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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주(몽타주)의 두 가지 양식과 현대미술의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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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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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_2019.08.10 심사기간_2019.09.01-14 게재확정일_2019.10.08

콜라주(몽타주)의 두 가지 양식과 현대미술의 단면

Two Kinds of Collages (Montages) and an Aspect of Contemporary Art 

이영일_중국·연변대학교 미술대학교 Yongri Li_Yanbian University of Art College

차례 1. 서론

2. 콜라주(몽타주)의 역사·지정학적 위치 2.1. 삶과 예술의 분리로서의 콜라주

2.2. 삶과 예술의 탈-경계로서의 콜라주와 몽타주

3. 현대·동시대미술에서의 콜라주와 몽타주의 기능과 그 양가성 3.1. 현대미술에서의 콜라주와 몽타주의 기능

3..2. 상품과 예술 사이에서의 콜라주 혹은 몽타주 3.3. 콜라주(몽타주)의 양가성

4.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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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주(몽타주)의 두 가지 양식과 현대미술의 단면

Two Kinds of Collages (Montages) and an Aspect of Contemporary Art 

이영일_중국·연변대학교 미술대학교 Yongri Li_Yanbian University of Art College

요약 상품문화의 논리 속에서 동시대미술이 삶과 예술의 “통합”을 주장한다면 정치적 콜라주(몽타주)는 의당 어떤 발 화를 하여야만 할까. 아울러 본고는 우선 먼저 콜라주(몽타주)로 현대미술의 두 개의 지층을 읽고자 하였다. 즉 미적아방가르드와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의 콜라주(몽타주)의 기능을 각각 살펴보고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에 서의 콜라주(몽타주)의 기능과 양가성에 그 초점을 모았다. 이는 현대미술에서 콜라주(몽타주)의 발생과 변화와 갈래에 대한 지정학적 탐사에 해당될 것이다. 동시에 논의를 실용성을 위하여 콜라주와 몽타주의 공통점과 차이 점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시도하였다. 다음으로 연구자는 관련 작품을 세 가지 계열로 나누어서 더 깊이 있는 분석을 기하였다. 즉 1)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의 모더니즘의 콜라주(몽타주)의 일련의 급진성과 전복성 2) 상 품과 예술작품사이에서의 상품조각으로서의 콜라주(몽타주)의 유사보수성 3) 상품문화논리에 저항하는 콜라주 (몽타주)의 비판성이 그것이다. 아울러 상기 세가지 계열의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콜라주(몽타주)의 특 징들은 그것의 양가적 속성으로 말미암은 것이겠다.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에서 콜라주(몽타주)는 양가적인 특 점을 기저로 비판성과 보수성, 급진성과 “퇴행”성 사이에서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상품문화 의 논리 속에서 예술작품의 유사기능에 대한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기호가 상품조각이 되고 상품조각이 예 술조각이 되는 동시대미술의 상황 속에서 예술작품은 초월에로의 환상을 벗는 동시에 상품문화논리와도 그 궤 를 같이 해서도 아니 될 것이라면(이 또한 “환상”일수 있다), 몽타주와 콜라주의 기능에 대한 양가적이고 “변 증”법적인 사유가 요청될 것이며 콜라주와 몽타주에 대한 보다 세미하고 내밀한 논의가 요청될 것이다. 본고는 그에 상응한 담론의 한부분이 될 것이다.

If contemporary art is taken for granted to integrate with everyday life in the commercial culture, what could the political collage(montage) speak for? This paper aims to examine two layers of collage(montage) of modern art, one is the function of collage(montage) in the aesthetic and historical Avant-Garde, while the other is its function and its ambivalence in modern and contemporary art. This study will be helpful to explore the generation and development of collage(montage) from the geopolitical perspective. For a better explanation, this study would start with redefining collage and montage in the comparison of their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And then, it will observe the features of collage(montage) in the context of different types of artistic works, they are: 1) the radicalization and subversion of modern collage(montage) in the historical Avant-Garde, 2) the conservation of commercial fragments between the commodities and the artworks, 3) the critique of collage(montage) against the commercial culture. These features are formed based on collage(montage)’s ambivalence. In modern and contemporary art, a question should be asked: what kind of strategy should collage(montage) be followed since it embodies the ambivalence between its critique and conservation and its radicalization and degeneration. In other words, what should the artistic works function in the commercial culture?

Because today the signs of art become the commercial fragments, and the commercial fragments are transformed into the fragments of art in the contemporary era. It means that art itself could not be transcended, neither could art be merged into the realm of commercial culture (since it would be another illusion). Hence, in such a dilemmatic situation, more dialectical discussions about the ambivalence of collage and montage will be called for.

중심어

콜라주 몽타주

정치적 아방가르드 미적아방가르드 동시대미술

ABSTRACT Keyword

collage montage

political Avant-Garde aesthetic Avant-Garde contemporary art

(3)

1. 서론

본고는 콜라주와 몽타주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읽었다.1) 아울러 논문은 크게 두 개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Ⅱ장 “콜라주(몽타주)의 역사·지정학적 위치”에서는 예술 과 삶의 분리로서의 미적 아방가르드의 콜라주와 삶과 예술의 탈-경계화로서의 역사적 아방 가르드의 콜라주의 비교분석하면서, 현대미술에서의 콜라주(몽타주)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Ⅲ장 “현대·동시대미술에서의 콜라주/몽타주의 기능과 그 양가성”부분에서는 우선 콜라주(몽 타주)의 이종연접 원리를 살펴본 다음 콜라주(몽타주)의 양가적인 의미를 세가지 계열의 작품 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이는 삶과의 접합을 꾀했던 콜라주(몽타주)가 상품문화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또 재-약호화 되는지에 대한 분석이다. 또한 이는 “저항”과 “순종”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는, 동시대미술에 대한 반어적인 사고와 연동될 수밖에 없는바 상품문화의 논리 속에서 동시대미술이 마주한 “곤경”에 대한 사유와 불가분하다. 아울러 현대인들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파편화되는 오늘날, 그리고 자본에 의한 물화가 삶의 저변까지 철저히 이루 어지는 상황속에서 삶의 은유적 반영물로서의 콜라주와 몽타주가 그 나름대로의 전략적 힘을 어떻게 내재해야 할 것인가. 연구자가 보기에 이는 콜라주와 몽타주의 양가성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와 더불어서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사회문화상황적인 분석을 요청할 것이다. 말하자 면 그것은 작품을 통한 상품문화논리, 그 경계에 대한 사유여야 한다면 콜라주와 몽타주에 대한 더 깊고 넓은 논의가 앞으로 요청될 것이다. 본고는 그런 논의의 한부분이 될 것이다.2)

2. 콜라주(몽타주)의 역사·지정학적 위치 2.1. 삶과 예술의 분리로서의 콜라주

프랑스어 동사 콜레(coller: 풀로 붙이다)에서 유래한 콜라주(collage)는 문자 그대로 “붙이기”

를 의미한다. 즉 “예술작품 표면에 다양한 소재를 부착시키는 기법인데, 물감을 칠하기 위해 남겨지던 캔버스 공간에 낯선 소재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콜라주의 급진성은 예술작품의 완전 성을 공격한다는 데 있는 것”3)이다.

주지하다시피, 현실과 예술의 접합인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관련하여서 “뷔르거(P· Burger)나 후이센(A· Huyssen) 같은 비평가들은 20세기 전반의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을 구분하기 위 하여 콜라주 개념을 사용했다. 아울러 산업/소비사회의 이미지와 재료의 차용으로 낯설게 하기 를 꾀하는 콜라주 개념은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연계성을 만들어낸다.”4) 그리고 여기에서 두 개의 콜라주의 지정학적 위치는 미묘하게 엇갈린다. 즉 상술한 뷔르거나 후이센의 지적처 럼, 모더니즘의 관습에 저항하고 미적 가치를 파괴하고 정치적 기능의 획득을 기도하는 것이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 콜라주의 근간이라고 한다면,5)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처음 회화작품에

1)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가 모더니즘과 구분되어 사용한다면(예컨대 미적 자율성의 쇠퇴, 추상미술의 종말,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복귀, 팝아트의 시작 등) 동시대미술이란 용어의 사용 또한 저런 회전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아울러 본고에서 20세기 전반미술 을 지시하는 의미로 제목을 “콜라주(몽타주)의 두 가지 양식과 현대미술의 단면”으로 달았고, 문맥적 상황에 따라 동시대미술과 현 대미술을 나누어서 사용하기도 할 것이다. 모더니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연구자의 졸저『키치로 현대미술론을 횡단하기』, 경성대학교출판부, 2011. pp. 55-70 부분을 참고해도 된다.

2) 논의의 편의를 위해 콜라주와 몽타주 두 용어의 차이보다(현대미술에서 콜라주와 몽타주가 어떤 기능을 하였는가에 초점을 둔 논문 인 것만큼,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양자의 관계에 대한 기술은 논외로 할 것이다.) 공통된 특점에 초점을 두고 사용할 것인데 콜라주 가 몽타주를 포함할 수는 있으나 몽타주가 콜라주를 통상 포함하지 않는 부분을 감안하여(2.2에서의 “콜라주와 몽타주의 겹침과 펼침”부분을 참고하라. 그러나 발터 벤야민 같은 경우에는 몽타주 용어를 애용한다. 각주 18내용을 참고하라.) 문맥과 상황에 따라 서 콜라주와 몽타주를 병치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몽타주를 콜라주안에 포함된 의미로도 사용할 것이다.

3) Joseph Childers, Gary Hentzi, (황종영 옮김),『현대문학. 문화비평 용어사전』, 문학동네, 1999, p.112.

4) ibid, p.112.

5) 일부 미술사학가들은 입체파의 콜라주와 관련하여서, “피카소와 브라크, 또 그리에서 보여지는 대중 문화적 요소는 순수회화에 매 스미디어를 도입한 것으로서의 고급미술과 통속미술의 섣부른 순위 매김에 제동을 건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것은 “당시 거의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던 전위적인 입체주의가 어느 측면에서는 대중문화에 대한 살아있는 반응”이라는 것이다. 김영나, 『서양 현대 미술의 기원』, 시공사, 2006, pp.250-251. 그러나 이러한 주장보다, 뉴먼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즉 “대중문화에 대 하여 입체파가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사실인데, 그러하다면 왜 민감하게 반응했는가, 라는 문제에서 양자의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 다. 자율적인 영역으로서의 미적인 것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비판에서 볼 때, 입체주의의 콜라주에서 타율적인 측면이 드러나기에 존재론적 긴장이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로서의 모더니즘이 그 신화를 위하여 상업적인 대중매체 이미지 등 인

(4)

끌어들인 예술가는 다름 아닌 피카소(Pablo Ruiz Picasso)와 브라크(Georges Braque)였다.

“우리”는 분석-입체주의에서 종합-입체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1912년을 전후하여) 브라 크와 피카소가 콜라주에 부여한 “절대적”인 힘을 잘 알고 있다. 즉 분석적 입체주의로 말미암아

“좌초” 된, 지나치게 부서져 내리는 대상을 구제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화면에 물감 이외의 신문 지, 벽지, 천 같은 이물질을 적극 도입한 것이다.

파피에 콜레(papier colle)라는 이 방법을 도입하면서 입체주의는 전체적인 표현방식은 갑작 스럽게 변했다. 때로는 단편화된 부분의 귀퉁이에 붙어있고, 때로는 자유롭게 부유하거나 그림 표면의 격자부분에 몰려있기도 했던 기울어진 작은 면들은 파편화된 양감을 지녔던 형태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에 벽지, 신문, 병 라벨, 악보 심지어 예전에 그렸던 드로잉까지 각양각색의 종이들이 들어섰다. 책상이나 작업용 탁자를 덮은 종이들은 서로 겹쳐지면서 화면 의 정면성과 보조를 맞추었다.6)

세잔이 주장했던 “기하형체로의 회귀”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입체주의 의 아이러니는, 결국 종이 한 장의 두께로 기하형체의 결구와 그 양감 을 대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말로 하면, “입체주의의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금세기 에 일어난 모더니즘 미술의 전체진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환점”7) 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그린버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미 적아방가르드로서의 “모더니즘 미술 전체” 일 것이다. 참고로 작품

<병, 유리컵과 바이올린>(그림 1)을 살펴보도록 하자. 좌측의 병 은 콜라주가 도입됨으로써 깔끔한 형체결구로 “정리”된다. 우측의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이다.

바이올린 머리부분에서 분석 입체주의적 특징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콜라주가 개입됨으로써 화면은 통일된 언어로 통합되듯이 전체적 완정성을 획득한다. 작품

<바이올린과 주전자>(그림 2)가 “과도”한 분석으로 부서져 내리 는 화면을 보여준다면, 대신 <병, 유리컵과 바이올린>에서는 콜라 주로 종합된 입체주의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 은, “콜라주가 선언하는 것은 작품의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닮음에 대한 긍정적인 동일시보다는 부정적 효과로 기능할 수 있”8)다는 점이다. 다시 그림 1을 보자. 바이올린라인을 의도적인 콜라주의 윤곽선이 강조해주지만, 즉 재현의 기능으로서 콜라주가 작용하는 것 같지만 전체적인 콜라주의 배치에서 볼 때, 그것에서는 “닮음을 근간으로 한 재현체계와의 결별”9)이 자연스럽게 선언된다. 그린버 그의 표현으로 하면, 콜라주가 화폭에 침투한 결과 “그림의 재현적 인 맥락을 벗어나 절대적인 정면성을 지니게”10)된 것이다. 그럼 미적 아방가르디스트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콜라주의 의미(소)는 무엇일까? 콜라주를 역사화한 그린버그의 주장에서 그 형체가 잡 힌다.

소를 반복적으로 흡수한 것 또한 사실이다.” 마이클 뉴먼, <시각예술에 관한 비판적 담론들>,이영철 엮음,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

시각과 언어, 1997, pp.403-404. 그러니까 이런 시점에서 보자면, 입체주의가 대중매체 이미지를 콜라주 형식으로 수용한 것은 아방가르드로서의 모더니즘의 타율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대중문화에 대한 살아있는 반응”으로서의 콜라주가 결코 “고급미술과 통속미술의 섣부른 순위 매김”에 제동을 건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대중문화에 대한 입체주의 의 반응은 자신의 갱신과 소생을 위해서 고급미술 바깥에 있는 것을 전유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6) Hal Foster,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Benjamin, H.D. Buchloh, (배수희, 신정훈 외 옮김), 1900년 이후의 미술사 , 세미콜론, 2007, p. 112.

7) Clement Greenberg, (조주연 옮김), 『예술과 문화』, 경성대학교출판부, 2004. p.88.

8) Hal Foster,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Benjamin, H.D. Buchloh, 위의 책, p.113.

9) ibid, p.112.

10) Clement Greenberg, 위의 책, p.91.

<그림 2> 브라크, <바이올린과 주전 자>, 1910년 경.

<그림 1> 피카소, <병, 유리컵과 바 이올린>, 1912년 경.

(5)

붙여진 종이는 그것이 덮고 있는 면적의 크기 때문에, 묘사되지 않는 평면성은 육체적으로, 즉 하나의 표시나 기호보다 더 많이 확립된다. 즉물적인 평면성은 이제 스스로를 그림의 주인 공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고, 그 장치는 부메랑 효과를 낸다. 깊이의 환영이 전보다 더 위태로 워지는 것이다. ... 실제 표면은 바탕이자 배경이 되고, 3차원적 환영을 위해 남은 유일한 자리 는 표면의 앞, 즉 표면의 위뿐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또 역설적으로 드러난다.11)

그렇다.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즉 화면을 조직(종합)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별개의 효과를 파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인용문에서 주목을 요청하는 부분은 “깊이의 환영”과 “평면 성”의 대별구도이다. 전자가 “전통회화”의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그것과 함께 할 수 없는,

“모더니즘 화화 전체”의 변화를 야기할 평면성일 것이다.12) 즉 “즉물적인 평면성은 이제 스스 로를 그림의 주인공으로 주장”하면서 “깊이의 환영이 전보다 더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콜라주 로 말미암아 “회화는 더 이상 환영주의적이고 원근법적인 관습을 위한 토대가 아니라 하나의 대상이 된”13)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콜라주(콜라주에 새겨진 내용·텍스트자체)를 사용했는가 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갖는 평면성이고, 그러한 평면성에 의하 여 깊이의 환영이 파훼된 효과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콜라주가 화면에 침투하는 문제란 곧 “형식”의 문제이지 “내용”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앞의 예문에서 보다시피 “모더니즘 미술의 전체 진화”에서 콜라주가 갖는 “미적가치”가 주목되는 것이다. 즉 “진화”의 어떤 단계에 속해있기에, 그러한 일직선적인 역사관 속에 자리하기에 콜라주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충분히 획득하는 것이다. 그 역사관이란 다른 말로 하면 아방가르드로서의 모더니즘, 완정한 “평면성”

을 향하여 진화하는 형식주의의 불가역적 역사관일 것이다.

앞에서도 잠간 언급했지만, 뷔르거에 따르면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미적-아방가르드의 “예술 을 위한 예술”이라는 순수성에 반발하는 반-미학적인 미술운동이다. 그러한 뷔르거에게 있어 서 콜라주는 당연히 브라크-피카소-그린버그의 것과는 다른 맥락에 위치 지워진다.

입체파는 현대회화의 역영 내에서 르네상스 이래 통용되어온 표현체계를 가장 의도적으로 파 괴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 하지만 우리는 이(피카소와 브라크의 콜라주-연구자) 도전적 요인을 너무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그러한 현실의 단편들은 개개의 요소들(양감, 색조 등)의 균형있는 조화를 기하려고 노력하는 미학적 화면구성 작업에 상당히 존속해있기 때문이다.14)

즉 그것이 아무리 “혁명적”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미적규범 안에서 회집되는 기호계열이라는 것이다.15) 그리고 여기에서 “예술과 삶의 통합”을 목적으로 한 역사적 아방가르드로서의 예술 의 사회적 기능 및 콜라주의 정치적 사회적기능이 주목되어진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피카소-브라크는 자기 화면에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콜라주를 사용하였고 그린 버그는 그것을 재-역사화(전유)하였다면, 다다나 초현실주의미술에서 사용되어진 콜라주를 뷔르거는 그린버그의 반대항의 것으로 계정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러한 행위(미적 아방가르드의 콜라주-연구자)는 물론 현실의 모사작업에 기반을 두는 유기적 작품을 파괴하려는 의도를 나타내지만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의 경우에서처럼

11) ibid, p.94.

12) 참고로 자크 랑시에르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사후적 구성과 그 환상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지적한바 있다.

예술의 모더니티는 일반적으로 서구 전통에서 재현예술과의 단절을 정의된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모던한 반(反)재현적 혁명의 패 러다임을 구축했다. ...“모더니즘”이라는 것 자체도 어떤 예술적 형태들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었다. ... 후기 모더니즘은 예술의 자율성과 그 정치적 의미에 대한 근거없는 우화를 구축하였다. 작품들의 자율성이라는 것은 그저 포이에시스와 아이스테시스가 단 절됨으로써 발생되는 효과일 뿐이다. 이 겸험은 이접의 경험이다. Jacques Ranciere, (양창열 옮김), 『해방된 관객』, 현실문화, 2017. pp.208-211.

13) Hal Foster,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Benjamin, H.D. Buchloh, 위의 책, p.687.

14)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 이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pp. 186, 188.

15) 그린버그는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나 다니엘-헨리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와 같은 전 세대 비평 가들의 견해, 즉 콜라주 기법이 외부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워진 시각을 드러내며 그 파편들은 벽보 포스터, 가계 진열장, 간판 등 으로 어지러워진 상업적 풍경에 잠재된 “새로운 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주장을 무시하였다. 그린버그에게 있어 서 콜라주는 회화평면과 조각적인 효과사이에서 일어나는 자기충족적인 대화로 분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Thomas Crow, (이순 령 옮김), <시각 미술에서의 모더니즘과 대중문화>, 윤난지 엮음,『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 눈빛, 2004, p. 390.

(6)

예술일반을 문제시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미적대상, 하지만 전통적 가치판단의 규칙들에서 벗어나 있는 대상을 제작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이와 다른 유형의 몽타주를 우리 는 하트필드의 사진 몽타주에서 볼수 있다. ...16)

뷔르거가 보건대 그린버그가 주목하는 콜라주의 기능은 “현실모사작업을 비판하는 한에서 미 적인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면, 대신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예술일반을 문제시”하면서 “전통적 가치판단의 규칙 벗어나는” 새로운 작품을 제작한다는 것이다. 그럼 아래에 또 다른 콜라주인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의 그 얼굴을 살펴보도록 하자.

2.2. 삶과 예술의 탈-경계로서의 콜라주와 몽타주 콜라주와 몽타주의 겹침과 펼침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잠간 포토몽타주와 콜라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 자. “몽타주라는 용어는 건축용어 monter(조립하다)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흔히 범죄 용의자 의 인상착의만으로 수많은 사진에서 골라내어 합성한 인물 그림을 일컫는다. 그러나 일반적으 로 예술분야에서 몽타주는 20세기 전반의 미술, 영화, 문학, 사진 등의 특정문화 산물에 작용 하는 형식적 원칙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콜라주· 몽타주와 관련하여서 관련 연구 자는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콜라주를 풀로 붙여진 그림이라고 할 때, 사진으로 덧붙여 만든 구성적인 작품인 포토몽타주 역시 콜라주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콜라주라는 동시대적인 어법 속에서 포토 몽타주. 혼합매체그림, 앗상 블라주(assemblage) 등 모두 재료에 따른 엄격한 정의를 부정한 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방법과 착상은 같은 계열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17) 즉 “재료에 따른 엄격한 정의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포토몽타주, 앗상 블라주, 혼합매체그림 등을 콜라주계열로 묶는 것이다. 콜라주가 “예술작품 표면에 다양한 이질적인 소재를 부착시 키는 기법”이라면 포토몽타주는 사진을 “이질적”으로 덧붙인다는 점에서 콜라주의 한 종류라 고 할수 있겠다. 아울러 연구자는 재료적 차이에 초점을 두기보다, “이질적인 합성”이라는 점에 주목코자 한다. 즉 두 가지 이상의 “이질적인 요소”를 연접·병치시키고 구성·조립한다는 점에 서 말이다.18) 비슷한 맥락에서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 같은 문화이론가는 “몽타주 · 콜라주”같은 방식으로 양자를 수평적으로 사용한다.19) 아래에 연구자는 몽타주와 콜라주를

“이절적인 것의 연접과 병치”라는 의미에서 평행적으로 사용할 것이다.20)

삶과 예술의 탈경계에서의 콜라주(혹은 몽타주) 먼저 몽타주와 관련된 “최초”21)의 언급을 살펴보자.

16) 페터 뷔르거, 위의 책, pp.189-190.

17) 김수기, <콜라주>, 박찬국 외 17인, 현대미술의 기초개념 , 재원, 1995, p.316.

18) 벤야민은 몽타주 기법을 “몽타주가 맥락을 교란하여 미망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진보적 형식으로 “특별한 아마도 완벽한 자격”을 갖춘 것으로 인식하였다. 말하자면 벤야민은 몽타주의 급진적인 힘을 주목하면서 용어상으로 (콜라주를 사용하지 않고) 몽타주를 애용한 것 같다. 아울러 몽타주나 콜라주는 비단 예술형식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고 구성하는 방식 또는 글쓰기의 새로운 방식에도 준할 것이다. 벤야민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몽타주의 파괴적, 비판적 차원이었고, 몽타주는 근대철학을 확립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고 또한 ”역사의 구성원리 자체가 몽타주였다..“ Susan Buck-Morss, (김정아 옮김), 『발터 벤야민과 아 케이드 프로젝트』, 현실문화, 2006. pp. 96, 109, 291, 587. 위에서 말했다시피, 콜라주와 몽타주는 비단 예술의 형식으로 주 목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 사회와 현실을 읽고 구성하는 하나의 유력한 방법 혹은 개념틀로 충분히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19) David Harvey, (구동희, 박영민 옮김),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 한울, 2006, pp.40, 76.

20) 콜라주와 몽타주의 관계를 좀 더 짚어보도록 하자. 1) 몽타주는 사진에서 비롯된 실재 이미지를 오려내어 덧붙이고 반복하거나 이질적인 이미지를 병치시키거나 이미지와 문자를 혼합하거나 이중인화의 합성을 통해 많은 관점을 하나로 뭉뚱그려 주마등같이 확장된 시각을 제공하는 기법이다. 2) 포토몽타주는 사진을 기본 자료로 사용하여, 이질적인 여러 가지 요소들을 조립해서 새로운 시간과 공간 속에 배치하여 시각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즉 콜라주는 접합이나 붙이기를 통해 오브 제라는 실체를 등장시키는 반면 몽타주는 오브제보다 이미지에 관계된다. 3) 몽타주는 전통미술에 나타나던 연속적인 삶의 이미 지를 급속하고 다면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이미지, 혹은 재합성된 이미지로 대체한 것이다. 백한올, <몽타주>, 박찬국 외 17인, 위의 책, pp.298, 300, 305. 상기 1)의 경우에 몽타주의 기본제작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면(사진의 매체적 특점을 제외하면 콜 라주의 제작방법과 대동소이하다) 2)와 3)은 내용과 관련된 것이다. 아울러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콜라주와 몽타주는 파편화된 세 계를 파편적인 언어로 다시 구성함으로써 현실을 은유적이고 등가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할 것이다.

(7)

1916년 5월의 어느 날 존 하트필드와 나(그로츠)는 포토몽타주를 창안했다. 우리는 마분지 한 장 위에 헤르니아 벨트라든지 학생용 노래책, 동물용 사료에 관한 광고물, 네덜란드사진과 포도주 병에서 떼어낸 라벨, 사진 책에서 오려낸 사진을 뒤범벅으로 붙이었다. 만일 그 작업이 언어로 표현되었다면, 검열되었을 것이다.22)

즉 회화작품에서 콜라주는 종합입체파(1912년)와 함께 도래하였다면, 하트필드와 그로츠는 1916년에 몽타주를 통한 “뒤범벅”을 지향하였다. 입체주의는 너무 잘게 부셔져서 뒤범벅이 된 화면을 극복·정리하고자 콜라주를 끌어들였다면, 하드필드와 그로츠는 역으로 혼성화(뒤범 벅) 된 화면을 구성하고자 포토몽타주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미적 아방가르 드와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갈라지는 지점을 확인해볼 수 있다. 즉 전자는 현실과의 거리를 통하여 순수화면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이와 반대로 현실에 개입하는 복합적 장치로써 몽타주 를 끌어들인 것이다. 말 그대로 “직접적인 검열”을 피해나가는 방편으로 일반언어 이외의 예술 언어를 지향했던 것이다. 즉 예술의 정치화를 지향한 것만큼이나 삶과 예술의 탈 경계화를 욕망하고, 예술에 정치적 기능을 부여하고자 하였던 무늬를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있어서 콜라주와 몽타주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불식시키고 자율적이고 폐쇄적이고 미적인 아방가르드에 도전하고 불안한 사회현상과 시대상황을 풍자하고 다양한 정치적 메시지를 제시함에 있어서 이미지의 반복, 이질적인 것의 병치, 이미지와 문자의 혼합, 이중인화 및 합성 등 다양한 전략으로 구성되었다.”23) 바꾸어 말하면 미적 아방가르드에서 콜라주가 “형식의 미학”을 위하여 존재하였다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의 콜라주는 “내용의 미학”에 속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현실과의 거리두기로써, 유미주의에로의 퇴각이 미적아방가 르드의 근간이라면24),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자신들의 예술을 대중과 결함시킴으로써 혁명적 목적에 자신들의 미학적 능력을 동원”25)하였던 것이다. 즉 다양한 정치적 비판 기능 및 선전의 기능을 담당하는 콜라주와 몽타주는 역사적 아방가르디스트들에 의하여, 대중의 정치화와 체 제를 위한 대중의 정치화라는 이중적인 기능을 부여받았는데,26) 다다이스트 같은 경우에는 예술의 제도적 기능을 타파하고, 삶과 예술의 탈-경계화에 대한 시도로 몽타주를 사용하였다.

그럼 아래에 현대와 동시대미술에서의 콜라주와 몽타주의 기능과 그 양가성을 살펴볼 것이다.

3. 현대·동시대미술에서의 콜라주와 몽타주의 기능과 그 양가성

편폭의 제한으로 아래에 몇몇 작품을 선별하였는데 그 초점은 콜라주와 몽타주가 삶과 사회를 어떻게 은유적이고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드러내는가에 있음은 물론이다. 앞에서 살펴보았 듯이(2.1. 삶과 예술의 분리로서의 콜라주) 미적 아방가르드가 심미적 장치로 콜라주를 회면 에 끌여들였다면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그것의 “재점화”(상품화된 역사적 아방가르드기도 한) 인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시대미술에서의 콜라주(몽타주)의 기능은 그것과 사뭇 다른 것이다.

물론 심미적 아방가르드와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관계는 “변증법”적이다.

3.1 현대미술에서의 콜라주와 몽타주의 기능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의 콜라주/몽타주는 이종연접을 통하여 단일하고 통일되고 순일한 세

21) 베를린 다다이스트들 가운데서 한편으로는 라울 하우스만과 한나 회흐가, 다른 한편으로는 게오르게 그로츠와 존 하트필드가 각각 자신들이 포토몽타주를 창안하였다고 주장했다. Dawn Ades, (이윤희 옮김), 『포토몽타주』, 시공사, 2003, p.21. 그러나 본고에 서 최초의 창안자에 대한 일련의 쟁론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22) Hans Richter, Dada: Art and Anti-Art(London, 1965), p.117.

23) 이영일,『키치로 현대미술론을 횡단하기』, 경성대학교출판부, 2011, p.64.

24) 뷔르거의 역사적 아방가르드이론에 대한 핼 포스터의 비판관련 논문은 김영욱, <네오 아방가르드: 해석과 재해석-핼 포스터의 페 터 뷔르거 비판을 중심으로>, 『미학 51권』(2007년 9월), pp.227-258를 참고해도 좋다.

25) David Harvey, 위의 책, p.69.

26) 예컨대 다다의 포토몽타주와 (러시아)구축주의자들의 포토몽타주의 사이에는 대단히 명백한 차이가 존재했는데, 이는 주로 제작했 던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전자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만큼 풍자적이었고, 새로운 바이마르공화국과 독일 군 국주의를 주요한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반면 클루트시스의 선동적·정치적 포토몽타주는 환상적이고, 근본적으로 유토피아적이었다.

Dawn Ades, 위의 책, p.73. 그러나 양자 모두 “정치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를 보이겠다.

(8)

계에 회의를 제기하고 제동을 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적 아방가르드에서 화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콜라주의 심미적 기능 과는 다른 맥락인 것이다.

한나 회흐의 작품 <바이마르 공화국의 배를 부엌칼로 가르다>

에서는 불가능한 여러 가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재한다. 이웃 항 들의 변화에 따라 “평범한 것”은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닌, “놀라 운 것”이 된다. 역으로서의 논리도 가능하다. 아울러 작품의 제목 부터 예사롭지 않을 만큼 “살벌하다”. 즉 부엌칼로 배를 폭력적으 로 갈라내는 것이다. 소위 “바이마르 공화국의 맥주 배”를 말이다.

이 “맥주 배”가 “부패 무능한 상위계층”을 겨냥한 것이고, 소위 “부 엌칼”을 그것에 대한 비판과 공격이라고 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 해진다”. 현실정치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려는 정신이 역사적 아방 가르드의 포토몽타주에서 집약적으로 묻어나는 것이다. 이종연접된 이미지는 현실에 참여하 려는 의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바로 거기에 붙어있는 것이다. 달리는 열차의 한 토막,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등장하는 당나귀 혹은 송아지, 머리를 잃어버린 운동선수, 오른쪽 귀퉁이 아래에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유럽지도, 왼쪽 하단에 등장하는 익명의 대중, 몸이 두 동각 난 벵골코끼 리와 그 사육자 ... ... 이러한 “무질서”와 “불가능한 연접”속에서 작품의 의미는 불확정적으로 확장된다. 미적아방가르드에서의 콜라주가 화면의 (미적)통일을 위하여 작동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아방가르드에서의 몽타주는 역으로 이미지의 파편화와 의미의 불확정성으로 사회정치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포토몽타주 프로젝트가 형성하는 모호한 기법과 전략이 뚜렷하게 드러낸다.

반어법적으로 표현된 내러티브에서 순수하게 구조적으로 배치된 텍스트들의 요소에 이르기까 지. 회흐의 작업이 보여주는 가능성들은 포토몽타주의 변증법적 작용의 축을 이룬다.27) 연구자로서는 일단 여기에서 “변증법적인 작용의 축”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지적하는지 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읽힌다. 아울러 아래위의 문맥을 살펴볼 때, 아마 “모호한 기법과 전략”

으로서 “반어법적으로 표현된 내러티브”와 “구조적으로 배치된 텍스트들의 요소들”, 그 양자의 관계를 이르는 것 같다. 즉 (반어법적으로 구성된) 질서로서의 내러티브와 뒤죽박죽(으로 인 하여 획득되어지는 “엄밀”함으로서의 텍스트구성원리)의 제(诸)요소들이 오버랩되면서 보여 주는 “무한한 가능성” 같은 것 말이다. 아울러 이러한 “질서”와 “무질서”의 관계를 일러 “포토몽 타주의 변증법적 작용의 축”이라고 명명 할 것 같으면, “무질서”는 질서의 너머에 존재하듯이 질서 안쪽 깊숙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무질서”와 “질서”의 변증법적 작용의 관계 속에 서 또한 독자의 주목을 요청하는 부분은, 여기저기 파편처럼 흩날리는 단편적인 문자텍스트이 다. 예컨대 “DaDa”, “Stem”, “anti”, “nf”, “Die grobe” 등등이 그것이다. 누구를 “안티”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해석도 “없다”. 왜서 “Stem”가 등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 어떤 징후적 인 해석도 “부재”한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난무”하기 위하여 거기에 존재하는 것들처럼 (일차 적으로) 읽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아래 위의 텍스트, 그 해석 가능한 뿌리를 “잃음”으로써 다다 적인 정신을 잘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무의미가 곧 의미”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항상 목적과 의미와 이성이 과잉된 시대이기에, 무의미가 곧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말과 이미지의 차이를 소거하는, 그 명백한 차이를 부정하려는 이러한 혼합”28)은 회흐적인 공격의 강도를 더 강화시킬지도 모른다. ... 회흐의 몽타주작품은 애초부 터 “궁극적인 해석”을 벗어나는 텍스트들의 더미이고 뭉치이다. 그것은 해석을 “벗어남”으로써 부단히 새로운 해석을 요청하는 텍스트이므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러한 장치들이, (불안한 “과도기”적인 바이마르시대) 정치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기 위하여 바로 저기에서 춤을 추고 있음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음직 하다(회흐 작품에 대한 분절이 긴 감이 없지 않아있다).

27) Hal Foster,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Benjamin, H.D. Buchloh, 위의 책, p.170.

28) Dawn Ades, 위의 책, pp.39-40.

<그림 3> 한나 회흐, <바이마르 공 화국의 배를 부엌칼로 가르다>, 1919년경

(9)

의외의 빌려온 단편적인 장치와 그 개입을 근간으로 작동하는 콜 라주는 우연과 환상을 중시하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더없이 적절 한 기제였다. 즉 명석하고 자명하게 인식된 세계를, 복합적이고 중 층적이고 혼성적인 세계로 교란하는 효과적인 장치였던 것이다.

낯선 “이물질”의 침투와 이종연접을 근간으로 한 콜라주와 몽타주 는 순일한 재현 속에서의 분열을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더 나아가 주체성의 분열을 직,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참고로 에 른스트(M · Ernst)의 관련 언술을 잠간 살펴보자.29)

··· 인류학적, 미시적, 심리학적, 광물학적, 고생물학적 논증을 위 해 디자인 된 물건들을 보여주는 화보 도록을 응시하다가 떠오른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곳에서 나는 별로 관계가 없는 구상적 요소들을 결합되어 그 수집물들의 불합리성이 내 시각능 력을 돌연히 강화하고, ... 즉 모순된 이미지들이 이중, 삼중, 다중으로 연속적인 환상을 이루어 서로 끊임없이 빠르게 충돌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즉 필연적인 내적인 연결이 결여된 이미지들(인류학적, 미시적, 심리학적, 광물학적, 고생물학 적)의 이중, 삼중의 교직 속에서 일관된 사유(이성)따위는 파훼되고, 그 다층적인 이미지의 중첩과 충돌 속에서 합리성은 “불합리성”에 의하여 밀려난다. 즉 명료한 시각이 다른 “시각적 능력”에 의하여 대체되듯이, 비합리적인 환상이 반(半)수면상태에서나 볼 수 있는 환영 따위 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성의 피안에 거뜬히 가닫는 것만큼이나, 기존 이성의 지경 을 확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非)이성의 이성성(性)”, 그 영역을 탐사하는 것이다. 그리 고 여기에서 다다주의와 초현실주의의 내적인 연관성이 시사된다. 이런 이미지로서의 콜라주 기능은 문자·시어(诗语)영역에서 어쩜 더 잘 확인되기도 한다.30)

상품문화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서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의 콜라주 작품 <엠지 158 코츠 그림>을 살펴보자. 슈비터스는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적극 차용함으로써,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전략(저항)의 일환으로 대중문화 안으로 진입하는 기점인 동시에 또한 그 곳 은 이데올로기 강화의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중매체적 포토몽타주가 “복종되고 기입되”어지는 장소는 그렇듯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상품조각과 지폐조각, 젊음(육체적 자 본의 상징이기도 한)과 계층구조를 구조화하는 기표로서의 복식, ... 이러한 파편들은 콜라주 가 갖게 되는 전복성 및 그 양가성을 드러내 보인다. 아울러 이러한 양가성은 차후에 상품문화 논리에 포섭될 기호적 운명은 내재적으로 안고 있음을 시사해 보인다. “상품조각”과 삶과 문자 텍스트와 사회구조에 대한 은유가 두루 엇물려 있는, 쿠르트 슈비터스의 <엠지 158 코츠 그 림>는 불안한 급진성이 숨을 톱는 듯이 읽혀진다.

3.2. 상품과 예술 사이에서의 콜라주 혹은 몽타주

말하자면, “이질적인 요소들의 종합을 꾀함으로써, 우연성과 환상 및 환각적 이미지작용에 이

29) Max Ernst, Beyond Painting (New York, 1928), p.26.

30) 브르통(A. Breton)의 시를 잠간 보자.

유출 대성당 고등 척추동물/ 그 이론의 마지막 추종자들은 문을 닫는/ 카페 앞 언덕 위에 자리잡는다/ 다이아 바로드천의 다리/

오생근·이성원· 홍정선 엮음, 『문예사조의 새로운 이해』, 문학과 지성사, 2007, 오생근, <자동기술과 초현실주의적 이미지>, p.252. 재인용.

한마디로 이성(의 공제 범위)에서 거의 탈주한 상태에서의 시어인 것이다.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형상·단어들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에른스트의 언급처럼, 모순된 텍스트(이미지들)이 이중, 삼중, 다중으로 연속적인 환상을 이루어 서로 끊임없이 빠르게 충돌하는 것이다. 주어와 술어관계 역시 탈구되었다. “문법적 주체”의 허약성을 반어적으로 드러내 보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인형”의 부단한 재조합을 통하여 욕망의 지층을 탐사하는 벨머의 작업도 주목해볼 수 있다. “극단적인 대 립물을 억지로 함께 붙”인다거나,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언캐니하게 뒤섞”는다거나, 절단된 신체를 재비치한다거나, 이런 사유의 근간이 “한 단어의 철자 배열을 바꾸어 다른 단어를 만들어내듯이, 부분 대상끼리 서로를 대체함으로써” 불분명한 정체성 을 연기하는 것이라면, 그 것에는 콜라주의 몽타주의 기본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세계의 경계를 흐릿하게”하는 콜라주의 원리 로 말하면 문자와 형상에서의 기본 작동원리를 대동소이한 것이다. Hal Foster,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소 옮김), 욕망, 죽음 그 리고 아름다움 아트북스, 2005, pp.160-172.

<그림 4> 쿠르트 슈비터스,《엠지 158 코츠 그림》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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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되었던 초현실주의의 몽타주는 작품에 대한 명료한 해독과 이해를 거부하는 장치였으며, 그러한 “우연성의 개입은 고급미술과 대중문화, 미술과 일상경험사이에 존재했던 간격을 제 거”31)하는 기제였다면, 팝아트가 차용한 대중적 이미지와 소비사회의 “발견된 오브제”에서 우리는 “아방가르드주의자들이 꿈꾸던 예술의 현실개입이 마침내 자본에 의한 현실지배로 완 벽하게 실현되었다”32)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서 리처드 해밀턴(R· Hamilton)의 작품을 간단히 살펴보자. 말 그대로 후기소비주의사회 소비자의 “경탄”을 그대 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가정을 그렇게 색다르고 매혹적 으로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다. 집안 기물 명세표처럼 “현대인의 가정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철저하 게 사실주의 공간에 구현하기 때문에”33) 해밀턴의 작품을 콜라 주와는 다른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1920-30년대 (상품이미지조각을 주조로 한) 콜라주가 저항적 장치로 활용되었다면, 1950, 60년대에 들어서서 그것은 물화된 사회현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기제로 된 것이다.

얼핏 가정을 통제하는 보이는 여성 또한 상품이다. ... 결국 모더 니즘도 상품화되고 길들여지고 흡수되는데 바우하우스는 덴마 크풍의 가구로, 폴록의 드립 페인팅은 최신유행의 양탄자가 되었다. ... 콜라주는 이미 문화산 업의 도구가 돼있었다.34)

말하자면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화시키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의 미적 아방가르드에 저항 하던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콜라주)는 이젠 문화산업의 파편으로 전락되어 청교도적 미적아 방가르드의 신화조차 붕괴시키는 아이러니를 동시대미술에서 확인할수 있는 것이다. 리처드 해밀턴은 “일시적이고 대중적이며 싸구려이고 대량생산된 것, 젊고 재치 있고 섹시하며 교묘 하고 매력적인 것, 눈길을 끄는 것, 현혹적인 것, 동시에 대기업적인 것”을 예술의 바람직한 특성으로 정의하였는데, 이 모든 특성은 이미 대중적 유행의 특성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물화된 사회적 총체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관련된 토머스 크로우의 언급을 잠간 살펴보자.35) 1) <오늘날의 가정을 그렇게 색다르고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포드의 휘장아래 대량생산된 물건들과 공장에서 제조된 꿈들이 전후 시대의 생활에 적합한 주관적 가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비웃는다. ... 2) 그러나 해밀턴은 이전의 산업 제도가 로서 일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대량소비 시대의 대중문화에 대해 단순히 비판자 행세만 하지 않는다. 3) 해밀턴이 팝아트의 정의로 제공한 목록 안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열광을 간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즉 그의 작품은 비판적일 수도 있으나 그가 산업제도가로서 일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비판성만 은 구유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데, 바꾸어 말하면 동일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산업제도가 로서의 경력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을 전후소비시대의 “그릇된” 허영과 “과잉된” 풍요에 대한 비웃음/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1)과 2)사이에 논리적 연관성이 떨어져보인다. 그러므로 3)에서 표현된 “간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기보다 더 적 절한 표현은, 그러한 열광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렇게 색다르고 매혹 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작품이며, 그러한 각도로 해밀턴의 작업을 읽고자 한다면, “포드의 휘장아래 대량생산된 물건들과 공장에서 제조된 꿈들이 전후 시대의 생활에 적합한 주관적 가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직접적인 예찬론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은 비판하는(비웃는) 것이 아니라 찬미하는 것이다. 연구자가 해밀턴의 작업과 토머스

31) Hal Foster,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Benjamin, H.D. Buchloh, 위의 책, p.437.

32) 김수기, 위의 글, p.332.

33) Dawn Ades. 위의 책, p.181.

34) Hal Foster,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Benjamin, H.D. Buchloh, 위의 책, p.390.

35) Thomas Crow, (조주연 옮김), 『60년대 미술』, 현실문화, 2007, p.60.

<그림 5> 리처드 해밀턴, <오늘날의 가정을 그렇게 색다르고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1965.

(11)

크로의 관련 언급에 주목하는 것은 대량소비사회에서의 콜라주의 “기능 전환”에 초점을 두기 위함이다. 후기소비주의 사회에서의 자본에 의한 현실지배를 콜라주에 묻어나는 것이다. 유행 과 취향을 먹고 사는 팝아트는 평범하면서도 초미(超美)적인 것이며 그러한 초미적인 것의 증식과 범람은 자본에 의한 현실지배가 삶의 저변까지 곳곳이 침투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사태 속에서 콜라주는 상품문화논리를 체현하는 기제가 되는 동시에, 그 회로 속에서 “낯선 음성”을 들려주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럼 다른 맥락에 자리하고 있는 아르망(Armand)의 작품 <이 브 클랭의 몽타주 사진 1번>을 살펴보도록 하자. 제목 그대로 여러 가지 물품이 “자유롭게” 배치되어있다. “아르망의 오브제미 학은 아방가르드가 약속한 과학기술의 유토피아를 추구하거나, 일상적인 기능에서 해방된 초현실주의 오브제를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사물들은 끊임없이 확장되고 맹목적으로 반복되는 생산에서 나온 것이었다.”36) 하자면 소비사회에서의 동일성의 폭력을 비판하는 것으로 가독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르망은 “(예술 혹은 오브제-연구자)조 각이 상품의 진열 기법을 따르게 될 것이며 미술관의 전시관례 또한 백화점의 상품 진열기법(상품 진열대와 쇼윈도)과 동화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다.” 예술조각이 상품목록이 되듯이 소비 상품의 원리와 미술문화소비의 차이가 무화되는 것이다. 작품을 살펴보면 “상품”에 대한 은유물(物)치곤 좀 “지저분하게” 보일수 도 있지만 각종 물품들은 하나의 액자 같은 것 안에 “갇혀있다.” 사실 문화상품의 논리라는 것이 하나의 액자같은 규격의 폭력이 아닌가.

저항하는 자는 저항을 포기하고 자신을 어떤 부류에 놓음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다. 문화산업 의 분류목록 속에 일단 등록이 되면 ... 유능한 자에게 자유로운 길을 열어주는 이러한 상황은 ...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는 개인은 사회라는 흉한 상흔을 지니고 다닌다. 개인은 겉보기에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사회라는 경제적 사회적 장치의 산물이다.37)

물론 이는 아방가르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것과의 이항대립의 구조 속에서 문화상품논리 를 비판하는 아도르노의 논조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 그 어떤 저항이 불가”할 뿐만 아니라, 개인들마다 동일성을 근간으로 한 사회라는 흉측한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비판하는 그의 목소리는 동시대사회상황 속에서 더 강력하게 들릴 것이다. 이 “개인”을 예술작품으로 치환해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개인이 그러하듯 예술작품마다에 동일성에 의한 폭력의 상흔 을 깊숙이 안고 있다. 자유로운 개인이 상상이라면 예술작품의 자유 내지 저항 또한 상상이다.

아르망의 “액자규격”이 보여주듯이 “액자규격” 밖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은 굶어죽을 권리와 자 유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순응하지 않는 별종은 경제적 무능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는 나아가 정신적 무력증을 초래한다.

경제생활에서 배제된 국외자는 쉽게 무능력자라는 판정을 받는다.38)

“예술작품의 진열구조와 상품의 진열방식의 동열구조”를 암시하는 것 같은 아르망의 작품은

“액자규격”의 밖을 통하여 규격화된 현대사회를 보여주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고 중성적이고 포스트모던하다. 이항대립적 구도로 예술의 기능을 파악하고자 하는 아도르노의

“급진적”논리와는 다른 것이다.

바바라 쿠르거(Barbara Kruger)의 작품을 살펴보면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의미를 더 강조하려는 듯 손과 배경은 흑백으로 처리되었다. 마치 상품광고이미지를 전유한 것 같다.

전유가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인수하여 그 문화자본의 원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36) Hal Foster,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Benjamin, H.D. Buchloh, 위의 책, p.438.

37) Th. W. Adorno, M. Horkheimer, (김유동 옮김),『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2001, pp.200, 234.

38) Th. W. Adorno, M. Horkheimer, 위의 책, p.200, 234.

<그림 6> 아르망, <이브 클랭의 몽타 주 사진 1번>,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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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39)이라면 “크루거 작업의 주요 이미지는 대중문화에서 빌려 온 것으로, 잡지와 대량으로 유통되는 다른 출처들에서 고른 발 견된 사진(found photographs)형태로 차용된 것이다.”40) 이미 지의 전유와 함께 문자텍스트 또한 그러하다. 데가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전유한 크루거는 포토몽타 주의 비판성의 역설, 역설적인 비판성을 나름대로 드러내 보이 는 것 같다. 코기토 주체는 “신이 나를 창조했으므로, 나는 존재 한다”를 뒤집기 위함이었는데, 이제 상품이 신을 대체한 후기자 본주의사회에서 이 유일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현대인들은 자신 의 자리를 올바르고 정확하게 지정받을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크루거 부류의 작품은 “소비하는 주체”로 전통적인 주체개념을 희화화하는 동시에 “발견된 이미지”의 재조합을 통하여 그러한 주체성을 기반으로 정립된 작가성이나 유일성, 진품성 등에 제동을 건다. 대중문화나 대량으로 유통되는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철저히 물화된 동시대예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스스로 물화됨으로써 비로소 비판성을 갖게 되는 아이러니를 동시에 보여준다. 즉 절적한 차용과 이어붙이기를 통하여 긴장한 의미를 발생시 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스로 물화된 제스처를 취해보임으로써 “저항”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이는 것이다.

다른 작품 <당신의 몸은 전쟁터이다>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1989년 워싱턴DC에서 있었던 낙태 합법화 찬성 행렬을 위 한 포스터로 쓰이면서, 남성에게 있던 낙태의 권리를 비판하 고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었었다. 연구자는 이를 현대소비사회의 몸의 경제학으로 읽고 싶다. 몽타주기법을 사용한 이 작품 속에서 한 여성의 얼굴 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비슷한 두 인물 이미지의 합성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몸은 전쟁터이다.” 얼굴 역시 전쟁터처럼 읽힌다. 나의 몸은 나의 것인가? 젊은 여성의 육체일수록 자본 이 서식하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 아닌가.

소비대상의 파노플리 중에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귀중하며 멋진 사물, ...그것이 육체이 다. ... 자본으로, 물신(또는 소비대상)으로 육체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느 경우에도 육체는 부정하거나 배척되기는커녕 오히려 의도적으로(경제적 의미에서) 투자되고 동시에 (심리적 의미에서) 물신숭배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 육체를 처녀지와 식민지를 개척하 듯이 또는 광맥을 발굴하듯이 ... 41)

소비대상으로서의 최고의 사물, 물신숭배품목 제1호를 보여주는 동시에 반으로 쪼개진 “전쟁 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설의 논리가 크루거의 수사학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육체 는 누구의 것인가? 사물은 사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그러나 소비경제학의 라인 안에서 사람 은 사물처럼 소비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의 몸통)은 제일 그럴듯한 소비대상 1호이다.

말 그대로 소배대상 목록 안에서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귀중하며 멋진 사물”인 것이다.

그 소비대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크루거는 어둡게 물든 나머지 반쪽 얼굴을 몽타주기법으로 보여줌으로써 사색의 여백을 준다.

충동 및 환상으로서의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욕망의 개별적 구조이지만 “에로틱한” 육체를 지배하는 것은 교환의 사회적 기능이다.42)

39) Joseph Childers, Gary Hentzi, 위의 책, p.76.

40) Hal Foster, Rosalind Krauss, Yve-Alain Bois, Benjamin, H.D. Buchloh, 위의 책, p.583.

41) Jean Baudrillard, (이상율), 『소비의 사회』, 문예출판사, 2002, pp.189, 190-191, 193.

42) Jean Baudrillard, 위의 책, p.198.

<그림 7> 바바라 크루거 <나는 쇼핑 한다. 고로 존재한다>, 1987.

<그림 8> 바바라 크루거 <당신의 몸은 전쟁터이다>, 1989.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