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일_2019.04.10 심사기간_2019.05.01-14 게재확정일_2019.05.22
‘구망 (救亡)”과 “계몽”으로 접근한 중국 다큐멘터리사진 약사
A Brief History of Documentary Photography in Chinain the Contextof
“Salvation
”and
“
Enlightenment
”김광영_중국·연변대학교 미술대학교
Guangyong Jin_College of Fine Arts in Yanbian University, China
차례 1. 서론
2. “구망”과 “계몽”으로 보는 중국 다큐멘터리사진 2.1. 다큐멘터리사진 명칭과 그 수용사(史)
2.2. “계몽”과 “구망” 속에서 사진일반과 초기의 다큐멘터리사진 2.3.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전유된 다큐멘터리사진
2.4. “문화대혁명” 이후 다큐멘터리사진과 계몽의 재(再)점화 2.5. 현대다큐멘터리사진과 작품일별
계열 1. 사회이슈형 다큐멘터리사진 계열 2. 미시서사형 다큐멘터리사진 계열 3. 전통문화형 다큐멘터리사진
3. 결론
참고문헌
‘구망 (救亡)”과 “계몽”으로 접근한 중국 다큐멘터리사진 약사
A Brief History of Documentary Photography in Chinain the Contextof
“Salvation
”and
“
Enlightenment
”김광영_중국·연변대학교 미술대학교
Guangyong Jin_College of Fine Arts in Yanbian University, China
요약 This paper will observe the history of documentary photography in China from the perspectives of salvation and enlightenment. First of all, it will discuss the definition of documentary photography and its adaption in history. And then, it will answer how documentary photography was settled down in China, what kind of processes documentary photography has been experienced, and what kind of aspects it has presented in history. It will also contrast the histories of documentary photography and of “documentary photography”, which transforms into journal photography(or political photography). In doing so, the history of documentary photography in China could be studied in the relation between metanarrative and micronarrative. Besides, documentary photography will be discussed from the perspectives of salvation and enlightenment. The discussion would be limited in the specific historical and social context, ranging from 1980s and 1990s, because the documentary photography after 1980s and 1990s is the extension of the documentary photography from the 1980s and 1990s. Based on the belief that documentary photography could record the historical facts “correctly”, documentary photography has well developed in China. The study could reveal the senses of time and facts because of such specific context tangles with history, culture, and politics. Epistemologically speaking, the senses of time and facts would be changed with different ways of understanding things. In other words, the senses are also “subjective”. In conclusion, the semantic analysis of documentary photography is about how the artist perceives the historical facts. That is to say, the senses of “fact” and “document” are in-between “subjective” and “objective” perceptions.
Therefore, this paper aims to reconstruct the history of documentary photography in China from the epistemic perspectives of salvation and enlightenment. Considering that this paper is the first attempt to perceive documentary photography in China from the perspectives of salvation and enlightenment at home and abroad, it could be regarded as a poetic study.
본 연구는 중국의 다큐멘터리사진 역사를 “계몽”과 “구망(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함)”의 이중주로 살펴본 것이 다. 아울러 그것을 몇개 덩어리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는데, 1) 먼저 다큐멘터리사진의 명칭의 함의와 그 수용사 를 논한 다음 2) 중국적 상황속에서 다큐멘터리사진이 어떻게 정착 되었으며 3) 격동의 시대에 어떤 역사적 과 정을 겪어왔으며 4) 현대다큐멘터리사진은 어떤 양상을 보여주는가가 그것이다. 아울러 본고는 다큐멘터리사진 과 저널리즘(정치보도)사진으로 전유된 “다큐멘터리”사진의 역사를 대비시키면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는 거대 서사와 유사미시서사의 관계로 중국 다큐멘터리사진의 역사를 깊이 있게 분석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구망(救 亡)”과 “계몽”의 관계로 관련 작품을 분절한 것은 다큐멘터리사진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적 지평에 놓기 위함 이다. 본고는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를 연구범위로 할 것인데 이는 지면의 한계이기도 하거니와 또 그 이 후의 다큐멘터리사진도 그것의 연장선에 서있기 때문이다. 기록성과 사실성을 중시하는 다큐멘터리사진은 중국 적 상황 속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시대성”과 “사실성”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다큐멘터리사진의 의미 분석은 예술가가 어떤 역사(시대)적 지평에 서서 사실을 어떤 시점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실성”과 “기록성”은 간(间) “주관”적인 것 만큼 간(间) “객관”적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연구자는 “구망”과 “계몽”이란 시대적 기후(에피스테메)로 중 국 다큐멘터리 사진약사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끝으로 국내외적으로 중국다큐멘터리사진을 “구망”과 “계몽”
으로 분석한 논문은 처음일 것이니 본고는 시론적 연구에 속할 것이다.
중심어
다큐멘터리사진 저널리즘사진 중국근현대문예 계몽
ABSTRACT Keyword
Documentary photography Journal photography Modern and Contemporary Art Movement in China Enlightenment
1. 서론
본 연구는 다큐멘터리사진을 통하여 중국사진역사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1)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본문은 몇 개의 덩어리로 구성하였는데 이는 다큐멘터리사진이 중국에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역사적 궤적을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분석하기 위 함이다. 중국의 다큐멘터리사진의 크게 두 개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중일전쟁 (1937년 “7.7 사변”)반발 이전과 개혁개방(70년대 말 80년대 초)이후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전쟁과 혁명의 수효에 따라 다큐멘터리사진이 저널리즘사진으로 전유되던 시기이다. 이러한 거대서사적인 내러티브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혁개방이후의 미시서사적인 다큐멘터리사진의 등장이 가능하다고 할 때 저널리즘사진에 대한 분석은 현대다큐멘터리사진의 지층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물론 다른 예술장르도 마찬가지지만 더군다나 다큐멘터리사진은 정치와 불가분하게 이런저런 연계를 맺을 수밖에 없듯이 개혁개방으로 인하여 새로운 유형의 다큐멘터리사진 창출을 요구받았으며(이런 점에서 역시 미시서사적인 양식을 띤 거대서사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이에 부응하여 다큐멘터리사진은 기존의 단일화를 벗어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다큐멘터리사진은 정치선전을 주요한 과제로 하였던 것에서 다큐멘터 리사진의 “본질적 역할”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다큐멘터리시진의 붐”의 시대라고 불릴 만치 많은 사진작가들이 등장해 기존과는 다른 작품들을 발표했고 이는 오늘까지 이어져 중국 사진의 하나의 큰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논의의 깊이를 위하여 “계몽”과 “구 망”이란 키워드를 사용할 것이다. 이는 다큐멘터리사진을 사회역학의 자장 안에서 읽기 위함 이다. 사족으로 여기서 “구망”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는 구한다.”는 의미에서의 “구(救)”와 “망 (亡)”의 합성어의 직역(중국어는 동사를 명사 앞에 놓음)이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구유한 한국도 일제치하에서 제일 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주제는 “광복”이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으 로 볼 때 본고의 주제는 한국독자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을 것이라고 연구자는 생각된다.
2.1. 다큐멘터리사진 명칭과 그 수용사(史)
중국의 대표적 사서인사해(辞海)에서 “다큐멘터리(纪实)”을 다음과 같이 뜻풀이하였다. 1)
“记”와 같이 기록의 뜻, 2) 실마리를 찾음, 3) 정리함, 4) 나이를 뜻하거나 세기의 뜻함, 5) 다큐멘터리영화와 다큐멘터리회화로서의 뜻.2) 여기서 다큐멘터리사진의 뜻과 연관되는 것은 1)과 5)일 것이다. 통상 중국어사전에서는 “다큐멘터리”을 1) 진실한 정황을 기록함(동사), 2) 진실한 정황을 기록한 문자적 기재(명사)로 사용한다.3) 즉 거짓이 아닌 진실한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남긴다는 뜻으로 쓰이는 셈이다. 사전적 의미로 “다큐멘터리사진”은 동사 적 명사, 즉 동명사인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에서 “Documentary”가 형용사의 경우에 “문서의” 혹은 “기록(자료)에 의한”
것이라면 명사의 경우에는 “기록물”이라는 의미이다. 1980년대 초 일부 사람들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사실주의 사진” 혹은 “현실주의 사진”이라고도 했으며, 중문판 미국 ICP사진백과전 서에서는 다큐멘터리사진을 “사실사진”으로 번역하면서 “문헌성 사진”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고 하였다.4) 참고로 다음 백과사전에서는 Documentary Photography을 “기록 사진”이라고 했다. 그럼 용어의 수용사(史)를 잠간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1980년대 초에는 다큐멘터리사진이 순수사진/纯摄影(Pure Photography), 직접사진/直 接摄影(Direct photography, Straight photography) 등 중역으로 두루 쓰이다가 그 뒤에는 스냅 쇼트(Snap Shot)의 뜻으로 “쾌조(快照, 빨리 찍는다는 의미에서)”, “조박(抓拍)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찍는다는 의미에서”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뜻으로 쓰이다가 왕혜민(王慧敏)이 미국에서 출판한 Documentary Photography라는 책을 소개하
1) 본고는 필자의 학위논문을 대폭적으로 수정, 보강하는 동시에 “구망”과 “계몽”이란 키워드로 다시 다큐멘터리사진의 역사를 읽은 것만큼이나 기존의 논문은 다만 참고적 밑그림으로 되었음을 밝힌다.
2) 辞海, 中华书局(中册), 1989, p.398.
3) 现代汉语规范词典, 语文出版社, 2008, p.618.
4) 夏放, 摄影艺术概论, 浙江摄影出版社, 2000, p.46 참고.
면서 처음으로 “다큐멘터리사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5)
둘째: 1984년에 편찬한 간명사진사전(简明摄影词典)에서는 다큐멘터리사진에 대해 “사진 예술의 한 장르로써 현실생활을 사실과 같은 명확한 기록과, 생활현상에 평론을 부가한 창작수 단이다. ... 사실주의 요소를 갖고 있다”6)고 해석했다.
셋째: 1993년 말 중국사진가협회에서 개최한 “사진이론 년말회의(摄影理论年会)”에서 처음으 로 다큐멘터리사진을 독립장르로 잠정 정의했다.7) 그 첫 번째 주장은 다큐멘터리사진을 예술 사진의 한 부류라고 인정하면서, 그 수법에 있어서 현실생활을 충실히 기록하고 현실에 관여하 는 것이라고 했다(사전적 정의와 거의 일치하다). 두 번째 입장은 다큐멘터리사진을 예술사진 에 귀납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하에, 사회를 반영하고 현실을 주도하며 ... “부정을 바로 잡으며 정의를 수호하는” 수단과 도구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들은 사물의 본래모습 으로 촬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우면서 촬영 중에 피사체에 관여하지 않고 인화할 때에도 암실조작을 하지 않는 것을 주장하였다(진실과 그 추구를 위한 구체적인 제작방식에 대한 주 목이다). 또 그 외 황소화(黄少华)는 다큐멘터리사진은 “진실한 현실적묘사로, 묘사대상에 대 해 주시와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사진예술형식”8)이라고 주장했다(독자의 수용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럼 다큐멘터리사진의 특점을 잠간 정리해보자.9)
첫째: 사회생활을 소재로 하며 표현하려는 대상에 대한 사진작가의 선명한 인식과 평가가 있어 야 한다(작가의 의식과 현실이 관계를 맺는 문제에 관한 것).
둘째: 다큐멘터리사진은 현장에서 스트레이트한 방법 으로 찍은, 말하자면 비(非)연출적 촬영방법만 허용한 다(현장에서의 프레임능력과 순간 판단능력에 대한 것). (일례로 호웅 콩 우트(Huynh Cong Ut)의 <전쟁 의 공포>는 “가감 없는 다큐멘터리(진실 된)특점으로 미국 내 반전고조를 일으키는 한 요소로 작동”하였다.
작품 1 참고)
셋째: 다큐멘터리사진작품은 예술성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다큐멘터리사진의 예술성은 예술의 다른 형식미와는 달라야하며 사진언어사용은 가급 적 완정해야 한다(형식적인 예술미와의 구분에 대한 것).
넷째: 다큐멘터리사진 작품은 개괄성을 필수로 하는데 그 “개괄성”은 주제에 대한 선택과 제련 을 말한다(다큐멘터리사진의 의미전달 명료성에 대한 것).
위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할수 있다. 사회생활의 진실한 모습을 기록함 에 있어서 “사실 그 자체”를 통하여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과 평가가 드러나야 하며, 선명한 의미전달을 위해서는 개괄적이면서 또 일반예술사진의 언어와는 다른 예술적인 언어가 추구 되어야 하는데 이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록성과 사실성과 시대성과 연유된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생활현장의 진실한 기록을 통하여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문제의 중핵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말하다”에 사회역사적인 기후와 맥락이 깊이 기입되어질 것이다. 이 시점이 또한 중국다큐멘터리사진역사분석에 “구망”과 “계몽”이 요청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2.2. “계몽”과 “구망” 속에서 사진일반과 초기의 다큐멘터리사진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먼저 “구망”과 “계몽”에 대하여 언급해보자.
근대사회는 계몽의 사회이기도 하다. 즉 인간이성의 능력을 믿고 그것을 사회구조 저변까지 확 산시킨 역사과정인 것이다.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세우고 세계를 탈마법화시키는 것이었다.
5) 會璜, <摄影 ․ 传播>, 镜间对话-與當代摄影师, 艺术理论家的对话, 吉林摄影出版社, 2003, p.77.
6) 胡鐘才, <纪实摄影>, 简明摄影辞典, 黑龙江人民出版社, 1984. p.13.
7) http://cpfd.cnki.com.cn/Article/CPFDTOTAL-XWSY199311001002.htm 2018년 11월 15일 검색.
8) 黄少华, <再谈记實摄影>, 中国摄影, 1993年 5期, p.3.
9) 林路, 跳出镜头的局限-文化现象與摄影方式漫谈, 中国工人出版社, 2000, p.192, 黄少华, 위의 논문, pp.3-6 참고.
<그림 1> 호웅 콩 우트, <전쟁의 공포>, 1973년.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 을 주인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 계몽의 프로그램은 세계의 탈마법화였다.10) 계몽이란 봉건 적 구습, 종교적 전통에 의한 무지, 미신, 도그마에 지배당했던 민중의 몽매를 이성에 비추어 밝히고 자유사상, 과학적 지식, 비판적 정신을 보급하고 인간의 존엄을 자각시키는 것이다11). 이성의 힘을 고양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이 서구의 근대적 사회 특점이라고 한다면 비서권의 근대성은 두 가지 뜻을 함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계몽”과 “구망”이다.
개발도상국들은 단순히 산업화된 지역보다 뒤떨어진 지역만은 아니다. 이들은 이전의 전통적 인 체제를 파괴하였던 서구 산업주의와의 접촉에 의해 만들어진 지역인 것이다. ... 12) 서구에 의해 주어진 근대 앞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근대는 권력이 되었고...13) 근대는 서구산업주의로 세계를 식민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의 관계 로 비서구권의 모더니티를 파악할 때 당연히 요청되는 것은 “구망”이다. 구망, 즉 “식민지로 전락되어가는(전락된) 나라를 어떻게 구하는가”의 문제가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다. 그러니까
“반(半)식민지, 반(半)봉건사회”였던 근대중국사회에 두 가지 역사적 과제가 주어지는데 그것 은 “계몽”과 “구망”이었던 것이다. 봉건적 전통사회와 결별하고 근대적 국가를 성공적으로 축 조하기 위해서는 계몽이 시급하게 요청되며(“몽매를 이성에 비추어 밝히고”), 동시에 근대적 국가건설을 위해서는 탈식민주의의 길 “구망”이 시급한 것이다. 타율적 근대화를 자율적 근대 화로 전환하는 문제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큐멘터리사진은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
중국 초기 사진의 발전은 사진관에서이다.14) 당시 기념사진의 형식은 도식적이었다.15) 아울 러 당시의 사진관은 기념사진뿐만 아니라 사건사진과 풍경사진 그리고 연극사진도 담당했다.
순친왕(舜亲王)이 북양함대를 사열하는 장면이나 흠차대신 이홍장(李鸿章)이 미국대통령을 회견하는 장면 등은 중국의 포토저널리즘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다.16) 1911년 손문(孙文)이 영도한 동맹회(同盟会)에 의해 “중화민국”이 건립되면서 당시 사진가들의 활동은 동맹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동맹회에 소속된 사진가들은 한 손에 총을 들고 투쟁하면서 또 다른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활동하게 되었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의 모더니티의 특수성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계몽과 “구망”의 이중주인 셈인데, 여기서 계몽적 기구가 사진기라 고 하면 “구망”의 기제는 무기인 셈이다.
1911년의 “신해혁명”을 거쳐 군벌의 등장으로 혼란이 극에 달했던 1919년 “반(反)제국주의”
와 “반(反)봉건주의”를 주요내용으로 과학과 민주를 주장하는 “5.4학생운동”이 일어난다. 젊 은 사진예술가들은 새로운 번영기를 맞게 되었는바, 많은 사진단체가 결성되고 사진전시회도 우후죽순마냥 도처에서 개최되었다.17)
사진기는 혁명의 격동기와 그 궤를 같이 해왔다. 아울러 1923에는 중국 최초의 개인 사진집과 연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풍집(大风集)과 북경광사연감(光社年鉴)도 출판되였다. 같은 시기에 사진잡지나는 독수리(飞鹰), 중화, 아침바람(晨风)이 창간되고 여러 관련 잡지 에도 사진특집을 신설하였다. 아울러 “동서양문화에 정통하고 문화적 명망이 높은” 학자스타 일의 사진가들이 출현하여 국제사진 살롱에 입선하는 등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8) 그러나 이러한 사진 활동은 중일전쟁으로 인하여 새로운 요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10) Th.W. 아도르노, M. 호르크하이머, 김유동,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2004, p.21.
11) 임석진 외 22인 철학사전, 중원문화, 2008, p.38.
12) 앤서니 기든스, 김미숙 외, 현대사회학, 을유문화사, 2005, p.55.
13) 전지영, 근대성의 침략과 20세기 한국의 음악, 북코리아, 2005, p.27.
14) 사진관이 처음 설치된 것은 1859년 홍콩에서였으며 이어 광주., 상해, 천진, 북경 등지로 파급되었다. 马運增 외, 中国摄影史 1837-1940, 中国摄影出版社, 1987, p.16.
15) 왼쪽엔 남편이 오른쪽엔 아내가 앉고, 가운데는 탁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 찻잔과 탁상시계 외에도 잘 어울리지도 않는 소품을 놓 기도 했다. ...반신상(半身像)은 금기였는데 그것은 허리를 절단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蒋齊生, 摄影史记, 新华出版社, 1990, p.30.
16) 马運增 외, 위의 책, p.51.초기에 활동했던 유명 사진사들로는 홍콩 뢰아방(赖阿芳),천진의 양시태(梁时泰)와 북경의 임경방(任景 芳)등이 있다.
17) 蒋齊生, 위의 책, p.153.
18) 陈申, 「郎静山과 그의 集锦摄影」, 사진과 포토그라피, 눈빛, 2002, p.366.
말하자면 “생사존망의” 문제가 계몽을 압도한 것이다.
5.4운동, 북벌전쟁, 그 후 십년의 내란, 항일전쟁, ... 많은 젊은이들이 이 “구망”의 전쟁에 뛰어 들었으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구받은 것은 자유와 민주(즉 계몽, 필자)가 아니라 ...개체적 존재는 보잘 것 없었고,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19)
유명사진작가 장인천(张印泉)은 1936년에 ...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 중국은 새로운 예술 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풍화설월(風花雪月)이 아니라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용기와 힘으로써 우리는 이를 지침으로 우리의 사진을 해나가야 한다.”20)
말 그대로 계몽의 도구였던 사진이 시대적 요구 속에서 “전투적 무기”로 되었던 셈이다. “새로 운 예술”이란 “바람이나 꽃이나 눈이나 달(風花雪月) 따위를 읊조리는” 그런 평안한 것이 아니 라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급진적 “예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항일전쟁이 본격화되자 매체는 연일 저널리즘사진으로 지면을 채웠다.
(저널리즘사진과 다큐멘터리사진의 관계는 아래에 다시 살펴볼 것이다.) “수십년 간 발전이 없었던 사진화보가 이제야 서광이 비친”21)다고 할 정도로 당시의 저널리즘사진가들은 “애국 적인 기치(즉 “구망”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특히 상해의시대화보는 저널리즘사진 에 중점을 두었는데 <동북의용군특집>, <열하전쟁>, <몽고변경특집>등 혁명과 사진이 혼 연일체로 하나가 된 작품은 주로 왕소정(王小亭), 김석성(金石聲)등이 활약한 산물이었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사진의 시작은 중일전쟁 직전인 1936년 광주(广州)에서 사진 전시회를 개최한 사비(沙飞)에 의한 것으로 인식된다. 중국 다큐멘터리사진의 선구자인 사비 는 이 전시회에 <노신을 기념함>, <화남 국가방어 제전 남오도(提前南澳岛)>, <대학생활>
등 사진작품을 선보였는데, 전시회서문에서 “사진은 현실의 상황 그대로를 묘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사진이 인류에게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줘야하고 사회를 개조하고 자유를 회복하는데 일조해야 한다”는 내용을 적시했다.22) 이는 다큐멘터리사진의 특성과 기능에 대 한 최초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중국적 다큐멘터리사진의 특점을 반영한 것이기 도 하다. “사회를 개조하고 자유를 회복”해야 된다는 주장 등이 그러하다. 사진의 계몽(“자유회 복”23))적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아울러 “현실 그대로의 현상을 묘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큐 멘터리사진의 일반특점과 연계되는 부분이다. 이후 사비는 연안(延安)의 공산당에 합류하면 서 항일활동근거지의 군인과 민중들을 중심으로 한 군상관련 사진작품이 제작하였다. 정치조 직에 봄을 담게 된 사비로 말하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앞에서 사비의 말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에게 정치주제의 사진은 저널리즘사진의 부류이면서 동시에 다큐멘터리사진이기도 했을 것 이다. 아울러 비록 그의 사진에서는 “강요된 어떤 집단적 의식”을 느낄 수 있으나 그 후 중국 사진에 많이 나타났던 개인숭배나 개인을 돌출하는 사진 경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음을 또한 주목할 바이다. 결론적으로 1937년에 일어난 중일전쟁으로 인해 어쩌다 제기된 다큐멘터리사 진의 계몽적 역할도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새로운 시련과 변화를 맞게 되었다.
국가의 이익, 인민의 고통이 모든 문제를 압도하였다. 지식인들의 혹은 그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 평등, 민주... 추구와 수효를 압도하였다.24)
2.3.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전유된 다큐멘터리사진 수잔 손택은 이렇게 말한바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진에 찍힌 대상을 전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과 세계가 특정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인데 ... 사진은 증명해준다.25)
19) 李泽厚, 위의 책, p.30.
20) 狄源滄, 「永远的怀念-憶摄影大师张印泉」, 中国摄影, 2001年 12期, p.35.
21) 龙憙祖, 「轮海南北张」, 摄影美学初探, 辽宁美术出版社, 1995, p.84.
22) 周家群, 图像时代, 安微大学出版社, 2001, p.47
23) “자유회복”이란 주장이 좀 애매하기는 하다. 회복한다는 것은 이미 상실했던 것을 다시 찾는다는 것이므로, 기존에는 자유로웠는 데 지금은 자유롭지 못하니깐 그것을 되찾아야 된다는 말인 셈이다. 근데 그 자유가 있었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언제 계몽된 적이 있었던가.
24) 李泽厚, 위의 책, p.29.
증명도구로서, 전유도구로서 다큐멘터리사진의 대대적인 확산과 발전은 프롤레타리아혁명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이는 모택동을 주축으로 한 지도자동지의 혁명이념과 이에 호응한 저널리 즘사진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다큐멘터리사진이 저널리즘사진으로 전유된 것이다. 거칠게 말하 면 다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분명한 메시지를 추구하는 저널리즘사진에 의하여 사실성과 기록을 근간으로 한 다큐멘터리사진이 대체된 것이다. 즉 저널리즘이 “활자나 전파를 매체로 보도나 그 밖의 전달활동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26) 저널리즘 사진은 그 특성상 정치보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일한 장면을 찍는다고 할지라도 다큐멘터리사진작가가 바라보 는 것과 저널리즘 사진작가가 보라보는 장면은 사뭇 다를수도 있겠다. 저널리즘 사진작가는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와 읽히는 독자적 맥락에 집중한다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는 일차적 으로 마주한 사실과 그것의 기록에 초점을 둘 것이다.
조금 맥락을 달리해보자. 1938년 모택동은 “항일의 리얼리즘”과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두가 지 창작방법을 제기하였으며, 이는 1958년에 중국 사회주의 예술의 발전수요에 따라 “혁명적 리얼리즘”과 “혁명적 낭만주의”를 결합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창작방법으로 다시 정식화되었 다.27) 리얼리즘의 기본원칙은 예술이 “현실 그대로” 반영해야 하는 동시에 “형상은 사물의 본질적 법칙(즉 역사적 유물론)을 반영해야”28) 한다. 1942년 모택동은 프롤레타리아 문예지 도지침이기도 한 “연안문예강좌”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문학가, 예술가, 문예공작자들은 군부대에서 공작하는 동지들과 결합하고 당무를 보는 공작자 들과 결합하고 경제공작을 하는 동지들과 접촉하여 이러한 동지들과 단합하여 ... 목적은 부르 주아사상을 척결하고 ... 프롤레타리아사상으로 무장하는 것이다.29)
“예술이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해야 된다는 구호, 즉 예술은 정치 를 위하여 복무해야 한다는 구호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저널리즘사 진으로 전유하기에 충분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교시였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역사발전의 수효에 맞춰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오인함(吴印咸)은 <베쮼의사(白求恩大夫>(작품 2), 사비는 <고장성에서의 전투(战斗在古长成)>, 강파(江波)는
<여명의 종소리'(黎明的钟声)>등 작품을 발표했다. 이러한 사진 은 “인민을 설득하고 교육하고 격려하는 정치적 예술로 훌륭한 평 가를 받았다.”30) 캐나다에서 온 “공산주의 의사전사”가 부상병들 을 수술하는 장면을 담은 <베쮼의사>는 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사진의 “모호한 경계”를 드러 내보였다고 할수 있다. 저것이 사실성과 기록성에 근거를 두었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사진의 특점을 보여준 동시에 또 분명한 정치적 목적으로 사실성과 기록성에 집중하였다는 점에서 저널리즘사진의 특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널리즘사진과 다큐멘터리사진의 공통점과 차이점 은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개별적인 작품을 어떻게 분석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할 것인데, 문제의 요는 저널리즘사진이 사실성과 기록성을 어떻게 전유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베쮼의사>의 예처럼 말이다. 아울러1930-1940년대 해방구에서 혁명기의 특유한 저널리즘사진이 성행하 게 된 것은 “문예의 정치화” 요구에 부합되었고 제도적인 뒷받침이 튼튼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저널리즘사진은 정치와 제도의 산물이다. 일례로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로서
25) 수잔 손택, 이재원, 사진에 대하여, 시울, 2005, pp.8, 20.
26) 저널리즘: 좁게는(이것이 일반적인 정의로 인식되고 있지만) 정기적인 출판물을 통하여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 는 활동, 넓게는 모든 대중전달 활동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는 비정기적인 것, 출판물 이외의 비인쇄물에 의한 것, 내용적으로는 단순히 오락·지식 등을 제공·전달하는 경우도 포함해서 사용된다.. 두산백과, <저널리즘>
27) 鲁原、 刘敏言 主编, 中国当代文学史纲, 中国文联出版公司, 1995, pp.3-4. 좌익문예이론 입장에서 본다면, 사회기초와 사회현 실 환경 속에서의 의식형태(이데올로기)의 능동적 작용에 있어서 문예의 기능을 중요하시지 결코 문예의 독립성을 중요시하지 않 는다. 또 사회혁명 중에서의 문학과 예술의 촉매작용을 중요시하지 결코 그것이 독립적 형식으로 존재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贾振勇, 理性与革命: 中国左翼文学的文化诠释, 人民出版社, 2004 p.94. “혁명적 리얼리즘”과 “혁명적 낭만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정치적 효능인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이나 독립성” 같은 것은 의당 비판의 대상인 것이다.
28) 陶东风, 和磊, 当代中国文艺学研究(1949-2009), 中国社会科学出版社, 2011, pp.98, 110-114부분을 참고하라.
29) 毛泽东, 毛泽东选集(第二卷), 人民出版社 2009年, pp.425-426.
30) 徐肖冰 외, 中国新文化大系(摄影集1949-1966), 中国文聯出版公司, 2000, p.2.
<그림 2> 오인함, <베쮼의사>, 1939년.
좌익작가연맹은 보고문학 등 장르를 혁명문예의 장르로 특별히 제정하였다.
좌익작가연맹은 “문예의 대중화 운동”을 일으키고 대중문예는 인터내셔널프롤레타리아의 새 로운 대중형식, 예를 들면 보고문학, 대중 낭독극 등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1) 준엄한 현실 속에서 박애사상나 철학적 추구나 우미한 예술은 모두 유치하고 텅 빈 것이 되었다. 모두 하나의 목적 하나의 방향, 하나의 일을 향하여 달려야 했다. ...32)
이런 상황 속에서 저널리즘사진은 1940년대 중국공산당 근거지였던 연안에서 대단히 주목을 끌었는데, 모택동은 “문예전문인들은 군중들의 벽보와 군대, 농촌의 통신문학에 주의를 돌려 야 한다”33)고까지 지적하였는데 이는 저널리즘사진과 정치현실의 접목을 통하여 시사성을 띤 선전사진방식으로 실현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거대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많은 사진기 자들이 전장에 나가 직접 취재에 참가하였는데, 사비, 나광달(罗光达), 오인함, 정경강(郑景 康), 석소화(石少华), 서초빙(徐肖冰), 고범(高帆)등은 연안에 모인 대표적 사진가들이었다.
이들은 “혁명사진”의 창시자였으며 동시에 적잖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아울러 “이런 연안시기 의 예술이론은 해방이후 전국적 범위로 확산되었음을 물론이다.”34) 위에서 언급했듯이 실재 성, 투명성, 사실성으로 말미암아 다큐멘터리사진은 정치선전도구로 사용되기에 더없이 합당 하였을 것이다. “예술의 생산에서 대중의 역할이 무엇이며 그들의 취향은 어떤 것이며 예술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혁명이 사회변화와 더불어서 의식을 변화시 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선전과 교육을 사실 특별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35)이다. “실제적이며 순수하고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끌어 낼”수 있는 사진의 매체적 속성으로 말하면, 다큐멘터리사 진이 저널리즘사진으로 전유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의 속성으로부터 기인된 것이기도 하다.
사진이야 말로 여타 모방물보다는 우리 두 눈으로 볼수 있는 실제와 훨씬 순수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사진이 진실하기 때문에 영향력을 끌수 있고 관심도 끌며 ...36)
2.4.“문화대혁명”이후 다큐멘터리사진과 계몽의 재(再)점화
새중국의 창건은 좌파문예정책을 전국적 범위로 확산시키는 초석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정치선전용저널리즘 사진으로 교체되었고 그러한 흐름에 변화가 온 것은 “문화대혁명”의 결속 과 함께이다.
“문혁”기간 ... 불완정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피해를 받은 사람은 1억 명이 되는데 ... “문혁”동안 입은 경제적 피해는 30년간(1949-1979년) 전국 고정자산의 총액을 넘어선다.37)
1976년 1월 주은래(周恩来)가 사망하자 그해 4월 수많은 군중이 천안문광장에 모여 추모활동 을 가지는 동시에 “문혁(문화대혁명 약칭)”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었다. “4인방(四人帮)”은 모 택동의 동의를 얻은 뒤(“문혁”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곧 모택동의 위상과 관련되었으므로),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군중을 강제해산하고 사건의 배후 조종자를 색출하기에 이른다. “문 혁”을 직접 경험했던 많은 청년 아마추어사진가들은 천안문광장에서 이 “항쟁의 현장”을 기록 하였다. 본의가 아니게 수만 점에 달하는 기록사진이 중국 사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진의 전통이 새롭게 구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이를 계기로 사실성과 기록성을 근간으로 한 다큐멘터리사진이 다시 시작되었 다는 것에는 별 의의가 없어 보인다. 아울러 1979년 4월 1일 북경 중산공원(中山公园)에서
“4.5항쟁”(위의 “천안문사태”를 이르는 말)에 참가했던 청년들이 <자연, 사회, 인간 (自然 ․ 社会 ․ 人)>사진전을 개최하고 그 참여자들 중심으로 “4월 사진회 (四月影会)”가 결성하였는 데 이는 중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민간사진단체이다. (사진 3 참고)
31) 丁晓原, 文化生能與报告文学, 三聯书店, 2001, p.12 32) 李泽厚, 위의 책, p. 242. 참고.
33) 丁晓原, 위의 책, p.13.
34) 李泽厚, 위의 책, pp.189-190 참고.
35) 토비 클락, 이순령, 20세기 정치선전 예술, 예경, 2000, pp.75-76.
36) 수잔 손택, 위의 책, p.21.
37) 王年一, 大动乱的年代, 人民出版社, 2009, pp.266, 467.
“4월 사진회”의 제1회 전시는 중국사진역사에서 혁명적 의의를 갖는데 이는 처음으로 중국의 사진에 “인간성”이 구현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물은 선전의 도구와는 다른 예술로 인정받게 되 었던 것이다.38)
정치 대신 인간일반이 처음으로 예술주제가 된 것이다.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이 “20여 일 간의 전시기간에 무려 7만 여명의 관람자들이 전시장을 찾았다.”39) 그러나 시각 을 조금 달리하면 이를 다르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문혁”이 등소평에 의하여 전면적으 로 부정되고 수정되었기에 1979년 4월 1일에 제1회 전시회가 가능했을 것이다.40) 그러니까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 사회, 인간>사진전도 정치적 변화와 무관할 수도 없거니와 더 나아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문혁”이 끝난 이후에 그것에 대한 부정으로서 극좌 문예이론과는 맥락이 다른 문예정책이 실행되었는데, 예를 들면 1984년12월에 열린 “중국작 가협회 제4차 회원대표대회”에서 “창작의 자유”가 표방되기도 했다.41)
1949년 이후 정치적 문예는 극단에 이르렀는데, ... 정치언어로 문학언어를 대체하고 집단경험 으로 개인적 경험을 대체하였다.42)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필자) 계몽, 각성, 인동주의, 인성회복... 이런 것들은 모두 피와 살이 있는 개체적 인간을 이야기했다. “사람아, 사람아”란 외침은 여러 가지 영역으로 파급되었다. 이 시기의 문예계의 성과는 양적이나 수적으로 이전의 어느 시대든지 압도할 수 있었다. 물론 제애도 있었고 금지령이 있었지만...43)
새로운 문화환경 속에서 1980년대 사진계도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1980년 “4월 사진 회”는 제2회전시를 개최하였는데 이경홍(李京红)의 작품 <어린이들을 구하라(救救孩子)>는 연출과 비(非)연출에 대한 논쟁대상이 되었다(작품 4 참고). 그 초점은 사진의 윤리성문제였 다. 즉 사진가는 청소년 흡연문제의 심각성을 부각하기 위하여 관련 장면을 연출하여 촬영했던 것이다. 이에 찬성자측은 사진가의 사회적 참여와 사회문제 해결에 보인 적극적인 자세라고 했고, 반대자측은 “연출의 부당성”을 제기하고44) 심지어 이런 연출사진이 오히려 청소년의 흡연을 부추길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마디로 다큐멘터리사진의 “진실성”에 대한 쟁 론인 것이다(2.1 다큐멘터리 사진 특점 둘째부분 참고할 것). 논쟁의 초점에 오른 또 다른 사진작품은 과겸(过谦)의 <깊은 그리움(深切的怀念)>이다. 반대자측은 렌즈에 포착된 것은 진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찬성자측은 다큐멘터리사진의 특점은 사진속의 자연속성, 즉 렌즈에 의해 과학적 정확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양측의 견해와 다른, 협의의 다큐멘터리사진의 특점과 광의의 다큐멘터리사진의 특점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45) 아울러 이런 논쟁의 배후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있었다. 모택동의 후계자 화극봉은 모택동의 기존사상대로 정치계를 제어하려고 하였고46) 등소평은 이에 맞서
“실사구시”라는 정치적 테제를 들고 나왔다.47) 사실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38) 佟樹珩, 当代中国摄影艺术史(1949~1989), 中国摄影出版社, 1996, p.69.
39) 佟樹珩, 위의 책, p.69.
40) 1978년 12월 13일 모택동의 후계자 화극봉(华国锋)은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자기의 “잘못”을 검토함으로써 등소평은 자신의 정치 적 입지를 완전히 다진다. 앞서 12월 8일 그의 비서실장인 왕동흥이 “잘못”을 검토하였다. 이로써 문혁이 완전히 결속된다. 马立 诚, 凌志军, 위의 책, p.60.
41) 작가는 주제 및 예술의 표현 기법을 선택할 충분한 자유가 있으며 자기의 감정과 열정을 토로하고 자기의 사상을 표현할 충분한 자유가 있다. ... 우리 당과 정부, 문예단체로부터 전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작가의 창작 자유를 확고하게 보장해주어야 한다.
<祝词>, 人民日报, 1984年12月30日.
42) 刘再复, 文学十八讲, 中信出版社, 2011, p.377.
43) 李泽厚, 위의 책, pp.270-271.
44) 사진의 연출성에 대한 반대는 사실 오래된 것이다. “사람들이 구성된 사진에 대해 가하는 비난은 이미지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 라 그 이미지가 제작된 환경에 대한 것이다. 즉 그것은 연출된 사진이지 자연적인 실재의 사진아 아니라는 것이다. ...구성된 사진 은 종종, 남몰래 찍은 사진과 거분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비난을 받는다. ... ” 피에르 부르디외, 주형일, 중간예술, 현실문화 연구, 2004, pp.252-253.
45) 夏放, 摄影艺术概论, 浙江摄影出版社, 2000, p.5.
46) “두 가지 무릇 两个凡是” 즉 무릇 모택동이 내린 결책은 견지해야 하고, 무릇 모택동이 지시한 것이라면 그래도 해야 한다는 뜻 이다 이를 역사적으로 “후기문화대혁명9(76-1978년)”시대라고 하는데 이는 문혁은 결속되었으나 “극좌정치노선”은 아직 끝나지 않고 지속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림 3>“4월 사진회” 제1회 전시 관련 사진자료. 1979년.
<그림 4> 이경홍, <어린이를 구하라>, 1980년.
뜻의 “실사구시”는 사유하고 실천하는 방법론일터인데 당시 중국적 정치상황으로 말하면 그것 은 정치테제였던 것이다.48) 1980년대 “사실을 바탕에 두어 진실을 말하려고” 하는 다큐멘터 리사진의 입장이, “실사구시 정신”과 궤를 같이 함으로써, 또 인본주의적 회귀를 통하여 “다큐 멘터리사진의 봄”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봄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제2차 “5.4 신계몽주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1980년대 중후반의 “문화열(文化热, 즉 인문주의 에 대한 열정)”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중국의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변화가 불가 피하다고 여겼다. ...학술과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파훼된 독립적 인격을 다시 찾는가 의 문제가 대두되었다.49)
“문혁”의 체험자들은 냉정한 반성적 시각으로 다큐멘터리사진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다큐멘터리사진의 재점화란 다름 말로 하면 계몽운동의 재점화인 것이다. 1980년대를 내 내 뜨겁게 달구었던 것은 계몽과 인본주의적 열정이었다. 이런 열정은 또 다르게 표현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심지어 허무조차 허무하다. ... 다른 선택은 없다. 자살하지 말고 자고 섹스하고 일하고 놀고 ... 모든 것을 비웃고 즉 모든 좋은 것, 나쁜 것, 살아있는 것, 죽은 것, 즐거운 것, 아픈 것, 의미 있는 것, 의미 없는 것, ... 이것이 일체이고 이 모든 것은 황당하니, 황당한 것이 곧 이 모든 것이다. ... 카뮈 역시 그러하지 않았는가.50)
이 시기 다큐멘터리사진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은 특점을 귀납할 수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 전유되었던 저널리즘사진에서 다시 다큐멘터리사진의 사실성과 기록성에 대한 주목이 요청되었다. 이는 중국적 사회문화적 상황을 사진에 반영한 것이다. 사진의 “작은 역사” 속에 정치적 큰 얼개에 대한 사유가 요청되는 대목인데 그런 연유로 필자는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한 분석에 지면을 할애하였다.
둘째: 다큐멘터리 사진을 놓고 여러 가지 쟁론이 있었는데 그것은 연출과 비연출, 즉 원래 사실을 사실자체대로 기록했는가의 문제였다. 다큐멘터리사진의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두느 냐와 아니면 사실성과 기록성을 우위에 둬야 하는 문제의식을 드러낸 부분이다. 이는 또한 다큐멘터리사진의 개념정리와 연관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2.1 관련논의를 참고할 것) 섯째: 계몽의 차원으로 놓고 말하면 이 시기 다큐멘터리사진은 정치적인 구호에서 벗어나서 개별적인 사람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진과 구분된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저널리 즘사진에서 자유로워진 다큐멘터리사진의 역사적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2.5. 현대다큐멘터리사진과 작품일별
직접적이든 등가적이든 은유적이든 예술은 사회의 반영물이다. 아울러 중국다큐멘터리 사진 은 중국적인 역사와 사회 속에서 그 진실성과 기록성을 근간으로 부단히 새로운 모습을 펼쳐보 였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는 “85년 신사조(문예의 새로운 흐름)”로 명명될 만큼 기존의 미술흐 름과는 다른 새로운 기후가 미술세계를 석권할 때이다. 이는 개혁개방에 따른 문화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럼 다큐멘터리사진은 이에 어떻게 반영하였을까. 1985년 5월 북경의 10여 명의 청년들이 발기하고 100여명의 청년사진가들이 참여한 <85년 현대사진 살롱전시>는 현대사진에서의 다큐멘터리사진의 발단이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4월 사진회” 회원들이 그 주축이었다. 1980년대 중, 후반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사진예술은 스트레이트 사 진만 인정하고 메이킹 사진은 부정하며 스냅사진만 인정하고 연출사진은 부정하며 사실기록 만 인정하고 심상(心象, 즉 마음속에 그려지는 주관적 느낌을 강조하는)사진은 부정하는 또 다른 극단으로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사진이 다원화되었음은 큰 진전이라고 할수
47) 더 구체적인 자료는 马立诚, 凌志军, 交锋 当代中国三次思想解放实录 人民日报出版社, 2011, 「一章 第一次思想解放」, pp.6-76 부분을 참고하라.
48) 马立诚, 凌志军, 위의 책, p.59.
49) 许纪霖, 启蒙如何起死回生, 北京大学出版社, 2013, p.100.
50) 李泽厚, 위의 책, p.277. 이 내용은 저자가 1987년 에 쓴 것임.
있다. 사회구조적으로 살펴보면 1980년대, 1990년대의 사진가들은 “문혁”의 직접 경험자로서 그들 다큐멘터리사진 저변에 깔려있는 것은 이성의 회복과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 선이다.
80년대는 사상계몽의 시대였으며 ... 자유와 진리를 추구하는 시대였다. ...51) 1989년의 사회 적 분위기는 엄숙하고 차갑고 삭막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그해 7월 “제7기 전국미술전시회”가 조직되었다. 왕암(王岩)의 <황혼녘에 균형을 잡는 남자아이>같은 사실적인 작품이 상을 받 았는데, 이런 주제나 정서적으로 모호하고 흐릿한 작품이 상을 받았다는 것은, 예술이 정부측 전시의도와 최종적으로 합의한 결과로 볼 수 있다.52)
“흐릿하고 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예술은 흐릿하고 모호해졌으며 그것 을 대체하는 것은 일상이었고, 좀 더 모호하고 은유적이고 냉소적인 예술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근년에 시중에 봇물처럼 쏟아지는 계몽과 관련한 책들은53)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시대가 “제2차계몽주의 운동”54)시대처럼 읽힌다(여기서 “2차”라고 하는 것은 20세 기 초반의 계몽운동을 “제1차 계몽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성적) 인간 의 죽음”이 “유행” 된지도 이슥한 동시대 문화환경 속에서 볼테르나 디드로나 루소의 18세기처 럼 이성의 힘을 믿고 신앙하는 계몽주의에 목말라 있는 상황은 아직도 계몽의 길이 멀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하버마스의 표현으로 하면 “미완의 프로젝트”가 현재진형인 것이다. (물론 하 버마스의 “미완의 프로젝트”의 원뜻은 그 맥락이 다르다55).) ...
그럼 아래에 관련 작품을 살펴보자. 작가와 작품을 선정함에 있어서 연구자는 동시대 다큐멘터 리사진진영에서 영향력이 있는 중진작가 20여명 중에서 10명의 작가를 선택하였다. 이는 우 선 20여명의 작가의 작품주제를 크게 세 덩어리로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기초하여, 각 덩어리에 3, 4명의 사진작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는 한정된 지면으로 동시대 다큐 멘터리 사진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효과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연구자의 고육책이었다. 각 시대 마다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있는 것만큼이나 기록과 사실을 중요시하는 다큐멘터리사진의 특점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사진이 앞에서 살펴본 사진과는 조금 낯설게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계열 1. 사회이슈형 다큐멘터리사진: 즉, 사회와 현실적 문제를 사진가의 눈으로 정확하게 바라보려는 작품계열이다.
예 1: 다큐멘터리사진의 대표적 사진가 해해룡(解海龙)은 다큐멘터 리사진의 사회적 가능을 누구보다도 주목하였다. 특히 그는 빈 곤층 아이들의 정상적인 취학을 하기 힘든 문제를 <중국 희망 공정 다큐멘터리>이라는 시리즈로 직접적이고 핍진하게 보여 주었다(사진 5 참고). 다큐멘터리사진의 다큐멘터리 특점은 결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끌어내서 수많은 빈곤층 아이들 이 정상적으로 취학하는 새 지평을 열었다. “그의 작품이 매력
적인 것은 선명한 주제의식이 있고 사회문제를 중시하였으며 인물의 눈동자에 초점을 두었으며 ... 오픈된 구도와 흑백사진으로 작품을 구성하였기 때문이다.”56) 적절한 지 적인 것 같다. 이는 다큐멘터리사진의 기록적 사실성과 사회적 반향의 문제인데 호웅
51) 新京报 编, 追求80年代, 中信出版社, 2006, p.16.
52) 吕澎, 中国当代美术史, 中国美术学院出版社, 2013, pp.297, 298, 299.
53) 무엇이 신계몽운동인가 (什么是新启蒙运动), 2014. 계몽은 어떻게 다시 회생하였는가-현대중국지식인의 곤경 (启蒙如何起死 回生 现代中国知识分子的思想困境,), 2011.중국계몽의 자각과 초조 (中国启蒙的自觉与焦虑), 2016. 계몽운동사화 (启蒙思 想话史), 2011. 지금의 계몽 (当下的启蒙), 2018.계몽운동: 무엇 때문에 여전히 중요한가 (启蒙运动:为什么依然重要), 2017. 모두 알아야 할 계몽운동 (人人都该懂的启蒙运动), 2018. 공민사회와 계몽정신 (公民社会与启蒙精神), 2017. ... 외 국도서 일부분 포함이다.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만큼 그야말로 눈사태다. 중국의 정치,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54) 许纪霖, 启蒙如何起死回生, 北京大学出版社, 2013, p.100.
55) 위르겐 하버마스, <현대: 미완성의 계획>, 이진우 엮음,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이해, 서광사, 2006, pp.42-63. 지면의 제약 으로 구체적인 논의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56) 赵许生, 赵许生评析作品<我要上学>, 작성일자 2018年9月29, 2018년 10월 2일 검색.
http://forum.home.news.cn/detail/141769340/1.html
<그림 5> 자신의 작품 앞에서 의 해해룡, 근년,
콩 우트의 <전쟁의 공포>사진의 사회적 파장을 연상시킨다. 물론 그 내용적 성질은 다르지만 말이다.
예 2: “문혁” 당시 1천6백여만에 달하는 청년들이 “산골로 올라가고 농촌으로 내려가는(上 山下乡)” 운동을 했다. “대혁명”은 끝났지만 시골에 반강제적으로 추방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역부족이었다. “문혁”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흑명(黑明)은 20여 년 간 그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결과물로흘러간 청춘(走远青春)이란 사진집을 발행 되었으며, 상응한 사회적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다큐멘터리사진의 기록적 힘으로 “문 혁”의 기억을 현재적 지평으로 깊이 끌어들인 것이다.
예 3: 주해(周海)는 <침체된 산업(工业的沉重)>이라는 테마로 국영압연공장 노동자들을 주목하는데, 그 초점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하게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었다. 사 회주의국가의 적잖은 노동자들에게 소외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큐멘터리의사진의 사실적 기록특점으로 사회문제를 근접거리에서 사진에 담음으로써 예술의 사회적 참여역할에 주목한 부분이다. 개별적 대상에 대한 핍진한 기록으로, 사회적 문제를 작가의 독립적 시선으로 사회저편에 부상시킨 것이다. 기록과 사실과 사회이슈 가 여러 층위로 복합적으로 점철되는 대목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계열 2. 미시서사형 다큐멘터리사진: 즉, 시시한 일상을 새롭게 조명한 다큐멘터리사진계열이다.
예1 : 북경의 골목을 주제로 골목 101모습(胡同101像)이라는 사진작품집을 출판한 서용 (徐勇)은 “골목을 통하여 북경 골목의 역사를 표현하고 북경의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려 했다.”57) 역사적인 측면과 현재의 모습이 어우러진 소박한 사진작품은 개인적인 정서나 주관의식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읽힌다. 말하자면 사진 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사진의 냉엄한 기록성을 최대화 한 것이다.
예 2: 안가(安哥)의 <등소평시대에 생활하다(生活在邓少平时代)>계열작품은 거대한 역사 서술이나 사회 저변의 소시민에 대한 관심을 벗어나, 한 시대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주목하고자 하는 동시에 장소특수성을 다큐멘터리사진에 냉정히 담고자 하였다.
예3: 아래에 살펴볼 원동평(袁东平)과 조철림(赵铁林)의 작품은 사회이슈형 사진으로도 분류될 수 있는 동시에, “시시한 사건”을 꼼꼼히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미시서사형이기 도 하다. 원동평은 <잊혀진 곳(被遗忘了的地方)>으로 1993년도 미국신문사진 공모 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사진가이기도 하다(작품 6 참고). “중국에는 1,400만 명에 달하는 정신병환자가 있지만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는 불과 1퍼센트에 불과하다.” 그의 사진집 정신병원은 잊혀진지 오래된 정신병환자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정신병은 개인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다. 원동평은 사회적 타자들의 삶을 미시서사형식으로 꼼꼼하게 담음으로써 작품의 설득력을 가강하였다.
생존에 묶여 도시 외각지대에서 표류하는 여인(聚集生存, 漂泊在都市边缘的女孩)
이라는 사진집을 출판한 조철림은 도시 변두리에 살고 있는, 소외된 여인들의 윤락적 인 삶에 주목하였다. 디테일하게 포착된 윤락녀 작품을 통하여 작가는 도시인들의 분 열증적이고 이중적인 사회심리구조를 세밀하게 파헤친다. 당연히 분열증은 앓고 있는 것은 그녀들뿐만 아니라 그녀를 찾는 이중적 고객들일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타자적 일상을 다큐멘터리사진의 특점으로 핍진하게 기록하여 주위 사람들 의 시선을 요청하는 부분이다. 이는 거대서사가 조락이후의 미시서사의 부활이 다큐멘터리사 진 영역에 스며든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울러 계열 1의 사진작가들이 다큐멘터리사진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였다면 상대적으로 이 계열의 작가들은 기록성에 초점을 두었다고 할수
57) 徐勇, 胡同101像浙江摄影出版社, 1990, 작가의 말 중에서.
<그림 6> 원동평, <잊혀진 곳>, 199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