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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가마터 출토 명문백자를 중심으로- / 김경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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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야외고고학. 제15호(2012.11). 243~265쪽. 16세기 중·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 가마터 출토 명문백자를 중심으로 – 김경중* 목 차. Ⅰ. 머리말 Ⅱ. 16세기 관요 연구현황 Ⅲ. 명문백자로 본 16세기 중·후반 관요 운영시기 재검토 1. 16세기 중반 2. 16세기 후반 Ⅳ. 발굴조사 자료로 본 16세기 관요백자 제작양상 Ⅴ. 맺음말. * 경기도자박물관.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43.

(2) 국문초록 ●○ 경기도 광주 관요는 16세기 전반에 도마리나 열미리, 학동리에 설치·운영된 것 으로 추정되나 운영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근에 16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무갑리 14호와 곤지암리 1호 가마터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와 관음리 10호 가 마터 수습유물, 그리고 번천리 9호 가마터에서 수습된 묘지명의 재해석을 통해 1530 년대 후반 이후의 관요 이설경로와 운영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1530년대 후 반부터 1540년대 초까지 운영된 우산리 9호 가마 일원을 시작으로 무갑리 14호 일 원(1540년대 중반~1551년), 번천리 9호 일원(1552~1558년)으로 이설되고, 이 후 관음리 10호 일원(1559~1560년대 후반)에서 곤지암리 1호 일원(1570년 전후 ~1570년대 중반)으로, 그리고 대쌍령리 1호 일원(1570년대 후반~1580년대 초), 무갑리 10호 일원(1580년대 중반~1590년대 초) 정지리 3호 일원(1590년대 중반 ~) 순으로 관요가 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560년대 후반까지 운영된 것으로 판단되는 관음리 10호 가마터에서 ‘地’銘이 ‘左’·‘右’銘과 함께 수습되어, ‘左’·‘右’銘백자가 1560년대부터 제작되었음을 확인한 점과 경복궁 함화당지 출토 백자 중에 굽 안바닥에 ‘左’가 음각되고 ‘地’가 정각된 것이 수습되어 이들 명문이 일정기간 공존하였음을 확인한 점은 성과라 할 수 있다. 뿐만 아 니라 어영청지나 종묘 등지에서 ‘宇’銘이 음각된 백자편이 출토된 점으로 볼 때 ‘天’· ‘地’·‘玄’·‘黃’銘 외에 다른 글자가 음각된 백자가 관요에서 생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발굴조사된 16~17세기 관요 자료를 토대로 16세기는 가마 2기 이상이 인접해서 양질백자와 조질백자로 나누어 생산하였으나 17세기에는 1기의 가마가 양질 백자와 조질백자를 필요에 따라 같이 생산하였음을 가마의 배치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처럼 이번 연구를 통해 16세기 중·후반 관요의 운영시기와 제작양상이 확인됨으 로써 16~17세기 관요에서 생산된 백자의 기형과 가마 구조가 시간의 경과함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좀 더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관요백자와 지 방백자의 비교를 통해 지방백자의 편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도 마련 되었다. 주제어 : 16세기, 조선관요, 명문백자, 운영시기, 제작양상. 244. 야외고고학 제15호.

(3) Ⅰ. 머리말 경기도 광주(廣州)에 위치한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하 관요)은 1467년경에 설 치된 이래로 약 416년간 조선왕실과 중앙관청에서 필요한 자기(磁器)를 제작·공급하였 으며, 그 흔적이 광주 전역에서 확인된다. 관요백자(官窯白磁)는 조선시대 백자연구의 기 초자료로서 조선왕실과 사대부가 주도한 조선백자의 양식변천 과정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방백자 편년 연구의 기본 자료로 활용된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 해 관요의 분포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지표조사가 현재까지 5차례 실시되었으며, 이 가운 1). 데 21개소의 가마터 가 학술발굴과 구제발굴의 성격으로 조사되었다. 그 결과 관요의 이 설경로와 운영시기, 가마 구조와 그릇 형태의 시기적 변화, 그리고 지방가마와의 관계 등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관요의 이설경로와 운영시기를 다룬 연구는 주로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편년 자료와 백자에 새겨진 명문 등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17세기에는 그릇의 굽 안바닥에 음 각된 간지명(干支銘)과 문헌자료, 그리고 선동리(仙東里)와 송정동(松亭洞), 신대리(新垈 里) 발굴조사 출토자료를 토대로 거의 명확하게 이동경로가 파악되었다. 이에 반해 16세 기는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가마 운영시기와 백자 제작양상에 대해서는 명확히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2009년 이후 관요 발굴이 활발해져 한 가마터에서 여러 기의 가마와 공방지가 확인되고, 특히 무갑리(武甲里) 14호와 곤지암리(昆池岩里) 1호 가마터 주변 발굴조사와 번천리(樊川里) 9호에서 출토된 자기제 지석(磁器製 誌石, 이하 지석)의 명문을 재해석함으로써 16세기 관요의 이설경로와 운영시기를 재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16세기 관요와 지표 또는 발굴조사 과정에 서 수습된 명문백자(銘文白磁) 등을 토대로 16세기 중·후반 관요의 운영시기와 관요백 자 제작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Ⅱ장에서는 16세기 관요의 이설경로와 운영시기와 관련한 연구를 정리해 보고 Ⅲ장에서는 16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관요 중에 발굴조사가 통해 운영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명문백자가 출토된 가마터를 중심으로 16세기 관요의 운영시기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Ⅳ장에서는 16~17세기 관요 중에 발굴조사를 통해 가마 배치양상이 확인된 가마터와 소비유적 출토 명문백자의 비교를 통 해 16세기 관요백자의 제작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가마터(窯址)는 가마(窯)와 그 주변 일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며, 가마는 가마터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개별적인 유구를 지칭하며 8-1호, 8-2호식으로 정리된다..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45.

(4) Ⅱ. 16세기 관요 연구현황 관요는 설치 초기부터 남종면 분원리(南終面 分院里)에 정착(1752년, 영조 28)하기 전까 지는 일정기간마다 광주 전역의 시장(柴場)을 옮겨 다니면서 운영되었는데, 현재까지 확 인된 가마터만 321개소에 달한다. 지역별로는 퇴촌면(退村面)과 초월읍(草月邑), 실촌읍 (實村邑, 2011년 곤지암읍으로 변경)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중부면(中部面)과 도 척읍(都尺面), 남종면은 30여 곳 이내이다. 조선 전기 관요의 운영시기와 이설경로에 대 한 연구는 이들 가마터에서 수습된 자기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먼저 1964~1965년에 발굴조사된 도마리(道馬里) 1호 가마터는 관요로서는 최초로 이루 어진 조사로 가마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乙丑八月’銘이 음각된 사각토봉이 출토되어 1445 년 또는 1505년 전후한 시기에 운영된 것을 확인하였다(국립중앙박물관 2005). 윤용이(1981: 22-45, 2005: 77-107)는 조선 전기 관요에서 출토되는 양질백자의 굽 안바 닥에 유면을 긁어 음각한 ‘天’·‘地’·‘玄’·‘黃’의 의미를 번조되기 전에 관리에 의해 監造 된 기호이거나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天字庫’·‘地字庫’ 등이 있어 그 所用의 구분 기호 2). 로 추정하였다 . 그리고 15~16세기 관요의 운영시기를 세분하였는데, 관음리(觀音里) 21 호와 귀여리(歸歟里) 11호, 오전리(梧田里) 2호를 1470년대, 1480년대, 1490년대, 그리고 1505년 전후의 도마리 1호와 ‘天’·‘地’·‘玄’·‘黃’銘이 수습되는 무갑리 2호·13호·17호, 학동리(鶴東里) 14호·15호, 열미리(悅美里) 5호를 1510년대·1520년대·1530년대에 운 영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16세기 후반 경에는 관요가 ‘左’·‘右’·‘別’銘이 출토되는 대쌍 령리(大雙嶺里) 1호, 곤지암리 1호·3호, 무갑리 11호·12호·15호, 관음리 4호·5호·10 호·11호, 정지리(亭支里) 3호 가마에서 운영된 것으로 보았다. 1980년대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관요의 분포현황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 고, 그 과정에서 많은 명문백자가 수습되었는데, 정양모(1986 ; 9-39)는 15세기 가마터에 서는 ‘天’·‘地’·‘玄’·‘黃’銘이, 16세기에는 ‘左’·‘右’銘, 그리고 17세기에 들어서면 ‘左’· ‘右’銘이 干支, 숫자와 함께 음각되는 것으로 보았다. 다만 干支와 ‘左’·‘右’銘이 음각된 자 기의 경우, 상한이 16세기까지 올라가는 예가 발견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상한 은 대체로 16세기 후반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左’·‘右’銘이 수습되는 가마는 15세기 말 ~16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보고, ‘左’·‘右’가 제작 집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1980~1990년대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의해 관요 발굴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2)  박정민은 ‘天’·‘地’·‘玄’·‘黃’ 등의 字號들이 각각 임의의 소용처를 미리 정해두고 그 범주 내에서 사용이 되었는지, 아니면 자호의 구분이 생산단계에서 생산품 혹은 생산자의 관리와 진상품의 출납에 필요한 과정이었는지는 분명하게 확인하기 어렵지만 적은 구분 단위만이라도 진상품의 관리가 가능한 범주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박정민 2012).. 246. 야외고고학 제15호.

(5) 가마와 공방지 등의 유구와 가마 운영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간지명 백자가 수습되었다. 먼저 선동리 2호는 간지명 백자를 통해 1640~1649년에 운영된 것으로 밝혀짐으로서 관요 3). 를 매 10년마다 수목이 우거진 곳으로 이설하였다는 문헌기록 을 입증해 주는 계기가 되 었다. 그리고 우산리 9호 가마터에서는 가마 3기와 ‘壬寅’(1542년)銘이 음각된 지석, 번천 리 5호·9호 가마터에서는 가마 1~2기와 ‘嘉靖三十三年’(1554년)銘과 ‘嘉靖壬子’(1552년) 銘이 음각된 지석이 출토되었다. 2000년대에는 조선관요박물관(현 경기도자박물관)이 송정동 5호와 6호, 신대리 18호 가 마터를 조사하여 가마와 운영시기를 알 수 있는 간지명 백자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이들 자료를 토대로 조선 전기~중기에 이르는 가마의 특징과 지방가마와의 비교 연구가 이루 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방백자의 편년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전승창(2007)은 1480년대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던 광주 남종면 귀여리 가마터의 운 영시기를 문헌기록 등을 토대로 1493년 전후한 시기로 보았다. 또한 관요시기를 4시기로 구분하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전반에는 ‘天’·‘地’·‘玄’·‘黃’銘의 글자가 새겨진 파편이 확인되는 우산·도마·번천·귀여·오전·무갑·학동·열미리에 가마가 이설되었고, 16세기 후반에는 ‘左’·‘右’나 ‘別’銘이 새겨진 파편이 확인되는 관음·정지·대쌍령리· 무갑·곤지암리 순으로 관요가 이설된 것으로 보았다. 김경중(2010: 165-190)은 경기도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영훈 기증유물과 송정 동 5호·6호, 선동리 2호 가마터에서 출토된 간지명 백자와의 비교, 그리고 용인 왕산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간지명 백자와 서울지역 소비유적에서 출토된 간지명 백자를 토대로 17세기 관요의 운영시기를 재조명하였다. 특히 상림리는 1618~1625년과 1628~1636년, 선 동리는 1640~1648년, 그리고 송정동은 1649~1654년으로 운영시기를 상정하였다. 2009~2012년에는 16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무갑리 14호와 대쌍령리 2호, 그리고 곤지암리 1호, 도마리 7호와 번천리 8호 가마터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여러 기의 가마가 인접해서 분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운영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명문백자가 출토되었다. 최근에는 서울지역 소비유적 출토 관요백자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관요에서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 없는 ‘宇’銘이 음각된 백자가 어영청지(御營廳址)와. 3)  『承政院日記』 103冊, 仁祖 26年 11月 9日. “金光煜 以司饔院官員 以都提調意啓曰 分院沙器燔造之處 自庚辰年移設之後 將迫 十年 樹木已盡 居民工匠等 累次呈訴 請爲移設者久矣 近歲連値凶荒 遷徙動役 莫如仍舊貫之爲愈 故退却而不施矣 今則事勢 異於 前日 運柴於數十里之外 其弊不些 故不得不移 而本院柴場內 廣州東面松峙 可合移設云 明年燔役爲始, 移設於此地 事甚便當 ….” 『承政院日記』 255冊, 肅宗 2年 8月 1日. “李觀徵 以司饔院官員 以都提意啓曰 分院沙器燔造之所 排設取柴 若近十年 則樹木旣 盡 決難繼燔 故例移於他處矣 今者燔所之設 已至十二年 ….”.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47.

(6) 4). 청진동(淸進洞) 유적, 종묘(宗廟)광장에서 수습되었다 . 이 명문은 ‘天’, ‘地’, ‘玄’, ‘黃’과 같 이 굽 안바닥에 유면을 긁어 글자를 음각한 점과 양질백자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5). 보아 관요에서 제작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 그러나 ‘宇’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黃’의 다음 순서인 글자로 볼 때 ‘天’·‘地’·‘玄’·‘黃’과 같은 의미로 볼 수는 있으나 현재 생산 유적에서는 확인된 바 없기 때문에 추후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들 연구 성과 중에 문헌자료와 가마터 출토 명문백자의 분석, 그리고 기형의 변화 등 을 토대로 추정한 관요 설치 이후부터 16세기까지의 관요 이설경로와 운영시기를 연구자 6). 별로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 <표 1> 연구자별 관요설치 이후~16세기 관요 운영시기 정양모(1986). 世宗代 ~成宗代 우산리 번천리 오전리 도마리 무갑리. 윤용이(2005). 전승창(2007). 1467년 우산리 2호·4호. 관요 1시기 (1466~1493). 1470년대 관음리 21호 1480년대 귀여리 11호. 1490년대 오전리 2호 1505년 전후 도마리 1호 1510년대 무갑리 2호·13호·17호. 16세기 관음리.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460년대 우산리 1480년대 관음리 1490년대 귀여리 관요 2시기 (1493~1530) 1493년 전후 귀여리 11호 1500년대 도마리. 1520년대 학동리 14호·15호. 1510~1520년대 무갑리. 1530년대 열미리 5호. 관요 3시기 (1530~1559). 1542년 경 우산리 9호. 1540년대 우산리 9호. 1552년 전후 번천리 5호·9호. 1550년대 번천리 5호·9호. 1542년 전후 우산리 9호 16세기 중반 번천리 9호 1554년 전후 번천리 5호. 4)  어영청지에서 수습된 것은 ‘宇’가 단독으로 음각되었으며, 종묘광장 주변과 청진동 유적 수습유물은 저부 일부가 결실되어 전체 숫 자는 알 수 없으나 함께 시문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5)  박정민은 ‘宇’명이 다른 字號들에 비해 출토량이 극히 적은 점은 생산량이 소량이었기 때문으로 보고, 국가에서 미리 예상이 가능한 수요 증가분에 대해서는 별도의 자호를 새로 부여하는 방식을 취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점각(정각)명을 부가하여 소용처의 변화 에 따른 수요 병동에 대응한 것으로 추정하였다(박정민 2012: 5). 6)  17세기 관요의 운영시기와 관련해서는 金京中 2010: 165-190 참조.. 248. 야외고고학 제15호.

(7) 16세기 후반. 16세기 관음리. 대쌍령리 1호, 곤지암리 1호·3호, 무갑리 11호·12호·15호, 관음리 4호·5호·10호·11호. 1590년대 정지리 3호. 관요 4시기 (1560~1599) 대쌍령리 1호 곤지암리 1호·2호 ↓ 관음리 4호·5호·11호·18호 무갑리 10호·11호 ↓ 정지리. <표 1>을 보면 2000년대 16세기 관요 운영과 관련해서 연구자들의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도마리 1호와 우산리 9호, 번천리 5호·9호 가마터에 서 명문백자가 출토되어 대략적인 운영시기가 밝혀지고, 지표조사를 통해 16세기 후반부 터 굽 안바닥에 음각되는 명문이 ‘天’·‘地’·‘玄’·‘黃’에서 ‘左’·‘右’로 바뀌는 것이 확인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연구자들이 정지리를 16세기의 마지막 관요가 있었던 곳으 로 보는 이유는 정지리 3호에서는 관음리나 무갑리 관요에서 확인되는 태토빚음을 받쳐 번조한 백자가 출토되는 것이 아니라 오목굽에 굵은모래를 받쳐 번조한 백자가 출토되기 때문이다(윤용이 2005).. Ⅲ. 명문백자로 본 16세기 중·후반 관요 운영시기 재검토 1. 16세기 중반 앞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한 지역에서 관요의 운영기간은 약 10년으로 7). 8). 이는 땔나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다만 오향리(五香里) 관요가 3년 , 신대리 관요가 12 9). 년 , 그리고 발굴조사된 송정동 5호 가마가 6년인 것처럼 운영기간이 일정하지 않은 것 은 땔나무의 조달상태에 따라 이설시기를 유동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전승창 2004 : 18). 17세기 관요는 문헌기록과 조사과정에서 수습된 간지명 백자 등을 통해 운영시기 7)  『承政院日記』 73冊 仁祖 18年 1月 11日. “司饔院官員 以都提調言啓曰 沙器燔造之地 柴木垂盡 則例以移設 而廣州舊基 已過十 年 非但樹木已盡 …” 『承政院日記』 255冊 肅宗 2年 8月 1日. “李觀徵 以司饔院官員 以都提意啓曰 分院沙器燔造之所 排設取柴 若近十年 則樹木旣盡 決難繼燔 故例移於他處矣 …” 8) 『承政院日記』528冊 景宗 卽位年 12月 17日. “又以司饔院官員 以提調意啓曰 本院燔造所丁酉年間 移設場內實村面五陽洞矣 本 院匠卒輩 齊聲呼籲曰 燔所近處柴木殆盡 明年燔木 無路繼用 若不趁卽移設 必將有狼狽之患 故使郞廳移設可合處看審 則場內牛 川樹木 雖不茂盛 水路最近 間間貿用 不至狼狽云 依此移設宜當 官廳庫間工作廳 依例造作 應用各樣雜物 解氷運給事 知委本道 及江原監司處 何如 傳曰允 9)  『承政院日記』 255冊 肅宗 2年 8月 1日. “… 今者燔所之設 已至十二年 切無刈柴之路 不得不移設 而必 秋冬有所經營 可於明春 始燔 廣州本院屬柴山內 可合移設處 …”.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49.

(8) 가 확인되었지만 16세기 관요는 발굴조사된 가마터도 적을 뿐만 아니라 운영시기와 관련 된 문헌기록도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운영기간을 10년으로 설정하고 시기를 구분하였다. 이에 본 장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무갑리 14호와 곤지암리 1호, 대쌍령리 2 호 가마터에서 수습된 명문백자와 번천리 9호 가마터에서 수습된 지석의 재해석, 그리고 1997년에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이 공동으로 실시한 관요조사에서 수습한 음각 명 백자 등을 토대로 10년 단위로 설정된 16세기 관요의 운영시기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중에 1505년 전후한 시기에 운영된 도마리 관요 이후부터 우산리 관요 이전 시기의 세 부적인 운영시기와 위치에 대해서는 지표조사를 통해 ‘天’·‘地’·‘玄’·‘黃’銘이 수습된 학 동리 14호·15호, 열미리 5호 가마터 일대로만 추정될 뿐 대략적인 운영시기도 알 수 없 다. 이에 본 장에서는 1530년대 전반 이전 시기에 운영된 관요는 제외하고자 한다. 먼저 번천리 9호 가마는 출토된 철화백자지석(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07 : 도 1, 사진 10). 230)에서 확인된 ‘嘉靖壬子’銘과 墓誌 의 撰者인 윤춘년(尹春年, 1514~1567)과 박민헌(朴 民獻, 1516~1586)의 관직 재임기간 등을 근거로 하한이 적어도 1552~1555년 사이인 것으 로 알려져 있다(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07). 그러나 이 지석 외에도 여러 점의 지석편이 수습되었는데, 다른 지석(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07 : p.178의 묘지 ⑤, 사진 230, 231)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번천리 9호 가마의 운영시기를 좀 더 구체화할 수 있다. 즉 기존의 보고에는 묘지에 씌어진 “…… 字實之龍仁人高麗 …… 三重大匡吉卷之 …… 使諱伯持曾 祖 贈”의 ‘字實之’를 이춘영(李春英, 1563~1606)의 字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實之’ 가 이종유(李宗蕤, 1479~1521)의 字임을 『林塘遺稿』 下 文 朝散大夫行通禮院引儀李公墓 碣銘 幷序에서 확인하였다. 이종유는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종6품)를 지낸 인물로 43 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고 서울 금천구에 묘가 조성되었으나, 부인과 아들들에 의해 1558 년 양주시 도하리로 이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석이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 지석편이 번천리 9호 가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 근거로 이종유의 장남 이담(李湛, 1510~1575)의 부탁으로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으로 재직할 당시 묘갈명을 짓고 1558년 7월에 만들어진 墓碣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公諱宗蕤 字實之 龍仁人 遠祖諱吉卷 佐麗祖 策三韓壁上功 位至太師三重大匡 厥後 簪 組相繼 世有聞人 十三世而曰中仁 駒城府院君 其子曰士渭 判書 以文行從圃隱 牧老遊 判. 10) 誌石은 장례의 절차 중 마지막에 묻는 하나의 장례도구로서 지상에 세우는 묘비와 묘표 등과 같은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의미를 가 지는 것이며 墓誌는 誌石이라는 물건에 기록하는 문장으로 갈문이나 행장과 같은 하나의 기록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김세 진 2009:1).. 250. 야외고고학 제15호.

(9) 書有三子 長曰觀察使諱伯持 以文藻政材稱 …” 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 지석이 이종유가 죽은 1521년(중종 16)에 제작되었을 가능성 도 있지만 번천리 9호 가마가 최소한 1552년에는 운영되고 있었던 점으로 볼 때 그 가능 성은 희박하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이종유의 무덤을 이장하는 1558년에 철화안료로 쓴 지석을 번천리 9호 가마에서 주문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특히 보고서에 지석 이 퇴적 1-Ⅱ와 퇴적1-Ⅳ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퇴적1-Ⅰ층에 부식토 와 유물이 드물게 섞여 있는 점으로 볼 때 번천리 9호 가마의 마지막 퇴적은 1-Ⅱ이며, 이 는 번천리 9호 가마의 하한을 최소한 1558년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嘉靖壬 子’銘이 수습된 번천리 9호 가마 일원이 ‘嘉靖三十三年’銘이 수습된 번천리 5호, 그리고 ‘地 ’와 ‘玄’명이 출토된 번천리 7호·8호 가마 일원과 함께 최소한 1552~1558년까지는 운 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갑산 자락에 위치한 무갑리는 현재 22개소의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는 것으 로 보고된 곳으로 무갑산은 1493년(성종 24)의 “…… 사옹원 사기소의 시장은 일정한 곳이 없어 땔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따라 옮긴다. …… 임금이 고점(羔岾)·가잉읍산(加仍邑山)·목예산(木刈山)·여말동(余末洞)·무애산 (無涯山)·도마현(都麻峴)을 모두 사옹원에 주고 예전대로 벌목을 금하라. ……” 11). 라고 한 기록 에 등장한 무애산으로 추정된다. 이를 토대로 윤용이는 무갑리를 최소한 1493년 전후부터 일정기간 관요가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天’·‘地’·‘玄’·‘黃’銘이 수습된 2호·13호·17호 가마는 1510~1520년에, ‘左’·‘右’銘이 수습된 10호 가마는 1560년 이후 12). 에 운영된 것으로 보았다 . 그러나 무갑리 13호와 17호 가마터 사이에 위치한 14호 가마 터 발굴조사가 2011년 한국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이루어져 가마 5기와 공방지와 ‘嘉靖 二十七年’명이 음각된 지석이 수습되어(노대석 외2011) 무갑리 14호 가마터의 운영시기를 재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석에 음각된 ‘嘉靖二十七年’銘은 1548년(명종 3)이며, 특히 ‘嘉靖二十七年’명 중에 ‘二十七’만 다른 음각에 비해 깊이가 깊고 크기가 큰 점은 ‘二十七’ 를 제외한 부분을 먼저 음각하고 묘주(墓主)가 사망하자 죽은 해를 음각했기 때문이며, 이는 지석이 1548년에 번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天’과 ‘玄’銘이 음각된 백자편도 수습. 11) 『成宗實錄』, 卷277, 24年 5月 25日. “… 而司饔院沙器所柴場無定所 隨薪木茂密處移徙 …… 傳曰 羔岾加仍邑山木刈山余末 洞無涯山都麻峴竝給司饔院 依舊禁伐 …” 12) 윤용이는 1510년대·1520년대·1530년대의 분원의 요지로서 비견되는 것은 광주 무갑리 2호·13호·17호와 학동리 14 호·15호, 그리고 열미리 5호 요지로 추정하고 있다(윤용이 2005: 89)..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51.

(10) <그림 1> 무갑리 14호 일원 출토 磁器製 誌石. <그림 2> 무갑리 14호 일원 출토 명문백자. 되었다. 이처럼 ‘天’과 ‘玄’銘이 수습되는 무갑리 14호 가마는 1548년 전후한 시기에 운영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무갑리 14호 가마 일원의 상·하한은 가마와 공방지로 추정할 수 있다. 무갑리 14 호 가마터에서 조사된 2기의 가마 외에도 동쪽으로 3기의 가마와 폐기물퇴적이 확인되고 공방지가 최소한 1548년까지 운영된 가마의 아궁이부를 일부 파괴하고 조성되었다. 이는 1548년 이후에도 이 일대에서 가마가 설치·운영되었음을 뜻하며, 이 가마가 동쪽에 위 치한 가마로 보인다. 그리고 무갑리 14호 가마터 주변에 ‘天’·‘地’·‘玄’·‘黃’銘이 수습되 는 17호 가마터 등이 위치하고 있어 1547년 이전에도 가마가 설치되어 백자를 생산하였 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종합해 보면 무갑리 14호와 2호, 그리고 13호와 17호 가마 일원의 운영시기 하한은 번천리 관요 이전인 1551년이고, 상한은 다음에 살펴 볼 우산리 9호 가 마 일원의 운영시기를 볼 때 1540년대 중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산리 9호 가마의 운영시기는 현재 ‘壬寅’銘이 음각된 지석을 통해 1542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산리 9호 가마터 주변으로 10호와 11호 가마터 등이 분포 하고 있는 점과 번천리 9호와 17세기 중반에 운영된 선동리 2-1호나 2-2호, 송정동 5호 가마의 운영기간이 4~7년인 점으로 볼 때(표 3 참조) 우산리 9호 가마 일원도 6~7년 정도 는 운영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관요가 우산리 9호 일원에서 무갑리 14호 일원으로 옮겨졌음을 의미하며, 운영시기는 가마 분포양상과 무갑리 14호 일원의 운영시기로 볼 때 1530년대 중반부터 무갑리 14호 가마 일원이 운영되기 이전인 1540년대 초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16세기 후반 16세기 후반에 운영된 가마터로는 대쌍령리 1호와 곤지암리 1호·2호, 관음리 10 호·11호, 그리고 무갑리 10호·11호, 정지리 3호가 있다. 여기서 정지리 가마가 1590년 대 운영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리고 백자의 유색과 굽 높이의 변화를 통해 대쌍. 252. 야외고고학 제15호.

(11) 령리와 곤지암리 관요가 관음리와 무갑리 관요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보았다(전승창 2007 : 276). 그러나 곤지암리 1호 가마의 대략적인 운영시기가 밝혀진 곤지암리 1호 가마터 주 변 발굴조사 결과와 관음리 10호 가마터 수습 ‘地’銘 백자 등을 통해 16세기 후반 관요의 운영시기와 이설경로를 재설정할 수 있다. 먼저 관음리 관요의 운영시기와 관련해서는 1997년에 국립중앙박물관과 경기도박물관 이 합동으로 조사한 관음리 10호 가마터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관음리 10호 가마터에서 ‘左’·‘右’銘 뿐만 아니라 ‘地’銘이 음각된 백자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고되었 기 때문이다(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1998: 67). 현재 ‘天’·‘地’·‘玄’·‘黃’銘에서 ‘左’·‘右’銘으로 음각명이 바뀌는 시기를 16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으며, 최소한 1558년까 지 운영된 번천리 9호 가마터 일원에서도 ‘左’·‘右’銘이 음각된 백자가 수습된 예는 현재 까지 없다. 이를 근거로 ‘左’, ‘右’銘이 수습되는 관음리 4호와 5호, 10호와 11호의 운영시 기를 16세기 후반으로 설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곤지암리 1호 가마터 주변에서도 ‘左’· ‘右’銘만 수습되었다. 이는 최소한 관음리 10호 가마 일원의 운영시기가 곤지암리 관요 이 후 시기가 아니라 이전 시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左’·‘右’銘을 새기기 위한 견본으로 ‘地’명이 음각된 백자를 가지고 갔을 수도 있 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 하더라도 ‘天’·‘地’·‘玄’·‘黃’銘에서 ‘左’·‘右’銘으로 바뀌는 시기 에 운영된 가마가 관음리 10호 가마터 일원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운영시기와 관련 해서는 관음리 4호와 10호 간의 거리가 약 350m이상 떨어져 있는 점과 그 주변으로 8개 소 이상의 가마터가 밀집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번천리와 무갑리, 우산리 관요보다는 운영기간이 더 길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관음리 10호 가마 일원의 운영시기는 번천리 관요 이후인 1559년부터 1560년대 후 반까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天’·‘地’·‘玄’·‘黃’銘과 ‘左’·‘右’ 銘 백자의 공존과 관련해서는 이들 명문백자 가 가마 안에서 같이 확인되지 않는 한 명확 히 알 수 없으나, 경복궁 함화당지(景福宮 咸 和堂址)에서 출토된 백자의 굽 안바닥에 ‘左’ 銘이 음각된 곳 옆에 정으로 쪼아 ‘地’銘을 새 겨 넣은 경우(정각명)가 있어(국립문화재연구 소 2008) 일정기간 동안 공존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天’·‘地’·‘玄’·‘黃’명에 정각. <그림 3> 경복궁 함화당지 출토 ‘左’銘 백자.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53.

(12) 하던 관행이 ‘左’·‘右’를 음각하던 초반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는 추후 소비유적에서 출토된 백자의 기형 분석을 통해 좀 더 명확해 질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곤지암리 관요의 운영시기를 살펴보면 곤지암리 1호·2호 가마터는 지표조 사를 통해 ‘別’銘이 수습된 곳으로 2009년 한국문화유산연구원에서 실시한 곤지암리 1호 가마터 주변 조사 결과 가마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左’·‘右’銘이 음각된 백자와 청화안료 로 필사된 지석이 수습되었다(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09). 이 지석에는 ‘察使叙疇’라는 인 물과 ‘隆慶六’銘이 확인되는데, 홍서주(洪叙疇, 1499~1546)는 1543~1545년(중종 38~인종 1)사이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인물로 곤지암리 관요의 운영시기로 볼 때 묘지 주인과 관 련된 인물로 보이며, ‘隆慶六’은 1572년(선조 5)에 해당한다. 이는 곤지암리 1호 가마의 운 영시기가 1572년 전후한 시기임을 알려준다. 다음으로 관음리 관요와 곤지암리 관요와의 선후관계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관음리 관요가 1560년대 후반 까지 운영된 것으로 볼 때 관음리에서 곤지암리 순으로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운영시기는 현재 곤지암리에 5개 의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1570년 전후부터 1570년대 중반까지로 생각된다. 최근에는 대쌍령리 2호 가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한국문화유산연구원에 의해 이루어 져 가마 1기와 공방지 2기가 확인되고 ‘右’銘으로 추정되는 명문이 음각된 백자편과 청화 백자편 등이 수습되었다. 대쌍령리 1호 가마는 16세기 후반에 운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 는데, 이번 대쌍령리 2호 가마조사에서 ‘右’銘이 수습되어 대쌍령리 관요가 16세기 후반 에 운영된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대략적 인 운영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명문백자 는 수습되지 않았지만 곤지암리 관요의 운영시기로 볼 때 1570년대 후반 이후에 운영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갑리와 의 선후 관계는 시간적으로는 관요가 ‘左’, ‘右’銘이 수습된 무갑리 14호 가마 일원에 서 1540년대 중반부터 1551년까지 운영되 고 다시 ‘左’, ‘右’銘이 출토되는 무갑리 10 호와 11호 가마 일원으로 이설되기 위해 서는 수목이 무성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시간이 경과해야 한다는 점 과 지리적으로는 관요가 곤지암리에서 무 갑리, 그리고 대쌍령리에서 정지리 순으 로 이설되는 것보다 곤지암리에서 대쌍령. 254. 야외고고학 제15호. <그림 4> 광주 관요 분포도.

(13) 리, 무갑리, 정지리 순으로 이설하는 것이 거리상 가깝다는 점에서 대쌍령리가 무갑리 10 호·11호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우산리와 무갑리, 관음리와 곤지암리처 럼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어 무갑리에서 대쌍령리로 관요가 이설되었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는 추후 정밀조사 등을 통해 자료가 축적되면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운영시기를 정리해 보면 대쌍령리 관요는 1570년 후반부터 1580년대 초, 무갑리 10호 일원은 정지리 관요 이전인 1580년대 중반부 터 1590년대 초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16세기 관요가 무갑리와 우산리 9호, 그리고 번천리 5호·9호, 대쌍령리, 곤지 암리, 관음리, 무갑리 순으로 10년마다 이설한 것이 아니라 우산리 9호와 무갑리 14호, 번 천리 5호·9호, 그리고 관음리 10호와 35호, 곤지암리, 대쌍령리, 무갑리 10호 순으로 땔 나무를 찾아 이설하였음을 가마터에서 출토된 명문백자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를 시기별 로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 16세기 관요 운영시기 년도 유구. 1505년 전후. 1530년대 1510~ 1540년대 후반~ 1530년대 중반~ 1540년대 중반 1551년 초. 1552~ 1558년. 1570년 1570년대 1580년대 1559~ 전후~ 후반~ 중반~ 1590년대 1560년대 1570년대 1580년대 1590년대 중반 후반 중반 초 초. 도마리 1호 일원 학동리, 열미리 우산리 9호 일원 무갑리 14호 일원 번천리 5호, 9호 일원 관음리 10호 일원 곤지암리 1호 일원 대쌍령리 2호 일원 무갑리 10호 일원 정지리 3호 일원.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55.

(14) 그러나 위의 <표 2>에서도 알 수 있듯이 1510~1530년대 전반의 관요 위치와 관련해서 는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 이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510~1520년 대에 운영된 것으로 알려진 무갑리 관요의 운영시기가 1540년대 중반과 1580년대로 확인 되었기 때문이고, 가마의 운영기간으로 볼 때 ‘地’·‘天’銘이 수습되는 학동리 14호·15호 가마터나 ‘黃’銘이 수습되는 열미리 5호 가마터로만 한정하기에는 확인되지 않은 운영기간 이 길기 때문이다. 16세기 초 관요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박상(1474~1530)의 『訥齋集』의 別 分司饔權直長行 余爲軍資正時同僚라는 詩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詩를 보면 崇儉君王家法純. 검소함을 숭상하는 군왕의 법도가 순수해. 用須瓷器斥金銀. 자기를 쓰고 금은을 물리쳤다. 白黏歲掘中原土. 백점토는 매년 중원토(中原土)를 캐내고. 材美秋燒廣嶺薪. 재료가 좋아 가을에 광주 산의 나무로 그릇 굽는다. 身出禁中分內院. 몸은 궁궐의 분내원(分內院)을 나왔지만. 事專江表領工人. 일은 오로지 강가에서 공인들을 거느린다. 草書傳得公孫劍. 초서는 공손대랑(公孫大娘)의 뛰어난 칼춤 솜씨를 보고 터득했지만. 陶世規模在彼匀. 도공 세계의 표본은 저 물레에 있다 .. 13). 라고 씌어져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강가에서 공인들을 거느린다’라고 한 점이다. 이 詩는 박상의 생몰연대와 과거 급제 시점으로 볼 때 1501~1530년 사이에 씌어진 것으 로, 이 시기에 관요가 강가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 시기에 운영된 관요는 도마리와 학동리, 열미리로 추정되는데 학동리와 열미리 관요는 강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를 볼 때 詩에서 언급한 가마는 도마리일 가능성이 높고, 도마리 운영시 기의 상한 또는 하한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Ⅳ. 발굴조사 자료로 본 16世紀 官窯白磁 製作樣相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관요는 초기에는 광주의 북부와 서부에 주로 설치되었으며, 한 강과 접하는 커다란 물줄기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특징을 보이나 17세기 관요는 동부와. 13)  시의 해석은 방병선 2003: 209의 내용을 그대로 수록하였음.. 이 외에도 첫 번째 詩는 다음과 같다.. 朴祥, 『訥齋集』 續集 卷1, “同監初識漢中面 分院更看湖外身 我鬢照銅霜線長 君髥垂膝墨華新 尊前歲月驚流水 客裏鶯花惜暮春 明日廣陵人事別 衣征馬草如茵”. 256. 야외고고학 제15호.

(15) 서부, 남부 등에 고르게 분포하고 이설지역 간의 거리가 이전에 비하여 멀어지며, 커다란 물줄기의 지류 주변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연료로 사용되던 땔나무에 의 해 생겨났다(전승창 2004: 27). 14). 이 가운데 16세기 관요는 9곳 이 발굴조사되어 도마리 1호와 곤지암리 1호 가마터 일 원에서만 가마가 확인되지 않았을 뿐 1기 이상의 가마가 확인되었다. 먼저 번천리 일원 의 경우, 번천리 5호 가마터에서만 1기의 가마만 확인되었을 뿐 번천리 7호~9호에서는 2~15m 간격을 두고 2기 이상의 가마가 나란한 방향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15). (그림 9) . 현재까지 번천리 5호와 7호~9호 가마터에서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 된 가마만 10기이며, 주변에 1기의 가마터가 더 분포하고 있다. 이는 이 일대에서 최소한 1552~1558년 동안 시기차를 두고 11기 이상의 가마가 설치·운영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포양상은 무갑리 14호 가마터에서도 확인되는데, 발굴조사된 14-1·14-2호의 가마를 제외하고도 동쪽으로 3기의 가마 흔적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경 50m 이내. <그림 5> 번천리 전경(1552~1558년). <그림 6> 관음리 전경(1560년대). <그림 7> 선동리 전경(1640~1648년). <그림 8> 송정동 전경(1649~1654년). 14) 본 논고에서는 관요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관요설치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진 우산리 2호와 17호, 그리고 건업리 2호, 신대리 29호은 제외하였다. 15) 번천리 7호ㆍ8호 가마터 일원에는 <그림 9>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가마 퇴적 양상으로 볼 때 2기 이상의 가마가 더 분포하고 있 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번천리 8호 가마터의 8-1호ㆍ8-2호(그림 4참조)는 가마벽과 토층으로 볼 때 8-1호가 먼저 운영되었다..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57.

(16) 에 무갑리 2호와 13호, 그리고 17호 등 3기의 가마 터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도마리 7호 가마터에 서도 발굴조사에서도 3기의 가마가 반경 10m안에 서 나란한 방향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 으며, 운영시기는 도마리 1호 가마터의 주변에 위 치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1505년 전후한 시기에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1992년 발굴 조사한 우산리 9호 가마터에서도 이러한 가마 배 치 양상이 확인된다. 우산리 9호에서는 3기의 가 마가 확인되었는데, 9-1호와 9-2호는 바로 인접해 있고, 9-3호는 9-2호에서 남쪽으로 약 10m정도 떨. <그림 9> 번천리 8호 일원. 어진 곳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16세기 관요는 여러 기의 가마가 동시기에 설치·운영되었음을 발굴조사로 확인된 가마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17세기 관요인 송정동 5호와 6호 가마는 구릉을 사이에 두고 각각 확인되었 으며, 인접지역에서 다른 가마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신대리 18호에서도 1기의 가마만 확인되었다. 이는 17세기 관요는 1기의 가마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동시에 운영되었다 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가마가 설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치 양상을 잘 보여주는 가마터가 경기도자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선동리 2호 가마터 일원이다. 선 동리 2호 일원에서는 1985~1986년에 2기(3-가·3나, 그림 10 참조)와 2010~2011년에 3기, 그리고 지 표조사를 통해 1기의 가마가 확인되었을 뿐만 아 니라(그림 10)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약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최소 2기의 가마가 더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8기의 가마는 상하로 등 고선에 직교하면서 상하로 존재하고 있으며, 발굴 조사된 3기의 가마는 폐기물퇴적에서 수습된 간지 명 백자를 통해 2-1호 가마는 1641~1644년, 2-2호 가마는 1644~1648년, 2-4호 가마는 1647~1648년 에 운영되었음이 밝혀졌다. 16세기~17세기 가마터 에서 확인된 가마 수 및 배치 양상을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258. 야외고고학 제15호. <그림 10> 선동리 2호 일원.

(17) <표 3> 16~17세기 가마 운영기간과 가마 수 시기. 16세기. 유적. 운영시기. 가마 수. 배치 양상. 도마리 7호. 1505년 전후. 3기. 반경10m 안에 인접. 우산리 9호. 1530년대 후반~1540년대 초. 3기. 10m 안에 인접. 무갑리 14호 일원. 1540년대 중반~1551년. 5기 (2기 발굴). 2~3기씩 인접. 번천리 5호. 1552~1558년 사이. 1기. 번천리 9호. 1552~1558년. 2기. 인접. 번천리 7호ㆍ8호 일원. 1552~1558년 사이. 7기 이상 (2기 발굴). 2~3기씩 인접. 대쌍령리 2호. 1570년대 후반~1580년대 초. 1기. 단독. 용인 왕산리. 1626~1627년. 1기. 단독. 선동리 2호 (1985~86년발굴). 1640~1648년. 확인 안됨. 선동리 2-1호. 1641~1644년. 1기. 선동리 2-2호. 1644~1648년. 1기. 선동리 2-4호. 1647~1648년. 1기. 송정동 5호. 1649~1654년. 1기. 송정동 6호. 1650~1653년. 1기. 신대리 18호. 1670년 전후. 1기. 17세기. 상하로 인접해 있으며 시기차가 있음. 약 80m 이격. 단독. 이처럼 16세기 관요는 2~3기가 나란한 방향으로 인접해서 확인되는 반면에 17세기 관 요에서는 가마가 1기만 운영되거나 또는 동시기에 운영된 가마의 경우 80m이상 떨어져 서 운영되었음을 송정동 5호와 6호, 선동리 2-2호와 2-4호, 그리고 1985~1986년 이화여 자대학교에서 발굴조사한 선동리 2호(현재 선동리 1호)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6). 다음으로 16세기 가마는 퇴적양상을 볼 때 갑발을 이용해서 양질백자 를 생산하던 갑 번요(匣燔窯)와 태토빚음을 받쳐 여러 점을 포개서 조질백자를 생산하던 상번요(常燔窯) 17). 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 도마리 7호와 번천리 7호·8호, 우산리 9호 가마의 경우처럼 조 질 백자를 생산하던 가마 2기가 바로 인접해서 확인되고 있어 선후관계가 있을 수는 있지 만 양질백자를 생산하던 갑번요가 반경 10m안에 위치하고 있는 점은 기본적으로 동시기. 16)  양질백자는 갑발을 이용해서 제작한 백자로 여기서는 ‘天’ㆍ‘地’ㆍ‘玄’ㆍ‘黃’ㆍ‘左’ㆍ‘右’銘이 음각된 백자에 한정한다. 17) 갑번요와 상번요는 주요(主窯)와 주변요(周邊窯(從屬窯))로도 불리는데, 경기도 광주일대의 주요와 주변요(종속요)는 모두 궁궐에 진상하는 백자를 구웠던 관요에 포함된다. 관요의 갑번백자나 예번백자는 왕실에서 일상용으로 혹은 의례용으로 사용되었고, 조 질백자는 궐내 하위 계층이 사용했다(김영원 2003: 169-170). .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59.

(18) 18). 에 양질백자와 조질백자를 나누어 생산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이에 반해 17세기 관 요는 송정동 5호와 선동리 2-2호에서 갑발이 많이 수습되기는 하였으나 조질백자도 많이 수습된 점으로 보아 1기의 가마에서 필요에 따라 백자를 갑번과 상번으로 동시 또는 별도 로 생산하였다. 이를 종합해보면 16세기에는 양질백자와 조질백자를 생산하는 가마를 좌우로 약 2~10m정도 거리를 두고 2~3기를 설치한 반면에 17세기에는 동시기에 여러 기의 가마를 운영할 경우에는 최소한 좌우로 80m정도 거리를 두고 설치하였으며, 시기차가 있는 경우 에는 상하로 옮겨 설치하였음을 선동리 2호 가마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7세기에는 가마폐기물퇴적을 통해 1기의 가마에서 필요에 따라 양질백자와 조질백 자를 생산하였음을 확인하였다는 점이 16세기와 17세기 가마 배치와 운영 양상의 차이점 이라 할 수 있다.. Ⅴ. 맺음말 경기도 광주 관요가 16세기 전반에는 도마리나 열미리, 학동리에 설치·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나 운영시기 등은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근에 16세기에 운영된 것으로 알려 진 무갑리 14호와 곤지암리 1호 가마터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와 관음리 10호 가마터 수습 유물, 그리고 번천리 9호 가마터에서 수습된 묘지명의 재해석을 통해 1530년대 후반 이후 의 관요 이설경로와 운영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1530년대 후반부터 1540년대 초 까지 운영된 우산리 9호 가마 일원을 시작으로 무갑리 14호 일원(1540년대 중반~1551년), 번천리 9호 일원(1552~1558년)으로 이설되고, 이후 관음리 10호 일원(1559~1560년대 후 반)에서 곤지암리 1호 일원(1570년 전후~1570년대 중반)으로, 그리고 대쌍령리 1호 일원 (1570년대 후반~1580년대 초), 무갑리 10호 일원(1580년대 중반~1590년대 초) 정지리 3호 일원(1590년대 중반~) 순으로 관요가 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560년대 후반까지 운영된 것으로 판단되는 관음리 10호 가마터에서 ‘地’銘이 ‘左’·‘右’銘과 함께 수습되어, ‘左’·‘右’銘백자가 1560년대부터 제작되었음을 확인한 점과 경복궁 함화당지 출토 백자 중에 굽 안바닥에 ‘左’가 음각되고 ‘地’가 정각된 것이 수습되 어 이들 명문이 일정기간 공존하였음을 확인한 점은 성과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 18) 소수의 왕실용품을 만들던 갑번요와 대조적으로 다수를 제작해야 했던 상번요에서는 예상하지 못하게 제작 수량이 증가하거나 뜻 하지 않게 가마의 유지와 보수 등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등 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제작량을 맞추기 위하여 갑번요의 일부 공간을 활용하여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다(전승창 2004: 25-26).. 260. 야외고고학 제15호.

(19) 영청지나 종묘 등지에서 ‘宇’銘이 음각된 백자편이 출토된 점으로 볼 때 ‘天’·‘地’·‘玄’· ‘黃’銘 외에 다른 글자가 음각된 백자가 관요에서 생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560년대를 기점으로 굽 안바닥의 명문이 ‘天’·‘地’·‘玄’·‘黃’에서 ‘左’·‘右’로 변화되는 이유는 확인하지 못하였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문헌자료 분석 등을 통해 밝히고 자 한다. 또한 발굴조사된 16~17세기 관요 자료를 토대로 16세기는 가마 2기 이상이 인접해서 양질백자와 조질백자로 나누어 생산하였으나 17세기에는 1기의 가마가 양질백자와 조질 백자를 필요에 따라 같이 생산하였음을 가마의 배치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처럼 이번 연구를 통해 16세기 관요의 운영시기와 제작양상이 확인됨으로써 16~17세 기 관요에서 생산된 백자의 기형과 가마 구조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 는지 좀 더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관요백자와 지방백자의 비교를 통 해 지방백자의 편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도 마련되었다. 또한 16~17 세기 가마의 배치 양상에 대한 차이점을 인식한다면 추후 관요에 대한 지표조사나 발굴 조사 시 좀 더 체계적으로 조사·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16세기 중·후반 관요가 땔나무가 풍부한 곳을 따라 우산리에서 무갑리, 그 리고 번천리에서 관음리 등으로 옮겨 다녔음을 가마터에서 출토된 명문백자 등을 통해 확인하였다. 그러나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관요가 일률적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 겨 다녔는지에 대한 부분도 연구되어야 할 시점이다. 그 이유는 사옹원 사기소의 柴場이 산을 중심으로 설정되었고, 1곳의 柴場에 다른 2곳에서 동시기에 가마가 설치되었을 가 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와 발굴조사 자료가 계속 축적된다면 조선시대 관요 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논문접수일(2012.8.17) ▶심사완료일(2012.9.20) ▶게재확정일(2012.10.19).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61.

(20)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경기도자박물관, 2008, 『광주 신대리 18호 백자가마터』, 경기도자박물관 학술총서 제5책. , 2011, 『조선백자도요지 보존·정비를 위한 시·발굴조사 약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景福宮 咸和堂·緝敬堂 行閣址 發掘調査報告書』, 대전: 국립문 화재연구소. 국립중앙박물관, 1995, 『廣州郡 道馬里 白磁窯址 發掘調査 報告書 -道馬里1號窯址-』, 서 울: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경기도박물관, 1998, 『京畿道廣州中央官窯(解說篇)』, 서울: 국립중앙박 물관. 金京中, 2010, 17世紀 銘文白磁를 통해 본 官窯의 運營時期-生産·消費遺蹟 出土品을 中心으로, 『한국고고학보』 77, 165-190, 한국고고학회. 김세진, 2009, 『朝鮮時代 磁器製 誌石 硏究』, 충북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 위논문. 김영원, 2003, 『조선시대 도자기』,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노대석 외, 2011, 사적 제314호 광주조선백자도요지 조사성과, 『사적 제314호 광주조선 백자 도요지 조사성과와 과제-2011년 한국문화유산연구원 학술대회』. 박정민, 2012, 點刻銘이 부가된 ‘天·地·玄·黃’銘 백자들의 사용시기와 성격, 『역사와 담론』 61, 445-476, 호서사학회. 방병선, 2003, 『조선후기 백자연구』, 서울: 일지사. 서울역사박물관, 2009, 『서울 종묘광장 인근유적 발굴조사(3차 현장설명회(종묘전교, 회 동·제생동천, 시전 지구))』. 尹龍二, 1981, 朝鮮時代 分院의 成立과 變遷에 관한 硏究(一), 『考古美術』 149, 22-45, 韓 國美術史學會. , 2005, 15·16세기 조선백자의 양상, 『한·일도자문화의 교류양상』, 서울: 경인 문화사.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1986, 『廣州 朝鮮白磁窯址 發掘調査報告書 -번천리5호·선동리 2·3호-』, 서울: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62. 야외고고학 제15호.

(21) , 1993, 『朝鮮白磁窯址發掘調査報告書-附 牛山里 9號窯址 發掘調 査報告』, 서울: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 2007, 『廣州 上樊川里 9號 朝鮮白磁窯址 發掘調査報告』, 서울: 이 화여자대학교박물관. 전승창, 2004, 조선 관요의 분포와 운영체계 연구, 『미술사연구』 18, 3-30, 미술사연구회. , 2007, 『15~16世紀 朝鮮時代 京畿道 廣州 官窯硏究』,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 과 박사학위논문. 鄭良謨, 1986, 京畿道 廣州分院 窯址에 대한 編年的 考察, 『朝鮮白磁陶窯址』, 성남: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鄭良謨·尹龍二·金得豊, 1986, 『朝鮮白磁陶窯址』, 성남: 韓國精神文化硏究院. 조선관요박물관, 2008, 『광주 송정동 5호·6호 백자가마터』, 광주: 조선관요박물관. 최종규 외, 2011, 『종로어영청지유적』, 발굴조사보고 15, 한울문화재연구원. 한국문화유산연구원, 2009, 『광주 실촌읍 곤지암리 492번지 근린생활시설부지 내 유적 발 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집』, 한국문화유산연구원..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63.

(22) A Study on the Operating Time and Production Aspects of the Royal Kilns of the Joseon Dynasty from the Middle to the Latter-half of the 16th Century Kyoung-joong Kim. (Gyeonggi Ceramic Museum). It has now become possible to estimate the relocation path and operating time of the Royal kilns after the late 1530s due to the excavations on Mugap-ri Kiln No. 14 and Gonjiam-ri Kiln No. 1, the ceramic assemblage from Gwaneum-ri Kiln No. 10, and the reinterpretation of the epitaph from the Beoncheon-ri Kiln No. 9. From the latter-half of the 1530s until the early 1540s, Woosan-ri Kiln No.9 was in operation. Then Mugap-ri Kiln No.14 (the mid-1540s~1551), Beoncheon-ri Kiln No.9 (1552~1558), Gwaneum-ri Kiln No.10 (1559~the latter-half 1560s), Gonjiam-ri Kiln No.1 (before and after 1570~the mid-1570s), Daessangryeong-ri Kiln No. 1 (the latterhalf 1570s~the early 1580s), Mugap-ri Kiln No.10 (the mid-1580s~the early 1590s) and Jeongji-ri Kiln No. 3(the mid-1590s~) came into operation, in that order. In particular, as porcelain vessels engraved with the characters ‘地’, ‘左’ or ‘右’ were found at Gwaneum-ri Kiln No.10, it has become evident that white porcelain engraved with ‘左’ or ‘右’ was produced since the 1560s. It was also possible to ascertain, based on porcelain vessels engraved with both ‘左’and ‘地’ found at the Hamhwadang site at Gyeongbok Palace, that there was a time when both ‘左’ and ‘地’ were used together. Furthermore, '天', '地', '玄', '黄', as well as the character '宇', were found to be engraved on the porcelain vessels. In the 16th century, more than two adjacent kilns were in operation at the same time, and each kiln produced, exclusively, high quality white porcelain or low quality white porcelain. However, in the 17th century, a single kiln produced both high quality and low quality white porcelain as needed. Through this study, the operating time and production aspects of the Royal kilns in the 16th century could be confirmed. It has also made it possible to analyze more systematically how the porcelain vessel types and kiln structure of the Royal kilns changed from the 16th to 17th century. Also with the comparison of the white porcelain of the Royal kilns and local kilns, it will contribute to the chronology of the white. 264. 야외고고학 제15호.

(23) porcelain vessels of local kilns. Key words : 16th century, Royal kilns of the Joseon Dynasty, Porcelain vessel engraved with character, Operating time, Production aspects. 16세기 중ㆍ후반 조선 관요 운영 시기 및 제작 양상 연구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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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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