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 유고슬라비아의 종교, 문화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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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 유고슬라비아의 종교, 문화적 특징

1. 발칸유럽은 왜(?)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 불려질까

선사시대 이래로 발칸반도에는 수많은 여러 부족 민족들(일리리안, 다키안, 트라 키안…)이 자신들의 부족 국가들을 형성하며 거주하여 왔었다. AD 1세기를 전후로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발칸유럽의 원주민들은 로마의 영향력 하에서 로마 문화에 융화되어 갔다.

하지만 발칸반도는 395년 로마제국이 동과 서로 분리된 이후 15세기 전까지 약 천년의 세월 동안 문화적으로는 동양과 서양문화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서로 마 교회, 로마 교회)과 정교(동로마 교회,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서로 복잡하게 혼재 되는 특징을 보여 왔다(1054년 크리스트교 종교 대분열).

이후 15세기를 전후로 소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오토만 터키의 발칸 지배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오토만 터키의 발칸 지배는 러터전쟁 이후 맺 어진 1878년 산 스테파노 조약(3월)과 베를린 조약(6월)에 의해 이 지역 민족들이 독립하기 이전까지 지속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발칸유럽은 터키에 의해 동양적 문화 요소가 급속도로 확산되게 되었고, 종교적으론 기존의 크리스트교(가톨릭과 정 교) 외에도 이슬람교가 유입되어 현 발칸유럽 지역에 가톨릭, 정교 그리고 이슬람교 가 서로 혼재되어 나타나는 배경을 형성하게 된다.

✪ 종교를 기준으로 한 발칸유럽의 문화권 분류 (주요 종교가 50% 이상을 기준으로 함)

❶ 가톨릭 문화권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❷ 정교 문화권 –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❸ 이슬람 문화권 – 알바니아

❹ 정교와 이슬람 혼재 문화권 – 마케도니아

❺ 가톨릭, 정교, 이슬람 혼재 문화권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2. 크리스트교의 역사와 발칸유럽으로의 전파

1) 예수의 활동 당시 세계는?

예수에 대한 정확한 출생 년도와 사망 년도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 트교가 예수의 탄생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모두들 동의하고 있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국제적 상황은 로마의 최대 전성기로 삼두 정치에 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의 지배력 아래 로마 공화정에서 제정 로마시대로 넘어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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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였다. 로마 공화정 말기 로마의 영토를 확대하고 그 지배권을 세계 전역으로 확장시켰던 율리어스 카이사르(BC 100-BC 44)가 공화정을 짓밟는다는 이유로 암살 된 이후, 로마는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안토니우 스, 그리고 지방의 호족 레피두스를 중심으로 삼두 정치가 시작된다. 카이사르의 유 언에 따라 양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재위: BC 27-AD 14)는 그 칭호를 ‘가이우스 율 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로 개칭한 후, BC 33년 레피두스를 격파한 후 이집 트군과 연합한 안토니우스와 대립하게 된다. 이어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 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한 후, 다음해엔 마침내 이집트 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옥타비아누스는 BC 28년 원로 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자)’란 칭호를 받았고, 곧 이어 로마 제정시대가 시작 된다. 예수가 탄생할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세수를 확보하고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 해 자신의 지배 지역에 호구조사 칙령을 발표하였고(기원전 6-7년으로 추측),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은 헤롯왕(BC 37-BC 4)의 통치가 끝나고 로마 총독에 의한 직접통치 하에 놓이게 된다.

크리스트교의 믿음에 따른 여러 기적과 놀라운 행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기존 유대교의 전통과 질서를 벗어난 언행으로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감을 샀었고, 마침 내 체포되게 된다. 로마 지배 하에서 사형 집행권을 지니고 있지 않던 유대교 지도 자들은 로마의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를 반(反)로마운동의 지도자로 소송해 사형을 요청하였고, 이어 예수는 골고다(‘해골산’이란 뜻) 언덕에서 사망하게 된다(30년 4월 7일로 추정).

2) 로마 제국의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이유는?

예수의 사망 이후에도 크리스트교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 등 예수 제자들의 활발 한 선교 활동으로 인해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하지만,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크리스트교의 핵심 교리인 유일신 사상과 메시아니즘 등이 로마의 사회질서와 체제 에 부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속된 로마의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그 중 가장 많 은 박해로 역사 속에 기록된 시기는 네로 황제 시기(로마의 제 5대 황제, 재위 54-68)이다. 네로는 64년 7월 로마에 대형 화재가 발생해 6일 동안 로마시의 1/3이 사라지게 되자,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민란의 조짐을 잠재우고자, 대형 화재의 원인을 크리스트교 교도들의 소행으로 간주한 후 수 차례의 박해를 통해 사도 베드 로와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초기 크리스트교 신도들을 사형에 처하였다. (당시 박해 에 관련한 자료로는 <타키투스의 연대기>를 참조).

3) 크리스트교가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달마티아 출신으로, 로마를 4개의 행정 권역으로 나누어 정제와 부제를 통해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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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군인황제시대가 도래하자 로마는 커다란 사회적 혼란과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 세르비아의 니쉬 출신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로마에 근거지를 둔 막센티우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황제 로 즉위(재위, 부제: 306-310, 정제: 310-337)하였고, 이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 해 크리스도교 박해에 대한 금지를 선포하고 로마내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자 노 력하였다. 이어 콘스탄티누스는 급변해가던 경제적 흐름을 따라 로마의 제 2도시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을 새로 건설하였다. 그 는 329년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한 후, 뒤 이어 330년 크리스트교 의식에 따라 콘스 탄티노플을 로마의 새로운 수도로 천명하게 된다. 로마시와 대등한 위치로 격상된 콘스탄티노플에는 로마 신전의 건축이 불허되었고, 오직 크리스트교 교회 설립만이 인정됨에 따라, 이때 이후 크리스트교는 로마 전역에 급속한 확산과 발전을 이루게 된다.

4) 크리스트교의 분열은?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에 따라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이후 초기 크리 스트교는 로마 제국의 보호와 여러 혜택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크리스트교 사제들은 여러 교회들 중 크리스트교의 3대 교회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교회를 확정짓고, 예루살렘 교회에게 3대 교회에 버금 가는 권위를 부여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선 로마의 새로운 수도로 건설된 콘스탄티노플내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로마 교회 다음 서열로 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로마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 의 강력한 반대를 낳았는데, 그러한 배경은 새로운 로마로서 성장하고 있는 콘스탄 티노플에 대한 로마 교회의 경계와 제 2교회로서의 지위를 뺏기게 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불만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러한 다른 교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51년 열린 칼케톤 공의회에선 5개의 대주교 관구(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 옥 그리고 예루살렘)를 그 순서에 따라 권위를 부여한다는 교회령이 확정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성장은 동․서로마 분리 이후 서로마의 멸망과 뒤 이은 로마 교회의 침체,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일한 로마 제국으로 남겨진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려짐)의 영향력이 커진 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 크리스트교의 여러 문제는 각 대주교 관구의 사제들이 모여서 진행한 여러 공의회 등을 통해 해결하여 갔다. 여러 논쟁들 중 현대 크리스트교에까지 그 영향 을 미치고 있는 주요 논쟁들은 4세기의 ‘성삼위 일체 논쟁’, 5세기 중엽에 일어난

‘양성론과 단성론 논쟁’, 그리고 ‘성상 사용 문제’를 둘러싼 8세기 말과 9세기 초사이 의 교회 논쟁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교회 교리를 둘러싼 주요 논쟁들은 주로 각 대교구간의 주도권 싸움에서 기인하게 된다.

동․서로마의 분리는 크리스트교의 분열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실제,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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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교회의 분열은 정치적 분열과 더불어 진행되게 된다. 희랍어와 라틴어가 서로 통용되는 등, 양대 지역(동․서로마)에 대한 선교 활동이 자유로웠던 초기 크리스트 교 시기와는 달리 동·서로마 분리 이후 서로마 멸망은 양 지역 교회간 교류의 단절 을 낳게 된다. 이후 비잔틴 제국의 황제이자, 교회의 수장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 제(재위 527~565)는 정치, 종교적으로 다시 한번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고자 서로마 일부 지역을 탈환하고 그 자리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주력하 였다. 반면 서로마 지역에선 교회의 포교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세속 국가의 비호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로마 교황인 레오 3세에 의해 당시 서유럽의 새로운 패권 국가로 등장한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카롤루스 혹은 카를 대제 라고도 불림, 재위: 768~814)가 800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비 잔틴 제국은 한 동안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812년에서야 승인), 서로마 멸망 이후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영향권 하에 눌려 지냈던 로마 교회는 이때 이후 본격적인 독 자 행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크 제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로마 교회는 그 동 안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영향 하에 있던 여러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이러한 프랑크 제국의 영토 확장과 로마 교회의 강력한 교세 확장은 곧 이어 비잔 틴 제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심각한 갈등을 불러오게 하였다. 실제 당시 양대 교회는 양 제국의 정치적 단절에 따라 서로마 지역에서는 희랍어 그리고 동로마 지 역에선 라틴어 사용자가 드물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초기 크리스트교를 중심으 로 한 문화적 일치성을 상당 부분 상실 시켰으며, 또한 종교적 분열에도 커다란 영 향을 미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크리스트교의 분열은 500년 간격으로 크게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분열은 5-6세기에 일어났는데, 당시 동․서로마의 분리 이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교회 주도권을 둘러싼 양대 지역(동․서 로마) 교회간, 즉 로 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두 번째 분열은 비잔틴 제국 의 쇠락 속에 기울어져 가던 콘스탄티노플 교회(훗날, ‘정교’로 발전)와 프랑크 제국 의 비호 아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로마 교회(훗날, ‘가톨릭’으로 발전)가 교회 주도권 다툼 속에 서로 파문을 하면서 일어난 1054년 교회 대분열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분열은 서유럽에서 로마 교회를 모태로 발전한 가톨릭이 중세 유럽의 모든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 면죄부 사건을 계기로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남으로써 발생한 신교와 구교로의 분열을 들 수 있다.

1054년 교회 대분열이 선언된 이후 크리스트교의 5대 대교구 관구 중 하나였던 소아시아의 안디옥 교회가 1098년, 그리고 1099년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이슬람 세 력의 침략에 의해 넘어가게 된다. 뒤 이어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한다는 이유를 들 어 로마 교황의 권위를 세우려 했던 십자군 원정 중, 1204년에 일어난 제 4차 십자 군 원정은 더 이상 양대 교회가 화합 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사태를 이끌어가게 된다. 제 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들은 로마 교황의 묵인 속에 이슬람 군대와 싸우는 대신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자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세워져 있던 콘스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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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플을 함락하고 약탈하여, 라틴 제국(1204~1261)을 건설하였다. 이 사건은 결과적 으로 크리스트교의 한 축을 형성하였던 비잔틴 제국의 급격한 쇠퇴 그리고 양대 교 회간 불신과 분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5) 크리스트교는 발칸유럽에 어떻게 전파되었을까?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간의 교세 확장 경쟁은 주로 당시 동․서로마의 분기점이자 양대 교회의 접합지역에 해당하였던 발칸유럽을 주 무대로 이루어지게 된다. 동․서로마의 분리선은 현재 발칸유럽의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사바-다뉴브- 우나강을 경계로 동․서로 나뉘어졌다. 따라서 6-7세기 무렵 발칸유럽으로 이주해 들어온 후로 남슬라브족은 이러한 양대 교회의 갈등 속에서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여 야만 했다.

크리스트교가 남슬라브족들에게 전파되기 이전, 발칸 지역의 남슬라브족들은 원 시 종교와 신앙적 특성 그리고 지리적 위치에 따라 여러 형태의 종교적 특징을 지 니고 발전해 있었다. 그 대표적 형태로는 가족신으로서 조상을 숭배하는 것, 농경민 족의 특징에 따라 농업과 관련한 수호신, 즉 태양, 대지, 천둥을 숭배하는 것, 그리 고 자연 정령인 숲 또는 물을 숭상하는 것이었다.

발칸유럽 내 남슬라브족들 특히 정교 지역의 여러 슬라브족들에게 크리스트교가 전파된 계기는 863년 비잔틴 황제의 명을 받아 모라비아 공국 내 크리스트교 포교 와 행정 체계 수립을 위해 떠났던 솔룬(Solun, 오늘날 그리스의 데살로니까) 출신의 콘스탄틴 키릴(826-869)과 메토디우스(815-885)형제 그리고 그 제자들에 의해서였 다. 중세 가장 뛰어난 문법 학자중 하나인 키릴과 행정, 정치, 외교 분야에 능했던 메토디우스는 자신들이 고안한 슬라브 문자와 언어를 기초로 4대 복음서(마테, 마 가, 누가, 요한)를 제작해 크리스트교 가르침을 전파하였고, 비잔틴 제국의 행정 체 계를 신생 공국에 도입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모라비아 에서 일어난 권력내분의 결과 실패로 돌아갔다. 모라비아 공국은 건국 70년 만에 공국 내 권력 투쟁과 동프랑크의 공격으로 멸망하였고, 뒤 이어 등장한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 등은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로마 교회의 영향력 아래 크리스트교 로 개종하게 된다.

모라비아 공국의 내분과 프랑크 성직자들의 압력을 피해 발칸유럽으로 피신해 온 클리멘트와 나움 등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마케도니아 오흐리드에 교회 를 설립해 슬라브 문자(키릴의 업적을 기려 이후 ‘키릴 문자’로 불려짐)와 언어를 보급하고 남슬라브인들을 대상으로 한 크리스트교 포교 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이 에 따라, 주변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여타 발칸 지역으로 확대되어 이들 민족들의 크리스트교로의 개종, 즉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교리에 바탕을 둔 정교를 신봉하게 된다. 훗날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권위에 따른 발칸유럽으로의 크리스트교 전파는 10세기 말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에까지 전파됨으로서 오늘날 발칸유럽을 비롯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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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 그 주변 국가들이 강력한 정교 국가가 되는 배경을 형성하였다.

반면 발칸유럽 내 국가들 중 로마 교회의 신봉자였던 프랑크 왕국에 속한 크로 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8세기 중엽 이후 로마 교회의 영향 하에서 가톨릭으로 개종 하게 된다. 또한 지리적 험준함으로 인한 주변 지역과의 고립 그리고 양대 교회의 접합점에 위치해 있어 잦은 교회 세력권 다툼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신앙심이 약하 였던 보스니아내 남슬라브인들은 12세기 말 이후 양대 교회의 특징을 지닌 ‘보스니 아 교회’를 설립해 신봉하였다.

발칸유럽 내 여러 민족들 특히 남슬라브족들에게 크리스트교가 전파된 이후 크 리스트교는 기존의 남슬라브족 토착 신앙과 융화하여 발전하였고, 이 지역에서 이 후 남슬라브족 중세 국가들이 출현한 이후에도 국가 내 민중들을 단합시키고 왕국 의 발전을 이루는데 주요 매개체로서 크리스트교가 장려되게 된다. 크리스트교와 남슬라브족 토착신앙과의 융화는 남슬라브족 내 민족의 영웅들이나 성인들이 기독 교 성인과 서로 혼재되어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을 보이거나, 크리스트교 방식에 따 라 조상신을 모시는 특이한 양식으로 발전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6) 로마교회(가톨릭)는 무슨 이유로 분열되었나?

발칸으로 이주해 부족국가를 수립한 남슬라브족들의 계속된 세력 확대로 어려움 을 겪고 있던 비잔틴 제국은 1453년 오토만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따라 마침 내 붕괴되게 된다. 오토만 터키에 의한 비잔틴 제국의 붕괴 그리고 뒤 이은 발칸유 럽 정교 신봉 국가들의 몰락은 로마 교회와 더불어 크리스트교의 양대 축으로 인정 되어 왔던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후 비잔틴 제국과 콘스탄티노 플 교회의 권위는 정교 국가로 강력히 무장한 러시아의 모스크바 교회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따라 로마를 제 1 로마, 콘스탄티노플을 제 2의 로마라 칭한다면, 발칸유럽의 정교 국가들이 이슬람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500여년 가까이 정교의 정통성을 이어 왔던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라 부르고 있는 이유이 기도 하다.

발칸유럽에서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즈음, 로마 교회는 중 세 유럽에서 최대의 권위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 교회의 이러한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로마 교회는 계속된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인한 교황권 추락과 절대 왕권의 도전에 의해 위기에 봉착하였고, 뒤 이어 면죄부 사건 에서 비롯된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에 의해 교회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1세기 말에서 15세기 중엽까지 총 8회 이상 진행된 십자군 원정은 성지인 예루 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교황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교황의 권위를 높이 고자 출전했던 십자군 원정은 계속된 실패 속에, 초기 정신조차 변질되어 교황권의 급격한 추락을 가져오게 된다. 교황권의 계속된 추락 속에 영국의 헨리 8세(재위:

1509-1547)를 비롯한 유럽의 절대 왕권 국가들은 왕권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교황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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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도전을 확대해 나갔다. 로마 교회의 분열을 가져 온 최대 계기는 독일에서 의 면죄부 판매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당시 독일은 절대 왕권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를 구성하고 있던 주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여러 소규모 도시 국가로 흩어져 서로 경쟁하고 있었던 관계로 교황청의 수탈을 막아 줄 방어막 이 부재하였다. 당시 교황청은 로마 바티칸 궁전의 신축 자금 마련에 고심하고 있 었고, 이를 위해 독일 내에서 대규모로 면죄부를 팔아 자금을 충당하는 것을 허락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면죄부 판매 사건은 루터 등 뜻있는 성직자들과 지식인 그리고 교황청의 수탈에 시달려 왔던 여러 도시들에서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517년 루터는 독일에서 판매되는 면죄부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였 고, 이 반박문은 당시 발달된 인쇄기술에 힘입어 곧 이어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퍼 져 종교개혁 운동의 발단이 되게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은 교황이 나 주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믿음과 성경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이념 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후 수차례의 종교 전쟁이 일어났고, 30년 종교 전쟁을 끝으 로 로마 교회는 마침내 신교(오늘날 ‘개신교’)와 구교(가톨릭)로 분리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7) 발칸유럽에 이슬람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나?

14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은 스테판 두샨 왕 시절에 들어와 날로 강력해져 가던 세르비아의 공격으로 국가 존립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결국, 비잔틴 제국은 소아시 아의 새로운 패권 국가로 등장하고 있던 오토만 터키에게 비잔틴 제국을 도와 세르 비아 군대를 격퇴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고, 오토만 터키는 이를 계기로 1345년 보 스프러스 해협을 넘어 본격적인 유럽 진출을 이루게 된다. 유럽으로 들어온 터키는 발칸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세력권을 확장시켜 갔다. 특히 오토만 터키군 대는 세르비아군을 중심으로 한 발칸유럽의 기독교 10만 연합군을 1389년 6월 코소 보에서 대패시킴으로서, 발칸유럽의 실질적인 패권 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1396년 헝가리군을 주축으로 한 서유럽 연합군이 오토만 터키군에 의해 대패하 고, 뒤 이어 오토만 터키군은 헝가리의 전 지역을 유린하였다. 1402년 몽고군과의 앙카라(Ankara, 현재 터키 수도) 전투에서 대패한 후 한 동안 발칸유럽에 대한 진 출을 참아야 했던 오토만 터키는 1413년 다시 재건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1444년 로마 교황의 주도하에 헝가리와 발칸유럽 내 국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규모 십 자군(일명 바르나Varna 십자군으로 불림)이 비잔틴에 집결, 오토만 터키군과 일전 을 겨루었으나 역시 대패하고 만다. 1448년 제 2차 코소보 전투를 승리한 오토만 터키는 이후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고, 뒤 이어 1463년 보스니아를 침공해 들어갔다.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는 오토만 터키군에게 점령당하였고,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의 상당수는 당시 사바강 북쪽의 합스부르그 제국의 영토로 도망쳐 들어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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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만 터키의 발칸유럽 지배는 이후 러터전쟁의 결과 맺어진 1878년 산스테파 노와 베를린 조약 때까지 이어지게 되며, 이 기간 동안 특히 보스니아와 알바니아 지역엔 상당수의 무슬림화가 진행되게 된다. 오늘날 보스니아와 알바니아 무슬림이 형성된 배경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8) 정리하며…

동․서로마의 분기점, 동․서교회의 접합점에 위치해 있었던 발칸유럽은 중세를 거치게 되면서 발칸유럽 내 새로운 이슬람 패권 국가로 등장한 오토만 터키의 종 교, 문화적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발칸유럽을 경계로 이루어진 크리스트교의 분 열, 이슬람 국가인 오토만 터키의 약 500여 년간의 지배는 오늘날 발칸유럽을 ‘종교 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즉 이러한 모자이크는 어느 한 순 간의 역사적 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2000여년의 역사 속에 발칸유럽 내 민중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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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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