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17.26.1.105
1. 서 론
한국건축에서 지붕의 형태는 크게 팔작지붕, 우진각지 붕, 맞배지붕 등으로 구분된다. 그중 맞배지붕은 현존 유구를 통해 고려 말 사찰 내 전각에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엄 숙한 의례를 진행하는 건축물을 맞배지붕으로 꾸몄는데, 종묘 정전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사대부가 사 당도 맞배지붕을 취하였으며, 사찰 내 중심 전각에서도 맞배 형태로 지붕을 이었다.
현존 유구를 보면, 조선 초 불교건축과 조선중기 이후 유교건축의 맞배지붕에는 풍판부1)를 갖추고 있다. 풍판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1) 맞배지붕에서 풍판을 설치한 넓은 부위에 대한 용어는 아직까지 정립되어 있지 않다. 팔작지붕에서는 합각부, 합각벽 등으로 해당 부 위를 일컫는 것과는 달리, 맞배지붕에서는 풍판 또는 박공부 등의 용 어가 사용되고 있다. ‘풍판’은 개별 풍판 재료와 혼용되는 문제가 있 고, ‘박공부’는 풍판 포함 여부가 불분명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맞배지붕에서 박공부터 풍판, 솔대 등을 포함한 부위에 대해 ‘풍판부’
로 명명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용어 정립은 추후 논의가 필
부는 맞배지붕의 측면 가구부와 벽체를 빗물 등 외기로 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데,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하 는 의장적인 역할도 한다.
이러한 풍판부에 대한 연구 성과는 아직까지 많지 않 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봉정사 극락전의 경 우 1975년 수리 이전에는 풍판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설 치 시기를 창건 당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2) 한국건축에 서 맞배지붕에 풍판을 설치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계 내 에서 아직까지 정립되어 있지 않다. 사찰건축 내 맞배지 붕 건물을 대상으로 풍판의 발생 원인과 발전에 대하여 사회·경제적인 측면과 기능·의장적인 측면에서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3) 풍판부의 구조 및 부재 간 결구법
요한 사항이다.
2) 주남철, 韓國 現存 最古의 木造建築 鳳停寺 極樂殿 本形에 관한 연 구 -鳳停寺 極樂殿 修理工事報告書, 鳳停寺 極樂殿 修理·實測 報告書 및 鳳停寺 大雄殿 解體修理工事報告書 分析을 기반으로-,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28권, 9호, 2012; 본고에 따르면 부석사 극락전 이외에도, 수덕사 대웅전 (1308), 정수사 법당(1423), 무위사 극락전(1476)에도 풍판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수리 과정에서 제거되었다.
조선후기 왕릉 정자각의 풍판부 용어와 구조의 변화
A Study on the Change of the Terms and the Structure of the Pungpanbu in the T-shaped Wooden Shrines in Royal Tombs in the Later Joseon Period
이 상 명*1) Lee, Sang-Myeong
(공학박사)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mprehend the change of the terms and the structure of the Pungpanbu in the T-shaped wooden shrines in the later Joseon period through the Salleung-dogamuigwes. Following conclusions have been reached through the study. First, the terms in the Salleung-dogamuigwes were similar to Yeonggeon-dogamuigwes but timing difference was verified. The word about the frame of Pungpanbu was different from the current. Second, in accordance with the extended of Pungpanbu, the members of frame of Pungpanbu had been increased and it had been changed to the lattice. The members of Pungpanbu used as plan dimensions and the size of the members had been gradually increased. Third, the Pungpanbu had been extended to protect the side of T-shaped wooden shrines. At the same time, the range of Chukjungbang had been extended. This was the result of the efforts of the era to reduce the range of plaster. This affected the overall elevation change of T-shaped wooden shrines.
주제어 : 풍판부, 풍판, 구조, 용어, 정자각, 산릉도감의궤
Keywords : Pungpanbu, Pungpan, Structure, Terms, T-shaped wooden shrines, Salleung-dogamuigwes
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는데, 조사보고서 내 이에 대한 도면 및 내용이 기록되지 않아 제한된 범위 내에 서 분석이 이루어졌다.4) 풍판부에 각종 부재에 대한 용 어 대해서는 장기인의 韓國建築大系Ⅴ: 木造5)에 도면 을 통해 명칭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후기 영건도감의궤 (營建都監儀軌)를 통한 용어 연구도 진행된 바 있는데, 풍판부를 구성하는 각종 부재에 대해 개괄적으로 용어 를 정리하였다.6)
이와 같이 맞배지붕의 풍판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시 작 단계에 머물러 있다. 특히 풍판부의 구조에 대해서 는 세부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는 풍판부 가 소모성 마감재료로 분류되어7) 실측 및 수리보고서 상에 상세도면이 실리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왕릉 내 정자각은 풍판부를 갖춘 맞배지붕으로, 40여 동의 건물이 현존하고, 관련 문헌으로 산릉도감의 궤(山陵都監儀軌)가 남아 있어 문헌과 유구의 직접 비교 를 통한 연구가 가능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정자각을 통해 조선후기 맞배지붕 풍판부의 구조적인 특징을 파 악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며, 그에 앞서 산릉도감의 궤를 통해 풍판부의 용어를 정리하고자 한다.
연구 범위로 삼은 산릉도감의궤는 16건이고, 그중 산릉 도감의궤와 직접 비교가 가능한 현존 정자각의 풍판부는 12건이며, 그 외 현존 정자각 풍판부 5건을 포함하여 17 건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정자각의 건립 시기 및 수리 시기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조선왕릉 종합학술 조사보고서8)를 참조하였고, 정자각과 풍판부의 시기가
3) 신웅주, 맞배지붕 건물의 풍판에 관한 연구 ,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27권, 3호, 2011; 본 논문에 따르면, 조선전기 맞배지붕 건물의 풍판부는 증축 과정에서 가설된 것으로 추정하였고, 16세기 이후 크게 유행하여 다포계 맞배지붕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판 단하였다. 16세기 이후 건물과 비례하여 측면 처마내밀기가 늘어나지 않은 점을 통해 측면 가구와 벽체 보호를 위한 풍판부가 설치되었음을 추측하였다. 조선 초 사분변작에서 삼분변작으로 구조가 변화하면서 중 도리가 박공널을 넘어서 노출됨에 따라 이를 가리기 위해 풍판을 설치 하는 부분도 나타남을 지적하고 있다.
4) (사)한국건축역사학회, 영조규범 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06, 561~
591쪽; 본 보고서에는 합각지붕을 포함하여 13건의 풍판부를 조사하였 는데, 그중 풍판틀에 대한 도면이 작성된 경우는 4건이다.
5) 장기인, 韓國建築大系Ⅴ: 木造, 보성각, 2001, 168~169쪽 6) 이연노·김왕직, 6. 건축용어: 3. 지붕부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 758~760쪽; 본 연구서에서 는 전반적으로 부재별로 표를 작성하여 시기별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데, 풍판부의 각종 부재에 대해서는 용어 표를 생략하고, 상대적으로 간 략하게 용어 정리를 하였다.
7) 신웅주, 앞의 논문, 213~214쪽
8)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Ⅰ~Ⅸ, 2009~2015
다른 경우는 후술하겠지만 해당 시기의 기법과는 다른 점 이 확인되어 후대의 수리 시기로 추정하였다.9) 정자각 풍 판부 구조는 실측 및 수리 관계자로부터 CAD 도면을 제 공받아 각종 실측 수치를 정리하였고, 풍판부 도면은 필 자가 직접 현장조사를 통해 간이실측 한 것과 수리보고서 및 수리 관계자를 통해 제공받은 사진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No. 능호 정* 풍# 의궤명 (편찬 시기) 1 영릉 1622 1622
2 헌릉 1644 1748
3 목릉 1630 1868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 (1630)
4 효릉 孝宗寧陵山陵都監儀軌 (1659)
5 숭릉 1674 1674 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 (1674) 6 익릉 1681 1681 仁敬王后翼陵山陵都監儀軌 (1681) 7 휘릉 1895 莊烈王后徽陵山陵都監儀軌 (1689) 8 희릉 17 후 17 후
9 명릉 仁顯王后明陵山陵都監儀軌 (1702)
10 선릉 1706 1706
11 의릉 1724 1724 景宗懿陵山陵都監儀軌 (1725) 12 홍릉 1757 1757 貞聖王后弘陵山陵都監儀軌 (1757) 13 원릉 1776 1776 英祖元陵山陵都監儀軌 (1776) 14 융릉 1789 1789 莊獻世子顯隆園園所都監儀軌 (1789) 15 건릉 正祖健陵山陵都監儀軌 (1800) 16 건릉 1821 1821 正祖孝懿王后健陵山陵都監儀軌 (1821) 17 인릉 純祖仁陵山陵都監儀軌 (1835) 18 경릉 1843 1843 孝顯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 (1843) 19 수릉 翼宗綏陵山陵都監儀軌 (1846) 20 수릉 1855 1855 翼宗綏陵遷奉山陵都監儀軌 (1855) 21 인릉 1856 1856 純祖仁陵遷奉山陵都監儀軌 (1856) 22 예릉 1864 1864 哲宗睿陵山陵都監儀軌 (1864) 23 휘경원 1864 1864 綏嬪徽慶園遷奉園所都監儀軌 (1864) 24 건원릉 1870 1870
※ ‘정*’은 정자각 건립 또는 중건 시기, ‘풍#’은 풍판부 설치 시기이 고, 능호에 진하게 표시한 것은 풍판부의 분석 대상이며, 표 셀에 음영을 둔 부분은 정자각과 산릉도감의궤 간 비교가 가능한 대상임.
영릉(英陵)은 세종대왕릉임. 희릉 정자각의 ‘17 후’는 17세기 후반임.
표 1. 연구 대상 정자각의 풍판부와 산릉도감의궤
2. 풍판부의 용어 정리
풍판부의 부재 용어는 산릉도감의궤 중 정자각 건립과 관련된 조성소(造成所) 내 품목질(稟目秩) 중 목물(질)에 기록된 부재 명칭을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9) 이에 대해서는 3. 풍판부 구조의 변화 과정 에서 기술하였다. 풍판 부는 1960년 이후 대부분 수리를 겪었지만, 각 부재의 규격은 수리 전 의 규격을 따랐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산릉도감의궤에 풍판부를 구성하는 부재는 <표 2>와 같이 총 다섯 종류로 분류된다. 박공은 朴工板(박공판)과 朴工(박공)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경종의릉산릉도감의궤
(1725)까지는 박공판으로, 이후 효의왕후건릉산릉도감의 궤(1821)까지는 박공과 박공판으로, 이후부터는 박공으 로 변화되었다. 따라서 19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좀 더 짧 은 박공이라는 용어가 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No. 능호 시기 박공 풍판사목
풍판 솔대
입사목(대목) 횡사목 (횡목)
1 목릉 1630 - - - 風遮 -
2 영릉 1659 朴工板 - - 風遮板 所乙竹
3 숭릉 1674 朴工板 - - 風遮板 率木
4 익릉 1680 朴工板 - - 風遮板 率木
5 휘릉 1689 朴工板 - - 風遮板 率木
6 명릉 1702 朴工板 - (風遮)
橫木 風遮板 (風遮) 率木 7 의릉 1725 朴工板 - 橫木 風遮板 欒木
8 홍릉 1757 朴工 帶木 絲木 風遮 率木
9 원릉 1776 朴工 帶木 絲木 風遮 率木
10 융릉 1789 朴工 帶木 絲木 風遮 率木
11 건릉 1800 朴工板 帶木 斜木 風板 縫竹 12 건릉 1821 朴工板 帶木 斜木 風板 縫竹 13 인릉 1835 朴工 立斜木 橫斜木 風板 縫竹
14 경릉 1843 朴工 風板斜木 風板 松竹
15 수릉 1846 朴工 風板斜木 風板 松竹
16 수릉 1855 朴工 風板斜木 風板 松竹
17 인릉 1856 朴工 風板斜木 風板 松竹
18 예릉 1864 朴工 風板斜木 風板 松竹
19 휘경원 1864 朴工 風板斜木 風板 松竹
표 2. 풍판부 부재 용어
풍판틀을 구성하는 부재는 대목(입사목)과 횡목(횡사목) 두 가지로 확인되는데, 산릉도감의궤에서는 18세기부터 확인된다. 산릉도감의궤에 대목(입사목)은 帶木(대목), 立 斜木(입사목), 風板斜木(풍판사목)으로, 횡목(대목)은 (風 遮)橫木(풍판횡목), 橫木(횡목), 絲木(사목), 斜木(사목), 橫 斜木(횡사목), 風板斜木(풍판사목)으로 표기되어 있다. 뒤 이어 3장에서 언급하겠지만, 풍판틀은 수평 및 수직부재 로 구성되어 있다. 산릉도감의궤에서는 수평부재에 해당 하는 (風遮)橫木이 인현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1702)에 가장 먼저 기록되는데, ‘가로(橫)’ 부재라는 뜻이 살이 있 는 음독자10)이다. 絲木과 斜木은 모두 사목으로 읽힌다.
10) 의궤 상의 건축 용어를 한자를 빌려 우리말로 기록하던 표기법을 차자 표기법이라고 한다. 차자 표기는 음독자, 음가자, 훈독자, 훈가자
絲木은 ‘실(絲)’로 풍판을 꿰맨다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 斜木는 ‘사(斜)’자가 ‘비스듬하다 또는 기울다’라는 뜻이어서 위치에 따라 비스듬히 설치한 모양을 표현한 음 독자임을 알 수 있다.
No. 능호 시기 박공 풍판사목
풍판 솔대
입사목(대목) 횡사목 (횡목)
1 건릉 1800 6立 12箇 24箇 90立 93箇 2 건릉 1821 6立 12箇 24箇 90立 93箇 3 인릉 1835 6箇 12箇 28箇 90立 93箇
4 경릉 1843 6立 40箇 60立 60箇
5 수릉 1846 6立 40箇 60立 60箇 6 수릉 1855 6立 40箇 60立 60箇 7 인릉 1856 6立 40箇 104立 110 8 예릉 1864 6立 40箇 104立 110 9 휘경원 1864 6立 40箇 60立 60箇
※ 박공 수량은 19세기 이전에도 6개로 표기되어 있지만, 박공, 사목, 풍판, 솔목 등은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부터 수량이 표기되어 있음.
표 3. 풍판부 부재 수량
수평부재인 絲木과 斜木이 쓰인 시기인 17세기 후반부 터 18세기 초엽까지, 수직부재는 帶木으로 표기된다. 帶木 은 띠장목에 해당하는데, 산릉도감의궤에서는 판벽 띠장 이 동일하게 표기되어 있고,11) 일반적으로 판장문의 띠장 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가로로 설치된 부재로 인식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목물 수량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 다. <표 3>에서 보듯이, 풍판틀은 수평부재가 수직부재에 비해 많이 소요되는데,12) 정조건릉산릉역(1800)과 효의왕 후건릉산릉역(1821) 모두 대목이 12개, 사목은 24개를 사 용하고 있어 대목이 수직부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풍 판틀에서 대목은 일반적인 띠장목이 아닌 수직부재를 의 미한다. 순조인릉산릉도감의궤(1835)에서는 대목과 사목 이 立斜木과 橫斜木으로 한 차례 표기된다. 입사목과 횡 사목은 모두 각각 수직과 수평부재를 뜻하는 음독자이다.
이러한 표기 방식은 정자각 축중방(築中防, 화방벽)13)에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음독자는 한자를 음(音)으로 읽으면서 그 표의성 을 살려서 이용한 차자이고, 음가자는 한자를 음으로 읽되 그 표의성을 버리고 표음성만 이용한 차자이다. 훈독자는 한자를 훈(訓)으로 읽으면 서 그 표의성을 살려서 이용한 차자이고, 훈가자는 훈으로 읽되 그 표 의성을 버리고 표음성만을 이용한 차자이다. [출처: 김왕직, 5. 건축 형 식과 용어의 표기: 2. 건축 용어 표기법 고찰 (영건의궤연구회, 앞의 책), 2010, 649~651쪽]
11) 이상명, 산릉의궤 정자각을 통해 본 조선후기 관영건축의 시공기 술 ,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286쪽
12) 이에 대해서는 3장에 기술되어 있다.
13) 축중방은 산릉도감의궤에 표기되어 있는데, 측면과 후면에 중인방
설치된 용지판을 19세기 중엽 이후 立龍脂板(입용지판)과 橫龍脂板(횡용지판)으로 구분하는 방식14)과 동일하다.
이러한 표기 방식이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1843) 부터는 風板斜木으로 표기되는데, 순조인릉산릉역에서 입 사목 12개, 횡사목 28개의 합산치가 풍판사목 40개와 동 일하여 입사목과 횡사목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 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재의 설치 위치가 다름에 도 하나의 명칭으로 통일된 것은, <표 6>과 같이 수직과 수평부재의 규격이 다르기는 하나 큰 차이가 없어 구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풍판사목으로 통일한 것은 부재 수량이 많은 사목에 대목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용 어가 조정된 것으로 판단된다.
풍판은 산릉도감의궤에 風遮(풍차), 風遮板(풍차판), 風 板(풍판)으로 표기되어 있다. 18세기까지는 風遮, 風遮板 으로 표기되는데,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엽까지는 風 遮板으로 기록되어 있다. 風遮는 바람을 막는다는 의미의 음독자이고, 風遮板은 동일한 의미에 판재라는 부재의 형 태가 더해진 명칭이다. 이러한 표기 방식은 정조건릉산 릉도감의궤(1800)부터는 風板으로 변경된다. 이는 風遮板 에서 遮자를 생략하여 용어를 단순화한 것인데, 어떤 부 재인지 명확한 경우 부재명을 줄이는 방식은 앞서 박공과 도 동일하며, 이는 산릉도감의궤 내 다른 부재에서도 확 인되는 경향15)이다.
풍판의 틈새를 마감하는 가늘고 긴 부재는 졸대 또는 솔대로 불리는데,16) 산릉도감의궤 상에 所乙竹(소을죽, 솔대), 率木(솔목), (風遮)率木(풍차솔목), 欒木(난목), 縫竹 (봉죽, 봉대), 松竹(송죽, 솔대)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 다. 所乙竹은 음가자인 所乙(솔)과 훈가자인 竹(대)의 합 성어로 솔대로 읽는다. 率木은 음가자인 率(솔)과 木의 합성어로 솔목으로 읽는데, 18세기까지 가장 많이 쓰인 용례이다. 경종의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한 차례 欒木이 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欒자는 둥글다는 뜻으로 솔대 단면이 둥그렇게 처리된 형상을 의미하는 용어로 훈독자 와 음가자의 합성어이다. 이후 19세기 초엽에는 縫竹으로 표기하였는데, 縫竹는 縫자가 꿰맨다는 뜻과 竹(대)의 합 성어로 꿸대로 읽을 수 있고,17) 가시새가 중깃에 뚫고 삽 입된 형태보다는 풍판을 옷감으로 보고 바늘로 꿰매는 모양을 뜻하는 용어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앞서 欒木(난 까지 전돌로 쌓은 벽체를 말한다.
14) 이상명, 앞의 논문, 288쪽 15) 이상명, 앞의 논문, 359쪽 16) 이연노·김왕직, 앞의 글, 760쪽 17) 이연노·김왕직, 앞의 글, 761쪽
목)과 마찬가지로 솔대의 둥근 형상을 뜻하는 봉대로 읽 을 수도 있다. 19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松竹으로 표기되 었는데, 훈가자인 松(솔)과 훈가자인 竹(대)의 합성어로 솔대로 읽는다. 이와 같이 산릉도감의궤에서는 전반적으 로 솔대를 이두식으로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건도감의궤에 기록된 풍판부의 용어는 선행 연구 결 과에 따르면 산릉도감의궤에 쓰인 용례가 대부분 나타나 는데, 시기적인 면에서는 차이를 보인다.18) 하지만, 19세기 후반을 기준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장기인의 韓國建築大系Ⅴ: 木造19)에 기술된 풍판부 의 도면은 <그림 1>20)과 같은데, 의궤 용어와 비교하면 풍판틀을 구성하는 용어에서 차이가 확인된다.
그림 1. 풍판부 용어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19세기 후반 산릉도감의궤의 풍판부 용어를 <그림 2>
와 같이 정리하였다. 풍판틀은 입사목, 횡사목으로 구분하 였고, 풍판틀 전체는 풍판사목으로 하였다.
그림 2. 풍판부 부재 용어(산릉도감의궤 기준)
산릉도감의궤와 장기인의 풍판부 용어를 비교하면 대
18) 이연노·김왕직, 앞의 글, 760~761쪽. 본 연구서에 따르면, 영건도감 의궤에서는 1800년대 이전에는 풍차판이 일관되게 사용되었고, 1800년 대 이후에는 풍판이라고 사용했다. 솔대는 대부분 송죽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19) 장기인, 앞의 책, 169쪽
20) <그림 1>은 영건의궤(영건의궤연구회, 761쪽)에서 발췌한 것으 로, 내용은 韓國建築大系Ⅴ: 木造(장기인, 169쪽)와 동일한데, 편집이 더 나아서 이를 실었다.
부분 동일하지만, 풍판의 받이재에 해당하는 풍판틀을 구성하는 부재 용어는 차이가 나타난다. 수직부재와 수 평부재를 산릉도감의궤에서는 입사목(대목)과 횡사목(횡 목)으로, 장기인은 달대(도리마구리에, 도리옆)와 풍판틀 로 구분하고 있다. 달대는 천장에서도 사용되는 부재로
‘달아맨다’는 뜻을 포함하고, 도리를 기준으로 마구리에 설치한 달대를 ‘도리마구리에’ 도리 측면에 설치한 달대 를 ‘도리옆’으로 칭하였다. 수평부재는 ‘풍판틀’로 칭하였 다. 현재 실무에서 풍판 받이재 명칭의 경우, 장기인의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부재 명칭이 생략된 채 부재 규격만 표기하고 있다.
장기인이 정리한 건축 용어는 해방 후 현장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가 반영된 것21)으로 추정된다. 산릉도감의궤 와 영건도감의궤에 기록된 건축 용어는 조선후기 장인들 이 사용한 용어를 한자를 빌려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으 로, 당시 읽었던 발음은 현재 국어와 비교하면 차이가 나타난다.22) 이러한 부분을 감안하여 풍판부 부재의 용 어 정립이 요구되지만, 이는 학계에서 좀 더 논의가 필 요한 사항으로 본 논문에서는 변화의 과정만 도출하는 선에서 멈추고자 한다. 단, 본 논문에서는 정자각 구조를 분석하기 때문에 산릉도감의궤에 사용된 풍판사목, 입사 목, 횡사목을 기준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21) 장기인, 건축용어제정의 발자취 , 건축, 33권, 5호, 1989, 66쪽 22) 오창명·손희하·천득염, 서궐영건도감의궤의 목재류 어휘 분석 연 구 , 건축역사연구, 16권, 1호, 2007
3. 풍판부 구조의 변화 과정
3-1. 풍판부 확장
현존 정자각을 시기별로 조사해 보면, <표 4>와 같이 후대로 내려올수록 풍판부가 전체적으로 커졌음을 알 수 있다. 풍판부의 수평 길이는 박공 길이의 2배인데, <표 4>
를 보면 정전 측면 칸의 주칸 길이가 길어지면서 이와 연동되어 길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측면 주칸 길 이를 보면, 17세기 전반에는 9자 정도인데,23) 17세기 후 반부터 18세기 중엽까지는 10.5자 정도로 커지고, 18세 기 말부터 19세기 후반까지는 11~12자 정도로 커졌으 며, 박공 길이도 이에 비례하여 커졌다. 이는 국장례 절 차와 관련된 것으로, 1674년 현종숭릉산릉역부터 영악전 (靈幄殿)24) 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영악전에 배설되었던 가구를 정자각 내 배설하게 됨에 따라, 정전 측면 칸의 규모가 점차 커지게 된 것이고,25) 이에 따라 풍판부의 크기도 비례하여 증가하게 된 것이다.
23) 헌릉 정자각은 1644년 중건된다. 이후 여러 차례 수리가 되는데, 평 면 규모는 변화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풍판사목의 구조는 19세 기 이전의 기법을 유지하고 있는데, 풍판의 최대 길이도 17세기 다른 정자각보다는 긴 편이다. 헌릉 정자각은 1644년 중건 이래 1748년·1822 년·1902년에 각각 수리가 되는데, 현재 풍판부의 구조는 풍판사목의 구 조와 풍판의 길이 등으로 볼 때 1748년 수리된 상태로 판단된다.
24) 국장 절차에 따라, 빈전에서 산릉으로 옮겨온 재궁을 봉분에 봉안 하기 전 하루 이틀 정도 모셔둔 임시 시설물로, 평면 형태는 정자각과 동일하다.
25)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喪葬禮 設行공간의 건축특성 -빈전·산릉·
혼전을 대상으로- , 경기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124~127쪽 No. 능 호 시 기 측면 칸
길이(尺)
박 공 풍 판 솔 목
길 이 너 비 두 께 너 비 두 께 최대 길이 최소 길이 너 비 춤
1 영릉 1622 2,850(9.0) 5,826 605 45 280 30 2,954 274 60 36 2 익릉 1680 3,275(10.5) 5,887 410 60 296 45 2,934 513 75 45 3 의릉 1724 3,270(10.5) 5,975 505 60 270 36 3,733 613 65 30 4 헌릉 1748 2,792(9.0) 5,551 459 45 298 32 3,342 439 74 45 5 홍릉 1757 3,240(10.5) 6,129 545 36 280 24 3,872 755 50 30 6 원릉 1776 3,210(10.5) 6,258 541 66 360 36 4,022 1,172 75 54 7 현릉원 1789 3,690(12.0) 6,674 433 70 274 39 3,768 542 80 51 8 건릉 1821 3,690(12.0) 6,594 571 54 262 36 4,076 506 60 54 9 경릉 1843 3,390(11.0) 6,345 547 75 297 45 3,610 679 60 60 10 수릉 1855 3,360(11.0) 6,385 638 85 365 35 3,546 339 88 65 11 인릉 1856 3,660(12.0) 6,711 642 80 360 39 3,875 431 64 41 12 예릉 1864 3,377(11.0) 5,991 614 60 298 40 3,807 389 92 60 13 휘경원 1864 3,400(11.0) 6,592 541 75 367 42 4,275 320 84 57 14 건원릉 1870 3,080(10.0) 5,768 395 66 353 45 4,051 557 81 50 표 4. 정자각 우측면 풍판부의 구성 부재 규격-1 (단위: ㎜)
풍판부의 확장은 수직적으로도 발생하였는데, 풍판의 최대 길이를 보면, 17세기 정자각은 2,934~2,954㎜로 9.5 자 정도이고, 18세기에는 3,733~4,022㎜로 10.8~13자이 며, 19세기에는 3,546~4,275㎜, 11.4~13.8자로 후대로 내 려갈수록 점차 길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풍판부의 높이 변화는 수평 길이의 확대와 연관된다. 하지만, 그 에 따른 자연 증가분보다는 좀 더 길게 증가한 경향이 있다.
3-2. 격자화하는 풍판사목
풍판사목은 도리 및 창방 등에 결구되어 있다. 입사목 의 경우 건릉 정자각(1821) 이전에는 대부분 종도리 하부 에 한 개만 설치하였다. 종도리 하부 뜬창방은 입사목 내 측에 맞닿아 직절되어 있는데, 입사목과는 결구되어 있지 않고 수직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입사목은 횡사목과 결구하여 수평 상태를 유지하였고, 수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측면 가구에서 횡사목 내측으로 90°로 뻗어 있는 버팀대26)가 설치되어 있다.
그림 3. 입사목과 뜬창방 (원릉 정자각, 1776)
그림 4. 버팀대 (의릉 정자각, 1724)
버팀대는 내측에는 기둥 또는 합량에, 외측에는 입사 목과 맞춤되는데, 횡사목의 1~2단 또는 2~3단 사이에 위치한다.
1622년 중건된 영릉 정자각의 경우, 횡사목은 입사목과 결구되는 횡사목 2단과 입사목과 결구되지 않은 보조 횡 사목 1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번째 횡사목은 단면 규 격이 60 × 75㎜로 나머지 횡사목의 90 × 105㎜보다 작고, 시공 순서상 풍판을 고정한 다음 풍판 뒤에 풍판 하단부 를 다시 재고정하는 역할로 구조적인 횡사목은 아니다.
영릉 정자각 이후 세 번째 횡사목은 가구부와 결구되어 구조적인 역할을 하므로, 영릉 정자각의 풍판부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법임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횡사목은 풍판 하단부와 측면부의 풍판 받이 재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역할에 부응하기 위해
26) 장기인의 韓國建築大系Ⅳ: 新編 韓國建築辭典, 보성각, 2010, 169 쪽; 이에 따르면 이 부재를 버팀대로 명명하고 있다. 부재의 의미가 잘 표현되어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도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그림 5, 6>과 같이 정자각마다 다양한 방식을 취하였 다. 선릉 정자각의 경우 창방에서 풍판부 측면까지 경사 지게 횡사목을 따로 설치하였고, 헌릉 정자각의 경우는 서까래 끝 부분에 짧은 입사목을 달고 중앙 입사목 간에 횡사목을 설치하여 측면부를 보강하였다. 하지만, 18세기 전반까지는 풍판부 하부 지점과는 이격된 상태로 횡사목 이 결구되어 최하부의 풍판은 불안정한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세 번째 횡사목을 풍판부 최하단까지 근접하기 위한 시도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변 화는 원릉 정자각(1776)부터 보이는데, 18세기 말 융릉 정자각(1789)에서는 입사목을 풍판부 최하단까지 내려 뻗 고, 세 번째 횡사목을 입사목 최하단 지점에서 창방과 경 사지게 결구하여 풍판부의 최하단에 최대한 가깝게 횡사 목의 위치를 잡아 풍판 고정을 긴밀하게 하도록 하였다.
1821년 건립된 건릉 정자각27)부터는 이전 시기의 문제 점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입사목의 수량을 대폭 늘리고 횡사목의 결구 위치 등을 조절하였다. 입사목은 기존 1단에서 최대 7단까지 증가하였고, 횡사목은 3단에 서 19세기 후반부터는 4단까지 증가하였다. 중앙 입사목 의 경우 뜬창방 뺄목과 결구하여 풍판 최하단까지 내려 뻗고, 중도리, 주심도리 선상에 입사목을 배치하고 중앙 입사목과 마찬가지로 (뜬)창방뺄목과 결구하여 풍판 최하 부까지 뻗어 있다. 횡사목은 이전 시기와는 달리 가구 부 재인 뜬창방과 창방 뺄목과 적극적으로 결구하여 구조 성능이 강화되었고, 최하단 횡사목은 풍판부의 최하단에 근접하도록 위치를 조절하여 풍판 하부를 확실하게 고정 하도록 하였다. 또한, 풍판부 최외단에 입사목을 한 단 설치하여 횡사목과 결구함으로써 최외단 풍판이 잘 고정 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입사목과 횡사목의 구조는 19세기 이전에는 생선 가시와 같은 형상으로 풍판의 받이재 역할을 하였 지만, 19세기에는 격자틀을 형성하여 안정적으로 풍판부 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진화되었다.
3-3. 풍판부 구성 부재의 규격 증가 (1) 박공
박공은 도리와 집우사 등 측면 가구를 노출하지 않으
27) 이권영·김왕직, 초창 정조 건릉 건축물의 복원적 고찰 , 대한건축 학회연합논문집, 11권, 4호, 2009; 본고에 따르면, 현 건릉 정자각은 정 조 붕어 후 건립된 정자각이 아니며, 효의왕후 사후 건립된 정자각이 다.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1800)와 정조효의왕후건릉산릉도감의궤
(1821)의 기록상 정자각의 규모와 각 부재의 수량 및 규격이 일치한다.
초창 정자각(1800)의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1821년에 건립된 정자각과 평면 규모가 일치하여 현 정자각은 초창 정자각(1800)을 전범(典範)으 로 하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면서 곡선 형태로 취하고 단부는 게눈각으로 처리하여 의장적인 역할을 하는데, 판재로는 가장 큰 원목(原木)이 소요되는 부재 중 하나이다. 산릉도감의궤에 박공의 길이 는 측면 칸의 주칸 길이에 따라 변동되는데, 현존 정자각 정전의 박공 길이를 살펴보면 5,551~6,711㎜로 나타나고,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17.9~21.7자로 산출된다. 따라서 산 릉도감의궤 상 박공의 원목 길이는 여유 치가 있는 규격 임을 알 수 있다. 박공 너비는 395~642㎜로 나타나는데, 19세기에 들어서 600㎜가 넘은 박공이 등장하여 점차 커 지는 경향이 일부 보이지만 전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비 중으로 본다면 1.75~2자 정도를 일반적인 너비로 계획하 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박공 두께는 45~85㎜로 나타나는 데, 60㎜ 이상이 다수를 점하고 있어 2~2.5치(寸)로 계획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2) 풍판사목
도리에 결구되는 입사목의 너비는 105~190㎜이고, 두 께는 90~150㎜로 대부분 장방형이다. 도리 또는 뜬창방 과 결구되는 횡사목의 너비는 90~115㎜이며, 두께는 90
No. 능 호 시기 원 목 No. 능 호 시기 원 목 1 목릉 1630 - 11 건릉 1800 大不等1株
中不等1株
2 영릉 1659 小不等1條 長14尺
圓經1尺4寸 12 건릉 1821 大不䒭1株 中不䒭1株
3 숭릉 1674 樓柱1條 13 인릉 1835 大不等1箇 長30尺 末圓徑2尺 4 익릉 1680 樓柱3條 14 경릉 1843 統木1箇 5 휘릉 1689 樓柱3條 15 수릉 1846 卜定大樑1箇 6 명릉 1702 樓柱6條 16 수릉 1855 長30尺 7 의릉 1725 樓柱3條 17 인릉 1856 卜定木1.5箇 8 홍릉 1757 中不等2株 18 예릉 1864 卜定木1.5箇 9 원릉 1776 中不等2株 19 휘경원 1864 - 10 현륭원 1789 中不等2株
표 5. 박공 원목
~150㎜로 역시 대부분 장방형이다. 19세기 중엽 이전까 지는 입사목이 횡사목보다는 큰 부재를 사용하였다. 이는
영릉 정자각(1622) 희릉 정자각(17C 후반) 선릉 정자각(1706)
헌릉 정자각(1748) 원릉 정자각(1776) 융릉 정자각(1789)
그림 5. 정자각 우측면의 풍판틀 구조(17~18세기)
건릉 정자각(1821) 경릉 정자각(1843) 인릉 정자각(1856)
예릉 정자각(1864) 휘경원 정자각(1864) 건원릉 정자각(1870)
그림 6. 정자각 우측면의 풍판틀 구조(19세기)
18세기까지 입사목 한 단에 횡사목 3단이 결구되었기 때 문에, 횡사목보다 더 큰 단면의 입사목이 필요하였던 것 이다. 19세기에 들어서 격자화한 풍판틀을 갖추었음에도 이전 시기의 부재 규격을 지속하다가 1843년 경릉 정자 각 이후부터는 건원릉을 제외하고는 입사목과 횡사목의 단면 규격이 동일해진다. 이는 앞서 언급한 19세기 후반 풍판틀의 부재가 풍판사목으로 명칭이 통합되는 부분과 도 관련된다.
(3) 풍판과 솔대
풍판의 너비는 267~367㎜로 나타나는데,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0.9~1.2자로 산출된다. 19세기 이전에는 0.9~
1.0자가 다수를 차지하는데, 19세기에는 1.2자가 다수를 점하여 19세기에 들어서 좀 더 넓은 풍판을 사용하는 경향이 일부 확인된다.
풍판의 두께는 30~45㎜로 나타나는데, 영조척으로 환산 하면 1.0~1.5치로 산출된다. <표 4>에서 보듯이 시기별로 미세하지만 점차 두꺼워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풍판의 최대 길이는 3-1절에서 언급하였듯이 후대로 내려갈수록 점차 길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솔대는 풍판 이음부가 노출되지 않도록 감싸주는 부재 이다. 단면은 대부분 모죽인 형태로, 풍판부에 율동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솔대의 너비는 60~45㎜로 나타나는 데,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2~3치로 산출되고, 춤은 30~
65㎜로 나타나는데,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1~2치로 산출 된다. 시기별로 보면 19세기 후반의 솔대 규격이 이전보
다는 약간 커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4. 풍판부 확장의 요인과 대응, 그리고 그 의미
4-1 미장 벽의 축소화 경향
풍판부의 수직·수평적 확장은 정자각의 입면에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하여 풍판과 중인방 간의 관계를 <표 7>
과 <그림 7>를 통해 보면, 풍판부의 최하부 지점과 중인 방 윗면 간의 차이가 후대로 내려갈수록 점차 좁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영릉 정자각(1622)의 경우 그 차이가 957㎜이었는데, 가장 늦게 중건된 건원릉 정자각(1870)의 경우 125㎜로 줄어들어 현격한 차이가 확인된다. 이와 함 께 중인방의 위치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차 높아지는 것도 확인되는데, 초석 윗면 기준 중인방의 윗면까지 높 이는 영릉 정자각의 경우 1,480㎜인데, 건원릉 정자각은 2,046㎜로 566㎜ 만큼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풍판부와 축중방의 기능과 밀접하게 관 련된다. 풍판부의 설치 목적은 측면 가구와 벽체를 빗물 로부터 보호하는 것인데, 이러한 목적에 부합되도록 미장 벽체의 노출 부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풍판부의 면적을 확대한 것이다. 한편 중인방의 위치를 상승시킨 이유는 미장 벽체의 면적을 줄이면서 외기(外氣) 노출에 상대적 으로 견고한 축중방의 면적을 확대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풍판부의 확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정자각의 입면 상
No. 능 호 시기 입 사 목 횡 사 목 풍판 수량 솔대 수량
열 너 비 춤 행 너 비 춤 정 면 측 면 총 량 정 면 측 면 총 량
1 영릉 1622 1 120 105 3 90 105 24 30 84 23 29 81
2 익릉 1680 3 180 115 3 115 115 24 32 88 25 33 91
3 의릉 1724 1 150 150 3 90 150 28 6 100 27 37 101
4 헌릉 1748 3 120 90 3 90 120 28 30 88 29 31 91
5 홍릉 1757 - - - 3 80 110 26 34 94 27 35 97
6 원릉 1776 1 120 114 3 115 120 18 26 70 19 27 73
7 현릉원 1789 1 120 120 3 100 120 30 40 110 31 41 113
8 건릉 1821 7 115 120 3 90 90 26 42 110 27 43 113
9 경릉 1843 7 150 90 4 90 100 26 34 94 27 35 97
10 수릉 1855 7 125 90 3 90 125 22 28 78 23 29 81
11 인릉 1856 7 120 105 4 90 105 20 32 84 21 33 87
12 예릉 1864 7 120 90 3 90 120 20 32 84 21 33 87
13 휘경원 1864 7 105 95 3 95 105 20 28 76 21 29 79
14 건원릉 1870 7 190 100 4 90 100 22 26 74 23 27 77
표 6. 정자각 우측면 풍판부의 구성 부재 규격-2 (단위: ㎜)
영릉 정자각(1622) 익릉 정자각(1680)
선릉 정자각(1706) 홍릉 정자각(1757)
건릉 정자각(1821) 건원릉 정자각(1870) 그림 7. 정자각 우측 풍판부의 입면 변화
의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다. 첫 번째는 풍판부의 형태가 점차 곡률이 큰 형태로 곡선화하는 것이다. <표 7>에서
곡선부 높이는 풍판부의 양끝단의 풍판 최저 지점에서 풍판부 중앙 최저 지점까지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인데, 수치가 작을수록 풍판 곡선이 직선에 가깝고, 클수록 곡 률이 큰 곡선을 띤다. 일부 예외적인 수치를 제외하면 영 릉 정자각은 269㎜로 직선에 가까운 곡선인데, 19세기 후 반인 예릉 정자각(1864)은 1,251㎜로 곡률이 센 곡선으로 풍판부의 의장성이 강화됨을 알 수 있다. 휘경원 정자각 (1864)을 보면 풍판부의 곡선이 박공 단부까지 이어져 풍 판부 전체적으로 통합된 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는 데, 이러한 모습은 19세기 후반 정자각에서 유사하게 나 타난다.
인릉(1856) 예릉(1864)
휘경원(1864) 건원릉(1870) 그림 8. 19세기 후반의 정자각 풍판부 형상 No. 능 호 시기 기단 내밀기(尺) 도리 뺄목
길이(尺)
풍 판 중 인 방 벽 체 높 이
곡선부 높이 기둥 길이 풍판~중인방 중인방 높이 상부 (A) 하부 (B) B / A 1 영릉 1622 1,140(3.6) 1,020(3.2) 269 3,027 957 1,480 1,320 1,295 0.98 2 익릉 1680 1,320(4.2) 1,230(3.9) 521 3,570 1,162 1,507 1,703 1,272 1.34 3 의릉 1724 1,470(4.7) 785(2.5) 818 3,456 429 1,881 1,610 1,239 0.77 4 헌릉 1748 1,220(3.9) 980(3.2) 580 3,054 45 1,845 1,566 925 0.59 5 홍릉 1757 1,350(4.4) 1,080(3.5) 448 3,296 574 1,790 1,240 1,610 0.59 6 원릉 1776 1,080(3.5) 1,230(4.0) 240 3,354 595 1,760 1,513 1,270 0.84 7 현릉원 1789 1,050(3.4) 1,250(4.1) 772 3,125 610 1,648 1,315 1,117 0.85 8 건릉 1821 1,120(3.6) 930(3.0) 1,100 3,060 380 1,690 1,393 965 0.69 9 경릉 1843 920(3.0) 930(3.0) 414 3,230 700 1,795 1,373 1,075 0.78 10 수릉 1855 945(3.1) 955(3.1) 891 3,190 449 1,730 1,366 938 0.69 11 인릉 1856 1,120(3.7) 931(3.1) 894 3,161 240 1,864 1,537 960 0.62 12 예릉 1864 951(3.1) 828(2.7) 1,251 3,162 200 1,832 1,495 1,038 0.69 13 휘경원 1864 960(3.1) 975(3.2) 1,205 3,248 25 1,888 1,463 1,020 0.70 14 건원릉 1870 1,000(3.2) 930(3.0) 1,167 3,285 125 2,046 1,803 599 0.33
※ 자(尺) 치수는 <표 4>의 측면 주칸 길이를 완척으로 나누어 산출한 영조척으로 계산한 값임. 풍판~중인방은 풍판부 최하부와 중인방 윗면 간 차 이, 중인방 높이는 초석 하부에서 중인방 윗면의 높이, 벽체 높이 중 상부는 창방 하부에서 중인방 윗면까지, 하부는 용지판 윗면에서 고막이석까지임.
표 7. 정자각의 입면과 측면 가구 변화
두 번째는 중인방의 위치 조절에 따라 측면과 후면 벽체에서 축중벽과 미장 벽의 면적 변화이다. 축중방 기 준 미장 벽의 높이 비를 보면, 17세기의 경우 0.98~1.34 로 나타나고, 18세기에는 헌릉 정자각을 제외하면 0.77~
0.85이며, 19세기에는 0.33~0.78로 나타나 후대로 내려올 수록 미장 벽의 면적이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1870 년에 중건된 건원릉 정자각의 경우 미장 벽의 높이는 축 중방에 비해 1/3에 해당하여 면적이 대폭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풍판부의 확장과 연동된 결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장 벽 면적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이 조선 후기에 지속된 것과도 연관된다. 예를 들어 정전 측면 합 량 하부에 익공과 결합한 인방 부재인 화인방을 1단에서 2단으로 확대하여 미장 벽체를 장방형화하였고, 19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장화반이 등장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정전 측면 합량 상부를 미장 벽에서 판벽으로 대체하였 고, 19세기 후반에는 축중방 부위 내벽도 판벽을 설치하 였다. 이러한 미장 벽체의 축소는 유지관리 측면에서도 유리하고, 시공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 다.28) 따라서 미장 벽의 면적 축소는 이러한 경향과 맞 물려 일어난 현상임을 알 수 있다.
4-2. 지붕 측면부 하중 증가에 따른 가구와 입면의 변화 풍판부의 확장은 지붕 측면부 하중을 증가시키므로 이 에 따른 측면 가구부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했다. 지붕 측 면부의 고정하중은 풍판부와 지붕 하중으로 구분할 수 있 다. 풍판부는 측면 칸의 도리, 뜬창방, 집우사 등에 결구 되거나 고정되는데, 그중 주요 구조부인 도리는 풍판부의 하중을 하부 구조로 연결하는 지점에 해당하여 응력이 집 중된다. 이와 관련하여 측면부의 도리 뺄목 길이와 풍판 부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도리 뺄목 길이는 <표 7>과 같이, 건릉 정자각(1821) 을 기점으로 변화가 확인된다. 건릉 정자각 이전의 도리 뺄목 길이는 785~1,250㎜인데, 이후 정자각은 828~975
㎜로 줄어들어 19세기 전후로 변화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19세기 이전 정자각의 도리 뺄목 수치를 보면 3~4자로 계획하였음29)을 알 수 있는 데, 19세기에는 3자 이하로 도리 뺄목 길이를 줄여 하중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리 뺄목을 줄이고자 한 것은 지붕 하중을 감소시키
28) 이상명, 앞의 논문, 358~359쪽
29) 의릉 정자각(1724)은 2.5자(尺)로 매우 작은 수치인데, 예외적인 경우로 보인다.
고자 한 부분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조선후기 왕릉 정 자각에서 기와는 모두 대와(大瓦)을 사용하였다.30) 기와 규격은 변화가 없었지만, 19세기 이전 도리 뺄목 길이가 3~4자였던 것을 19세기 이후 3자로 줄임으로써, 최대 1 자 정도의 지붕 하중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풍판부의 면적이 증가하더라도 19세기 이후 도리 뺄목 은 예릉 정자각에서 2.7자로 줄인 것으로 제외하고는 3자 정도를 유지한다. 이러한 경향은 기단 내밀기와도 연관되 는데, <표 7>에서 보듯 기단 내밀기의 수치 또한 후대로 내려올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는 4.2~4.7자이지만, 19세기 후반에는 인 릉 정자각을 제외하면 3.1~3.2자로 도리 뺄목 길이와 유 사한 수치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측면 기단의 길이가 3자 이하가 되면 건물 규모에 비해 너무 작아져 미적인 부조 화가 발생하고, 보행도 어려우며 초석과도 너무 인접하여 시공도 어렵다.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3자 이하 로는 줄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단 내밀기 의 한계치로 인해 도리 뺄목 길이도 의장적인 측면에서 3 자 이하로 줄이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으며, 기능적인 측 면에서도 도리 뺄목이 너무 짧으면 우수 등 외기를 막는 풍판부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도리 뺄목 길이는 3자를 최소치로 설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4-3. 풍판부 확장의 의미
조선후기 왕릉 정자각에서 풍판부는 점차 확장되는데, 19세기를 기점으로 확연한 변화가 나타난다. 풍판부 확 장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외기로부터 측면부를 보호하기 위해 그 범위를 넓혀간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 자각에서 풍판부의 확장은 개별적인 현상만은 아니었다.
풍판부의 확장과 미장 벽의 축소가 동시 과정으로 일어 난 것이다.
미장 부위는 전통건축에서 가장 수리가 많이 일어나는 곳 중 하나이다. 따라서 미장 벽체의 면적을 줄이고자 하 는 노력이 조선후기 정자각에서는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풍판부의 확장은 미장 벽의 노출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 한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정자각을 계획한 도편수는 이에 그치지 않고 미장 부위도 최소화하는 동시에 외기 노출 에 유리한 축중방의 면적을 증가시켜 그 효과를 증대시 켰던 것이다.
풍판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야 했다. 첫 번째는 확장된 풍판을 안정적으로 고정할 수 있도록 풍판 받이재의 강화가 필요하였다. 이에 풍판사목 30) 이상명, 앞의 논문, 300~3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