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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fka ’s Psych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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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 精 神 分 析 :第 13 卷 第 2 號 2 0 0 2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 13, No. 2, Page 178~190, 2 0 0 2

카프카의 心理

李 炳 郁*

Kafka ’s Psychology

Byung-Wook Lee, M.D.*

서 론

카프카는 독일어를 사용한 체코 태생의 유태계 작가이다.

혈통과 언어 및 국적이 모두 서로 다른 특이한 경력을 지녔 던 작가로서 그의 대표작 [심판], [성], [변신], [아메리카]

등은 바로 그러한 카프카 자신의 내면세계와 외부의 환경적 조건상의 불일치와 괴리를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그 자신 의 정체성 혼란을 작품 속에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카프카 가 풍기는 기괴한 분위기는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무기력 한 주인공들처럼 절망적이다. 그가 묘사한 주인공들은 카프 카 자신처럼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실체가 없는 조직의 힘 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한 개인을 여지없이 파멸시킨다. 그 리고 소리도 없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이 사라져 간다.

유태인은 결코 유럽사회의 중심부에 접근할 수 없었다. 언 제나 변방의 게토를 서성거릴 뿐이다. 그런 사정은 민주화 된 오늘날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적어도 유럽사 회는 귀족적 선민의식에 뿌리를 둔 백인우월주의로부터 아 직까지도 자유롭지 못하다. 카프카는 자유의 땅, 미국을 동 경하였다. 그러나 그가 일찍 요절하지 않고 좀더 오래 살았 다 하더라도 그는 결국 나치수용소의 소각로를 통하여 한 줌의 재로 화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자유를 갈망하였다.

카프카에게는 이미 유럽대륙 자체가 거대한 감옥이요 성채 였으며 그 안에서 백인들은 마음대로 유태인을 심판하고 추 방하고 학살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좌절은 변신에 대한 소망을 담은 절규에 가깝다. 비록 벌레같은 신분이지 만 실낱같은 거듭남에 대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 이다. 그런 관점에서 카프카의 절망과 소망은 그들과 비슷

한 고난과 시련의 오랜 역사적 과정을 겪어온 우리에게 남 다른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사회는 카뮈와 사르트르가 카프카의 진정한 가치를 인 정하기까지 그를 받아들이는데 주저하고 인색해온 것이 사 실이며 그것도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연구작업이 활발해 질 정도로 그들은 카프카의 존재를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 던 것이다.

카프카의 생애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 하는 보헤미아에서 부유한 유태인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나 1924년 결핵 요양소에서 마흔 한 살이라는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작가였다. 그는 매우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말수도 지극히 적었던 인물 이었다. 법률가로 성공하기를 기대했던 부친의 뜻을 거역하 지 못하여 그는 프라하대학에 진학하여 법률을 공부했다. 그 러나 폭군적인 부친에 대해 불만이 많았으며 졸업후 재해보 험국 직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작품을 썼는데 글을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카프카는 자 기 자신을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문단에 정 식으로 데뷔할 생각조차 지니고 있지 않았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부터 폐결핵을 앓기 시작하여 결국 보험 국을 그만두고 스위스, 발틱해안 등을 전전하며 요양생활을 보냈지만 병세는 진전이 없었다. 그의 애인 도라 디만트와 동거하면서 창작에 몰두했으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비인의 키어링 요양소에 들어가 투병 중에 사망하였다. 그 는 작가로서의 자신감이나 자부심도 적어서 유일한 친구였 던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죽고난 후 자기 작품 모두를 불 에 태워줄 것을 유언했으나 브로트는 카프카의 예술적 가치 를 고려한 나머지 고인의 뜻을 어기고 카프카 사후에 그의 작품들을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Psychiatry, College of Medicine, Hallym Univer- sit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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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그뿐 아니라 브로트는 나치독일의 눈을 피하여 카프카의

원고들을 국외로 안전하게 빼돌리는데 성공했다. 브로트가 아니었으면 카프카의 존재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없 었을 것이다. 그는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하자 팔레스타인으 로 망명하였으며 1968년에 84세로 죽었다. 카프카가 죽을 때까지 곁에서 헌신적으로 간호했던 도라 디만트는 그가 죽 고난 후 나치스를 피해 런던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2차 세 계대전이 끝난 후 곧 세상을 떠났다. 한 때 그의 연인이었던 밀레나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했다. 그리고 카프 카보다 좀 더 오래 살았던 그의 세 누이동생들 역시 나치수 용소의 가스실에서 사망했다.

카프카의 거세공포

카프카의 아버지는 천민 출신의 야심많은 인물로 출세와 성공을 위한 신분상승에 대하여 강한 집착을 보였던 사람이 지만 카프카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상당히 양가적인 태 도를 지니고 있었다. 권위주의적이며 폭군적인 아버지에 대 한 그의 두려움과 혐오감은 카프카의 성격을 더욱 위축시 키고 염세적으로 몰고갔다. 비천한 신분이 겪는 서러움과 모 욕을 잘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자신의 외아들만은 관직으로 진출시켜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아들 이 법대를 졸업하여 관료의 길로 들어서기를 절실히 바랬지 만 카프카는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작가의 길을 걸었다. 어 머니는 이러한 부자간의 반목과 갈등관계에서 명확한 태도 를 취하지 못할만큼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단지 음 성적인 은밀한 방식으로 아들을 위로해줄 뿐이었다. 카프카 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결국 아버지 편이라는 공식이 확인될 뿐이었다. 오히려 카프카에게 위안이 되어준 것은 그의 막 내 누이동생 오틀라였다.

Haymann(2001)은 카프카의 출생 배경과 무관심한 부 모밑에서 성장한 경험이 어린시절부터 카프카의 고독하고 우울한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고 보았지만 저자 가 보기에는 오히려 지나치게 강압적인 아버지와 방관자적 인 어머니의 역할이 어린 카프카의 의존적 욕구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카프카는 한번도 본인에게 전달된 적이 없는 [아버지께 드 리는 편지]를 통하여 그 자신의 평생동안 중요한 화두가 되 었던‘아버지’라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Kafka 1987).

어찌보면 그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카프카가 그의 모 든 작품을 통하여 우리에게 던지는 수수께끼에 해답을 던져 주는 열쇠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카프카 의 작품들을 범람하는 강물에 비유한다면 이 편지의 기록들

은 그 강물들의 수원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만큼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 드러난 내용들은 카프카 자 신을 포함해서 그의 모든 작품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 서를 제공하는 중요한 문헌적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김광 규(1996)도 그런 점에서 카프카의 작품 못지 않게 그의 편 지들이 지니는 중요성을 인정하고 카프카를 이해하는 지름 길로서 특히 오틀라와 아버지에 대한 서한을 다루고 있다.

프로이트가 카프카의 이러한 기록들을 일찍부터 알았다면 번거롭게 고대 그리이스의 비극까지 거슬러 올라가 인용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부자간의 갈등에 국한 해서 초점을 맞춘 점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카 프카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으며 카프카 또한 정신분석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양자간의 역동적 유사성은 그 후에 도 언급된 바 없다.

카프카는 비록 일찍 요절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이 아버 지 노릇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약혼을 수차례 취소하고 번복하는 등의 우 유부단함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결국 동거는 했어도 정식으 로 결혼하지는 않았다. 물론 자식을 낳은 적도 없다. 카프카 에게 결혼과 성, 부모와 가족 등은 가까이 하고싶지 않은 껄 끄러운 주제였다고 본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단 어는 전혀 의미없는 말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그는 사회로부 터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으로부터도 소외되 었다. 카프카가 안주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점은 그의 소설 [변신]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아버지를 혐오하는 동시에 두려워 하였다. 어머니는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적어도 그의 어머니는 아 버지의 횡포로부터 아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방패막 역할 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 같다. 어머니 율리에 카프카의 이 러한 특성은 그의 소설 [부부], [아메리카], [변신] 등에 가 장 비슷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결국 카프카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자신을 보호해주고는 싶지만 무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대적인 아버지 편에 가담하는 배신자의 역할로 비쳐진다.

아버지에 대한 카프카의 태도는 매우 양가적이다. 두려움 과 반항 그러면서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아버지라는 존재 앞에서 카프카는 몹시 혼란된 감정상태를 겪을 수 밖에 없 었다. 그가 1919년에 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철저한 자기분석과 내적 성찰의 기록이다. 유태인 폭군을 어버이로 섬겨야만 했던 나약한 아들의 모습이 결코 본인에게 도달 될 수 없었던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숨겨진 갈등을 표출시 킬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매우 절제된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왜 아버지가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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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마치 구약성서의 여호와 가“너는 나를 두려워 말라!”고 서두를 꺼내는 것과 비슷 하다.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카프카 자신이 왜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때로는 반론을 제기하고 아버 지의 뜻에 거스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애쓰기도 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표현하 는 등 상당히 복잡한 양가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편지에 서 카프카가 고백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출세와 성공 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매우 탐욕적인 유태인 의 전형이다. 그리고 툭하면 자식들에게 모욕을 주고 무시 하거나 욕설을 퍼붓는 그런 아버지이다. 카프카의 완곡한 표현을 빌면,“아버지는 힘으로 보나, 식욕, 성량, 말솜씨, 자 기만족, 우월감, 끈기, 순발력, 대담성 면에서 진정한 카프 카 집안사람이십니다.”라고 평가하면서 그러나 자신은 소 극적이지만 경건하고 섬세한 외가쪽에 더욱 친밀감과 동질 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것 때문에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자 신은 겁이 많고 소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어린 시절 밤중에 자다 일어나 훌쩍거리며 울고 있을 때, 아버지가 화 를 내며 문밖으로 쫓아내 오랜시간 서있도록 한 사실, 수영 장 탈의실에서 아버지의 억세고 딱 벌어진 몸집을 보고 기 가 죽었던 일, 밥먹을 때 식탁앞에서 항상 고개를 내젓거나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빈정거리는 말투로 힐난하던 모습들, 아들이 호감을 갖는 상대만 있으면 해충에 비유하 며 개와 벼룩에 관한 속담을 즉석으로 인용하던 버릇 등, 감 히 맞대놓고 할 수 없는 결함들을 말하고 있다.“아버지께 서는 제 판단을 존중해 주지도 않으시고 제 감정을 전혀 고 려하시지도 않은 채, 모욕하고 흠을 잡고 근거없이 깎아내리 곤 하셨습니다.”카프카에게 항상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은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할 수도 있는 아버지 자신의 말에 어쩌면 아버지는 그토록 무감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서슴없이 내뱉는 그런 말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감이나 연민의 정도 전혀 느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하여“그 누구도 아버지 앞에서는 결코 항 거할 수 없었다”고 털어 놓는다. 독선적이고 가학적인 아버 지에 대해서 카프카는 불가항력적인 모순된 감정으로 고통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한 맺힌 분노의 감정을 그 스스로가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대 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보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적개심 을 거의 자학적인 형태로 해소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Brod(1995) 의 증언에 의하면 카프카의 아버지는 아들이 편지에서 묘사 한 것처럼 그토록 폭군적인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며, 평

생동안 자식들에게 손찌검 한번 해본 적도 없는 아버지였다 고 한다. 다시 말해서 카프카 자신의 주관적인 심리적 인식 이 그랬다는 것이지 실제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서 지나치 게 대한 적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의 탈 출이야말로 카프카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요 과업이었음 에는 틀림없다. 비록 그는 그 문제를 생전에 해결하지는 못 했지만 자신의 창작활동과 여성관계를 통하여 극복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어찌됐건 카프카와는 달리 그의 누이동생 오틀라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항하고 관계를 단절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카프카는 감히 아버지를 거역할 수는 없었 다. 그는 자신의 집을 감옥에 비유하고 스스로를 죄수로 간 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히 자신의 감옥에서 스 스로 탈출할 생각조차 지니지 못한 것 같다. 오틀라는 과감 히 감옥을 박차고 뛰쳐나가 버렸지만 카프카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카프카로서는 사랑과 미움의 이 율배반적인 딜레마에 처한 상황에서 그 어떤 적절한 해법 을 찾지 못한 채 자기징벌적이며 자학적 죄책감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창조적 환상세계를 통하여 그 탈출구 를 모색해 보고자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불란서의 정신 분석가 앙드레 그린은 사랑과 증오의 모든 감정이 가정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가정이야말로 모든 절묘한 비극의 공간 이라고 단언하고 우리 각자에 있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는 긍정적, 부정적, 남성적, 여성적 측면들이 모두 관여하는 4중성을 띤다고 하였다(Clancier 1973). 오틀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프카는 가까운 친척들에게까지 항상 험담만을 늘어놓는 아버지의 모습을 차마 눈뜨고 못 봐줄 정도로 거 드름 피우는 인물로 묘사하는가 하면, 그런 아버지의 욕설 잔치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가족들 전체의 모습에 대해서도 우리집 식구 모두가 참여하는 일종의 바보들의 공연이라고 비웃고 있다(Kafka 1982). 이와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카 프카 한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양자간의 권력 구조상의 역 학관계로 인식한 Deleuze와 Guattari(1986)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의 심리적 배경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고발하며 유죄선고를 내리는 신경증의 고전적 오이디푸스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부자간의 공통된 고뇌라는 가설 을 토대로 움직이는 더욱 더 도착적인 오이디푸스 단계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설 [판결]에서 처럼 아버 지와의 갈등은 보다 사실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약혼을 앞 둔 행복한 청년이 아버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강물에 투 신하여 자살한다는 내용은 당시 카프카의 심정을 그대로 반 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프카 부자는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오이디푸스 갈등 해소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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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그들이 처한 시대적, 환경적 상황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

인이 될 것이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가학적인 모습으 로 자신의 부친의 존재를 거부하고 사회적 신분 상승과 출세 를 통하여 자신의 약점을 보상받으려 했다면 그의 아들 프 란츠 카프카는 자학적인 환상을 통한 창작활동으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카프카로서는 프로이트가 1909년에 발표한 부자관계의 갈등에 관한 분석사례들, 예를 들어 [꼬마 한스], [쥐 사나이] 등에 대하여 접해본 적이 없었겠지만 그에 못 지않게 카프카는 애절한 감정으로 자신의 모순된 감정과 혼 란스러움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카프카는 하르츠 지방 의 융보른에서 요양하는 기간 중에 한 교사와 프로이트에 관해 대화를 나눈 사실을 일기에 적고 있다. 그는 프로이트 의 꿈에 대한 이론이나 개관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 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신분석의 치료적 효과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않았으며 어떤 점에서 본다면 프로이트에 대한 이 율배반적 태도를 지녔다고 보여진다. 카프카는 자신이 창조 한 작품속의 주인공 K처럼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자신이 안고 있는 한계, 달리 말해서 자 신의 내면적 모순과 갈등, 그리고 양가적인 혼돈상태의 본 질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몸짓을 통하여 거의 자학적인 환 상에 가까운 작업을 작품으로 표출시켰다고 본다. 성공과 출세욕에만 사로잡힌 아버지라는 존재가 유약하고 민감한 카프카의 눈에는 사랑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속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 움,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 여성에 대한 의존성, 사회적 불 이익과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와 좌절 속에서 나름대로의 해 법을 찾고자 노력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으며 자신의 내면 적 변화를 통한 새로운 탈바꿈에는 그 어떤 통찰을 지니지 못함으로써 비극적인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절망적인 메시지는 오늘날에 이르러 새로운 충격 으로 다가오면서 우리 삶의 본질적 모순에 대한 질문을 과 감하게 던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카프카의 여성들

카프카는 어머니 품안에서 태어나 죽을 때도 한 여성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 성관계에서 방황과 실패를 거듭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였는데 따라서 정식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생애를 마쳤다. 그는 여성들에 대하여 유아적인 소망과 두려움(need-fear dile- mma)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짧은 생애동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결국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카프카 자신의 해결하지 못한 딜레마를 언어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머니 율리에 카프카는 착하고 순박한 유태인 여성이었 지만 독불장군식의 아버지 횡포로부터 아들을 보호해주는 역 할 면에서는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진 못하였다. 그런 점 이 카프카에게는 어머니 역시 힘없는 약자인 자신의 편이 아 니라 힘있는 아버지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말았다. 일 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그는 어머니에게서 느꼈는지도 모르 겠다. 어머니 자신도 몽상가적인 기질의 아들이 글쓰기에 몰 두하는 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아니라 그를 변호 해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카프카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아버지의 독재에 행동으로 맞선 누이동생 오틀라였다 고 볼 수 있다. 그는 오틀라와 수많은 편지를 통하여 자신이 처한 곤경과 불만을 하염없이 늘어놓고 있었다(Kafka 1982).

그는 온갖 걱정과 푸념을 누이동생 오틀라에게 털어놓으면 서 그녀로부터 위안을 받고자 하였는데 오틀라는 이처럼 나 약한 오빠에 대해서 일종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담당했다 고도 보여진다. 오틀라는 소심한 오빠와는 달리 매우 용기 있는 여성으로 가난한 체코 남자와 결혼했지만 나중에 나치 독일에 의해서 두 언니 엘리와 발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잡혀가자 본인은 추방대상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 스로 자청하여 남편과 이혼하고 아우슈비츠로 가는 어린이 수송열차에 동행함으로써 결국 언니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서 죽었다. 카프카는 어머니에게서 보장받지 못한 심리적 안 정감을 그녀의 대리자인 다른 여성들로부터 구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누이동생 오틀라를 포함하여 펠리체, 율리에 보리 첵, 밀레나, 도라 디만트 등이 바로 그런 여성들이었다.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에게 뼈저린 아픔과 시련을 안겨 준 여성이었다. 그녀와의 거듭된 약혼과 파혼 사이에서 카프 카는 그야말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펠리체 는 매력적인 용모는 아니지만 낙천적이고 매우 실용적인 태 도를 지닌 여성이었다. 불행히도 그녀는 카프카의 예술세계 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카프카는 오랜 망 설임과 주저 끝에 결국 약혼식을 치렀지만 곧바로 그는 자 신의 결정에 두려움을 느끼고 얼마가지 않아 두 사람의 관 계는 깨지고 말았다. 카프카 본인은 결혼이 자신의 예술적 창작활동에 장애물이 될 것을 우려했다고 변명하였지만 여 성과의 결합에 대하여 그는 원초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지니 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정체성이 상실될 것에 대 한 두려움도 한 몫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카프카는 결혼을 일종의 구속으로 보고 결혼이 기정사실화 되는 순간에 곧바 로 그러한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를 꿈꾸는 이율배 반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 자신이 오이디푸스적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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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음을 드러낸다. 그가 펠리체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카프카 자신의 혼란된 감정을 엿 볼 수 있다(Kafka 1989).

“저와 결합을 한다면, 따님께서 불행해질 것은 분명한 사 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본래의 본성이 폐쇄적이고 말이 없고 사교성이 없는 불청객입니다. 저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남 이상으로 서먹서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결혼으로 제 가 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직장이 저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다시 재약혼하지만 때마침 카프카의 결핵이 발병 하는 바람에 결국 그들 관계는 영원히 끝나고 말았다. 펠리 체는 그후 베를린의 부유한 상인과 결혼하여 스위스에 살다 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1960년에 미국에서 죽었다.

율리에 보리첵은 구두수선공의 딸로 작은 옷가게를 운영 하던 여성이었다. 카프카는 펠리체와의 파혼 이후 심리적 좌 절을 겪는 가운데 율리에 보리첵을 만나 그녀와 약혼했지만 아버지는 그녀의 낮은 신분을 이유로 삼아 극렬하게 반대했 다. 결국 카프카는 아버지의 강압에 못이겨 그녀와의 파혼 을 결정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카프카 자신의 우유분단성에 그 원인을 돌려야할 것 같다. 그가 그토록 결혼에 집착한 이 유는 결국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서 간 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결혼으로의 도피(escape to marriage)인 셈이다. 책임감이 결여된 카프카는 아버지로 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결혼을 추구하지만 막상 자신이 한 여성을 책임져야만 하는 상황을 인식하고는 다 시 마음이 바뀌어 결별을 선언하는 행동을 반복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여성들을 이용 하려 했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본인 자신도 괴로워한 것이다.

밀레나 예젠스카는 카프카의 소심함과 우유부단성에 대해 서 짜증과 불만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예술적 천재성을 높이 평가하고 허물없는 친구로서 그를 대해 주었던 여성이 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내게 있어서 당 신은 나의 가슴을 스스로 도려내는 칼과 같은 존재”라고 적 고 있다. 밀레나는 대학에서 의학과 음악을 전공했던 자유 분방한 여성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구강외과 의사였 다. 당시 기자였던 그녀는 카프카의 작품을 체코어로 번역 하여 잡지에 실어주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렇게 해서 만난 두 사람은 따뜻한 우정관계를 계속 유지시켜 나가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카프카 의 내면적인 불안과 고통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태인 신분에 대한 카프카 자신의 자격지심도 그녀에 대한 접근을 주저하게 만든 장애물로 작

용했다. 불가능한 접근 대상에 대한 접근 가능성의 열망이 야말로 카프카로 하여금 고뇌에 빠트리게 하는 부조리 자체 였다고 볼 수 있다. 열정적이고 민감한 밀레나는 그런 카프 카의 우유부단성에 대해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 스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 다.“그의 불안이 무엇인지 저는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요양소에서도 그를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불안을 지니고 있는 한 그는 결코 건강해질 수 없습 니다. 심리적으로 아무리 원기를 북돋아 준다고 할지라도 불안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안이 원기 회복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밀레나는 적어도 카프카의 근원적인 갈등상태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이 보인다. 카프카는 그 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밀레나에게 자신의 일기와 미완의 소설 [아메리카]의 원고, 그리고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맡겼는데 나치 독일은 그녀를 라벤스브뤽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었으며 결국 1944년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Buber- Neumann(1997)은 그녀에 관한 전기에서 밀레나의 최후 를 동정적인 시각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불란서의 베 라 벨몽 감독에 의해 [카프카의 연인 밀레나]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도라 디만트는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 여성으로 그녀는 사 회주의자였다. 카프카와 동거하며 그가 죽을 때까지 돌봐준 장본인으로 카프카의 사망 후 나치 독일을 피하여 간신히 국외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1952년 런던에서 죽었다.

1923년 베를린에서 만난 그들은 동거에 들어갔으며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원에 들어간 카프카를 끝까지 헌신적으로 보 살펴준 여성으로 히브리어에 정통했던 그녀는 카프카에게 구약성서를 원어로 읽어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녀와의 결 혼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지만 카프카 자신도 결혼에는 자 신이 없었다고 본다. 그가 죽고난 후 게슈타포는 그녀의 집 에서 카프카의 원고 뭉치를 압수해 갔는데 결국 이 원고는 지 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카프카의 여성관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다만 그를 최 후까지 돌봐준 도라 디만트와의 짧은 동거생활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입장에서 그녀와의 관계는 정신적인 사랑과 신뢰의 관계였지 성적인 차원은 아니었다. 카프카는 시종일관 금욕적인 태도를 유지 하였는데 그 자신의 해결되지 못한 오이디푸스적 욕망은 카 프카로 하여금 상당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며 아버 지로부터의 가학적인 공격과 보복을 항상 두려워하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자조적으로 비난 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오이디푸스적 함정에서 스스로 탈출하고자 시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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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수차례의 약혼과 파혼의 반복은 카프카 자신의 갈등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해준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 에 대한 기대의 좌절을 누이동생 오틀라에게서 보상받고자 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심리적 족쇄를 풀고 자유를 얻고자 하는 탈출구로서 결혼으로의 도피를 생각하였으나 대리적 만족의 대상이라는 인식에 기초한 죄의식, 그리고 성적 억 압 및 금욕적 태도로 인하여 그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회 피한 채, 한없이 부끄러운 자신의 초라한 존재를 환상적인 작품활동을 통하여 보상받고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정체성의 위기

중부 및 동부 유럽의 변방지대로 이동해간 유태인들은 서 방세계에 정착한 유태인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더욱 큰 사 회적 핍박과 천대를 감수하며 지내왔다. 따라서 서부 유럽에 기반을 잡은 세련된 셰파르디 유태인들은 평소에도 동구의 가난한 아쉬케나짐 유태인들을 다소 업신여기는 태도를 견 지할 정도로 동구의 사정은 비참했다. 카프카가 태어나고 살 았던 보헤미아 지방은 여러 민족들이 뒤섞여 살았던 곳이다.

체코인, 독일인, 유태인, 집시족, 슬로바키아인 등은 서로 언 어도 달랐지만 당시에는 강력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령으로 함께 살았던 것이다. 카프카의 부모인 헤르만과 율 리에는 모두 1848년에 당시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 가 내린 유태인 해방령에 힘입어 비참한 게토생활을 청산하 고 프라하로 이주해온 사람들로 비록 반유태주의 감정이 남 아있었지만 열심히 일한 대가로 프라하 상류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던 행운아들이었다. 아버지 헤르만이 아 들의 출세를 위해 보인 강한 집념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본다면 결코 무리였다고 볼 수도 없을 것같다. 그 러나 카프카는 이런 아버지의 보상심리를 고통스런 감정으 로만 받아들였다. 단지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틀에만 맞추려 는 아버지의 뜻을 일종의 횡포요 폭압으로만 받아들인 것 이다.

카프카는 체코어, 독일어를 모두 배우고 사용하며 살았기 때문에 비록 독일어로 작품을 남겼다고는 해도 표준 독일어 문법에 맞지않는 특이한 문체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카프 카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독일인사회에 서 독일인 대우도 받지 못하고 체코인들에게는 독일인 취급 을 받아 경원시 되었다.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이방인은 당연히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기 마련이다. 나는 누 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나는 누구와 어울려야 하는 가. 나는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나는 누구로부터 인정

을 받고 누구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Guttmann(1971)은 이같은 정체성의 위기와 혼란이 특히 유태계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작품 경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카프카에게 정체성의 위기는 사춘기부터 가속화되었다. 물 론 아버지와의 갈등문제로 도전과 복종 사이에서 혼란을 거 듭하기는 했지만 가족내에서조차 그는 일찍부터 그 어떤 확 고한 소속감을 갖지 못한 채, 소외되고 있었으며 카프카의 내향성은 학창시절을 통한 성정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어디에도 속할 곳이 없다는 그의 소외감과 고독감의 근원은 카프카 자신의 혈통적 뿌리와 아버지의 영향, 사회적 편견 이라는 조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와의 고통 스런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으며 동시에 자신의 유 태적 기원에 귀속되고자 하는 개인적 소망 사이에서 고뇌하 였다(Pawel 1992). 카프카는 유태인의 정체성 문제에 있 어서 아버지의 입장과 분명히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사회적 신분상승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현지인들 과 동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카프카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반대의사를 아버지 앞에서 공공연히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아버지는 권 위주의적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기민하게 적응하 는 것이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의 성공 비결이었는데 그는 심지어 자신의 이름조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 에 있을 때는 독일식 이름인 Hermann에 체코식 성인 Ka- fka를 사용하다가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자 재 빨리 자신의 이름을 Herman으로 바꾸는 민첩성을 보일 정 도로 생존을 위한 변신의 귀재였다(Thiebaut 1996). 카프 카는 그런 아버지의 성향들이 체질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 다. 본래 푸줏간 출신의 카프카 집안 기질은 건강, 강인함, 끈기와 지구력, 유창한 언변술 등을 특징으로 하는 강한 생 활력, 사업욕, 정복욕으로 대변되는 물질적 탐욕인 반면에, 양조장 출신인 외가쪽 뢰비 집안 사람들은 고집, 민감성, 불 안감, 정의감 등을 기반으로 경건한 유대교 신앙을 지녔다는 점에서 기질적으로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탈무드 학 자 및 의사 등을 배출시킨 지식인 계층의 집안이었다는 점 에서 카프카는 친가보다는 외가쪽에 더욱 친근감을 지녔다 고 볼 수 있다(Wagenbach 1984).

카프카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K가 보이는 심리상태 는 카프카 자신의 내면적, 외부적 갈등구조를 여실히 드러 낸다. 카프카에게 이 세상은 모순에 가득찬 모습을 띄고 있 다. 자신의 세계에 철저히 몰입되어 젖어사는 사람들은 그 러한 모순과 불합리를 깨닫기 더욱 어렵다. 그러나 소외된 자의 눈에는 어느 누구보다 더욱 확대되어 잘 드러난다. 프 로이트도 마르크스도 서구인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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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心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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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때까지 서구인들이 인식하지 못 한 정신적, 사회적인 측면의 구조적 모순을 밝혀내는 작업 에 일생을 바친 것이다. 그런 작업에 일찍부터 서구사회에 서 소외된 유대인들이 공헌하였다는 점은 아마 당연한 귀 결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Mairowitz(1996)는 카프카 작품 의 주된 배경과 뿌리를 유태인의 민간설화 등에서 찾기도 하였는데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유머, 희화적인 비유, 우화 적인 형식 등은 그런 전통을 강력히 시사한다는 것이다. 자 신의 유태적 기원과 뿌리에 대해서 애써 외면하고 무시하고 자 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카프카는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부인할 수 없는 조건과 의도적으로 씨름하며 진지한 자세로 받아들였다. 단적인 예로, 유태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시오니즘에 대한 카프카의 태도는 다소 이중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시오니즘에 내포된 공격성과 선동성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는 시오니즘에 대하여 동 조하는 입장이었고 1913년 9월의 11차 시온주의자 회의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으며 1914년에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정착 기금 마련에 협조하기도 했다. 또한 그토록 바라던 팔 레스타인 여행을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하기도 했다(Muller 1999). 그는 임종시까지도 그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유 태인의 동화정책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였으며 유태민족주 의를 지지하였다. 그런 점에서 시오니즘에 대하여 공개적으 로 반대했던 아버지와 그리고 침묵으로 일관한 프로이트와 는 달리 카프카는 자신의 유태적 기원에 대하여 전혀 회의 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거부하지 않 고 수용했던 것이다.

심 판

성실한 은행원 요젭 K는 어느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채 신분을 알 수 없는 관리에 의해 체포된다. 그리고 그후의 사 태는 갈수록 수수께끼처럼 오리무중이 되어간다. K는 어떻 게든 자신의 곤경에서 빠져나가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지 만 방법은 전혀 없었다. 결국 K는 두 사람에게 개처럼 끌려 가 무참하게 처형당하고 만다.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소 문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심판은 1915년 에 완성되었다. 즉 나치독일이 출현하기 전에 나온 작품이 지만 이미 이 소설에서 카프카는 자신의 동족들앞에 어떤 운 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이 그와 비슷 한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하였다. 오손 웰즈는 이미 오래 전 에 흑백 필름으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지만 원작 의 분위기를 살리기에는 다소 역부족인 듯 하다. 카프카가 죽고난 후 그의 세 누이동생들 역시 나치수용소의 가스실에

서 아무런 저항없이 최후를 맞이해야만 되었다. 동생들뿐이 아니다. 그의 연인이었던 밀레나 역시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 어야만 했으며 끝까지 그를 돌봐주었던 도라 디만트는 천신 만고 끝에 해외로 도피할 수 있었다. 그녀가 목숨을 다해 지 키고 간직했던 카프카의 중요한 기록들 덕분에 우리는 다 행히 카프카라는 존재의 일부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카 프카의 작중 인물 K는 그 자신을 나타냄이 분명하다. Ka- fka의 첫 문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독일어 발음은 [카]이 다. 소설 속에 나타나는 주요 등장인물에는 판사와 변호사, 신부 그리고 처형자가 있다. 판사는 법을 수호하는 사람이 고 형을 언도한다. 변호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부 는 계속 K의 죄에 대해서 말한다. 자신의 죄명도 끝내 알아 내지 못하고 변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그는 개처럼 들판 으로 끌려나가 처형된다.

Fromm(1957)은 카프카의 [심판]을 상징적 언어의 관점 에서 분석하면서 K가 영문도 모르고 경찰에 체포당한 사 실은 단순히 신체적 구금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성장과 발달이 정지된 상태임을 반영한다고 하였다. 영어에 서도 arrest라는 단어는 체포와 더불어 정지라는 의미를 동 시에 뜻한다. 즉 K는 타인에 의존적인 남자로 특히 어머니 또는 여성에 의해 보살핌을 받고 의지하는 아이같은 존재 로서 그의 문제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데 있는 것이며 자신을 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는 유죄 라고 보았다. 달리 말해서 그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로서 체포의 진정한 이유를 이 해하려 하지않고 애써 회피하려던 점이 그의 가장 큰 문제 라는 지적이다. K가 지닌 유일한 도덕률이란 고작해야 복종 이 최대의 미덕이며 그에 대한 위반이 가장 큰 죄악이라는 정도의 권위에 의한 양심 밖에 몰랐다는 점이며, 또다른 양 심, 즉 인간적 양심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타락한 법 정에서 부당한 권위의 양심 문제로 착각하고 부질없는 투쟁 만을 일삼고 있었다는 점이 K가 지닌 비극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Canetti(1988)는 실패로 끝난 약혼녀 펠리체 바우 어와의 관계가 이 소설의 핵심적인 배경이라고 주장하였지 만 결정적인 증거를 작품속에서 입증하지는 못하였다. 그러 나 펠리체와의 파혼 경험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대개 의 평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권력자와 힘 없는 자, 법의 심판과 형벌의 구도는 약혼녀와 아버지 그리 고 무기력한 카프카 자신을 포함한 복잡하고 혼돈스런 삼 각구도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과연 누가 누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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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심판하고 또한 그러한 자격은 누구로부터 부여된 것이며 또

한 정당한 자격이 적절한 인물에게 주어진 것인가. 주인공 은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또한 상대의 신원도 제대로 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영문도 모른 상태에서 처형당 한다. 보이지않는 가해자들의 실체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만 하는 주인공의 운명은 마치 오랜 세월동안 유태 인들이 서구사회에서 겪었던 부당한 핍박과 고난에 대해 항 변하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의도적으로 설정된 모호한 상황 은 마치 부조리한 운명의 조건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고통 받는 현대인들 또는 유태인을 상징한다. 동시에 그것은 카 프카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따라서 심판은 카프카 자신 에게 이중의 사슬을 채운 상태로 몰고간 유태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과 분노 그리고 그에 따른 죄책감으로 자학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비극적 운명에 놓인 아들이 외치는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의 부친은 자신의 아들이 법관이 되기를 바랬지만 결국 그는 작가의 길을 선택하였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의 법과 세속 법을 함께 거부한 셈이다. 법정은 죄를 심판하고 형벌을 내 리는 곳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뜻을 거 역한 죄로 카프카 스스로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극단적인 자기 징벌 환상으로 점철된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인위적인 도그마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아버지를 포함 한 권위적인 모든 상들에 대한 통렬한 조소와 자학적인 복 수극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주인공 K의 노력과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누구도 그를 초대 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K는 집요할 정도로 성안에 관심을 지니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무던히 애쓴다. 소외 된 인간의 좌절과 고독이 작품 속에 짙게 배어있다. 막스 브 로트같은 평자에 따라서는 성은 결국 신을 상징한다는 뜻으 로 해석하여 심오한 철학적, 신학적 주제에 연관시켜 논하기 도 하지만 과연 카프카의 의도가 진정 그랬던 것인지 여부 에 대해서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학창시절부터 그는 자신 의 내면세계와 외부현실 사이에는 자신과 아버지 사이만큼 이나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크나큰 간격이 놓여있음 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성세대, 기득권자, 권위 주의적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적대감을 보였으며 청년이 되 면서부터는 자신을 사회주의자, 또는 무신론자, 무정부주의 자를 자처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는 무정부주의자 회 합에 참석하거나 사회주의적인 시오니즘 운동에 동조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K가 추구하는 바가 브로트가 주 장하는 것처럼 신을 상징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운명 을 좌지우지하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사회제도 내지는 아버 지의 권력 또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다만 추측 컨대 [율법 앞에서]와 같은 단편을 토대로 생각해본다면 신 의 존재와 율법에 대한 카프카 자신의 고뇌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점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신학적 주제로 받 아들일 수는 있겠다. [성]을 포함한 이들 작품에는 문과 문 지기, 그리고 문안으로 들어가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 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주인공의 등장이 특징이다. 유태인들 역시 카프카의 아버지처럼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중심부 또 는 상층부에 접근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들을 기울였지만 대개의 경우 실패와 좌절이 그들에게 돌아오기 일수였다. 다 수의 유태인들을 오랜 세월 비좁고 더러운 게토 안에 가두 고 경멸해왔던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카프카 역시 유 태인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된 서구기독교문명의 허구성과 모순에 일찍 눈이 떴으며 영원히 중심부에 접근할 수도 없 고 접근이 허용되지도 않는 서구사회의 변방을 배회하는 자 신의 소외된 모습을 작품화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힘과 권 위의 상징인 아버지라는 존재를 의미할 수도 있다. 알 수 없 는 그 어떤 음모가 진행되는 핵심 권력의 상징으로서 성은 무력한 K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억압체제를 의미할 수도 있다. 분석적으로 본다면 카프카 내면의 어두 운 무의식 세계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소용 없는 짓인줄 알면서도 K는 포기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 실체에 접근 하고자 무진 애를 쓴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영화로 만든 [카 프카]는 그의 생애를 직접적으로 다룬 내용이 아니라 오히 려 카프카의 작품 [성]을 토대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특이한 구도를 지닌다.

K는 카프카 자신의 이름 첫 문자와도 일치한다. 생존을 위 해서는 자신이 속한 생활권에 맞춰 수시로 이름도 바꾸어야 만 하는 유태인들에게 정확한 이름은 어차피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정확한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신분 도 명확하지 않다. 신원이 철저히 은폐된 주인공은 무조건 성안으로 들어가려고만 든다. 그 모습은 거의 필사적이기까 지 하다.

여기에 카프카 자신의 정체성 문제가 드러난다.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독일인도 아니고 체코인들에게는 독일인 행세를 해야되고 같은 독일어를 사용해도 결국 유태인일 수 밖에 없는 혼란된 정체성의 문제는 카프카의 삶에 항상 따라 다 니는 꼬리표 같은 것이 되었다. 그의 작품에 일관된 모습으 로 나타나는 불확실성, 통렬한 자기 분석, 심판에 대한 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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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집착, 외부현실로부터의 단절과 소외, 자유에 대한 희 구 등은 카프카 개인의 특성뿐 아니라 항상 좌절과 수모, 그리고 정체성의 갈등을 겪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유태민족 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한 운명적 조건을 지워준 아 버지의 폭군적 지배체제에 대한 투쟁과 반발도 엿볼 수 있 다. 다시 말해서 부당한 특권을 행사하는 가부장적 이데올 로기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성안으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가 장 큰 장벽인 셈이다. 그러나 이름도 신원도 불분명한 K의 모습에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힘없는 한 인간이며 비록 소외된 인간이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열망 하고 있다는 점이다.

변 신

어느날 갑자기 흉칙한 벌레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에 놀란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Samsa)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결국 가족들한테서까지도 따돌림을 당한 끝에 죽음을 맞이 한다.‘잠자’나‘카프카’는 모두 체코말로 외롭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잠자는 항상 따돌림 당하고 외롭게 살았던 카 프카 자신을 상징한다. 벌레로 변함으로써 가족의 생계를 부 양하는 짐에서 잠시 벗어난 주인공은 그러나 뜻하지 않게 그에 대한 대가 지불로써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만 가족들은 그의 말 소리를 듣지 못한다.

끔찍스런 의사소통의 단절이 그들 사이에 가로 놓인 것이 다. 결국 아버지가 내던진 사과에 몸을 맞고 중상을 입은 후 주인공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벌레의 상징 은 카프카 자신이 스스로를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던 말이 었다. 그는“독충의 세계에서는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 해서 상대방의 피를 빤다.”거나“나는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가끔 커다란 딱정벌레나 풍뎅이 모습을 한 내 자신을 생각 한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그 자신을 하잘 것 없는 벌 레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자학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는 대 목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유태인은 서구 기독교사회에서 항 상 벌레와 같은 취급을 받아왔다는 사실이다. 벌레같은 유 태인은 당연히 박멸의 대상이었기에 나치이데올로기의 등 장은 마른 땅에 비내리듯 일사천리로 유태인을 겨냥한 인종 청소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독일 어를 사용한 체코국적의 유태인이었지만 그 역시 벌레같은 인간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스스로 독일인이고자 하여도 결국은 독일인도 아니고 체코인도 아니면서 한낱 벌레같은 취급을 당하는 유태인일 수 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

닫게 된 카프카의 심리가 작품 [변신]의 배경을 지니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적대적 관계에 있던 부자 간의 갈등을 집약시킨 상징일 가능성도 많다. 해충으로 변 한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는 공격적으로 대하며 그를 죽음 으로 내몬다. 아버지를 향한 살해 욕망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카프카는 항상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 였으며 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따라서 한결같이 죽 음을 맞는다. 갑자기 벌레가 된 주인공은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된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다시 인간이 되고자 몸부림치던 그의 필사적인 노력도 가족들조차 그에 게서 외면하자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집안을 온통 뒤 집어 놓은 벌레가 죽자 그의 가족들은 드디어 기쁨과 안도 감에 휩싸여 교외로 산책을 나간다. 가정과 사회에서 모두 배척당한 나약한 한 유태인 남자에게 주어진 비극적인 운명 을 카프카는 동화적인 수법으로 잘 묘사했다. 현미경적인 미세한 시선으로 관찰한 벌레의 묘사는 읽는 독자들로 하여 금 주인공의 심리와 일체감을 얻게 하는데 그야말로 탁월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카프카 개인에게 주어진 조건은 노력으로 바뀌어질 성질 의 것이 아니었다. 절대적 권위와 힘으로 군림한 아버지의 존재는 그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존재였으며 그의 유일한 구 원자였던 어머니조차 그러한 아버지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 이 없는 존재로 그를 돕지는 못하였다. 그야말로 대책없이 내버려진 존재로서의 유태인 카프카가 스스로 혼자만의 힘 으로 신분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헤쳐나가야만 되었던 삶 의 조건은 너무도 벅찬 짐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감당키 어려운 삶의 조건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벌레 또는 해충으로 변신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매우 자학적인 환상을 통한 자기 극복의 한 방법으로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볼 때, 벌레같은 존 재로 취급된 유태인 문제는 결국 최악의 파국을 맞게 되는 데 그것은 다름 아닌 카프카가 죽은지 불과 20년 뒤에 실 행으로 옮겨진 소위 유태인 박멸사업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세 누이들도 사랑하던 연인도 모두 그런 해충 박멸사업의 일환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해충과도 같은 유태인 문제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최종 해 결책으로 제시된 박멸사업은 한 개인의 환상이 아니라 집단 적인 사업으로 이루어진 인종청소였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크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 동시에 그러한 비극적 상황의 이면에는 [변신]에서 드러나듯이 인간 상호 간에 존재하는 의사소통의 장애와 단절이 주된 이유로 작용 한다는 메시지가 더욱 우리 자신들을 전율시킨다. 문안으로 들어가는 일도 거절당하고 출구도 보이지 않는 현대인의 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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