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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의 생사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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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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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혁명 이후, 소련 공산당정권이 출범하였고, 이어서 동유럽과 중국 등에도 공산당정권이 들어섰다. 이들 국가들은“이론으로만 존 재하던 마르크스주의를 실현하였고, 사회주의 이상을 현실 제도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순조롭지 않았 다. 관건문제는 전체주의적인 통치기제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생산 동기를 억압한 결과, 발생한 극심한 경제침체였다. 그리고, 지난 세기의 후 반 4반세기 기간 중 두 개의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나는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선언이고, 또 하나는 그로부터 11년 후인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산당정권이 몰락한 것이었다.

본 연재 글에서는 중국 개혁개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개혁 전야의 중국의 시대적 상황과 맥락, 농촌과 도시 기층에서 형성되어 상향 식으로 작용한 개혁의 동력과 이에 부응한 중국공산당의 정책결정과 정부 주도의 하향식 개혁개방 전개과정을 주요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고 찰하고자 한다. 이 같은 고찰의 목적과 주요 관심은 북한 정권의 실체와 맥락을 파악하고 향후 변화 방향을 전망하기 위한 틀과 시사점을 구 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이해

샤오강생산대

농민들의 생사협약

박인성|저장대학교 토지관리학과 교수

개혁개방 이전 중국 농촌의 실상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이 일제와 국민당과의 전쟁 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동력은 당시 인구의 절대 다 수를 차지한 중농 이하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였 고, 이 지지의 기반은‘무상몰수 무상분배’토지정 책이었다. 혁명 전쟁 기간 중에는 중공 세력하에 있 었던 해방구(解放區)에서, 그리고 건국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토지개혁을 진행하여 빈농과 소농 우 선으로 농지를 분배해 주었다. 대대손손 농노와 다 름없는 굴레 속에서 살아온 대다수 농민들이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갖게 되었을 때의 감격과 그를 바탕 으로한 중공에 대한 열렬한 지지에 대해서는 재론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1957년부터 진행된 사회주의 개조와 집 체화 과정에서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도구들이

‘생산합작사’와‘인민공사’등의 집체 공동 소유로 되고, 촌민은 인민공사의 사원이 되어‘공동노동 공동분배’라는 생산방식을 강제 당하게 되면서, 대 다수 농민들의 감격과 기쁨은 사라졌고, 생산 의욕 과 적극성이 갈수록 저하되었다. 심지어 집체화에 대한 불만을 태업으로 표출하는 일이 보편화되면 서 생산량이 극심하게 줄었고, 여기에 자연재해까 지 겹치면서 기근이 발생・확산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58~1962년 기간 중에‘대 약진’운동을 전개하면서, 생산목표를 과다하게 책 정하여, 책정된 양의 식량을 납부하지 않는 농민들 을, “(생산량을) 속이거나, (식량을) 숨겼다”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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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으로 몰고, 탄압하였다. 전형적인 사례가 허난 성(河南省) 신양( )지구에서 발생한 참상이다.

■허난성 신양지구에서 일어난 일

1958년“영국을 추월하고 미국을 따라잡자”는 구 호를 내세운‘대약진운동’이 시작되자, 허풍과장 보고, 과다 생산 목표 설정, 극좌 구호, 강압적 명 령 등의 바람이 중국 전국의 농촌을 휩쓸었다.

1958년 허난성 전체의 식량 생산량은 실제로는 281억 근이었으나, 우즈푸( )가 서기 겸 성 장을 맡고 있던 허난성위원회는 702억 근이라고 부풀리고 이를 근거로 식량 징수 목표 지표를 정하 고 시행하면서, 반만산( ) 운동, 즉 생산량 을 속이지 말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말이 좋아

‘운동’이지 생산량을 속이거나 식량을 감추는 자 는‘우파’, ‘자본주의자’라는 식으로 모자를 씌우 고 협박하면서,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숨기고 저장 해 둔 식량까지도 뺏어내는 것이었다. 농촌의 기층 간부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성위원회 가 과다하게 할당한 목표량을 달성할 수가 없었으 므로, ‘반 우경화 투쟁’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폭력 을 행사하였다. 즉, 할당된 양의 식량을 바치지 않 는 농민들을‘반혁명’,‘우파’로 몰면서 공권력과 무력을 사용하여 묶고, 매달고, 때리고, 가두고, 밤 잠을 안 재우고 벌 세우고, 집을 헐어 부수고, 거리 로 끌고 다니면서 조리 돌렸다. 그중에서도 광산현

현 위원회 제1서기 마롱산( )은‘반우경화 투쟁’을 한다며 우경(右傾)으로 비판받던 현 위원 회의 또 다른 서기 장푸홍( )을 직접 주먹과 발길질 등으로 때려 죽였고, 또 다른 서기 류원차 이( )는 하룻만에 40여 명의 농민들을 심하 게 구타하여, 체력이 약한 농민 수명이 현장에서 즉사하였다.1)

후에 이 같은 사실이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 (周恩來)와 중공 중앙에 보고되었고, 국무원에서 조사팀을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광산현 내 인민공사 1급 간부 중 93%가 직접 농민들을 구 타하였고, 1959년 11월부터 1960년 7월까지 신양 지구에서 식량 공출을 강요하기 위하여 공안기관 이 체포한 농민 수가 1774명에 달하였고, 그중 36 명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단기 구금자는 1만 720 명이고, 구치소에서 죽은 자가 667명이었다. 수 많 은 농민들이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외지로 탈출하 는 상황에서도, 지구 위원회의 서기인 루시엔원 ( )은 이렇게 말했다. “식량이 없는 게 아니 다. 90% 이상은 사상 문제 때문이다.”2)

이 같은 상황은 신중국 건국 초기에 중공이 토 지개혁을 시행하면서 각 지구에서 개최한 농민대 회에서 농민들이 폭로, 고발한 구사회 악질 지주들 의 소행을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면, 1951년 사회 학자 판광단(潘光旦)이 장쑤성 남부 농촌 조사를 마치고 작성한‘장쑤 남부 토지개혁방문기

1) . 2008. p237 2) . 2008.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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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3)

“우장( )에서는 소작료를 못 내서 지주의 감옥에 갇힌 적이 있는 농민이 약 1857명이었다.

사망자 105명 중 45명은 직접 죽임을 당했고, 35명 은 맞아 죽었고, 25명은 지주의 감옥 안에서 죽었 다.”당시 이 지방 농민들 사이에 유행하던 민요 내 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등에는 빌린 쌀의 무게와 고이율의 이자라는 두 개의 칼을 지 고, 앞에는 강에 빠져 죽거나, 목 매달거나, 감옥에 가는 세 가지 길 만이 있구나….”

장구한 역사 동안을 이렇게 살아온 중국 농민들 입장에서 보면, 구타 당하고 식량을 뺏기고 굶주리 다 죽는 것이 특별히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다. 단, 새로운 수탈자들은 이전의 지주나 토호들과 달리, 입만 열면‘반우경화’니, ‘반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면서 당당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점만 달랐다.

수확한 곡식 중 생존에 필요한 최소의 식량 조차 도 남기지 못하고 뺏긴 농민들은 초근목피로 연명 하다가 굶주림으로 인한 부종병( )에 걸려 죽었다. 가축을 몰고 외지로 나가는 촌민들이 늘어 나자 현과 성위원회는 공안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각 촌의 길목 입구 등에 보초를 세우고 감시하였다.

최초로 굶어 죽은 농민이 발생되었다는 보고는 1958년 11월에 허난성 미현( )에서였다. 이를 시작으로 부종병에 걸린 자와 굶어 죽는 자의 수가 갈수록 증가하였다. 후에 중공 중앙에서 파견한 조

사팀의 조사 결과 보고에 의하면 수많은 촌락에 사 람의 흔적이 없어졌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은 참상도 있었고, 광산현 한 현에서만 20만 명이 굶 어 죽었다.4)그러나 신양지구의 이 같은 참상은 비 교적 일찍 폭로되었을 뿐이고, 당시 식량 부족과 아사자의 발생은 중국 전국에서 보편적인 현상이 었다. 1958년~1962년 대약진 기간 중 중국 전국 에서 비정상적으로 죽은 농민의 숫자가 약 3천만 명에 달했다.5)

■완리(万里)의 눈물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죽고, 4인방이 타도 되고, 문화대혁명 10년 동란이 끝난 다음 해(1977 년)에 중공 안훼이성(安徽省)위원회 제1서기로 부 임한 완리(万里)는 부임 후 성 내 농촌지역을 시찰 하며 기층 주민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하루는 안훼 이성 북서부에 있는 푸양( )지구에서 허름한 초가 농가들이 늘어선 마을을 방문하였다. 대부분 의 농가에 쌀과 밀가루는 고사하고, 기근을 면하기 위한 고구마마저도 부족하였다. 많은 농가의 문이 잠기고 비어 있는 이유가 초근목피 등 먹을 것을 구하러 외부로 나갔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 었다.6)이에 상심하여 점심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 한 완리가 성 농업위원회 주임의 보고를 받고 파악 한 바에 의하면, 당시 안훼이성 전체에 28만여 개 의 생산대7)중 10% 정도가 겨우 춥고 배고픈 상태 를 면하고 있었고, 나머지 90%는 정부 방출미에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이해

3) . 2009. p1-2 4) . 2008. p239 5) . 2008. p282 6) . 2008. pp33-34

7) 당시는 인민공사 체제하에서 행정단위인 촌(村)이 인민공사의 생산대(生産隊)에 통합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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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한 따비에산( ) 진자이현( )에 도착 하였다. 당시는 혹독한 엄동설한 시기였다. 산촌지 구인 옌즈하(燕子河)에서 한 허름한 초가집 가정 을 방문하고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컴컴한 방안 부뚜막 부근에 짚이 쌓여 있었고, 노인 한 명과 처 녀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완리가 노인에게 한발짝 다가가며 따뜻한 어조로 인사말을 건네며 악수하 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노인은 별 반응을 보이 지 않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완리는 노인의 청 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동행한 현지 촌간 부가 노인에게“이 분은 새로 부임한 성위원회 제1 서기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노인이 허리를 굽히고 하반신을 덮고 있던 누더기를 한 손으로 들고 천천 히 일어났다. 순간 완리는 경악했다. 노인의 하반 신은 맨살이었다. 옆의 촌간부가 두 처녀를 가리키 며 말하였다. “이 아가씨들도 바지를 안 입었어요, 날씨가 추워서 이렇게 아궁이 앞에서 불을 쬐는 겁 니다.”

완리가 다시 몇 집 건너 또 다른 농가에 들어서 서 둘러보니, 집안에는 남루한 옷을 걸친 중년 부 녀자가 혼자 있었다. 완리가 그녀에게 집안 상황을 물었다. “가족이 몇 명입니까?”“부부하고 아이가 둘해서 네 식구입니다.”“아이들은 어디에 있나 요?”“놀러 나갔습니다.”, “아이들을 보고 싶으니 불러주세요?”“…”, 완리가 두 번 연이어 부탁하자

아이가 보였다. 밥을 짓고 나서 아직 열이 남아있 는 아궁이 안에, 무쇠솥을 들어내고 어린 딸 둘을 그 안에 넣고 솥뚜껑으로 덮어두었던 것이었다. 순 간 완리의 눈이 시려지고 만면에 눈물이 흘렀다.

“백성들의 빈곤이 이 정도일 줄이야…”완리가 침 통한 어조로 말하였다. “혁명 전쟁 당시, 이 지구의 인민들이 혁명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뜨거운 피를 바쳤는가? 이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어디에 우리의 오늘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해방 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백성들이 배를 굶주리고, 십 칠팔세 처녀들이 몸을 가릴 옷조차 없을 정도라 니…, 대체 무슨 낯으로 강동의 어른( )들 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9)

2. 샤오강 생산대의 생사협약

안훼이 펑양현( )은 명(明)을 창건한 황제 주위엔장(朱元璋)의 고향이고, “펑양화고(

)”라는 작은 장구를 치며 두 명이 같이 노래를 부르는 풍습이 있다. 이 같이 부르는 민요 가사 중 각설이 타령조로 구걸하면서 부르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펑양에 대해 말해보세, 펑양은 본디 좋은 지방이었으나, 주황제가 나온 후에는 10년 중 9년은 기근이라네…”이 지방은 수백 년 이래 기근 을 피해 다른 지방으로 구걸을 하러 다니는 게 마

8) . . 2008. p21 9) . . 2008. p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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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전래 풍습처럼 되어 있었다. 이 펑양현 내의 촌 단위 생산대인 샤오강촌( )에서 중국 농촌개 혁의 핵심인 호별 도급생산이 시작되었다.

1978년 추수를 끝낸 이후, 샤오강 생산대는 집 체화로 인하여 하락한 사원들의 노동 적극성을 높 이기 위하여, 생산대를 4개조, 8개조의 작업조로 나누고, ‘조별도급생산제( )’를 실행하였 으나, 각 작업조 내부에서는 여전히 출근 시간 및 지각 판단 기준, 작업량 배분 및 기록과 평가 등에 대한 문제를 둘러싼 분규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에 는 모두들“차라리 해산하고 말자”고 말하는 상황 이 되어 버렸다. 생산대 부대장 옌홍창( )은 젊고 적극적이고 승부욕이 강했다. 그는 샤오강 생 산대가 계속 이런 식으로 가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 각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옌홍창이 그의 형이자 생산대장인 옌쥔창( )에게 말하였다. “쥔창 형, 형집에는 식구가 많으니 내가 앞장 설께, 우리 다시 사원회의를 열고 모두가 동의하면 각 호 단위 로 나누어 경작합시다.”

1978년 11월 24일 밤에, 안훼이성 펑양현 샤오

강촌 생산대 대장 옌쥔창과 부대장 옌홍창이 촌 전 체 18호 농가 호주들을 생산대 회계인 옌리화 ( )의 집에 집합시키고, 1차 비밀회의를 열 었다. 자유토론을 거친 후에 옌홍창이‘생사협약’

이라 불리는 협약서 초고를 낭독하였다. 주요 내용 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각 호(戶) 단위로 농지를 나누고, 각 호 주가 서명하고 날인한다. 이후 각 가정마다 정부와 집체에 납부하는 공량(公粮) 외에는 어떤 돈도 식 량도 다시 요구하지 않는다. 상부와 외부에 비밀을 유지하고, 발설하는 자는 전 촌민의 적이다. 만일, 실패하여 우리 간부들이 감옥에 가게 되면, 남은 사람들은 감옥에 간 간부의 아이들을 18세가 될 때 까지 양육해 준다.”10)

그 아래에 주동자 생산대 부대장 옌홍창의 이름 을 선두로, 각 호의 대표인 20인(외부 출타 중인 호 주 포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루한 의복을 걸 친 18인의 촌민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이‘생사협약 서’에 엄지 손가락 지장 또는 정방형 도장을 찍었 다. 그리고 이들은 다음날 하루만에 생산대의 가축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이해

<사진 1> 샤오강촌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1978년 생사협약서 <사진 2> 샤오강촌 기념관의 호별도급생산 생사협약 관련 전시물

10) . 2008. pp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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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농기구, 그리고 토지를 각 호별로 나누었다. 이 렇게 하여 펑양현에서 은밀하게‘호별 도급생산’

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생사협약서’가 중국 전국의 농촌에서 구경제체제를 타파하고, 생 산력을 해방하기 위한 새로운 농업혁명의 상징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각 가정 단위로 농지를 분할한 이후부터 샤오강 촌민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당시는 춘절을 며칠 앞 둔 때였다. 과거 춘절에는 촌민 거의 모두가 식량 을 구하기 위해 외부에 나가 있었다. 그러나 이 해 춘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가지 않고, 비료용 쇠똥 수집 등을 하기 시작하였다. ‘생사계약’을 맺 은 첫 해에 샤오강 생산대가 이룩한 성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식량 총생산량 6.6만여 kg은 1966년 에서 1970년 5년간의 총생산량과 같았다. 식물유 재료인 유료(油料)는 1.75만kg으로 과거 20년간 생산량 총계에 달하였다. 이전 20년간 국가에 한 톨의 공출 곡식도 상납해 보지 못했지만, 이 해에 는 정부에 1.25만kg의 식량을 공출하였다.

베이징 천안문 광장 동편에 있는 중국 국가박물 관 안에는 샤오강촌 농민들이 1978년 비밀리에 맺 은 호별 도급생산을 위한‘생사협약서’가 중국 현

대사의 귀중한 자료로 소장되어 있다. 또한 2005년 6월 15일에는 샤오강촌 현지에 기념관도 건립되었 다(<사진 4> 참조).

3. 호별 도급생산과 관련한 아픈 기억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4인방이 타도된 후에, 샤 오강촌 외에도 궤이저우, 내몽고, 안훼이, 허난, 쓰 촨, 장시, 저장 등 수많은 성의 일부 농촌에서 각자 다른 형식으로 은밀하게‘호별 도급생산’이 천하 대세처럼 확산되었었다. 따라서, 오늘까지도 중국 내에서는‘호별 도급생산’의 발원지가 도대체 어 디냐? 라는 문제에 대하여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 다. 이 같은‘호별 도급생산’을 개혁개방 이전에는, 사회주의 집체화를 거쳐서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방향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엄격하게 금지 했었다. 중국 농민들은 합작화, 집체화에 대한 반 항으로 처음에는 합작사나 인민공사에서 퇴사(退 社)를 시도하였고, 당과 정부로부터 이 같은 행동 을 제압 당하게 되자, 태업과 호별 도급생산의 방 법으로 바뀌었다.

태업과 관련해서 농민들 간에는 다음과 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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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유행하였다.

“열심히 일해서 노동점수 6천 점, 8천 점 따봐야 닭장 안 암탉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달걀 하나 얻 는 것만 못하다”, “첫 번째 작업 개시 호각소리는 못 들은 척하고, 두 번째 호각소리에 고개들고 두 리번거리고, 세 번째 호각소리에 천천히 걸어가서 논두렁 앞에 다다른 후에 깜박 잊고 쟁기를 안 갖 고 왔다고 하고 다시 집에 갔다 온다”, “남자는 화 투 놀이하고, 여자는 신발 꿰메면서 시간 때우다 가, 퇴근시간이 되면 서둘러 귀가하여 개인 텃밭을 가꾼다.”

이 같은 태업 분위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친 3년 곤란시기(1959~1961년)에는‘호별 도급생산’방 식이 일종의 농민 구제방법으로 유행하게 되었 다.11) 이와 관련하여 안훼이성 쑤현( )에서는 70대 노인이 이룬 생산 기록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 오고 있다. 1959~1961년 3년간 자연재해와 이로 인한 심각한 기근 상황에서 중병에 걸린 아들을 돌 보기 위하여, 생산대의 집체 노동에 참여할 수 없 었고, 이로 인하여 집체 생산대로부터 식량을 배분 받기도 어려워진 노인이 자신의 생산대가 소속된 인민공사 간부의 허락을 구하고, 병든 아들을 데리 고 산으로 가서 70대 노인 혼자의 노동으로 16무12) 면적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하였 을 뿐만 아니라, 인민공사에 1,800근의 식량을 납 부하고, 닭을 길러서 당시 호당 평균 수준보다 높 은 60위안의 소득도 올렸다. 이 노인이 개인노동을 통하여 달성한 이 같은 성과는 당시 집체노동 상황

하에서 기근을 겪고 있던 다른 촌민들의 상황과 명 백하게 대조되었고, 각 가정별로 경지를 분할하여 경작하게 하면 훨씬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고, 기근을 면할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주었다.13) 따라서 이 무렵에 호별 도급생산이 광동, 광시 ( ), 간쑤( ), 후난(湖南), 허난, 산시 ( ) 등 수많은 지방에서 서로 다른 형식으로 시 행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안훼이성의 책임전 ( ) 방식으로 1961년 3월에서 10월까지 8개 월간 성 전체 생산대 중 책임전을 시행한 생산대 비율이 39%에서 85%로 증가하였다.

당시, 안훼이성 제1서기 정시셩( )은 성 전체에‘책임전’을 시행하고, 1961년 3월 15일에 는 광저우에 온 마오쩌둥을 찾아가서‘책임전’에 관하여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당시 마오는“시험해 보라, 만일 잘해서 10억 근의 식량 증산을 할 수 있 다면 좋은 일 아닌가”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다시“책임전은 오직 소범위 내에서만 시험하 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정시셩의 태도는 결연하 였다. 그는 즉각 마오쩌둥, 류샤오치( ), 저 우언라이 등 중앙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써서‘책임 전’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말하며 책임전 실시를 계속 장려하고 확대 해 나갔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50년대 후반 부터, 저장성(浙江省) 원저우( ) 용지아현 ( )의 적지 않은 생산대에서 이미‘호별 도 급생산’을 시행하였다.14)

당시,중국 내 다른 지방에서도, 농민들과 지방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이해

11) . . 2008. p22.

12) 약 3200평, 1무는 666.7m2. 13) . 2008. pp52-53.

(8)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가령, 려우샤오치는“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좋다”

고 말했고, 천윈은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급하게 반대할 필요가 있는가? 우선 수년간 시험해 보게 하고, 다시 보면 될 것 아닌가”

라는 태도를 표시했고, 덩샤오핑은 후에‘고양이론 ( )’으로 유명해진“누런 고양이( )든 흰 고양이(白猫)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고 말하며, 찬성하였다.

그러나 호별 도급생산에 대하여 처음에는 두고 보자는 식이었던 마오쩌둥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1962년 1월에 개최된 7천 인 대회에서 마오쩌둥이 안훼이의‘책임전’을 비판하고, 정시셩을 전출시켰고, 이어서 1962년 9 월에 개최된 중공 8기 10중 전회에서는 중앙에서 호별 도급생산을 적극 옹호하던 중앙농촌공작부 주임 덩즈훼이( )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그의 직무를 박탈하였다. 또한 저장성 원저우 용지 아현에서 호별 도급생산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현 농업담당 부서기 리윈허(李云河)와 서기 등 관계 자들은 우파분자(右派分子)로 판정받고 당적 박 탈과 직위 해제 당하고, 현성( )에서 농촌으로 하방되었다. 1960년대의‘호별 도급생산 바람’은 이렇게 저지・중단되었다.

마오쩌둥은 려우샤오치, 덩샤오핑, 천윈 등이

주의다. 일단 시작하자 반년 만에 농촌의 계급분화 가 시작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바람은 어 디서 불어 오는건가?”마오는 이렇게 자문자답하 였다. “당 내부로부터다”, 그리고 단언했다. “호별 도급생산은 방향의 문제다.”15)

4. 호별 도급생산제의 승인 및 확대

마오쩌둥이 죽고, 4인방이 타도되고 문화혁명‘10년 동란’이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주의 개혁 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호별 도급생산’이 허용 되고 농촌개혁이 활성화되는 방향으로 개혁이 진 행된 것은 필연이었다. 이 필연이 구체적으로 진행 된 것은 덩샤오핑의 혁명동지이자 측근인 완리가 안훼이성위원회 제1서기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완리는 이미 1958년부터 20여년간 시행된 인민공 사와‘큰솥밥( )’제도가 농민들을 토지상에 묶어 두고, 생산의욕과 적극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농민들의 고통을 현장에서 거듭 확인하면서, 인민공사식 농촌관리 체제를 돌파(突破)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 었다.

1978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안훼 이성은 백 년에 한 번 정도 오는 대가뭄이 들었고, 농촌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 같은 상황을 극

14) . . 2002. pp17-22.

15) . . 2008. p20-21.

(9)

복하고자 완리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임대하여 경 작하게 하고, 정부에 대한 식량 납부 의무도 면제 해 주는 결정을 주도하였다. 이 같은 시책을 통하 여 농민들의 생산 적극성을 촉발시켜 대가뭄을 극 복할 수 있었고, 일부 농민들은 비밀리에‘호별 도 급생산’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같은 움직임의 시 작으로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것이 앞서 말한 안훼 이성 펑양현 샤오강촌 사례다.

1980년 1월, 중공 안훼이성위원회가 개최한 농 업회의에서 제1서기 완리가 처음으로‘호별 도급 생산( )’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 고, 이를 허용・실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회의 를 마치고 샤오강 생산대를 방문한 완리는, 집집마 다 식량이 가득 쌓여 있는 것에 고무되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렇게 하면, 형세는 자연히 크게 좋아 질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려고 한다. 내가 여러분 을 지지해 주겠다.”당시 샤오강 생산대 부대장이 었던 옌홍창은 이렇게 회고하였다.16)

“성정부에서 새해 첫 회의가 열리고, 회의가 끝 난 후에 완리 서기가 우리 샤오강촌에 왔다. 촌 서 편에서 동편까지 집집마다 둘러 보고 매우 만족해 하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매우 불안했다. 당시 우리 집에서 완리서기에게 보고할 때, 완서기는 서 쪽을 향해 동쪽에 앉았고 나는 그 맞은 편에 앉았 다. 완서기의 뒤에 성과 현의 각급 간부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간의 전후 진행과정을 완서기에게 보고하였다. 다 듣고난 완서기가 말하기를, “진정 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농촌의 초가집에 살고 있는 줄 나는 몰랐다… . 사실 이 같은 방법을 일찌

기 나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감히 시도한 사람이 없 었는 데, 여러분이 하였다.”이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고, 두 눈에서 눈물을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내가 다시 완서기에게, “우리는 여러 영도(領導)들이 우리가 계속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자, 완서기가 대답하 였다. “여러분 안심하시오, 나는 한편에서 여러분 의 방식을 지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중앙에 보고하 고 지지를 얻어내겠습니다. 여러분의 이 같은 방법 이 우리 중국 농촌 발전을 위한 길입니다.”

안훼이성과 비슷한 시기에, 쓰촨성(四川省)의 적지 않은 농촌과 내몽고자치구, 허난성, 궤이저우 성(貴州省) 등에서도‘호별 도급생산’을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제5기 인민대표대회 2차회의 기간 중에 완리는 당시 중공 중앙 부주석이었던 천윈을 찾아 가‘호별 도급생산’실시에 대하여 적극적인 지지 를 약속받았고, 이어서 1979년 7월에 안훼이성을 방문한 덩샤오핑과 함께 성 내에 있는 황산(黃山) 을 등반하면서 호별 도급생산과 관련한 경과를 덩 샤오핑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덩샤오핑의 대 답을 듣는다. “바로 그렇게 추진하라, 실사구시적 으로 추진하라,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모든 방법 을 동원해서 농민들을 부유하게 만들라”

덩샤오핑은 처음에는‘호별 도급생산’에 대하여 찬반 표시를 하지 않았다. 완리가 수차례 안훼이성 에서 베이징에 와서 보고하자, 시험해 보는 데 동 의한다고 했다. 그리고 성과가 나타나자 즉시 공개 적으로 지지하였다. 중국 내 각 지방에서‘호별 도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이해

16) . 2009. p33.

(10)

“그들이 진정으로 지방 특성에 맞게 그리고 자 신의 특성을 발전시키도록 해야 한다. 정책은 넓고 느슨하게 하여, 각 호마다 모두 자신이 방법을 생 각하게 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게 하라. 소조(小 組)별로, 또는 개인별로 분할 도급해 줄 수 있다.

이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총괄적으로 말하 면, 현재 농촌관리업무 중의 핵심문제는 아직도 사 상이 충분히 해방되지 못한 점이다…, 현지의 구체 적 조건과 군중의 요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덩의 말 중 특히 흥미 있는 말은‘사상 해방’이 라는 말이다. 반우파 투쟁이니 문화대혁명이니 해 가면서, 극좌노선투쟁을 전개해 왔으나, 개혁개방 이후에는 바로 그 극좌 사상이 해방의 대상이 된 것 이다. ‘호별 분할도급생산’이 광대한 농민의 절실 한 요구를 반영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하고 있었지 만, 다수의 간부들은 여전히 진부한 관념을 고수하 고 있었으므로, ‘호별 도급생산’의 성(姓)이 사회 주의‘사( )’씨냐 자본주의‘자( )’씨냐 하는 이 른 바‘성사성자(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 다. 1980년 9월 14일~22일 기간 중에 대폭 조정 교체된 중앙 고위직 간부들과 각 성, 직할시, 자치 구 제1서기들 간에 좌담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농업생산책임제를 강화하는 문제를 전문 주제로 토 론이 진행되었다. 이 중에서 초기‘호별 도급생산’

을 지키고 있었다. 츠비칭이 궤이저우성의 호별 도 급생산 책임제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발언할 때, 헤이롱장성( ) 서 기 양이천( )이 그 자리에서“우리는 그 물건 은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대꾸했다. 츠비칭이 그 말 에“당신은 당신의 탄탄대로로 가시오, 나는 나의 외나무 다리로 가겠오”라고 받아쳤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회의간보( )에 실린 후, 이 소 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탄탄대로( )와 외 나무 다리( ) 논쟁”으로 불렸다.18)

그러나‘진리표준논쟁’19)을 통하여 이론 투쟁에 서 승세를 굳히고, 중공 11기 3중 전회에서‘개혁 개방’정책 실시가 채택된 이후, ‘실사구시’가 대 세로 확산되던 형세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의 지지를 바탕으로, 호별 도급생 산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개혁은 더욱 탄력을 받으 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7) . . 2008. p68.

18) . . 2008. p70.

19) 개혁파와 보수파간에 전개된‘진리표준논쟁’의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제2부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참고문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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