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차 원근법 시연 1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브루넬레스키의 차 원근법 시연 1"

Copied!
13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브루넬레스키의 1차 원근법 시연

두*

르네상스 원근법은 서양미술사의 가장 중요한 발명으로 손꼽힌다 원근법을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우선 인간이 시각주체가 되어서 세상을 체계적으로 인식하려? 는 노력이 되어야 했다 수학과 기하학이 회화적 공간의 생산수단으로 수용된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미술사에서는 알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를 원근법의 창시자로 언급한다. . 이 글에서는 르네상스 원근법의 발명자를 가리기 위해서 회화적 원근법과 건축적 원근법 의 차이를 구분하고 최초의 원근법적 사건으로 알려진 브루넬레스키의 제 차 원근법, 1 시연을 재구성한다 아울러 마네티의 증언에서 모순되는 내용에 대한 새로운 해결을 제안. 한다.1)

르네상스 원근법 다시 말해 중앙투시 원근법의 기초와 회화적 응용을 회화이론으로, 정리하여 책으로 펴낸 것은 알베르티가 틀림없지만 그에 앞서 원근법의 과학을 실험하고, 발명한 것은 브루넬레스키였다.2) 화가가 아닌 건축가가 공간의 평면적 재현을 다루는 원

* 성신여대 강사

1) 논문 질의를 맡으신 목원대 이은기 교수님이A. Parronchi Studi su la dolce prospetti-

년 그리고

va , 1964 , G .C.Argan The Architecture of Brunelleschi and the origins 년 두 편의 논문을 추가로 제공하 of perspective theory in the fifteenth century , 1946 ,

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2)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축가로서 최초의 원근법 이론을 제시했던 인문학자 알베르 티와 가까운 친구였다 알베르티가 그의 첫 미술론 저작인. 회화론 의 이탈리아 어 본을 브루넬 레스키에게 헌정했다는 사실은 두 사람의 절친한 교우관계를 훌륭하게 증언한다 책 한 권의 가격. 이 웬만한 성 한 채와 맞먹었다는 중세 시대와는 사정이 달랐겠지만 초기 르네상스 기에 후원자, 나 귀족장상이 아닌 일개 건축가에게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의 저작이 바쳐졌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알베르티가 보기에 브루넬레스키는 불가사의한 예술의 기적을 이룬 전대미문의 천재였고. , 그의 솜씨로 만들어진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의 천정궁륭은 하늘로 솟구치는 그 그림자로 토스카 , 나의 모든 민족을 넉넉히 가둘 만한 거대한 건축물 로서 만인의 찬사를 누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2)

근법을 발명했다는 사실은 어쩐지 의외로 들린다 물론 조각이나 건축의 실행에서도 원근. 법의 학습과 훈련이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조각에서 부조 형식이라든지 고대 건축이나. , 바로크 건축의 주정면 혹은 내부 공간에서 원근법적 벽체 구성이 회화적 효과를 겨냥하 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원근법이 이차원적인 회화를 삼차원적 공간으로 확장하는 회화, 장르의 고유 기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서 실행되었 던 원근법적 실험과 시연의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평면과 씨름하는 화가들보다는 오히려. 입체적인 조감도를 다루는 설계도면 그리고 수학적 사고에 능숙한 건축가야말로 원근법 의 공간의 발명에 더욱 적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마네티 바사리 필라레테 등, , 15-16세기의 증언들이 주장하는 대로 브루 넬레스키를 르네상스 원근법의 발명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까 예컨대 파노프스키는 알베? 르티가 원근법을 발명했다고 주장한다.3) 특히 알베르티가 발명한 그물망사는 회화적 원 근법의 실행에 몹시 요긴해서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서 이미 화가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 었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는 알베르티보다 한 발 앞서 원근법적으로 그려진 그림들을 사. 람들에게 선보였다 어떤 방식으로 그렸는지는 모른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 . 브루넬레스키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완성한 그림을 내놓았다 그가 두. 차례 시연 그림을 통해서 입증해 보였던 원근법적 제작방식 어떤 것이었는지 또 그의, 방식이 동료 예술가 특히 화가들 사이에 파급되어 어느 정도 실용화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브루넬레스키의 실행은 동시대와 후대의 다른 예술가에게도 계승. 되지 않은 단발성 사건에 그쳤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원근법이 그만큼 혁신적이기도 했. 다.

브루넬레스키 이전에도 많은 화가들이 공간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지의 문제에 관심 과 재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부분 눈어림에 의존한 그림들이어서 그림 속의 배경 건축. 이나 등장인물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고 어색했다 예컨대 성모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대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 장면을 그려놓으면 마치 자그마한 새장 속에 커다란 새 두 마리가 답답하게 쪼그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건축도 벽면과 천장 내부와 외. , 부의 아귀가 맞지 않아서 부실한 인상을 주기 마련이었다 조토나 두치오가 그린 어떤.

생각했다 알베르티가 회화론을 헌정할 대상으로 화가가 아닌 건축가를 선택했던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말대로 회화 예술을 자라나게 하는 자연의 뿌리인 수학의 내용 이 곧 건축 예술. 의 뿌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하나의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론 첫 권이 원근법. 이론으로 짜여진 것은 알베르티 미술론의 주된 관심사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알베르티의 회화 , 1998년 노성두 역, 11쪽부터.

3) D ie Perspktive als sym bolische Form , 그의 책 Aufsätze zu Grundfragen der Kunstwissenschft, 99쪽부터.

(3)

그림들을 보면 공간과 등장인물의 배치가 퍽 자연스럽다 그러나 정확히 자를 대고 살펴. 보면 이가 제대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제법 눈에 띈다 수학과 기하학 대신에 눈어림의. 작업관례에 의존했기 때문이다.4)

브루넬레스키는 달랐다 그의. 과학적 원근법은 이전의 어떤 화가에 의해 실행된 그림 보다도 재현대상과 정확하게 일치했다.5) 실물과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 불가사의한 정확 성에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가 어떻게 그. 런 그림을 완성했는지 손수 기록을 남겨두었더라면 원근법의 역사가 다시 씌어졌을지도 모른다.6)

사람의 눈은 중앙투시적이다 안구의 구조를 살펴보면 수정체를 통과한 빛다발이 안구. 내부의 한 지점에서 하나의 점으로 모인 다음에 다시 퍼져서 망막 위에 투사된다 이 과. 정을 바깥으로 펼치면 곧 중앙투시적인 그림이 된다 화가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 림으로 옮긴다고 가정할 때 화가의 작업과정을 기계적으로 옮긴다면 눈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광학적인 과정을 꼭 닮았다 이것은 물론 한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경우에 해당. 한다 사진기의 렌즈를 투과한 빛다발이 망막에 해당하는 필름 위에 뿌려지는 과정도 이. 와 마찬가지다.

눈이 중앙투시적이라면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도 중앙투시적이다 세상의 이미지. 는 눈에 비침으로써 우리에게 인지되기 때문이다 또 세상을 이루는 크고 작은 풍경과. , 사물들도 모두 중앙투시적이다 그러나 중앙투시적 자연에서 선형 원근법을 읽어내기는. 간단하지 않다 자연에서 평행으로 달리는 직선들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형 원. . 근법은 이른바 소실선이라고 불리는 종선이 공간의 전후를 일관되게 규정하는 원근법을 가리킨다 오늘날 대도시에 밀집한 건축물들에서 얻을 수 있는 기하학적 체험이나 홍수처. 럼 범람하는 중앙투시적 사진 도판들에 익숙한 현대인의 시습관이 과거 중세 시대나 초

4) 눈어림에 의존한 어설픈 원근법적 실행의 관례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알베르티가 그의 회화론 제 쪽에서 자세히 언급한다 소실점과 시선거리를 먼저 정해두고 횡선의 간격을 산출하는

1 42-43 .

수학적 원급법과 달리 눈어림 원근법에서는 횡선긋기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첫째 횡선의. 위치를 그저 눈대중으로만 어림하기 때문에 시각 피라미드의 정점에 대응하는 소실점의 위치와 시선거리가 완성된 그림에서 화가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거나 모호해진다는 단점이 생긴다.

5) 바사리는 그의 르네상스 예술가 전기에서 수많은 시간을 원근법과 씨름한 끝에 브루넬레스키는 혼자 힘으로 정확하고 완전한 원근법을 실행하는 방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고 단정한다 . 6) 그렇다면 브루넬레스키는 소실점을 갖는 이른바 선형 원근법의 원리를 어디에서 깨우쳤을까 피렌?

체에서 건축과 조각의 수련과정을 거쳤고 금은세공 수학 측량기하학의 숙련을 쌓은 그는 고대, , , 건축에 관심을 두고 로마를 여러 차례 답사했다고 한다 사다리와 자를 들고 폐허의 돌무더기를. 누비면서 자신의 관찰을 하나도 빼지 않고 꼼꼼히 기록에 담았다 고대 유적의 실측과 소묘 부단. , 한 학습과 연구의 열정이 훗날 르네상스의 예술을 과연 예술답게 만들었던 원근법의 발명에 준비 단계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사리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전 제 권. 1 325쪽부터.

(4)

기 근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물을 관찰하고 인식하던 방법과 같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 다 재현주제나 재현형식 그리고 시각론의 입장과 세계관이 모두 달랐을 것이다 만약에. . 브루넬레스키가 활동했던 르네상스 시대에 수학적으로 완전한 소실점7)을 갖는 바깥풍경 이 존재했더라면 수학적 원근법의 발명이 생각보다 더 수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껏해. 야 길게 패인 밭고랑이나 가로수가 길 양켠으로 열립한 가로수 길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도로에 면한 건축군들이 르네상스 시대에는 서로 종축과 횡축의 각도가 잘 들어 맞지 않고 도로들이 겨냥하는 소실점도 어긋나기 일쑤였다 단일 건축물에서도 외벽면의, . 모서리가 정확히 직각으로 교차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예컨대 브루넬레스키의 두 번째. 시연 그림의 주제였던 시뇨리아 궁도 건축물의 북쪽과 서쪽 벽면이 직각보다 경미하게 더 벌어져 있다.8)

브루넬레스키가 원근법적으로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는 두 점의 그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안토니오 마네티가 브루넬레스키의 전기를 쓰면서 그가 시연했던 원근법. 적 그림에 대해 70줄 가량 기록한 것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로 남아 있다 마네티는 브루넬레스키의 역사적인 시연 그림을 수 차례 직접 보고 만지기도. 했던 동시대 인물로 그의 기록은 과학적 원근법의 첫 출발점에 관한 신뢰할 만한 증언, 으로 꼽힌다.9)

마네티에 따르면 브루넬레스키의 첫 시연 그림은 가로 세로가 똑같은 정방형 규격이었 다고 한다.10) 그림의 한 변이 반 브라치아 곧, 29.5cm의 작은 크기였다 브루넬레스키는.

7) 르네상스 원근법 이론에서 소실점의 개념은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알베르티는 무한이라는 의미의. 의 개념을 사용한다 소실점보다는 무한원점이라는 번역이 타당할 것으로 보 infinitum /infinito . ‘

인다.

8) 건축물 외벽면들 사이의 모서리각이 틀어질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길까? 제일 먼저 시선거리의 계 산이 불가능하다 시선거리를 알 수 없으면 화가는 회화적 실행에서 작업시점을 확보하지 못한다. . 작업시점이 확보되지 않은 작업이란 규칙이 없는 혼돈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그림을 그리는 자체 가 대단히 어려울 뿐더러 긴 시간을 두고 여러 차례 작업에 착수해야 하는 작가 스스로 일관된, 시점을 견지하기 어렵다 이렇게 완성된 그림은 관찰자가 어느 방향 어느 높이 어느 거리에서 관. , , 찰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화가는 건축가의 실수와 건축재료 건축환경의 결함을 보정하고. , 개선하면서 그림을 진행해야 했다 브루넬레스키가 첫 번째 시연 그림의 주제로 수학적으로 정확. 하게 건축된 성 요한 세례당을 골랐던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9) 마네티는 브루넬레스키를 원근법의 발명자라고 단정한다 크라우타이머는 기베르티의 성 요한 세례. 당 두 번째 청동문 제작 시점보다 브루넬레스키의 시연이10-15년 가량 앞서 실행된 것으로 추정 한다 그렇다면 기베르티가 천국문 제작에 착수한 시점이. 1425년 월1 12일이므로 브루넬레스키 의 시연은1410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K rautheim er, Brnelleschi and linear Perspective, in Lorenzo Ghiberti, 1956 , 129 쪽부터.

10) 크라우타이머는1956년 그의 저작에서 브루넬레스키의1, 2차 시연의 순서를 바꾸어 설명하고 있

(5)

그림 복판에다 구멍을 뚫어 두었다 그림 앞쪽에 난 구멍은 콩알 정도의 크기였고 뒤쪽. , 은 두카토 주화만큼 커서 그림의 단면을 잘라보면 구멍의 형태가 원뿔모양이 되도록 했 다.

그림 앞 정면에는 그림을 마주 비출 수 있도록 그림과 평행으로 거울을 받쳐두었다.

거울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이 그림 복판에 난 구멍에. 눈을 바짝 붙이고 들여다보면 그림을 마주보는 거울을 볼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울에 비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브루넬레스키가 자신이 발명한 원근법의 기적을 입증. 하기 위해서 작은 패널에 정교하게 재현해둔 성 요한 세례당이 거울의 표면 위에 떠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사람들에게 거울에 비친 세례당 그림과 실물 세례당을 비교하도록 했 다 그림 복판에 뚫린 구멍에서 눈을 떼고 눈앞의 실물 세례당을 실물로 바라본 사람들. 은 그림 속의 완벽한 원근법적 재현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 그만 찬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림과 실물의 두 세례당이 윤곽선 형태 실물감 비례관계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 , , 일치했던 것이다 심지어 크기까지 같아 보였다. .

브루넬레스키는 시각적 환영의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그림의 윗부분을 비워두었다 세. 례당을 감싸 누르는 하늘의 밝은 빛을 파란 물감으로 바르지 않고 매끄럽게 표면을 처리 한 은박을 입혔다 은박. 11)은 거울처럼 투명해서 대기와 하늘과 구름이 실제로 비쳐 났 고”12), 빛나는 하늘을 이고 있는 그림 속의 세례당은 실물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였 다.13)

브루넬레스키는 그림의 위치를 미리 정해두어서 그림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항상 고 정된 시점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시점은 피렌체 대성당의 중앙 주정문의 문설주를. 동축으로 삼고 성당 내부로 대략 세 브라치아 곧 , 1.75m 가량 들어간 지점이었다 성. 요한 세례당은 대성당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어서 성당 내부의 정해둔 시점에서 보 아도 건축물의 전경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그 뿐 아니라 세례당 광장을 에워싼 배경 건.

다 그러나 성 요한 세례당을 그린 그림이 첫 번째 시연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 다.

11) ariente brunito

12) accio che l'aria e cielj naturalj ui si specchiassono drento e cosi e nuvoli

13)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직접 관찰하는 대신 거울을 통해서 그림을 보게 했던 브루넬레스키의 의, 도는 무엇이었을까 대개 회화를 자연을 비추는 거울에 비유하고 자연을 비춘 거울과 그림을 나? , 란히 놓고 그림의 완전성을 검증하던 관례와는 달리 브루넬레스키는 거울에 비친 그림과 자연, 이 경우는 실물 세례당을 비교하게 하였다 빛의 반사율이 낮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울에 비추. 었을 때 거울에 비친 대상의 명도가 감소하는 점을 노렸을 가능성도 있다 특이한 것은 첫째 시, . 연에서와는 달리 둘째 시연에서는 거울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6)

축군들의 실루엣이 함께 잡혔다 브루넬레스키가 정한 시점에서 성 요한 세례당 바깥 주. 벽까지 최단거리는 정확히 예순 브라치아 곧, 35m에 달했다 대성당 주정문의 바깥 문설. 주가 벌어진 너비는 6.5 브라치아 곧, 3.79m이므로 정해둔 시점에 위치한 그림 구멍에 눈을 들이대고 본다면 시계는94.6도 만큼 벌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마네티가 성당 내부. 로 대략 세 브라치아 들어선 지점이라고 14) 눈어림한 것이 실제 척도보다 길거나 짧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계는. 90°보다 넓고100°보다 좁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브루넬레스키가 정해둔 시점은 그의 원근법적 회화의 작업시점인 동시에 관찰자들의 관찰시점이다 그리고 원근법적 시연에서는 시각 피라미드의 정점이기도 하다 이 때 구. . 멍이 난 그림은 대성당 바깥을 향해서 돌려져 있고 맞은 편에 거울이 위치한다 브루넬, . 레스키는 사람들에게 한 손으로는 한쪽 눈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거울을 잡아서 그림과, 나란히 위치하도록 했다.15) 원근법 시연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그림 구멍을 통해서 거울 에 비친 세례당 그림을 본 다음에 한 손에 든 거울을 잠시 옆으로 젖히고 실물 세례당을 보았을 것이다 이때 관찰자는 눈을 그림 구멍에서 뗄 필요가 없이 손으로 거울을 대고. 젖히면서 그림과 실물을 번갈아 비교할 수 있다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거울의 위치를. 고정시켰을 경우이다 거울을 움직였다가 다시 제자리에 세우는 일이 번거로울 수 있고. , 더욱이 거울의 위치나 각도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경우에는 완전한 원근법적 시연이 근 본적으로 망쳐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에는 관찰자가 그림 구멍에 눈을. 고정시키고 그림과 실물을 비교했던 첫째 경우와는 달리 잠시 눈을 그림에서 떼고 머리, 를 젖혀서 실물 세례당을 바라보면 된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 모두 시각 피라미드의 정. 점에 해당하는 그림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림 복판에 뚫어둔 눈구멍에 의해. 서 시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16)

첫번째 원근법 시연 그림에서 그림 복판에 뚫은 구멍은 들고 나는 쪽의 크기가 달랐다 고 한다 그림이 그려진 쪽의 구멍이 콩알만큼 작고 뒷편의 구멍은 두카토 주화만큼 컸. , 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림 뒤쪽에서 구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이. . 마와 눈썹뼈가 돌출하고 콧대가 높은 토스카나 사람들이 패널구멍을 통해서 그림 앞의

14) dentro alla porta del m ezzo di Santa M arie del Fiore ‘qualche’ braccia tre

15) e con una m ano s'accostassi allo occhio et nell'altra tenessi uno specchio piano al dirinpetto

16) 그림 복판에 구멍을 뚫은 것은 브루넬레스키의 기발한 착상이다 물론 구멍을 뚫지 않고도 완전한. 시연은 수행할 수 있었다 예컨대 훗날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런 것처럼 그. 림 바깥에 또 하나의 시점을 분리시키는 방법이 가장 간단했다 시점을 고정한 다음에 그림과 실. 물 세례당을 동일한 축 위에 위치시키고 그림의 위치를 바꾸어가면서 둘을 비교한다면 구멍을 뚫 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마네티의 기록에 따르면 브루넬레스키의 두 번째. 시연에서는 이 방법이 사용되었다.

(7)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구멍은 패널의 두께에 비. 례해서 점차 감소하므로 시계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그림과 거울 사이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떼어놓았을까 또 사람들은? , 어느 정도의 간격에서 그림을 정확히 관찰할 수 있었을까 마네티의 증언에 따르면 사람? 들이 그림과 마주보도록 들었던 거울은 마주 보는 그림으로부터 대략 작은 브라치아 ( ) 17) 정도의 거리에 위치 했고 , ― 구멍에 눈을 대었을 때 거울 속에 비쳐보이는 그림과 눈 사이의 거리는 눈과 거울 사이의 거리의 두 곱에 해당하므로 실제로는 브루넬레스키 가 성 요한 세례당을 그리기 위해서 잡았던 지점으로부터 온전한 브라치아18)만큼 거리가 떨어져 보였다 고 한다 여기서 눈과 거울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기 위해서 편의상 시각 . 피라미드를 시각삼각형으로 바꾸어 도해하면 간단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삼각형의 정점을 이루는 고정 시점을A, 거울의 중심을 B, 거울 속에 비치는 그림의 중심을 C, 시각 삼각형의 밑변 중심을D로 잡았을 때 거울을 중심으로 거울 밖과 거울, 안의 그림은 등거리에 놓이므로ABBC의 거리는 같다 나아가서. ACAD의 거리는 그림의 가로 길이와 시각 삼각형의 밑변 길이에 대해서 제각기 비례관계에 놓이므로 간 단히 값을 낼 수 있다. AD의 길이는 브루넬레스키가 정해둔 성당 내부의 고정시점에서 성 요한 세례당까지의 거리이므로 마네티가 기록한대로 정확히 예순 브라치아 곧, 35m

17) circha di braccia piccholine 18) braccia uere

(8)

다 삼각형의 꼭지각은 눈어림치로. 94.6도였으나 오차를 감안하여 90도라고 가정한다면, 이등변 삼각형의 밑변 길이를 그림의 가로 길이로 나눈 값이ADAC로 나눈 값과 같 으므로 AC 1/4브라치아가 나온다 그렇다면 그림과 거울 사이의 거리. AB AC 다시 반으로 나눈 값 곧, 1/8브라치아가 된다.

상황을 수치로 재현하면 이렇다 브루넬레스키의 손에 이끌려서 그림 구멍을 들여다보. 았던 사람들은 한 손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가리고 다른 눈으로 1.5 2.5cm 직경의 두 카토 주화 크기 만한 그림 뒤편의 구멍에 눈을 바짝 붙이고 대략1 2cm 두께의 패널을 지나서 그림 반대면에 뚫린 대략 0.5 0.7cm 직경의 콩알 만한 구멍을 통해서 바깥을 내다본다 남은 한 손으로는 콩알 구멍 바깥. 1/8브라치아 곧, 7cm 남짓한 거리를 두고 그림과 평행을 이루도록 거울을 세워들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거울과 그림의 간격이 대략 작은 브라치아 , 그리고 눈과 그림의 간 격이 온전한 브라치아 라고 기록한 마네티의 증언은 우리의 계산과 전혀 맞지 않는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의 고심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그림과 거울의 거리가. 1/2 라치아를 유지하려면 정방형 그림의 크기가 마네티의 기록처럼 반 브라치아가 아니라 2 브라치아 만큼 커져야 옳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그렇게 큰 패널 그림을 한 손에 들. 수 있을까 패널뿐 아니라 패널을 비추는 거울도 덩달아 커져야 하는 것도 문제다 설령? . 양팔의 길이와 근력이 남달라서 크기 2×2브라치아의 패널 그림과 1×1브라치아의 거울 을 양손에 제각기 들고 보는 장사가 있다고 쳐도 마네티의 기록은 또 다른 모순을 야기 한다 패널의 크기는 접어두고 수평시계의 계산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림 크기. . 는 그대로 살려두고 마네티가 언급하는 대성당 문설주 안쪽의 시점위치를 브라치아보다3 더 깊이 들어가는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수평시계가 조금 전에 계. 산했던 90°보다 좁아지고 어느 지점에서 시각 피라미드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횡단면이, 마네티의 기록대로 1/2×1/2브라치아에 맞아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다 이. . 경우 마네티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배경 건축군이 보이지 않게 된다 미제리코르디아. 를 위시해서 양모시장과 밀짚시장이 송두리째 시야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네티는 패널과 거울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면서 손바닥의 짧은 길이를 뜻하 는 팔모 피콜로(palmo piccolo)라고 써야 할 것을 작은 브라치아라고 오기한 것은 아닐 까 팔모 피콜로는 대략? 7.39cm. 앞에서 계산했던 1/8브라치아 곧, 7.295cm와 거의 일 치하므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한편 거울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1/2브라치아인 정방형의 그림을 비추기에 충분 히 커야 한다 그러나 그림보다 거울이 더 커져서는 곤란하다 그림의 윗부분에 씌워둔. . 은박에 하늘과 구름이 비치는 것을 거울이 가로막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거울이 사물의.

(9)

크기를 언제나 반으로 줄여서 투영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거울의 이상적인 크기는 대 략 가로 세로 15 16cm 정도가 무난하다 하늘을 비출 요량으로 거울의 세로 길이가.

가량 짧아져도 상관없을 것으로 보인다

2 3cm .19)

마네티는 브루넬레스키가 첫번째 시연그림에서 성 요한 세례당 외벽의 흰색과 검은 색의 대리석들이 얼마나 꼼꼼하고 정성스럽고 정확하게 그렸던지 어떤 세밀화가의 솜씨 라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고 전한다 .20) 지금까지 마네티의 기록에 따라 재구성한 시연 상황에 미루어 볼 때 브루넬레스키의 첫번째 그림은 좌우가 도치된 구성으로 그려졌다고 보아야 한다 거울에 그림을 비추면 그림의 좌우방향이 바뀌기 때문이다 좌우 동형의 팔. . 각형 구조로 지어진 성 요한 세례당 하나만 따로 떼어서 바라본다면 굳이 시연 그림의 좌우를 바꾸어 그릴 필요가 없었겠지만 문제는 배경의 건축군들이다 그림 구멍을 통해, . 서 들여다본 거울 그림과 실제 풍경이 같은 형태와 방향을 취하려면 그림의 좌우를 뒤집 어서 그리는 것 이외에 다른 해결은 없다 그렇다면 그림 윗부분의 은박에 비친 하늘과. 구름의 방향까지 실제 풍경과 일치할 수 있을까 구름과 하늘은 은박에 한 차례 투영된? 다음 다시 거울에 재투영되어 관찰자의 눈에 비친다 이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시연 그림, . 은 좌우를 바꾸어 그려야 옳다.

브루넬레스키가 어떤 방법으로 그의 완전한 원근법적 그림을 좌우를 뒤집어서 성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당시에 조형예술가들의 아틀리에에서 어떤 회화적 원근. 법의 실행방법이 전해지고 있었는지도 알아낼 도리가 없다 그래서 브루넬레스키의 작업. 방식을 추론하려면 역설적이지만 후대에 실행되었던 몇 가지 원근법 실행방법을 거꾸로 소급해서 검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

첫째 자로 친 듯이 정확한 재현, .

둘째 좌우를 용이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 .

첫째 알베르티가 제안했던 그물망사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물망사의, . 모눈과 동수의 모눈을 새긴 종이나 패널을 펴두고 동일시점에서 측정한 수치를 옮기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그림의 좌우를 바꾸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리 용이하지 않다는.

19)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제기된다 패널의 두께를 가로지르는 작은 깔때기 구멍을 통해서 반 뼘. 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의 거울면을 관찰하는 일이 과연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건강한 사람에게 가능할까 차라리 깔때기 구멍이 반대로 돌려져 있었더라면 다시 말해 그림 뒷판의 구멍이 작고? , , 앞면을 향해서 벌어져 있었더라면 관찰자들이 한결 넓은 시계를 확보하기에 용이했을 것이다 그. 러나 마네티가 자신의 손으로 그림을 만져보기도 하고 직접 거울을 들고 여러 차례 시연에 참가했 다고 증언하고 있어서 이 부분의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 fatto con tanta diligenza e gentilezza e tanto apunto co colorj de m arm j bianchj et neri, que non e m iniatore che l'auessi fatto m eglio.

(10)

단점이 있다 그리고 모눈에 걸친 대상의 위치와 거리를 육안으로 읽은 다음에 그림으로. 옮기는 이중적 작업과정으로 인해서 정확성을 기하기는 어렵다 브루넬레스키가 가로 세. 로 반 브라치아의 작은 패널에 세밀화가의 솜씨를 능가할 정도로 정교한 그림을 완성하 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알베르티는 그물망사를 화가들이 보조도. 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

둘째 뒤러가 초상화 작업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제작했던 모눈유리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알베르티의 그물망사와 원리는 같지만 유리판 위에 모눈을 새. 겼다는 점이 다르다 그물망사는 과학적 관찰도구에 불과하지만 모눈유리는 여기에다 물. 질적인 평면의 속성을 더했기 때문에 유리판 위에 직접 작업이 실행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물망사를 사용할 경우 사람의 감각과 기억을 매개로 삼고 일단 눈으로 관찰한 것을 종 이나 그림 위에 옮기는 이중적이 작업이 요구되지만 모눈유리의 경우 시각 피라미드의, 횡단면이 곧 화면과 일치하므로 작업과정이 단순하고 그만큼 오류가 개입할 여지가 줄어 든다 또 유리판을 뒤집으면 쉽게 좌우를 바꿀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장점으로. , 꼽힌다.

셋째 이른바 코스트루치오네 레지티마, 21)라고 불리는 건축적 조감법을 사용했을 가능 성을 생각할 수 있다 건축의 입면도와 평면도를 결합하여 입체적인 조감도를 그려내는. 건축적 실행방식이므로 설계실무에 익숙했을 브루넬레스키에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두. 개의 투영평면을 결합하는 방식이라는 뜻에서 결합 투영법 혹은 건축적 투영법이라고 ’, 옮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건축적 투영법을 사용해서 원근법적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앞의 두 방식과 달리 입체적인 사고를 전제한다 또 건축물의 전체와 부분의 길이 폭. , , 높이 등을 일일이 측정하고 다시 그림의 규격에 맞추어 비례를 계산해서 재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러나 그림의 좌우를 바꾸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뿐더러 완성된 그. , 림은 어떤 원근법적 실행보다 정교함에서 뛰어나다.

브루넬레스키가 첫째 시연에서 선보인 그림이 알베르티의 그물망사나 뒤러의 모눈유리 를 사용했다면 그는 명실공히 르네상스 원근법의 발명자이자 회화적 원근법의 창시자라 고 불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세 번째 건축적 투영법으로 성 요한 세례당을 그렸다면 그. 는 회화적 원근법의 발명을 알베르티의 몫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두 가지. 방법을 병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세례당은 일일이 자를 대고 측정해서 수. 학적 비례를 계산해야 하는 건축적 투영법으로 그리고 배경의 건축군들은 작업량을 줄이, 기 위해서 그러나 좌우방향을 용이하게 바꿀 수 있는 모눈유리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 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모눈유리 투영법의 발명이 백년 이상 앞. .

21) costruzione legittim a

(11)

으로 당겨져야 한다는 것.

바사리는 그의 전기에서 브루넬레스키의 작업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평면도와 측면도 그리고 시각 피라미드의 횡단면을 사용해서 원근법적 재현을 건

져 올리는 방법이었다.”

perspettiva che fu il levarla con la pianta e proffilo e per via della intersegazione…

아래는 마네티가 쓴 브루넬레스키 전기 가운데 원근법 시연에 관한 대목을 옮긴 것이 (

다 원문은. G.J. Janowitz의 논문 Leonardo da Vinci, Brunelleschi, Dürer, ihre Auseinandersetzung mit der Problematik der Zentralperspektive 92-94 )

이 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오늘날 원근법(prospettiva)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처럼 진전시 키고 탄생시킨 것은 바로 그 브루넬레스키 에 의해서였다 원근법이란 눈과 관련된 과학이고( ) . , 멀고 가까운 모든 사물들의 축소와 확대(diminuizionj e accrescimenti)를 적합하고 올바르게 실행하는 과학(scienza)이기 때문이다 원근법에서는 여하한 종류의 건축물 어떤 위치에 자. ( ) , 리잡은 산과 들 그리고 등장인물과 온갖 사물들을 막론하고 모두 보는 이의 시점으로부터( ) 제각기 놓인 자리까지의 거리에 맞는 척도(misura)에 따라서 재현된다 이처럼 브루넬레스키. 로부터 원근법 의 규칙( ) (misura)이 나왔으니 그의 업적은 그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 ) 원근법 연구의 기초를 이루었다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위대한 거장들이 활동했던 시대. , 또 뛰어난 조각가들의 시대였던 고대 의 예술적 상황 를 둘러보아도 고대의 화가들이 과연( ) , 원근법이라고 불릴 만한 것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 그런 것을 올바르게 실행하였는지, 에 대해서 현재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나는 원근법을 일컬어 앞에서 과학이라고 불렀다 고대의 화가들이 훗날 브루넬레스키. 가 행했던 대로 꼭같은 원근법의 규칙을 그 시대에 이미 실행했다손 치더라도 그에게( ) , 원근법의 규칙을 가르쳐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만한 고대의 인물은 이미 수백 년( ) 전에 유명을 달리하였고 원근법에 관한 규칙을 적은 글귀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뿐, ( ) 더러 설령 그런 것이 남아서 전한다 할지라도 그 뜻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

브루넬레스키는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과 섬세한 열정으로 원근법을 재발견하였으니, 이로써 원근법의 발명자(inuentricie)가 되었다 그는 여러 분야에서 다른 많은 이들을 뛰. 어넘는 재능을 소유하였고 자신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살았던 세기와 이후의 세기, 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저를 앞에 내세우거나 자랑을 늘어놓거나 무슨 일 을 두고 허풍을 떨거나 그 일을 가지고 스스로 자찬하는 말은 단 한 마디라도 입에 담는 법이 없었다 다만 기회가 어찌 닿을 때면 행동으로 묵묵히 보여줄 따름이었다 브루넬레. . 스키는 다른 사람이 조롱하거나 멸시하는 행동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한 노여움

(12)

을 좀체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고 친구들과 늘 우애롭게 지냈다 또 그는 원근법이 필, . 요한 사람에게 원근법의 규칙을 권하는 일로 자신의 기쁨을 삼았으며 원근법에 대해서, 배우려는 열망과 능력을 지녔다 싶은 이에게는 대가 없이 가르쳐주었다 다른 일에서도. 늘 그랬지만 가르치는 일에서도 그는 사려 깊고 현명하게 처신했다.

그가 처음으로 원근법에 관하여 보여주었던 것은 크기가 반 브라치아 가량 되는 작은 사각형 패널 그림으로 거기에다 피렌체의 성 요한 세례당 (circha mezzo bracchio)

건물의 외관을 그려두었다 세례당은 바깥에서 건물 전체를 한 눈에 다 볼 수 있는 모습. 으로 재현되었다 그것은 마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중앙정문 안쪽으로 대략. 세 브라치아(qualche bracchia tre) 들어간 곳으로부터 정면에 위치한 세례당을 내다보( ) 면서 그림으로 옮긴 것 같았고 세례당 외벽 의 흰색과 검정색 대리석 색깔에 이르기까( ) , ( ) 지 어찌나 꼼꼼하고 정성스럽고 정교하게 그렸던지 어떤 세밀화가의 솜씨로도 이보다 더 낫게 그릴 수 없었다.

성 요한 세례당 뒷편 광장의 전면부를 눈에 보이는 대로 미제리코르디아 건너편에서

( )

시작해서 양모 시장 상부 박공과 모퉁이까지 그리고 성 제노비오의 기적을 기리는 기념, 원주에서 밀짚 시장까지 그림에 그려넣었다 광장 을 에워싼 건축군들 이 멀리 떨어져( ) . ( ) 보였고 그림에 하늘을 나타내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림 속에 담벽 처럼 늘어선 건축, ( ) , ( 군들 을 대기에 노출시키기 위해서 브루넬레스키는 패널 그림의 상부 곧 하늘이 들어갈) , ( , 자리에다 은박) (ariente brunito)을 입히는 방법을 썼다 은박은 거울처럼 투명해서 대기. 와 하늘이 그대로 비쳐 났고 바람이 이끄는 대로 구름들이 은박 위를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림을 관찰할 고정된 단일시점을 확보하는 일이 문제였다 브루넬( ) . 레스키는 사람들이 그림을 잘못된 시점에서 보는 일이 없도록 높낮이는 물론 방향과 거 리를 정해두고 그림에다 작은 구멍을 뚫었다 이 시점 이외의 다른 장소에서 바라보면. 눈에 비치는 세례당과 배경건축군의 광경들( ) (apparizionj)이 변하기 때문이었다 그림에서. 구멍의 위치는 성 요한 세례당 부분에 놓였고 구멍에 눈을 대면 브루넬레스키가 앞서, ( ) 세례당을 그리기 위해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안쪽에 자리를 잡았을 때의 시점과 일치했다 구멍은 나무패널에서 그림이 그려진 쪽이 완두콩 의 직경 만큼 작았고 뒤쪽. ( ) ( ) , 을 향해서 여자들이 쓰고 다니는 밀짚모자처럼 생긴 피라미드 꼴을 이루며 점차 벌어져 서 패널그림의 반대편에 이르면 두카토 주화의 크기 정도 아니면 그보다 약간 더 큰( ) , 구멍이 뚫렸다 브루넬레스키는 그림의 앞뒤를 뒤집어서 구멍이 크게 난 쪽 의 면 에 눈. ( ) 을 갖다대고 보도록 했는데 사람들은 한 손으로 자신의 한 쪽 눈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평면거울(specchio piano)을 그림과 마주보게 세워든 채로 거울 속에 비쳐나는 그림을

(13)

관찰하였다 눈을 가린 손 말고 다른 손에 든 거울은 마주 보는 그림으로부터 대략 작. ( ) ( ) 은 브라치아(circha di braccia piccholine)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지만 구멍에 눈을 대었, ( 을 때 거울 속에 비쳐 보이는 그림과 눈 사이의 거리는 눈과 거울 사이의 거리의 두 곱 에 해당하므로 실제 브루넬레스키가 성 요한 세례당을 그리기 위해서 잡았던 지점으로부) 터 온전한 브라치아(braccia uere)만큼 거리가 떨어져 보였다 그래서 구멍을 통해서 거. ( 울 속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은박이나 광장 에 늘어선 건축군의 모티프 그리고) , ( ) 시점 등 앞서 말한 여러 다른 장치들(circustanze)의 덕택으로 마치 실제 광경이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내 손에 거울을 직접 들고 여러 차례 들여다 보았. ( ) 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나의 증언은 틀림이 없다.

브루넬레스키는 또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을 원근법적으로 재현했다. 시뇨리아 궁을 위시해서 그 위쪽과 주변 광경들을 광장에 나서서 보았을 때 시야가 허락하는 만큼 포함 시켰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산토 로몰로 교회의 정면에서 얼마간 나와서 오르토 산. 미켈레를 향해 몇 피트 가량 광장 쪽으로 열려 있는 칸토 디 칼리말라 프란체스카까지였 다 이 지점에 서면 시뇨리아 궁의 두 주벽면 곧 북쪽과 서쪽으로 면한 벽이 온전하게. , 다 보였다 이 지점이 제공하는 시야를 택했을 때 시뇨리아 궁을 위시해서 광장에 둘러. ( 선 건축물들의 모든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노라면 감탄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러자 파) . 올로 우첼로와 다른 화가들이 몰려와서 브루넬레스키가 제 차 시연을 위해서 완성한 그( 2 림을 모방하고 겨루려 했다 내가 보는 동안에도 여럿이 달려들었으나 어떤 이도 브루) . ( 넬레스키가 그린 그림보다 더 잘 그리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 혹시 이런 질문이나올지) . 모른다 왜 똑같이 원근법적으로 그렸으면서 왜 이번에는 앞서 성 요한 세례당에서 그. ( ) 랬던 것처럼 패널에다 눈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시뇨리아 광장이 워낙 넓기도 하지만 멀리 떨어진 곳에 놓인 여러 건축물 따위의 모티( ) 프들을 다 포함시킬 만큼 그림 의 규격 을 크게 한다면 앞서 성 요한 세례당을 그린 그( ) ( ) 림에서처럼 한 손에 그림을 들고 거기에다 눈을 붙이고 들여다보면서 다른 손에 거울을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팔을 가지고는 한 손에 거울을 든 상태에서 맞. 은 편으로 정확한 거리에다 그림을 세워들기에 힘이 부족할 뿐더러 그림과 거울 사이의( ) 거리도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다른 화가들이 그들이 그린 그림을 보일 때와 마찬가지로 브루넬레스키는 그림을 보는 사람이 스스로의 분별력을 가지고 판단하도록 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분별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개의치. 않았다 성 요한 세례당 그림에서 은박을 입혔던 하늘 부분 곧 건축물이 재현된 윗부분. ( ) , 을 이번에는 톱으로 썰어내었다 그리고 그림에 그려진 건축물 위쪽으로 자연스러운 하. ( ) 늘이 건축물의 실루엣과 정확히 일치해서 내다보이는 지점에다 그림을 세워두었다( ) .

참조

관련 문서

 거리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 환영은 시각 각도에 의해 결정 된다는 그의 규칙 역시 후대의 르네상스인들처럼 평행선이 수 렴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때에 첫째 어머니는 겁이 나서 바싹 다가앉아서 그의 머리를 짚어 볼 때 방 안이 캄캄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서방은

그리고 인지 손상이 있는 환자의 기능적 수행을 강화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Toglia의 역동적 상호작용 인지재활을 적용하여 인지 영역 중 기억력을 높이고 선행연구

연구자의 작업방식을 분석해 보면 미술계의 전환과 혼돈의시기를 살아가며 겪는 상 징적 , 기호적 , 비정형성과 같은 표현주의적 이미지 속에 1960 년대부터

23) 과 16S rRNA 유전자를 바탕으로 설계된 프라이머 1) 이 있음에도 이들 2가지 프라이 머들보다 민감도가 높은 프라이머를 개발하였다.즉,민감도가 뛰어난 프라이머를 이

z 내용 : 고유값 문제, 여러 가지 행렬, 대각화를 통한 문제 해결법.. Transformation to Principal Axes (주축으로의 변환) Quadratic

프로그램을 마치고 난 후 학생들이 이야기하였던 문제점들을 모아 다음 프로그램의 적용 전에 반영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보고서 내용을 대외적으로

USB 연결 케이블을 이용하여 라즈베리 파이와 센서보드 연결 라즈베리 파이의 USB 포트와 WeDo 의 컴퓨터 연결 허브를 연결하 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