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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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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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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복도훈*

목 차 1. 들어가며: 거짓된 이중협박

2. 이데올로기적 커플: 금욕주의자와 아름다운 영혼 3. 토템과 터부: 이데올로기적 항산화물 또는 대리보충 4. “그러니까 네가 종인 거야” : 문화비평 안에서의 계급투쟁 5. 동의와 그 불만

6. 나오며: 보편성의 내용을 위한 투쟁

<국문초록>

이 글은 오늘날 한국의 대안적 사회문화 담론에서 쟁점으로 부상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담화와 실천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이 글은 정치적 올바름 에 대한 좌파 이론가인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을 경유해 정치적 올바름이 보편적인 해방정치를 위한 투쟁에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를 측정하고자 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정치적 소수자에 경멸적이거나 그들을 배제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언어 사용과 행동을 규제하려는 화용론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보다 정 체성이 정치의 무대에 부상하게 된 후기근대 정치의 문화적인 산물이다. 본문에서 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본격적으로 다뤘다. 정치적 올바름은 후 기근대의 정치적 주체의 기본적인 모체로 출현한다. 그것은 초자아적인 자기검열 을 수행하는 강박증과 자신을 환경의 희생자로 간주하는 히스테리로 이중화된다.

그러나 그러한 주체는 궁극적으로 참여와 해방을 수행하지 못할뿐더러 소수자나 배제된 자들을 위한 평등주의적 실천에 해방적으로 기여하지 못한다. 이것은 불평 등을 무시하고 다양성을 선호하는 문화 비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본의 요구

*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교양학부 강의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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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갈수록 부합한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은 후기근대의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 를 유지하는 대리보충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젝의 비 판은 계급 적대를 제기할 때는 효과적이지만, 성적 적대를 다룰 때에는 한계를 노 출한다. 그럼에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젝의 비판과 그의 정치학은 민주주의에 대한 재정의가 요구되는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대안적인 사회적 실천과 담론을 일정하게 조명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주제어 : 슬라보예 지젝, 정치적 올바름, 혐오발화, 강박증, 히스테리, 정체성 정치, 대리보 충, 보편성, 특수성, 적대

1. 들어가며 : 거짓된 이중협박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에는 사람들이 선택과 배제의 양자택일을 강요당 하는 상징계(The Symbolic)를 살아간다는 것을 환기하는 개념이 있다. 그 것은 ‘강요된 선택’이다. 강도가 당신을 위협한다. ‘돈이냐, 목숨이냐.’ 만일 당신이 목숨을 택하면 돈만 잃되, 당신이 돈을 선택하면 돈과 목숨 둘 다 잃게 된다. 그런데 강요된 선택 가운데 거짓된 것은 없을까. 더 정확하게는 강요된 선택의 외관을 둘렀지만 사실상 이중협박(double blackmail)이라고 할 만한 그릇된 양자택일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2016년 미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 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세 컷짜리 카툰은 강요된 선택의 외피를 뒤집어 쓴 이중협박, 그릇된 양자택일의 프로파간다라고 할 만하다.

첫 번째 컷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힘들어 죽 겠어요.” 두 번째 컷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대답한다. “좋아요, 그러면 ‘정치 적 올바름’을 빼놓고 말해 봐요.” 세 번째 컷에서 다시 남자가 말하는데, 그 컷은 첫 번째 컷을 반복하면서 첫 번째 컷에서 남자의 발화에 숨겨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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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폭로한다. “여성과 소수자를 모욕하고 무시할 수가 없으니 힘들어 죽겠 어요.” 같은 컷의 오른쪽 하단에는 자그마한 글씨로 여자가 혼잣말을 한다.

“기분이 좀 나아졌나보지?” 카툰 작가는 남자의 발화위치를, 그의 발화에서 암시된다고 여겨진 여성혐오와 소수자혐오를 폭로한 것이다. 분명히 정치 적 올바름 때문에 힘들고 피곤하다고 말하는 여성혐오자와 인종주의자 등 은 넘쳐난다. 그러나 여성혐오와 인종주의에 맞서는 방식으로 정치적 올바 름에 대해 비판적일 수도 있다. 후자를 염두에 두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카툰의 요구는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여성혐오자 나 인종주의자로 몰아가는 낙인찍기를 수행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냐, 혐오냐’는 선택의 강요는 비단 다른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실의 한 예화는 아닐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이라면 이러한 선택의 강요란 실제로는 양자택 일의 거짓협박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거부해야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나아 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이 혐오세력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협박도 거 절하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 컷 짜리 카툰은 있을 수 있는 네 번째 컷을 삭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카툰의 거짓된 양자택일에 대한 지양을 통해 네 번째 컷을 위한 빈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제목 에서 ‘아뇨, 괜찮아요’는 양자택일의 대상을 선언적 분리(‘또는’)로 삭제하지 않고 양자의 내속적인 차이(적대)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려는 변증법적인 의도를 내포하는 진술이다.1)

슬라보예 지젝은 초기 저서에서 최근의 칼럼들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간의 방대한 글쓰기 이곳저곳에서 좌파이론가로서는 거의 드물고도 지속적으로

1) 슬라보예 지젝, 「계급투쟁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입니까? - 예, 부탁드립니다」, 슬라보 예 지젝․주디스 버틀러․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뺷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뺸, 박대진․

박미선 옮김, 도서출판 b, 2009, 131~132면. 지젝이 인용한 영국 코미디언 그룹인 마르 크스 브라더스의 농담(‘커피로 하시겠습니까, 차로 하시겠습니까 - 예, 부탁드립니다’)이 갖는 변증법적인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켈시 우드, 뺷한권으로 읽는 지젝뺸, 박현정 옮 김, 인간사랑, 2018, 29~3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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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의 ‘비정치성’과 ‘올바르지 않음’을 다양하게 비판해왔다. 그리 고 정치적 올바름의 담화규칙을 가볍게 무시한 트럼프에 대한 아이로니컬한 대선지지 선언 이후 미투 운동에 대한 최근의 칼럼 등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수위와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얼핏 보면 그의 저술에 담긴 이론적인 핵심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또한 그의 글쓰기 스타일인 숱한 여담의 한 사례로 제시되는 정도에 불과해 보인다. 게다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지젝이 수행해온 비판적 인 정의와 개념화는 때로는 다소 느슨하고 포괄적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지젝이 비판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탈이데올로기적인 후기근대에서 현저해 진 주체성과 타자성의 양태, 대안적인 사회, 문화, 정치 담론 및 실천에 내재한 교착상태를 드러내는 중요한 증상(symptom)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페미니즘 운동, 소수자적 정체성의 인권과 인정에 대한 다양하고도 마땅한 요구가 급속도로 부상하고 있는 최근 한국의 사회적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그 적용이 부적합하거나 때 이른 것처럼 보인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 이민자 등에 대한 시민사회적인 존중과 배려의 풍속, 요컨대 시민인륜(civility)이 현저하게 결락된 한국사회에서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화용론이기도 할 정치적 올바름의 요청은 필요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 사항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돌이키기 힘들 정도의 사회적 해악으로 증가하는 혐오발화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만한 시민도덕이나 사회 규범이 별반 마련되지 않은 사회적인 온도차를 짐작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은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을 수행하는 주체들에게 때로 는 거의 필수적인 도덕적․정치적인 기율이자 품행으로 전제되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정치적 올바름의 수행성이 과연 민주주의 적 자유와 평등의 해방적인 실천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 사회적 불평등의 온갖 불만을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전치시키는 광범위한 갈등에 대한 대안이나 해결책으로 정치적 올바름 전술이 과연 타당한 것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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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에 대해서는 따져볼 여지가 여전히 적지 않다.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질문 자체를 사전에 봉쇄하여 반지성주의를 조장․확산시키는 경 우이다. 누군가는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에 대한 있을 수 있는 비판 을 페미니즘에 대한 비평적 반동(backlash)과 성급하게 등치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페미니즘을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의 전술전략 의 평평한 결합으로 축소하면서 그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용치 않으려는 편협함과 옹졸함을 스스로 드러낸 것뿐이다. 대안적인 사회운동의 봉기에 적절한 때와 장소가 없는 것처럼, 그에 대한 있을 수 있는 비판에도 시기상 조란 없지 않은가. 이 글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유형화한 다음, 그에 내재한 정치적 효과와 한계를 살피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지젝 의 비판이 계급, 젠더, 인종이 교차하면서 사회적 적대(antagonism)를 가시 적으로 드러내는 한국사회에 필요한 해방적인 사유에 약간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바를 모색하고자 한다.

2. 이데올로기적 커플 : 금욕주의자와 아름다운 영혼

“정치적 소수 집단에 경멸적이거나 그들을 배제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언어 사용과 행동을 의도적으로 피하기. 의사소통 정책의 일환으로 정치 적 올바름을 택하는 기관과 조직은 그에 따라 인종차별주의적․성차별주의 적․기타 차별/편견의 언어 사용을 금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으로 중 립적인 용어를 사용하라고 요구한다.”2)좌파의 문화이론사전에 등록된 ‘정치

2) 이안 뷰캐넌, 「정치적 올바름」, 뺷교양인을 위한 인문학 사전뺸, 윤민정․이선주 옮김, 자음과모음, 2017, 510면. 참고로 주로 화용론의 측면에서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된 다양 한 견해들을 소개하는 국내 문헌으로는 박금자, 뺷정의롭게 말하기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참조.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책도 있다. 홍지수, 뺷트럼프를 당선시킨 PC의 정체뺸, 북앤피플, 2017. 그러나 이 책은 정치적 올바름이 미국의 대학, 기업, 정치 등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는 중이라는 편집증적인 음모론에 입각해 정치적 올바름이 적용된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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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올바름’에 대한 항목은 차별적인 언행을 줄이거나 교체하는 정치적 올바름 의 불가피성과 함께 그것의 딜레마를 부각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니거 (nigger)’는 흑인에게 향하는 모욕적인 발화일 수 있지만, 흑인들 자신에게는 연대의 표현일 수도 있다. 뺷혐오 발언뺸의 저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주디스 버틀 러는 ‘퀴어’(queer)가 끊임없는 재맥락화와 재전유 또는 수행적인 패러디를 통해 더는 혐오 발언이기를 중지할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집단의 주체적이고 도 평등한 상징성을 드러내는 인상적인 사례들을 제시한 바 있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적, 사법적 규제 대신에 해체주의적 해석 투쟁을 통해 혐오 발언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구조와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서 혐오 발언에 대항할 강력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국가와 법이 혐오 발 언을 직접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하는 것을 용인하면 혐오 발언에 대항하고 그것을 전복할 주체의 역량과 가능성을 스스로 줄이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의 법적 개입은 주체의 안전과 신변보호에 대한 국 가와 법의 통치역량을 불가피하게 강화한다. 따라서 버틀러는 혐오 발언을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직접적으로 묻는 사법적, 국가적 규제 대신에 혐오 발언이 수행되는 역사적인 맥락에 초점을 맞춘다. 버틀러에 따 르면 주체는 인종차별(또는 성차별)의 역사적 맥락의 부산물이며, 혐오 발 언은 역사적인 맥락 속에 오래토록 집적(集積)된 것을 주체가 재인용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버틀러에 따르면, 혐오 발언의 주체를 기소 한다고 할 때 실제로 ‘누구를 또는 무엇을 기소하는가?’라는 난제가 발생한 다. “만일 그런 발언이 기소되어야 한다면, 언제 어디서 기소가 시작되며 언제 어디서 끝나게 될까? 이는 자신의 시간성으로 인해 재판으로 회부될 수 없는, 어떤 역사를 기소하고자 하는 노력과 같은 어떤 것은 아닐까?”3)

사례들을 때로는 과도한 왜곡을 가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글의 전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우파의 편집증적이고도 피해망상적인 비난을 마땅히 거부하는 동시에, 지젝 식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좌파가 해방적 보편성, 계급투쟁 등에 대해 똑같이 편집증적인 비난을 하는 방식도 문제 삼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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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버틀러 식의 맥락의존적인 입장은 혐오 발언을 하거나 그럴 가능성 이 있는 주체가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감시하면서 맥락과 거 리를 두려는 정치적 올바름의 입장과 조만간 나란히 할 수밖에 없게 된다.4) 그것은 문제를 부각시키지만 해결할 수는 없다. 지젝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 해 갖고 있는 의구심 또한 여기에 있다.

지젝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역사의 종언) 이후 전개되 는 전지구적인 정치의 교착상태 곧 민족주의적(인종주의적) 근본주의의 발 흥과 해방적인 사건 없는 자유민주주의의 맥 빠진 정치의 교착상태에서 자유 주의 이데올로그나 좌파가 처한 곤경의 한 단면을 압축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증상이다. 그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정치적 올바름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발화 스타일 또는 발화위치, 자유주의적 또는 좌파적인 주체의 도덕적․정치 적 태도 또는 지향성, 타자(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입장, 관용이나 의례, 언어 와 화용론, 문화적 재현방식 등에 폭넓게 걸쳐있는 이데올로기이다.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은 정치적 올바름의 부상이 이데올로기의 종말 이후에 정치의 문화화, 언어론적 전환, 정체성 정치의 동시다발적인 융기와 발흥 속에서 언어, 재현, 개념 등의 영역을 놓고 치러진 우파들과의 헤게모 니적인 문화전쟁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5) 그러나 홀에 따르면 공적 영역에 어울릴 것 같은 어조로 사적 영역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방식, 어 떤 것이 다르게 불리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극단적인 유명론, 개 인이 대문자 진리(Truth)를 목격한다고 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특징은 마치 장구한 전략적인 목표는 포기한 채 수행되는 단기적인 전술적 기동전에 가 깝다. 홀이 직간접적으로 관찰한바, 무엇보다도 “도덕적 독선의 강한 압박 은 정치적 올바름이 내는 가장 특징적인 ‘목소리’”이다.6) 정치적 올바름은

3) 주디스 버틀러, 뺷혐오 발언뺸, 유민석 옮김, 알렙, 2016, 100면.

4) 레나타 살레츨, 뺷사랑과 증오의 도착들뺸,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3, 193면.

5) 이에 대해서는 문강형준, 「정치적 올바름과 살균된 문화」, 뺷비교문학뺸 73집, 한국비교 문학회, 2017, 1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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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적인 진정성, 참된 양심에 호소해 ‘진리의 정치’가 아니라 그것의 이미 지를 구축하는 것에만 전념한다는 것이다. 홀의 이러한 지적은, 곧 살펴보 겠지만, 지젝이 정치적 올바름의 당사자의 발화가 아니라 발화위치를 문제 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홀에 따르면,

정치적 올바름은 언어와 문화가 말하고 의미하려고 하는 바를 바꿔왔지만, 그 의미와 문화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개념을 바꾸지는 못했다. 이것은 비단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전반적인 전략은 잘못된 관념이나 의 미의 가면을 벗겨 그것들을 참된 것으로 대체한다는 정치학의 개념에 의존한다.

정치적 올바름의 전략은 ‘참된 양심[의식]’(true consciousness)으로 잘못된 인종 차별적, 성차별적, 동성애공포증적 의식을 대체하는 식으로 ‘참된 정치’(politics as truth)의 이미지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의 ‘진리’가 언제나 맥락 의 존적이고, 담론으로 구성되며, 권력관계와 연관되어 진리가 된다는 것, 그렇게 진리의 정치가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 탐사(미셸 푸코 등이 행한)를 이 해하려 들지 않는다.7)

지젝이 자신의 저술(뺷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뺸)에서 명시적으로 정치 적 올바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대목을 인용해보면 그것은 “인종적이고/

이거나 성적인 폭력의 더욱더 새로운, 더욱더 정제된 형식을 적발해내려는 강박적 노력”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을 “자신의 향유 를 희생”하려는 “백인 남성 이성애자”의 “강박신경증의 약점”과 결부시키 고, 그것의 유래를 “자신 안에서 좀 더 새로운 죄의 층위를 발견해내기 위 해서 자신의 생을 바친 초기 기독교 성자의 노력”과 연결 짓는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의 태도(어조, 목소리)가 헤겔을 빌리면 “금욕주의적 자기굴 욕과 관련하여 비난했던 발화된 내용과 발화행위 위치 간의 적대와 동일한

6) Stuart Hall, “Some 'Politically Incorrect' Pathways through PC”, The War of the words : The Political Correctness Debate, ed. Sarah Dunant, London : Virago, 1994, p.168.

7) Stuart Hall, Op. cit,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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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함축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은 백인 남성 이성애자 의 특권을 희생하는 척 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고집하는 자기기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지젝의 좌파 정치학의 관점에서 정치적 올 바름이란 “극단적 좌파의 위장된 표현”이기는커녕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방패”인 것이다.8)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젝의 초기 분석에서 도출된 핵심은 정치적 올바름을 수행하는 주체의 특징, 즉 그의 발화내용이 아니라 발화행위 또는 발화위치이다. 그런데 지젝은 정치적 올 바름을 수행하는 주체에 대한 분석과 나란히 후기근대적인 주체성에 대한 별도의 분석에서 “타자들의 현존 그 자체가 폭력으로 지각되는”9) 주체의 새로운 출현과 그의 경험양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지젝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의 종말, 역사의 종말은 이데올로기적 대타자 (The Other)의 철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정체모를 타자들(라캉 정

8) 슬라보예 지젝, 뺷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뺸,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7, 411면.

헤겔의 말을 덧붙이면 금욕주의자는 “자유의 개념”에 숭고한 느낌을 갖고 그것에 매달리 는 것을 “생동한 자유”로 오인하는데서 오는 내적 분열을 조만간 권태감과 공허감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G. W. F. 헤겔, 뺷정신현상학뺸 1권, 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988, 275면. 그런데 지젝이 비판적으로 언급한 스토아적인 금욕주의는 개방적인 다문화 주의적 교육정책과 관련하여 정치적 올바름을 어느 정도 장려하는 마사 C. 누스바움의 다음 진술에서는 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요즘은 ‘정치적 공정성’[정치적 올바름]

―우리가 소수자나 외국인이나 여성에 관해 말할 때 언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로 비평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표현―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유행이다.

그런 철저한 검토는 형태에 따라서는 자유로운 언어 표현에 위험이 될 수도 있으며, 당연히 이런 자유는 섬세하게 옹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표현이나 심상의 철저한 검토가 반드시 전체주의적 동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반민주적인 ‘사상경찰’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철저한 검토를 요구하는 스토아철학의 밑바탕에는 개인과 집단에 대한 증오는 개인적․정치적으로 유해하고, 교육자들은 여기에 저항해야 하며, 생각과 말이라 는 내적 세계는 궁극적으로 증오에 저항해야 하는 장소라는 타당한 견해가 자리잡고 있다. 내적 세계를 철저하게 검토하자는 발상은 기독교인에게도 친숙한데, 그도 그럴 것이 마음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성경의 명령은 스토아철학과 역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다.” 마사 C. 누스바움, 뺷인간성 수업뺸,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7, 111면.

9) 슬라보예 지젝, 위의 책, 4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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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석의 대상 a)의 생생한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 를 들면, 정체 모를 테러리스트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정치적인 적이 아 니라 전 인류에 범죄를 저지르는 근본악의 화신이며, 심지어는 당신의 이웃 조차 그러한 테러리스트나 범죄자일지도 모른다. 역사의 종말과 같은 이데 올로기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구체적인 생활세계에서 타자에 대한 주체의 지각과 감각의 대대적인 신경증적 변화를 수반한다. 이데올로기적 대타자 의 철수(또는 온갖 위협적인 타자들, 대상 a의 귀환)로 인해 ‘타자들과의 모 든 접촉은 폭력적인 침해로서 지각되고 경험’되는 후기근대적인 주체성이 출현한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주체의 증상은 타자들과의 접촉에서 올 수 있는 폭력과 상해의 지각과 경험(향유)을 끊임없이 단속하는 의례와 규율 을 자신에게 부과하는 강박신경증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강박신 경증적 주체의 출현은 타자의 현존을 폭력적인 침해로 경험하는 희생자적 인 주체, 사악한 세계의 피해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계(타자)에 호소하고 인정받으려는 히스테리증적 주체의 출현과 동시 발생적이다. 이 둘은 잘 어 울리는 이데올로기적인 커플을 이룬다.

지젝은 헤겔을 빌려, 정치적 올바름의 강박증적 주체를 금욕주의자로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히스테리증적 주체를 ‘아름다운 영혼’(die schöner Seele)으 로 부른다. ‘아름다운 영혼’은 뺷정신현상학뺸에서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정신’

이라는 항목에서 ‘양심’과 관련이 깊다. 요약하면 양심은 특정한 의무를 행동 으로 실천하기보다는 정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신념과 비평으로 표현한다.

더 정확하게는 양심은 신념과 비평의 표현으로 자신의 의무를 실천한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행동은 타자에게 죄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심은 “악한 타자의 의식을 불량, 비천하다는 등으로 일컫는 열성”으로, “이 열성에 넘치 는 의식”을 자신의 “진정한 의무”로 칭한다.10)그러나 양심은 결국 자기 마음 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현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한 채 아집의 무기력으로

10) G. W. F.헤겔, 뺷정신현상학뺸 2권, 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988, 79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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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들거나 끊임없이 타자를 비난하기만 하는 ‘아름다운 영혼’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영혼’은 자신이 비난하는 악한 세계의 진행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믿는 위선자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세계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데 기여한 존재이다. 지젝에 따르면 ‘아름다운 영혼’은 “세계의 사악한 진로들을 개탄하 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세계의 재생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11)자기모순적 인 태도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금욕주의자가 온갖 향유를 금지하는 와중에 금지 자체에 몰두하게 되는 자기역설적인 태도와 비교해볼 만하다.

요컨대 지젝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후기근대적인 주체성의 특정한 양태 로 출현하되, 금욕주의와 아름다운 영혼, 강박신경증과 히스테리증, 이른바 남성과 여성의 성차(sexuation)로 표식되기도 한다. 이쯤에서 정치적 올바 름의 주체가 대면하는 타자 혹은 타자성의 양태는 무엇인지를 물을 차례인 듯하다. 이러한 질문은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과 실천이 윤리적으로도 정치 적으로도 타자와의 실재적인 만남을 체계적으로 회피하는 시도가 아닌가 라는 질문으로 바꿔 물을 필요가 있겠다. 그러한 타자와의 만남에 대한 회 피는, 지젝에 따르면, 도처에서 타자와의 만남을 희생자를 만드는 경험으로 치환하고 타자의 침해에 대해 규제를 가하거나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초자 아적인 죄책감에 근거해 스스로 규제의 규범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방 식으로 나타난다.12)정치적 올바름이 유별나게 강조하는 타자의 침해와 자 기 단속을 악순환하는 리비도 경제는 지젝의 정치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 소인 계급 적대와 성적 적대를 체계적으로 은폐하거나 위장, 전치하는 이데 올로기적인 책략으로 기능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지젝이 주로 미국

11) 슬라보예 지젝, 뺷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뺸, 정혁현 옮김, 인간사랑, 2016, 59면. ‘아 름다운 영혼’은 지젝의 최초의 저작(1988)인 뺷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뺸(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13)부터 등장하는 개념이다.

12) 슬라보예 지젝, 뺷지젝이 만난 레닌뺸, 정영목 옮김, 교양인, 2008, 266~267면; 「반인권론」, 김영희 옮김, 뺷창작과비평뺸, 2006년 여름호, 3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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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례를 중심으로 정치적 올바름의 담화와 실천이 다양한 방식으로 본격 화된 1990년대부터 그에 대해 좌파적인 비판을 수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3. 토템과 터부 : 이데올로기적 항산화물 또는 대리보충

1장에서도 환기했지만, 항간에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그것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을 페미니즘, 소수자 정치에 대한 ‘백래 시’ 그 자체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는 그러한 비 난을 하는 상대방에게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이 효과적이겠다. 즉 페 미니즘이나 소수자 정치에 대한 좌파적인 비판이, 그 비판에 대한 응수로 백래시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큼,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과 과연 곧바로 등치될 수 있는가라고 되물어보는 것이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자신이 옹호하는 이론과 실천에 대한 비판적 이의제기를 사전차단 하고 봉쇄하거나 반대로 그것을 숭배하는 반지성주의이다.

이 글의 맥락에서 지젝은 후기근대적인 정체성 정치나 포스트모더니즘 을 표방하는 문화연구에서 종종 보이는 ‘이데올로기적 항산화물’, 즉 특정 한 개념에 대한 길들임을 통한 사유금지(denkverbot)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뺷전체주의가 어쨌다구?뺸에서 자유민주주의적 합의 아래에서 전체주 의라는 개념이 그에 대해 어떠한 진지한 사유도 허락할 필요가 없는 근본 악으로 규정되며, 이러한 규정은 자유민주주의적 합의의 환상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적 항산화물’의 사유금 지는 이른바 급진적 학계에서도 모종의 불문율로도 나타난다. 스튜어트 홀 은 정치적 올바름이 참된 양심에 의해 온갖 혐오에 맞서 참된 정치의 이미 지를 내세우지만, 그것은 진리가 지식의 구성적 산물임을, 맥락화의 전적인 효과임을 깨닫지 못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은 다만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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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담론을 탈맥락화하여 특정 언어나 발화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만 표현되 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적극적으로 (재)맥락화를, 발화행위의 위치를 폭로하는 보다 진화된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지젝 자신도 정치적 올바 름에 대한 초기의 비판에서는 이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는 다음 과 같이 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연구는 진리(관여된 주체적 입장)와 지식을 혼동함으로써 ― 그 둘 사이를 갈라놓는 간극을 부인하거나 지식을 진리 아래 직접 복속시킴으로서 ―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진지한 태도를 결 여하고 있는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13)여 기서 ‘지식을 진리 아래 직접 복속시킨다는’ 서술이 의미하는 바는 지식이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위치한 발화행위(진리)의 부산물일 뿐만 아니라, 오 로지 그것이라고만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지식)은 사유하는 서구 남성 주체(진리)의 산물에 불과 하다고 폭로하는 것이다. 지젝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학계의 “논쟁에서 자 동적으로 점수를 따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상대의 입장이 역사적 맥락 속에 적절히 ‘위치 지어져 있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사례를 들고 있다.14) 물론 그는 특정 지식이 진리의 산물임을 부각하는 방법에 일정하게 동의하 지만 그러한 방법의 상투적인 역사화(맥락화)에 저항하는 ‘실재’(The Real) 로서의 지식을 고수하고자 한다.15)

한편으로, 맥락화하라는 명령의 상투화와 함께 나란히 문제 삼아야 할 것 은 특정 개념(전체주의)에 대한 터부뿐만 아니라 토템적 숭배이다. 예컨대 정체성 정치처럼 젠더와 인종처럼 사태와 결부되어 다루기 대단히 민감한

13) 슬라보예 지젝, 뺷전체주의가 어쨌다구?뺸, 한보희 옮김, 새물결, 2008, 341면. 고딕 강조 는 원저자.

14) 슬라보예 지젝, 위의 책, 12면.

15) 다양한 방식의 역사적 맥락화에도 불구하고 다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가지는 고유의 급진성에 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 뺷까다로운 주체뺸,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5. 특히 「서문: 하나의 유령이 서구의 학계를 배회하고 있다……」, 9~15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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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이 있는데, 누군가가 그것에 대한 비판을 제기할 때 비판에 정당한 이 의를 제기하기보다는 무효화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 탈맥락화, 물신화와 같 은 또 다른 개념들을 나열해 덧붙일 경우를 떠올려보자. 아도르노는 개념들 은 사태와 맞닥뜨리면서 그 자체로부터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 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사태와 맞닥뜨리는 대신에 외부로부터 자의적이 고도 상이한 의미를 그 개념에 덧붙이는 경우 논변은 궤변이 되기 십상이 다.16)개념은 학문의 전쟁터에 던져진 무기이지만, 개념의 생명력을 단축시 키는 것은 개념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사전차단하려는 움직임이다. 그것이 야말로 개념에 대한 토템숭배, 즉 물신화이다. 개념에 대한 토템숭배는 물 론 학문적인 게으름의 산물이겠지만, 그보다는 개념을 통해 수행하려는 이 론적 투쟁의 자기방어가 다다를 수 있는 막다른 교착상태이다.

정체성 정치의 예를 들기는 했지만, 정체성 정치는 순전히 그것의 특수주 의와 당사자성으로만 축소되지는 않을 것이다.17)지젝 또한 정체성 정치의 특수주의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정체성 정치는 차이를 내포하 는 특수주의에서 시작한다. 그렇지만 정체성 정치가 정치의 최상의 모델은 아니며, 자동적으로 보편성을 담보하지도 않는다. 지젝은 ‘자기 자신의 특 권적 경험은 불량하고 반동적인 논거’라는 질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면서

“누군가의 특수한 발화위치가 그 말의 진정성을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보증 한다는” “열성 당원들의 널리 퍼진 주장”, 곧 당사자성에 대해서 강한 의문

16)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뺷변증법 입문뺸, 홍승용 옮김, 세창출판사, 2015, 46면.

17) 이 글의 맥락에서 정체성 정치는 여성과 소수자의 (때로는 폐쇄적인) 당사자성을 내세 우는 정체성 정치를 일차적으로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난민, 이주노 동자, 여성, 소수자 등의 권리주장에 맞서 자신들의 사회적 박탈감과 좌절을 앞서의 난 민, 여성 등에게 공격적으로 드러내는 또 다른 정체성 정치(주로 남성-노동계급-실직자 등의)와 상호 반영적인 관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젝의 정치학은 이처럼 상이한 정 체성 정치의 좌절되고 뒤틀린 인정과 공격적인 원한감정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고 비난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공통적으로 승화시킬 보편적 공적 공간 의 재창출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켈시 우드, 앞의 책, 602~6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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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제기한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논쟁에서 지젝은 일련의 정체성 정 치(성적, 소수자적, 인종적 등등)의 특수한 종(種)들 각각이 다른 종(과 자 신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른가)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종 그 자체에 대해 질 문하는 방식으로 보편성을 탐문하거나, 라클라우의 표현을 빌리면 보편적 표상기능을 점유할 가능성을 탐사한다.18)실천적으로 매우 어려운 작업이 겠지만, 보편을 표상할 가능성을 내포한 각각의 정체성은 자신의 차이 안에 서, 차이를 보존하면서도 등가연쇄를 맺는 방식으로 보편적인 연대를 창출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젝은 만일 정체성 자신의 ‘진정성’을 다른 정체성과의 차이에서만 찾는 ‘변형주의적 조작’에 머무는 정치는 궁극적으로는 ‘해방적 정치의 토대를 침식’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한다.

같은 이야기를 정치를 개념으로 사유하려는 일체의 시도나 논쟁에 대해서 도 할 수 있다. 결국 논변은 주어진 개념을 방어하기 위해 다른 개념을 외부 에서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자신의 서술 속에서 지양하는 움직임으 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매개 활동에서 자신의 생명력을 점차 획득하는 개념은 사태에 대한 적실한 판단과 사유를 제공하는 무기가 된다. 정체성 정치에 대한 논쟁이 옳고 그름에 대한 토론 대신에 도덕적 우월성이나 토템 화된 당사자성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축소되는 양상은 한국에서도 이전보다 는 한층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 협소한 당사자성에만 입각하면 어떤 사태 가 초래하게 될까. 논쟁에서 자신이 옳고 타인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 진리주장의 형식이 되고 타인을 비진리의 존재로 낙인찍는 것으로 자신의 옳음과 타인의 틀림을 입증하는 것으로 변하기 십상이 된다. 도덕주 의적인 우월성이 논쟁의 승패여부를 가르고, 금기가 논쟁을 대체하며, 제기 될 수 있는 논쟁의 어휘들은 곧잘 검열의 대상이 된다. “명제들은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결하거나 불결하다고 판정된다. 명제뿐

18) 슬라보예 지젝, 「자리를 점유하기」, 뺷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뺸, 432면(각주 9). 에르네 스토 라클라우, 「보편성의 구성」, 같은 책, 410~4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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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아니라 간단한 단어도 순결하거나 불결할 수 있다.”19)결국 당신은 나의 주장이 틀렸다(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틀린(옳은)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표현으로는 효과적일지는 모르지만,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연대의 창출에는 거의 유효하지 않은 전술 이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는 분열을 조장하고 획책할 뿐이다.

물론 맥락화(역사화)를 강조하기 또는 정체성 정치처럼 당사자성에 입각 하는 방식으로 발화하기의 증가하는 특징은 결국에는 우리가 “의견의 차 이”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아닌 “주체 위치의 차이”20)가 현저하 게 중요해진 정체성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역설(力說)한다. 따라서 주체의 발화위치를 끊임없이 검열하거나 드러내는 방식인 ‘X로서 말하는데’21)와 같은 발화방식은 더욱더 권장되고 확산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와 발화 가 정체성의 표현수단이자 정체성 구축의 우세한 수단이 될 것이다. 또한 발화의 교정을 통해 도덕적․정치적 교정이 가능하다는 정치적 올바름의 화용론이 대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의 화용론은, 지젝에 따 르면, 이데올로기적 간지(奸智)로 작동하면서 권력담론이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유하는 것으로 더욱더 잘 기능한다. 적을 죽이 는 일을 ‘타깃의 소멸’로, 민간인 살상을 ‘부수적인 피해’로, 해고를 ‘구조조 정’이라고 고쳐 부르면서 말이다. 결국에 그것은 라캉의 용어로 ‘실재’와의 마주침을 체계적으로 회피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22)

정치적 올바름은 민주주의적 자유와 평등의 표현이 아니라 그것의 ‘대리 보충’(supplement)으로 기능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내재한 문제는 지젝 그 리고 웬디 브라운 등이 비판한 관용의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처한 교착 상태와 얼마간 닮았다.23)정치적 올바름은 민주주의적 자유평등의 덕을 실

19) 마크 릴라, 뺷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뺸, 전대호 옮김, 필로소픽, 2018, 95면.

20) 월터 벤 마이클스, 뺷기표의 형태뺸, 차동호 옮김, 앨피, 2017, 130면.

21) 마크 릴라, 앞의 책, 94면.

22) 슬라보예 지젝, 뺷나눌 수 없는 잔여뺸, 이재환 옮김, 도서출판 b, 2010, 312~3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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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는 것으로 권유되고 통용되기보다는, 소수자에 대한 자유주의적 주체 의 관용을 통해 평등과 자유를 ‘대리보충’하는 기제로, 혐오발화를 관리하 고 규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강요된다. 거기서 주로 장려되는 것은 감수성 훈련, 태도의 치료와 개선뿐이다.24)뿐만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은 바로 그 러한 방식으로 소수자를 관용하는 방식 그대로 소수자를 불관용하는 타자 를 불관용하는 특정한 정체성의 생산에 기여한다. 그것은 대개 소수자에 대 한 불관용의 혐오발화를 적발하거나 혐오발화를 하는 존재를 불관용하면 서 소수자를 관용하는 자신의 도덕주의적 우월성을, 그러한 관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자들과 스스로를 차별화하면서, 은밀하거나 공공연 하게 내세운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은 차별을 포용하기보다는 차별로 다 른 차별을 맞세운다. 그것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행하는 혐오발화의 주체 를 불관용하고 그들과 위계적인 구별 짓기를 행한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 올바름이 직접적으로 혐오발화를 낳는다거나 혐오발화의 위선적인 이면에 불과하기에 전혀 쓸모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혐오발 화가 정치적 올바름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한다는 뜻도 아니다.

한편에서는 소수자를 참을 수 없어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소수자를 참을 수 없어하는 타자를 참을 수 없어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혐오발화를 관리하고 규제하려 하지만, 그것의 중단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는 못한다. 최악의 경 우, 정치적 올바름은 혐오발화의 주체를 그저 불관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 은 일종의 악순환에 불과하다. 지젝이라면 혐오발화에 대응하려는 정치적 올바름은 혐오발화의 불관용을 ‘반영적으로 규정’(reflexively determinate)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23) 웬디 브라운의 뺷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뺸, 이승철 옮김, 갈무리, 2010, 특 히 62~65면 참조.

24) 웬디 브라운, 위의 책, 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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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니까 네가 종인 거야” : 문화비평 안에서의 계급투쟁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전치에 의해 차폐된 실재를 끊임없 이 되살려내려는 지젝의 노력은 「라라랜드 : 레닌주의적 독해」와 같은 ‘문 화비평 안에서의 계급투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올바 른’ 비난에 따르면 “게이가 많은 도시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하는” <라 라랜드>(2016)에는 “게이커플이 없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성소 수자와 소수민족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좌파들이, 하층 계급 노동자들이 철저히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노동자들이 안 보이는 것은 괜찮고, 게이와 레즈비언만 도처에 있으면 만사오케이란 말일까?”25) 만일 한국에서 <라라랜드>에 대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비평이 쓰여진 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가령 그것은 ‘평범한 대로’ 듣기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라랜드>의 판타지에 몰입하는 관객들의 꿈을 그런 대로 이 해하려고 하지만, 뮤지컬 영화로서의 <라라랜드>에 대한 일련의 비평을

‘형식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면서, <라라랜드>의 현실도피적인 꿈에서 깨 어나 헬조선의 아픈 현실 속에서 오늘도 나는 촛불을 든다고 말하는 류의 문화비평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라라랜드>의 LA에는 성소수자가 등장하 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LA에는 ‘트럼프가 싫어한다는’ ‘키 작은 노 동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라라랜드>는 ‘젊은 백인 미남미녀’가 자신의 화려한 꿈을 펼치는 자기계발서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26) 그런데 이러한 류의 문화비평은 ‘젊은 백인 미남미녀’가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노동자라는 초보적인 사실을 간과할뿐더러, 영화에서 사랑 대신에 경력을 택한 미아와

25) Slavoj Žižek, “La La Land : A Leninist Reading”,

http://thephilosophicalsalon.com/la-la-land-a-leninist-reading, 2017. Feb. 19.

26) 천정환, 「‘라라랜드’를 거부하며」, 뺷경향신문뺸, 2017. 2. 8.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70207204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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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택을 지지해준 세바스찬의 행위(act)에서 대의에 대한 헌신과 사랑에 대한 충실성을 읽어낼 여력과 가능성은 없다. 지젝이 어디선가 언급한 우화 를 비틀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비평은 어두운 곳에서 잃어버린 바늘 을 찾는 소년의 행위와 닮았다. 누군가 그에게 바늘을 왜 이곳에서 찾고 있 냐고 묻자, 소년이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가 제일 어두우니까요.” 소년은 밝은 곳에 바늘이 떨어져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조차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행위자는 자신의 올바름을 증명해줄 수 있는 타자를 끊 임없이 찾아다니거나 ‘좋은’ 주인을 원하면 아무래도 그만이라고 말한다.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의 발화에는 특정한 타자에 대한 주체의 환상이 작동 한다고 말한다. 그 타자는 일종의 ‘안다고 가정되는’(supposed to knowing) 특권화된 타자의 형상이다. 그들은 영화 속에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성소수자 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거나 폭력에 의해 희생된 무구한 희생자 (아름다운 영혼)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비평은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 에서 그들이 보낸다고 간주되는 환상적인 응시에 매혹된다. 한편으로 희생 자적, 소수자적인 타자성에 붙박인 순진한 응시, 환상적인 매혹과 함께 거 론되어야 할 것은 또 다른 타자 즉 지배계급 또는 ‘갑질’하는 자들에 대응하 는 ‘을들’의 방식에서 현저해지는 어떤 경향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나쁜 주 인에 대한 비난 이면에 좋은 주인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것이다. 헤겔은 뺷역 사철학강의뺸에서 종(從)의 도덕에 대해 이야기한다.

심리학자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사생활에서 지니고 있는 특수한 사실들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인간인 이상 당연히 먹고, 마시고, 친구들과도 교제하고, 때로 는 감동도 하고 격앙도 한다. “종의 안중에는 영웅은 없다”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나는 전에 이에 덧붙여서 말했었다. “그것은 영웅이 영웅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종이 종이기 때문이다.” 괴테는 내가 한 이 말을 10년 뒤에 가서 되풀이하고 있다.

종은 영웅의 장화를 벗기기도 하고 그의 잠자리를 돌보기도 한다. 또 그가 샴페인 을 즐겨 마신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역사기술에 있어서 이와 같은 종의 본성을 가진 심리학자에 의해 기술되는 역사적 인물은 화를 당할 것이다. 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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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라 해도 수평선상으로 끌어내려져, 이러한 인정에 정통한 종의 도덕과 같은 줄에 세워지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그보다 몇 계단 더 격하되기도 한다.27)

이 흥미로운 문단에 등장하는 심리학자는 자신의 안중에 영웅 따위는 없다 는 ‘종의 도덕’에 매혹되는 오늘날의 문화비평가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심리 학자-문화비평가는 주인-영웅이 ‘사생활에서 지니고 있는 특수한 사실들’,

‘먹고, 마시고, 친구들과도 교제하고, 때로는 감동도 하고 격앙도’ 하는 사실들 을, 때로는 추문까지도 낱낱이 알고 있는 종의 이미지에 한참 매혹되고 있다.

물론 그 자신이 ‘종의 본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종은 주인-영웅의 위선 을 발견하며,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의 사회적 위신과 명망을 스캔들 폭로로 단숨에 몰락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는 영웅-주인을 격하시킴으로써 도덕적인 자기만족(‘인정’)을 얻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꿔 쓰면, 만일 우리는 그가 좋은 자본가이기만 하다면, 만일 그 기업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회적 기업이기 만 하다면 아무래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헤겔의 위 구절에 대한 논평에서 서동진이 지적했듯이 종의 도덕의 수평선은 그 나름의 평등주의의 구현이기에 애써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또한 우리가 수많은 을들이 갑의 갑질에 의해 겪는 굴욕과 모멸에 분노를 거둬야 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인정과 불인정으로 갈수록 패러다임화되는 사회 속에서 관점 의 근본적인 이동이 포착된다. 가난한 사람은 사회적 소수자와 마찬가지로 주변화된 정체성으로 함께 묶이며, 예컨대 프란체스코의 빈자는 혁명의 주 체가, 청빈은 급진적인 윤리가 되는 것이다.28)계급적인 “차이”는 계급적인

27) G. W. F 헤겔, 뺷역사철학강의뺸, 귄기철 옮김, 동서문화사, 2008, 41~42면. 이 구절에 대한 탁월한 논평으로는 서동진, 「‘을질’하는 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미망 - 문화비평의 윤리를 생각하며」, 뺷말과활뺸 9호, 2015년 8~9월.

28) 월터 벤 마이클스, 앞의 책, 333면. 마이클스는 가난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취급하는 뺷제국뺸의 저자들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존재론적 정치학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마이클스는 카트리나 재해에 대한 조지 W. 부시의 거의 고의적일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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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문제로 재정의되는데,29)이러한 정의는 계급 정치를 정체성 정치 의 하위 범주로 가두는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충분히 이유 있는 반론, 예를 들면 사회적 인정과 부의 재분배가 동시에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계급적인 편견이라면, 을이 겪을 모욕과 굴욕이 정말 문제가 된다면, 주인도 그런 문제가 교정되어야 할 ‘인정’의 중요한 방식임 을 결코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30)주인은 그저 자기만족적이거나 노예의 반란에 아무런 대비가 없는 무방비한 존재가 결코 아니다.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를 고용한 변호사는 바틀 비를 고용한 이후부터 구치소에서 그가 자진(自盡)할 때까지 돌보려고 했 던, 도덕적으로는 크게 나무랄 데라고는 없는 ‘좋은’ 주인이다. 그러나 변호 사는 ‘그러지 않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말하는 바틀비의 이유를 추궁하고, 그 이유를 심리적으로 파고들거나 자유와 필연, 의지 등 의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해석한다.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굴욕과 수치심을 주는 것을 조심하는 만큼이나 그를 달래고 어르며 회유한다(물론 늘 그런

미온적인 대처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흑인에 대한 차별의 결과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적이다. Walter Benn Michaels, “Introduction”, The Trouble with Diversity : How We Learned to Love Identity and Ignore Inequality (2nd edition), Picador, 2016, p.11.

29) 월터 벤 마이클스, 「계급이 인종보다 중요하다」, 곽영빈 옮김, 뺷자음과모음뺸, 2014년 겨울호, 340면.

30) 최근에 삼성전자는 미국 최대의 성소수자 축제인 프라이드 위크를 맞아 뉴욕의 삼성 마케팅 센터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문화행사를 마련하고 지원했다. 삼성은 “진보 성향의 젊은 소비자층에 긍정적 브랜드 이미지를 심기 위해 성 소수자와 이민자, 여성 등 소수자 의 인권을 지지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는 미국의 유수한 다른 기업들의 사례 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인용한 기사에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는 얼마든지 포함될 수는 있어도 거기서 예외인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 이 금지된 존재는 물론 국내외에서 노동탄 압으로 악명 높은 삼성에게는 노동자일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자본은 단 하나, 불평등을 제외하고는 차이, 다양성을 사랑하고 또 얼마든지 장려한다는 것이다.

김용원, 「삼성전자, 미국 뉴욕 마케팅센터에서 성 소수자 위한 행사 열어」, 뺷BUSINESS POST뺸, 2018. 7. 3.

http://www.businesspost.co.kr/BP?command=naver&num=87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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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변호사가 설령 굴욕과 모멸을 준다한들 바틀비가 눈 하나 깜짝할 리는 없겠다). 바틀비가 죽고 나서, 변호사는 수신배달 불능편 지(dead letters)를 태우는 일을 맡았다가 해고된 비정규직 출신의 바틀비 에 관한 소식을 뒤늦게 듣고 애달파한다. 이 정도라면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좋은 주인이 아닌가. 종의 불평이라면 변호사는 사무실의 다른 서기들에 대 한 세심한 업무배려로 그들을 잘 다독이질 않았나. 따라서 헤겔은 종이 불 평하는 방식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주인을 두고 ‘종의 안중에는 영웅은 없다’

고 말하는 종에게 오히려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종인 거야.’

그러나 주인이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종도 있다. 바틀비는 변호사에게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러자 바틀비가 변호사에게 되묻는다. ‘이유를 말 해주지 않으면 모르시겠습니까?’

지젝이 바틀비의 거절의 정치학31)을 요청하는 이유는, 예를 들면, 끊임없 이 상해와 위협을 강조하고 조장하는 ‘공포의 정치’32)에 즉각 반응(반동, react)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박적인 행동의 넘침이 자본이라는 추상적 실재 가 지배하는 세계에 오히려 부합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때로는 그로부터의 근본적인 물러섬, 바틀비 식의 근본적인 정초의 몸짓이 더욱더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쯤에서 사악한 세계로부터의 물러남과 거리두기가, 그리

31) 이런 입장은 특히 슬라보예 지젝, 뺷시차적 관점뺸(김서영 옮김, 마티, 2009), 뺷헤겔 레스 토랑뺸 & 뺷라캉 카페뺸(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에서 잘 드러난다.

32) 공포정치는 자코뱅의 테러정치가 아니라 불확실성의 위험사회 속에서 단자화되고 형해 화된 개인과 공동체의 구조적 취약성을 파고들어 그들에게 공포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후기근대의 신종 이데올로기로, 좌우파 모두 활용하는 특색이 있다. 프랭크 푸레디는 공포정치가 신자유주의의 가속화로 인해 전통적인 윤리체제가 붕괴된 이후에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새로운 에티켓’을 요구한다는 사회학적인 분석을 내리고 있다.

프랭크 푸레디, 뺷우리는 왜 공포에 빠지는가?뺸, 박형신․박형진 옮김, 이학사, 2011. 특히 7장 ‘새로운 에티켓’을 참고할 것. 한편으로 지젝 자신도 헤겔이 말한 풍속(Sittlichkeit), 즉 불문율로 유지되어오던 사회적 삶의 규칙들의 오랜 관행, 윤리적․관습적 실체의 붕괴를 메우려는 정치적 올바름의 강박적 규칙의 등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 「코빈의 교훈: 도덕적 다수가 좌파라면 어쩔 것인가?」, 최재봉 옮김, 뺷한겨레신문뺸, 2017. 7. 6.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17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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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러한 물러남과 거리두기를 요청하는 비평이 아름다운 영혼이 수행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지 않을까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임마누엘 칸트 식으 로 말해 그것이 이론에서는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천으로는 부적합한 것은 아닌가. 만일 지젝의 이론적인 곤경이 있다면, 그가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계급 적대보다도 ‘성관계는 없다’는 성적 적대를 다루는 방식에, 즉 자신의 언표행위 위치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5. 동의와 그 불만

지젝이 자신의 저술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별도의 장을 할애한 경 우가 딱 한번 있다. 그는 뺷왜 하이데거는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뺸의 「정치 적 올바름의 덫」의 절반 이상을 성관계에서의 ‘동의’(consent)의 곤경(불만) 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가 최근에 쓴 일련의 칼럼들33)또한 미국의 미투운동과 관련되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성관계에서의 ‘동의’를 논의 의 중심에 놓고 있다(미투운동 등에 대한 지젝의 절반의 동의와 절반의 비 판은 항간에서는 별다른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동 의’는, 보다 폭넓은 관점에서 볼 때, 즉 근대 서구민주주의의 사회계약의 성 립과 역사에서 여성들의 지난한 민주주의적 참정권 획득과정, 여성들의 연 애와 결혼에 이르는 불리한 계약, 그리고 그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민주주의 적 전제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가장 첨예하게 벌려놓는 개념이다.

페미니스트 정치학자인 캐롤 페이트먼은 특히 성적 동의와 완전히 대립

33) 슬라보예 지젝, 「성적 자유, 1968년 그리고 2018년」, 강영민 옮김 (2018. 3. 8), http://fabella.kr/xe/blog11/83200;

「거대한 각성과 그것의 위험들」(2018. 3. 11), 이성민 옮김, 개인 블로그, http://thephilosophicalsalon.com/a-great-awakening-and-its-dangers/;

「Yes, Yes, Yes가 No가 될 수 있을까?」, 강영민․김강기명 옮김 (2018. 3. 22), http://fabella.kr/xe/blog11/8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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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쟁점과 논란(‘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동의란 말인가’라는 반문과 이의)까지 심문에 부치는 ‘강간’에 대한 일련의 사법적 논의 등을 검토하면서 막막한 결론을 내린다. 페이트먼은 말한다.

“여자와 동의의 문제에서 가장 현저한 측면”은 “두 동등자들이 창조하기로 자유롭게 동의하는 개인적 삶의 형태를 구성함에 있어 우리에게는 도움이 될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34)그런데 지젝은 “동의해야 동의하는 것이다”35) 라는 규칙의 명시적인 도입을 통해 성적 존중을 장려하려는 새로운 문화에 서 오히려 주관은 취약하기에 복잡한 규칙들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는 나 르시시즘적인 주관성의 단면을 읽어낸다. 페이트먼이 민주주의에서 성관계 에서의 자유로운 동의의 언어가 없다고 말한 그곳, 공백에 명시적인 규칙을 집어넣는 것(‘동의해야 동의하는 것이다’)에 반대해 지젝은 오히려 ‘성관계 는 없다’ 즉 동의의 불확실성과 불가능함을 유지하는 것이 섹스의 가능성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물론 ‘동의에 도움이 될 만한 언어가 없다’

는 페이트먼의 말이 ‘동의해야 동의하는 것이다’와 같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겠다). 지젝은 마크 허만의 영화 <브레스 드 오프>(1996)의 사례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사고실험을 수행하는데, 여기 서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만 인용하겠다. 여자주인공이 데이트 후에 자신의 집 앞에서 남자주인공에게 묻는다. “커피 한 잔 할래요?” 남자가 대답한다.

“저는 커피 안 마셔요.” 여자가 다시 말한다. “괜찮아요. 집에 커피는 없거 든요.” 그리고 그들은 여자의 집에 함께 들어간다. 이것이 성관계에서 전형 적인 암묵적 동의의 한 방식이다. 섹스는 그 자체로 섹스가 아니라 그것의 불가능성(‘성관계는 없다’)으로 인해 환영적인 보충(‘커피 한 잔 할래요?’)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지젝은 이러한 노골적이면서도 은밀한 여자의 신호를

34) 캐롤 페이트먼, 「여자와 동의」, 뺷여자들의 무질서뺸, 이평화․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18, 146면.

35) 슬라보예 지젝, 뺷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뺸, 김영선 옮김, 글항아리, 2016, 4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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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그녀를 이른바 ‘존중’하기 위해 명시적으로 약속을 하는 경우를 상 상한다. ‘좋아요. 분명히 해둘게요. 당신은 커피를 마시자고 말했고, 그것은 섹스하자는 말인 것 같은데. 맞죠?’ 이처럼 규칙을 명시해버리는 경우, 유혹 의 게임은 끝장난다.36)

지젝은 유혹의 과정에 명시적인 규칙이 개입되는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 면서 ‘왜 직접적인 유혹은 작동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한마디로 섹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는 <브레스드 오프>의 두 남녀의 대화에서 억압된 것은 섹스가 아니라 섹스에는 없는 것, 즉 ‘성관계는 없다’이다. 그리고 섹스 를 커피로 대체한 것은 부차적인 억압이며, ‘커피 한잔 할래요?’의 기능은 근본적인 억압(‘성관계는 없다’)을 애매하게 만드는 ‘환영적인 틀’을 유지하 여 궁극적으로 두 남녀의 섹스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젝은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의 미묘한 불균형과 긴장을 유지하는 대신 명시적인 계약서에 서명하는 방법으로 남녀 간의 불균등한 폭력을 피하고 성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발상에 회의적이다. 그는 몇몇 페미니스트의 주장에 기 대어 명시적인 성적 계약이야말로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시장의 계약과 섬 뜩하게 닮아간다고 비판한다.37)무엇보다도 동의의 모호성, 지젝이 생각하 기에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애매성을 명시적인 계약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초래되는 것은, 취약한(precarious) 것으로 주체성을 자리매김하는 방식에 서 일어나는 주체성에 대한 현저한 자기비하적인 지위격하이다.

지젝은 미투 운동과 관련된 논란 많은 논평에서 성행위의 책임을 여자에 게 돌리는 것 못지않게 일어나는 것으로 성행위의 책임을 남자에게 돌리는

36) 슬라보예 지젝, 위의 책, 47~49면.

37) 슬라보예 지젝, 「Yes, Yes, Yes가 No가 될 수 있을까?」에서 인용. 한편으로 월터 벤 마이클스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게일 루빈의 글과 게이 SF 작가인 새뮤얼 딜레이니 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성적 동의의 지속을 나타내는 ‘안전어(행위 중단 지시어)’로 성적 계약을 명시화하는 등의 ‘계약에 대한 전념’이 ‘자유주의의 성애화된 형식’임을 밝히고 있다. 월터 벤 마이클스, 앞의 책, 288~29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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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저한 현상을 보면서, 여성들의 이유 있는 정치적 각성이 주체의 피해자성 에 근거하고 의존하는 경우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그는 미투운동의 주체에 게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운명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경험 했던 자유로운 주체와 자기 말의 권위를 자기 통제를 벗어난 환경의 피해 자라는 지위에 근거 짓는 주체의 기이한 결합”38)을 보고 있다. 그러나 페이 트먼이라면 지젝의 논평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까. 그녀는 그에게 불확실성 의 동의의 열린 공간이 사실상 강간과 같은 비동의의 사건에서 여성들의 입을 틀어막은 채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온 역사를 상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젝이 동의의 애매하고도 불확실한 열린 공간을 옹호할 때 그는 헤겔의 풍속, 사회적 삶의 묵시적인 관습에 대한 참조와 존중으로 종 종 되돌아가는데, 거기에는 암묵적인 유혹이 가능했던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회향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그렇다면 정치적 올바름의 차가운 화용론, 곧 내가 정말 타자를 존중하는 지에 대한 의도를 타자에게 지속적으로 검증받는 것39)이외에 다른 소통의 방법이나 연대의 표현은 달리 없는 것일까. 지젝은 한 동영상 강좌40)에서 그에 대한 한 방편을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제안한다. 이를테면 약 간의 저속한 농담과 접촉을 통해 상호간의 진정한 친밀함을 구성하는 어떤 특정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담화가 병리적 으로 의심이 될 만한 향유를 제거하려고 애쓰는 방식이 아니라, 다소 저급 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상호간에 내재한 향유를 차라리 반(半)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인정하는 방법이다(친구의 업적을 칭찬하면서 그에 대한 질투 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은). 어느 책 사인회에서 지젝은 그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두 흑인과 나눈 우정의 순간을

38) 슬라보예 지젝, 「거대한 각성과 그것의 위험들」에서 인용.

39) 슬라보예 지젝, 뺷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뺸, 104면.

40) Slavoj Žižek, “Political Correctness Is a More Dangerous Form of Totalitarianism”, bigthink.com, 2015. 4. 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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