학회, 1999, 90쪽.

2) 이인숙, 「근원 김용준(1904-1967)의 기명절지화 연구」, 뺷민족문화연구뺸 85호, 민족문화 연구원, 2019, 495쪽.

3) 김현숙, 「김용준과 ≪문장≫의 신문인화 운동 - 동양주의 미술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뺷미술사연구뺸 16호, 미술사연구회, 2002, 366쪽.

4) 오윤형, 「근원 김용준의 ≪문장≫ 표지화」, 뺷한국예술연구뺸 18호, 한국예술연구소, 2017, 274쪽.

(3)

대한 단편적인 글들이 발표6)되며 김용준에 대한 조명이 시작된다. 이후 1997 년 김용준을 주제로 한 첫 학위논문이 발표7)되고, 2001년부터 전집이 구성8) 되며, 그가 서양화가로 활동했을 때부터 장정에 관한 연구, 그리고 동양화로 전향한 이후 ≪문장(文章)≫지의 표지에 구현한 신문인화,9)미술사를 비롯 한 미술론10)등의 연구도 진행된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예술 가이기에 그 연구 영역 역시 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유독 뺷근원수필뺸에 대한 단독의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물론 김용준의 주된 활동이 미술이었기에 미술가로서 더욱 활발하게 연구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하지만 “한국 수필 문학의 백미”11)로 조선을 대 표하는 문장가 이태준의 수필과 비견해서 부족함이 없다는 평12)을 받는 것 을 감안하면 문인으로서 김용준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아쉬움 을 남긴다.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수필에는 그의 예술 의식이

5) 김용준, 뺷근원수필뺸, 을유문화사, 1988.

6) 김복기, 「김용준 - 민족미술의 방향을 제시한 근대화단의 재사」, 뺷월간미술뺸, 1989.12.

최열, 「김용준의 초기미학미술론 - 최고의 논객 김용준」, 뺷가나아트뺸 1․2월호, 1994.

7) 이경희, 「近圓 金溶俊의 繪畵와 批評活動 硏究」,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석사학 위논문, 1997.

8) 김용준, 뺷근원 김용준 전집뺸, 열화당, 2001.

9) 김현숙, 위의 논문, 2002.

안현정, 「해방이후(1945-1960) 한국화단의 경향과 수묵화 교육에 관한 연구 - 근원 김 용준의 수묵남화론을 중심으로」, 뺷미술교육논총뺸 20호, 한국미술교육학회, 2006.

박계리, 「20세기 한국회화에서의 전통론」,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논문, 2006.

윤범모, 「근원 김용준 탄신 백주년 기념 학술대회-김용준의 조선미술론의 고찰」, 뺷인 물미술사학뺸, 인물미술사학회, 2005.

10) 최태만, 위의 논문.

윤세진, 「현실과 예술, 그 ‘사이’의 비평: 김용준의 1920-30년대 비평연구」, 뺷한국근대 미술사학뺸 17,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06.

정형민, 「한국미술에서의 동양성 개념의 출현과 변형」, 뺷미술이론과 현장뺸 1, 한국미술 이론학회, 2003.

11) 신수경, 「일상과 고전의 융합: 시각 이미지를 통해서 본 김용준의 뺷근원수필뺸」, 뺷미술 사학보뺸, 미술사학연구회, 2018, 212쪽.

12) 황종연, 「문장과 문학의 정신사적 성격」, 뺷동악어문학뺸 21, 동악어문학회, 1986,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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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수필은 반드시 연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김용준의 수필 연구가 제대로 이 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수필을 ‘곁장르(주변장르)’로 여기는13)인식이 작용 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수필은 비평계와 학계로부터 소외된 채 가벼운 장르나 여기(餘技)의 문학 정도로 인식”14)되어,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것과는 별개로 판단되 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장르임에도 시나 소설, 극과 같은 여타의 장르보 다 하위에 놓인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허만욱은 네 가지 이유를 꼽는다. 첫째는 수필이 무형식의 문학이라는 왜곡된 인식에 있으며, 둘째는 학자와 비평가들이 수필을 시와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시해 왔기 때문이며, 셋째는 수필이 창작에만 편중되어 이론연구와 비평에 소홀했다는 점이고, 넷째는 젊은 문인들보다는 나이 든 작가들의 비정통 문학 장르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다.15)

하지만 수필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장르보다 작가의 의식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수필은

“의식의 민낯에 해당하는 글로서, ‘경험’과 ‘통찰’이 결합된 산문”16)인바, 한 작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화가이자 미술비평가, 미술사학자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근원 김용준의 예술세계를 그의 ‘수필’을 통해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1924년부터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김용준은 1936년에 첫 수필 「서울 사람 시골 사람」을 발표,17)이후 1948년에 수필집 뺷근원수필뺸을 출간한다. 그의

13) 김미영, 「채만식 수필연구」, 뺷한국문학과 예술뺸 23,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7, 254쪽.

14) 허만욱, 「수필문학의 이론과 비평, 학술 연구의 진단과 방향」, 뺷어문론집뺸 71, 중앙어문 학회, 2017, 237쪽.

15) 허만욱, 위의 논문, 237쪽.

16) 김미영, 위의 글, 255쪽.

17) 최열, 「근원을 담은 그릇」, 뺷새근원수필뺸, 파주: 열화당, 200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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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의지나 곧고 강직한 철학, 그리고 전통을 바라 보는 시각까지, 그의 예술세계를 아우르는 의식이 담겨 있어 김용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전통과 신문물의 갈등과 일제강점기 지식인으로서 예술에 대한 고뇌를 읽을 수 있어 근대 시기 우리 예술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뺷근원수필뺸 이후 새로 발굴한 글을 실어 2000년에 재발간한 뺷새근원수필뺸에 수록된 총 53편의 수필을 분석해 그의 예술세계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자 한다.

2. 예술의 의미와 강직한 철학의 발현

2.1. 순수한 정신의 결합과 예술의 의미

1927년은 우리 근대 미술계에 큰 의미가 있는 해이다. 카프(KAPF)에 미 술부를 창설하기도 했던 그해에 조각가이자 미술비평가였던 김복진의 「나 형선언초안((裸型宣言草案)」을 시작으로 우리의 예술을 어떻게 대해야 하 는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미술 논쟁’(이하 ‘프로미술 논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김복진, 윤기 정, 임화 등 당대 쟁쟁한 논객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 동경미술 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용준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는 프로미술 논쟁이 있었던 1927년에만 「화단개조」, 「무산계급회화론」,

「프롤레타리아 미술 비판- 사이비 예술을 구제하기 위하여」 등 세 편의 글을 연속으로 발표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특기할 점은 그가 여타의 글을 발표하면서 예술관(藝術觀)의 변화를 보인다는 것이다.

상아탑 속에 숨은 그들에게는 사회가 안 보였고, 부모가 안 보였고, 자기의 탕 자(蕩子)까지도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이 사실이 화가에 있어서 심하였던 것이 다. 그들은 집에 불이 나도 몰랐고, 처자(妻子)가 굶어죽어도 태연하였다. 사회

(6)

와의 교섭은 말해 무엇하랴. 이 영향은 금일에까지도 파급하여 사회가 그들(화 가)에게 대한 태도가 역시 이러하다. 이리하여 화가가 되면 사회와 등질 줄 알았 고, 사회는 이를 용서해왔다.

18)

1927년 5월에 발표한 「화단개조」에서 그는 예술가들이 상아탑 속에 숨어 사회와 등지고, 사회 역시 이를 용서해왔다고 말하면서 사회 속에서 행동하 지 않는 예술가들을 비판한다. 이는 김복진이나 임화 등 프로미술을 주창했 던 논객들의 의견과도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예술가들(화가들)이 자 신의 갇힌 세계를 벗어나 사회에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으로, 사회 속 에서 예술이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는 논쟁을 주고받으며 곧 자신의 의견에 수정을 가한다.19)우리 미술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이 논쟁 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런 변화를 보일 수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술적 요소가 미를 본위로 한 이상 미의 표준과 미의식에 있어서는 시대와 사상, 즉 환경을 따라 변환(變換)할지나, 미의식을 부인하고는 예술이란 대명사는 붙일 수 없는 것이다. 예술품 그 물건이 실감에서, 직감에서, 감흥에서, 이 세 가지 조건하에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술은 결코 이용될 수 없고, 지배될 수 없으며, 구성될 수도 없다. 또한 예술품 그것은 결코 도구화할 수 없고, 비예술적일 수 없고, 오직 경건한 정신이 낳는 창조물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결코 과학적이 어서는 아니 되며, 순연(純然)히 유물론적 견지에서 출발하여서도 아니, 될 것이 다.

20)

(인용자 강조)

18) 김용준, 「화단개조」, 뺷조선일보뺸, 1927.05.18-05.20.

19) 당시 그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이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김복진이나 임화 등이 주장 했던 ‘프로미술’과 상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곧 프로미술과의 정치적 인 연결지점에서 벗어나는데, 예술을 일정한 ‘사조’로 엮어 이용하는 것에 반대하며 스스 로 ‘무정부주의자’임을 드러낸다. 최태만은 김용준의 이러한 태도 변화가 좌파예술의 경 악적 공포감만을 파악했을 뿐 그들의 정치성을 간파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도, 보수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격렬한 주관주의에 바탕한 새로운 예술을 주창하여 표현주 의적 예술의 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 최태만, 위의 논문, 92~93쪽.

(7)

예술은 결코 이용될 수 없고 지배될 수 없으며 구성될 수도 없다는 그는 예술가들이 예술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는 예술을 ‘예술’로써 바라보아야 한다는 인식을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미술론은 몇 개월 만에 자신의 의견을 대폭 수정하는 등 하나로 정제 되지 않아 “좌충우돌식의 글을 발표”21)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의 변화는 예술을 다른 무엇도 아닌 예술로 대하고자 했던 자신 의 예술관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22) 사실 그의 예술 지상주의적 의 식은 예술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유년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자신의 경 험과 생각을 생생하게 드러낸 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용준은 재치 있는 문투와 구성으로 ‘예술가’로서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펼친다. 평생을 서양화가이자 동양화가, 비평가, 미술사학, 수필가로 문학과 미술이라는 장르를 가로지르며 예술 활동을 펼쳤던 김용준에게 ‘예술’이 어 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김용준에게 예술은 자신 의 감정을 충실하게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걸핏하면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나이 이십을 전후할 적 에 이런 일이 많았다. 그것을 나의 인생의 가장 낭만적인 시기인 관계라 하겠다.

그럴 때면 나는 흔히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아무도 안 보는 호젓한 곳에서 혼자서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이 고독한 심사는 얼마쯤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생각키를, 고독이란 자기의 역량이 빈약할 때 느껴지는 일종의 감

20) 김용준, 「프롤레타리아 미술비판」, 뺷조선일보뺸, 1927.09.18-09.30.

21) 최태만, 위의 논문, 95쪽.

22) 월북 이후 김용준은 사회주의 미술에 합류하는데, 동양화를 ‘조선화’로 불러야 한다며,

“인민 생활을 반영해 현실성 있는 작품을 주제로 다루”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프로 미술의 도구론에 반말하여 순수 예술로 돌아섰지만, 미술을 통해 사회를 드러 내고자 했다는 점에선 일관된 예술 의식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련된 논문은 다음을 참조. - 김미정, 「김용준의 월북 이후 활동과 회화 연구」, 뺷한국근현대미술사학뺸 39호,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20, 18쪽.

(8)

정이라고 하였다.

23)

아무것도 아닌 일에 걸핏하면 외로움을 느낀 김용준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고독한 감정에 얼마간의 위안을 얻는다. 자기 역량이 부족할 때 느끼는 이런 고독이라는 ‘감정’을 예술로서 달랜 것이다. 그는 “이런 감정이 있고서야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24)며, 예술에 있어서 ‘고독’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예술이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며, 무엇으로 활용될 수 없는 부분이다. 삶의 고독이 라는 결핍은 채울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화에게 “조선의 돈-키호테”25)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프로미술 논쟁 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김용준이지만, 그의 예술 의식은 결국 순수 예술로 서 예술을 바라보고자 한 부분으로 수렴된다. 이는 그가 예술을 생각하고 있는 근원적인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 어 ‘예술’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순수하다는 것을 정신의 결합에서밖에는 찾을 길이 없다.

이 정신의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종교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에서뿐 이다.

26)

그에 따르면 순수하다는 것은 정신의 결합에서만 찾을 수 있는데, 이 정 신의 결합은 오직 종교와 예술에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김용준에게 예술의 세계는 종교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예술을 종교와 같게 보았던 그였기에

23) 김용준, 「고독」, 뺷김용준 전집1 - 새근원수필뺸, 파주: 열화당, 2007, 65쪽. - 앞으로 김용준 뺷새근원수필뺸에 수록된 글은 쪽수만 표기한다.

24) 김용준, 위의 글, 68쪽.

25) 임화, 「미술영역에 재한 주체이론의 확립 - 반동적 미술의 거부」, 뺷조선일보뺸, 1927.11.

20-11.24.

26) 김용준, 「육장후기」, 127쪽.

(9)

순수한 의도와 정신으로 예술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종교’와 ‘예술’을 동일시하고 있다고 해서, 예술이 일 상에서 벗어나는 신성화 된 영역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독이라는 감정을 예술을 통해 위로받았던 것처럼 그에게 “미는 우리 인간의 제일 순 결한 감정의 표현”27)이 된다. 인간은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 므로, ‘미’는 우리 삶을 구성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요건이다. 그래서 그는 “예술이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도 하는데, 예술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과 같은 다반사에 불과”28)

“제이차의 본능”29)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밥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본능(예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본능 없이는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속성상, 예술이 인간의 삶에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예술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라고 할 지라도 어떤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모든 이욕(利慾)에서 떠나고 모든 사념(邪念)의 세계에서 떠나, 가장 깨끗 한 정신적 소산이고서야 비로소 미술품이 될 수 있”30)기 때문이다. 다시 말 해, 인간에게 예술이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본능 같은 기본 요소이지만, 이것이 ‘미술품’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이욕과 사념의 세계에서 떠나야 한 다. 여기에서 그가 예술과 예술품을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예술품’

은 하나의 결과물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가장 깨끗한 정신이 예술품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7) 김용준, 「미술」, 179쪽.

28) 김용준, 「예술에 대한 소감」, 181쪽.

29) 김용준, 「미술」, 177쪽.

30) 김용준, 위의 글, 180쪽.

(10)

2.2. 강직한 예술가로서의 의지

지금까지 김용준에게 예술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에게 예술이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본 구성 요소지만, 그것이 실제 미술품이 되기 위해서는 이욕과 사념의 세계를 떠나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예술품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술가’로서의 자 세였다. 그는 “미는 곧 선”이라고 주장하며 “인격의 행위화”31)에서 완전한 미가 성립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예술은 예술 그 자체의 의미보다 그것을 실현하는 예술가 로서의 강직한 의지가 중요했다.

그런데 나란 사람이 일생을 거의 삼분의 이나 살아온 처지에 아직까지 나 자 신 환쟁인지 예술가인지까지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딱하고도 슬픈 내 개인 사정이거니와, 되든 안 되든 그래도 예술가답게나 살아 보다가 죽자고 내 딴엔 굳은 결심을 한 지도 이미 오래다. 되도록 물욕과 영달에서 떠나자. 한묵(翰墨) 으로 유일한 벗을 삼아 일생을 담박(淡泊)하게 살다 가자 하는 것이 내 소원이 라면 소원이라 할까.

32)

(인용자 강조)

김용준에게 ‘예술가’답게 산다는 것은 ‘물욕’과 ‘영달’에서 떠나 ‘담박’하게 사는 것이다. 물욕과 영달은 부와 명예와 같은 세속적인 조건이다. 이런 외부 적인 요소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하는 김용준은 예술가로서 의 강직한 삶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환쟁이와 예술가가 갈리는 지점 은 그곳에 있는 것이다. 외부의 조건에서 벗어나 인간의 고독을 채울 수 있는 예술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길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삶을 살아가는 인격이란 예술가의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한다. 예술가의 인격이 완성되지 않는다면 훌륭한 예술품이 나올 수 없기

31) 김용준, 「예술에 대한 소감」, 182쪽.

32) 김용준, 「게」, 20~21쪽.

(11)

때문이다. 시골서 교장 노릇을 하던 친구 G가 위정자가 되어 보겠다며 서 울로 올라오는데, 김용준은 이런 G에게 조언을 건넨다. 그리고 이 조언 속 에 ‘인격’에 대한 그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껍데기 세상만 보지 말고 속 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있는 세상을 보아야 하네.

감투란 원래 값이 비싼 것이 아닐세. 아니라기보다 한푼어치 값도 없는 것이요, 또 값이 있을 수도 없네. 감투가 돈으로 환산되는 날 세상은 망하는 날일세. 왜 그러냐 하면 감투를 밑천 들여서 사는 날 벌써 감투 밑천을 뽑아야 할 생각이 안 나겠나?

33)

김용준은 당시 거금을 주고라도 정치를 해보겠다는 친구에게, 돈을 들여 감투를 얻은들 본전 생각이 나지 않겠냐는 일침을 가한다. 사람의 본성이 밑천을 생각하는바 이런 부수적인 일을 만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 는 조언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자 한 김용준의 의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본인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 한다. 특히 조선 시대의 화가인 안견, 강희안, 이정, 정선, 신윤복, 김홍도, 최북, 임희지 등 선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소개하며 예술가로 사는 삶과 작 품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드러낸다.

[임희지는] 성미가 청렴하고 강개(慷慨)한 기절(氣節)이 있으며, 삼각 수염에 신장이 팔 척이나 되는 끼끗한 선비였다.

술을 대하면 주야를 구별하지 못하여 이삼 일씩 취하는 것은 항다반사였다.

난죽(蘭竹)을 전문(專門)하였으나 죽(竹)은 표암 강세황과 비견하며 난(蘭)은 훨씬 표암을 능가하였다. 그 필법은 그의 청렴 강직한 기개와 같이 유아(幽雅)함 이 구석구석에 창일하고 있다.

34)

33) 김용준, 「강희자전과 감투」, 53쪽.

34) 김용준, 「최북과 임희지」, 234쪽.

(12)

그는 수월도인(水月道人) 임희지를 ‘정열의 화가’라고 소개하면서도 그 의 청렴함을 강조한다. 술을 좋아하지만,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필법은 ‘청 렴 강직한 기개’를 담고 있어 표암 강세황을 능가한다고 평한다. 임희지는

“집이 가난하여 세간이라고 이를 만한 것이 없으나 오직 금(琴), 경(鏡), 검 (劍), 연(硏)과 고옥(古玉)으로 만든 필가(筆架) 하나가 유일한 가장집물 (家藏什物)”35)일 정도로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 속에서 예술가의 삶을 이 어갔으며, 여기에 그 자신의 ‘호방함’을 더해 작품에 이러한 그의 기개가 드 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에는 이런 ‘인격 도야’에 관한 관심을 드러낸 글이 많 은데, 이는 그의 개인 성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태만 은 김용준이 중앙고보 시절, 학업성적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내문제 로 일어난 동맹휴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일화에서 그의 강직한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36)그뿐 아니라 일제에 의해 창씨 개명이 있었던 때, 창씨한 사람의 열에 끼이지 아니했던 사례를 통해서도 이런 강직한 성 정에 대한 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창씨(創氏)란 간판을 걸고 우리 겨레를 습격해왔다.

내가 창씨한 사람의 열에 끼이지 아니했다는 것쯤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도 못 되지만,

37)

일제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그의 강직한 태도는 예술 행위로도 연결되는데, 그에게 일제와 타협하는 예술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일본이 패망하는 날은 반드시 우리에게 독립이 올 것이요, 우리가 떳떳한 독립 국민이 되는 날은 내 평생에 쌓인 심회를 탁 풀어놓고 마음대로 그림도 그려 보려니 하였다.”38)

35) 김용준, 위의 글, 234쪽.

36) 최태만, 위의 논문, 90쪽.

37) 김용준, 「검려지기」, 30~31쪽.

38) 김용준, 「육장후기」, 125쪽.

(13)

고 말하며 올바른 철학을 가진 예술가로서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본인은 물론 훌륭한 예술가로서 성정과 조건을 갖춘 이에게 존경의 마음 을 감추지 않기도 한다. 김용준이 살았던 집 ‘노시산방’은 소설가 이태준이 지어준 이름이다. 늙은 감나무(老柿)가 서 있는 이 집에서 김용준은 지극정 성으로 나무와 화초를 심으며 가꾸었고, 이후 화가 김환기에게 집을 넘긴다.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도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 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藝術心)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 엇보다 기쁜 일이다.

39)

그가 살았던 집의 경제적인 가치는 올라갔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헐값에 넘긴 것에 후회가 없다. 그 이유는 ‘김환기’라는 예술가를 얻었다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김환기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며,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에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40)이다. 즉 김용준이 보기에 예술가로서 자격이 충분한 김환기에게 집을 넘겼기 때문에, 집값으로 인한 차익 따위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술가로서 강직한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김용준의 의지를 그의 글을 통해 살펴보았다. 김용준의 수필집에 묶인 수필들은 그가 참여했던 뺷문 장뺸지에 1939년부터 집중적으로 발표된 글들이다. 1940년대로 치달으며 일 제의 검열이 심해지고 친일로 등지는 인사들이 많아지던 시기, 예술가로서의 의지를 다지는 것은, 세상에 대한 비판이자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

39) 김용준, 위의 글, 128쪽.

40) 김용준, 위의 글, 128쪽.

(14)

이 비애의 주인공은 실로 나 자신이 아닌가. 단장의 비애를 모르는 놈, 약고 영리하게 처세할 줄 모르는 눈치 없는 미물(微物)! 아니 나 자신만이 아니라 우 리 민족 중에는 또한 이러한 인사(人士)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41)

자신을 포함해 ‘약고 영리하게 처세할 줄 모르는 눈치 없는 미물’이라고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은 당시 상황과도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어 리석고 눈치 없고 꼴에 서로 싸우기 잘하는 놈!”42)들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 는 것은, 당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자조이자, 앞으로도 예술가로서 강 직하게 살아내고자 했던 철학의 정립이었다.

3. ‘동양적인 것’으로의 회귀와 ‘문인화’식 글쓰기

3.1. ‘정신’의 표현과 ‘동양주의’

1915년 고희동에 의해 서양화가 소개된 이후,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중심 으로 서양화를 전공한 유학생들이 늘어나게 된다. 바닥에 종이를 깔고 묵과 붓을 이용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방식에서 벗어난 서양화는 서구의 문물이라는 사실로 당시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43)하지만 점진적인 변화 와 발전으로 자생적인 문물을 이뤄낸 것이 아닌,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에서 일본을 통해 왜곡된 상태로 서양의 미술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당시 화가들

41) 김용준, 「게」, 23쪽.

42) 김용준, 위의 글, 23쪽.

43) 미술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은 문인들의 미술비평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희동에 이어 두 번째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던 김관호의 <해질녘>이 문부성 전람회에서 특선 을 수상하자, 춘원 이광수가 매일신보에 연재하던 <동경잡신>에 미술비평문을 싣는다.

그는 ‘미술’을 감상하는 ‘미술감상안’이야말로 문명인이 되는 일대요건이라고 말하며, 김 관호의 특선에 감격한다. 이 외에도 변영로, 최남선, 김기림, 이상, 이태준 등 많은 문인이 미술비평 활동에 뛰어들어, 미술이 가진 ‘신문물’로서의 위상을 알게 한다. 해당 내용은 다음의 책을 참고. - 강정화, 뺷문학이 미술에 머물던 시대뺸, 서울: yeondoo, 2019.

(15)

은 ‘우리의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품게 된다.

이런 고민 끝에 서구의 미술에 대한 대칭점으로 동양의 미를 인지하고 동양의 미술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생긴다. 1920년대 후반부터 결성된 다 양한 미술 단체는 동양주의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이라고 주장하 게 된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려왔던 서구의 미술에 시각의 해방을 준 것은 사 진의 발명 이후였다. 세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역할을 카메라에 넘긴 미술은 시각의 형식에서 벗어나 예술가들의 정신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형 식에 얽매이지 않은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동양 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전통의 예술이 서양화가 지향하는 곳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조선미술전람회의 서양화부에서 입상하며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장한 김 용준은 1939년 동양화가로 전향한다. 이전까지 서양화가로서 다양한 전시 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던 김용준의 행보를 보았을 때, 이런 전향은 갑작스러운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동양주의로 회귀해야 한다는 김용준 의 논지는 그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이어져 왔다. 동양화가로 본격 적인 전향을 하기 전인 1930년, 동경미술대학교를 나온 동창들이 모여 설립 한 ‘동미회(東美會)’에서 동미전을 개최하면서 작성한 설립 취지문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44)

44) 녹향회나 동미회 등 김용준이 참여했던 소그룹은 조선미술전람회나 서화협회전 등 아 카데믹한 예술과 예술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프로 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되었다.

“조선미전이나 협전과 다른 “자유롭고 신선발랄한 창작을 도모”하고, 카프에서 계급투 쟁의 선동수단으로 미술의 무기화를 주장하는 등의 ‘정치지상주의’적 경향에 대항하여 미술의 자율성과 예술성을 추구하는 반관학적이며 비정치적 순수미술론을 각각 표방하 며 등장하였다.” - 홍준표, 뺷한국근대미술사뺸, 서울: 시공아트, 2019, 170쪽.

(16)

오인(吾人)의 취(取)할 조선(朝鮮)의 예술(藝術)은 서구(西歐)의 그것을 모 방(模倣)하는 데 그침이 아니요, 또는 정치적(政治的)으로 구분하는 민족주의적 입장(民族主義的立場)을 설명(說明)하는 그것도 아니요, 진실(眞實)로 그 향토 적 정서(鄕土的情緖)를 노래하고 그 율조(律調)를 찾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爲)하여는 오인(吾人)은 석일(昔日)의 예술(藝術)은 물론(勿論)이거니 와, 현대(現代)가 가진 모든 서구(西歐)의 예술(藝術)을 연구(硏究)하여야 할 필요(必要)를 절대적(絶對的)으로 느낀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서구(西歐)의 예술(藝術)이 이미 동양적 정신(東洋的精神)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45)

(인용 자 강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일제강점기를 겪어야 했던 우리의 화단은 일본을 통해 왜곡된 서양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 장했음에도 우리의 전통성을 계속해서 고민해야 했던 김용준 역시 미술 단 체를 조직하고 전시를 개최하며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정립하고자 했다. 서 양화의 형식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서구의 것을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율조를 찾자는 것이었다.

주의해야 할 점은 “동양적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이 단순히 과거로의 회 귀가 아니라, “서구의 예술이 이미 동양적 정신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가장 근대화된 공간이라 여겨졌던 일 본의 동경을 체험하고, 서양화라는 신문물을 수용했던 김용준은, 서구 예술 이 동양의 정신을 지향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동미전 이후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를 조직하며 김용준 이 발표한 취지문으로 이어진다.46)

45) 김용준, 「동미전을 개최하면서」, 뺷동아일보뺸, 1930.04.12-04.13.

46) 1928년 녹향회를 시작으로 1930년대 동미회와 백만양화회, 그리고 1934년의 목일회와 이후 목시회까지 비슷한 성격의 다양한 단체를 조직한 것은 같은 예술 의식을 가지고 모인 동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향점이 달랐으며, 그 안에서 잦은 논쟁이 있었음에 연유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의 책을 참고. - 최열, 뺷한국근대미술비평사뺸, 서울:

열화당, 2016.

(17)

그럼으로 우리들은 모든 속악(俗惡)을 혐오(嫌惡)하며 예술(藝術) 아닌 일절 (一切)의 것과 비정신적(非精神的)인 일절(一切)의 것에 무관심(無關心)한다.

오오 얼마나 오랜 시일(時日)을 예술(藝術)이 정신주의(精神主義)의 고향(故 鄕)을 잃고 유물주의(唯物主義)의 악몽(惡夢)에 헤매었던고. 과연(果然) 오랫동 안 예술(藝術)이 사회사상(社會思想)에 포로(捕虜)가 되어 많은 예술가(藝術家) 들이 프로레 예술(藝術)의 근거(根據)를 보여주지 못하였으니 여기에 실망(失望) 하고 다시 국경(國境)을 초월(超越)한 예술(藝術)의 세계(世界)로 찾아온 것이다.

가장 위대(偉大)한 예술(藝術)은 의식적 이성(意識的理性)의 비교적 산물(比較 的産物)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藝術)의 기본원리(基本原理)에서 예술(藝術)의 계급성(階級性)은 근본적(根本的)으로 부인(否認)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미 학적(美學的) 형식(形式)과 내용(內容)의 무한(無限)한 전개(展開)가 가능(可 能)한 동시(同時)에 목적의식적내용급(目的意識的內容及) 네오리알리슴의 표 현형식(表現形式)이 절대(絶對)로 조화(調和)되지 못할 것이다.

47)

(인용자 강조)

그는 사회주의 미술이 ‘유물주의의 악몽’이었다고 말하며, 프롤레타리아 미술가들도 다시 ‘국경을 초월한 예술의 세계’로 찾아온다고 주장한다. 국 경을 초월한 예술이란 가장 위대한 예술이고, 미학적 형식과 내용의 무한한 전개가 가능하다. 따라서 김용준이 주창하고 있는 회화는 계급 미술을 거부 하고 순수한 예술로서 동양의 정신을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듯 서양화를 기반으로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찾으려던 김용준이지 만 결국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서 양화가에서 동양화가로 전향하게 된다.48)

47) 김용준, 「백만양화회(白蠻洋畵會)를 맨들고」, 뺷동아일보뺸, 1930.12.23.

48) 이인숙은 김용준이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방향을 완전히 바꾼 여러 요인 중에서도 동경 미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8년에 대구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오원 장승업의 기멸절지 병풍에서 받은 충격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 예상한다. 장승업의 기명절지화에서 받은 충격을 잊지 않고 조선인인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해서 성찰했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 이인숙, 「근원 김용준(1904-1967)」의 기명절지화 연구, 뺷민족문화연구뺸 85호, 민족문화연구원, 495쪽.

(18)

동양의 화론은 일(一)에서 출발하여 일에로 귀착하고, 서양의 화론은 다(多) 에서 출발하여 일에로 귀착하니, 하나는 직감적이요 하나는 해석적인 것이다. 결 론에 있어 동일하되 방법에 있어 상이하다. 하나의 사상은 노(老)요 하나의 사상 은 소장(小壯)인 것이다.

나는 한때 소장 기분에 도취한 적이 있다. 그러나 동양 사람으로서의 진정한 안주(安住)의 고향은 역시 노경에 있다는 걸 깨달을 때 나는 이제껏 해 온 일의 전부를 잃어버린 듯했다.

49)

그는 서양의 화론에 빠졌던 적이 있지만, 결국 동양 사람으로 진정한 안주 의 고향이 동양의 화론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서술한다. 동경이라는 가장 근대의 공간에서 서양화라는 신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온 김용준이었기 에, 자신의 길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제껏 해 온 일의 전부를 잃어버린 듯’하다며 허탈해한다. 하지만 이는 비단 김용준 혼자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때문에 신문화의 대표였던 미술이 문학이나 음악보다 성장 하지 못하고 침체하고 퇴보하는 역현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춘곡 고희동 씨에 의하여 수입된 서양미술은 신문학보담도 음악보담도 제일 먼저 조선에 흘러온 신문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진 삼십 년을 지나온 오늘날 그것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는커녕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도리어 침체하고 퇴보 하는 역현상을 이루고 있다.

50)

그는 1호 서양화가였던 고희동을 언급하며 신문화였던 미술이 삼십 년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침체하고 퇴보’한다고 비 판한다. 실제로 고희동은 서양화가에서 동양화가로 전향했으며, 1930년대 화단은 ‘조선다운 것’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논쟁을 이어가던 시기였다.51)

49) 김용준, 「신세일가언」, 61쪽.

50) 김용준, 「회화적 고민과 예술적 양심」, 183쪽.

51) 최열은 이를 ‘심미주의 논쟁’이라고 부른다. 시기상 프롤레타리아 미술논쟁이 끝난 직 후인 1920년대 후반, 녹향회의 설립 이후 전시 취지문과 실제 작품 사이의 괴리를 들어

(19)

화가들은 미술에서 조선적인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을 벌이며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김용 준이 선택한 것은 ‘동양주의’로의 회귀였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만 해도 가가호호에 벼루가 있고 학동(學童)마다 종 이를 다듬어 글씨를 익히던 것인데, 너무나 갑자기 밀려온 서구식 교육은 종래 의 유산에 대한 하등의 성찰과 비판도 없이 재래식 방법은 모조리 없이 하는 통 에, 불과 기십 년을 지난 오늘에 있어 소․중학교의 습자(習字)란 것도 간판만 있을 뿐, 서도의 무엇임은 참담한 잔재뿐으로 되어 있다.

52)

‘서구의 문물’은 신문물로 여겨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을 비 판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서구 문물의 최대 수혜자였기 때 문이었다. 그는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고 서양화를 배우며 신문물의 세계를 경험했지만, 결국 동양의 것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3.2. ‘시서화일치’ 사상과 ‘문인화’식 글쓰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김용준은 일본이라는 근대적인 공간에서 서 양의 신문물을 습득하고 ‘동양’의 것이야말로 우리의 “보배”53)라는 결론을 얻는다. 그리고 1939년을 기점으로 김용준은 서양화가에서 동양화가로 전 향한다. 그는 소설가 이태준과 함께 잡지 뺷문장뺸지를 창간하는데, 추사 김 정희의 필적을 집자(集字)하고, 그의 그림에서 따온 표지화를 그리며 ‘신문

화가들과 문인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논쟁을 가리킨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서양화가 들은 ‘조선적인 작품’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하려고 했다.

김용준 역시 서양화가로 동인들과 함께 활동하며 조선적인 색을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서양화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이에 1930년대 후반, 김용준은 동 양화로 전향하게 된다. - 최열, 위의 책.

52) 김용준, 「한묵여담」, 200쪽.

53) 김용준, 위의 글, 200쪽.

(20)

인화’의 세계를 펼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문인화(文人畵)는 시(詩), 서(書), 화(畵)를 하나로 보 는 ‘시서화일치론’의 입장으로 전개되었다. 상형문자인 한자는 글자를 씀과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글과 그림을 함께 다루었던 문인들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려내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문인화의 그림은 문인들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글과 함께 자리했다.54)김용 준 역시 문인화의 정신을 이어받아 시와 그림을 하나로 여겼다.

동파(東坡)가 왕유(王維)를 찬(贊)한 중에, 마힐(摩詰)의 시에는 시중유화(詩 中有畵)요 화(畵)에는 화중유시(畵中有詩)라 하여 소위 시화일체(詩畫一體)의 상승(上乘)임을 말하였다. (…) 동도서말(東塗西抹)하여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니 다. 흉중(胸中)에 문자(文子)의 향(香)과 서권(書卷)의 기(氣)가 가득히 차고서 야 그림이 나온다.

55)

그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회화의 최고정신을 담은 것이 남화(南畫)요 남 화의 비조(鼻祖)로 치는 이가 왕마힐”이라며 마힐 그림의 ‘시화일체’ 정신 에 대해 언급한다. ‘시’와 ‘그림’이 하나로 이루어졌는바 이는 “시에서와 꼭 마찬가지의 논법”56)으로 시와 그림이 하나의 논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 는 것이다. 즉 그림을 그릴 때 문자의 향과 책의 기운을 생각하지 않고는 뛰어난 그림이 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시를 지을 때에도 그림을 생각해 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용준의 수필은 특유의 재치와 농담으로 해학을 지니는 동시에

54) 문인화란 글자 그대로 ‘문인들이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근대 화단에서

‘문인화’의 의미는 그림의 소재와 작풍으로 인식되었는데, “글씨와 그림이 공존하는 사군 자류를 문인화로 인식했고 남종화 안에 문인화를 포함했”다. - 송희경, 「20세기 전반 한국 의 문인화」, 뺷한국문학과 예술뺸 27호,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8, 331쪽.

55) 김용준, 「시와 화」, 174쪽.

56) 김용준, 위의 글, 174쪽.

(21)

뛰어난 묘사로 마치 한 편의 그림을 보는 듯한 기분에 들게 한다. 이는 김용 준 스스로가 시와 그림을 하나로 여겼던 사상을 기반으로 하기도 하지만, 그가 데생에 능했던 ‘화가’라는 직업을 가졌음에서 연유하는 결과이기도 하 다.57)사물을 시각적으로 접근한 표현 방식이 글쓰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글에는 생동감 넘치는 비유와 묘사가 사용된다.

다음은 길거리에서 마주한 마차(馬車)와 우차(牛車)를 보고 ‘말과 소’에 대한 사유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미적 의식의 차이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김용준이 볼 때 말과 소는 외양부터 차이를 가진다. 허울 좋은 털을 푸르르 날리면서 길지막한 다리를 성큼성큼 떼어놓는 말에 비해 느릿느릿한 소는 그 외모부터가 미련해 보인다고 말한다.

이놈은 갈 데 없는 촌놈이다. 촌놈에도 상복(喪服) 입은 촌놈이다.

그 험상궂은 상판에 무지스런 뿔다귀하며, 여북하면 얼음에 자빠진 쇠눈깔이 란 소리까지 듣는 번들번들한 눈깔딱지 하며, 게다가 걸음걸이조차 느레고자처 럼 느릿느릿 걷는 양이 저러고서야 ‘그놈 소 같은 놈’이란 욕설이 아니 생길 수 없으리만큼 그놈은 미련해 보인다.

58)

주목해야 할 점은 소를 그려내고 있는 그의 표현이다. ‘무지스런 뿔다귀’,

‘얼음에 자빠진 쇠눈깔’, ‘느레고자처럼 걷는 모양’ 등 비유적인 표현과 ‘반 들번들’, ‘느릿느릿’ 등 의태어의 활용으로 소의 외양과 성격을 그려내고 있 다. 묘사와 비유로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듯 ‘소’의 외양을 표현하고 있는

57) 김용준에게 동양화 수업을 들었던 박노수의 구술 면담을 통해 김용준은 “데생의 귀신”라 고 표현했다고 한다. 데생은 대상의 특징을 빠르게 잡아내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수필가로서의 그의 글에도 드러나는데, 상대의 시각적인 특징을 통해 내면의 특성까 지 읽어내는 방법이 된다. “모필 가지구서 사생(寫生)해 가지고, 저 시작하는 동양화 그 운필서부터 화선지 쓰는 이런 것도 근원 선생이 지도를 하셨고.” - 박노수 구술, 김철효 면담 뺷삼성문화재단 구술사 원로작가프로젝트(-2005) 朴魯洙 1927- 뺸, 서울: 삼성문화 재단, 2009, 94쪽. - 신수경, 위의 글, 재인용, 220쪽.

58) 김용준, 「말과 소」, 24쪽.

(22)

것이다. 재빠르고 세련된 말은 그 화려함이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세련되지만, 소는 미련스럽게 느리고 고요하다. ‘소의 성격이 동 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정적이어서’ 그런지 서양화가들과 달리 동양 사람들 은 ‘소’를 주제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서사를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기보다 비유와 묘사로 상대를 그려내고, 그 에 따른 사유의 방식을 덧붙이는 형태를 취하는 것은 그의 글이 가지고 있 는 특성이 된다.

나는 소를 대할 때마다 어쩐지 그놈이 그 커다란 눈깔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무슨 말이나 할 듯 할 듯한 표정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순직(順直)하기 이보다 더할 바 없고, 무겁기 이에서 더할 바 없는 소란 놈을 볼 때마다 말에게서 받는 것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일쑤다.

59)

김용준은 빠르고 세련된 말보다 느리지만 우직하고 한없이 무거운 소에 게서 동양의 정신을 발견한다. 서사의 방식보다 대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비유로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쓰는 그는 아예 시를 함께 배치하여 문인화 의 구조를 갖추기도 한다. 사라져가는 전통이라 여겨졌던 ‘문인화’를 재소 환하여 ‘신문인화’의 영역을 개척했던 그가 글쓰기에서도 그러한 방식을 차 용한 것이다.

김용준이 활동하던 근대화 시기, 문명개화 이후 서양화의 유입으로 문인 화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서화일치사상은 이미 19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서서히 붕괴되다가 1920년대에 오면서 그 분리가 확고”해지는데 “그림 속 에 시나 글(문자)은 배제되었고, 사의(寫意)적 세계 역시 지워”60)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조선미술전람회는 1932년, 서(書)와 사군자로 대표되는 ‘서

59) 김용준, 위의 글, 29쪽.

60) 박영택, 「한국 현대 동양화에서의 그림과 문자의 관계 - 문자추상과 제발의 패러디를 중심으로」, 뺷한민족문화연구뺸 35호, 한민족문화학회, 2010,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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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크게 재정비하는데, 사군자를 동양화부에 편입시키고 글씨는 출품 종 목에서 폐지 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김용준은 서양화로 시작했음에도 다시 동양의 정신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의지로 다시 문인화에 집중하게 된 것이 다. 그의 문제의식은 조선인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예술에 대한 고민으 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는 선인의 시를 자주 인용하는데, 이는 마치 문인화에서 그림을 그리고 옆에 시를 적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이를 ‘문인화 식 글쓰기’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김용준은 서사보다는 묘사의 방식으로 그 림을 그리듯 글을 썼으며, 실제로 선인들의 시를 차용, 자신의 목소리를 은 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1948년에 발간된 뺷근원수필뺸에 실린 30편의 수 필과 이후 발굴한 23편의 글들을 모은 뺷새근원수필뺸에 실린 총 53편의 글 중에 시문을 함께 적은 글은 10편이다.61)그림처럼 묘사하는 글씨와 동시 에 시문을 덧붙여 진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때문에 김용준의 수필은 한 폭 의 문인화를 떠올리게 한다.

오사모(烏紗帽)를 벗어 던져 벼슬자리 물러나니 烏紗擲去不爲官 주머니는 텅텅 비고 양 소매는 차가웁네 囊橐蕭蕭兩袖寒 청수(淸瘦)한 대나무 한 폭을 멋지게도 그려내어 寫取一枝淸瘦竹 바람부는 가을 강에 낚싯대나 만들어 볼까

62)

秋風江上作漁竿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간 판교(板橋)의 시로 시작하는 이 글은 시 를 적은 뒤 자신이 낚시하는 풍경과 과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흥미로운 점

61) 김용준은 글에 고전의 문구를 함께 사용하기를 즐겼는데 선인들의 글귀를 적은 글은 제외하고, 한시나 노랫말과 같이 ‘시가’에 해당하는 글을 함께 적은 작품은 다음과 같다.

「게」, 「조어삼매」, 「한운야학의 연명을 본받아」, 「육장후기」, 「원수원과 정판교와 빙허 와 나와」, 「화가의 눈」, 「시(詩)와 화(畵)」, 「한묵여담」, 「조선조의 산수화가」, 「최북과 임희지」.

62) 김용준, 「조어삼매」, 39쪽.

(24)

은 뺷근원수필뺸을 발표했을 당시 김용준이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부 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동맹휴학 사건으로 동료 교수들과의 관계에 환멸을 느껴 서울대학교를 떠난 시기와도 맞물린다는 것이다.63) 세상과의 갈등으로 벼슬을 버린 판교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시를 적고 있다는 짐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듯 자신의 감정을 담은 시구를 내용에 포함시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시의 언어로 표현하는 시도는 다음에도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 한가 히 떠도는 구름과 들에 노니는 학’이라는 뜻의 ‘한운야학’의 연명을 본받겠 다는 이 글에서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을 인용해 자신 의 마음을 대변한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가니 携幼入室

술동이에는 술이 가득하다. 有酒盈樽

구름은 무심하게 산에서 피어 오르고 雲無心以出峀

새는 날기에 지쳐 돌아올 줄 아는구나. 鳥倦飛而知還

부귀는 내 바라지 않으며 富貴非吾願

선향에도 갈 수가 없노라.

64)

帝鄕不可期

몇 해 전까지는 스페인이나 유태 같이 ‘활동사진’이나 ‘구약’을 읽고 만나 봄직한 먼 나라를 동경했던 김용준이지만, 현재 그는 무릉도원도 아닌, ‘연 명이 직을 받지 않고 고요히 한운야학으로 벗을 삼은’ 그곳에 가고자 한다.

부귀도 없이, 세상에 얽매인 것도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비친 그는, 도연명의 목소리를 빌어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다. 이는 세속에서 떠 나 ‘예술가답게’ 살고자 했던 그의 예술 의식의 발현이자, 당시 개인 삶의

63) 신수경, 위의 논문, 214~215쪽.

64) 김용준, 「한운야학의 연명을 본받아」,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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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적과 맞물려,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시구를 찾아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표 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김용준이 글쓰기에 있어 ‘문인화’의 방식을 차용하였음을 살펴 보았다. 묘사와 비유의 방법으로 그림 그리듯 글을 써 내려가기도 했던 그 는, 실제 문인화가 글과 그림을 한 화폭에 배치하듯 선인의 시를 배치하며 문인의 정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의도적으로 문인화를 그리듯 글을 썼 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양주의에 심취해있었던 점과 ‘신문인화’로 표지를 그리며 당대 우리의 전통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했던 그의 예술세계를 볼 때, ‘문인화식’ 글쓰기는 그의 예술 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한 방식이 된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일제강점기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냈던 지식인이 자 예술가였던 김용준은, 그 자신도 예술에 대한 견해를 번복하거나 서양화에 서 동양화로 전향하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강직한 철학으로 예술을 행하고, 우리의 예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진술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준의 이런 예술 의식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드는 그의 수필은, 김용준의 예술세계나 당대 우리 문예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가 된다.

4. 나가며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특수성과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우리 근대의 미 술은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 속에 놓여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의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김용준 역시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질 문하고, 고민하며, 시대를 살아냈다.

가장 근대화된 공간이었던 동경에서 신문물의 상징인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용준은 화가이자 미술이론가, 문인이자 교육자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그의 수필집은 지금까지 단독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6)

본고에서는 그의 수필집을 중심으로 그의 전반적인 예술 의식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1927년에 있었던 프롤레타리아 미술 논쟁과 1930년대를 전후로 한 심미 주의 미술 논쟁에서 김용준은 예술을 예술로써 대해야 한다는 예술 지상주 의의 논리를 펼친다. 그리고 이런 사상의 근원은 그의 수필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김용준은 예술을 우리 인간들이 살아감에 있어 빼놓을 수 없 는 제2차의 본능과도 같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가장 순수한 정신을 깃들게 하기 위해서는 예술가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글을 통해 예술의 의미와 예술가의 역할, 그리고 그를 해내기 위한 본인 스 스로의 다짐을 살필 수 있었다.

이러한 의지는 그의 예술 의식의 결과물인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수필을 통해 이런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동양주의로의 회귀와 문인화식 글쓰기가 그것이다.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장했지만, 역설적으로 서양화가였기 때문에 ‘전통의 양식’이야말로 우리의 의식을 표현하기에 적합 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서양화가였던 김용준은 1939년 동양화가 로 전향하는데 이러한 과정과 의식의 흐름을 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었 다. 서양화를 경험했던 신지식인으로서 동양을 바라보고,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그의 의식은 글과 그림, 그리고 글씨를 하나로 여겼던 ‘시서화 일치론’을 기반으로 한 그의 ‘신문인화’ 그림으로 발전 했고, 이와 결을 같이하는 ‘문인화식 글쓰기’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림을 그리 듯 글을 쓰고 시와 함께 배치하며 문인화의 정신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수필은 작가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 있어서 그의 예술 의 식을 살펴보는 지름길이 된다. 재치 있고 단아한 문체로 글을 풀어내는 김 용준의 수필은 화가로만 주목받았던 그의 예술세계를 문학으로까지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를 기반으로 앞으로도 김용준의 수필을 포함한 다 양한 산문이 연구의 대상이 되어, 김용준의 연구는 물론이고 우리 근대의 문예사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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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Abstract

The Study of Kim Yong-jun’s Essays

65)Kang, Jung-hwa*

This study explores the artistic consciousness of Kim Yong-jun who was a painter and writer based on his essays. Kim Yong-joon actively performed in literary history during the modernization period, but no independent research has been conducted on his essays.

Essays directly reveal the author's consciousness. In this sense, Kim Yong-joon's essay reveals his artistic consciousness as a painter and artist.

From his art-based attitude of treating art as an art, to the upright attitude that an artist should have, to the art of orientalism that our artist should pursue, we can see his worldview encompassing the world of art.

Therefore, taking a look at Kim Yong-joon's essay provides a glimpse into the artistic consciousness of Kim Yong-joon, as well as into the concerns of artists during the modernization period, which has been marked by concerns about the identity of our art. We look forward to expanding the appearance of our literary artist Kim Yong-joon as a writer.

Key Words : Kim Yong-jun, writing, essays, art consciousness, identity of art

<필자소개>

이름 : 강정화

소속 : 경기대학교 융합교양대학 교양학부 전자우편 : compare08@hanmail.net

논문투고일 : 2020년 7월 19일 심사완료일 : 2020년 8월 24일 게재확정일 : 2020년 8월 28일

* Kyonggi University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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