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미술 실험에서 전개된 판화의 흐름
이 은 주*1)
Ⅰ. 들어가는 글
Ⅱ. 매체 표현 연구를 위한 판화적 태도
Ⅲ. 추상미술 실험과 실험판화
Ⅳ. 행위판화의 개념과 전개 양상
Ⅴ. 나가는 글
Ⅰ. 들어가는 글
강국진(姜國鎭, 1939-1992)에 대한 선행연구에서 연구자 대다수는 강국진이 1960년대 후반에 진행한 행위예술과 퍼포먼스 아트 영역에 초점을 두고, 그가 이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예술가로 평하고 있다. 2017년부터 강국진을 재조명하는 학술행사가 본격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행위예술, 퍼포먼스 분야를 넘
* 아트스페이스 와트 대표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9년도 봄 정기학술대회 자유주제발표 및 한국미술연구 의 일환으로 故강국진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한 <강국진 판화 학술 세미나 2018>
발표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 DOI http://dx.doi.org/10.17527/JASA.57.0.10
어 강국진을 둘러싼 다각도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 연구도 그 일 환으로 시작되었다. 강국진 작업세계 전반을 크게 구획 짓자면 세 개의 시대로 요약된다. 첫째, 1965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활발히 진척시킨 전위예술 시대, 둘째, 1970년 초반부터 새로운 매체 실험 돌파구로 시작한 오브제와 판화작업 시 기, 셋째, 판화와 회화를 동시에 하나의 화면에 완성해낸 시기이다. 이와 같이 매 체를 중심으로 세 가지 구획이 설정되지만 연구자는 본 연구에서 주로 1970년대 중반 이후 판화와 회화를 병행하는 시기를 조명하여 강국진의 추상미술개념을 체 계화하고자 한다.
또한 이번 연구에서 강국진이 제작한 ‘추상판화’ 세계를 조명함으로써 그가 판화작업을 본격화하기 이전에 탐구했던 전위적 행위예술이 판화매체와 어떻게 조우하는지 분석한다. 첫째, 행위예술의 시도와 실험판화의 연관성을 분석하고 둘 째, 강국진의 초기 실험정신이 추상주의에 어떻게 접목되었는지 연구한다. 강국진 은 <색물을 뿜는 비닐주머니>(1967), <한강변의 타살>(1968) 등의 해프닝 이전에
≪논꼴동인전≫(1965. 2. 8-2. 14, 신문회관전시실)을 통해 이미 추상회화를 시작 하였다. 판화작업 전반에 드러나는 ‘추상’ 전 조에 대한 분석은 논꼴아트에 실린 「나의 작품 속의 말」1) [도 1] 을 통해서 기술한다.
왜냐하면 강국진이 그 당시 추상회화를 진척 시키게 된 근원적인 원인과 개념이 「나의 작 품 속의 말」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 가 ≪한국청년작가연립전≫(1967. 12. 11-12.
16, 중앙공보관)과 ≪종합미술전≫(1968. 1.
22-2. 10, 중앙공보관)에서 펼쳤던 그의 오브 제, 해프닝 실험정신이 1970년대부터 어떻게
‘추상판화’로 전이되는지에 관한 연구는 그가 복합적 매체를 사용하여 완성한 실험판화 연 1) 강국진, 「나의 작품 속의 말」, 논꼴아트 (1965), p. 26.
[도 1] 강국진, 「나의 작품 속의 말」, 논꼴아트 (1965)
구와도 직결된다.
오늘날 한국 미술현장에서 판화 작업을 하는 작가군(群)이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미술 전문 관계자들 역시 판화 연구에 대한 관심이 저조하다. 또한 지난 판화이론 연구를 되돌아보면 전통판화 기법 위주로 분류돼 있어 동시대 미술사조 와도 동떨어져 있다. 이렇듯 판화가 한국화단의 중심 이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 에 강국진 판화의 조형적․내용적 연구가 전무했다. 특히 매체 실험적 차원의 판 화에 대해선 연구가 실시되지 않아 강국진의 초기 실험예술 개념과 연결된 연구 가 빈약하다. 따라서 이번 강국진의 판화작업 연구에서는 그가 최초에 했던 행위 예술의 개념과 추상미술 개념이 판화매체에 어떻게 전사되었는지 분석한다.
강국진의 초기 행위예술이 추상판화에 어떻게 전이되었는지 분석하기 위해 본 논문 Ⅱ장에서는 그가 1960년대 후반에 펼쳤던 오브제, 설치 예술을 통한 매 체실험이 강국진의 판화적 태도에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Ⅲ 장에서는 1965년 행위예술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는 강국진의 추상미술 개념을 분 석하며, 특히 판화를 통해 실험한 다양한 추상미술개념을 실험판화라 명명하여 서술한다. Ⅳ장에서는 그의 행위예술 개념이 새로운 개념의 ‘행위판화’를 제시했다 는 맥락에서 강국진의 ‘행위판화’ 개념을 정립한다. 강국진이 판화기법을 모두 익 힌 이후, 기계로 완성한 판화작업 위에 손으로 그린다는 회화적 행위를 직접 접 목시키는 지점을 조명하여 강국진 ‘행위판화’의 완결성을 분석할 것이다.
Ⅱ. 매체 표현 연구를 위한 판화적 태도
강국진의 전위적 실험 행보는 1965년 ≪논꼴동인전≫에서 시작했으며, 이 시기 그는 주로 추상회화에 골몰해 있었다. 홍익대학교 회화과 재학시절부터 논꼴동인 중 몇몇은 공동스튜디오에서 작업과 일상생활을 병행했다.2) 그는 논꼴 동인전에 2) 이은주, 「수행적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하는 강국진의 예술행위: 초기 실험예술을 중심으 로」, 현대미술사연구 제42집 (2017), pp. 119-149 (DOI: 10.17057/kahoma.2017..42.005),
<Work64-5>(1964), <Work64-6>(1964) [도 2] 등의 구상과 추상 사이의 작업 을 출품했다. 이 시기 한국화단은 구 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서 있었으며, 그런 분위기에서 이 당 시 20대 젊은 작가들은 실제로 구상에 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직접 피 부로 체험하게 되었다. 논꼴아트에 실린 김동리(金東里, 1913-1995)의 글 에서도 확인되는바, 그는 1960년대 중 반 국전 풍경에 대해 얼마 전 방문한 “국전에서 서양화부에 추상화실이 따로 마 련될” 만큼 추상화가 급진적으로 증가한 사실을 기술하였다. 박서보는 “현대화단 (畫壇)이 집단적(集團的) 형성을 본 것은 1957년을 기점(起點)으로 하고 있으며 이 해에 앵포르멜 회화(繪畫)가 오늘의 30대에 의하여 의도(依導)3)되었음을 주지 시킨다. 이렇듯 앵포르멜 회화가 한국 화단의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한 세대에게 소위 학교교육을 받은 작가들은 추상적 표현을 교과서처럼 받아들이 게 되었고, 이 시기 구상과 추상 사이의 긴밀한 줄다리기는 각자의 표현과제였다.
1957년부터 비로소 한국현대화단에서 구상과 추상에 대한 논의가 개진되기 시작 했으며 이 문제는 1963년 해외진출을 앞둔 작가 선정에서도 크게 논란이 된 바 있다.
미협 위원들의 작가 선정 범위를 두고, 추상과 구상의 비율을 고려해 골고 루 선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고, 여기서 구상과 추상의 구도는 작품의 내용적 측면의 반대급부적인 해석이 아니었다. 기존 화단과 젊은 작가들의 구도, 기득권 과 비(非)기득권의 패권과도 연결되어 있어 결국 “국제전 참가를 둘러싸고 100여 명이 연판장을 돌리는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해외 진출을 주선하는 커미셔너
pp. 121-126 참조.
3) 박서보, 「한국현대미술의 전망: 1965년을 기점하여」, 논꼴아트, p. 9.
[도 2] <Work 64-6>, 1964, 종이에 오일, 25x29cm
는 주로 한국의 실정보다는 해외 동향에 중점을 두어 ‘추상’ 부분에 힘을 실었고, 이에 반기를 든 구상주의 작가군은 선정 작가 재심사를 요청하기도 했다.”4)
한국화단이 구상과 추상의 대립 구도로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던 이 시기 에, 강국진은 예술성의 우위보다 권력구도에 좌지우지되는 미술계에서 새로운 돌 파구를 찾게 된다. 화단의 구도와 제도의 실체, 모름지기 젊은 작가로서 실행해야 하는 진지한 예술적 탐구, 예술가로 살아남기 등의 고민은 강국진의 향후 작업세 계 진전에 큰 방향성을 제시한다.5) 공고한 기성세대 체제로 꾸려진 조선미술전람 회에서 그 형식적 계보가 이어진 국전의 주도적 화풍은 구상주의였으며, 박서보 의 언급처럼 1957년부터 해방 이후 미술대학을 졸업한 젊은 작가들이 주도한 ‘현 대미술가협회’는 앵포르멜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앵포르멜을 통한 추상회화는 ≪ 국전≫ 중심의 화단에 완벽히 새로운 작품과 경향을 선사했으나 이 영향의 파급 효과도 잠시였다. 1957년 앵포르멜 추상을 주도했던 세대 이후 화단의 다음 젊은 작가들은 유럽 앵포르멜과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경계를 탐닉하면서도 서구이론의 영향으로 구축된 한국추상은 양식적 모방에 머무는 표피적 움직임이라 여겼다.
따라서 이 세대들은 이 추상의 움직임과는 또 다른 결별을 선언한다.6) 이러한 시
4) 「國際展參加(국제전참가) 둘러싸고 百餘名(백여명)의 連判狀(연판장) 소동」, 경향신문, 1963년 5월 25일자 참조.
5) 김미경은 강국진의 초기 예술행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논했다. “한국의 미술계를 살펴 보고 있으면 제도권의 미술이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뽐내는 동안, 눈에 띄 지 않는 그늘에서 행해졌던 무명작가들의 예술이 당당하게 존재했음이 종국에는 드러 나게 된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배운다.” 이 글은 2007년 경남도립미술관에서 <강국진 의 삶과 예술>이라는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글이며, 김미경은 강국진의 실험행보는 그 당시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힘이었으며, 그 힘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생생히 살 아 있다고 평했다. 김미경, 「강국진 :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힘」, <강국진의 삶과 예 술> 학술세미나 (경남도립미술관 2007), p. 147.
6) 윤진섭은 1950년대와 60년대 중반까지 한국 화단을 풍미했던 앵포르멜 화풍에 저항했 던 세대들의 조형형식은 오브제와 기하학적 추상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당시 앵 포르멜의 저항적 기하학 추상은 <오리진> 그룹이었고, 오브제를 제시했던 그룹은 ‘무’
동인과 ‘신전’ 동인이었다. 그들의 등장은 앵포르멜을 주류로 이루고 있는 화단에 전환 기적 면모를 보여준다.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재원 2000), p. 71.
기에 출범한 ‘논꼴동인’은 구상과 추상 사이 혹은 추상 안에서도 국가와 시대를 비롯하여 각 작가 개인의 작업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갖는 ‘추상이론’을 다시 연 구하고, 또 이 연구를 토대로 한국화단의 풍토에 대한 문제의식과 각 동인 개인 의 작업세계를 정립하기 위한 고민을 미술계 제도적 방법으로 선언하였다. 그것 이 바로 논꼴아트인 것이다. 연구자는 이 시기 강국진에게 추상의 의미는 그 당시 한국화단의 권력구도 쟁탈을 위한 구상과 추상의 이분법적인 구획보다는 폭 발하듯 뿜어 나오는 작가 내면의 에너지와 작가 본연의 자유로운 본능을 충실하 게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 탐구라 보고 있다.
이 시기 실제로 강국진은 ‘논꼴동인’들과 제1회 ≪논꼴동인전≫을 통해 앵포 르멜의 추상주의와는 또 다른 국면의 새로운 환경을 재조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상과 추상 사이, 유럽 앵포르멜 운동과 미국 추상표현주의 사이, 호프만, 폴록 등의 각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추상을 표현해 가는가, 그리고 우리(논꼴동 인)는 기성세대와 다르게 어떠한 추상 개념을 표현해 나가야 되는가 등의 복잡한 고민과 사유를 논꼴아트 제작방법을 통해 표현했다.
구상과 추상의 대립, 해외진출을 놓고 세대와 장르 간의 권력쟁취가 벌어지 던 시기에 ‘논꼴동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보해 가기 위한 정신은 논꼴아트에 실린 김동리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논꼴동인’들은 현재의 기득권처럼 여기지는 추 상주의와는 연장선상에 있을 수 없고, 더군다나 과거의 구상화 시대로는 되돌아 가지 않을 것을 단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의 앵포르멜 추상과는 다른 방식 의 ‘추상이론’을 전개하려고 했다. “(가) 앞으로도 그림은 과거와 같은 구상화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 앞으로도 그림은 오늘날의 그것과 같은 추상화의 연장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 오늘날의 추상화는 어떠한 형태로든 표현상의 객 관적인 제약을 보다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7) 이 글에서도 확인되듯이, 과거와 같은 구상성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짐작건대 ‘논꼴동인’은 그 당시 추상의 새로운 이론의 정당성을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성세대 7) 김동리(金東里), 「구상성․추상성(具象性․抽象性)-현대화의 장래(將來)에 대한 나의
소감(所感)」, 논꼴아트, p. 13.
가 받아들인 앵포르멜적 추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추구한 ‘추상주 의’는 기성세대가 받아들인 앵포르멜과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혼란의 시기 강국진은 ‘전통을 단절한 실존주의’를 내세운 엥포르멜 보다는 “낡아빠진 현 시대의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실행에 대해 전적으 로 책임을 져야 하는 추상표현주의”에 더 매료되었다.8) 그리고 그는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에 영감을 받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에서부터 앨런 캐프 로(Allan Kaprow, 1927-2006)까지 이어지는 예술형식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 과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서 오브제를 비롯한 해프닝을 시연하게 된 다.9) 이 전시에서 강국진은 신전동인 일원으로서 무동인과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 제하의 집단형식 퍼포먼스와 <색물을 뿜는 비닐 주머니> 제 하의 개인작업으로서 해프닝을 시연하기에 이른다. ‘논꼴’ 활동에서 시작된 추상 회화의 정신은 곧 해프닝으로 번지게 되었는데, 이 시기 강국진은 예술형식 실험 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논꼴동인전≫을 통해 화단의 주류 추상을 두 고 ‘진정 한국 실정에 부합하는 추상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해프닝은 예술형식을 실험하고 동시에 기성세대의 구태의연한 화단 분위기에 도전하는 의 식과 같은 행위였다.
강국진은 1960년대 후반부터 해프닝 이후 판화기술을 자신의 본격적인 예술 형식으로 끌어왔지만 실제 그 당시 한국 판화제작 환경은 매우 척박했다. 새로운 판화의 흐름을 선도한다는 취지로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창립된 1960년대 후반 부터 판화작가들은 인쇄용 프레스기를 개조하여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시기 아
8) 안나 모진스카, 추상미술의 역사, 전혜숙 옮김 (시공아트 2003), pp. 156-157. 이에 대한 참조: ‘행동하는 화가’의 ‘슬로건’을 내걸고 ‘캔버스’를 탈피한 ‘액션페인팅’을 추 구하는 젊은이들. 그들에게는 어떤 시간과 공간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의 행위 하나 하나가 곧 예술이라는 것. 「캔버스 떠나 액션, 페인팅 추구」, 서울신문, 1968년 5월 9일자.
9) 이은주, 「강국진의 실험미술(1960-1970) - 초기 행위예술부터 액션-오브제 아트 (Action-Object Art)까지」, 조형디자인연구 21권, 3호 (2018), pp. 104-123, pp.
106-113.
방가르드, 실험미술을 개진하던 작가군 사이에서는 캔버스 회화보다 기계와 기술 메커니즘으로 완성되는 판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시기 강국진은 누구 보다 새로운 실험적 돌파구로서 판화를 제작하게 되었고, 그의 스튜디오는 물감 과 캔버스 뿐 아니라,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프레스기로 가득 차게 된다.10)
[도 3] ≪제2회 논꼴전≫(1996. 5.
12-5. 17, 중앙공보관) 리플릿 이미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황양자 기증)
[도 4] ≪종합미술전≫(1968. 1.
22-2. 10, 중앙공보관) 리플릿 표지, 황양자 소장
윤진섭은 이러한 1960년대 후반의 한국화단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 다. “이 시기는 앵포르멜 경향이 점차 쇠잔해 가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오 브제와 설치, 해프닝과 같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예술경향이 대두되고 있었다”고 서술한다.11) 기성화단과 전혀 다른 예술언어를 제시한 ≪한국청년작가연립전≫과
≪종합미술전≫ [도 4] 이후 강국진은 본격적으로 판화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10) 이은주, 「행위예술가 강국진, 판화를 통한 매체실험의 전모」, 오마주! 강국진 판화전
도록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강국진 기념사업회 2018), p. 3.
11) 윤진섭, 「60-70년대 실험미술의 성과와 반성」, 한국 추상미술 40년 (재원 1997), p. 106.
1960년부터 강국진과 함께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광고판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 던 김차섭(金次燮, 1942- )에 의하면 “강국진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기 전부터 실크스크린과 에칭을 이미 마스터 했다”고 한다. 1959년에 대학에 입학한 김차섭은 1960년 상경한 강국진을 만나게 된다.12) 김차섭은 강국진과 함께 대학 4학년을 졸업할 때까지 실크스크린 광고 일을 하면서 생활을 했고, 이때부터 생 계형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후에 회화작업을 하다가도 어렵지 않게 판화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1970. 12. 10-1971. 1.
24, 도쿄국립근대미술관, 1970. 2. 20-3. 21, 교토국립근대미술관) 출품이 그 예이 다.13)
김차섭과의 인터뷰로 강국진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점은 그의 오브제와 설 치 그리고 해프닝 작업도 판화와 회화와 동일한 관점에서 실행한 매체형식실험이 라는 점이다. 특히 해프닝 작업을 하기 이전부터 판화와 회화라는 조형언어를 가 지고 있었고, 따라서 강국진에게 ‘추상주의’는 ‘추상이후 실험’보다는 작업 전체를 조망하는 개념이며, 다양한 예술형식 사용이야말로 그가 ‘추상주의’ 개념을 표현하 는 실험매체였던 것이다. 고등학교부터 혹은 고등학교 졸업 바로 직전에 마스터 한 실크스크린도 강국진에게는 붓으로 캔버스에 그리는 행위와 매한가지였던 것 이다. 더 나아가 강국진은 예술형식뿐 아니라 그 예술이 미술계에 어떠한 구조 속에 존재해야 하는가를 고려했다. 곧 기성예술 형식의 전복이었다. ≪한국청년작 가연립전≫ 이후 그의 예술형식 실험이 극대화로 치달은 <투명풍선과 누드>,
<한강변의 타살> [도 5] 등은 예술적 동요뿐 아니라 사회적 반향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극단적인 예술형식 실험은 미술 비평적 해석을 낳기보다 세간의
‘오락을 동반한 쇼’로 치부되기도 했다. 가령, 강국진, 정찬승(鄭燦勝, 1942-1994),
12) 김차섭과의 페이스북 메신저 인터뷰, 2018년 9월 13일.
13) 1970년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열린 이 비엔날레는 도쿄에서 시작하여 교토까지 순회전으로 진행되었다. https://www.momat.go.jp/am/1970/ (2019년 2월 11일 최종 접속), https://www.tobunken.go.jp/materials/nenshi/6270.html (2019년 2월 11일 최종 접속).
정강자(鄭江子, 1942-2017)가 미술화단의 암적 존재로 분류한 문화 “실명자(문명 공포증자), 문화 기피자(관념론자), 문화 부정 축재자(사이비 대가), 문화 보따리장 수(정치작가), 문화 곡예사(시대 편승자) 등”14)을 고발하는 <한강변의 타살> 퍼포 먼스를 관람하러 왔던 한 관객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이 퍼포먼스를 보려고 10월 17일 제2한강교를 찾은 이 관객은 자극적 인 누드쇼를 기대하고 온 모양이었다. 하 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한강 다리 밑에서 각각의 고발 대상자들을 기입한 종이를 태우고, 구덩이를 파서 몸을 묻어버리는
‘심각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관객은 “여자가 벗는다기에 왔더니 벗지도 않고 춥기 만 해서 재미가 없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이러한 반응은 <한강변의 타살> 해프 닝이 있기 이전에 진행된 <투명풍선과 누드>의 관람풍토에서 기인한다. 퍼포먼스 에서 관객들이 선취한 개념은 작가들이 펼치려 했던 사회적 통념에 대한 고발보 다는 ‘누드’ 라는 오락적 요소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 당시 강국진, 정찬승, 정 강자는 사회․문화적 병폐에 대한 고발을 마치 하나의 누드쇼와 같은 가벼운 오 락프로그램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되자 후에 또 다른 모색을 하기에 이른다.
1973년 명동화랑에서 ≪형의 상관≫(1973. 9. 27-10. 1, 명동화랑) [도 6] 이 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면서 20여점의 입체 작업을 출품한 강국진에 대한 소개는 무엇보다 “현재 판화에 주력하고 있는 작가”로 묘사되었다. 강국진은 「논 꼴동인」으로 ≪한국청년작가연립전≫, ≪앙데팡당≫(1972. 8. 1-8. 15, 국립현대미 술관)전, ≪판화 8인전≫(1973. 7. 1-7. 7, 한국예술화랑) 등에 출품15)하고 또 다른 14) 「한강변서 진기한 「해프닝 쇼」」, 한국일보, 1968년 10월 18일자.
15) 「강국진 작품전」, 조선일보, 1973년 9월 28일자.
[도 5] <한강변의 타살>(1968), 해프닝 전경, 황양자 소장
예술적 열망에 도전하기 위해 판화를 선 택했다. 강국진은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현대판화전시와 교육에 몰두하였으며 ≪ 제1회 판화작가초대전≫(1973. 12. 21-12.
30, 한국예술화랑), ≪한국판화12인전≫
(1978. 2. 19-2. 25, 한국화랑), ≪강국진 석판화 개인전≫(1978. 12. 1-12. 7, 한국 화랑)등 매해 판화전을 기획하고 참여했 을 뿐 아니라 태국, 프랑스, 덴마크 등에 서 열리는 국제 판화 전시에도 적극적으 로 참여하였다. 1960년 비록 생계를 위해 서였지만 김차섭과 함께 실크스크린 광고
제작에 주력하던 시기, 조형언어가 설정되기 이전 판화에 주력하던 그 때로 되돌 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강국진은 다양한 실험 이후, 다시 판화로 그 실험을 이어가는데, 그의 판화작업은 거의 대부분 추상적 조형을 띤다. 따라서 연구자는 강국진이 판화를 통해 실험하고자 했던 ‘추상’실험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Ⅲ. 추상미술 실험과 실험판화
현대미협, 창작미협, 모던아트, 신조형파가 출발하던 1957년은 미술운동 시 대의 막을 올렸으나 196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1957년에 출발했던 여러 그룹이 열기를 서서히 잃어갔다. 현대미협은 1960년에 제6회전을 마지막으로 하여 와해 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1960년 미협과 이념적 동질성을 띤 악튀엘이 정상화(鄭相 和, 1932- ), 하인두(河麟斗, 1930-1989), 김대우(金大禹), 손찬성(孫贊聖, 1936-1966), 전상수(田相秀, 1929- ), 김종학(金宗學, 1937- ), 박서보(朴栖甫,
[도 6] ≪강국진 작품전: 형의 상관≫(1973. 9. 27-10. 1, 명동화랑)
리플릿 표지, 황양자 소장
1931- ), 김봉태(金鳳台, 1937- ), 김창열(金昌烈, 1929- ), 장성순(張成筍, 1927- ), 조용익(趙容翊, 1934- ), 윤명로(尹明老, 1936- ), 이양로(李亮魯, 1929-2006) 등에 의해 창립되었다. 현대미협과 1960년 미협이 앵포르멜 미학으로 출발했다가 그 이념에 의해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면, 1962년 새로 결속된 단체는 앵포르멜 미 학을 극복하는 실험적 추진이 따라야 했다. 하지만 앵포르멜 미학이 다음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조형언어가 되지 못해 악튀엘은 결속과 동시에 와해될 수밖에 없 는 환경을 맞이한다.16)
탄탄한 이론적 토대가 구축되지 못한 한국의 추상화단을 두고 오광수(吳光 洙, 1938- )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화단에 구상과 추상세력이 등장한 것부터 “이는 구상과 추상의 미학적 탐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국제전 참여 를 계기로 야기된 화단 기류를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이와 더불 어 구상과 추상의 논쟁은 “세대 간의 단순한 시비차원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했 고”, “사실․구상․비구상․추상 등의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게 된 원인도 구상과 추상의 본질적 논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논했다.17) 기성세대의 무분별 한 이론 수용은 새로운 예술이론을 정립하려는 젊은 세대들에게 충분한 영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때문에 강국진은 ‘논꼴’을 결성하면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서 슴지 않았다. 강국진은 “기성의 무분별한 감성에서 벗어나 지성의 발판에서 형성 의 모럴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이후 강국진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 혹은 앵포르멜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일면을 수용하여 작업세계를 구축해 가기 시작하였 다. 강국진이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서 해프닝을 통한 본격적 실험미 술로 진입하기 이전부터 진행하던 ‘추상’작업의 면모와 해프닝, 판화, 회화로 이어 지는 일련의 매체적 변화는 이미 논꼴에서 그 시작의 면모를 분석해 볼 수 있다.
논꼴아트에 인쇄되어 남아 있는 그의 「내 작품 속의 말」에서는 그 당시 화단의 주류적 추상과 어떠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모색했는지, 또 그 시작
16)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 1990년대 도입과 장착에서 오늘의 단면적 상황까지 (열화 당 2009), pp. 208-210 요약.
17) 오광수, 한국현대미술사: 1990년대 도입과 장착에서 오늘의 단면적 상황까지, p. 205.
을 통해 하나의 단일한 화풍이 아닌 굴곡이 그려지는 작업결과물을 남겼는지 말 이다.18)
1965년과 1966년 ≪논꼴동인전≫을 통해 이러한 추상회화의 정신과 형식을 실험하고, 1967년에는 바우하우스부터 추상표현주의의 계보를 잇는 액션-페인팅 과 해프닝예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일체의 타협의 형식을 벗어나는 시 점에서 우리는 항상 자유로운 조형의 가치를 올린다”라는 그의 고백이 곧 실현되 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추상회화에서 해프닝으로, 또 곧이어 판화로 진행되 는 조형적 행보는 단일한 흐름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판화로 시작한 추상연구는 논꼴 활동 시절의 사유로 점철된다. 강국진은 예술작품을 실 천해 나가는 자세는 곧 “수식 없는 미의식”이며 “그저 느껴 표현”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사유는 지나간 시대의 회화에 대한 미련을 탈피시키며 새로운 예술양식이 되기를 염원하는 데서 나왔다. 다른 한편으로 강국진은 인간상의 모 순을 강한 선, 가열된 바탕, 부정의 세계를 뚫고 폭발하는 무수한 기호형에서 나 오는 직열된 감정들을 통해 표현하고 캔버스에서 구축하기를 희망했으며, 이는 곧 “극단적 시간의 창조적 변화를 조형윤리로 삼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는 심적 내면의 역동적 상황을 표현해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표현의 내면의 억지 보다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 표현’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가 다양한 예술매체를 실험하게 된 궁극적 이유는 “낡은 정신을 탈피하여 새로운 풍토적 조형을 창조”하는 데서 비롯된다.19) 추상에서 행동주의로, 그 행 동주의에서 다시 판화로 분주하게 전개한 이유도 한국화단에 조형적으로도 새로
18) 강국진의 추상은 앵포르멜 운동 중 기존의 가치관을 전복하여 새로운 표현을 도모한 다는 시대적 정신의 발언은 동의한 듯하지만 그 자동기술 장치와 무의식에 의존한 결 과물보다는 추상표현주의 형식의 액션-페인팅에 더 매료되었다. 내면의 에너지를 발 산하되, 그 발산은 무문별한 감성의 노출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추상과 구상 사이의 정신을 추구했으며, 말레비치의 절대적 객관성을 띠는 추상 정신도 가지고 있다. 따라 서 칸딘스키의 자유로운 기법과 말레비치의 절대성을 겸비한 조형성을 추구했으며, 후에는 한국의 전통, 역사를 주제화하여 그 형상을 화면에 넣기도 했다.
19) 강국진, 「나의 작품 속의 말」, 논꼴아트 (1965), p. 26.
운 풍토를 자리 잡게 하기 위함이었다. 강국진의 판화는 그렇게 해프닝과 퍼포먼 스와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도전’, ‘새로운 형식실험’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판화 와 회화 작업을 하면서 그 이전의 해프닝과 같은 예술형식과 단절을 꾀하며, 그 는 곧 그것을 창조의 윤리로 여겼다. 따라서 그가 1970년대 시작한 판화는 전례 없던 해프닝을 시도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실험이다. 그리고 그는 판화 를 오브제와 회화와 접목하여 기존의 캔버스 회화 평면과는 완벽히 다른 (판화 의) ‘평면성’을 이끌어냈다. 강국진은 이를 위해 에칭, 동판화, 석판화 등의 전통 적인 판화기법을 독학했고, 그만큼 판화를 통해 자유로운 형식실험을 지향했다.
그에게 판화는 예술의 ‘자유의지’를 표현하되 무분별한 감정의 노출을 막아내는 기술이었고, 이는 앵포르멜의 전조였던 자동기술기법과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래 서 강국진은 추상과 구상 사이, 기계적 결과와 우연성, 평면과 입체성 사이의 미 묘한 줄다리기적 감성을 판화매체를 통해 다양하게 실험했다.
75년경부터 나는 여러 가지 기법의 판화를 시도했다. 목판, 실크스크린, 메 조틴트 그런 방법을 썼다. 판화는 손으로만 되지 않는다. 손으로 시작하여 기계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이 2단계 작업은 나의 구상을 객관화, 간접 화 시키는 기회이기도 했다. 객관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요즘 판화에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강국진)
위의 강국진의 노트20)에서처럼 그는 판화의 기계 메커니즘을 ‘무형의 내재 적 심연’을 대상화시키는 특정 매개체로 보았다. 자신의 내면적 표현과 작품이라 는 결과물 사이의 중간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판화기계였다. 다시 말해 강 국진에게 판화는 스스로의 내면을 직접 손으로 제작하는 결과물이기보다는 마치 기계라는 중간영역으로 내면의 무분별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 다. 따라서 감정을 절제시키고 화면의 대상을 절대적으로 객관화시키는 판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20) Kang Kukjin 강국진 도록 (금산갤러리 2017), p. 176.
[표 1] 강국진 판화의 조형성
1970년대 회화와 판화를 동시에 지속시킬 만큼 주제 표현에도 일관성이 있 다. 이는 곧 1974년 ≪판화8인전≫(1973. 7. 1-7. 7, 한국화랑)21) [도 7] 에서도 드 러난다. 강국진이 판화를 과거의 실험미술 연장선상에서 지속하고 있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강국진의 1973년 명동화
랑 개인전을 앞두고 ≪판화8인전≫을 기 획하고 참여하였다. 강국진은 미술계 화단 에 데뷔한 이래로 8년 만에 개인전을 가 졌다. 그에게는 개인전을 통해 개별 사유 를 안착시키는 것보다 집단적 활동을 통 한 화단 풍토 변혁이 더 선행적 과제였던 것처럼 보인다. 강국진은 1971년 명동에서 합정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인테리 어 회사였던 ‘스페이스 디자이너’ 대신 ‘강 국진 화실’이라는 간판을 냈다. 이 시기부
21) 1973년 7월 1일부터 7일까지 한국화랑에서 열린 ≪판화8인전≫에는 강국진을 비롯한 김상유, 김정수, 김차섭, 이태현, 정찬승, 최붕현, 한영섭이 참여했다. 한영섭은 같은 논꼴동인으로서, 이태현, 정찬승, 최붕현은 신전동인과 무동인으로 ≪한국청년작가연 립전≫의 주역이고 김차섭은 ≪회화68≫전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판화8인전≫을 통 해 각기 다른 위치에서 새로움을 모색하고 있는 멤버들이 다시 뭉치게 된 것이다.
[도 7] ≪판화8인전≫(1973. 7. 1-7. 7, 한국예술화랑) 초대장, 황양자 소장
터 본격적으로 추상과 행위, 그리 고 판화, 회화의 작업개념과 조형 형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결혼 후에 옮긴 경기도 하남의 집 겸 스튜디오에서도 “프레스기를 두 고 판화작업에 손을 떼지 않았 다”22)고 한다. 강국진에게 판화는 낡은 인식을 대체할 새로운 예술 사조를 세우는 것만큼 새로운 조형 형식을 세우는 데 중요하게 작동한 개념이라 여겨진다. 1973년부터 강국진의 회 화는 <점>(1973)으로 시작해서 <선>(1974-1978), <가락>(1976-1987), <역사의 빛>(1989-1992) 순으로 전개되었다. 판화 역시 <점> 시리즈 회화를 시작할 시기 에 더욱 본격화되는데 이는 ≪형의 상관≫23), ≪판화8인전≫과 ≪한국실험작가전
≫(1974. 3. 6-3. 11, 대구백화점 화랑)이 시간차이를 두지 않고 개최되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강국진은 판화강습 프로그램도 기획하여 판화교 육24)도 진행했다.25) [도 8]
그가 이 시기에 회화, 판화, 실험미술 등을 동시적으로 펼쳐냈고, 주로 평면 과 오브제의 경계에서 작업을 개진했다. 명동화랑의 첫 개인전에서는 오브제와 입체 작업을 주로 선보였으며, 이 시기 판화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작업보다 22) 부인 황양자 인터뷰, 2018년 8월 2일.
23) 강국진의 첫 번째 개인전 ≪형의 상관≫전은 1973년 9월 27일부터 10월 1일까지 명동 화랑에서 개최되었고, ≪판화8인전≫은 개인전이 열리기 전 같은 해 7월 1일부터 7일 까지 한국화랑에서 열렸다.
24) 강국진은 1968년 ≪종합미술대전≫에 네온사인 작업인 <시각 1, 2>(1968)를 발표할 시기에 대구, 광주 등지에서 환경예술 및 미니멀아트에 관한 강연을 펼쳤는데,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판화교육에서 힘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5) 판화 제작 강습 프로그램은 1973년 8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합정동 로터리에 위치한 ‘강국진 화실’에서 진행되었고, 에칭은 김상유가, 실크스크린은 강국진이 강습 하였다. 「판화 제작 강습」 홍보 초대장(1973), 황양자 소장.
[도 8] 「판화 제작 강습」 홍보 초대장(1973), 황양자 소장
는 판화적 개념과 태도를 드러내는 작업을 전시했다. 기하학적 도형을 활용한 골판지 작업과 프레스로 압력을 가한 여러 장의 한 지를 겹겹이 쌓아올려 레이어를 이룬 작업, 종이를 반복적으로 길게 잘라 바닥에 설치한 작업 등은 주로 판화의 기법적 완성보다 판 화의 개념과 태도에 입각한 작업이다. [도 9]
“강국진의 판화는 ‘복제성’과 거리가 있으며, 따라서 한 장 한 장 완벽히 똑같은 작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구자는 그가 특정한 굴 레에 속박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작활동을 해 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똑같은 판으로 판화를 제작하더라도 그 제판을 활용하여 다 른 결과물을 도출했다. 가령, 한 가지 판으로 에디션이 기입된 넘버링 작업도 했으며, 이
와 동시에 넘버링 작업과는 다른 ‘차이’가 확연히 부각되는 작업을 동시에 남겼다.
이러한 차이는 통상적으로 A.P 혹은 E.P 라고 서명해 두었다.”26) 따라서 이 시기 강국진의 판화는 평면․오브제라는 특성을 넘나들거나, 기존 판화의 규칙과는 전 혀 다른 맥락을 띠고 있다. 판화매체를 향한 강국진의 이러한 태도는 모두 판화 의 속성을 새롭게 활용한 ‘실험판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 ≪’74 현대미술제≫(1974. 10. 13-10. 19, 계명대학 미술관)가 개최되기 전에 결성된 ≪한국실험작가전≫에서 강국진은 <무제 Untitled>(1974) 작업을 출 품하였는데, 이는 <선> 회화 시리즈 작업으로 마대 천에 오일로 그린 캔버스 작 업으로 추상성을 띤다. 이 전시가 있기 이전에 1973년 ≪대구현대미술초대전≫이 7월 18일부터 27일가지 열렸으며, 그 이후 개최된 ≪한국실험작가전≫은 새로운 실험을 모색하고자 하는 서울과 대구 작가들의 일종의 교류전 형식이었다. 부산 26) 이은주, 「행위예술가 강국진, 판화를 통한 매체실험의 전모」, p. 4.
[도 9] 강국진, ‘형의 상관’이라는 주제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 1973, 한지, 가변설치, 여러 장의 한지를 겹치고 프레스 기로
압력을 가해 완성함
에 거주하던 김동규(金東奎, 1939-2001)와 김인환(金仁煥, 1941-)을 제외하고 강국 진, 강하진(인천), 김명희, 김정수, 김정헌, 김종호, 김진석, 백수남, 윤연한, 이완호, 정재규, 최상철, 한만영은 서울 거주 작가였으며, 김기동, 김재윤, 김종호, 박현기, 이강소, 이명미, 이묘춘, 이종윤, 이향미, 이현재, 최병소, 황현욱은 대구에 거주하 는 작가였다.27)
대구에서 활동하며 이 전시에 참여한 김기동, 김재윤, 김종호, 이강소, 이명 미, 이묘춘, 이향미, 이현재, 최병소, 황현욱은 ≪대구현대미술제≫를 기획하는 주 요작가군으로 남는다.28) 이들은 “개인이나 하나의 이념을 표방하는 단체에 의해 서 유도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비전’을 가진 예술가들의 모임이 다”라고 규정했으며, 따라서 활동 방향에 대해 “폐쇄적인 경향보다는 개방적이고, 침체보다는 흐름을 갈구할 것”임을 명시한다.29) 강국진은 1973년부터 본격적으 로 회화작업에 돌입하여 그 이전에 다양한 형식으로 선보였던 실험미술의 행보가 수명을 다 했다는 평가도 뒤따랐다. 하지만 그가 ≪한국실험작가전≫을 통해 서 울과 대구 간 교류전을 펼치면서 여전히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작품의 실험성’보 다는 ‘작가의 실험성’이 아니었을까.30) 강국진의 초기예술 실험이 오브제, 해프닝 등의 시각적 변화가 두드러지는 장르 변화에 초점을 두었다면 연구자는 이번 연 구에서 1970년대 강국진의 또 다른 실험을 목격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 또 다른
27) 한국실험작가전 도록 (대구백화점 화랑 1974),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황양자 기증).
28) ≪대구현대미술제≫를 기획한 미술인은 총 12인으로 ≪한국실험작가전≫에 참여했던 작가 10인과 김영진, 황태갑이 합세하였다.
29) 대구현대미술제 (1974. 10. 13-10. 19) 도록 (계명대학미술관 1974), p. 1, 국립현대미 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황양자 기증).
30) 한국실험작가전 도록 맨 뒷장에는 부록형식의 텍스트가 실려 있다. 내용은 ‘실험’에 대한 사전적 정의이다. 실제로 실험을 하는 과학적 용어와 실제의 경험에 의존하는 심리학, 교육학에 대한내용이다. 이러한 ‘실험’의 개념을 가지고 ‘미술을 행하자’ 라는 작가들의 의도로 여겨진다. 참여 작가 중 누군가 올렸겠지만 참여한 모든 작가가 공 통적으로 공유한 개념의 사전적 정의이다. 따라서 이 당시 ‘실험’이라는 용어를 본격 적으로 화단에서 사용하게 되었음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자료이다.
실험은 평면과 오브제라는 프레임, 그 프레임에 담아내는 추상미술 실험이다. 왜 냐하면 강국진이 제작한 판화 거의 대부분은 추상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강국진은 제1회, 2회의 ≪논꼴동인전≫에서도 추상회화를 출품했으며, 1973 년 ≪판화8인전≫을 기점으로 기술을 활용하여 내면적 정신성을 객관화시키는 상 태로 두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가 작가의 내면적 감성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고 믿은 판화기법은 이전에 추상회화를 진척시키면서 추구했던 정신과 맞물렸다. 또 한국화단의 권력적 구조로 자리 잡힌 예술범위를 넘어 또 다른 돌파구를 찾던 강 국진은 해프닝, 오브제 아트에서 했던 실험을 판화매체로 대체시켰다. 강국진은
‘추상’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추상의 개념을 어떻게 작업 에 적용하려 했을까.
앵포르멜31)
(1939-1956) 추상표현주의 말레비치 칸딘스키32) 강국진33) 당시 지배적인 철
학경향은 장-폴 사르트르와 알베 르 카뮈의 실존주 의 등으로 전쟁으 로 인한 상흔을 극복하기 위해 개 인의 회복이 중요 하게 되었다. 개 인은 모든 도덕적 가치의 근원이며, 외적인 혹은 객관 적인 기준에 의지 하지 않고 삶 안 에서 스스로의 행 동을 선택해야 하 는 존재였다. 그러 한 자유의식이
‘진정한’ 실존으로
존 그래함의 미술 체계와 방법론
(1937)에서는 “의 식적인 마음에 무 의식의 강렬한 사 건을 제공하기 위 해 … 원초적인 과 거와 접촉하고(적 극적으로는 미술 작품을 제작함으로 써 그리고 소극적 으로는 미술작품을 사색함으로써) 무 의식과의 잃어버 린 관계를 회복하 라.”고 미술가를 격려했다.
1952년 클리포드 스틸이 이러한 현
작품을 통해 절대 주의를 확립한 말 레비치는 <흰 바 탕 위의 흰색 사각 형(1917-1918) 연 작에서 ‘무(無)’를 향한 중대한 갈림 길에 도달하는데 단 하나의 흰색 형 태가 흰색 바탕 위 에 놓인다. 이러한 회화는 비대상성 의 본질을 드러낸 다. 이 비대상성은 형태 혹은 ‘순수조 형적 회화’는 자연 세계와 유사성을 갖지 않으며, ‘사 물세계’에 근거한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 있어 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1912)에 서 발견된 색감은
‘어떤 정확한 과학’
에 기본을 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느낌’ 이라고 기술 했다.
작품은 무한한 내 재적 심상에서부 터 출발하여 이것 을 대상화하고 생 활감정을 표현한 다는 것은 객관적 인 외적 대상의 표 현보다 더욱 곤란 하다.
나의 특유한 감정 의 표현은 나의 개성을 발굴하는 성실한 나의 작업 이다.
수식 없는 미의식 을 가져야 하며 이 것은 그저 느껴 표 현되어야 할 것이 다. 지나간 시대의
이끌었고, 잠재적 으로는 선택을 해 야 하는 부담으로 가득찼다.
(pp. 123-124).
상을 다음과 같이 대변하였다. “우 리는 이제 낡아빠 진 신화나 현 시 대의 문제에 관심 을 갖지 않으며, 구속 없는 행위에 전념한다. 우리는 자신이 실행한 것 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미술가의 위대함은 자신의 예술관을 현실화 하려는 용기와 통 찰력의 깊이 안에 서 발견될 것이 다.” ‘혼자서 온 힘 을 다해’ 작업하던 스틸은 “감각적으 로 호소하여 알아 볼 수 있게 만드 는 기존의 양식”
을 받아들이려는 자기내부와의 갈 등과 투쟁해야만 했다.(p. 156-157)
창조적 정신을 거 부한다.
(p. 61-62).
회화에 대한 미련 을 탈피하고 새로 운 양식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 젊 은 미술은 낡은 정신적 자세를 탈 피하여 우리들의 새로운 풍토적 조 형을 창조할 것이 다. 과거에 집착 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모색 속에 서 가능하다. 나의 작업이 나의 생활 의 출발이며 나의 기착점이 되어야 한다. 나의 작품 전체가 나의 생활 속에 결정되어야 할 것을 바랄 뿐 이다.
장 뒤뷔페(Jean Du -buffet, 1901-1985):
‘오트 파트’ 기법의 그림을 전시했으며, 1950년대는 두껍게 바르되 명백히 추 상이며 마치 땅의 표면을 암시하는 것 같은 <표면조직학>
몬드리안: 「자연적 리얼리티와 추상적 리얼리티」라는 글 에서 ‘새로운 조형 적인 개념은 외양 이 지닌 특정함, 즉 자연적인 색체 와 형태를 소멸시 킬 것이며, 색채와
칸딘스키의 태도는 심리적인 것보다는 낭만적이고 정신적 인 신념에 의해 좌 우되었다.
강국진 판화의 다양한 조형적 표현을 분석해 보았을 때 결국 그는 판화기술 을 통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데 열중했음이 확인된 다. 즉, 그에게 판화는 추상미술을 통해 전개된 복합적 예술정신과 조형적 실험을 동시에 연구할 수 있는 매체였다. 실제로 그의 판화작업에서는 앵포르멜, 추상표 현주의, 기하학추상,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적 추상의 조형성을 모두 만나 게 되는데, 이는 강국진이 어느 한 사조에 머무르지 않고, 각 사조의 장점을 탐구 하고, 그 연구 내용을 통해 한국의 풍토 그리고 본인 스스로의 생활로 가져와 그 조형이 최종적으로 자신의 작업으로 구축될 수 있게 작업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강국진은 판화를 통해 그간 모색해 온 예술관을 가감 없이 실험했으며, 따라서 강국진의 판화작품 세계는 기법적 분류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추상미술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의 작업의 변화를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추상미술 사조 와 관념, 정신에 대한 연구로 그의 작업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몇 명의 판화가가 참여한 그룹전처럼 연출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강국진의 판화 연구는 그 화면의 조형적 분석과 동시에 그가 일상생활 속에서 예술관을 어떻게 접목시켰는지에 대 31) 안나 모진스카, 20세기 추상미술의 역사, pp. 123-124, p. 126.
32) 안나 모진스카, 20세기 추상미술의 역사, pp. 28-29.
33) 강국진, 「나의 작품 속의 말」, p. 26.
34) 안나 모진스카, 20세기 추상미술의 역사, pp. 54-157. 이 표는 논꼴아트에 삽입되 어 있는 강국진의 「나의 작품 속의 말」의 텍스트와 다양한 추상개념을 가시적으로 연 결하기 위해 제작된 표임을 밝힌다. 연구자는 강국진의 추상미술의 전반적 맥락이 이 미「나의 작품속의 말」에 전사되어 있다고 분석하였으며, 이러한 분석결과 하나의 특 정 추상미술 사조에 머무르지 않았던 강국진의 ‘추상미술개념’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을 선보였다.
(p. 126).
형태의 추상, 다시 말해 직선과 명확 한 3원색 안에서 그 표현의 가능성 을 발견할 것이다.’
(p. 54)
[표 2] 다양한 추상미술 개념과 강국진의 「나의 작품 속의 말」 비교34)
한 연구가 병렬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Ⅳ. 행위판화의 개념과 전개 양상
강국진의 판화는 ‘논꼴시대’와 같이 추상의 경향을 띠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의 다양한 조형형식의 구성과 다양한 기법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단일 추상논법 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논꼴에서 추상회화를 선보인 이후, 1967-1968년에는 한국 화단에서 전례 없던 급진적인 예술형식으로 해석된 해프닝, 테크놀로지 아트를 시도했다. 이러한 급격한 장르실험 이후, 그가 추구한 작업세계를 들여다보면, 과 거에 진척시킨 추상의 여러 조형적 실험이 드러난다. 따라서 강국진의 예술작품 형식 분석은 곧 그가 추구한 예술 사조를 탐구해야 그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강 국진은 기성 추상회화에서 추구한 표피적인 형식 답습을 탈피하기 위해 ‘판화’를 선택했다. 이 때문에 그는 추상회화에서 오브제로, 해프닝으로, 설치미술을 시도 했고, 또 그 이후에는 판화매체를 선택하였다. 따라서 그의 판화작업은 판화에 다 양한 기법이 존재하듯이, 그의 판화 화면을 구성하는 추상은 하나의 사조가 아니 라 다양한 추상미술사조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또한 정통 판화 기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형의 상관≫전에 출품했던 판화작업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오 히려 ‘판화적’이지 않은 작업들을 생산했다.
강국진 판화의 조형 변화는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뉜다. 초기는 주로 1970 년대 초로 <가두시위>(1967), <투명풍선과 누드>, <한강변의 타살> 해프닝을 마 친 이후 그는 다양한 매체 실험에 개방적이었으며, 이 시기에 동판화와 석판화 등의 판화기법을 숙지해 가고 있었다. 중기는 대체적으로 판화의 기법을 교과서 적으로 습득하려 노력한 시기로, 판화기법을 사용하되 화면에서는 다양한 경향의 추상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1989년 이후를 강국진의 후기판화기로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는 주로 회화와 판화를 동시에 하나의 화면에 구성해내게 된다. 연구자는 강국진의 후기판화시대를 ‘행위판화’로 정립하고자 한다.
곽남신은 한국현대판화사에서 “강국진은 판화도구조차 제대로 구비되지 않았던 1970년대 초반부터 판화를 진행”했다고 서술했다.35) 강국진은 1960년대 후반부터 판화기술을 작업형식에 본격적으로 끌고 왔지만 실제 그 당시 판화제작 환경은 매우 척박했다. 1963년 김봉태는 ≪파리비엔날레≫(1963. 9. 28-11. 3, 파리시립근대미술관)36)에 판화부문으로 출품을 했는데 그 당시 추계예술대학교 전신인 중앙여고에서 그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마저도 친한 지인인 한영진 이 중앙여고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앙여고에 비치된 프레스기는 작업용도이기보다는 인쇄를 위한 기계였다. 그만큼 한국 화단에서 현대미술로서 판화는 생소한 장르였다. 다만 몇몇 작가군이 현대미술 섹션의 한 파트로 해외에 서 판화작업을 하고 있었다. 1958년 ‘한국판화협회’ 창립전에서는 이항성(李恒星, 1919-1997)을 제외한 14명의 회원 모두가 목판화 출품에 그친 일화도 있다.37)
1970년대 초 강국진은 주로 대학입학 이전에 마스터했던 실크스크린과 에 칭작업을 했으며, 화면에 특정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기하학 추상을 연구했다. 이 시기 강국진은 판화 프레스로 찍어내는 조형 연구와 더불어 돗자리, 은박지, 마대 천 등을 활용하여 판화작업을 완성시켰다. 그의 판화작업 전반의 흐름을 분석해 보았을 때 주로, 판화 초기와 후기 시대에 판화의 전통기법과는 거리를 둔 작업 을 진행했다. 이 시기를 일종의 실험판화 시기로 규정할 수 있으며, 그는 초기에 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실크스크린, 에칭에서 동판화, 석판화 등을 학습했다.
이 시기 그는 판화기법을 순차적으로 익혔을 뿐 아니라, 이 당시 추상에 대한 연 구와 실험을 판화를 통해 진척시켰다. 또한 에디션 넘버링과 A.P로 표기한 작업 의 최종 결과물도 다르다. 즉 판은 같은 판이지만 결국 다른 판화를 제작하여 에 디션 개념을 사용하되, 미술시장에서 통용되는 에디션 넘버링의 관념과는 또 다 른 차이가 있다. 그는 주로 넘버링과 E.P를 사용했으며, 넘버링 작업과 A.P는 같 은 것 같지만 결국 서로 다른 작업으로 남아 있다.
35) 곽남신, 한국현대판화사 (재원 2002), pp. 104-105.
36) 파리시립근대미술관, http://www.mam.paris.fr/ (2019년 4월 5일 최종 접속).
37) 이은주, 「행위예술가 강국진, 판화를 통한 매체실험의 전모」, p. 3.
1970년대는 판화를 접 하게 되면 기법 습득과 매체 탐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1973년 <Relation> 목판화 는 칼로 자국 내어 파낸 흔 적이 거칠게 남아 있으며, 1976년 실크스크린 작업은 하나의 판을 두고 각기 다른 색감을 입혀 제작하였다. 기 법 연구에 충실하게 제작된 판화 이외 실험판화로 분류되는 <Shape of Line>(1973)에서는 돗자리는 종이로 특정 모양의 돗자리 부분을 찍어내고, 찍어낸 종이를 오려내면서 대칭으로 설치하여 종이가 마치 돗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시각적 효과를 연출하였다. 알루미늄 호일 위에 목판화 엠보싱 작업을 한
<Shape>(1973)은 빛이 반사하면서 쉽게 구겨지고 자국이 뚜렷하게 남는 호일을 사용하여 찍어냈다. [도 10] 엠보싱 자국 부분에 이미지를 찍고 색을 입혔는데 실 제로 이미지보다는 알루미늄 호일이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작업에 서는 1968년에 제작한 네온사인 작업 <시각 1, 2>(1968)와 같이 그 재료가 가지 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살려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1975년에 강국진은 메조틴 트 작업을 진행하게 되는데, 이 작업은 현재 <Story>(1975) 시리즈로 남아 있다.
강국진은 이 시기 스토리의 구성을 위한 명확한 소재를 구현함과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 1960년대에 완결하지 못했던 추상세계로 다시 회귀한다. 하지만 이 시기 의 추상성은 과거의 추상성과는 거리가 있으며, 이 시기에 판화로 제작한 추상의 전모를 살핌으로써 강국진이 추상회화에서 어떠한 예술정신을 탐독했는지 분석할 수 있다.
<Brushing>(1976) [도 11] 은 추상표현주의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기계를 사용하여 제작된 직선의 교차점들은 내면의 감성보다는 절제적인 복합성을 표현 하고, 반면에 1973-1975년에 제작한 <Untitled> [도 12], <Following dots>은 앵
[도 10] 강국진, <Shspe-3>, <Shape-1>, <Shape-2>, 호일위에 목판화 엠보싱, 53x51cm
포르멜 방식의 조형적 탐구로 해석된다. 이에 반해 <Shape>(1975)는 앵포르 멜의 원형질 탐구와 절제된 직선들이 동시에 교차해, 앵포르멜 화풍과 추상표현 주의 화풍의 경계에 서 있다. 1980년에 이르러 석판화 기법을 학습하게 되고, 이 시기에는 주로 기하학 색채 추상으로 분류되는 <리듬>(1980) 시리즈를 제작하게 된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회화와 판화를 병행하며 제작한 <리듬> 에칭 시 리즈는 회화의 <선> 시리즈와 조형적 맥락이 닮아 있으며, 회화의 <선> 시리즈 와 같이 세로 선으로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 같은 화면을 완성하지만 에칭 <리 듬>에서는 아직 가로 선 사이의 화면에 담아 두었던 대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렇듯 강국진은 판화로 화면의 대상화와 비대상화, 추상과 구상, 판화에서 의 색채, 회화의 색채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탐구했고, 특히 판화에서는 실제로 위 와 같은 문제의식을 시각적으로 환원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그에게 판화는 하나의 완결성보다는 ‘과정’에 있었고, 또 각각 다르게 찍힌 판화는 곧 오늘날 에 디션 개념으로 정립되는 복제와는 다르다. 강국진의 판화를 실험판화라 지칭할 수 있는 이유는 판화의 평면성 탈피, 복제성 등 판화의 교과서적 특성과 빗나간 화면을 구성해서가 아니다. 강국진이 1965년부터 꾸준히 실험했던 “강한 선, 가열 된 바탕, 부정의 세계를 뚫고 폭발하는 무수한 기호형에서 오는 직열된 감정”에 대한 구축을 두고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을 모색했기 때문이다.38)
[도 11] 강국진, <Brushing>, 1976, 에칭, 44.7x35.5cm, Ed. 2/20
[도 12] 강국진, <무제>, 1974, Intaglio with LP, 52x38cm, 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