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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Cho O-Ryun's Life and Thoughts of Physical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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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FM SE, 26(3), pp. 567~577, 2014. www.ksfme.or.kr 수산해양교육연구 제 권 제 호 통권 호 , 26 3 , 69 , 2014. http://dx.doi.org/10.13000/JFMSE.2014.26.3.567

.

서 론

스포츠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는 선수들을 보면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이 마음 속 깊이 전해지는 듯하다 한국 수영 사상 최초로 . 2008 년 제 회 29 베이징올림픽 자유형 400m 에서 금메달을 딴 박 태환 선수는 2006 년 제 회 도하아시아경기대회 15 ,

년 제 회 광저우아시아경기대회에서 연속

2010 16 3

관왕과 함께 개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오늘날 7 . 박태환의 대활약이 있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면 한국 수영 사상 국제대회 첫 금메달을 안겨준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조오련이다 , .

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척박하기 이를 데 1970

없는 수영의 불모지였다 이런 환경에서 조오련 . 이라는 걸출한 스타 선수가 탄생했다는 것은 사 실 기적이었다(Cho, Sung-kwan, 2005).

조오련의 1970 년 방콕 , 1974 년 테헤란 회에 2 걸친 아시아경기대회 관왕은 한국 수영사에서 2 의미 있는 사건이다 특히 은퇴 후에도 끊임없이 . 장거리수영에 도전했던 조오련의 도전정신과 애 국심은 우리 국민들에게 희망과 위안이 되기에 충분했고 청년실업으로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에 , 게 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큰 ‘ ’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조오련의 업적은 .

수영선수 조오련의 생애와 체육사상

정동희 이태웅

부경대학교

( )

A Study on Cho O-Ryun’s Life and Thoughts of Physical Education

Dong-Hee JEONG Tae-Ung LEE ㆍ (Pukyong National University)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study in depth about the life, activities, and achievements of the swimming gold medalist in Asian Game, Cho O-Ryun, to make systematic correction. This research mainly used literary data to try making theoretical contemplation, and to raise objectivity and substantiality of literary research, and to be devoted to limited literary contents, it used acquaintances who are related to this research, especially his wife, Lee Sung-Lan. Cho O-Ryun’s thoughts in physical education can be described as nationalistic physical educational thoughts. He did not only have pride as Korean, and tried to show superiority of our nation to the world, but he also tried very hard to prove that Dok-do Island is a Korean territory and not Japan’s. He lived with water all his life, showed his everything as a proud Korean, worked as the most patriotic person of 20thcentury in Korea, and became to be a hero, dream, and hope to people in Korea. Spent all his sweat and energy to our country Korea, Cho O-Ryun, he was this era’s true hero.

Key words : Cho O-Ryun, Asian Game, Thoughts in physical education

Corresponding author : 051-629-5639, [email protected]

This work was supported by a Research Grant of Pukyong National University(2013Year).

(2)

체육사적 의의가 큰데도 불구하고 조오련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

현재 한국교육학술정보원 (KERIS) 에서 제공하 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RISS) 의 국내 학술지 논 문에 등재된 조오련에 관한 문헌으로는 대한체육 회에서 발행한 SPORTS KOREA 김대환의 ‘1971 년 하포엘대회에 입상하여 : 수영 조오련선수 와 / ’ 기영노의 1986 년 제 회 아시아경기대회 한국이 ‘ 10 : 낳은 아시아의 거인들 - 제 편 김충용 조오련 2 , , 백옥자 의 기사 자료 그리고 ’ , 1990 년 월간지 월 ‘ 간 샘터 에 조오련이 직접 쓴 곰처럼 한길로만 ’ ‘ 치달았다 의 수필로 출판된 것이 전부이다 ’ .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조오련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업적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고자 한다 . 본 연구의 객관성과 실증성을 높이고 제한된 문 , 헌 및 영상자료 등을 보완하기 위하여 본 연구와 관련이 있는 지인들 특히 조오련의 부인 이성란 , 과의 면담을 병행하여 연구를 실시하였다 .

조오련의 생애

.

유년기

1. (1952~1969)

년 월 일 전라남도 해남에서 부친 조흥 1952 10 5

관 모친 김금미의 남 녀 중 막내로 남자 다섯 , 5 5 을 이었다고 하여 조오연 다섯 오 < ( ), 五 이을 연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년

( )> 連 . 1970

방콕아시아경기대회 금메달을 따고 돌아온 후 기 자들이 조오연은 두음법칙에 맞지 않아 조오련 “ 이라고 해야 한다 고 하여 그때부터 조오련이라 ” 고 쓰게 되었다 조오련은 빈농의 아들로써 공부 . 하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많았고 산과 강과 , 물을 친구삼아 유년기를 보냈다 자연과 놀면서 . 사춘기를 맞게 되고 중학교 학년이 되자 동네의 3 여유 있는 집 친구들은 서울 광주 목포 등으로 , , 유학을 가고 혼자 해남에 남게 되었다 조오련은 . 괴리감 좌절감이 생겨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 , “ 우고 서울로만 가고 싶다 는 생각을 하였다 ” (JTV

Jeonjoo Broadcast, 2009).

년 월 일 조오련은 해남고등학교에 자 1968 10 10

퇴 원서를 냈다 . “ 한 20 일 동안 추수하고 겨울 보리 갈고 산에서 나무까지 해 놓고 , 1968 년 11 월 일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누나 집에서 3 . 지냈는데 영 눈치가 보이고 갑갑하고 불편해서 안 되겠더라 조오련은 종로 가 ” 2 YMCA 수영장 근처에 있는 간판 집에 들어갔다 간판 집에서 . 휘발유 배달 심부름도 하고 간판을 칠하던 페인 트 붓을 빨기도 하는 등 잔심부름을 하면서 숙식 을 해결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실내 풀장이었던 .

수영장에 년 월 일자로 등록을 했 YMCA 1968 11 7

다 절박한 마음으로 수영에 매달린 조오련은 몰 . 래 수영장 등록증을 위조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 다(Shin, So-yoon, 2009).

회비가 없어가지고 카드 위조를 했는데 월

“ , 11 7

일이라고 찍혀 있는 등록증에다 먹지를 대고 앞 7 에 를 썼어요 그러니까 일이 되버리잖아요 결 2 . 27 . 국 수영장 직원에게 걸렸어요 그래서 내가 사정사 . 정을 했죠 나 시골에서 올라와 구두 닦으면서 수 . 영선수가 되려고 그랬으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어 겨우 용서를 받았어요”(JTV Jeonjoo Broadcast, 2009).

간판집의 야간 경비도 하면서 수영장은 꾸준히 다녔다 하지만 수영 코치도 없이 혼자서 훈련을 . , 했다 그 당시 겨울철에 수영할 수 있는 곳이 전 . 국에 YMCA 수영장 한 곳 밖에 없었다 그래서 . 수영한다는 선수들은 모두 YMCA 수영장에 모였 다 오산 중동 양정 휘문 서울 경기고 학생들 . , , , , , 이 그 곳에서 수영을 하였다(JTV Jeonjoo Broadcast, 2009).

간판집과 수영장만 오가며 소속된 곳도 없이 연습하는 조오련을 건드려 보는 아이들도 있었 다 그때의 한 일화이다 . .

수경도 없이 연습을 하다 보면 수영을 하다 마

주 오는 다른 선수들과 몸이나 머리를 부딪칠 때

가 있어 어느 날 연습을 하다가 어떤 선수와 부딪 .

쳤는데 그걸 빌미 삼아 중동중학교 야간부 몇몇

선수들이 나를 밖으로 불렀지 내가 보기에는 별 .

(3)

것도 아니었는데 부르길래 나도 ‘ 좋다 옷 입고 나와라 그랬다 그런데 나가 보니까 애들이 ’ . 15 명 쯤 있는 걸 보고 혼자서 운동선수 열댓 명을 상대 ,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그 길로 간판 집에 가서 총 무한테 500 원을 빌려 뱀 한 마리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싸움하러 오라던 한적한 곳으로 갔지 뱀을 . 주머니에서 꺼내 뱀 뒤통수를 씹어서 애들 앞에서 내흔들면서 , ‘ 이 새끼들아 덤벼라 , ’ 그러니까 반 은 굳은 채 가만히 서 있고 반은 혼비백산해 달아 나는 거야 내가 덤비라며 한 아이의 팔을 입으로 . 물었는데 죽는다면서 병원으로 줄행랑을 치는 거 야 그 후로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어 . ”(Shin, So-yoon, 2009)

어릴 때부터 조오련의 강한 의지와 패기 및 승 부욕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한 차례의 해 . 프닝을 겪고 나서 조오련은 자기 페이스대로 연 습을 할 수 있었다 소속이 없어 조오련은 대학 . ․ 일반부로 출전하여 1969 년 월 제 회 전국체육 6 50 대회 서울 예선에서 수영복도 없이 사각 팬티만 입은 채 자유형 400m 와 1,500m 에서 위를 했다 1 . 그 경기를 마치고 조오련은 양정고등학교에 스카 우트 됐다 당시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이 경기를 . 지켜보고 있었다 조오련의 사정을 들은 민관식 . 회장은 조오련이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훈련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 조오련은 출전하는 경기마다 한국 기록을 세웠다 (JTV Jeonjoo Broadcast, 2009).

선수생활

2. (1970~1979)

조오련은 1970 년 양정고 학년에 재학하고 있 2 었다 . 1970 년 제 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 6 하기 전까지만 해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손 . 발이 남달리 커서 수영하기 좋은 몸이라는 평가 는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금메달을 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400m 에서 등을 한 뒤 뒤늦게 1 기자들이 몰려와 수영복 차림으로 호텔 복도에서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 . 1,500m 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자 조오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Shin, So-yoon, 2009)

[Fig. 1] The Photos after 6

th

Bangkok Asian game 당시 여론이 상당했다고 하더라구요 자세한 이

“ .

야기는 모르겠지만 그 때 당시 바다에서 남영호 , 침몰 사고 때문에 300 명 정도 사망하고 나라 전체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한국 최초로 아시아경기대 , 회 수영 관왕 소식으로 국민들에게 큰 기쁨이었 2 다면서 자주 얘기 하셨어요”(Source : Lee Sung-ran, 2010)

국가대표시절 조오련과 노민상 (2008 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박태환이 금메달을 땄을 당시 감독 ) 과의 일화가 있다 노민상은 당시 톱이었으니까 . “ . 수영계 년 선배인 조오련 한번 이겨 보는 것이 4 소원이었다 그 수영복을 입고 헤엄치면 어떤 느 . 낌인가 싶어서 태릉에서 함께 훈련할 때 몰래 훔 쳤는데 들통이 나서 뒤지게 얻어맞았다 라고 말 ” 하면서 조오련과의 국가대표시절을 회상하였다 (ChosunIlbo, 2011).

년 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연이어 자 1970 , 1974

유형 400m, 1,500m 2 관왕에 올랐고 마지막 국제 , 대회였던 1978 년 제 회 태국 아시아경기대회에 8 서 접영 200m 동메달을 획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조오련은 은퇴할 때까지 . 50 여 개의 한 국 신기록을 세웠다(Lee, Hyong-joo, 2009).

지금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

들에겐 병역면제 해택을 주지만 그 당시엔 그런

해택이 없었다 그래서 조오련은 . 1976 년 대학 4

학년 때 군복무를 년 동안 하게 되었다 그 후 3 .

경상남도 의령에 있는 모 은행에 취직이 되어 수

영선수로서는 저절로 은퇴가 되었다 하지만 은 .

(4)

행에선 조오련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10 년 동안 선수촌에서 수영만 했으니 당연한 것이었 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몰랐고 은행에선 . ,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 후 사표를 내고 고려 . 대학교 사학과로 학사 편입을 했다 학교에 다시 . 들어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역사를 공부했다 학 . 교를 다니면서 역사를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 나도 역사를 창조해 보자 라는 생각을 하였다 ’ (JTV Jeonjoo Broadcast, 2009).

선수 은퇴 이후

3. (1980~2009)

년에 어느 일본인이 대마도에서 출발하여 1972

부산 앞바다 목섬 부근까지 수영으로 횡단한 기 사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체온유지를 잘못하여 . 배탈이 나서 횡단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게 된 조오련은 은퇴 후 넓은 세상 넓은 바다를 , 향한 도전을 결심했다 . 1980 년 13 시간 16 분 만에 대한해협 횡단을 시작으로 1982 년 도버해협 , 년 한강 리를 완영 했다 년에는 2003 600 ( 完泳 ) . 2005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3km 를 18 시간 만에 두 아 들 조영웅 조성모 과 함께 횡단하는 데 성공하였 ( , ) 고 , 2008 년 월에는 독도 7 33 바퀴 돌기에 성공했 다 . 33 바퀴는 3.1 독립선언문의 발기인 33 인을 기 리기 위해서였다 (JTV Jeonjoo Broadcast, 2009).

조오련 사택의 문패에는 한국을 빛낸 자랑스 ‘ 러운 금메달리스트의 집 이라고 적혀있다 ’ . “ 내가 만날 문을 열어놓고 다니는데 도둑놈이 와서 저 , 것이 걸쳐있으면 안 들어오겠지 싶어서요 . ‘ 호신 방 이요 그것이 ’ . ”(Park, Sun-i, 2008) 라고 인터뷰한 재밌는 자료가 있으며 조오련은 아시아경기대회 , 금메달리스트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년 월 일 살이란 나이차를 극복하고 2009 4 18 14

조오련은 호형호제 하는 배추절임 공장 사장 이 성배의 여동생 이성란씨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 져주며 여생을 함께 보내기로 약속하고 두 사람 은 재혼을 하였다 (Kim, Ji-hoon, 2009).

한 번 더 높은 파도에 맞서겠다던 조씨의 40 년

수영인생 마지막 도전도 미완으로 남겨졌다 그 . 는 2009 년 월 8 15 일을 D-day 로 정하고 30 년만의 대한해협 횡단을 목표로 훈련에 매진해 온 것으 로 전해졌다 생전 이번 도전을 통해 환갑의 힘 . 을 보여주는 동시에 세계적인 경제 불황 여파로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했 다 하지만 제주도에 캠프장을 마련 훈련에 전념 . , 해 오다 해남 자택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지 불과 주일 만에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났다 1 . 결국 내년에 대한해협 횡단 “ 30 주년을 맞아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겠다 한국인의 저력 . 과 함께 60 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 도 보여 주겠다 내 수영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 각오로 온몸을 던지겠다 던 고인의 생전 약속은 ”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Sundaysisa, 2009).

조오련은 2009 년 월 일 전남 해남군 법곡리 8 4 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해 남종합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 낮 12 시 45 분에 사망하였다(Son, Sang-won·Shin, Jae-woo, 2009).

년 월 일 타계한 수영인 조오련 의

2009 8 4 (57)

사망 원인은 심근경색 허혈성 심장질환 인 것으 ( ) 로 밝혀졌다 전남 해남경찰서는 월 일 오전 . 8 5

시 분부터 분가량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부 11 40 40

분소에서 조씨의 시신을 부검해 사인을 심근경 색 심장 동맥의 경화 및 석회화 심비대증으로 , , 결론지었다(Kim, Sung-hyun, 2009).

조오련의 활동과 업적

.

아시아경기대회 1.

어릴 적부터 고향 실개천에서 자연스럽게 수영 을 배우며 자신감을 보였던 그는 중학생 시절 본 격적으로 수영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국 해 . 남고등학교 학년인 1 1968 년 말 자퇴서를 내고

국가대표가 되겠다 는 꿈을 이루기 위해 무작정

“ ”

서울로 상경했다 물론 조오련에게 굴곡진 경험 .

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 1972 년 제 회 뮌헨올림 20

(5)

픽 이미 아시아를 제패한 한국 수영의 희망으로 , 떠올랐던 조오련은 이 경기에서 예선 탈락의 고 배를 마셨다 세계 수영의 높은 벽에 부딪힌 그 . 는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Sundaysisa, 2009).

하지만 년 뒤 조오련은 4 , 1974 년 제 회 테헤란 7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자유형 .

에 이어 에서도 우승하며 아시아경기 400m 1,500m

대회 년 연속 관왕이라는 쾌거를 달성하였다 2 2 (JTV Jeonjoo Broadcast, 2009).

이후 1978 년 제 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를 끝으 8 로 은퇴할 때까지 조오련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 계에 도전해 50 여개의 신기록을 이뤄냈다 실제 . 그는 현역시절 배영 100m 와 평영 100m, 200m 를 뺀 모든 종목에서 통산 50 개의 한국 신기록을 보 유하고 있었다(JTV Jeonjoo Broadcast, 2009).

조오련의 재능을 알아보고 태릉선수촌에 입촌 시켜준 민관식 회장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조 오련은 아시아경기대회 출전하여 딴 메달 전부를 민관식회장에게 선물하였고 그 메달은 수원박물 , 관에서 2010 년 월 4 16 일부터 월 5 23 일에 열린

소강 민관식과 그의 컬렉션 에서 국민들에게 선

‘ ’

보여졌으며 현재는 수원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 .

조오련의 도전 활동 2.

가 대한해협횡단 ) (1980)

은퇴 후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편입하여 학업에 열의를 가지고 공부하던 중 조오련은 일본인 나 ( 카시마 쇼지 이 ) 1972 년 대한해협을 횡단하려다가 실패했던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 1972 년 기사를 보고난 후 조오련은 일본인이 실패한 대한해협 횡단을 성공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의 위상을 드 높이기 위한 훈련에 돌입하였다 저체온증 예방 . 을 위한 지방량 증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 근력 지구력 증가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의 준비 , , 를 마치고 드디어 1980 년 월 8 11 일 부산 다대포 에서 대한해협 횡단을 시작하였다 조오련팀에서 .

자체 제작한 그물망 안에서 조오련은 13 시간의 사투를 벌였다(JTV Jeonjoo Broadcast, 2009).

조오련은 대한해협 55km 를 13 시간 16 분 10 초 의 기록으로 횡단 도전에 성공하였다 당시 대한 . 해협횡단 성공 후 사진 및 인터뷰 자료를 소개한 다.

[Fig. 2] The Photos for commemorating Crossing the Straits of Korea

(Source : Lee Sung-ran, 2010)

나는 한국사람이니까 조그만한 몸으로써 대마도

해협을 건너가지고 일본에 체류하고 계신 여러 동 포들에게 또 나아가서 그 후세들에게 한국인이라 는 긍지를 버리지 않고 한국인도 얼마든지 인내와 끈기가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걸 보람으로 느낍니 다 내 몸 한 몸 우리 부모님이 나를 낳아 준 내 . , 몸으로써 여기 건넜지만 부모님이 아니라 내 핏줄 속에서는 5000 년 역사에서 내려오는 한민족의 인 내와 끈기가 내 몸속에 핏줄에 흐르고 있었기 때 , 문에 오늘이 가능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돼 요”(MBC Hope Lecture Bluebird, 2009).

조오련은 한국인의 긍지를 가지고 대한해협횡 단 도전에 유사이래 최초로 성공을 했고 한국인 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였다 대한해협횡단을 시 . 작으로 조오련의 멈추지 않는 도전은 계속되었 다 .

나 도버해협 횡단 ) (1982)

(6)

조오련은 한국인의 도전정신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의 긍지와 위상을 세계에 떨치기 위해 도 버해협횡단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 1982 년 8 월 28 일 조오련은 도버해협 (35.4km) 을 시간 9 35 분 만에 횡단하게 되었다.

[Fig. 3] The Photos for commemorating Crossing the Straits of Dover (Source : Chosun Iibo newspaper, 1982)

조오련은 도버해협횡단 성공 후 세계적인 장거 리 바다수영선수로 명성을 떨쳤지만 세계 기네스 북 기록에는 아깝게 실패하였다 .

다 한강 ) 600 리 종주 (2003)

년 디자이너였던 조오련의 전 아내 김정복 2001

은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두 아이 . 의 엄마이자 든든한 내조자 영혼의 친구였던 아 , ,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조오련은 우울증에 빠져 수영과 사업을 접고 술로 세월을 지새웠다 , . 몇 차례나 병원신세를 지며 피폐한 나날을 보냈 던 조오련은 슬픔을 잊기 위해 한강 600 리 종주 계획을 세웠다(Kim, Ji-hoon, 2009).

조오련은 2003 년 월 7 30 일 북한강의 남한 최 “ 북단지역인 평화의 댐을 출발해 여의도까지 수영 으로 주파하겠다 고 발표했다 출발일은 월 일 ” . 8 5 이며 물길 , 249km 를 헤엄쳐 광복절인 월 8 15 일 여의도에 도착한다는 계획 매일 . 22km 이상을 헤 엄쳐야 하는 힘든 일정이었다 하루 동안 물속에 . 있는 시간만 최소한 시간이 될 것이라 예상했 7 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약해요 나는 년 테헤

“ . 1974

란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뒤 대한남아의 기 상을 보이려고 모시적삼을 입고 시상대에 올랐어

요 아직 건강하니까 내 아들을 포함한 젊은이들에 . 게 자신감이 뭔지 보여주고 싶습니다”(Jeon, Chang, 2003).

이 도전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했던 조오련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 .

조오련은 이번 도전을 위해 2003 년 월 7 28 일부 터 강원도 파로호 선착장 인근에 캠프를 차려놓 고 하루 시간씩 훈련을 했다 이번 한강 주파에 3 . 는 친구인 지봉규 수영감독과 명의 스태프가 보 8 트를 타고 따라가며 조오련에게 도움을 주었다 . 전방지역에 있는 장애물들은 군부대의 도움을 받 아 일시 개방되며 댐이 나타나면 육로로 이동해 댐 하류에서 다시 물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말했 다 (Jeon, Chang, 2003).

훈련에 몰두하여 마침내 조오련은 한강 600 리 종주를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고 드디어 2003 년 8 월 15 일에 대망의 성공을 거두었고 대한민국의 , 모든 젊은이들과 국민 모두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하였다.

조오련은 지천명 ( 知天命 ) 의 나이에 신체적으로 도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동년배 국민들 에게 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또한 ‘ ’ . 조오련의 도전은 나약한 청년들이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현재의 시련과 역경을 이겨 나갈 수 있 도록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

라 울릉도 독도 횡단 ) - (2005)

도버해협횡단 도전에 임했을 때 세계 기네스북 에 기록을 올리려고 하였으나 신통치 않은 기록 으로 완주에 만족해야 했던 조오련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한강 . 600 리 종단으로 명예회복을 하면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준비하였다 .

조오련과 두 아들로 이뤄진 삼부자 가 국

“ ( 三父子 )

민의 염원을 담아 독도에 무사히 안착해 한 여름 밤 청량제처럼 시원한 소식을 들려 드리겠습니 다”(MBC Hope Lecture Bluebird, 2009).

한국 최초로 대한해협을 횡단했던 아시아의 ‘

(7)

물개 조오련 ’ (53) 이 광복 60 주년을 맞아 두 아들 성웅 (24)· 성모 (20) 와 함께 헤엄쳐 독도에 갈 계획 을 세웠다 조오련은 . MBC ESPN 광복 60 주년 특 집 프로젝트 조오련 부자의 독도아리랑 에 출 ‘ 3 ’ 연 울릉도 독도 , ․ 100 km 여 를 헤엄쳐 건널 예정이 었다 (Kim, Mi-lee, 2005).

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작발표 19

회에서 조오련은 “25 년 만에 대한해협 횡단에 재 도전하려고 2005 년 월부터 제주도에서 훈련을 2 하고 있었는데 최근 , 독도 문제

1)

가 불거지면서 계획을 수정하게 됐다 고 밝혔다 조오련은 울 ” . “ 릉도 독도 간 거리가 대한해협 ․ (48km) 의 배나 되 2 고 수온도 도 정도 낮아 망설이고 있었는데 제 2 , 작진에서 두 아들과 함께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 냐고 제안해 흔쾌히 받아들였다 고 말했다 이들 ” . 부자의 도전은 총 14 회로 나뉘어 방송되었다 제 . 주도와 울릉도에서의 훈련 과정을 비롯해 전 과 정이 카메라에 담기며 특히 월 초로 예정된 도 , 8 전 당일은 24 시간 생중계로 방송될 계획이었다 . 제작진은 부자 공동 도전을 통해 독도를 후손들 “ 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공고히 하고 가 , 족의 소중함도 함께 전달하고자 했다 고 기획 의 ” 도를 밝혔다 .

한편 아버지 뒤를 이어 수영선수로 활약하였던 둘째 아들 성모는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땅에 “ 가는데 언론에서 이렇게 화제가 된다는 것 자체 가 비정상적이지 않으냐 며 이번 도전에 성공해 ” “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실히 인지시키겠다 고 당 ” 찬 각오를 밝혔다 군복무 중인 큰아들 성웅은 .

년 월 말 제대하자마자 훈련에 합류할 계획 2005 6

을 세웠다 이와 같이 새로운 도전을 두 아들과 .

1) Since 2005, Korea-Japan relationship have cooled due to the problems, such as Japan ambassador Dakano’s territorial claims to South Korea’s Dokdo islets, the history textbooks, the distortion of the past, Korean former president Roh Moo-Hyun’s statement on the compensation for the past on Independence Movement Day and the Minister of foreign Affairs and Trade Ban Ki-moon’s cancelation of visiting Japan.(Yang, Ki-woong Cho,Sung-kap, 2011). ・

함께한 조오련의 당시 인터뷰이다 .

아무래도 첫 주자 성모가 냉수대를 만났을 때가

제일 어려웠고 좀 난감했습니다 계획했던게 한 . 8 시간 계산했었는데 시간 넘어가더니 못하겠다고 4 해서 정말 못하는 건지 꾀로 못하는 건지 얼굴을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얼굴이 사색이 돼 나와 . 서 야 이번 일 어렵겠구나 이제 망신 당하는구 ‘ , , 나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가문의 망신이구나 이 , ’ 렇게 생각했었죠”(MBC Hope Lecture Bluebird, 2009).

조오련과 UDT 출신 성웅 현 국가대표 수영선 , 수인 성모는 번갈아 안전망 가로 ( 25 · m 세로 9 ) m 속으로 입수 동해를 가로질러 역영했으며 마지 , 막 1km 를 남긴 지점부터는 부자가 함께 안전망 3 을 벗어나 독도로 향했다 조오련과 아들 성웅 . , 성모 부자는 3 2005 년 월 8 12 일 오후 시 울릉도 1 도동항을 출발한 지 18 시간 46 분 만인 13 일 오전

시 분 독도에 도착했다

6 58 (Jang, Sang-jin, 2005).

년 일본의 계속되는 망언을 불식시키기 위 2005

해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수영횡단을 기획하고 년 월 일 광복 주년 기념행사로 대한민 2005 8 15 60

국 최고 이벤트였던 그 도전을 18 시간 만에 감동 적인 성공으로 마쳤다 .

마 독도 ) 33 바퀴 회영 (2008)

해방 이후 한국인들은 독도 역시 일본 지배에

서 벗어나 한국 영토로 되돌아왔다고 믿었다 그 .

것을 확인이라도 해주 듯 , 1946 년 월 1 29 일자 연

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SCAPIN) 677 호는 울릉도 “ ,

독도 (Liancourt Rocks[Take Island]), 제주도 를 일 ”

본 영토에서 제외되는 지역으로 명기했다. 1947

년 월 3 20 일에 발표된 미국 측 대일강화조약 제 1

차 초안도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를 한국 , , ,

영토로 인정했다 이후 . 1949 년 11 월 일에 작성 2

된 차 초안까지 독도는 한국 영토로 규정되어 5

있다 그러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요시 .

다 정부의 집요한 대미활동으로 독도가 한국령이

라는 미국 측의 인식에는 심각한 균열이 일어났

다 그것은 . 1949 년 12 월 29 일자 차 초안에서 북 6

(8)

방 개 섬과 함께 독도가 일본 영토로 명기되는 4 것으로 가시화 되었다 (Heo, Yeong-ran, 2008).

일본은 우리나라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 고 있는 한 지금 당장은 독도를 어떻게 할 수 , 없겠지만 틈나는 대로 문제를 제기해 놓음으로써 외교적인 기록을 남겨 두자는 의도이며 그렇게 , 함으로써 독도가 한 일간의 영유권 분쟁지역이라 · 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확산시키고 나중에 언젠가 국제정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날이 오 면 본격적인 외교 분쟁화하여 독도를 자국 영토 로 하려는 것이었다 (Park, Jong-hyung, 2008).

이와 같이 일본의 만행이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했던 조오련은 독도가 한국 땅임을 전 세계에 알리고 점점 식어가는 , 독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기 위해 독도 프로젝트를 준비하게 되었다.

일본이 계속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그러잖소 그

“ .

런 주장 하는 게 을사보호조약 때문인데 을사보호 , 조약은 강압적으로 이뤄진 일이라서 사실은 늑약 이란 말이오 년 기미독립선언 때 인께

( 勒約 ) . 1919 33

서 을사보호조약이 무효라고 선언했는데 그걸 기 , 념해서 , 한 분에 한 바퀴씩 헌정하려고 그라 요”(Park, Sun-i, 2008).

솔직히 국민이 독도를 너무 몰라요 일본은 계속

“ .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고 … . 그래서 국민이 독 도를 사랑하게 만들어 많은 사람이 찾게 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독도 를 돌기로 했어요”(Yang, Jong-gu, 2008).

조오련은 2008 년 월 중순부터 독도 사랑 만들 1 기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훈련에 들어갔다 가 . 장 신경 쓰는 것이 강한 훈련을 하면서 살을 찌 우는 것 찬 바다에서 몇 시간씩 견디려면 몸에 , 지방을 축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조오련 은 몸만들기에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조오련은 2008 년 월 일부터 독도 사랑 만들 7 1 기 프로젝트에 돌입하여 31 일까지 33 바퀴를 회영 하는 힘든 여정을 당당히 성공시키며 한국인 기 개를 떨쳤다(Yang, Jong-gu, 2008).

본 연구자가 2010 년 월 8 21 일 해남 조오련 사

택를 방문했을 때 조오련이 33 바퀴 독도 회영 도 전 중에 직접 쓴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 이란 현판 참조 을 발견하였다 이는

) (Fig. 4 ) .

백 리를 가려는 사람은 구십 리를 가고서 이제

절반쯤 왔다고 여긴다 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마 .’

무리가 중요하고 어려우므로 끝마칠 때까지 긴 , 장을 늦추지 말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다 젊었을 때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 쓰이기도 한다 두산백과사전 ( ). 조오련은 도전을 성공하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스스로 마음을 잡아가며 차분하게 도전을 완성시켜 나간 것이었 다 .

[Fig. 4] The Status Board when circulating the Dokdo islet 33 times

(Source : Lee Sung-ran, 2010)

독도 프로젝트는 한달 동안 총 18 일을 회영하 였고 한 바퀴당 약 시간 , 1 20 분가량 역영을 하였 으며 총 누적 시간은 41 시간 15 분으로 조오련은 너울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하며 독도 프로젝 트를 무사히 성공하였다 .

조오련의 독도 회영 도전 중 썼던 일기 한 부 분을 소개한다.

여름에 춥다는게 행복일까

행복이란 편안함 일껀대 나는 편치 못하니

행복치곤 공이가 박힌 판자로

공이가 승화되어 희열로 변화할 때

난 웃으리라 웃을 수 밖에...

(9)

태극기가 물속에서 펄럭입니다.

펄럭이는 태극기 따라 수영을 합니다.

물속에 펄럭이는 태극기는

쪽빛 동해물과 어우러져 아름답다를 넘어 황홀하기까지 하답니다.

태극기가 물속에서 펄럭입니다.

나의 몸과 마음도 펄럭입니다.』

년 월 일 조오련 일기 중 - 2008 7 2

(Source : Lee, Sung-ran, 2010)

이와 같이 조오련은 훌륭한 애국심을 국민들에 게 직접 보여준 진정한 애국자였다 조오련의 독 . 도 사랑 만들기 프로젝트를 통해 독도가 대한민 국의 영토임을 세계에 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 인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또한 . 국민들에게도 독도 사랑에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도 큰 역할을 하였다 .

사단법인 한국 바다수영 협회장인 지봉규는 조오련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수영을 통

해 체육문화인을 대표해서 애국을 실천하는 사람 이다 라고 말하면서 조오련을 극찬했다 ” .

조오련의 체육사상

.

조오련은 1968 년 무작정의 상경 후 간판집 심 부름과 신문팔이로 견뎌냈던 고달픈 서울생활 , 무명선수 시절의 배고픔 실망과 방황은 대학 일 , ․ 반부의 자격으로 어렵게 출전한 1969 년 전국체육 대회 서울예선전에서 자유형 400m, 1,500m 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끝이 났고 조오련은 한국 수영 , 의 희망이 되었다 조오련은 대부분이 십대인 수 . 영선수들 틈에 끼어 계속되는 고된 훈련과정을 견디면서 일본 독주의 수영시대를 무너뜨리는 데 그의 이십대를 걸었다 . ‘1970 년과 1974 년의 아시 아경기대회 에서 자유형 ’ 400m, 1,500m 에서 연속

관왕을 하면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역사를 새 2

로 썼다(Wolgansamteo, 1990).

조오련은 일본 독주의 수영시대를 무너뜨리는 ‘ 데 나의 이십대를 걸었다 라고 말할 정도로 대한 ’

민국 국민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민족 , 주의의 성향이 강한 것으로 파악된다.

조오련은 1970 , 1974 년 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자유형 400m, 1,500m 2 관왕을 차지하고 시상대에 올랐을 때 하얀 색 한복을 입고 등장했다 그리 , . 고 조오련은 대한해협 횡단 성공 후 당시 인터뷰 에서도 일본을 그냥 갑니까 내가 한복을 하나 “ ? 딱 빼입고 일본을 다 돌아다녔지요 ”(MBC Hope 라고 말한 바 조오련은 우 Lecture Bluebird, 2009)

리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과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조오 . 련은 과거 식민 통치로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 민족 말살 정책과 경제 수탈의 만행을 저지른 일 본에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려 했고 또 , 수영에서도 당당히 겨뤄 일본을 앞질렀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

다음은 조오련을 이해할 수 있는 수영과 도전 에 대한 조오련의 인터뷰 내용이다.

수영은 고독한 운동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 .

응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물 속에서 무 . 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을 맛보았다 그래서 나 . 는 또 도전한다”(MBC Hope Lecture Bluebird, 2009).

내 몸 한 몸 우리 부모님이 나를 낳아준 내 몸

“ ,

으로써 여기 건넜지만 부모님이 아니라 내 핏줄 속에서는 5000 년의 역사에서 내려오는 한민족의 인내와 끈기가 내 몸속에 핏줄에 흐르고 있었기 , 때문에 오늘이 가능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돼 요”(MBC Hope Lecture Bluebird, 2009).

스포츠는 국내적으로는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 하고 애국심을 북돋우며 국외적으로는 국위 선 , 양과 더불어 국가를 홍보하며 같은 이념을 공유 한 국가 간의 선린 협조를 공고히 하는 외교적 역할을 수행한다(Heo, Jin-seok, 2010).

조오련이 수영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체육사상

은 첫째 일제시대의 아픔과 독도문제에 대한 일 ,

본의 태도를 바로잡으려 했던 점과 둘째 시상식 ,

에서 한복 착용을 통해 우리문화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 했던 점 셋째 장거리 수 , ,

(10)

영을 통해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과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려는 노력을 했던 것에서 그의 애국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체육사상을 엿볼 수 있 다.

.

결 론

조오련은 1952 년 10 월 일 전라남도 해남에서 5 남 녀 중 막내로 태어나 평생 수영을 통해 성 5 5

공과 국위선양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가 어려운 . 환경에서도 수영 하나로 위대한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믿고 무 , , 엇이든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자세 때문일 것이 다.

한국 수영 역사의 첫 페이지를 쓰며 당시 경 , 제적 어려움으로 허덕이던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한국인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 대한해협과 도버해협 횡단에 성공하였고 지천명 , 의 나이를 지나고도 동년배 국민들과 청년들에게

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실시한

‘ ’

한강 600 리 종주 도전에 성공하게 되었다 조오 . 련은 수영을 통해 희망과 가능성을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오련은 일본의 만행을 참지 못하고 두 아들 조성웅 조성모 과 함께 부자 울릉도 독 ( , ) 3 · 도 횡단 독도 , 33 바퀴 회영 프로젝트를 보란 듯 이 성공하며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것과 수영을 통한 애국심을 우리 국민들은 물론 일본 인을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조오련은 민족주의적 체육사상가 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경기대회 시상대에 한복을 입고 . 등장하여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 려고 노력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해협 횡단 , 30 주 년을 맞아 한국인의 저력과 함께 60 세라는 나이 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접 국민들에게 보 여 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대한해 ,

협 차 횡단 훈련에 임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마 2 , 비로 사망하였다.

조오련은 물과 평생을 함께 하면서 국민들의 영웅으로 꿈과 희망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하였다 대한민국을 위해 땀 흘린 사람 조오련 . ,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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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접수일 : 2014 년 04 월 28 일

심사완료일 : 1 차 2014 년 05 월 22 일

게재확정일 : 2014 년 05 월 22 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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