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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 외래화장품(박래품)의 수입

1.근대 이후 화장의 모습

▣ 1900~1930년대

강화도 조약(1876년)에 따른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는 신식 메이크업 테크닉 과 화장법이 물밀 듯 밀려 들어왔다. 재래의 미용법, 화장품, 그리고 화장품 의 제조 유통방식은 새로운 화장품과 화장법으로 변화되었다. 재래에 화장품 을 팔던 육의전이 붕괴되면서 화장품을 판매하던 분전은 그 기능을 상실하 게 되었다. 육의전 붕괴 이유에는 외국으로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수입상품의 영향도 컸는데, 처음에는 주로 일본과 청나라로부터 유입되었으나 한일합방 이후 1920년대에는 프랑스를 주로 한 유럽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수입화장품 은 주로 크림, 백분, 비누, 향수 등이었는데 포장과 품질이 우수하여 여성들 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상품의 한 예가 박래품인데, 하지만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가격도 높았기 때문에 거의 상류 여성층에게만 사 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916년에 등장한 국산 최초의 관허 1호 화장품

‘박가분’은 저렴한 가격과 잘 발라진다는 특성 등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22년에는 정식으로 제조 허가를 받아 '박가분제조본포'라는 이 름으로 등록허가를 받기도 했다. 박가분의 성공으로 잇따라 미용백분과 서 울분 배달 기름(머리), 연부액(미백로션), 유액(로션), 연향유등도 시판되었다.

하지만 박가분은 납 성분이 들어있어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고, 또한 1920년 대 말부터 국내로 밀입된 일본의 고급 화장품에 밀려 결국 1937년 박가분 은 사라졌다. 그 후 여성 일본 유학생 오엽주가 종로 화신 백화점에 처음으 로 미장원을 개업하고 새로운 메이크업 테크닉과 바니싱 크림 (흡수가 잘 되 는 크림, 무유성 크림) 등의 신식 화장품을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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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도입된 신식 화장법은 입술연지의 색깔이 진해지고 향수와 비 누향내가 강렬했다. 이 시기의 신여성은 짧아진 치마의 길이와 하이힐을 신 고 양산을 든 차림으로 대표되었다. 하지만 이런 신여성의 화장과 옷차림은 기생과 접대부에 의해서 먼저 유행되었고, 화장품 또한 그러했다. 일부 신 여성의 자유연애 예찬으로 빚어진 비난 때문에 여염집 여인들은 종전보다 더욱 엷은 화장을 선호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1930년대 말 일 본 유학생 오엽주에 의해 입술연지를 아랫입술에만 빨갛게 바르고 눈썹 을 초승달 모양으로 그리는 화장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 1940년대

1945년 8.15 광복을 계기로 한국의 화장품 산업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제 화장품은 사라지고, 일제 말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화장품업자 김 동엽의 동방화학은 에레나랑 상표로 바니싱 크림등을 만들어 냈고, 이밖에도 모나미 크림, 스타 화장품 등의 국산 화장품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8.15 직 후, 원료가 부족해지고 일본인들의 철수로 제조 회사의 규모가 작아진데다가 6.25와 같은 수차례의 전쟁으로 생활고는 심해졌으며, 물가까지 치솟아 화장 을 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1945년 8.15 해방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화장품 산업은 일시적으로 퇴보를 보였으며, 6.25 이후 수입 화장품, 밀수 화장품, 미군 PX 유출 품이 범람하였다.

1940년대 이러한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화장은 끊임없이 유행을 만들었다.

1940년대에 외국에서 도입된 현대식 화장법은 얼굴을 희게 하고 눈썹은 반달 모양, 볼연지와 붉은 입술을 하는 것이다. 해방 후의 화장 기법은 피부는 번들거리고 눈 화장은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로 강조함으로서 강 조한 눈 화장 부분에 포인트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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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 탐방(화장 박물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망교회 인근에 있는 화장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화 장문화의 역사적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여성 관련 민속품 5천여 점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코리아나 화장품의 창업자가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유물을 일반에게 보여주려고 마련한 자리로 화장품 회사가 단순히 화장품을 파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런 박물관을 세웠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장역사는 삼국시대부터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출토유물과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 것입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모습 은 연지로 단장한 뺨과 입술, 다양한 형태로 다듬은 눈썹을 하고 있어, 고구 려 때는 기초화장과 더불어 색조화장까지 했다고 보겠습니다. 일본의 엣 문 헌인 <화한삼재도회>는 일본인들이 백제로부터 화장품의 제조기술과 화장 기술을 익혀 비로소 화장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신라에는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의 발현으로 청결한 몸과 치장을 중 요하게 여겨 화장 기술이 상당 수준 발달했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의 화장문 화는 고려로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고려 초에는 제도화된 기생들을 중심으로 하얗게 분을 바르고, 눈썹은 가늘고 또렷하게 그리고, 머릿기름을 많이 쓰는 분대화장이 성행을 했답니다. 반면 귀부인들은 얼굴에 많이 바르는 것을 좋 아하지 않아 분만 바르고 연지를 쓰지 않으며 버들잎 같은 눈썹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인들은 비단 향낭을 차고 다녔는데 심지어 조 정향이란 것을 먹기도 했답니다. 1728년에 나온 <청구영언>에 보면 ‘백발에 화냥노는 년이...센 머리에 흑칠하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고려 말엽에 이미 머리 염색이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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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화려해지던 화장문화는 조선으로 접어들면서 검소하고 실리를 강조하 던 유교 윤리에 따라 외면의 아름다움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부덕이 강조되어 깨끗하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을 부용으로 여겼 습니다. 궁녀나 기생은 화려한 화장을 했지만 사대부 여성들은 특별한 나들 이 때만 엷은 색조의 은은하고 수수한 화장을 했고, 복숭아 색의 분을 사용 하여 흰 분을 바르는 기생들과 구분되고자 했답니다.

강화도조약(1876)에 따른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는 신식 화장법과 화장품이 유입되었습니다. 주로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던 화장품은 한일합방 이 후 1920년부터 프랑스를 비롯 유럽까지 확대되었는데, 품질이 우수했던 백 분, 크림, 비누, 향수 등이 많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박래품이란 말을 기억하 시는지요. 그런데 이런 박래품은 가격이 비싸 기생들이나 상류층 여성들만 사용했고 일반 서민들은 구경하기조차 힘들었지요. 수입 화장품자극을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인 박가분이 등장을 합니다. 1916년에 포목전문점인 박승직 상점에서 제조, 판매한 것으로 여성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 니다. 그 당시 동아일보에 광고도 냈는데 ‘조선 사람은 조선 것을 아무조록 만니 씁시다’ 라는 광고문안을 냈습니다. 국산 제 1호 박가분이 성공하자 서 가분, 장가분 등이 나오고 서울분, 설화분 등이 연달아 나왔습니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얼굴 모습과 단정한 몸가짐을 미덕으로 삼았던 우리 전 통 화장문화는 세정제와 미안수, 면약과 화장유 같은 기초화장품의 발달을 가져왔습니다. 세정제는 콩, 팥, 녹두를 갈아서 사용했는데 미세한 거품을 내 는 사포닌 성분이 묵은 때와 잡티를 제거해주는데 효과적이었습니다. 요즘 화장수라고 부르는 것은 순수한 우리말로 미안수라고 하며 면약이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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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인데 원래는 피부의 동상을 막기 위해 겨울철에 주로 쓰던 것이 차츰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햇볕에 그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 었습니다. 살구씨와 복숭아씨 기름은 기미 주근깨를 제거하는 미백 효과가 있지요. 희고 화사한 피부를 위해 분을 빼놓을 수 없는데 쌀이나 분꽃씨 등 으로 만든 백분은 물에 개어 바르고 잠시 있어야 하기에 이것을 보완한 연 분을 많이 썼는데 이것은 납성분이 있어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초생달처럼 가늘게 그리는 눈썹화장에 사용된 미묵의 재료는 꽃잎을 태운 재나 목탄인데 재료에 따라 검은색, 짙은 밤색, 검푸른 색 등 다양해서 현대 에 뒤지지 않습니다. 연지는 주사와 홍화로 만든 화장품으로 주술적인 목적 에서 시작되어 평상시에는 볼과 입술에만 하다가 혼례 때는 이마연지(곤지) 까지 찍었습니다. 향은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종교적 의례나 맹세할 때, 부 부 침실에도 피웠고 남녀노소 관계없이 향낭을 차고 다녔는데 정향, 향부자 등에서 비싼 것은 사향까지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화장품들은 소량으로 직접 제조하였기 때문에 화장품 용기도 작고 앙 증맞은 크기였고, 청자, 백자와 같은 도기류는 직사광선, 온도, 습도에 민감 한 화장품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머릿기름이나 화장 유를 보관하는 자기병은 입구를 좁게 만들어 향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했고, 다섯 개의 작은 분합을 만들어 큰 화장 용기 안에 넣은 청자함도 아름답습 니다. 화장을 하기 전에 백분의 부착력을 좋게 하기 위해 얼굴의 솜털을 제 거하는 족집게도 있고, 남자들이 망건을 쓸 때 빠져 나온 귀밑 머리털을 망 건 밑으로 집어넣는데 사용한 살쩍밀이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복식의 특징은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인데 그러자니 비녀와 뒤꽂이가 대 표적인 장신구가 되었습니다. 비녀는 의복과 계절에 따라 다른 것을 사용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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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여 봉황잠은 왕비만이 꽂을 수 있었고 머리 위 가 르마를 꾸미는 첩지 역시 신분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전통 한국 의복은 대부분 끈으로 옷을 여몄으며, 마고자 조끼에는 단추를 사 용했는데 수단추를 암단추에 끼우거나 한쪽에만 수단추를 달아 단추 구멍에 끼우는 형식도 있습니다. 여성의 매무새를 아름답게 꾸미는 노리개는 금이 나, 은, 호박, 산호, 마노 등을 매듭과 술을 달아 늘어뜨리는데 옷고름이나 허리에 찼습니다. 하나로 된 것은 단작노리개, 세 개가 한 벌인 것은 삼작노 리개라고 하며 대단히 화려합니다. 장도의 패용은 고려시대에 몽고에서 전해 진 풍습으로 장도에 달린 은젓가락은 휴대용으로 사용하거나 음식물의 독성 유무를 판단하는데 썼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혜공왕은 비단주 머니 차는 것을 좋아했다는군요.

이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화장 중심의 유물을 모아놓은 것이기에 참 아름답습니다. 이런 유물을 무려 5천 점이나 소장했다니 박물관을 아니 할 수가 없겠다는 소감으로 우리나라에 이런 민간 차원의 박물관이 모쪼록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이 박물관 1층에는 아주 조용한 Cafe가 있어 관람후 쉬면서 정다운 사람과 담소를 나누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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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수정(2005). 「한국미용100년」. 동서교류

문화원형 백과사전(2011). 다음백과사전. 다음케뮤니케이션.

브리태니커(2011). 다음백과사전. 다음케뮤니케이션.

손미경(2005). 「한국 여인의 髮 자취」. 이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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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진(2005). 「미용문화사」. 광문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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