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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 속의 전쟁, 그 변화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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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 속의 전쟁, 그 변화와 의미

The Meaning of War in Korean Pop Songs and Its Changes

저자 (Authors)

이영미 Lee, Young-Mi

출처 (Source)

대중음악, (6), 2010.11, 121-163 (43 pages)

Koren Journal of Popular Music, (6), 2010.11, 121-163 (43 pages)

발행처 (Publisher)

한국대중음악학회

The Korean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Popular Music

URL http://www.dbpia.co.kr/Article/NODE02010856

APA Style 이영미 (2010). 한국 대중가요 속의 전쟁, 그 변화와 의미. 대중음악, (6), 121-163.

이용정보 (Acc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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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1.233.206.***

2018/04/13 09:48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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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일반논문

한국 대중가요 속의 전쟁 , 그 변화와 의미

이영미(성공회대)

1.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2. 식민지시대, 친일가요와 독립군 노래의 공존 3. 해방 후와 1950년대, 6·25전쟁 경험의 형상화

4.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호전적 사회의 전쟁에 대한 태도 5. 1970, 1980년대, 전쟁과 분단에 대한 최초의 반성

6. 1990년대 이후, 신세대 가요의 자유로움과 반미·반전의 대중화 7. 맺음말

이 글은 한국 대중가요사 속에서 전쟁이란 소재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양상은 크게 몇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식민지시대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는 친일적 대중가요와 이와 는 이질적인 다양한 종류의 독립군가들이 전혀 다른 생산과 유통 방식을 지니 면서 공존했다. 친일적 대중가요는 종종 희생과 죽음의 형상화로 강한 선동성 을 지니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노래가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명분을 향한 희생이라는 억지스러움이 강하다. 그런 점에서 죽음에 대한 인간적 두려움과 극복의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독립군가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둘째, 해방 후와 6·25전쟁 직후 전쟁에 대한 노래는 가장 풍부하게 만들어 지고 애창되었다. 실제의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 시기의 대중가요들은 다른 어느 시기의 노래보다도 리얼리티를 잘 포착한 수작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일제 말기의 친일가요와 같은, 선동적 억지스러움이 드러나는 작품 역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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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전쟁, 친일가요, 독립군가, 6·25전쟁, 극단적인 비민주적 정치상황, 전후세대, 평화와 반전

셋째,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의 대중가요에서는 고착된 분단체제 속에 서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병영적 정서를 유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 편 전쟁의 비극적 체험이 점차 옅어지면서 군인이 대중가요 속에서 일상의 멋진 모습이 해학적으로 형상화되어 친근감 있게 그려지는 경향도 나타났다.

넷째,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극단적인 비민주적 정치상황 속에서 국민계 도적인 노래들이 국민에게 강요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전후 세대들이 청소년기를 맞으면서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에 대한 갈망이 본격적으 로 표출되었다. 즉, 이 시기는 노래 속에서 전쟁과 분단에 대한 비판의식과 반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다섯째, 1990년대 이후에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점차 갖추어가는 정치적 상황에서 노래는 단지 우리나라의 평화통일에 대한 갈망의 표현을 넘어서서 전 세계와 인류의 평화와 반전이라는 주제의식을 표출했다.

1.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글은 한국 대중가요사 속에서 전쟁이란 소재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 따라서 이 글은 특정 가설을 세우 고 그것을 논증하는 방식의 글이 아니라, 한국 대중가요사 속 특정 소재의 형상화의 변화 과정을 거칠게나마 일관되게 추적하여, 그 대강 의 흐름을 정리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예술이라는 형태를 통해 그 안에서 전쟁이나 분단 , 평화와 통일 등

의 소재를 찾아보는 작업이 다 그러하지만 , 특히 대중가요처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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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형태의 예술에서 이러한 사회적 소재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 가를 탐구하는 데에는 몇 가지 유념할 점이 있다.

첫째는 노래가 지니는 강한 주관성의 문제이다. 예술이란 학술논문 이나 신문기사, 역사적 기록 등과 같이 객관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성의 개재를 본질로 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적 산물 가운 데 어떤 것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없지만, 예술은 본질적으로 감정 과 정서 , 미적 가치 부여 등 주관적 영역에 뿌리박고 있는 종류의 것이 다. 물론 예술에서 인식의 측면은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인식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느낌, 정서, 감정, 미세 한 질감 등의 측면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 그런데 예술 중에 서 노래는 객관적 인식의 비중이 작고 주관적인 감정·정서의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 노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단형 (

單形

) 의 서정 적인 노래들은 (노래 중에서 길고 서사적인 것들을 제외한) , 대부분 외부 세상의 모습을 짧은 언어 속에 강렬한 주관적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예술이다. 그런 점에서 노래에서 발견되는 ‘소재’는 인식으로서가 아 니라 그 소재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느낌이나 태도와 함께 나타나고 있다 . 노래 속에서 전쟁의 이야기를 찾는 것 역시 전쟁의 사실을 확인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전쟁을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 가, 어떤 태도로 전쟁을 받아들이고 있었는가, 전쟁과 함께 어떤 느낌 으로 살아가고 있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즉, 대중가요 속 전쟁 표상을 찾는 작업은 객관적인 인식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그 에 대한 태도나 느낌을 확인하는 일이다 .

둘째는 다양한 노래문화 중 대중가요라는 종류의 노래가 지니는 본

질적인 보수성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구전가요 , 민중가요 등 다른 종류의 노래를 조금씩 함께 거론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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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대중가요가 전쟁과 평화를 다루는 방식은 다른 종류의 노래, 즉 민요, 구전가요, 민중가요 등이 지니고 있는 전쟁에 대한 태도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 이는 대중가요가 시장이라는 공개된 산업의 영역에서 상품으로 생산된 것이며, 따라서 당시의 정치적 간섭 (예컨대 검열 혹은 심의 등으로 대표되는) 이나 당대 사회의 보수적 여론 등으로부 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 이다 . 즉 대중가요는 당대 수용자 대중의 경험과 욕망과 조응함으로써 그들에게 공감을 받고 그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인기를 얻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회의 지배적인 보수적 사회의식이나 정치적으 로 권력이 부여된 심의주체들의 심의기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만 형 상화된다 . 즉, 대중의 경험과 욕망을 보수적 사회의식 및 지배 이데올 로기의 틀과 결합하는 방식으로만 표현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렇지 않은 다른 종류의 노래들과 비교해보면 그 특성이 확 연히 드러난다 . 민요와 구전가요, 민중가요 등은, 그 성격이 각기 다르 기는 하지만, 상업적 생산·유통·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검열이나 심의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 즉 이들 노래는 어떤 식으로든 수용자 대중이 원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지는 노 래들이다. 그러나 대중가요는 수용자 대중이 원한다 할지라도 상업적 으로 이윤창출 가능성이 없거나 심의 등에 의해 제지당할 경우 생산 될 수 없거나 사라지게 된다 .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그 노래가 향유되는 맥락 (context) 이다. 비록 작품 자체만을 놓고 보면 표면적으 로는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노래가 불리는 맥락까지 고려하면 그 의미의 차이가 자못 큰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두 가지 점에 유념하면서, 한국 대중가요와 그 외의

서민적 노래문화 속에서 나타난 전쟁 표상에 대해 시대별로 정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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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자 한다 . 그것은 크게 몇 시기로 나뉘는데, 식민지시대, 해방 후와 6·25전쟁 직후, 약간의 안정을 되찾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1970년대와 1980년대 시기, 그리고 그 이후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2. 식민지시대, 친일가요와 독립군 노래의 공존

우리의 근대사는 첫 시작부터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 도 개항이라는 외세 침략의 근대이행기부터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개항 자체가 국지적인 전쟁을 수반한 것이었거니와, 1894년의 동학농 민전쟁과 그 여파로 벌어진 청일전쟁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 배로 들어가게 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시대 대중가요에서 전 쟁의 흔적을 찾기란 적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대중가요가 시작한 때는 개항기로부터 훨씬 후인 1920년대 말이며, 본격화되는 것은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식민지 후반기라 할 만한 이 시기는 3·1운동의 체험이 그리 지배적이 지 않거나 이에 대한 기억을 거의 갖지 않은 새로운 세대가 청소년이 된 시기로 , 사회주의운동 등도 거의 잦아들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식민지적 근대의 모습이 안정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던 때였다 . 당시 대중가요에서 그려진 경성의 모습은 , 낮에는 빌딩의 양장한 젊은 남녀 들이 바쁘게 오가고 밤에는 네온등불과 카페의 불빛이 휘황한 불야성 으로, 어디서도 전쟁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르게는 1937, 1938년, 본격적으로는 1940년 즈음부터 나

타나기 시작한 만주와 중국 혹은 북쪽 대륙 땅 어느 곳을 연상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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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들은 , 확실히 만주사변에 뒤이어 난징 (

南京

)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중국 침략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즉 만주와 중국 혹은 대륙을 연상시키는 소재의 노래가 등장한 것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본 역시 이러한 관심을 부추기거나 적어도 용인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 문이다. 물론 이 시기 만주 소재의 대중가요는, 그저 대중가요의 공 간적 배경을 옮기는 의미 이상의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지 여태까지 한 번도 등장해본 적이 없는 만주와 중국이 <만주의 달> (1937) , <야루강 춘색> (1938) , <북국 오천 키로> (1939) 등 지속 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주목하기에 충분하다.

1940년대에 들어서서 본격화된 이른바 군국가요에서는 이제 본격 적으로 전쟁이 등장한다. 조선인 지원병제를 거쳐 징병제를 실시한 1943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이천오백만 감격> 같은 노래는, 남인수와 이난영이라는 당대 최고의 남녀 가수가 불렀음에도 다소 구 호적이고 당위의 주장으로 일관하여 감동의 정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1. 역사 깊은 반도 산천 충성이 맺혀 / 영광의 날이 왔다 광명이 왔다 / 나라님 부르심을 함께 받들어 / 힘차게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2. 동쪽 하늘 우러러서 성수(

聖壽

)를 빌고 / 한 목숨 한 마음을 님께

바치고 / 미영(

米英

)의 묵은 원수 격멸의 마당 / 정의로 나아가자 이천오백만 /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 아 감격의 피 끓는 이천오백만

― <이천오백만 감격> 1·2절

(1943,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남인수·이난영 노래)

(8)

그러나 전쟁을 독려하는 노래가 모두 이렇게 구호적인 것만은 아니 다. 전쟁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사적 희생을 비장함으로 소화해낸 수 작 (?) 들도 없지 않다 .

1. 나라에 바치자고 키운 아들을 / 빛나는 싸움터로 배웅을 할 제 / 눈물을 흘릴쏘냐 웃는 얼굴로 / 깃발을 흔들었다 새벽 정거장 2. 사나이 그 목숨이 꽃이라면은 / 저 산천초목 아래 피를 흘리고 /

기운차게 떨어지는 붉은 사쿠라 / 이것이 반도남아(

半島男兒

) 본분 일 게다

3. 살아서 돌아오는 네 얼굴보다 / 죽어서 돌아오는 너를 반기며 / 용감한 내 아들의 충의충성(

忠義忠誠

)을 / 지원병의 어머니는 자랑 해 주마

4. 굳세게 나아가는 우리나라의 / 총후(

銃後

)를 지키는 어머니들은 / 여자의 일편단심 변함이 없이 / 님에게 바치리라 굳은 절개를

― <지원병의 어머니>

(1941, 조명암 작사, 고가 마사오 작곡, 장세정 노래)

1. 어머님 전(

)에 이 글월을 쓰옵노니 / 병정이 되온 것도 어머님 은혜 / 나라에 바친 목숨 환고향(

還故鄕

) 하올 적엔 / 쏟아지는 적 탄 아래 죽어서 가오리다

2. 어제는 황야 오는 날은 산협천리(

山狹千里

) / 군마도 철수레도 끝 없이 가는 / 너른 땅 수천 리에 진군의 길은 / 우리들의 피와 뼈로 빛나는 길입니다

3. 어머님 전에 무슨 말을 못하리까 / 이 아들 보내시고 일구월심(

日 久月深

)에 / 이 아들 축원하사 기다리실 제 / 이 얼굴을 다시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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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마옵소서

― <아들의 혈서>

(1942,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백년설 노래)

두 곡은 마치 짝을 이루는 듯 동일한 사고방식과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지원병의 어머니>는 1937년에 일본에서 발표된 <군국의 어 머니 (

軍國

) > (시마다 킨야 작사, 미치얏코 노래) 의 번안곡으로 , 본격적 인 징병제가 실시되기 이전인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지원병’으로 설 정이 바뀌었다. 두 곡 모두 죽음으로 완성되는 천황에 대한 충의충성 을 특유의 비장함으로 잘 형상화함으로써 강한 선동력을 발휘하고 있 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과 가족과의 단란한 삶을 완벽하게 포 기하는 극단적인 고통을 가까스로 극복하며 충성이라는 대의로 나아 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고통의 크기만큼이나 대의명분의 숭고함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어떤 식으로든 전쟁의 일선에 나서야 하는 군인의 입장에서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고 대의를 세우는 이러한 태도는 어느 전쟁 , 어느 군인 에게나 타당하다. 그러나 위의 두 노래는, 아무래도 고통의 형상화에 비해 이를 극복하게 하는 대의명분의 강고함 쪽이 훨씬 강화되어 나 타난다 . 이는 독립군들이 즐겨 불렀다고 전해지는 <독립군 추도가>

와 비교해보면 그 섬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1. 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진다 독립군 / 가슴에서 쏟는 피는 푸른 풀 위 질벅해

2.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 몸은 비록 죽었으나

독립정신 살아 있다

(10)

3. 만리창천 외로운 몸 부모형제 다 버리고 / 홀로 섰는 나무 밑에 힘도 없이 쓰러졌네

4. 나의 사랑 대한독립 피를 많이 먹으려나 /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 의 피도 먹어다오

― <독립군 추도가>(창작자 미상)

1)

표면적으로 군국가요와 독립군가 두 종류의 노래는 매우 유사해 보 이며 , 실제로 유사한 측면이 많다. 앞서 말했듯이 전선에 무기를 들고 나서야 하는 군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개인적 희 생에 대한 고통,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는 태도는 어 느 전쟁터에서나 공통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세밀히 살 펴보면 <독립군 추도가>에서는 다른 독립군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화자의 고통이 매우 강렬하다. 무엇보다도 <독립군 추도가>

는 실제 전장 (

戰場

) 의 체험이 생생한 리얼리티로 드러나는 것에 비해, 두 편의 친일가요는 (<아들의 혈서>의 화자가 군인으로 설정되어 있음에 도 불구하고) 전장의 리얼리티가 없다. <독립군 추도가>는 실제 독립 투쟁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 그들에게 수용된 노래이고 , 두 편의 친일가요는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 없는 상태인 후방에서 만들어지고 노래의 수용 역시 전장의 체험이 없는 후방의 민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전장에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와 고통의 형상화의 차이로 확연히 나타난 셈이다. <독립군 추도가>는 죽음의 공포와 고통의 형상화는 생생한 대신, 이 고통을 극복하게 하

1) 이 악보가 수록된 󰡔광복의 메아리󰡕에는 “1920년대 만주 일대에서 왜군과 혈전하 다가 순국한 독립군 추도의 노래로서 광복군에서도 많이 불렀”다는 해설이 붙어 있다. 독립군가보존회, 󰡔광복의 메아리󰡕, 독립군가보존회, 1982, 84쪽.

(11)

는 대의명분의 대상은 ‘나의 사랑 대한독립’이라는 말로 매우 소박하 다. 적어도 이 노래에서는 ‘죽어서 가오리다’나 ‘기운차게 떨어지는 붉은 사쿠라’ 같은 다분히 억지스러운 과장이 없다. ‘피를 많이 먹겠 으면 나의 피도 먹어다오 ’의 자기희생의 각오는, 바로 앞 구절의 ‘나 의 사랑 대한독립 피를 많이 먹으려나 ’라는, 이 죽음을 피할 수만 있 다면 피하고 싶다는 삶에 대한 미련의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구절에 배치되어 있어 , 과장되게 강고한 척하는 느낌이 훨씬 적다. 고통스러 운 전쟁의 상황을 맞아 스스로 고통과 공포를 극복하고자 자발적으로 지어 부르는 노래와, 지원병의 어머니나 군인이 아닌 대중가요 전문 창작자가 국가의 보호 (혹은 권유) 아래 만들어 주민들에게 유포하고 계 몽하고자 하는 노래 사이에는 이 정도의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 리네 부모가 날 찾으시거든 /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주소 /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 광복군 아리랑 불러나 보세”라는 <밀양 아리랑 >에 가사를 바꾸어 광복군이 불렀다는 <광복군 아리랑>

2)

의 흐드러짐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 군인들을 강제로 줄 세워 경직된 행 진곡으로 빳빳하게 만들어놓지 않아도 그 자발성으로 유지 가능했던 독립군 진영의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불린 , 흡사하지만 매우 다른 이 두 노래는 노래의 진정 성이 그 형상화 기술을 넘어서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군국주의 가요 들이 창작자들의 전문성으로 높은 기술력의 형상화 수준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이 결여된 경직성과 불편함을 완전히 제거 하지 못했음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해방 후의 노래들에 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

2) 같은 책, 102쪽.

(12)

3. 해방 후와 1950년대 , 6·25전쟁 경험의 형상화

해방 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대중가요에서, 전쟁은 식민지시대와 는 비교할 수도 없이 생생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 한반도 안에서 3년이 라는 긴 기간 동안 6·25라는 국제적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남북이 단독정부를 수립한 1948년 남인수가 불러 인기를 모은 <가 거라 삼팔선>이 나온 이후 전쟁을 거치면서 분단과 전쟁의 체험은 1950년대의 가장 중요한 대중가요 소재로 떠올랐으며, 특히 1950년 대 트로트 양식의 대중가요의 주류 경향을 이루게 된다.

3)

전쟁의 생생한 모습을 반영한 대중가요로 최초의 것은, 1950년 9·28수복 직후에 우연하고도 급작스럽게 만들어져 압록강까지 북진 하면서 내내 즐겨 불린 진중가요 (

陣中歌謠

) <전우야 잘 자라>일 것이 다.

4)

그리고 1·4후퇴 이후 <전선야곡> 등 전쟁 소재 작품들이 발표 되었다.

1.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 리는 전진한다 /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

5)

을 무찌르고서 / 꽃잎처

3) 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 민속원, 2006, 128~136쪽. 이하 6·25전쟁 소재의 1950년대 대중가요에 대해서는 앞의 책에서 서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4) 이영미 채록연구, 󰡔유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 235~237쪽.

5) 이 구절에서 ‘적군’은 애초에 작사가 유호가 지을 때에는 ‘적구(赤狗)’였다. 전쟁 당시 이 노래를 배운 기억을 갖고 있는 분들이 이 대목이 와전되어 전해진 것이 라는 이의제기가 있었고, 작사가 유호에게 문의한 결과 창작 당시에는 ‘적구’였 음이 확인되었다. 작사가 유호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그때에는 빨갱이가 하도 지긋지긋해서 ‘적구’라고 지었는데 이후에 어느 틈엔가 군대 안에서 부를 때에도

‘적군’으로 바뀌었다고 답변해주었다. 군대 내에서 바뀐 것으로 보아 정훈국에서 바꾸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이제는 뭐 공산국가와도 손잡고 다 용서 하는 세상인데, 바꿔 불러도 괜찮다”고 말했다(2010년 6월 11일 필자와의 전화

(13)

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2.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 는 돌진한다 /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느냐 우리 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겨주는 /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 선 무너진다 /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 <전우야 잘 자라>

(1950,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1.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에 달밤 /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 데 /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 님의 목소리 / 아아 아아아 그 목소리 그리워

― <전선야곡> 1절 (1952,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군인들 스스로 만든 노래가 아니라 전문 창작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품인데도 이 정도의 놀라운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전쟁 체험의 생생함 때문일 것이다 . 즉, 몇 년 전에 치른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체험이 지역적으로 북만주나 동남아시아 등 한반도 바깥 지역

인터뷰).

(14)

에서 이루어져 한반도 내의 일반 주민들에게 전쟁터의 체험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 6·25는 바로 한반도 내에서 폭탄이 터지 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을 몸으로 경험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체험 을 한 20세기의 유일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일제 말기의 <아들의 혈 서> 같은 노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물론 이들 노래는 정부가 허용하고 장려하는 한계 내에 있으며, 따 라서 적개심과 호전성이 노래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그러 나 적어도 이 두 곡은,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와 전쟁의 명분을 지지하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순응의 태도가 묘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한다 . <전선야곡>에서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 머님의 목소리”라는 구절이 주는 지배이데올로기와 대중의 고통 사이 의 묘한 균형감은 매우 흥미로운데, 실제로 어머니들이 아들을 전쟁터 에 내보내면서 ‘장부의 길’을 일러주었을 리 만무함에도 (아마 어떻게든 살아서만 돌아오라고 했을 것이다) , ‘어머니’라는 소재가 불러일으키는 가족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의 환기가 이 비현실성을 상쇄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들 노래에는 일제 말기의 군국가요들에서처럼 반드 시 죽어서 돌아오겠다는 과장된 비장감은 없으며 , 죽음의 고통과 공포 가 비교적 솔직하게 형상화된다. <전우야 잘 자라>에서도 ‘달빛 어 린 고개에서 ’ ‘화랑담배’를 마지막 나누어 피우던 전우의 마지막 모습 의 선명함은, ‘삼팔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진격을 하면서도 ‘흙이 묻 은 철갑모’로만 남은 안타까운 죽음의 느낌으로 전해지고, 바로 그 고통과 공포, 슬픔이 작품을 전체를 압도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의 생경한 노출을 상당히 막아주고 있다.

한편, 전쟁의 한복판에서 겪은 체험의 절실함은, 후방의 민간인들

이 주인공이 되는 노래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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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눈물 고개 /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 끌려가신 이 고개 한 많은 미아리 고개

― <단장의 미아리고개>

(1957,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1.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 를 봤다 /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 홀로 왔다

2.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랴/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 사치기다 /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질 때 /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3.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 손을 잡고 울어 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 보자

― <굳세어라 금순아>

(1953,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미아리고개는 동북쪽에서 서울의 동대문으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

시 넘어야 하는 고개이며, 따라서 북한군의 퇴각도 이 길을 통해 이루

어졌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퇴각하면서 남편을 데리고 가버림

으로써 졸지에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 되어버린 젊은 아낙의 막막함과

절규가 절절하게 배어 있다. 한편 <굳세어라 금순아>는 ‘눈보라가

휘날리는’이라는 표현이 꼭 맞을 정월 추운 한겨울 1·4후퇴 때 흥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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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겨우 배를 얻어 타고 부산으로 피난 온 월남민이 금순이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를 담은 노래로, 한겨울 흥남부두의 아비규환, 부산 국 제시장과 영도다리 등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을 읽는 듯한 생생함이 있다 . 이러한 형상화 역시 체험적 절실함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 가능 했던 성취였다고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노래들은 모두 월남민과 납북자 가족이라는, 북한과 등을 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어 당시 남한 정부의 정치적 입장을 고스란히 따 라가고 있다 . <굳세어라 금순아>의 3절에서 발견되는 “북진통일 그 날이 오면 ” 같은 구절은 바로 그 시대 자유당 정권의 입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이 대중가요가 본원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체 제순응성 속에서나마 높은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성취를 보이고 있는 것에 비해, 모든 노래가 다 이러한 성취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훨씬 더 노골적인 선동이나 억지스러운 감격도 없지 않다.

1.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 / 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소 / 가신 뒤에 내 갈 곳도 님의 길이요 / 바람 불고 비 오는 어두운 밤길에도 / 홀로 가는 이 가슴에 즐거움이 넘칩니다

― <아내의 노래> 1절 (1952, 유호 작사, 손목인 작곡, 심연옥 노래)

‘영광의 길’이나 ‘눈물을 감추었소’, ‘즐거움이 넘칩니다’ 같은 억지

스러운 구절은 일제 말기의 친일가요를 연상시킨다 . 지배이데올로기

의 이해관계가 현실성을 압도함으로써 과장과 억지가 발생하는 것이

다. 이 노래가 지닌 친일가요와의 친연성은 실제 이 노래의 창작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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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아내의 노래>는 일제 말에 불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같은 제목의 노래 (김다인 작사, 손목인 작곡으로 1947년 혹은 1948년에 김백희가 불러 취입했다) 를 개작한 작품으로 , 일제 말 작품이 해방 이후에 개작되어 재활용되는 경우는 앞서 언급한 <아들의 혈 서>, <혈서지원> 등 꽤 여러 편에 이른다. 이러한 작품은 ‘일장기’

를 ‘태극기’로만 바꾸어, 전혀 다른 정치적 지향을 담는 노래로 탈바 꿈했지만 ,

6)

전쟁에 대한 태도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호전성이 뚜렷하고 사적 고통을 무시하면서 전쟁의 명분을 절대화한다는 점에 서 동일한 것이다 .

<아내의 노래>에서와 같은 형상화는 정부가 주도하는 검열체계 속에 있는 대중가요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 아마 북한의 공식적 인 군가 역시 이러한 성격이 다분히 드러나 있었을 것이라 보인다.

그에 비해 이러한 검열체계를 거치지 않은 ,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노래들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띤다.

1.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 <인민항쟁가> 1절(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

부용산 오릿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 람 타고 /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산허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부용산>(박기동 작시, 안성현 작곡)

6) 이영미, 「일제 말 대중가요의 해방 후 개작 양상과 그 의미」, 󰡔대중음악󰡕 3호, 대중음악학회, 2009, 96~105쪽.

(18)

앞의 <인민항쟁가>는 해방 직후에 만들어져 좌익들에 의해 널리 불리고 전쟁 중에도 공식적으로 많이 불린 노래이다 . 그러나 이는 공 식적 유포의 힘을 넘어서서, 마치 <전우야 잘 자라>가 그러하듯, 그 노래의 감동력으로 전국적으로 불려졌다. 제주도에서는 가사가 바뀌 어서까지 불렸다고 한다 . 이는 구호적 행진곡과는 다른 감동력을 지니 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부용산>은 애초에는 이념과 무관하게 만들어져 불린 추모가였는데, 지리산 빨치산들이 즐겨 부름으로써 졸 지에 빨치산 노래가 되어버린 작품이다 .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 중가요처럼 정부의 검열이 개입되었더라면 군인들이 부를 노래로는 절대로 만들어지거나 유포되기 힘든 작품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 죽 음 저편으로 가버린 사람에 대한 절절한 애도가 전쟁 중에 큰 호소력 을 발휘한 것이라고 보인다.

4.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 호전적 사회의 전쟁에 대한

태도

전쟁 중 고통스러운 체험의 절절한 형상화는 이데올로기를 압도함 으로써 그 나름의 한계 내에서나마 빛을 발하는 데 비해, 전쟁이 끝난 후에 나온 노래들은 정부의 권장과 정책적 배려 속에서 만들어진 노 래들로 현실적 감동력이 줄어들면서 호전성이 강해지는 양상을 보여 준다. 전쟁이 끝난 이후 국민들은 전쟁의 후유증에 고통스러워할 뿐, 더는 전쟁 때처럼 ‘적’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적개심 넘치는 노래가 필요한 이유일 수

있다.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유신시대까지 온 국

(19)

민에게 교육된 노래들은, 지금 듣기로는 끔찍할 정도로 호전적이다.

예컨대 ‘무찌르자 오랑캐 몇 천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 길 초개로구나’,

‘무찌르고 올 테야 중공 오랑캐’ 등등의 노래들은, 곳곳에 붙여져 있 는 반공 표어나 많은 수를 차지하는 반공드라마, 반공영화, 교육용 반 공 만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경례 구호에 ‘초전박살’이나 ‘멸공’이 라는 끔찍한 단어까지를 동원하도록 하고 온 국민의 체력 테스트에 모조 수류탄까지 사용한 병영식 교육 등이 그 예이다.

겉으로 보기에 호전적이지 않은 노래들도 정치권력과 전쟁이 맺고 있는 관계는 매우 불순하다. <독립군 추도가> 같은 노래를 부르며 피 흘렸던 독립 투쟁은, 대통령 이승만의 팔순 축하 소재로 쓰인다.

1.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 / 여든 평생 한 결 같이 몸 바쳐 오신 / 고마우신 이대통령 우리 대통령 / 우리는 길이길이 빛내오 리다

― <우리 대통령> 1절(1954,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군가풍의 노래는 지속적으로 생산되 고, 그중 상당수가 군대가 아닌 일반 대중 사이에서 널리 불렸다. 군가 풍 노래의 끊임없는 생산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말해준다.

이른바 건전가요로 분류되어 상업적 이윤 체계와는 무관하게 정치적

논리로 생산·유포된 이들 군가풍의 노래는, 전쟁터의 생생한 경험이

사상된 채 구호적인 특성을 강화하고 있다. 군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

었으나 , 군대를 넘어서서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유포된 이러한 노래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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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 조국의 이름으로 임들은 뽑혔 으니 /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다 해도 / 한결 같은 겨레 마음 임의 뒤를 따르리라 / 한결 같은 겨레 마음 임의 뒤를 따르리라

― <맹호들은 간다> 1절(1965, 유호 작사, 이희목 작곡)

그나마 월남전이라는 실제의 전쟁이 전제가 된 이 노래는 이 시기 같은 부류의 노래 중 가장 강한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물론 이것이 앞서 이야기한 <전우야 잘 자라>에 비하자면 훨씬 선동적이어서,

“조국의 이름으로 임들은 뽑혔으니” 같은 빛나는 대목도 국가의 이익 이라는 명분으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밀어내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 가온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면 일반적인 대중가요에서 전쟁 자체가 소

재로 채택된 노래는 크게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드라마나 영화 주

제가였던 <빨간 마후라> (1962) , <성난 독수리> (1965) 같은 노래들

에서 간접적으로만 나타날 뿐인데, 이들 노래에서도 그나마 육군의

전투가 보여주는 치열함은 크게 떨어진다 . 이 두 노래 모두 공군 소재

의 노래로, 첨단의 기계장치를 다루는 제트기 조종사의 질감은 피와

흙이 범벅된 군복을 입은 채 시체 위에서 뒹구는 육군 보병들의 질감

과는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전쟁의 비극과 분단으로 인한 실향에

가슴 아파하는 트로트 가요의 인기는 이미 1950년대 중반을 계기로

절정을 넘어서서 이후에는 몇 편의 인기작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전

반적으로 크게 세가 꺾였다. 1960년대는 휴전이 된 지도 7, 8년이 지

난 이후이고, 정권조차 몇 번씩 바뀐 뒤였고, 대중가요의 경향 역시

트로트와 신민요 중심의 이전 경향에서 미국식 가요인 팝이 주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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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하는 등 대중의 취향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던 때였다 . 1960년대 대중가요에서 전쟁 소재가 크게 줄어든 대신, 군인은 지 속적으로 등장한다. 이 시대에 주목할 만한 것은 명랑하고 발랄한 군 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

1. 신병 훈련 육개월에 작대기 두 개 /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김 일병 (헤이 브라보 김 일병) / 기상나팔에는 투덜대지만 (헤이 브라보 김 일병 ) / 식사시간에는 용감한 병사 / 신나는 휴가 때면은 서울의 거리는 내 차지 / 나는야 졸병이지만 그녀는 멋쟁이 / 백발 백중 사수에다 인기도 좋아 (헤이 브라보 핸섬 보이) / 육군 김 일 병 님 용감한 병사

― <육군 김 일병>(1967, 정민섭 작사·작곡, 봉봉사중창단 노래)

1. 치마를 둘러 입고 총칼은 안 들어도 / 나라 위해 일어섰네 여군 미스 리 / 국방색 치마는 미니스커트 / 제비 같은 그 모습이 정말로 예뻐요 / 눈웃음이 매력적인 여군 미스 리

2. 기관총 소리 같은 타자기소리 / 적을 향해 두들기는 여군 미스 리 / 작대기 한개 달고 생긋 웃으면 / 화장 안한 그 얼굴이 더욱 더 예뻐요 / 주근깨가 인상적인 여군 미스 리

― <여군 미스 리>(1968, 황우루 작사·작곡, 이씨스터즈 노래)

이런 노래가 대중가요로 나올 수 있는 시대가 1960년대였다. 군인

이라는 소재는 이제 전쟁의 맥락을 떠나 국민의 일상공간으로 들어왔

다. 전쟁이 끝난 후 10여 년도 더 지난 이 시대에 군인은 이제는 죽음

의 비장감을 수반하지 않아도 되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군인이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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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 관심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거나 포악하거나 나쁜 존재여서도 안 되었을 것이다. 군인이 멋지고 친근하고 성실한 애인처럼 받아들여지 는 것 , 그것이 이 시대의 체제순응적 대중가요의 선택이었다. 이들 노 래는 더는 비장한 엔카조로 지어지지 않았고, 1960년대 발랄한 팝의 분위기로 소화되었다.

대중가요의 양식은 변해도 이러한 1960년대 건전가요적 대중가요 의 본질은 여전했다. 한국 록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신중현의 노래들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이제야 돌아왔네 /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모두가 기다렸네 / (중략) / 말썽 많은 김 상사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 상사 / 동네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 (중략) 뽐을 내는 김 상사 돌아온 김 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1970, 신중현 작사·작곡, 김추자 노래)

월남에 갔다가 돌아온 군인을 철들고 의젓해진 멋진 남자로 그리면

서, 전쟁의 비극을 멋진 군인의 매력에 대한 즐거운 매혹으로 해소해

버리는 이 노래는, 당시 히트 제조기라 할 만한 신중현과 김추자 콤비

의 힘으로 매우 큰 인기를 모았다. 미국과 서구권에서 록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색깔이 반전 , 더 구체적으로는 월남전 반대이었음을 생각

하면 ‘한국 록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신중현의 작품에서 나타난 이러

한 모습은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그러나 당시 신중현이 청년문화적

성격이 강한 포크에 비해 주류적 보수성을 훨씬 더 지니고 있었음을

(23)

생각하면

7)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발랄하고 명랑한 군인의 모습은 , 모두 당대 최첨단의 대중가요 양식으로 창작되었다는 점이다. <육군 김 일병>,

<여군 미스 리>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주류를 차지한 팝 의 양식이며,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팝의 경향을 지니고 있 으면서 이보다 더 새로운 록적인 색깔을 첨가한 작품이다 . 이런 노래 들이 대중가요 양식의 흐름으로 볼 때에는 상승하는 경향과 결합해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는 이들 노래가 다분히 정부의 의뢰에 의해 작곡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 곡의 노래 모두 박정희 정권 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떨어지기 시작했던 두 번째 집권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 아직까지는 상승하는 대중가요 경향과 결합하고 상당한 인기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이들 내용은 대중적 설득이 가능 한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이렇게 군인이나 전쟁 소재의 노래가 대중가요의 상승하는 경향과 결합하고 대중적 인기도 얻는 현상은 1970년대에 이르면 거의 사라진다.

그러나 이는 지배문화로서의 보수성을 지닌 대중가요 영역에서의 현상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시기야말로, 군대에서는 구전 가요 “소령 중령 대령은 찝차 도둑놈 / 소위 중위 대위는 권총 도둑 놈 … ” 같은 구전가요가 출현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대중매체의 시장 안에서 공식화되지 않았으므로 검열 등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이 구전 가요에서 , 군대는 계층화된 부조리의 온상이며 성적 욕망을 비롯한 일상적 욕망이 억압당하는 곳이다. 군대가 전쟁의 맥락에서 벗어나면 서 어떤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비춰졌고 어떻게 체험되었는지, 검열과

7) 이영미, 󰡔한국대중가요사󰡕, 민속원, 2006, 265~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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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적 이윤구조 속에 있는 대중가요와 그와는 무관하게 만들어지고 불린 구전가요는 전혀 다른 응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5. 1970, 1980년대 , 전쟁과 분단에 대한 최초의 반성

1970, 1980년대에서 전쟁이나 그 결과로 빚어진 분단을 다룬 노래 의 양상은 상당히 복잡하고 다기하다. 군인 출신 대통령의 강압적인 통치가 이어지는 한편 이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이에 저항하 는 전후 세대들이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 따라 서 식민지시대에 전쟁 소재의 노래를 조명하기 위해서 대중가요만이 아니라 독립군가를 살펴보아야 했듯이, 이 시기 전쟁과 분단이라는 다분히 정치적 소재에 대한 노래적 형상화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대중 가요만이 아니라 민중가요라 통칭되는 하위문화적 노래까지 살펴보 아야 한다.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전쟁과 분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싹튼 것은 1970년대의 포크송에서부터이다. 1970년대 청년문화 바람은, 해방 후 세대, 전후세대가 청소년기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이들은 이전 세대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미국식 자유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세대였다. 어릴 적에 4·19를 겪고, 분단의 동족상잔의 피해 를 보기는 했으나 전쟁 당사자로서의 증오는 적은 세대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들 세대로부터 비로소 전쟁을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8)

8) 같은 책, 223~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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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단지 세대만의 문제는 아니며, 포크송을 주도한 대도시 의 고학력 중산층 청년이라는 계층적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록이나 트로트 계열과 달리 , 포크송을 만들고 부른 담당자들은 대중가요계에 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적은 자유로운 아마추어였으며 대 학의 분위기에서 자연스레 체득한 반정부적 태도와 의식 (그 심도는 천 차만별일지라도) 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이를 동경하는 인문계 고등 학생들까지 이들의 문화권으로 흡수되었다.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미국의 청년문화는, 우리 대중가요에 늘 빙 산의 일각만큼만 보여질 수 있었다 . 반전적 의미를 지닌 대표적인 미 국 모던 포크의 대표작 <꽃들을 어디로 갔나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 <세찬 비가 내린다 (Hard rains gonna fall) >는 봉봉사중창단의

<들에 핀 꽃들은 어디로 가나> (1966) , 이연실의 <소낙비> (1973) 로 번역 ·번안되는 과정에서 그 반전적인 내용이 거의 훼손되었다.

9)

미국 등 외국에서 들어오는 노래 중 반전적인 내용을 지닌 노래들은 모두 금지되었다. ‘반전’은 당연한 금지 사유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의 포크송이 노골적으로 사회비판적 내용을 드러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 김민기 등 극소수의 확신 있는 창작자에 의해서만 ‘저질러질 수 있는’ 일이었다.

1. 꽃밭 속에 꽃들이 한 사람도 없네 / (후렴)오늘이 그날일까 그날이 언제일까 / 해가 지는 날 별이 지는 날 / 지고 다시 오르지 않는 날이

2. 싸움터에 죄인이 한 사람도 없네 / (후렴)

9) <들에 핀 꽃들은 어디로 가나>의 한국어 가사에는 원작에 있는 ‘군인’을 언급한 내용이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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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1, 2절(1971, 김민기 작사·작곡·노래)

1.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 먼 옛날 그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 어느 맑은 여름 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 고 /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 (하략)

― <작은 연못> 1절(1972, 김민기 작사·작곡, 양희은 노래)

3. 밤거리엔 낯선 사람들 떠들면서 지나가고 / 짙은 화장의 젊은 여인 네들이 길가에 서성이네 / 작은 별들이 하나둘 흩어지더니 하늘 끝으로 달아나 / 오늘 밤에는 무슨 꿈을 꿀까 아무것도 남지 않았네

― <기지촌> 3절(김민기 작사·작곡)

인간 세상의 분쟁이 얼마나 모두를 망가뜨리는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죄 없는 사람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도록 만드는 어리석은 일인가를 느끼게 하는 이들 가사는 , 한국대중가요사의 맥락에서 보자 면 돌연변이나 다를 바 없는 돌출적 작품들이다. 또한 전쟁을 통해 한국에 남겨진 미군부대가 만들어내고 있는 미군 상대 성매매에 대한 반성적 성찰 역시 (양공주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던 1950년대도 아 니었으므로) 1970년대에는 합법적인 음반 발표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 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대중가요권 안에서 김민기가 ‘저질러 놓은’ 이 성과는, 한국대중가

요계의 한계 때문에 그 안에서는 거의 계승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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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된 권위주의적 정권 아래에서 대중가요 활동을 하면서 먹고살 작정 을 한 사람이라면 이를 계승한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일 수밖에 없 었기 때문이다.

한편 1960년대에도 전쟁과 군인에 대한 대단히 우호적인 노래의 창작과 유포를 부추겨온 정부는 , 이 시기에도 마찬가지의 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노래의 양상은 상당히 달라졌다. 즉, 이 시대 에 지배이데올로기를 반영한 노래들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거나, 적어도 대중가요사의 상승하는 경향과 결합하지 못한 낡은 흐름 속에 놓여 있었다.

즉, 1960년대까지 대중가요사의 상승하는 젊은 경향과 결합하여 그 럭저럭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육군 김 일병>이나 <여군 미스 리>

같은 노래는 더는 나오지 못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유지 되었던 1960년대와 달리 1972년 10월 유신으로 삼권분립이나 정당정 치 같은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원칙도 무너뜨린 1970년대의 강압적 정치상황은, 노래에도 반영되었다.

1. 백두산에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 한라산에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 / 무궁화 꽃 피고 져도 유구한 우리 역사 / 굳세게도 살아 왔네 슬기로운 우리 겨레

― <나의 조국> 1절(박정희 작사·작곡)

노래 가사에 전쟁의 흔적이나 호전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한 구호성과 전형적인 엔카의 단조5음계로 만들어진 일본 군가 분

위기의 이 노래는 , 유신시대의 사회 분위기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노래 중 하나이다 . 간선제로 선출되고 삼부 권력을 모두 장악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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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집권을 꿈꾸었던, 총통이나 다를 바 없는 제왕적 대통령이 직접 만든 노래로서 공적 행사는 물론 매일 방송 시작 때마다 애국가 다음 순서로 연주된 이 노래는, <육군 김 일병>이나 <여군 미스 리>,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는 물론이거니와 <빨간 마후라>가 지 녔던 약간의 여유로움과 유머조차 허락하지 못하고 있다 . 이는 이 시 대 권력이 요구하는 수준과 수용자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 사 이의 절충점이 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 권력은 설득과 공감이 아니라 강요와 억압으로만 대중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고 노 래는 당대 대중가요의 유행을 선도하는 젊은 수용자들의 취향이나 경 험을 수용하지 못하고, 과거회귀적인 음악과 권위주의적 계몽성으로 가득 찬 가사가 결합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 젊은 대중에게도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노래를 창작 하고자 하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군대에 징집된 조영남이 직접 작사하고 부른 <이일병과 이쁜이> (1971) 같은 노래가 그런 예이다 . 비록 음악적으로는 행진곡풍의 노래이기는 하지만, 조영 남이라는 젊은 수용자의 지지를 받고 있는 가수와 그가 지은 다소 해 학적이고 리얼리티가 있는 가사와 조영남의 군 입대라는 현실 맥락과 의 교섭 등이 약간의 대중적 인기를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10월 유신을 계기로 점점 사회가 경직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접점은 점점 찾기 힘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1975년 대마초 사건으로 검거되기 몇 달 전에 출반한 신중현과 엽

전들의 2집 음반은 이러한 접점 찾기의 실패를 여실히 보여준다. 1974

년 <미인>을 들고 나와 록밴드의 연주를 텔레비전 안의 인기로 성공

시킨 신중현과 엽전들은, 그 다음해의 2집에서는 대중가요의 관행과

는 전혀 달리 ,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노래가 모조리 제거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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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이 음반에는 <산아 강아> 같은 국토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 과 <지키자>, <뭉치자> 같은 다소 호전적이고 선동적인 노래들이 실려 있다. 이 음반에 수록된 작품 중 당시에는 그다지 크게 돋보이지 는 않았지만 오래도록 살아남은 수작 <아름다운 강산>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신중현이 결성한 더 멘 (The Men) 의 목소리로 1972년에 발표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시기에 정부의 요구에 의해 급작스럽게 만 들어진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지만, 이 음반 속에서는 <산아 강아>와 함께 애국심을 표 나게 드러낸 일종의 건전가요로 배치된 셈이다. 하 지만 이 작품은 당시 정부에 의해 건전가요로 인정받고 널리 홍보되 지는 못한 듯하다. 그와 함께 들어 있는 <지키자>, <승리의 휘파 람>, <뭉치자> 등은 다음과 같은 가사가 록 사운드에 실려 있다.

휘파람을 불어라 승리의 휘파람 / 우리는 이겼노라 싸워서 이겼노라 / 휘파람을 불어라 승리의 휘파람 / 발장단 맞추어 휘파람을 불어라 /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네 모두 일어나자 / 그 얼마나 우리는 기다렸나 우리의 승리

― <승리의 휘파람>

(1975, 신중현 작사·작곡, 신중현과 엽전들 노래)

뭉치자 한 덩어리로 태극기를 손에 들고 / 뭉치자 우리 모두 다 나라 위해 뭉치자 / 뭉치자 한 덩어리로 우리는 한민족 / 뭉치자 우리 모두 다 평화 위해 뭉치자

― <뭉치자>(1975, 신중현 작사·작곡, 신중현과 엽전들 노래)

가사로 보자면 당시 정부가 원하는 내용이었을 수 있으나 이런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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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가 당시 록이나 포크 취향의 젊은이들에게 호응을 받기는 매우 어 려웠을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신중현과 엽전들의 2집 음반에서 이 곡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정부가 록 그룹을 압박하고 이에 굴복한 신중현과 엽전들이 정부가 원하는 노래 를 지어 발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처럼 어느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획득하면서 건전가요적 효용성을 발휘한 작품은 만들 어내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는 창작자의 창작력 문제라기보다는 젊은 대중들의 취향과 당시 정치권력이 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영이 접점을 이루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며, 이는 당시 정치권력이 포크나 록의 수용자인 젊은 대중들에게 동의와 설득으로 헤게모니를 획득하지 못하여 물리적 억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1970년대 중후반에 전쟁 소재의 대중가요로 약간의 인기를 얻은 유일한 노래가 허성희의 <전우가 남긴 한 마디> (1978) 인데, 음악적 으로 포크나 록 취향의 젊은이들과 공감하기 쉽지 않은 ‘올드 패션’의 작품인데다가, 가사에서도 25년이 지난 옛 전쟁을 마치 당대적인 것 으로 환기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시 중년 이상의 세대가 주 수용 자일 수밖에 없다 .

결국, 이른바 유신 말기라 불리는 1970년대 후반부터는 김민기의 노래조차 대중가요가 아닌 민중가요가 되어버렸고, 1970년대 포크가 보여주었던 전쟁과 분단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대중가요가 아닌 민중 가요의 영역으로 옮겨가 계승되었다 . 민중가요는 시장과 검열 체계 바깥에서 구전이나 공연·교육 등을 통해 확산된 민중가요 문화는, 이 렇게 극도로 억압적인 정치적 환경이 오히려 성장의 조건이 되었다.

북진통일의 논리로 가르쳤던 동요 <우리의 소원>은 수십 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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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입을 통해, 평화통일의 노래로 재해석되었고, 김민기의 금 지된 노래들과 발표되지 못한 노래들도 대학가에서 꾸준히 불려졌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대중가요는 전쟁이나 분단에 대한 이렇다 할 만한 진전된 형상화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오로지 민중가요권과 관련 을 맺고 있던 돌 , 김원중 등의 <터>, <직녀에게> 등만이 유일하 게 대중가요로서는 평화통일에 대한 바람을 드러내었다.

<터>, <직녀에게>가 검열을 통과하고 대중가요로 발표될 수 있 을 정도의 작품이라면, 검열과 무관하게 오로지 민중가요 수용자들에 게만 향유된 노래에서는 본격적으로 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싹트 고 있었다.

제국의 발톱이 이 강토 이 산하를 / 할퀴고 간 상처에 성조기만 나부 껴 / 민족의 생존이 핵폭풍 전야에 섰다 / 이 땅의 양심들아 어깨 걸고 나가자 /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이 목숨 다 바쳐 / 해방의 함성으로 가열 찬 투쟁으로 / 반전반핵 양키 고 홈

― <반전반핵가>(1987, 박치음 작사·작곡)

이러한 노래는, 1986년 이후 이른바 반외세자주화를 주장하는 학생

운동의 정파가 큰 호응을 얻으면서 광범위하게 불려졌다 . 한반도의

분단이 미국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며 한반도가 결코 핵전쟁으로부

터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이들 노래는 , 검열의 힘

도 상업적인 논리도 미치지 않는 공간에서 오로지 수용자들의 선택에

의해서만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정부가 대중매체와 교육을 통해

유포한 건전가요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 이들이 과격성은 오히려 독립

군가류가 보이는 과격성과 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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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노래는 대중가요와는 전혀 다른 맥락의 노래들이다.

특히 이 시기 6·25전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노래로 발표되기 시 작한다.

눈보라 몰아치는 저 산하에 떨리는 비명소리는 누구의 원한이랴 죽 음의 저 산 / 내 사랑아 피 끓는 정열을 묻고 못 다 부른 참 세상은 누구의 원한이랴 침묵의 저 산 / 지리산 (남겨진 상처를 가슴에 보듬어 안고서 ) 일어서는 저 산 지리산

 

(못다 한 사랑을 목 놓아 노래하라) 지리 산

 

/ 반란의 고향

―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1988, 안치환 작사·작곡,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

반공이데올로기의 균열이 확연한 이런 노래들은 , 6·25 시기 지리산 의 빨치산 투쟁 역시 (그 역사적 평가야 어떻든 간에) 그 시대 젊은이들이 제 나름대로의 신념과 열정적인 애국심에 의해 목숨을 바친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인식과 동반하는 것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애국의 길> (1989) , <서울에서 평양까 지> (1991) 등 매우 많은 통일 관련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노래 중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서울에서 평양까지>를

비롯하여 <백두산>,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남누리

북누리 > 등 몇몇 노래들은, 합법적 공연이나 음반 심의 기준에 맞춘

약간의 ‘가위질’을 거쳐 대중가요의 공간에까지 유포되었다.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얻어진 약간의 민주적인 분위기는 이를 가능하게

한 정치적 조건이 되었다. 이렇게 불린 노래들은 그 시기 정태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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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가수들의 변화를 유도했으며, 1990년대 이후 새로운 대중가요의 변화에 적지 않은 자극제로 작용했다.

6. 1990년대 이후 , 신세대 가요의 자유로움과 반미 ·반전의

대중화

1992년경부터 시작한 1990년대 신세대문화는 1980년대까지 민족 민주운동의 당위가 만들어내는 경직성으로부터의 탈출을 그 특징으 로 하지만, 바로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성과로 이룩된 표현의 자 유를 당연한 기본권으로 여기는 특성 역시 지니고 있었다 . 이들은 이 미 1980년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이 민중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단 어를 상업적 대중음반으로 출반하는 것이 허용된 그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세대문화를 상업적 대중문화 가 주도했던 만큼 신세대 가요 역시 사랑타령 중심의 노래가 태반을 이룰 수밖에 없었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현실에 대한 대담한 표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창작자뿐 아니라 수용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즉

사랑타령으로 일관하는 대중가요의 획일성에 비판적임으로써 다소

사회비판적이거나 문명비판적이거나 자아성찰적인 방향으로의 내용

의 다양화가 대중가요의 발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여기는 비판적 수

용자들이 1980년대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즉 그간 민중가요의

향유자들은 대중가요에 대한 비판적 수용자들이었고, 이들은 텔레비

전과 라디오의 인기 판도와 구별되는 자신들의 인기곡들을 축적해나

갔으며, 이로써 대중가요의 인기 판도에 영향을 미쳤다. 강산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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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요>가 거둔 예상치 못한 인기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1.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보지는 못했지만 / 그 노래는 너무 잘 아는 것 내 아버지 레퍼토리 /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 고향 생각나실 때면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고 / 눈물로 지새우시는 내 아버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 꼭 한 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라구요

― <라구요>(1992, 강산에 작사·작곡·노래)

이 노래는 통일을 이야기하려면 뭔가 엄숙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고 정관념을 깨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사실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 에 그분들처럼 눈물 흘리고 가슴 아프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 하면서 아버지 세대의 슬픔에 장난기 섞인 거리두기를 잃지 않으면서 도, 절정부에서는 그 부모 세대의 아픔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보여주 고 있는 수작이었다. 이 노래는 라디오나 콘서트 등에서 처음부터 인 기를 얻은 것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대학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대중매체에서 인기를 얻었던 <예럴랄라>, <할아버 지와 수박> 등을 넘어서서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대중가요계에서 평화적 통일이나 사회비판적 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온하다는 취급을 받으며 자신을 위험에 빠 뜨리는 짓이었지만, 1990년대에 그런 노래는 창작자와 가수를 이른바

‘의식 있는 작가’의 이미지를 만드는 필수요건이 되었다. 록의 생명이 저항성이라는 새로운 인식

10)

은, 이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

10) 임진모의 책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민, 1996) 등 외국 대중음악에 대한 새로운 소개서는 이러한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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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어찌 보면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조차 그들의 놀라운 기획력으로 통일을 노래하는 <발해를 꿈꾸며> (1994) 를 발표 하기에 이르는 것은, 이 시기 대중가요, 특히 신세대 록 등의 음악이 저항성과 진보성을 지녀야 한다는 수용자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였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그런 점에서 이 시기의 대중가요계에서 나온 통일에 관한 노래들은 진정성이나 인식의 깊이보다는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 우리의 근현대를 통틀어 전쟁과 분단 문제에 대해서 이런 내용으로 노래한 작품이 이토록 대중적이었던 시기는 없 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의 노래가 대중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언 급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금기의 영역으로 과감히 들어가는 작 품도 적지 않다. 예컨대 이런 작품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나를 봐 내 작은 모습을 너는 언제든지 웃을 수 있니 / 너라도 날 보고 한 번쯤 그냥 모른 척해줄 순 없겠니 /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 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 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 이야

― <왼손잡이>(1995, 이적 작사·작곡, 패닉 노래)

이는 신세대 대중가요에서 자주 다루어온 다양성에 대한 인정, 획

일성의 강요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

해보면,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어지럽힌다고’,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 같은 구절들은 오른손과 왼손의 표면적 의미로만 이해하기에는

과한 표현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서 왼손잡이는 좌파적 사상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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