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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중엽 西北史地學 발흥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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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문초록❙

중국 국내외에서 청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연구가 확대되는 가운데 청대 중기 즉 18세기 말 19세기 초 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도 제기되고 있다. 필자는 이런 새로운 시각과 관련하여 청대 중엽에 서북 사지학연구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사실과 그 의미를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본고에서는 그 전제 작업으로서 배경적 측면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요점을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18세기 중엽 신강정복으로 중국의 영토가 크게 확대되었 으며, 이에 고무된 만주족 지배층은 적극적으로 그 것을 역사상 유례없는 대일통의 위업으로 강조하며 대내적 으로 과시하고자 하는 가운데 대규모의 관련 편찬사업이 추진되었다. 정복과정에 관한 기록으로서의 󰡔평정준 가르방략󰡕 외에 신강지역 이해를 위한 󰡔서역도지󰡕, 󰡔서역동문지󰡕가 편찬되었고, 나아가 신강지역을 중국의 영 역으로 새롭게 확정한 「건륭내부여도」, 󰡔건륭일통지󰡕 등도 간행되었다. 이에 따라 종전에는 禁區였다고 할 수 있는 청대사와 변경문제에 대한 한인 관료 지식인층의 관심과 지식도 점차 확대되고 나아가 현지의 사정에 관 한 기행문들도 늘어나면서, 청조의 위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건륭제는 유관 서적편찬사업과 관련하여 좀 더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청조 중국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황제 자신이 최종 재정권을 행사하여 민간 야사나 사사를 관사로 흡수하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충의의 관점에서 명청교체기의 역사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며 사가법등 명 조 순절자를 포상하고 󰡔승조순절제신록󰡕을 간행케 하였다. 그 과정에서 건륭제는 명의 멸망시기를 이자성군에 의한 북경함락이 아니라 청조에 의해 남명의 복왕이 사로잡힌 순치 2년으로 설정하며, 사실상 명청교체를 천 명에 따른 역성혁명으로 선언하였다. 이후 󰡔사고전서󰡕 편찬 과정에서 역대왕조의 정통문제가 부각되자, 건륭 제는 대일통의 관점을 표준으로 해야 한다며 요 금은 중원을 장악하지 못했으나 원은 ‘중화의 주’가 되어 송의 정통을 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청조 중국지배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당당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건륭 말년에 들어 그 간 응축되었던 문제들이 다방면에서 분출하면서 심각한 정치 사회적 혼란이 확 산되기 시작하였다. 백련교난, 묘족의 난 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청조체제가 자칫하면 급전직하 막다른 붕괴의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건륭제 사후 이른바 가경신정이 추진되면서 대대적인 인사개혁과 함께 군기처 내무부 등 핵심권력 기구의 정비가 진행되고, 언로개방의 상유가 거듭되는 가운데 중하위 한인관 료와 사인층의 정치적 참여와 활동영역의 확대가 현저하게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청대 중엽 西北史地學 발흥의 배경*

33)

최 희 재**

* 이 연구는 단국대학교 2013년 대학연구비의 지원으로 수행되었음.

** 단국대학교 교수 / hjchoi@dankook.ac.kr

(2)

18세기에 인구가 급증하게 됨에 따라 과거를 준비하는 한인 지식인들도 크게 늘어 경쟁은 더 치열해 지며 인재적체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으나, 앞서 언급한 중앙정부 주도의 대규모 문화편찬사업이 어느 정도 그 숨통을 열어 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치밀한 분석과 실증을 중시하는 고증학이 번창하게 되 었는데, 가경신정기에 지방관들과 신사층의 활동 공간이 확대되게 됨에 따라 지방지 편찬등 지역적 문화사업 도 활성화되면서 한인 사인들의 동원이 확대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관료기구 하층 또는 외연의 한인 지식인 들의 현실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개입이 확대되면서 증폭되는 현실적 위기의 근원과 해결책을 탐색하 고자 하는 경세적 학풍이 특히 경학을 현실문제와 관련하여 연구하고자 하는 금문공양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발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한인 지식인 관료들의 현실분석과 해결방안 모색이 본격화 하고,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범위와 만주족 정권의 역할 등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확대되면서 가도함 시기에 들어 신강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의 역사 지리에 대한 연구가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주제어] 서북사지학, 청조정통론, 가경신정, 청대공양학, 건륭제

❙목 차❙

Ⅰ. 머리말

Ⅱ. 新疆征服 후 관련 편찬사업과 正統論의 새로운 전개

Ⅲ. 乾隆 末 이후 정치사회적 위기와 嘉慶新政

Ⅳ. 考證學과 經世論의 발전

Ⅴ. 맺음말

Ⅰ. 머리말

康熙 雍正 乾隆帝의 통치를 거치면서 성세를 구가하던 청조는

18

세기 말 이후 점증하는 대내외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 가운데

,

결국

1842

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서구 열강과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한인들의 만주족지배체제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고

,

성세의식과 文字獄 등의 영향으로 잠복 하였던 만한갈등이 새롭게 분출된 가능성도 대두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곧 청조타도를 표방한 태평천국운동 이 일어나게 되었다

.

그러한 상황에서 이후 한인 관료지식인층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魏源은 서양 각국의 사정을 소개하는

󰡔海國圖志󰡕를 편찬하여

,

서양 오랑캐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고 그들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

1) 그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신성한 무력이라는 시각에서 청조의 성립과 발전과정을 정리한 󰡔聖

1)초간본은 1842년에 간행되었으며 이후 3차의 증보가 이뤄졌는데, 이에 대한 국내 연구로는 崔韶子, 「魏源(1794~1857)과

󰡔海國圖志󰡕」, 󰡔梨花史學硏究󰡕20-21, 1993; 김의경, 「위원(魏源)의 󰡔해국도지󰡕에 나타난 서양인식」, 󰡔中國史硏究󰡕5, 1999 등이 있다.

(3)

武記󰡕를 간행하여

,

청조 황실의 무공을 대대적으로 선양하고자 하였다

.

2)

말단 관료 지식인에 불과하였던 그가 청조체제의 심각한 위기상황에서 새삼스럽게 학술저작을 통해 청조 의 군사적 위업을 대대적으로 찬양하고자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그에게 만주족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문제 의식은 전혀 없었던 것일까

.

당시에는 이미 滿漢의 일체화가 철저하게 관철되어 중하위 관료들이나 일반 한 인 사인층도 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대한 거부감을 거의 갖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

그렇지 않다면 만한갈등이 새롭게 증폭될 가능성3)에도 불구하고 왜 일부 한인지식인 관료들이 앞장 서서 청조의 무공을 현창하고자 하였는가

?

이 같은 의문과 관련하여 필자는 당시에 크게 발흥하고 있었던 西北史地學4)에 대해 특히 그 배경과 성격 및 역사적 의의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성무기󰡕에서 서북지역의 청조 편입 찬양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만

,

당시 魏가 龔自珍

,

徐松 등과 함께 서북지역의 역사 지 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공유하면서 그것을 현실문제와 연관시키고자 하였다는 점이 주목되기 때문이다

.

중국 서북지역 역사 지리 문제는 기실 중국 국내외 학계에서 그간 많은 학자들에 의해 활발한 연구의 대 상으로 주목되어 왔으며

,

그 일환으로 청대 중엽의 서북사지학에 대한 연구도 충분히 축적되었다고 할 수 있 다

.

5) 특히 중국에서는 개혁 개방 이후 새롭게 증폭되는 소수민족문제

,

지역격차 문제 대책 등과 관련하여 서 부대개발이 추진되고

,

다민족통일국가론이 강조되면서

,

변강지역연구의 붐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 1983

년 社 會科學院 산하에 邊疆史志硏究中心

(

후에 中國邊疆硏究所로 개칭

)

이 설립되어 관련연구를 선도하는 가운데 조직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며

,

6) 그 중에서도 청대의 서북지역연구문제는 서구학계에서의 新淸史연구와 도 관련하여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

그리하여 종래 嘉道咸시기를 주목하던 청대 중엽 서북사지학 발흥의 시점문제에 대해 건륭기까지 올려 잡

2) 1842년에 간행되었으나, 준비는 이미 1820년대 말부터 시작하였다. 舒習龍, 「晚清紀事本末体史書的傑作— ≪聖武記≫ 特點 與價值」, 󰡔淮北煤炭師範學院學報(哲學社會科學版)󰡕24-5, 2003 참조. 때문에 후일 혁명파 장병린은 청조와 중국을 동일시 하며 청조의 진흥을 도모코자 한 그를 ‘媚虜’로서 통렬히 비판하기도 하였다(陳其泰, 󰡔淸代公羊學󰡕, 東方出版社, 1997, 156쪽 참조).

3)반청사상의 잠류에 대해서는 高翔, 󰡔近代的初曙, 18世紀中國觀念變遷與社會發展󰡕, 社會科學出版社, 2000, 526~541쪽; 戴逸,

󰡔乾隆帝及其時代󰡕, 中國人民大學出版社, 1992, 25쪽 등 참조.

4)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20세기 초에 梁啓超, 唐景升 등이 주목한 바가 있는데(侯德仁, 󰡔清代西北邊疆史地學󰡕, 群言出版社, 2006, 4쪽), 근년의 연구에 따르면 아편전쟁 전후의 서북사지학 관련 저작이 120여종에 달하였으며 당시 서북사지를 중심으 로 한 변강 및 역외사지 연구학자들도 48명에 이르고, 그들을 학자형 관리, 관리형학자, 순수학자형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 다고도 한다.(章永俊, 「鴉片戰爭前後硏究邊疆和域外史地的學者群」, 󰡔學術硏究󰡕2007-3, 98~104쪽).

5)근년의 연구동향은 田澍 何玉红, 「西北邊疆史地研究的回顧與反思」, 󰡔中國邊疆史地研究󰡕21-1, 2011; 勵聲 賈建飛, 「60年來 西北邊疆史地研究的回顧與展望」, 󰡔中國邊疆史地研究󰡕19-3, 2009 등 참조. 이 주제에 관한 근년의 주목할 만한 저서로는 賈 建飛, 󰡔清代西北史地學研究󰡕, 新疆人民出版社, 2010; 郭麗萍, 󰡔絶域與绝學: 清代中葉西北史地學研究󰡕, 三聯書店, 2007; 侯 德仁, 󰡔清代西北邊疆史地學󰡕, 群言出版社, 2006 등이 있으며, 그 외 그 범위를 확대하여 당시 변강사지연구에 대해 그 요점 을 정리한 것으로는 喻大華, 「論19世紀中國史學界邊疆史地研究的熱潮」, 󰡔遼寧師範大學學報󰡕1991-2; 章永俊, 「鸦片戰争前 後的中國邊疆史地研究」, 󰡔史學理論研究󰡕2004-3 등이 우선 참고할 만하다.

6)이 연구소는 계간학술지 󰡔中國邊疆史地研究󰡕를 간행하고, 중국변강망(bianjiang.cass.cn)을 운영하며 관련 연구성과를 폭넓 게 소개하고 있는데, 2003년에는 사회과학원 내에 중국변강역사계가 설립되어 변강연구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융합학문으로 서의 중국변강학 분야가 부각되고 있기도 하다.(邢廣程, 「關于中國邊疆學研究的幾個問題」, 󰡔中國邊疆史地研究󰡕23-4, 2013).

특히 청대 중엽 서북사지학의 발흥문제는 학위논문의 주제로 중시되기도 하면서, 근년들어 상당히 심도있는 연구들이 축적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吕文利, 󰡔≪皇朝藩部要略≫ 研究󰡕, 黑龍江敎育出版社, 2013 서론 참조).

(4)

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

이와 관련하여 󰡔西域圖志󰡕 󰡔西域同文志󰡕 등 서북관련 관찬사서의 역할과 영 향이 강조되기도 하는 가운데

,

다시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

7) 또 이전에는 대체로 당시의 서북 사지학연구를 주로 대외적인 위기의 증폭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고 그 반침략적

,

애국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

근년에는 인구문제 등 내부적 위기의 심화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측면이 더 강조되고 있기 도 하며

,

나아가 서북사지학이 당시의

顯學

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서 관련 학자들의 네트워크와 상호교 류 확대의 측면이 새롭게 주목되기도 하였다

.

8)

구미지역에서는 청조의 滿族的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청사연구의 확대와 관련하여

,

만주족의 신강 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정복과 통치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면서 청조 중엽의 서북지역 역 사 지리연구가 새롭게 주목되고 있기도 한다

.

9) 특히 일군의 미국학자들에 의해 선도되며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신청사연구에 대해서는 기존의 漢化論적인 시각에서의 비판 외에 이른바

3

의 길

모색의 필요성이 제 기되기도 하는데

,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연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하여 청대 중국관념 및 華夷觀의 변화 등의 문제도 새롭게 검토되고 있다

.

10)

국내에서는 당시에 西域建省論을 제기한 공자진관련 연구들11)을 제외하면

,

청대 중엽의 서북사지학 자체 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안 보이는 듯하다

.

다만 동북공정에 의해 촉발된 중국의 邊疆史地硏究에 대한 소개 분석 외에 근간의 서구 신청사연구에 대한 관심과 관련하여 본 주제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언급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이렇게 다양한 시각에서 청대 특히 嘉道咸期를 중심으로 한 시기의 서북지역에 대한 관심이 재검토되고 있는 바

,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연구의 주요 논점을 고려하면서

,

모두에 제기한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청대 중엽 서북사지학 발흥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를 천착해 보고자 하는데

,

연구의 분량문제로 본고에서는 우선 그 배경적인 측면을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

12)

7) 특히 후덕인은 󰡔서역도지󰡕 등 초기 관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흥기 시점을 올려야 한다고 하는데(侯德仁, 󰡔清代西北 邊疆史地學󰡕), 이에 대해 가건비는 그 영향이 제한적이었다고 비판하였다(賈建飛, 「論 ≪西域圖志≫ 與清代西北史地學的興 起」, 󰡔吐魯番學研究󰡕 2009-2).

8) 일반적으로 서북사지연구를 변강위기와 관련시켜온 경향이 있었는데, 곽려평은 초기에는 대일통찬양이 주선율이었으며 도 광후기 이후에야 외압과 침략에 대한 반대의 표적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郭麗萍, 󰡔絶域與绝學: 清代中葉西北 史地学研究󰡕, 2쪽). 가건비는 서송을 중심으로 한 서북사지학연구자들의 네트워크와 상호 작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賈建飛, 「論清道、咸時期的西北史地研究」, 󰡔史林󰡕 2003-4).

9) 신청사연구동향에 대해서는 김선민, 「만주제국인가 청 제국인가 ‒ 최근 미국의 청대사 연구동향을 중심으로 ‒」, 󰡔사총󰡕74, 2011 등 참조. 특히 퍼듀는 청조의 신강정복에 대한 연구에서 이후 서북사지연구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켰다(Peter C.

Perdue,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Mass., 2005, pp.497~517). 이 주제에 관한 구미권의 연구로 주목할 만한 것은 Chou Nailene Josephine, Frontier Studies and Changing Frontier Administration in Late Ch’ing China: The Case of Sinkiang, 1759~1911, University of Washington Ph.D. 1976 등이 있다.

10) 楊念群, 「超越“漢化論”與“滿洲特性論”:淸史硏究能否走出第三條道路?」, 󰡔中國人民大學學報󰡕2011- 2; Gang Zhao, “Reinventing China, Imperial Qing Ideology and the Rise of Modern Chinese National Identity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Modern China 32-3,2006 등 참조.

11) 서역건성관련 논문으로는 김종원, 「공자진의 변정론과 경제사상」, 󰡔인문논총󰡕54, 1999; 유장근, 「청말 개혁가의 식민주의」,

󰡔대구사학󰡕69, 2002 등이 있다.

12) 발흥원인과 관련해서 청조쇠락의 자극, 건가학풍의 변화, 변강개발의 필요성 인식, 관심공유 집단의 형성 등이 거론되고 있

(5)

Ⅱ. 新疆征服 후 관련 편찬사업과 正統論의 새로운 전개

1. 신강정복과 관련 편찬사업의 확대

최후의 한족왕조 明은 내륙아시아를 기반으로 한 이전 몽골왕조 元에 비해 소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였 으며

,

그 영역도 주로 한족이 거주하는 내지 중심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

명조의 쇠퇴기에 만주에서 발흥한 淸朝는 무력의 근간인

8

기제에 만주족 외에 몽골인과 한인을 참여시키면서 초기부터 다분히 개방적인 민족 정책을 추진하였다

.

특히 몽골왕공과의 연합을 통해 내몽골 등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 가면서 명조와 대 립하고 있었는데

, 1644

년 李自成의 반란으로 자금성이 함락되자 산해관을 넘어 중국 내지에 진출하였다

.

入 關 후 청조 지배층은 기존 한인지배층의 협조 하에 南明정권을 비롯한 저항세력을 진압하고

,

吳三桂 등의 三 藩세력을 제거한 뒤

1683

년에는 항청세력의 최후 거점이었던 대만까지 장악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

강희제는 그 과정에서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주변 내륙아시아 지역에 대한 세력확장을 도모하였다

.

문수보살 신앙을 중시하였던 청조 지배층은 당시 몽골부족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티 베트불교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티베트와 인접 내륙 아시아 지역문제에 대한 개입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던 것 이다

.

당시에는 알타이 산맥과 천산산맥에 사이의 준가르분지를 거점으로 하는 서몽골의 일부족 준가르가 급 속히 대두

, 17

세기 후반에서

18

세기 중반까지 약

1

세기에 걸쳐 청의 최대 라이벌로 등장하고 있었는데

,

특히 겔룩파 출가경험이 있던 갈단 칸이 몽골 유력자들을 포섭

,

패권장악을 시도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점차 고조 되게 되었다

.

13)

이전까지 청조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준가르부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1677

년 권력을 장악한 갈단은 적극적인 동진정책을 추진

,

청해

,

호쇼트와 漠北의 할하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조에 대항하며 몽골제국의 위업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

갈단의 통치 하에서 준가르가 급속히 강성해지며 북방에서 세력을 확 장 중인 러시아와의 연맹을 추진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게 된 바

,

청조측의

서북변환

에 대한 우려가 증대되 었다

.

이에 강희제가

3

차에 걸친 원정을 단행하여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

건륭 중엽까지 광대한 서북변경 지역이 여전히 준가르정권의 통제 하에 있었다

.

갈단 사망

(1697)

후 준가르는 한편으로 청조에 臣服의 자세 를 취하면서

17

세기 말

18

세기 초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대외적 세력확장을 계속하여

,

야르칸드

,

투루판

,

카 쉬가르

,

악수 등지를 압박하고

, 1715

년에 하미를 공략한데 이어

1717

년에는 티베트까지 진격

,

라싸를 공격 하기도 하였다

.

14)

으나(喻大華, 「論19世紀中國史學界邊疆史地研究的熱潮」, 󰡔遼寧師範大學學報󰡕1991-2; 賈建飛, 「論清道、咸時期的西北史地 研究」 등 참조), 그 성격이해를 위해서는 배경문제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성격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만한 근년의 연구로는 Matthew W. Mosca, “The Literati Rewriting of China in the Qianlong-Jiaqing Transition,” Late Imperial China 32-2, 2011이 있다.

13) 이하 준가르의 동향과 청조 대응은 平野聰, 󰡔大淸帝國と中華の昏迷󰡕, 講談社, 2007, 140~143쪽; 白壽彛 總主編, 󰡔中國通史󰡕

17, 上海人民出版社, 1996, 188~196쪽 참조.

(6)

그러나

1753

년 무렵 다시 준가르부에 내홍이 발생하여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는데

,

이러한 틈을 이 용한 청조의 준가르원정이 곧 시작되었다

.

건륭제는

1755

년 준가르에 대한 친정을 개시

, 2

년 만에 이리와 우 루무치를 중심으로 한 天山北路 지역을 장악하고

,

이어 준가르의 지배하에 있던 天山南路의 回部지역에 대한 원정을 계속하였다

.

그리하여

1759

년에는 천산남북로 전역에 대한 지배권이 확립되고

,

이후 과거에는 서역 으로 불렸던 그 지역이

新疆

으로 지칭되기 시작하였다

.

15)

중국 내지 지배권 확립에 이어 본격화한 일련의 대외 군사작전 결과

,

청조는 발흥지 만주와 내지를 넘어서 광대한 서북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

이로써 역사상 유례없는 大一統이 이뤄지게 된 것인 데

,

이에 따라 건륭제를 중심으로 한 청조 지배층의 자부심과 자신감이 한층 고조되면서 자신들의 위업을 과 시하고 자랑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

그 결과 주요한 정복전쟁과 새로이 확보된 영토에 관한 편찬사업이 특히 건륭 중기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되었다

.

먼저 새로운 영토를 정확하게 확정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어 새 지도가 만들어 지고

,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영토 확보를 가능하게 했던 정복전쟁과 그 지역의 자세한 실정에 관한 자료의 간행이 이뤄지게 되었다

.

이미 강희제시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참여로 서구의 근대적 측량방법에 의한 실측작업이 추진되고 이를 기반으 로 한 새로운 전국지도 「皇輿全覽圖」가 제작되었었는데

,

건륭제는 준가르 정벌에 따른 영토확장과 병행하여 현지에 대한 실측작업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

그러한 작업을 기초로 곧 신강까지 포함하여 경위도 지점이 표 시된 「內部輿圖

(

乾隆

13

排地圖

)

」가 간행되었다

.

16) 나아가 그러한 자료를 기초로 좀 더 체계적인 신강지역자 료집 발간이 추진되게 되었으며 그 결과

,

󰡔西域圖志󰡕 󰡔西域同文志󰡕의 편찬과 아울러

,

강희기에 시작되어 완 성된 지

20

년밖에 안된 󰡔大淸一統志󰡕의 중수가 서역부분 증보를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

17)

󰡔서역도지󰡕는

1756

년 건륭제의 지시로 대학사 劉統勳이 책임자가 되어 편찬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는 데

,

도어사 何國宗 등이 서양인을 대동하여 측량한 자료들을 기초로

1761

년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

그것이 곧 군기처 방략관에 넘겨졌으나

,

간행이 미뤄지다

1777

년 건륭제의 증정지시를 거쳐

1782

년에 편찬 작업이 완 료되었다

.

52

권으로

,

내용은

4

권의 「天章」편에서 서역에 관한 어제시문을 수록하고 이하

48

편은 지도

,

강 역

,

산천

,

변방

,

번속 등

19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

총도와 분도

21

편의 지도 및 역대 서역도

12

폭 외에 정사 및 기타 유관 서적 및 청대 군영의 기록

,

지방 관원의 문장 등에서 발췌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

편찬 목적은 신강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나아가 지역 통치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

그것은 실지측 량과 견문을 바탕으로 전대 사적의 오류를 교정하고 지명의 통일을 시도한 문화적 대위업으로서 계통적이고 완정한 신강사지학 저술이자 진정한 방지였다고 평가된다

.

18)

󰡔서역동문지󰡕는 󰡔서역도지󰡕 편찬과정에서 준가르어

,

위구르어 등 다양한 현지 언어의 혼용으로 인한 혼란

14) 위와 같음.

15) 그러나 신강이라는 용어가 보편화 된 것은 1820년대 이후이다. 청조의 신강정복의 의의와 신강지배의 특징에 대해서는 김 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사계절, 1999, 35~49쪽 참조.

16) 郭麗萍, 󰡔絶域與绝學: 清代中葉西北史地學研究󰡕, 26~27쪽 참조.

17) 侯德仁, 「<大清一統志>之“西域新疆統部”的纂修及其學術價值」, 󰡔中國地方志󰡕 2006-12 참조. 18) 賈建飛, 󰡔清代西北史地學研究󰡕, 11~12쪽.

(7)

이 발생하자

,

이해의 편의와 용어의 통일성 확보를 위한 일종의 언어학적 참고서로 편찬된 것이었다

.

대학사 傅恒이 칙명을 받아 편찬

, 1763

년에 무영전에서 간행한 이 책은 총

24

권으로 만문

,

한문

,

몽골문

,

티베트문

,

위구르문 등

6

종 문자의 인명

,

지명 대역사전으로 신강

,

청해 등 지역별로 정리되어 있다

.

주요한 내용은 지 명

,

산천명

,

각 민족의 지도층 인명과 해석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

이후 서역연구에 유용한 공구서로 활용되 게 된다

.

19)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1764

년에 시작되어

1784

년에 완성된 󰡔건륭대청일통지󰡕의 편찬이다

.

󰡔대원일 통지󰡕와 󰡔대명일통지󰡕의 전통을 이어 청조는 강희제의 통치기에 중국에 대한 지배권이 확립되어 감에 따라

1686

년부터 일통지 편찬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으나

,

방대한 작업분량 때문에 건륭초

(1743

)

에야

342

권의

󰡔대청일통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

그런데

21

년 밖에 지나지 않은

1764

년에 어사 曹學閔의 상주를 계기로 건륭제는 일통지의 중수를 추진하였다

.

그 목적은 무엇보다 새로이 영토에 편입된 신강지역 정보를 추가하려 는 것이었던 바

,

건륭제는 작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

당시 초고가 완성된

)

󰡔서역도지󰡕와 󰡔동문지󰡕를 저본으로 이용할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

영시위대신 문화전대학사 和珅에게 찬수총괄 책임이 부여되었으 며

,

紀昀 등

3

인이 총찬관으로 참여한 가운데 대량의 인력이 투입되어

, 1784

년 총

500

권의 편찬작업이 완료 되고

1789

년에 정식으로 황제에게 진정되었다

.

편찬의 주요 목적은 신강의 역사지리 상황을 포함시켜

대일 통의 성대함을 밝히 드러내는 것

이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

20) 추가된 「西域新疆統部」

(414~420

)

에서는 소 속 각지의 지리방위

,

건치연혁

,

산천형승

,

고적

,

직관건치

,

성보

,

둔전

,

호구부세

,

풍속

,

물산 등이 정리되고 있으며

,

그 외에 비각자료와 주변 소수민족 부락 정형 등도 풍부하게 소개되고 있다

.

기본적으로 서역도지 등의 자료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나

,

토지개간 등에 대한 최신자료도 반영하고 있다

.

21)

이와 같이 신강소개를 주목적으로 한 편찬 작업과 함께 신강정복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기 위한 작업이 준 가르원정 초기부터 진행되어

15

년의 노력 끝에

1770

년에 󰡔平定準噶邇方略󰡕이 완성되었다

.

방략이란 주요 군사작전이 끝난 후

,

奏章

,

諭旨

,

檔案 등 자료를 모아 전쟁의 시말을 정리한 것으로 건륭시기에 가장 많이 간행되었는데

,

그 중 총

172

권의 󰡔평정준가르방략󰡕은 최대 규모로 서북지역 원정의 경과 및 결과

,

그리고 서 북관제 설치의 업적 등을 정리한 것이었다

.

이들 주요 서북관련 官書들의 편찬은 모두 군기처 소속 方略館에 서 일반 관료 학자들의 접근이 통제된 기밀성이 높은 군기처 당안을 기본사료로 이용하여 추진된 것으로 당 시로서는 가장 신뢰할만한 서북지역에 관한 정보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

22)

한편 方略館과 함께 관서편찬의 다른 한축을 담당하던 한림원 소속 國史館에서는 건륭제의 지시로

1779

년 몽골 신강 등지 왕공들에 대한 자료 정리에 착수

, 10

년 만에 󰡔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

120

권을 완성하고

, 1795

년에 이번원을 통해 간행하였다

.

몽골

,

회부의 청조 귀부과정과 이후 청정과의 관계 및

1,300

여명의 몽 골 왕

,

패륵 등 상층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현지 각 부락의 발전과정과 정치

,

문화

,

경제

,

풍속 등에 대한 정

19) 위의 책, 12~14쪽.

20) 侯德仁, 󰡔清代西北邊疆史地學󰡕, 118~119쪽. 21) 위의 책, 126쪽.

22) 郭麗萍, 󰡔絶域與绝學: 清代中葉西北史地學研究󰡕, 28쪽 참조.

(8)

보를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일반 한인 관료 지식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이번원의 몽골어 자료들을 기본적인 사료로 이용하여 당시 국사관찬수관이었던 祁韻士가 총찬관으로 편찬을 주도한 것이었다

.

23)

이렇게 서북지역 관련 편찬사업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1773

년에는 四庫館이 설치되어 대대적인 문화사업 으로서 󰡔四庫全書󰡕의 편찬이 추진되게 되었는데

,

이후 황하의 대범람 후 황하의 근원을 찾기 위한 작업도 진 행되어

1782

년에는 기윤 등에 의해 西藏

,

南疆 등지 역사지리를 상세하게 소개한 󰡔河源紀略󰡕

35

권이 완성되 었다

.

건륭기에는 그 외에도 사고관개설 이전부터 다방면에 걸친 대규모의 문화편찬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 데

,

역사분야에서는 특히 청조체제의 기원

,

발전과 특징 등을 부각시키기 위한 당대사자료의 편찬을 중시하 여 많은 성과를 남기게 되었다

.

상설화된 국사관과 방략관 등을 통해 앞서 언급한 󰡔평정준가르방략󰡕을 포함 한

,

이른바 건륭제의 十全武功과 관련된 여러 방략 외에 󰡔淸朝開國方略󰡕 등이 편찬되었으며

,

앞서 언급한 󰡔몽 고회부왕공표전󰡕 외에 󰡔滿洲源流考󰡕와 󰡔宗室王公功績表傳󰡕의 간행도 추진되었다

.

그 외 󰡔大淸會典󰡕과 󰡔會 典則例󰡕

,

󰡔皇朝通典󰡕

,

󰡔皇朝通志󰡕

,

󰡔皇朝文獻通考󰡕 등의 편찬을 통한 당대 전장제도의 종합적인 정리와 집대 성이 진행되었다

.

24)

요컨대 서북관련 관서 및 기타 대규모편찬 사업을 통해 청조 지배층이 공전의 강토를 개척하고 미증유의 대일통을 이뤘다는 점이 크게 강조되게 되었으며

,

그 과정에서 과거에는 황량한

絶域

으로 인식되었던 서북 지역 및 접근이 용이치 않았던 당대 청조역사에 대한 한인관료 사인층의 관심과 인식이 새로워지고 청조에 대한 향심력이 강화될 수 있었다

.

25)

2. 청조 정통론의 새로운 전개

앞서 살핀 대로 건륭기에는 공전의 영토확장을 배경으로 그 위업과 함께 전성국면의 당대 청조의 각종 전 장제도와 문화유산을 정리 집대성하려는 일련의 노력이 계속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

그 과정에서 청조 지배층의 자부심과 자신감은 크게 강화될 수 있었다

.

이에 따라 이제 청조 지배층이 중국지배의 정당성 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다 당당하게 주장하려는 움직임이 부각되게 되었다

.

26)

소수민족 정복왕조로서의 청조가 중국지배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먼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한인들에게 그들의 정권획득과 중국통치를 어떻게 정당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한인들이 언제라도 華와 夷의 세계를 준별하고 이를 야만시하는 화이사상을 근거로 결집하여

,

이민족정권 타

23) 侯德仁, 󰡔清代西北邊疆史地學󰡕, 133쪽 등 참조.

24) 이에 따라 輿圖, 방략, 여행기 등의 간행이 이어 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Chou Nailene Josephine, Frontier Studies and Changing Frontier Administration in Late Ch’ing China: The Case of Sinkiang, 1759~1911 참조. 건륭기 편찬 주요관서 목록은 白壽彛 總主編, 󰡔中國通史󰡕 17, 846~852쪽 참조.

25) 郭麗萍은 대일통찬양이 건가기 이후 도광기까지의 서북관련 저작의 주선율이었음을 강조한다(󰡔絶域與绝學: 清代中葉西北史 地學研究󰡕, 2쪽 등); 王先謙은 청대의 대일통으로 漢代의 匈奴之患, 唐代의 土蕃之撓 같은 것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고 있 으며, 󰡔평정준가르방략󰡕 편찬에 참여하였던 趙翼은 󰡔皇朝武功紀盛󰡕을 간행하여 별도로 청조의 위업을 찬양하였으며, 王鳴 盛, 于敏中 등 많은 한인 관료 지식인들이 청정의 문치무공을 칭송하였다(高翔, 󰡔近代的初曙, 18世紀中國觀念變遷與社會發 展󰡕, 社會科學出版社, 33~36쪽 참조).

26) 吕文利, 「清廷的正統理論及文化建設」, 󰡔中國邊疆史地研究󰡕 20-2, 2010 참조.

(9)

도에 나설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일찍부터 한인포용과 한문화흡수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던 청조 지배층은 입관 후 한편으로는 강력 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辮髮과 易服을 강요하는 등 강경전략을 구사하면서도

,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들의 회유 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다

.

북경 장악 후 자살한 崇禎帝를 위해 후한 장례를 치러주고

,

청조의 중국진 출이 기본적으로 위기에 처한 명나라를 돕기 위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

吳三桂 휘하 한인군대를 앞세워 李自成과 張獻忠 등이 이끄는 반란세력에 대한 토벌을 진행하였다

.

이후 順治 康熙期에 걸쳐 저항하지 않는 한 한인들의 기존관직과 학위를 인정해 주고

,

새로운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특별 과거를 실시하는 외에 주자 학을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名儒들을 우대하고

,

강희제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황제 자신이 유교적 교 양과 문화를 체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

27)

이런 과정을 통해 滿漢 간 민족모순이 대체적으로 점차 완화되게 되었지만

,

만주족 지배층을 이적시하는 흐름의 저류가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

그런 중에

1728

년 曾靜逆謀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

이 를 계기로 雍正帝가 보다 적극적으로 반청적 한인들의 화이사상을 비판하면서 청조의 중국 지배 정당성을 강 조하였다

.

28)

사건의 발단은 湖南省 永興縣의 하급사인 曾靜이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웠던 학자 呂留良의 저술에 감화를 받아

,

송대 岳飛의 후손으로 알려진 川陝總督 岳鍾琪에게 모반을 권유한 것이었다

.

사실을 파악한 옹정제가 증정을 소환하여 직접 신문하면서 그 주장을 조목 조목 비판하고 그 배후에 있는 한인들의 화이사상을 철저 하게 타파하고자 하였는데

,

사건 정리 후 그 과정과 내용이 정리되어 󰡔大義覺迷錄󰡕으로 간행되었다

.

여기에 나타난 옹정제의 증정비판 요점은 첫째 청조가 중원을 점거한 것은 당시 이미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해 명이 멸망한 상황에서 천명을 얻어 無主의 땅을 차지한 까닭에 전혀 부당하지 않다는 것

,

둘째는 화이의 구별은 종족이 아니라 문화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舜임금과 文王이 각각 東夷

,

西夷였던 데서 볼 수 있듯이 원래 夷 란 지역의 명칭으로 중외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며

,

더욱이 청조는 동해연안에서 발흥하여 제국을 통일하 고 천하에 군림하였으니 堯舜 이래 중외일가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

나아가 청조가 대소문무 中外一 家의 사람을 기용하여 중외일가의 정치를 이뤘으므로 天下一統

,

華夷一家의 시기에 중외를 구분하는 것은 천 리에 어긋난다는 점이 역설되었다

.

즉 혈통에 근거한 夷夏구분과 차별을 부정하고 문화를 기준으로 이하관계 의 변화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

청조가 요순 이래의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화이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인 데

,

이는 이후 현대 중국에서 다민족국가체제 이념의 정당성을 강조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주 목되기도 한다

.

29)

건륭제는 옹정제의 주장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청조의 현실적 위업을 크게 부각시키면서 보다 당당하게

27) 杜家驥, 「從古代民族之私性、國家之公性談清代满漢民族矛盾」, 󰡔淸史硏究󰡕 2010-2; 余梓東, 「論清朝民族關系格局的特點」,

󰡔内蒙古社會科學󰡕2003-3 등 참조.

28) 사건의 시말과 󰡔대의각미록󰡕의 구성은 민두기, 「청조의 황제통치와 사상통제의 실제 – 증정역모사건과 「대의각미록」을 중심 으로 ‒」, 󰡔중국근대사연구 ‒ 신사층의 사상과 행동󰡕, 일조각, 1973 참조.

29) 平野聰은 이것을 주권국가 근현대중국을 출현시킨 성전이라고 평가한다(󰡔大淸帝國と中華の昏迷󰡕, 174쪽). 이 문건의 내용 요약은 吕文利, 「清廷的正統理論及文化建設」 참조.

(10)

독자적인 정통론을 발전시켜 나간다

.

특히 앞서 언급한 신강정복과 이후 관련 편찬사업이 본격화 되던 시기 인

1760

년대 중반부터 忠義의 관점에서 역사인물의 재평가를 시도하면서 정통의 문제를 새롭게 거론

,

이전 漢唐宋明과는 다른

皇淸의 中夏

를 주장하며 실력을 바탕으로 한 보편주의를 분명하게 천명하기 시작하였다 는 것이다

.

30)

대일통의 위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건륭제는 앞서 언급한 각종 관련 편찬사업의 추진과정에서도 公議 를 중시했던 강희제와 달리

,

황제 자신이 최종 裁定權을 행사하고자 하면서 민간의 野史나 私史를 官史로 흡 수하고자 하고 있었다

.

31)그는 특히 錢謙益의 󰡔初學集󰡕 󰡔有學集󰡕 등을 열독하는 가운데 명청교체기 역사인 물의 청조에 대한 불경한 언급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며

,

失節者의 부끄러움을 개탄하고

,

충의의 관점에서 역사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

그리하여

1766

년 그는

평화가 이루어진지

100

여 년 만에 대대적으로 추진되는 국사 찬집을 통해 국법을 밝히 드러내어야 할 것

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

晩明 역사 서사에 대해 새로운 원칙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

특히 黃道周

,

史可法 등 명말의 제신들이 당시

王師 에 항거하여 주륙당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

평심으로 돌이켜 따져보자면

,

그들이 군주를 위해 순사한 절의 는 가려서는 안 될 것

이므로

僞臣

으로 지목하는 것이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大中至正의 도를 드러내 기 위해서는 그들을 포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

이러한 입장에서

1775

년에는 사가법

,

劉宗周 등 을

一代의 完人

으로 칭하기에 족하다며 특히 史에게는 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

그의 지시에 따라

1776

년에는 殉節者

3,600

여명의 성명과 사실을 간략하게 기록한 󰡔勝朝殉節諸臣錄󰡕이 간행되게 되었다

.

32) 이와 관련하여

1776

년에는 국사관에 명청 양대에 봉사한 관료들의 명단을 갑을 양편으로 나누어 정리하도록 지시 한 바

,

그에 따라 󰡔貳臣傳󰡕 편찬이 진행되어

,

건륭말 년 경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옹정기에 시작 된 한인의 화이관에 대한 사상투쟁의 완결이라고 간주되기도 한다

.

33)

그 과정에서 건륭제는 이제 명확하게 명청교체를 천명에 따른 역성혁명으로 선언하게 되었다

.

그는 이하 론적인 관점의 주자 정통론에 입각하여 宋遼金 시기를 다룬 󰡔資治通鑑綱目續編󰡕을 열독한 후 그것이 遼金元

3

조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문제를 인식하며

, 1768

년에 문신들에게 󰡔歷代通鑑輯覽󰡕 편찬을 추 진케 하였다

.

그리하여 건륭제 자신의 評語가 첨부된 󰡔御批歷代通鑑輯覽󰡕이 곧 간행되었는데

,

여기서 명의 멸망시기를 이자성군에 의한 북경함락이 아닌 남명의 福王이 사로잡힌 순치

2

년으로 잡음으로써 사실상 명 이 천명을 받은 청에 의해 멸망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

34)

건륭제는 이어

1771

년 자신의 평어를 추려 󰡔評鑑闡要󰡕를 간행토록 했는데

,

이를 통해 금의 송침공 기록을 入寇가 아닌 入侵으로 수정하도록 하고

,

󰡔명사󰡕에서 元兵관련해서 寇자를 사용한 것의 문제를 지적하며 주자 의 역사관과 권위에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

하지만 동시에 淸人이 비록 金의 후계자지만

,

역사 포폄 문제에서는 族群분별이 아닌 일통관의 관점에 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

守節평가 문제에서 종족적 연관성

30) 楊念群, 󰡔何處是“江南”: 清朝正統观的确立與士林精神世界的變異󰡕, 三聯書店, 2010, 261~269쪽 참조. 31) 楊念群, 󰡔何處是“江南”: 清朝正統观的确立與士林精神世界的變異󰡕, 297~299쪽 참조.

32) 위의 책, 299쪽.

33) 최갑순, 「<이신전>편찬시말과 그 배경」, 󰡔청주여자사범대학논문집󰡕7, 1978, 38쪽. 34) 楊念群, 위의 책, 270~271쪽; 安部健夫, 󰡔淸代史の硏究󰡕, 創文社, 1971, 28쪽 참조.

(11)

과 관련하여 금의 입장에 무조건적으로 편드는 것을 거부하였다

.

즉 송대 이래 종족충돌의 평가표준을 무효 화시키며

,

신하가 금인이냐 송인이냐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臣節을 지켰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

35)

이후 󰡔사고전서󰡕의 편찬과정에서 역대왕조의 정통문제가 부각되게 되자

,

건륭제는 보다 명확하게 역대 왕 조의 정통성을 평가하는 데 대일통의 관점을 표준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

36) 문제의 발 단이 된 것은 원말 명초 楊維楨의 「宋遼金正統辯」이었다

.

그 요지는 元이 遼 金이 아닌 宋統을 계승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

,

四庫館臣들은 陶宗儀의 󰡔輟耕錄󰡕에 포함된 그 글이 여진을 계승한 청조를 폄척한 것으 로 보고 황제가 꺼려할 것을 우려하여 삭제하고자 하였다

.

이에 대해 건륭제가 이의를 제기하며

,

요 금은 모 두 북방에서 일어나

,

본래 이어받은 정통이 없으므로

,

송 원이 서로 이어받아

中華의 主

가 된 것과 같지 않 다고 하며 楊의 주장에 동의를 표하였다

.

즉 북방에서 흥기한 같은 이적계통이지만

,

요 금은 아직 중원을 장 악하지 못했고 원은 중화의 주가 되었던 까닭에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

이러한 관점에서 건륭제는

1785

년 종묘의 역대제왕묘에 그 정당성문제와 관계없이 실제로 천하에 군림했던 군주를 모두 입사하여

,

夷夏관념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천하는

천하인의 천하

로서 남북중외의 구분에 따라 누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천명하였다

.

37)

이렇게 건륭제는 정통인정의 기준이

중화의 주

가 된 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던 바

,

그에 의해 비로소 소수민족 왕조 청조의 중국지배 문제에 대한 정당성과 합법성 문제와 관련하여 한인들의 화이론적 정 통론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주도권이 당당하게 주장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러한 주장은 신강정복을 핵심으 로 한 대일통의 완성과 중외일가체제의 구축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

나름대로 상당한 논리적 설득력을 지닌 것도 사실이었다

.

따라서 이후 한인 관료지식인층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

예컨대 건륭 말 凌廷堪은 역사서술의 기본은 사실의 기재라는 錢大昕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

건륭제의 이러한 관점의 기초 위에서 나아가 정통에 관한 논의는 이하관념에 구애되지 말고 국세의 강대함

,

군주의 책임과 능력을 기준으 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

38)

Ⅲ. 乾隆 末 이후 정치사회적 위기와 嘉慶新政

1. 정치사회적 위기의 심화

강희년간 이래 성세를 자부하던 청조는

18

세기 말 건륭 후기에 이르러 그간 다방면에서 응축된 문제들이

35) 楊念群, 위의 책, 273~275쪽.

36) 이하 郭麗萍, 󰡔絶域與绝學: 清代中葉西北史地學研究󰡕, 12쪽 참조.

37) 張壽安, 「凌廷堪的正統觀」, 劉鳳云 董建中 劉文鵬 编, 󰡔清代政治與國家認同󰡕 下,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12, 567~568쪽. 38) 張壽安, 「凌廷堪的正統觀」, 576쪽.

(12)

분출하면서 심각한 정치 사회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

인구가 급증하고 점차 사회전반에 사치풍조가 확산 되며 官紳層의 부패와 관료기구의 이완이 심화되는 중에

,

각지에서 반란이 확산되며 이른바 中衰期에 진입하 였던 것이다

.

39)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의 근원은 정치사회적 안정과 신작물 보급에 따른 생산력 증대의 결과 인구가 놀랄 정도로 급격히 증가되었다는 점이다

.

통계에 따른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실록기록을 근거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건륭초

(1741) 1

4

천만명을 돌파한 인구가

50

년 후인

1790

년에

3

억명을 넘어서서

1850

년에는

4

3

천만명에 도달하였다

.

40) 따라서

1

인당 경지면적도

18

세기 말에는 생계유지선인

4

畝에 훨씬 못 미치는

2.5

畝정도로 줄어들게 되면서

,

하층빈민들의 생계유지가 매우 힘든 상황이 출현하게 되었다

.

41)

특히 내지 중심부의 인구압이 급증함에 따라 四川 陝西 甘肅 雲南 廣西 변경 등 서부 및 남부지역으로의 이민이 늘어나면서 산지개간이 확대되고 그에 따른 토사유실 등 문제로 인한 생태위기가 심화되었다

.

황하범 람을 비롯한 큰 재해가 빈발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량운송이 큰 타격을 받게 되는 등 그 여파가 다방면 으로 확대되게 되었던 바

,

따라서 적극적인 대책 모색이 절실한 과제로 대두하고 있었다

.

하지만 성세의식에 젖어있던 건륭제를 비롯한 청조지배층은 그러한 문제가 심화되고 있던

18

세기 후반기 에도 관료기구의 확대 개혁 등을 포함한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모색하기 보다는

持盈保泰

를 표방하면서 현 상을 유지하려는 소극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

42) 특히 신강정복을 완료한

1759

년 이후

偃武修文

을 표방

,

대외적인 영토확장에 이어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문치를 강조하면서

,

앞서 언급한대로 대대적인 문화편찬 사업을 전개하였다

.

따라서 새로운 인력충원과 대책모색이 요구되었지만

,

정부조직이나 관료기구의 확대개편 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못한 결과 관료기구 외연의 막우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

그러한 상황에서 사치와 향락의 풍조가 억제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었다

.

성세를 호언하며 황제가 호화로운 별장을 개축 확장하고

,

대규모의 전국순행을 추진하며 청제국의 부와 권력을 과시 하는 가운데

,

사회 상층인사들 사이에서 진귀한 선물을 주고받으며 호화로운 연회를 다투어 열고자 하는 등 사치풍조가 만연하고 있었다

.

봉급수준이 높지 않았던 관료들도 그러한 풍조에 빠져드는 가운데

,

관료기구 내부에 뇌물수수의 관행이 만연하게 되었다

.

특히

1770

년대 이후 건륭제의 총애를 입은 和珅이 권력을 농단 하게 되면서 관료들의 뇌물수수와 착취가 거의 공공연하게 이뤄지게 되고 이로 인해 관료기구의 부패문제가 점점 더 악화되게 되었다

.

43)

그 결과 빈부격차가 확대되어 농민을 포함한 사회 하층민들의 삶은 날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바

,

곳곳에서 사회모순이 증폭되면서 강력한 반란이 분출하기 시작하였다

.

특히 이주민의 증가로 土客 간 갈등이

39) 戴逸, 󰡔乾隆帝及其時代󰡕, 中國人民大學出版社, 1992, 23~25쪽; Susan Mann Jones and Philip A.Kuhn, “Dynastic Decline and the Roots of Rebellion,” John K. Fairbank ed.,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1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8, pp.113~116 참조.

40) 王育民, 󰡔中國人口史󰡕, 江蘇人民出版社, 1995, 505~510쪽 참조.

41) 이 시기 사회혼란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Wensheng Wang, “Prosperity and Its Discontents: Contextualizing Social Protest in the Late Qianlong Reign,” Frontiers of History in China 6-3, 2011 참조.

42) 高翔, 󰡔康雍乾三帝統治思想硏究󰡕, 中國人民大學出版社, 1995, 305~312쪽 참조. 43) 高翔, 위의 책, 374~391쪽 참조.

(13)

확대되고 改土歸流 조치로 국가권력의 지배가 새롭게 강화된 서부 변경지역에서 소수민족과 비밀결사 주도 의 민중반란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

44) 특히 명말청초 전란으로 황폐화된 토지가 많았던 四川의 경 우

,

주변으로 부터 이민이 몰려 이미

18

세기 중반에는 더 이상 개간의 여지가 없어지게 되었던 바

, 18

세기 후반에는 四川 陝西 湖北의 交界 지역으로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어 가경 초년에는 그곳의 외성 이민이 수백 만에 이르게 되었다

,

이들 이주민의 산지 개간확대에 따른 토사유출 등 문제로 재해가 빈발하며 토객 간 갈 등이 증폭되는 가운데

,

특히 이주민들 사이에 白蓮敎 등 비밀결사가 침투하여

18

세기 말에는 세력을 크게 확 대하고 있었다

.

그런 흐름을 주목하기 시작한 조정에서

1794

년부터 백련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는데

,

이에 따라 백련교들이

1795

년 호북성의 宜都 枝江 交界 지역에서 반청투쟁을 일으켜 곧 사천

,

섬서 등지로 세력을 급속히 확대하면서 정치사회적 혼란이 증폭되게 되었다

.

45) 四川 湖北 貴州의 교계 苗族 집거지에도

1764

년 한인출입 금령 해제 이후 이민이 증가하면서 苗漢 간 갈등이 응축되고 있었는데

, 1795

년에 폭동이 발생하여 곧 근

10

만명에 달하는 세력의 반란으로 발전하였다

.

청정은 진압작전에 대량의 병력을 투입

,

잔혹한 진압작 전을 전개하였지만

10

여년 후에야 겨우 평정할 수 있었다

.

다른 한편에서는 본래부터 반청적 색채가 강한 반면 종교적 색채는 약했던 三合會

,

天地會 등의 활동도 급 증하는 파산농민과 유민 및 빈곤 운수노동자들의 흡수를 통해 남부 연해지역에서 크게 늘어나게 된 바

,

乾嘉 교체기 정치사회적 위기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

내지사회의 동요가 이렇게 확대되는 과정에서 신강을 포함한 변강지역에서도 청조 지배의 이완현상이 확대되면서 현지인들의 저항투쟁도 점차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

2. 가경신정과 漢人 官紳層의 동향

이렇게 위기가 증폭되어 가는 중에

1795

년 건륭제가 제위를 양여하고 嘉慶帝가 즉위 하였으나 건륭제의 신임을 배경으로 한 화신의 권력농단은 계속되었다

.

그러던 중

1799

년 건륭제가 사망하게 되자 가경제는 곧 화신을 체포 自盡토록 하고 정치개혁에 착수하였다

.

그는

18

세기 후반 이래의 정치혼란과 왕조체제 이완문 제 유발의 원흉으로 화신을 지목하고 그와 연관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인사개혁을 단행하여

, 1802

년까지

43

명의 총독 순무를 새로 임명하였다

.

부패 근절을 위해 관료기구 내 보물진정을 금지시키고

,

勤政 實政

을 표방하면서 사치풍조를 해소하고 절검을 강조하기 위해 南巡중지를 선언하고 궁궐 내 오락공연 을 금지시키는 등 솔선수범 의지를 천명하였다

.

46)

44) 이하 이 시기 반란 개관은 白壽彛 總主編, 󰡔中國通史󰡕17, 257~260쪽 등 참조.

45) 楊國强, 「200年人口西遷的歷史因果」, 󰡔晩淸的士人與世相󰡕, 三聯書店, 2008, 21~22쪽; 白壽彛 總主編, 󰡔中國通史󰡕17, 260 쪽 등 참조.

46) 이하 가경신정의 개략적인 내용은 Daniel McMahon, “Dynastic Decline, Heshen, and the Ideology of the Xianyu Reforms,” Tsing Hua Journal of Chinese Studies, New Series 38-2 2008, pp.231~255; William T. Rowe,

“Introduction: The Significance of the Qianlong-Jiaqing Transition in Qing History,” Late Imperial China 32-2,

(14)

아울러 전대에 화신일가 탄핵으로 혁직된 어사 曹錫寶와 예부상서 尹壯圖 등 敢言大臣의 명예를 회복시키 고

,

언로를 확대하여 관료들의 진언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

.

이에 개혁을 기대하고 있던 法式善을 포함한 일부 고위관료들은

新政 維新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환호하기도 하였다

.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洪亮吉이 成親 王을 경유한 상서를 통해 황제의 소극적인 행보를 비판하며 보다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다

,

사형언도를 받고 감형되어 신강으로 유배되었다

.

이로 인해 洪은 당시 시국을 우려하는 젊은 사인들의 영웅으로 부각되게 되었 지만

,

이후 황제의 求言의 진실성에 대한 회의가 확대되면서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의견개진이 사라지게 되었 다

.

이에 가경제는 홍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여

3

개월 여만에 복귀시키면서 재차 언로개방의지를 천명하였다

.

이런 상황에서 包世臣은 가경제의 문신에 대한 관용을 지지하면서 보다 철저하고 근본적인 행정체제의 정비를 요구하여

,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못했지만 이후 개혁지향적 지식인들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47)

18

세기 말 이후 다방면에 걸쳐 심각한 문제가 응축되고 있던 상황에서 즉위한 가경제가 나름대로는 거 듭 개혁의지를 천명하며 인사개혁을 추진하였고

,

따라서 일부 인사들은

維新

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

가경제 자신은 부업을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식으로 그러한 용어의 사용을 회피하면서 제한적인 신정을 추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때문에 이 시기의 변화는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었다고 할 수 있다

.

즉 청조체제 가 康雍乾 성세에서

19

세기 중반이후 급격한 동요의 시기로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中衰期 혹은 과도기 정도 로 이해되어 온 경향이 있었다

.

그런데

19

세기 중반 이후 중국사회의 주요한 변화

,

즉 심각한 정치사회적 위기에 직면

,

중앙정부의 역할이 약화되는 속에서 한인 관신층의 체제수호를 위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 鄕勇편성 등의 형태로 부각되 게 되었다는 점과 관련하여

,

필립 큔

(Philip Kuhn)

등이 군사화의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

18

세기 초반의 중 요성이 점차 새롭게 주목되기 하였다

.

48) 이시기 한인 지역 엘리트들이 단련조직에서 나아가 점차 징세과정 참여를 확대해 가면서 비판적 淸議활동의 활성화가 진행되게 되었다는 점 등의 사실이 새로운 관심을 끌게 되었던 것이다

.

나아가 근년에는 관점을 달리하면 이 시기의 변화를 통해 동요하던 청조의 명맥이 연장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으며

,

그 변화의 실상은 무엇인가를 해명해 보려는 일련의 새로운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

특히 關文發

,

韓承賢

,

모스카

(Mattew Mosca),

王文生 등의 연구에 주목한 로우

(William Rowe)

는 「청대사에 있어서 건가변혁의 의미에 대한 도론」이라는 글에서 논점들을 소개하면서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

49)

그들의 연구를 통해 강조된 가경기의 중요한 변화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다

.

가경제가 널리 언로를 확대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1774

년 법률적 근거 없는 상소를 엄격히 견책하는 조치도입으로 기능이 약화되었던 京 控제도를 회복하여 가경기에 京控이 배로 증가하고 그 처리를 위해 지방에 發審局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

50)

2011, pp.74~88 등 참조.

47) William T. Rowe, “Rewriting the Qing Constitution: Bao Shichen’s “On Wealth”(Shuochu),” T’oung Pao 98, 2012; Rowe, “Introduction: The Significance of the Qianlong-Jiaqing Transition in Qing History,” p.77 참조. 48) Rowe, “Introduction: The Significance of the Qianlong-Jiaqing Transition in Qing History,” p.77.

49) Rowe, “Introduction: The Significance of the Qianlong-Jiaqing Transition in Qing History,” pp.74~88.

(15)

아울러 이전 화신 弄權의 수단으로 이용된 軍機處와 內務部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어 실제적 종신제가 적용되 던 내무부에

3

년 임기제가 도입되고

,

임시기구적 성격이 강하여 화신이 사적인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군기처도 일련의 표준화 관료화 조치를 통해 어사의 감시 하에 두는 등 권력제한이 가해지면서

1818

년 간행된 가경 󰡔大淸會典事例󰡕에서는 정식으로 그 법률적 지위가 부여되었다

.

51)

뿐만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주목되기 시작한 이 시기 중앙정부의 퇴각과 지방엘리트 세력의 부상은 정부 의 추동 혹은 적어도 그 동의하에 이뤄진 것으로

,

그와 관련하여 지방엘리트들의 지방지편찬이나 지역공공사 업 등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었으며

,

국가는 이들에 대한 포상과 보상을 확대하는 가운데 지방 名宦祠

,

鄕賢 祠 등에 대한 통제도 약화되고

,

과거 수험생들의 罷考등 집단행위에 대해서도 처벌을 다소 완화하는 등 개방 적 정치언론 형성의 조건이 형성되게 되었다

.

52)

교파적 반란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

건륭시기에는 교파 자체를 문제시 하며 철저한 탄압에 나섰던데 비 해

,

가경기에는 교파 반란의 원인이 생활의 불안과 관료의 핍박과 탄압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처벌을 최소 화하려는 관용적 정책이 추진되었다

.

53)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한인 사인관료층의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과 활동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

그동 안 이민족정권이라는 사정과 관련하여 접근이 어려웠던 영역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

특히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이민족 왕조로서 그동안 한인에게는 접근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청조 의 역사 및 당대의 체제위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顧炎武 등 명말청조 경세치용을 표방했던 학자들과 그들 의 연구에 대한 관심과 함께 확대되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

Ⅳ. 考證學과 經世論의 발전

1. 고증학과 士人活動 공간의 확대

명말의 혼란과 뒤이은 이민족지배는 일부 한족 지식인들에게는 天崩地解로 표현될 정도로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여졌으며

,

이에 따라 亡國의 원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학문의 방향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진행되는 가운데

,

顧炎武

,

黃宗羲

,

王夫之 등에 의한 經世致用의 학문이 대두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그 과정에서 心理에 대한 空談에서 벗어나 경세를 위해 사실에 근거한 實學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이 강조되고 黃의 󰡔明夷

50) Qiang Fang. “Hot Potatoes: Chinese Complaint Systems from Early Times to the Late Qing(1898),” Journal of Asian Studies 68-4, 2009.

51) Rowe, “Introduction: The Significance of the Qianlong-Jiaqing Transition in Qing History,” p.84.

52) Seunghyun Han, “Punishment of Examination Riots in the Early to Mid-Qing Period,” Late Imperial China 32-2, 2011; Seunghyun Han, “Shrine, Images, and Power: the Worship of Former Worthies in Early Nineteenth Century Suzhou,” T’oung Pao 95, 2009 참조.

53) Daniel McMahon, “Dynastic Decline, Heshen, and the Ideology of the Xianyu Reforms,” p.249.

(16)

待訪錄󰡕에서 볼 수 있듯이 경직된 황제전제체제의 문제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

하지만 청조의 중국지배가 안정

,

확립되어 가고 학자들의 체제비판적 논의에 대한 통제가 강화됨에 따라 이러한 학 문경향은 후속세대들에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

현실에 적응하는 형태로 변형되지 않을 수 없었다

.

청조 지배체제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한인들의 反滿의식이 점차 淡化되어 가기는 하지만 일부 사인층과 비밀결사 집단 사이에서는 懷明

,

反淸 정서가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

󰡔明季野史󰡕 등의 전승이 계속되고 있 었으며

,

그에 따라 강희 시 戴明世 󰡔南山集󰡕案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청조측의 文字獄을 통한 사상통제는 단 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특히 건륭기에 들어 문자옥과 禁書지정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

54) 이에 한인 관 료사인들의 현실적 문제나 명청교체 및 이후 시기의 당대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크게 억제될 수밖에 없 었다

.

게다가 청조의 역사와 관련해서는 자료에 대한 접근도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

명말청초에 흥기한 경 세치용을 강조하는 학문의 전통이 온전히 계승 발전될 수 없었다

.

따라서 사인 학자들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유보하거나 은폐한 채 학문적 관심을 경전이나 과거 의 사서에 대한 문헌비판과 고증 혹은 음운연구 등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

이런 고증학의 방향설정에 누구 보다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顧炎武라 할 수 있는데

,

그는 학문의 지침으로서

行己有恥

博學于文

을 제시 하면서

,

理學은 經學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경전연구에 있어서 음운 등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를 통해 故意를 밝히고 古制를 고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

55) 연구방법으로서는 실지조사와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실 증하는 경험주의적 귀납법과 아울러 고금을 관통하는 사학방법을 중시하였다

.

顧의 이 같은 방법론에 대한 강조를 기초로 하여 이후 사상통제가 강화된 상황에서 수준 높은 고증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 었다

.

고증학은

17

세기 말 閻若璩와 胡謂가 漢代자료를 이용

,

주자학의 이론이 의존하고 있던 󰡔古文尙書󰡕 및

󰡔周易󰡕과 관련하여 󰡔尙書古文疏證󰡕과 󰡔易圖明辯󰡕을 지어 그것들이 위작임을 증명함으로써 그 학문으로서의 독자적 존재를 확립할 수 있는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 18

세기 중엽에는 蘇州의 惠棟이 중심이 된 吳派 가 등장하여 宋學에 대항하는 漢學을 표방하며 고증학의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

동시기에 安徽省에서 는 江永

,

戴震을 중심으로 한 晥派가 등장하여 禮學

,

音韻

,

曆算 등에 대한 분석적인 탐구를 추진하였다

.

그 과정에서 고증학은 전통 유학사상 유례없는 수준의 전문성을 확보하게 되는 데

,

그 배경에는 개혁적 경세관 이나 뛰어난 학문을 지닌 관료 학인 가운데 관료계와 敎學 간의 일정한 분리를 모색한 재야성이 존재하여

,

학문의 일정한 독립성

,

즉 탈정치적 學隱 정신이 작용하였던 점이 있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

56)

혜동 대진 이후 고증학자들은 경학 이외의 분야로 관심을 확대하여

,

吳派 王鳴盛

,

錢大昕 등의 考證史學

,

汪中 등의 諸子學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

고증학의 기초적인 실증방법으로서 훈고

,

문자학

,

음운학을 포함한 小學과 아울러 목록학

,

판본학

,

교감학 등이 발전하게 되었으며

,

역사연구와 관련해서는 考古

,

金石學이 독자 적 학문영역으로 발전하였다

.

역사연구도 전통사학에 대한 비판적 재정리 중심으로 발전하며

,

왕명성의 󰡔

17

54) 岡本さえ, 󰡔淸代禁書の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96, 16~37쪽 참조.

55) 조병한, 「청대의 사상」, 서울대동양사학연구실편, 󰡔강좌중국사󰡕 4, 지식산업사, 1989, 260~261쪽. 56) 조병한, 위의 글, 26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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