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남산공원의 공간적 특성과 의미 변화에 관한 연구
- 남산공원 회현지구를 중심으로 -
이 수 연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석사과정)
황 희 준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
주제어 : 남산, 남산공원, 한양공원, 공간적 특성, 공원의 의미, 변화
1. 서론
1)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시대에 따라 도시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공 간적 요소들은 변화되어 왔으나, 공공공간에 대한 요구는 지속되어 왔다. 자연 발생적으로 공공공간을 형성하였던 남산은 공원으로서의 인공적 개발이 덧붙여져 현재까지 다양한 계획 과 개발이 시행되고 있다.
남산은 도시공간적, 역사적, 상징적 측면에 서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진 시점부터 남산은 도시를 구성하는 주요 한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과거에는 도시의 경계 역할을, 현재는 도심 중앙에 자리 잡은 생태환경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한 대한제국말기 일본인에 의하여 남산 내에 공원이 형성된 이후로 현재까지 대표적인 공공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남산에 들 어선 다양한 시설물은 당시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남산공원 에 대한 연구는 깊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이다.
* 교신저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특히 한양공원1) 은 남산의 공원들 중 근대공 원으로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공원에 대한 담 론, 즉 공원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이해되어지 고 구현되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남산공원의 공간과 의미의 변화과정을 고찰하고 그 성격을 정리․제시하 는 데에 연구의 목적이 있다. 이는 과거의 남 산공원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현재 남산공원의 역할과 의미,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모색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 라고 기대한다.
1-2. 연구의 범위와 방법
본 연구는 남산공원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 을 도시·경제·종교·문화적 관점을 바탕으로 하 여 공원 변화를 살펴보기 위하여 공원의 입지 와 접근성, 공간의 구성과 시설물을 회현지구를 1)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초기까지 남산 내에는 3개의 공원이 계획되었는데, 남산 정북록(正北麓)방향의 왜성대공원(현 숭의여자대학 주변), 남산 서북록(西北麓) 의 한양공원(현 회현지구), 그리고 장충단공원(현 장충 지구)이었다. 이 세 공원 가운데 현재까지 공원으로 활 용되는 곳은 회현지구와 장충지구 뿐이며 본 연구에서 는 현재 성곽 복구가 한창인 남산공원 회현지구를 대상 으로 공간과 시설물을 조사·분석하였다.
(1) 1885~1894년경 일본인 거류지(추정)
(2) 1895~1903년경 일본인 거류지(추정)
(3) 1904~1909년경 일본인 시가지(추정)
<그림 1> 1885~1909년 일본 시가지 변화2)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도시구조 및 인프라의 변
화, 공원의 전체적인 형태와 구체적인 구조, 시 설물의 변화 및 당시 상황과 다양한 행위 정보 는 지도, 사진, 신문자료를 통하여 분석하였다.
시간적 범위는 한양공원의 생성 직전인 대한제 국 말기부터 1980년대 초까지를 다룬다.
2. 한양공원(1908~1918)의 설립
2-1. 한양공원의 설립배경
1882년 이후 대한제국에서는 경제권을 장악 하기 위한 서양강국과 청국, 일본 등 상인 위 주의 정착이 시작된다. 1882년에 이루어진 조 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조인과 1884년에 있었 던 조영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문호의 개 방과 함께 한양 성내(城內)에 외국인의 거주가 합법화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도 일본 민간인 의 도성 내(內) 입경 및 거주를 조선정부에 요 구하였으며, 그 결과 1885년 2월부터 성내 민 간인 거주가 허용되었다.
한성 내에서는 남산 진고개를 중심으로 거 류지가 형성되었다(그림 1). 조선정부와 일본 이 정한 거류지의 범위는 일본 공사관을 기점 으로 하여 영사관에서 북행하는 작은 길의 양 측과 그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의 구간(명동 성당 남단까지)이었다(그림 1-(1)). 1894년 청 일전쟁의 승전 이후 진고개를 중심으로 있던 거류지는 기존 청국의 상권이었던 남대문통으 로 서진(西進)하게 된다. 이 당시 거류민의 증 가와 함께 신사창립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1897년 남산 북록(北麓)의 거류지 일대를 남산 대신궁(추후 경성신사로 개명) 건축예정지로 1ha의 토지를 차용하여 왜성대공원이라 명명 하며 도로개착에 착수한다(그림 1-(2)). 1905 년 러일전쟁 이후 급격한 일본인의 증가와 함 께 거류지도 확장된다. 일본인 거류지는 설치
10년 만에 초기 거류지 면적의 약 4배 이상으 로 넓어진다(그림 1-(3)). 이와 같은 거류지의 확장은 남산에 공원을 확장시키는 계기를 마련 한다.2)
1906년 설치된 경성일본인 거류민단은 그 해 8월 15일 ‘경성이사청고시 제23호’를 고시 하였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김종근, 「서울 중심부의 일본인 시가지 확 산:1885~1928」, 서울학연구 제20호, 2003 (필자 재편집)
경성 남산 북록 일대 지역 중 장충단, 제신청, 주차군사령부, 통감부의 각 소 속지, 일본공원 및 민유지를 제외한 잔 여의 전부를 경성공원으로 한다.
이와 더불어 1908년 3월 한일공동공원이라 는 이름으로 남산 서북록 토지 약 30만평을 영구적인 무상으로 대여하여 남산공원의 확장 을 계획하고 1910년 5월 29일 공원공사를 종 료하면서 한양공원이라 명명하였다. 이 과정은 식민지 전의 일본의 정치적 압력에 의한 것으 로 여길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부의 공원에 대한 관심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당 시 조선정부는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부터 조 선을 근대국가로 이끌려는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 중 근대도시를 형성하는 것은 국가 의 핵심사업 중 하나였다. 도로가 신설․정 비․확장되었고 전차 및 자동차가 누비는 근 대도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공원이라는 요소는 근대도시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서 한양공원의 설립과 대지의 무상대여는 단지 일본 거류지 주변의 일본인들만 사용만을 고려 한 것이 아닌 조선인들과의 공유를 이끄는 정 부의 시도라 할 수 있겠다.
2-2. 근대공원의 설립
남산공원은 본래 그 기능이 누구나 그 곳에 올라가 여가와 오락생활을 즐기는 공공공간으 로 사용되어오고 있었다.3) 구한말에 한국을 방
3) 헐버트(H. B. Hullbert), The Passing of Korea, 1896, 249쪽: The Koreans have no nation of public parks or other places of public ornament or recreation, and yet they are fond of wandering about the hills finding of picturesque nooks and enjoying the beauties of nature.
길모어(George. W. Gillmore), 서울시편위 역, 향토서 울3호, 1958, 215~216쪽: 한국인은 산을 무척 좋아한다.
이 때문에 남산(북산은 궁궐이 있으므로 공개되지 않는 다)은 사람들의 쉬는 놀이터가 된다. 봄, 여름, 가을에는
문했던 외국인들이 쓴 글을 보면 남산에 올라 가보지 않은 외국인4)은 거의 없다. 그들은 도 착 후 서울 경관을 지배하는 산악경관에 놀라 워하며 얼마 안 되어 서울의 전체 시가지를 한 눈에 보기 위해서 남산에 올라갔다. 이들 대부분은 남산의 도시 랜드마크로서의 성격과 그리고 전망대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이에 이어지는 자연지세형의 성벽과 성문 을 특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자연공간으로 개방되어 있는 남산에 일본거류지를 중심으로 공원이라는 개념을 남 산에 삽입하는 과정은 공간을 인위적으로 변모 시키고 사용에 한정성을 부여하는 계기가 된 다. 하지만 공원을 조성하는 과정과 설치된 내 부 시설물을 통하여 당시 근대공원으로서의 남 산공원이 역할 및 지향점을 살펴볼 수 있다.
한양공원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공사비의 절 반을 지불하지 못하게 되면서 당시 총대 이케 다는 청원서5)를 경성 거류민장인 후루기에게 제출하는데, 이에서 공원의 운영방안과 공원에 대한 당시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한양공원은...<중략>...지난 달 29일로써 개원식을 거행하기까지의 준비를 완료 맑은 날이면 으레 몇 사람씩 산을 거닐고 나무 아래에 눕고 성 위에 앉아서 남쪽 강을 바라보고 경치를 즐긴 다. 어떤 때는 악기를 가지고 가는데, …남산이 산림이 울창하고 좋은 놀이터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서울 근방 의 모든 산에는 사람이 많이 다닌 길이 있고, 어느 때이 고 어른이나 애들이 혼자서 또는 몇 씩 패를 지어서 산 보도 하고, 바위에 앉기도 하고 매우 행복스럽게 보인 다. 대단히 이상스러운 것은 한국 사람은 높은데 오르 면, 반드시 노래하는 것이다. 나는 산에 올라가서 노래 하지 않는 한국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강신용, 『한국근대도시공원사』, 도서출판조경, 1995, 129쪽에서 재인용
4) 헐버트(Hullbert 1896), 길모어(Gillmore 1880), 비숍 (Bishop 1897), 써드(Third 1902), 헤쎄-바르텍 (Hesse-Wartegg 1895), 로월(Lowell 1888)
5) 경성거류민단역소, 『경성발달사』, 1912, 259~269쪽, 449~451쪽; 강신용, 『한국근대도시공원사』, 대왕사, 2004, 72쪽에서 재인용
<그림 2> 한양공원의 배치평면도
(1) 한양공원(북광장)
(2) 한양공원(남광장)
(3) 한양공원(남광장 입구)
(4) 한양공원(남광장)
<그림 3> 한양공원6) 한바, 그 설비라는 것은 아직 유치한 것
으로...<중략>...장래의 시설경영은 오히 려 공익상 공설하는 것이 지당할 줄 사 료되어 위 공원 설비에 관한 권리와 의 무는 그 일체를 민단이 인수토록 하고, 장래에 있을 상당한 시설 경영을 바라 고 싶다
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한양공원은 공공을 위 하여 공공성을 확보하여 경영해야한다는 관점 을 바탕으로 공원을 즐길 수 있는 시설물·설비 확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렇게 설립된 한양공원은 남산 서북록의 등고가 평평한 곳을 택하여 두 개의 광장을 형성하고(그림 2) 산 중턱에 식재되어 있던 나 무를 제거하여 만들어진 광장은 간단한 구조물 과 인공 식수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계획연혁』(1977)에 나오는 한양남산 공원의 시설개요에는 음악당(音樂堂), 충혼비 (忠魂碑), 광장(廣場), 연못(池), 정자(亭), 벤 치(腰掛), 전등(電燈), 분수(噴水), 회유도로(廻 遊道路) 및 산책도로(散策道路), 공동변소(共 同便所) 등이 나타나 있으며 강신용(2004)은 한국식의 정자와 휴게소,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고 하였다. <그림 3>에서는 벤치와 전등 등의 시설물 뿐 아니라 공원의 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남산공원계획안』(1917)에는 대송(大 松)을 중심으로 한 북광장, 국사당 아래쪽에 위치한 남광장, 전망대, 한양공원기념비가 기술 되어 있는데 이와 함께 추가되는 공원시설과
공원의 공간구성
공원의
시설물 계획안
북광장 벤치
가로등
-북광장 중앙에 기념비 및 동상
-전기 가로등 설치 -새집 설치 -조선식 수정 건설 남광장
공원기념비 한국식정자 휴게소 전망대
-한양공원기념비에 서양 식 석대 설치
-광장 주위에 등책 설치 -남광장에 전망대 설치 회유 및
산책도로
-남산을 유람할 수 있는 자동차도로
-중,소 회유도로 [표 1] 한양공원의 시설표
부지계획이 도면과 함께 기술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6)
북광장은 두 개의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한양공원의 북쪽에 놓여있다. 중앙에 대송이 있는 정방형으로, <그림 3-(1)>처럼 건물이나 식수가 미비하며 벤치, 가로등의 시설물이 드 물게 놓여 있다. 남광장은 장방형을 띠고 있다.
광장 주변으로 나무가 밀도 있게 식재되어 있 고 다양한 건축물이 곳곳에 놓여 있다. 남광장 의 남쪽 변으로 기단을 쌓아 조선식 정자와 휴게소 등이 놓여 있으며 산비탈 아래쪽을 볼 수 있도록 벤치도 놓여있다.
또한 광장에 이르기 위한 다양한 루트가 만 들어지는데 그 중 자동차도로의 역할이 한양공 원을 근대공원으로 인식하고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자동차는 근대사회의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여겨져 왔으며 근대화의 척 도였다. 즉, 남산의 경치 및 주변 경관을 감상 하도록 남산 중턱에 놓인 자동차우회도로는 근 대 도시의 인프라를 그대로 공원에 끌어들임으 로써 한양공원이 근대공원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자동차도로는 공원을 가기위한 하나의 동선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그
6) 자료: 朝鮮総督府, 『朝鮮神宮造営誌』, 1927, 여환진 보유엽서
자체가 근대공원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중 요한 프로그램으로 역할 하였다.
3. 한양공원과 조선신궁의 설립 (1925~1945)
3-1. 식민지기의 경성
일본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수도인 경 성을 하나의 거대한 유희공간으로 계획하고 탈 바꿈시켜나갔다. 경성시내의 곳곳을 관광 상품 으로 변형시키는데, 이를 위한 공간적 수단으 로 공원이 사용되었다. 창경궁, 장충단, 종묘 등과 같은 조선시대의 궁궐과 주요 역사적․
정치적 장소를 관광 목적의 경승지 및 공원으 로 변형시켰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와 조선총독부철도 국이 연합하여 경성을 관광도시화 하는 데에 선두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조선반도 내의 유 명한 절경이나 사찰을 포함한 주요 경승지를 다양한 사진첩과 엽서, 안내책자 등을 통하여 소개7)하는데, 그 중 경성의 시내관광은 이들의 주력 상품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성의 관광 활성화는 도시 인프라와도 긴밀하게 연계된다.
경성역부터 시작하여 시내 곳곳의 관광지를 정 차하는 전차와 경성유람버스8) 등의 동선을 이 끄는 도로는 대표적인 도시기반시설이다. 그 중에서도 남산공원9)에는 관폐대사격의 조선신 7) 『조선의 풍광』(1927), 『조선의 풍광』(1933), 『반 도의 근영』(1936), 『조선의 풍모』(1940) 등 조선 팔도 의 아름다움을 사진집으로 출판하였다
8) 1930년대에 들어서는 경성자동차주식회사에서 경성 유람버스를 운행한다. 1931년 2월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 에 허가원을 제출하였고, 그 해 6월 22일부터 본격적인 운행을 하게 되는데 경성의 주요 명소와 명승지 14곳을 하차하여 구경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경민,『경성, 사진에 박히다: 사진으로 읽는 한국 근 대 문화사』, 웅진씽크빅, 2008
9) 당시 발행된 지도 및 경성안내도에는 과거의 한양공 원을 그대로 표기하기도 하였으나 남산공원 또는 남산 한양공원으로 표기된 것도 있다. 이는 현 숭의여자대학
(1) 1928년 (2) 1940년
<그림 6> 남산 내 공원영역 변화 비교13) 궁이 있었으므로 조선 내에서도 꼭 가봐야 할
명소로 꼽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산공원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어느 도시 인프라보다도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림 4, 5).10)
<그림 4> 남대문부터 조선신궁10)
<그림 5> 조선신궁 동참배도11) 3-2. 조선신궁의 설립의 영향11) 남산공원에 부여된 공원의 의미는 관광지 또는 경승지를 일컫는 영역의 개념으로 변환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신궁 건립초기에 신궁지 역이 공원 내에 포함되었던 것에 반해 1940년 총독부고시 208호에 고시된 내용(그림 6)처럼 한양공원은 공원이 아닌 경내지로 편성된다.12)
교가 있는 공간을 왜성대공원으로 구별하여 표기하고 있었으므로 남산공원이라는 명칭은 당시 조선신궁이 있 던 공간에 한정되어 사용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10) 자료: 朝鮮総督府,『朝鮮神宮造営誌』, 1927 11) 자료: 朝鮮総督府,『朝鮮神宮造営誌』, 1927
13)하지만 당시 일제강점이라는 시대적인 조건 과 조선신궁을 포함하고 있다는 물리적인 조건 은 공원의 성격을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것으로 한정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공간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많은 제약을 두는 한계를 가져온다.
조선신궁의 배치는 남산의 북서축에 따라 상 (上), 중(中), 하(下) 광장과 계단, 신전과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공간은 본전을 시 작으로 하여, 시설물의 위계에 따라 상광장부터 하광장으로 배치된다. 하지만 본전 이외의 건물 들은 중심축에 놓이지 못하고 광장의 한 쪽 변 에 대칭으로 놓여있다. 이러한 시설물의 배치는 하광장부터 중광장까지 물리적․심리적으로 개 방감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용이 활발하였다. 특 히 공간의 쓰임에 있어서 중광장은 대규모 관 광객들의 주차장으로도 사용 될 만큼 개방적이 었으나, 그 위의 공간은 제례와 정치적 집회를 위하여 쓰였기 때문에 권력에 의하여 공간이 지배되어 억압이 발생하는 공간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14) 이는 초기 한양공원이 가지고 있던 자동차를 타고 남산을 자유롭게 유람하는 12) 공식적인 공간의 구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신궁 을 포함한 영역을 한양공원 또는 남산공원으로 명명했다.
13) 자료: 경성부, 『경성부도시계획조사서』, 1928, 필 자 편집
14) “내지인(일본인)도 조선인도 속속 돌계단을 올라간 다. 그러나 배전 앞에 오면 내지인은 탈모해서 예배를 하지만, 선인은 발길을 돌려 되돌아가 버린다.” ; 강신 용, 『한국근대도시공원사』, 2004, 140~141쪽
<그림 7> 조선신궁15) 모던도시의 이미지와 대조적이다.
남산공원의 개념자체가 초기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던 모습에서 벗어나 조선신궁을 포함 한 ‘영역’이라는 부차적인 개념으로 변하면서 공원의 공간도 조선신궁의 절대적인 영향아래 에 놓이게 된다. 즉, 공원의 공간은 그 자체가 형태나 구조를 결정하는 주권을 상실하고 내부 프로그램에 의하여 결정되기 시작한다.15)
공간의 분절이 초기 한양공원에서는 등고라 는 지형적인 요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면 이후 에는 조선신궁의 부속 건물에 의하여 공간이 분절되었으며, ‘위계’라는 개념이 공원 내에 삽 입된다. 특히 조선신궁이라는 상징적인 건물을 공간화하기 위하여 사용된 다양한 건축 공간적 수법이 드라마틱하게 공원 내에서 펼쳐지는 계 15) 자료(상): 조선총독부철도국, 『조선의 풍광』, (1927), (하)자료: 조선총독부철도국, 『조선의 풍모』, (1940)
기가 되는데, 이는 남산 북서 산면을 옹벽으로 쌓아 거대한 광장 및 계단 등의 구조가 사용 되었고, 기존의 공원의 성격을 대표하던 자동 차도로는 신궁에 도달하기 위한 부차적인 요소 가 되었다.
4. 남산공원의 정비(1960~1980)
4-1. 식민도시의 해체와 기능의 분화 일제 강점 아래에 있던 경성이 1945년 해방 과 함께 피지배적 공간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 문화의 수도로서 도시의 주체성을 회복하게 되 었다. 경성이 가지고 있던 다양한 역할과 기능 이 서울의 새로운 정립과 함께 해체 또는 분 화, 재집약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결과적으로 경성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던 여러 특성 중 유희적 성격이 해체됨으로 인해 공원은 더욱 중요한 도시유희공간의 집약체 역할을 하게 되 었으며, 그 대표적 공간이 남산공원이 되었다.
하지만 기능의 분화와 재집약하는 과정에서 도 시와 남산공원사이에 연계성이 감소한다.
당시 경제개발계획의 수립과 함께 국민 경 제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도시의 질적․
양적 성장을 추구하며 전국적으로 급격한 도시 화가 일어났다. 서울에서도 도시 인프라의 신 설 및 재정비가 일어나며 시가지 전체의 체계 가 재편성된다. 강북의 종로와 을지로를 중심 으로 한 상업지구 강화, 서울의 영역 확장 및 강남의 개발 등은 서울 전 지역의 도로확장 및 신설을 야기했다. 이러한 변화는 서울의 중 심에 놓이게 된 남산공원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존에 남대문에서 시작한 소월로부터 후암삼거리로 이어지는 도로(A)와 과거 총독 부부터 도동삼거리로 이어지는 소파길(D)의 확장은 남산 남측을 기로질러 이태원동까지 연 결되는 소월로(H)의 신설과 함께 강북지역
<그림 8> 1962년 시가지계획도16)
<그림 9> 남산공원 국회의사당 예정부지 종합미화계획(서울시안) 배치도18) 위
치 현황 계획안 비고
1단 2,481평
(대지공사완료) 박물관(3천평)
표고가 가장 낮은 곳이 1단임.
2단 12,986평
(대지공사완료) 박물관(7천평) 3단 7,900평
(대지공사미완성)
미술관(2천 5백평) 야외음악당(1천
3백평) 4단 2,000평(미완성) 도서관(7천평) 5단 5,000평(미완성) 선열유족관(1천
평) 계 20,367평 17)18)
[표 2] 남산공원 국회의사당 예정부지 종합미화계획(서울시안)17)
CBD의 교통혼잡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 변화가 남산공원의 이용과 연계되기보다는 서울의 도시화와 순환체계 자 체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공원으로의 보 행자 접근이 어려워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남산공원의 공간적 고립을 초래하였다.16)
4-2. 유희기능의 집약
남산공원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조선신궁 으로 인하여 서울시 내의 주요한 경승지로 인 식되어졌던 것과 더불어 서울의 경계 확장으로 인하여 도심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면서 유희공 간으로서 대표성을 띄게 된다. 이는 남산공원 을 당시 근현대 시민이 누릴 수 있는 이상적 인 여가생활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집합소이자 박람회장과 같은 양상을 띄게 한다. 1961년 서 울시산하 각 위원회에서 국회의사당 예정부지 의 종합미화계획을 검토하였으며 1962년 국회 의사당 신축예정지를 자연공원으로 환원시켜 시민들의 휴식처를 마련하기 위해 계획안 현상 공모를 시행하며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을 고취 16) 자료: 지번입최신서울특별시가도(1968) (필자 편집)
시켰다. 이 공모전에서 1등으로 선정된 안병의 의 작품은 야외음악당, 사설미술관, 시민광장, 아동유원시설, 5월혁명기념탑 등이 주요 시설로 계획되었다. 1962년 5월 국회의사당터를 공원으 로 환원하는 문제가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최 종적으로 결정이 났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회의사당 신축예정대지였던 서울남산 을 자연공원으로 환원할 계획을 세워온 서울시는 11일 상오 이 공원의 개괄적 인 모습을 발표하였다. 이 공원계획에 소요되는 자금은 앞서 한양대이사장 김 17) 자료: 동아일보, 1961. 12. 20
18) 자료: 조선일보 1961. 12. 19
A1945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B45.8.15 해방 50.
한국전쟁 60.4.19
학생혁명 72.10
유신체제 80.5.18 광주민주화운동
C
남산어린이놀이터 (1963.8 ~ 2009.2) 남산야외음악당
(1963.8 ~ 1980.4)
남산시립도서관 (1965.1 ~ 현재) 남산식물원 (1968.12 ~ 2006.10)
남산동물원 (1970.8 ~ 2006.10) 안중근의사기념관 (1970.10 ~ 현재) 어린이회관
(1970.7 ~ 1974.7) 국립중앙도서관
(1974.12 ~ 1988.5) 서울과학교육원 (1989.10 ~ 현재)
D
이승만동상 (1956.8~1960.8)
안중근동상 (1967.4 ~ 현재) 김구동상 (1969.8 ~ 현재) 정약용, 이황동상 (1970.10 ~ 현재) 방정환동상
(1971.7 ~ 1987.5)
김유신동상 (1972.5 ~ 현재)
이시영동상 (1986.4 ~ 현재) A: 연도 B: 일반사 C: 건물 D: 조형물
[표 3] 1945년 이후의 남산 시설물 변화
연준씨가 기부한 삼천만원으로 충당된 다. 시당국은 남산공원을 3단으로 고루 어 제2단지에는 4천명을 수용할 수 있 는 야외음악당을 마련할 계획이다...<중 략>...
- 제1단지: 각 종 화초를 심어 어린이 놀이터 등 어린이를 위한 시설을 한다.
- 제2단지: 4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음악당과 전망·휴식시설을 만들고 주위에는 약 400m의 석축위에 넝쿨장 미, 개나리꽃을 심어 미화한다.
- 제3단지: 숲을 조성, 그 속에 곳곳에 연못과 휴식처를 만들며 100m의 벚나무 길과 80m의 라이락꽃길을 만들어 산책 로로 한다.
위와 같이 정부와 시민이 제시한 계획을 바 탕으로 당시 남산공원에 기대하는 이상적인 모 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물 및 공간을 구성함으로써 서울 의 대표적인 시민공원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근현대 시민공원을 지향하는 남산공원은 과거 한양공원이 추구하던 근대공원과는 다름을 알 수 있는데, 남산도로공원의 편입(1959)이 이를 말해준다. 도로공원 또는 자동차가 주는 ‘신식’
또는 ‘자유’의 개념자체가 보편화되었다는 것과 동시에 이 시기에는 음악, 미술, 과학 등이 이 상적인 시민 여가생활의 컨텐츠로 변화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에는 남산 공원이 이러한 대규모 시설물들에 의하여 정의
시대별 공원 남산공원의 공간적 특성 남산공원의 의미
한양공원 (1908~1918)
한정된 공간 설정 공간이용의 공공성 강조 이용 및 이용자의 제한 없음 자연적 공간의 인공화
자연지형에 의한 이용공간 결정
공원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자동차우회도로
근대도시의 구성요소:
근대도시를 구축하려는 조선 정부의 사업의 일환으로 공원 이라는 도시구성요소를 사용하 였다.
한양(남산)공원 (1925~1945)
경승지를 포함하는 영역의 경계 도시와 연계 시작
공공성 제약
조선신궁 특성이 공간 형성에 반영 공간에 위계 조성
유희도시의 구성요소:
일본 식민도시로 전락한 경성 의 다양한 역할 가운데, 경성의 유희 기능을 발현시키는 주요 한 관광지 중 하나로 사용하 였다.
남산공원 (1960~1980)
시설물에 의한 공간의 정의 도시와 연계 감소
대규모 인원 수용을 위한 시설물 및 공간구성 다양한 시설물 설립과 잦은 용도변경 공원과 시설물 사이의 연관성 미비
도시문화공간의 집약체:
해방이후 경성의 해체에 따라 그 기능이 전수되면서 도시문화 공간을 제공하였다.
[표 4] 시대별 남산공원의 특성 및 의미 되고 사용되어지는 공간 또는 영역으로 인식되
고 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배치 도에서 보여지듯이 공원은 주요 시설물에 의하 여 공간의 기능이 구분되어 지고 그에 따른 특성에 따라 공간이 분리된다. 하지만 시설물 의 다양성, 규모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각 시설 물과 그 시설물을 담고 있는 공간들 사이에 연계성이 결여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산공원 자체와 설립된 시설물 사이의 연관성 도 떨어지는 계기가 된다. 결국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남산에 세워진 대부분의 건물들이 오 래 지속되지 못했다(표 3).
CBD가 맞닿아 있는 공원의 입구에 거대한 어린이 놀이 광장과 산 중턱에 들어선 어린이 회관은 당시 어린이를 위한 공간의 부족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긴 했으나 곧 그 기능이 어린 이 대공원 또는 주거단지 내의 놀이터 등으로 이전되면서 그 역할을 상실하였다. 또한 국립 도서관과 야외음악당도 접근성 및 활용도가 떨 어져 용도가 변경되었다. 특히 야외음악당에서 정치적, 종교적 집회가 자주 열리자 야외음악
당을 헐고 남산공원 내 집회일절금지령(1968) 을 내리는 등 공원의 자유로운 시민이용이 제 약당하는 한계점도 지니고 있었다.
5. 결론
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시기별로 변화 한 남산공원의 공간적 특성과 의미를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한양공원이 들어설 당시, 사람들의 여가 및 휴식 공간 역할을 하던 남산이라는 광활한 공 간에 공원이라는 개념을 인위적으로 삽입함으 로써, 공원은 유한하고 한정적인 영역이라는 개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공원이라 는 것 자체가 기존도시구조에는 없는 새로운 개념으로, 근대도시를 표상하는 구성요소였기 때문에 영역을 구분 짓는 수단이자 존재의 목 적이었다.
조선신궁이 들어서면서 이것이 기존 공원의 기능을 흡수한 것도 있지만 그 역할 자체를 변형시켰다. 결국 남산공원은 조선신궁이라는
경승지를 둘러싸는 영역 또는 그 영역의 경계 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조선신궁의 관광 지화는 사람들에게 공간의 대중성을 인식시키 기도 하였지만, 조선신궁이 가지는 특수성, 즉 그 본질적 의도와 목적은 일본인과 조선인들의 장소를 바라보는 시각과 기억을 다르게 만들었 다. 이는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신궁영역 뿐 아 니라 공원 영역 내에서도 그 이용을 제약하여 공원의 공공성을 저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 선신궁의 시각적․물리적 접근이 경성시 전체 와 긴밀하게 연계되고 계획되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일제 강점기이라는 시대 적 상황 속에서 경성이라는 공간 또한 종속적 이고 부수적인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었고, 이 에 따라 경성은 시내에 퍼져있는 주요 사적 및 경승지를 위주로 조직적인 유희도시로 꾸려 졌기 때문이다. 즉, 조선신궁도 이러한 유희도 시의 구성요소로 역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의 다른 구성요소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해방은 서울을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도시가 아닌 대한민국의 수도로 탈바꿈시키며 위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과거 경성이 담당했던 유희체 역할의 해체 또는 축소 및 이전을 의 미한다. 남산공원은 서울의 확장과 더불어 지 리적으로 서울의 중심에 놓이게 되면서 그 중요성과 상징성이 더하여졌다. 이것은 경성이 담당하던 유희체 역할의 부분이 남산공원으로 이전 그리고 재집약하는 데에 바탕이 된다. 그 결과 남산공원은 하나의 성격이 아닌 다양하고 복합적인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구체적으로 삽입된 여러 가지 시설물에 의하여 성격이 좌 우되었다. 이에 따라 공원의 공간 구성이 시설 물에 따라 독립적으로 분리․계획되었고, 공원 내부 시설물에 초점이 맞추어진 공원 계획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띄며 도시와의 연
계성이 떨어지게 된다.
현재 남산의 대부분이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이를 가꾸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초기에 남산에 공원이 생겼을 때 이후로 공원자체가 공원의 목적과 의미를 형성하여 통합적으로 계 획되고 개발된 적이 없다. 특히 해방이후 공원 에 들어선 수많은 동상과 빈번히 바뀌는 공원 의 시설 프로그램은 남산공원의 정체성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결국, 공원을 시설물을 담 아두는 단순영역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공원의 성격과 역할을 수동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들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공원의 이용률을 저해하고 황폐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본 연구는 남산공원의 회현지구만을 한정적 으로 분석하였고, 시기적으로도 남산공원의 뚜 렷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1980년까지 다루 었다는 점에서 모든 분석내용이 남산공원 전체 에 적용될 수는 없다는 연구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은 동일하 게 적용되기 때문에 전반적인 변화의 흐름은 본 연구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왜성대공원과 장충단공원의 내용이 추가되어 남산공원 연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는 것이 필요하고, 일본인에 의하여 설치 된 남산공원과 파고다공원이나 독립공원과 같 이 조선인에 의하여 설치된 공원의 비교분석하 는 일도 근대공원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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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2011. 4. 11)
수정(1차: 2011. 9. 26, 2차: 2011. 11. 5, 3차: 2011. 11. 20)
게재확정(2011. 11. 21)
A Study on the Changes of Spatial Characteristics and Meaning of
Namsan-Park from the Late 1900s through the Early 1980s
- Focused on Hoehyeon district in Namsan Park -
Lee, Soo-Neon
(MSc., Hanyang University)Whang, Hee-Joon
(Professor, Hanyang University)Abstract
In this research, the changes of spaces on Namsan-Park and of the meaning of the park from the late 1900s through the early 1908s are analyzed, and the results are provided as follows.
To begin with, inserting a concept of park to Namsan provided people with limitation in understanding definition of park, which indicated finite and constrained space, so that it distracted people from using spaces on Namsan. At that time, since the park was considered as one of key factors to establish Modern city, it was distinguished to the urban structure which had existed.
After then, Joseon shrine, settled in Hanyang-Park, absorbed in functions of the park, so that the term of Hanyang-Park meant an area around the shrine or a boundary of the space. In addition, the particularity of Joseon shrine sometimes discouraged people from using the park spaces as well as spaces on the shrine, which led to decline the publicity of the park. However, Joseon shrine was correlated and planned with infrastructures of the city, Kyeongsung, not only physically but also visually in that Joseon shrine played role in one of components in Kyeongsung performed as an entertaining city such as a theme park.
Lastly, Seoul is no longer subordinated and dependent city but has dramatically changed as a prominent city after regaining of independence in 1945. This indicates that the entertaining function of the old city was dismantled or reduced or transferred to public spaces, especially Namsan-Park. Consequently Namsan-Park has diverse and complex characteristics like traits of Kyeongsung, playing a pivotal role in providing cultural
spaces, and its spatial organization is divided and planned based on various facilities and buildings on the park. This organization has a negative effect on the city and the park by decreasing in connectivity between them.
Keywords : Namsan, Namsan-Park, Hanyang-Park, Spatial Characteristic, Meaning of Park, Ch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