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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틀러 매체론에서의 ‘지각’의 문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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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기록체계 1800과 1900의 비교를 중심으로 ―

최 소 영*

1)

Ⅰ. 키틀러의 매체론과 ‘기록체계’

Ⅱ. 기록체계 1800의 ‘지각’과 낭만주의 문학의 ‘환영성’

Ⅲ. 생리학 및 정신물리학적 실험과 기술매체의 등장

Ⅳ. TAM(시간축조정)과 지각의 표준화

Ⅴ. 키틀러의 ‘지각’ 개념의 의미와 한계

Ⅰ. 키틀러의 매체론과 ‘기록체계’

지각의 문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 및 담론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 할을 해 온 주제였다. 지각은 특히 우리가 세상과 만나는 과정의 첫 단계이자 우 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규정하는 매우 근본적인 매커니즘이라 할 수 있다. 우 리는 세상을 어떻게 접하는가, 그 방식은 어떻게 형성되어 있으며 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아가 이런 구조는 예술에 어떻게 반영 되는가 등의 문제는

* 박사 후 연수, 숭실대학교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5년 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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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의 전통적인 논의 대상이기도 했다.

지각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듯이 우리의 지각 방식이 어떤 자발적인 역사를 갖고 있거나 그 생리학적 전제조건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눈을 비롯한 우리의 지각 기관은 관성적 기관이며 오랜 시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1) 반면 우리의 지각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인식의 장을 구성하는 힘 이나 규칙들의 변화로 설명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2) 발터 벤야민 역시 시청각 매체가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생리학적 감각으로서의 눈이 아니라 시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비교적 큰 규모의 역사적 시공간 내에서 인간 집단들의 전 존 재방식과 더불어 그들의 지각의 종류와 방식도 변화한다. 인간의 지각이 조직되 는 종류와 방식 ― 즉 인간의 지각이 조직화되는 매체 ― 은 자연적으로뿐만 아 니라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져 있다”3)는 것이다. 중세적 공간인식과 이와는 확연히 다른 르네상스 시대의 선 원근법, 그리고 이를 무너뜨리는 사진과 영화의 등장은 단지 새로운 기술이나 매체의 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각의 방식, 인식의 방식, 다시 말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고 이를 구축해 나가는 방식의 변화와 함 께 생각할 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사건이다. 마셜 맥루언은 이에 대해 각 각의 문화와 시대는 거기 속한 모든 인간과 사물에게 적용되는, 그 나름의 지배 적 지각 모델이나 인식 모델을 가지고 있으며, 매체가 달라지는 문제는 상호적인 관계 맺기, 혹은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방식이 달라졌다는 문제이므로 이는 그것 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식 방식과 구조가 바뀌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주장한다.4)

그리고 ‘지각 방식’에 관한 연구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은 기술매체의 등장과 관련된다. 기술매체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우리의 ‘보기 방식’은 매체의 영 향을 결정적으로 받게 되었다. 따라서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매

1) 랄프 슈넬, 미디어 미학-시청각 지각형식들의 역사와 이론에 대하여, 강호진 외 옮김, 이 론과 실천, 2005, 41쪽 참조.

2) 조나단 크래리, 관찰자의 기술-19세기의 시각과 근대성, 임동근, 오성훈 외 옮김, 문학과 학사, 2001, 19쪽.

3)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옮김, 길, 2007, 48쪽.

4)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인간의 확장, 김성기, 이한우 옮김, 민음사, 2002, §.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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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연구에서는 문화구성체의 변화 근거를 상당 부분 매체의 기술 내재적 논리에 두고 있으며 또한 신체의 문제, 즉 지각과 매체간의 관계가 중요한 연구 주제로 상정된다.

이 글에서는 독일의 매체학자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이론을 ‘지각’의 문제를 통해 논의하고자 한다. 키틀러는 정보의 기록과 저장 기술의 변화와 발전을 중심 으로 우리 문화의 형성 기제에 접근을 시도하는 이론가이다. 그는 기록의 기술과 그 방식이 한 시대의 주도적인 ‘기록체계(Aufschreibesystem)’를 구성한다고 보는 데, 여기에는 한 사회의 중요한 정보를 저장, 전송, 재생하는 기술들 및 기관 혹은 제도들까지도 망라되고 있다. 이는 한 문화가 권력과 지식을 관리하는 데에 대한 인식론적인 묘사를 제공하기 위해 물리적, 기술적, 담론적, 사회적 체계를 연결하 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며5) 그가 개별 매체에 대한 분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록 기술을 중심으로 한 여러 담론적 상황을 함께 고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키틀러는 기록체계들이 어떤 변증법적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보며 각 기록 체계간의 불연속성과 이질성을 강조한다. 또한 모든 시대나 문화권이 기록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매체기술의 새로운 변화나 등장, 그리고 이를 전후 해 관련된 제도나 기관들의 대두, 나아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분석하고자 하 는 예술적 현상 및 담론들이 존재할 때 하나의 기록체계가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6) 따라서 키틀러의 매체론은 지각 방식의 연구에 매우 용이한 논의의 틀로 볼 수 있다. 사실 새로운 매체의 출현과 지각 방식의 변화는 상당히 우연적이고 불연속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연적이고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과정 속에 서 어떤 필연적 요소와 인과 관계를 읽어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 으며 이는 키틀러의 두 가지 기록체계에 대한 논의 과정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

5) F. Kittler, Gramophone, Film, Typewriter, tr., Geoffrey Winthrop-Young & Michael Wutz, Standford University Press, 1999, xxiii. 이후로는 본문 중에 (Kittler 1999: 페이지 수)로 표기.

6) J. Armitage, “From Discourse Networks to Cultural Mathematics-An Interview with Friedrich A.Kittler”, in: Theory, Culture & Society, Vol. 23, No. 7-8, December 2006, pp. 24-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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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는 한 시대의 주력 매체기술의 특성이 어떻게 당대의 담론과 사람들의 의 식, 그리고 예술을 포함한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따라서 그의 ‘기록체계’ 분석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시대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도 록 하며 제도와 담론의 관계, 우리 의식 구조의 형성과 변화, 새로운 예술의 등장 과 발전 등 다양한 제반 사항들에 관한 숨겨진 지층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이 글에서는 기록체계 1800과 1900에서 지각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한 키틀러의 논의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키틀러가 말하는 ‘지각론’의 특성과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본격적인 기술매체의 등장 이전과 이후에 지 각에 대한 이해와 그 체험적 특성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줄 것이며 이러한 특성이 당대의 주요 예술 분야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될 것 이다. 또한 글의 말미에는 키틀러의 주장에 대한 반론 역시 짧게나마 제기해 보 고자 한다.

Ⅱ. 기록체계 1800의 ‘지각’과 낭만주의 문학의 ‘환영성’

‘기록체계 1800’은 1800년경의 독일, 즉 통상적으로 고전-낭만주의 시대 혹 은 괴테 시대로 불리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는 기술매체의 등장 이전이 며 키틀러 역시 이 시대의 주력 매체기술을 ‘문자’로 언명한다. 그는 이 시기의 문 자가 그 이전 시대와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이해되었음을 주장하고 있으며 문자 에 대한 이런 새로운 이해가 고전-낭만주의를 가능하게 했음을 분석함으로써 이 시대를 매체론적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키틀러가 기록체계 1800을 형성했던 중요한 변화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어 린이들의 알파벳 교육 방식이 달라졌다는 점이다.7) 이전 시대 아이들의 읽기 교 육은 철저히 문자와의 시각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버지나 남자 교사들 7) F. Kittler, Aufschreibesysteme 1800․1900, Wilhelm Fink Verlag, 1985/2003, pp. 37-42 참

조. 이후로는 본문 중에 (Kittler 2003: 페이지 수)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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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딱딱하고 어려운 성경 속 지명이나 인명을 반복적으로 쓰면서 읽기와 쓰 기를 배웠던 이들에게 알파벳 교육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남는다. 반 면 이 시대에 아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친 사람들은 바로 어머니들이었다. 어머니 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알파벳 자모음을 하나씩 반복적으로 가르쳐 주는 음성적 방법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문자를 익히도록 유도했다.8) 부드러운 어머니의 음성이 아이들에게 문자를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던 것이다.

18세기 말부터 이들 가르치는 어머니를 위한 다양한 교육 방법이 등장했는 데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바로 하인리히 스테파니의 ‘음성적 방법 (Laut-Methode)’이었다. 이는 알파벳 철자를 마치 음표처럼 읽는 방식으로(Kittler 2003:43)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정확한 일치를 목표로 한다. 인간의 음성을 문 자화시키는 구조적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키틀러는 유럽 알파벳의 혁 명은 ‘구두화(Oralisierung)’였다고 말하고 있다(Kittler 2003:42).

알파벳에 대한 이런 새로운 접근 방식을 통해 글쓰기는 입이라는 신체 기관 을 위한 작곡처럼 정의되었고 알파벳은 쓰기가 없어도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처 럼 여겨졌다. 알파벳이라는 자의적인 문자체계가 사람들의 입과 소리라는 신체적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비롯되는 것처럼 인식된 것이다. 문자에 대한 이런 인식은 당시의 문학 작품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키틀러가 기록체계 1800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로 꼽고 있는 E. T. A 호프만의 소설 황금항아리에서는 문 자언어와 음성언어는 모두 자연과 관계를 갖는다. 음성 언어의 근원을 자연으로 보듯 당시 사람들의 문자에 대한 인식 역시 그랬던 것이다. 알파벳을 포함한 모 든 문자는 근원 문자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근원 문자는 말 그대로 상형성을 갖 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안젤무스는 한 사설 도서관에 필경사로 고용된 인물인데 어느 날 자신이 베껴야 하는 양피지 위의 낯선 기호들을 보고 당황한다.

8) 기록체계 1800에서의 가르치는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보다 상세한 분석은 최소영의 독일 낭만주의 소설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키틀러의 매체론적 관점에서 본 프로이트 , 라깡 과 현대정신분석 Vol. 17 No.1 (2015. 겨울) pp. 114-1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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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는 식물을, 더러는 이끼를, 더러는 동물의 형상을 나타내는 듯싶은 무 수한 점과 선, 획과 당초 무늬를 보자, 자신이 과연 그 모든 형상을 정확히 모사해 낼 수 있을지 용기가 꺾였다.9)

안젤무스는 이 낯선 문자를, 자신의 뮤즈이자 가르치는 어머니의 역할을 맡 고 있는 세르펜티나의 음성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해하게 되고 무사 히 필사를 마치게 된다. 이처럼 문자의 상형성은 그것이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기 에 직관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어머니의 음성은 이 런 이해를 촉발시켜 낯선 문자도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읽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보편적 번역 가능성이라 할 수 있는, 문자에 대한 이 러한 인식은 말하기-듣기-읽기-쓰기 능력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로 보는 당대의 관점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으며 이는 인간의 청각과 시각적 감각이 상통하는 것 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알파벳은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신체적 혹은 생리적 조건과 무관하다. 그러나 기록체계 1800에서 언어의 위상은 정신과 영혼의 통로이자 자 신의 근원의 번역으로 여겨졌기에 당시의 알파벳 교육은 아이들의 눈과 귀, 발성 기관을 특정하게 훈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아이들의 몸은 일종의 훈련의 결과를 갖게 된다. 눈으로 문자를 익히던 방식에서 청각적 방식으로 바뀌게 되면서 귀와 눈, 입의 역할 역시 달라지고 신체는 마치 커다란 입처럼 기능하게 된 것이다(Kittler 2003:43). 언어를 소리로 이해하게 되는 방법론 적 변화가 신체 기관의 기능과 관계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게 된 것이다. 따라서 키틀러는 당시의 문자 교본들에서 제시되고 있는 언어의 발달 단계들이 그 당시 의 교육학적 가정에 기초한 언어 발전에 대한 사이비 생물학에 의해 비롯된 것들 이라 주장한다(Kittler 2003:61).

그런데 이렇게 어머니의 음성을 들으며 교육 받은 아이들에게 나타난 결과 9) E. T. A. 호프만, 황금항아리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낭만동화집 1, 차경아 옮김, 이

룸, 2006,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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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하나가 바로 묵독이다. 새로운 알파벳 교육법은 유아 때부터 묵독을 익히도록 한다. 텍스트를 시청각적으로 머릿속에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10) 따라서 키틀러 는 낭만주의적 글쓰기와 시문학의 담론은 묵독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리 고 낭만주의 시와 소설들은 묵독이라는 이 새로운 기술과 연관된 환영의 효과를 강화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즉 글을 읽는 사이 독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으로 영상을 그리도록 하는 묘사기법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예로 드는 괴테의 <나그네의 밤노래>를 살펴보자.11)

모든 산봉우리 위에 정적이 감돌고

모든 나무 꼭대기에서도 너는 느끼리

그 고요함을

숲 속의 새들도 침묵하고 잠시만 기다리라, 곧 그대 또한 쉬게 되리니

이 시에서도 자연에서 시적 화자에게로, 그리고 독자에게로 점차 확산되어 가는 ‘고요함’이라는 청각적 심상이 매우 생생하게 느껴진다. 또한 낭만주의 소설 의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환영을 보는 경우가 많다. E. T. A. 호프만은 물론 괴테, 노발리스 등의 소설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꿈인듯 환영인듯 애매한 환각 속에서 영원한 연인이나 도플갱어를 만나기도 하고 자신의 미래를 보기도 한다. 이렇게 매우 감각적으로 서술된 문학 작품을 읽으며 독자들은 시각

10) 맥루언 역시 르네상스 시대에 인쇄술이 개발된 이후에도 사람들이 소리 내어 글을 읽었으 며 이는 17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고 말한다. 이후 띄어쓰기나 쉼표, 구두점 등이 발전하며 읽기의 속도가 빨라졌고 점차 묵독이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마셜 맥루언, 구텐베르크 은 하계, 임상원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167-170쪽).

11) F. Kittler, “Lullaby of Birdland”, in: Friedrich Kittler Die Wahrheit der technischen Welt, Hg. Gumbrecht, Suhrkamp Verlag GmbH, 2013, pp. 41-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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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청각은 물론 촉각적인 환영을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1800년경 당시 사람들의 언어에 대한 이해 때문에 문학이 상상 력에 기반한 보편적 예술로 자리 잡았고 다른 예술 장르의 작품들을 문학으로

‘번역’하는 것은 이들을 보편적 매체를 통해 ‘해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음성을 통해 익히게 된 문자라는 상징적인 매체의 특성과 한계로 인해 당시 사람들의 지각 방식을 ‘환영성’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키틀러는 기록체계 1800의 시기에 일어난 문자 교육 방식의 변화 및 이를 통한 문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일종의 매체기술적 차원에서의 변화로 보고 있 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생리학적 변화까지도 일으키게 되고 이런 변화 과정의 특징 및 그 결과가 당대의 주류 담론이자 가장 핵심적 예술 영역인 문학 작품 속 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록체계 1800의 지각 방식은, 이제 사 진을 필두로 한 전신, 축음기, 영화 등 아날로그 기술매체의 등장 속에서 또 다시 변화를 준비하게 된다.

Ⅲ. 생리학 및 정신물리학적 실험과 기술매체의 등장

기록체계 1800의 시대에 사람들이 읽는 문자는 마치 연금술처럼 풍경과 소 리로 바뀌어 그들의 영혼을 시적 감정으로 충만하게 했다. 모든 감각이 상상력을 매개로 상호 소통하며 ‘환영’의 효과를 강화했던 것이다. 반면 기록체계 1900의 상 황은 매우 다르다. 키틀러는 괴테로 상징되는 독일문학의 ‘죽음’과 니체로 대변되 는 새로운 글쓰기에 대한 연구로 기록체계 1900의 분석을 시작하는데, 그는 니체 를 이 새로운 매체의 시대, 즉 분화된 매체의 시대를 예고하는 인물로 보고 있다.

니체가 인간의 개념화 작용의 자의성을 강조하는 것은 기록체계 1800의 언어적 존재이자 통합적 주체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니체의 주 장은 그가 언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니체는 언어 를 신경자극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언어는 신경 자극에 대한 시각적, 청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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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들인 이미지와 소리로 구성되는데 이 이미지와 소리 사이에는 어떤 지속성도 통합성도 없이 다만 은유와 치환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12) 언어에 대한 이런 생리학적 접근은 시적 상상력과 같은 보편적 근원의 폐기를 의미하며 대신 ‘시각 의 세계’와 ‘소리의 세계’로 광학과 음향학을 분리하게 된다(Kittler 2003:227). 따 라서 키틀러는 니체가 매체의 분화를 직관적으로 예고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체계 1800이 교육학 분야에서의 개혁에서 시작되고 있듯이, 새 로운 시대의 기록 기술은, 그들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담론들 속에서 그 특징 이 이미 나타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분할’과 ‘분리’이다. 키틀러는 아날로그 매 체들의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인식과 지각 연구 분야에서 나타난 진보에서 비롯 된 것으로 본다. 특히 그는 생리학과 정신물리학적 성과에 주목하는데 예를 들어 프랑스의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는 신체의 각 부위와 기관의 기능을 연구하며 그들의 독립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체 기관이나 장기의 경 우 각각을 독립된 기관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정신이나 의식 차원에서의 기능은 다르다. 말하기와 듣기, 읽기와 쓰기 등의 능력은 포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경계 역시 불분명했다. 기록체계 1800에서 이 기능들을 자연에 근원을 둔 단 일 기능의 연속체로 이해했던 것은 이런 인식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생리학의 발달을 통해 인간의 의식과 관련된 기관이나 기능 역시 수많은 하부 단위들로 분 리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조나단 크래리는 키틀러와 마찬가지로, 인간 감각기구 의 분화와 특화에 대해 연구한 생리학과 그에 영향을 받은 정신물리학자들의 주 장이, 특수화된 여러 요소들의 결합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보여준다고 말한다.

(뮐러, 헬름홀츠 등의) 이론은 상이한 감각들의 신경이 생리학적으로 구분 되어 있다는 발견, 즉 각 신경들은 한 종류의 정해진 감각에 대해서만 수용 가능하며 다른 감각기관에 적합한 것들은 수용할 수 없다는 발견에 기초한 것이었다.13)

12) 프리드리히 니체,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 , 니체 유고(1870-1873), 이진우 옮 김, 책세상, 2001, 447-45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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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틀러가 주목하는 생리학과 정신물리학의 발전이 이루어지던 19세기, 즉 근대는 빠른 ‘속도’를 특징으로 하는 도시 생활의 보편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특징은 기차와 자동차 등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구체화된다. 또한 사람들 이 자연의 리듬이 아닌 기계의 리듬에 따라 일하는 상황이 일반화되며 사람의 신 체는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즉 인간의 지각 자체를 수학화, 과학화하려는 연구가 진행된 것이다. 키틀러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의 몸과 감각이 미디어로 외 재화 되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14)

생리학적 측면에서 지각을 수량화하려는 시도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15) 그리고 키틀러는 생리학적 연구 성과에 기대어 19세기 말에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정신물리학적 실험들의 결과가 아날로그 기술매체 탄생에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 음에 주목한다. 이런 실험결과와 기술매체의 등장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는데, 정신물리학자들의 실험은 기록체계 1800의 산물이라 할 인간의 언어관, 그리고 인간이 추구했던 ‘의미’를 붕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실험은 인간에 대한 이상적인 완성이나 종료지점을 찾지도, 보편적 규범 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대신 인간은 실험 대상으로서 제한된 실험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일종의 표준을 갖게 된다(Kittler 2003:258).

그리고 이러한 실험을 통해 ‘의미’ 이전의 ‘소음’, 기의와 무관한 기표 자체로 서의 언어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언어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연구 과정에서 빌헬름 분트의 타키스토스코프 장치는 실험자의 시야에 문자를 노출하 며 그 시간을 지속적으로 줄여 나갔다. 그리고 0.01초에 이르렀을 때 눈이 어떤 13) 조나단 크래리, 앞의 책, 138쪽.

14)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 1999년 베를린 강의-예술, 기술, 전쟁, 윤원화 옮김, 현실문화, 2011, 13쪽.

15) 지각의 수학화와 수량화는 근대 국가의 출현, 그리고 공장 노동자들과 자본주의의 등장과 도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노동했던 농부들과 달리 공장 노동자들은 기 계의 리듬에 따라 생산 활동을 전개했고 따라서 이들 노동자들의 행동, 사고, 지각 등 모 든 것을 수량화, 계량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공장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는 노동자들의 주의 집중시간과 연동하여 생산에 최적화되었다. 이렇듯 자본주의와 근대 모 더니티의 등장은 인간을 생리학적, 정신물리학적 대상으로 접근하도록 하는 중요한 배경 이 되고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나단 크래리, 앞의 책, 156-15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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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데(Kittler 2003:268) 이렇게 짧은 시간 망막에 노출되는 문자는 의미를 갖지 않는 순수 기표가 된다.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언어의 진열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 능력을 비롯해 인간의 다양한 감각 능력에 대해 진행된 연구의 성과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게 된다. 그리고 기술매체는 바로 이러한, 선험적 인간이 아닌 경험적 인간의 심리와 생리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출현한다.16)

새로운 기술매체 중 영화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잔상효과’와 관련이 있다.

잔상 연구를 통해 지각이 순간적이지 않고, 감각이 순간적으로 연이어 인지될 때 혼합이나 융합의 형태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즉 보는 행위와 얽힌 지 속성이 그 변조와 통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17) 그리고 이런 실험 결과 1825년에는 회전판 장치가 개발되어 대중화되었는데 예를 들어 회전판의 한 면에 는 새가, 다른 면에는 새장이 그려져 있어 이를 회전시키다 보면 우리 눈에는 새 장에 갇힌 새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잔상 효과에 의해 회전판의 두 면을 동시 에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1825년 영국의 로제트는 기차 바퀴의 움직임에서 느 껴지는 착시 현상들에 주목했고 물리학자 패러데이 역시 빠르게 회전하는 바퀴가 마치 느리게 도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조사했다. 스트로보스코프 효과는 잔 상을 이용한 것이며, 영화매체의 발전은 스트로보스코프의 빗살무늬 현상을 제거 함으로써 가능해졌다. 그런데 영화는 운동 자체를 기록하는 장치가 아니다.

영화는 대상의 운동을 촬영하면서 그것을 낱낱이 분해하여 연쇄적 시간으 로 변모시켜야 한다. 순수 수학적 관점에서는 … 이렇게 운동을 분해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 그렇지만 기술적 측면에서는 (정지와 운동 사이 의) 이 경계를 넘는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 (대상의 움직임을) 스캔하는 속도가 무제한으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 학적으로 엄밀히 그런 경계를 넘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의 단편을 얼 16)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269쪽.

17) 조나단 크래리, 앞의 책,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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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 작게 잘라야 적어도 겉보기에 그런 경계를 넘은 것처럼 보일지 고민 해야 한다.18)

영화는 이렇게 인간의 지각에 대한 측정을 통해 그 조작가능성을 기술적으 로 실현함으로써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와 축음기의 가장 중요한 기술적 성과는 인간의 시각적 혹은 청 각적 데이터를 그대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축음기는 소리 자체를 기록했고 영화는 위의 인용문에서 말하듯 실제 그대로는 아니지만 움직임을 시각 적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 정보 데이터가 상징체계인 문자나 악보에 의존하지 않 고 빛과 음파의 형태로 직접 기록된 것이다. 이렇게 시각이나 청각 자료를 기록 하는 매체들이 등장하며 문자 매체의 독점은 무너지게 된다. 타자기의 등장도 이 러한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자기로 인해 글쓰기 자체가 기계화되면서 기 록체계 1800의 문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종이 위에 손으로 글을 쓰는 작 업은 표준화된 타자기 활자체로 대체된다. 손으로 글을 쓰며 몸의 흔적을 남겼던 글쓰기가 기계화된 것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기록체계 1800의 지각 체험의 통합 성은 사라지게 된다.

이들 아날로그 매체들의 또 다른 특징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틀러는 영화가 소리와 연동되는 장치를 개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 요했는가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19) 이는 그만큼 기술매체 사이의 비호환성이 본 질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비호환성을 기술적으로 극복하며 등장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매체이기에 매체의 분화는 아날로그 매체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아직 데이터의 증폭이나 전송은 불가능했지만, 청각과 시각 자료의 시간적 흐름 을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는 장치인 무성영화와 축음기가 등장하며 니체의 예언 은 실현된다.

18)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227쪽. 이 글에서는 영화와 관련된 정신물리학적 실 험들만 소개하였지만 축음기의 등장 역시 헬름홀츠의 생리학적 음향학 연구 등 연관 실험 들의 선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물론이다.

19) 위의 책, 3.2.4. 유성영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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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음기는 실린더와 흑연 디스크에 정보를 기록하고 영화는 셀룰로이드 필름 에 기록한다. 그런데 이 두 매체는 마이크나 카메라 렌즈 영역 안에 있는 것을 무차별적으로 기록함으로써 기록을 무의식적이고 무의도적인 것으로 바꾸게 된 다. 의미 있는 소리를 넘어서는 소음, 의미 있는 장면에서 벗어나는 무작위적인 시각 데이터가 기술적으로 기록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Kittler 1999: xxvi). 그리고 이로써 의미로 충만해 있었던 언어, 자연의 번역으로서의 시적 언어의 효용성은 이제 의미가 아닌 의미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백색 소음의 존재로 대체된다. 니 체는 글을 읽을 때 행간에서 어머니의 음성을 들었던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들과 달리, 자신이 글을 쓸 때마다 들었던 무시무시한 소음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 다. 이것은 측정되지 않는 무한의 배경이나 존재하지 않는 기호들로 볼 수 있다.

모든 소리, 혹은 의미의 배경처럼 무한히 떨리고 있는 미세한 백색 소음은 기록 체계 1800을 가능하게 했던 어떤 상징적 규칙도 갖지 않는 순수 기표들의 흐름을 보여준다. 니체가 글을 쓸 때마다 공포 속에 들었던 그 소음은, 그가 정신병원에 서 끝없이 남겼던 수많은 기록들로 구현된다. 그의 글쓰기는 의미의 세계에 닻을 내리지 못하고 소음의 바다를 떠도는 순수 기표의 흐름이었고 이것은 바로 새로 운 기록체계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Ⅳ. TAM(시간축조정)과 지각의 표준화

기록체계 1900은 정신, 의식, 의미 등으로 나타나는 자율적 주체가 추방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키틀러는 기록체계 1800과 1900의 대조 점을 통합과 분할, 매체 독점과 그것의 붕괴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키틀 러가 중요하게 언급하는 정신물리학적 실험들은 인간 지각의 특성이나 한계를 측 정하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즉 이 실험들은 새로 운 기술매체들을 인간공학적으로 재설정하는 데 이용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키틀러에게 기술매체는 인간의 지각, 즉 인간 신체의 바깥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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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키틀러는 매체적 지각의 특징을 TAM(시간축 변경, Time Axis Manipulation)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TAM이란 시간 연쇄적인 데이터 흐름을 다르게 조작하는 것으로20)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정보의 흐름을 공간 좌표 위에 배치함으로써 가능해진다.21) 따라서 키틀러에게 인간의 몸은 기 술적 매체에 의해 침투되지 않고 또한 도구의 투사로 재구성될 수 없기에 매체가 될 수 없다.22) 인간의 음성이 매체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 재생될 수 없고 데이터 조작의 가능성이 개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몸은 TAM이 불가 능하기 때문에 매체가 아니다. 반면에 문자는 매체다. 문자는 발화 언어를 특정 공간에 자리 잡도록 하는 기술이며 그 기술에 의해 공간화된 구문 구조는 반복이 나 변경도 가능하다. 따라서 키틀러는 최초의 TAM 기술을 문자로 본다. 문자를 통해 시간이 반복될 수 있고 저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비가역적인 질서 가 공간질서로 이동하게 되며 글이라는 매체는 시간 질서를 저장할 뿐 아니라 이 에 대한 변경과 역전이 가능해진다. 키틀러에게 데이터 처리로 간주되는 매체기 술은 바로 사물의 질서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창조하기 위한 공간적 방법이며 무언가를 기록, 저장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질서가 반드시 공간적 구조로 물질화 되어야 한다.23) 키틀러가 인쇄매체의 발명보다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로의 전환을 더 중요한 매체적 혁신으로 보는 것도 정보의 순차적인 질서에서 벗어나는 가능 성을 높이 사고 있기 때문이다. 두루마리는 나중에 올 텍스트를 미리 읽거나 전 에 읽었던 것을 다시 찾아 읽는 것이 쉽지 않다. 두 손으로 조금씩 펼치고 말면 서 글을 읽기 때문이다. 반면에 코덱스는 물질의 시간적 공간을 텍스트 내의 개 인화되고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공간으로 변형하는 최초의 기술이다.24) 그러나 코

20) F. Kittler, “Real time analysis, Time Axis Manipulation”, Draculas Vermächtnis, Reclam Verlag Leipzig, 1993, p. 183.

21) 같은 책, p. 183.

22) S. Krämer, “Friedrich Kittler-Kulturtechniken der Zeitachsenmanipulation”, in:Medientheorien.

Eine Philosophische Einfuhrung, Frankfurt/M., 2004, pp. 203-204 참조.

23) 같은 책, p. 211.

24) 같은 책, p.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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덱스든 책이든 결국 상징체계인 문자를 사용하는 방식이기에 여기서의 데이터 처 리는 상징체계적 질서에 따르게 된다.

그러나 아날로그 매체가 등장하며 이제 시간의 저장과 생산이 말 그대로 자 유로워졌다. 그리고 인간의 시간 경험과 그에 대한 기술적 지배에도 근본적인 변 화가 일어난다. 기술매체는 물질적 실재 자체를 조정 가능한 코드로 변형할 수 있고 이로써 ‘시간적 사건의 역전 가능성’을 만들기 때문이다. 축음기와 영화는 이 를 가능하게 한 최초의 기술매체들로, 에디슨은 축음기 실험을 통해 음악을 거꾸 로 재생할 수 있음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음의 흐름을 새롭게 편집함으로써 TAM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조르주 멜리에스 감독의 영화 에서는 파괴된 돌무더기가 다시 성벽으로 완전히 복원되거나 잘 구워진 소시지가 정육점의 돼지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TAM은 이러한 시간 양상의 조작만을 뜻하 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초기 영화들은 초당 16프레임의 이미지가 영사되었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에서 깜박임 증상이 나타났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날로 그 영화의 표준이 되는 초당 24프레임의 영사로 바뀌게 된다. 이것 역시 TAM에 속하는데 초당 몇 컷의 이미지가 조사되느냐에 따라 각 컷의 영사 시간이 달라지 기 때문이다. 따라서 TAM은 매체의 표준화 과정과 관련됨을 알 수 있다. 초당 16프레임씩 영사되던 초기 영화는 24프레임 표준 영사기로 상영할 경우 정상적인 재생이 어렵게 된다.25) 물론 무성영화 시절, 촬영할 때와 상영할 때의 영사 속도 는 제각각이었지만 엄연히 기술표준은 존재했다는 말이다. 텔레비전 역시 마찬가 지다. 텔레비전의 경우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의 송수신 방식이 다르다.

NTSC 방식, PAL 방식, SECAM 방식 등은 저마다 색신호의 변조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각 방식에 적합한 TV 수상기가 아니라면 화면이 진동하고 보는 사람에게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각 국가는 저마다 자신들만의 표준 방식을 채택 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나 텔레비전이 마치 실재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보 25) “무성영화 시대에는 재생 속도를 늦추거나 높이는 것이 예외적인 기술적 실험이 아니라, 유료 관객에게 가능한 많은 양의 필름을 팔기 위한 일상적 실행이었다. … (유성영화의 등 장 후) 관객은 귀에 들리는 소리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 역시 실시간 프로세싱되고 있음 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306-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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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것처럼 인식되지만 이들의 영상물은 TAM의 결과물이며, TAM은 영화를 비롯한 기술매체의 대량 보급을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산업 표준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26)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에티엔 쥘 마레의 조수이자 해부학자였던 조르주 드므 니의 발화사진 연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드므니는 1904년 프랑스 참모부의 의 뢰로 표준화된 군대식 행진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최적화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 미 1891년에 천분의 1초 셔터 스피드로 ‘프랑스 만세’라는 말을 외치는 장면을 음 절별로 분해해 입모양을 촬영한 바 있다. 드므니의 발화사진에 의해 군인들의 걸 음걸이나 사람들이 말하는 모습은 분할되었고, 당시에 이것은 사람들의 움직임의 정확한 구분 동작으로 여겨졌다. 이런 촬영 과정을 통해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 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드므니는 이 이미지들을 청각 장애인들에게 보 여주고 그 분할된 입의 모양대로 소리를 내도록 했는데 이 실험에서 장애인들은 소리를 전혀 듣지 않고도 ‘프랑스 만세’를 외칠 수 있었다(Kittler 1999:136). 드므 니의 이 연구는 기술매체가 사람들의 지각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보 여준다. 매체가 기록한 장면이 실제 움직임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표준화된 움직임은 곧 자동화되는 효과를 가져 오는데 이것은 기술매체가 가지고 온 새로운 리듬을 이루게 된다.27)

기술매체에 의한 지각의 표준화와 자동화 과정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한 병사들의 훈련 방식에 그대로 적용된다. 적은 늘 빠르게 나타났다. 그러나 측정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 즉 병사들이 적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리듬이 아닌 기술의 리듬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렇 게 훈련을 받았던 병사들의 지각에 보다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전선에 배치된 이후였다. 병사들의 훈련 방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최초

26) F. Kittler, “Real time analysis, Time Axis Manipulation”, p. 191 참조.

27) 키틀러는 드므니의 발화 사진이 입모양을 분절시켜 포착한 시각미디어와 소리 발성이라는 청각미디어간의 기술적 조합을 시도함으로써 유성 영화와 같은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열 망을 보여준다는 설명도 하고 있다. 즉 드므니의 실험은 멀티미디어를 향한 초창기 실험이 라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247-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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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기계화된 전쟁이었다. 자동화 무기가 보급되면서 병사들은 기습적으로 이루어 지는 적의 공격을 피해야 했다. 결국 병사들은 긴 참호를 판 후 그 안에서 대부 분의 시간을 보냈고, 보이는 것은 참호 위의 하늘뿐인 시간 속에서 병사들의 감 각은 점점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자동화 무기의 긴 사정거리 때문에,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적의 모습을 육안으로 보지 못하고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두 참호 사이의 공간은 양측의 포격으로 아무 지표도 남기지 못한 채 폐 허가 되었고 그마저도 계속 모습이 달라져 어떤 공간적 좌표로서의 기능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병사들은 전투 상황도 심지어 자신의 위치조차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전쟁에 임하고 있었다. 반면 이런 상황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항 공촬영으로 얻을 수 있는 사진과 영상물들이었다. 전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촬영 이미지를 통해서였고 전쟁은 지각의 시뮬라크르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은 이런 상황을 보다 가속화한다. 당시 전투기 파일럿들은 역 사상 최초로 하이-파이 입체음향을 경험했다. 나치 공군들은 영국 상륙 작전에서 라디오 빔을 이용해 목적지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다. 영국과 마주보는 해안에 서 방출하는 라디오 빔은 폭격 목표 도시 상공에 위치하는 삼각형 변을 형성했고 파일럿들은 양쪽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신호의 흐름으로 자신의 위치를 인식했 다(Kittler 1999:103). 파일럿들의 지각은 매개된 지각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그 리고 이런 지각 상황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전쟁 기간 중에 빠르게 발전 한 기술 매체와 장비들이 전후 대중문화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라디 오와 텔레비전 산업이 거대한 규모로 성장했고 최초의 전자음악이라 할 록 음악 이 등장했다. 록 음악은 소리를 증폭시키는 전자 통신 장비를 이용해 사람들의 지각을 압도함으로써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기록체계 1800의 지각 방식이 낭만 주의 소설에서 구체화되듯 록 음악과 라디오, 텔레비전 산업 등 전후에 폭발적으 로 성장한 대중문화는 기록체계 1900의 지각 방식을 보여준다. 즉, 기록체계 1900 의 지각방식은 매체를 통한 TAM과 지각의 표준화로 정리할 수 있다.

매체는 우리의 지각을 지배한다. 매체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방식은 우리 지 각의 방식을 구성한다. 우리는 기술적으로 매개된 외부 세계의 재현에 의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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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뿐 그 매체를 가능케 하는 전자기적인 환경과는 직접 상호작용할 수 없는 것이다.28) 이렇게 기술매체의 등장 이후 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은 근본적으 로 매체적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록체계 1800 시기의 사람들도 의무교육을 받으며 익 힌 묵독 속에서 기록된 것을 소비했고 그 속에서 그들의 신체 자체는 상징체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것은 기술매체 시대와는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지각 체험이 조작과 왜곡, 그리고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렇지만 이때는 인간의 신체와 생리적 지각 방식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기록체계 1900 시대 이후에 기술은 말 그대로 우리의 감각지각을 지배하 고 있다. 기술매체의 등장 이후에 무작위적으로 기록되는 기술의 속성을 인간공 학적인 기준에 맞추어 새롭게 지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제작된 수많은 대중문화 컨텐츠가 등장하면서 매개된 지각의 경험이 일상화되고 우리의 세계를 채우게 된 것이다. 이렇듯 기술매체의 등장은 신체의 매개성을 무시할 만한 것으로 만들며 디지털 기술은 그런 경향을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강화한다.

따라서 키틀러는, 인간의 감각이나 지각과는 ‘무관한’ 매체의 기록 방식을 강조한다. ‘지각적, 미학적 특성은 기술적 실현 가능성에 의존하는 변수’29)이기 때 문이다.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지각이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정보를 기 록하고 처리함으로써 ‘인간 지각의 시대’를 끝낸다. 컴퓨터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읽고 쓴다. 그리고 컴퓨터의 실시간 정보 처리는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는 결과로만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정보는 우리 지각에 적합한 것 처럼 포장되어 제공된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 매체는 정보 처리와 커뮤니케이션 을 분리시킴으로써 매체와 인간 감각을 분리한다.30) 이제 정보는 일종의 표면효 과를 통해 이미지, 음성, 텍스트로 나타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눈속임’일 뿐이

28) 최소영,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매체이론 연구-‘기록체계’ 개념을 중심으로- , 홍익대 대학 원, 2013, §4.2 참조.

29)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338쪽.

30) S. Krämer, 앞의 책, p.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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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와 지각은 더 이상 정보처리 및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관 련되지도 않으며 그 주체는 더더욱 아니다. 이렇듯 키틀러는 지각 방식의 형성과 변화에 있어 인간의 본연의 지각이 갖는 역할이 역사적으로 점점 축소되고 있음 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형성되는 지각 방식과 무관한, ‘순수한’ 인간 지 각의 매커니즘의 역할과 의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Ⅴ. 키틀러의 ‘지각’ 개념의 의미와 한계

키틀러가 말하는 매개된 지각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 다. 특히 지각방식이 기술매체의 변화에 따라 재구성된다는 주장은 발터 벤야민 과 상당히 유사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936)에서 사진, 영 화와 같은 복제 가능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며 인간의 지각 방식에도 변화가 생 겼다고 말한다. 대상에 대한 주체적 경험으로서의 아우라의 몰락이 그것이다.31) 심미적 경험인 아우라는 지각형식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다. ‘가까이 있더라 도 먼 곳의 일회적 현상’인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시공간적 거리감을 의미하는데, 전통적 예술작품이 아우라의 근거로 지니고 있는 객관적 특성, 즉 일회성과 유일 성, 원본성이 기술 재생산 시대에 와서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술 재생산 시대에 예술 작품의 존재 방식, 그리고 그에 대한 체험의 방식은 일회성에서 반 복성으로, 지속성에서 일시성으로 전환되고 벤야민은 이런 전환을 ‘아우라의 몰락’

으로 정의한다. 이제 누구나 원하면 어디서나 예술작품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으 며 이로써 예술은 숭배의 대상이 아닌 심미적 대상, 즐김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아우라의 몰락’은 새로운 예술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 을 알리는 표현이다. 또한 이는 예술에 대한 폐쇄적 수용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31) 발터 벤야민, 앞의 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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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작용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벤야민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이

‘영화관’에서 새로운 지각 방식에 대한 훈련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기 계의 속도와 리듬에 따라 노동을 하는데 그것은 시간, 그리고 속도에 대한 우리 의 지각을 완전히 바꾸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벤야민이 ‘정신분산’ 혹은 ‘오락’이 라 칭하는 영화관에서의 새로운 지각 체험은 대도시에서의 생활과 노동, 그 일상 속에서의 생경한 리듬이 가져오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영화가 본질적으로 몽타주의 결과물이라 할 때 수많은 파편적 이미 지의 결과물인 영화는 대도시에서의 시공간 체험이 지닌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 다.

다시 말해 벤야민은 모더니티라는 이 새로운 시대의 지각 방식을 ‘몽타주’적 인 것이라 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그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키 틀러의 기록체계 1900이 아날로그 기술매체 등장 시기부터 디지털 매체 등장 전 까지의 시대라고 볼 때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를 새로운 시대의 속도감과 리듬이 가져오는 지각 방식의 훈련의 장으로 보는 것은, 벤야민과 유사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지각의 방식이 일종의 역사성을 갖고 있으며 이는 각 시대의 예술 체험에서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에서도 이 둘의 관점은 비슷하다.

그러나 키틀러는, 벤야민과 달리 인간의 신체가 ‘거대한 상부구조를 지지하 기에는 너무 약한 토대’32)라는 관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인간의 지각은 본질적으 로 기만당하기 쉽다. 그것은 매체기술의 효과에 매우 쉽게 현혹된다. 낭만주의 시 대의 ‘환영성’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술매체의 등장 이후 인간 지각의 척도 는 생리학적인 기준이 아니라 기술표준이다. 인간의 신체가 매체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기록과 재생, 변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이 렇듯 매개된 지각의 특성과 한계 역시 인간의 신체가 아닌 매체 기술이 수립해 왔다는 것이 키틀러의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맥루언 역시 키틀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론가다. 특히 맥루언은 매체 효과의 기술적 특징들이 인간의 감각 비율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데 문 32) G. Winthrop-Young, Kittler and the Media, Polity Press, 2011, 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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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문화 속의 인간들이 오직 시각 일변도의 매체 의존을 보임에 따라, 이들이 마 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힌 나르시스와 같은 감각 마비에 사로잡힌다 는 주장을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한 것, 즉 매체의 효과에 갑자기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33) 그런데 이런 맥루언의 논의는 기록체계 1800, 즉 낭만주의 시대에 사람들의 지각 방식에 대한 키틀러의 주장과 유사하다 고 볼 수 있다. 당시 소설들에서 문자를 통해 소리와 이미지를 듣고 볼 수 있었 던 사람들의 상황이 많이 묘사되었던 것은 문자에 대한 당대의 이해 방식과 상통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키틀러는, 맥루언이 새로운 매체의 등장을 다름 아닌 인간 지각 능 력의 확장으로 보는 것에 대해 분명히 비판을 제기한다. 맥루언에게 “모든 미디어 는 인간이 지닌 재능의 심리적 또는 물리적 확장이다 … 미디어는 환경을 변화시 킴으로써 우리 내부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여 지각하게 한다. 그야말로 감각의 확 장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 유형-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변화시킨다. 그 리고 이런 부분이 변화함에 따라 인간도 변화한다.”34) 그러나 키틀러는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 기획이 ‘인간 중심의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의미란 기술에 내재적이거나 기술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기술의 현존에 의해 의미가 가능하고 지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와 기술의 관계에서는 기술이 보다 우세한 힘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키틀러는, 매체의 출현과 그 효과를 인간의 감각 기관과의 연관 속에서 바라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그에게 우리 의 감각과 신체는 매체기술의 작동의 장이나 투사 표면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키틀러가 인간의 본질적인 생리학적 지각 방식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 것은 인간 에 대한 폄하가 아닌, 무시간적 가치의 그릇으로서의 혹은 역사의 주체로서의 뿌 리 깊은 인간개념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지각 방식은 기록체 계별로 상이하게 ‘구성’, 혹은 ‘발명’된다. 따라서 그러한 방식은 신체의 본래적 기

33)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인간의 확장, 4장 참조.

34) 마셜 맥루언 & 쿠엔틴 피오리, 미디어는 맛사지다, 김진홍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26-4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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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과는 어찌 보면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달라지는 지각의 방 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매 시대의 예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기록체 계 1800의 지각의 환영성은 수많은 낭만주의 시와 소설 속에서, 그리고 기록체계 1900의 TAM과 매개된 지각은 영화와 대중음악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키틀러의 논의에는 비판을 제기할 만한 지점들이 있다. 먼저, 지각에 대한 키틀러의 논의가 기술매체와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수동성만을 부각시키 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가능할 것이다. 지각 방식의 변화와 역사적 구축에 있어 최소한의, 그리고 최종적 토대는 결국 인간의 생리적 지각이라는 점을 간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TAM의 예로 들었듯이, 영화의 초당 프레임을 몇 컷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환영 효과라는, 우리의 시지각 척도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또한 이후 영화의 다양한 특수 효과나 기법 등이 발 달하면서 우리의 시각에는 매우 기발하고 충격적인 자극이 가해졌지만 그 역시 우리가 이를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새로운 매체 환경에 서서히 적응함으로써 자신을 무장하는 과정을 매체 기술에 의한 ‘조작’의 측면으로만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새로운 정보 처리 방식 은 결국 경험적 지각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생리학적 기반에서 벗어난 지각 체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키틀러의 관점으로는 매체기술의 변화와 혁신에 대해 기술 혁신 의 내재적 역동성과 자율성만이 그 답이 될 수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키틀러 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기술혁신은 어쩌면 기술들이 서로 말 걸고 답하는 과정 에 불과하지 않을까?”35)라고 주장하며 매체기술, 즉 데이터 처리 기술이 변화함 에 따라 전체 문화적 상부구조가 달라진다는 것을 기록체계 1800과 1900의 비교 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기술은 동일한데 담론적, 교육적, 정부 정책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기록체계의 등장이 가능하다는 것 역시 그의 논의 속에서 알 수 있다. 기록체계 1800 이전의 기록체계인 ‘지식인 공화국’에서 기록체계 1800으 로의 변화가 그렇다. 따라서 이런 부분에 있어서, 사람들이 말하고 쓰는 새로운 35)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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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을 만들어 내는 규약들이 기술적 영역이 아닌 사회적인 요소들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점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36)

그러나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매체기술과 인간의 지각, 나아가 존재 방식의 관계를 기술적인 배치의 문제로 규정하려는 주장은, 특히 기술혁신과 발 전을 동일시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귀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 가 말하고 글을 쓰고 정보를 수용, 소통하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매체 의존적이다. 키틀러는 이에 대해 기록체계에 ‘중독’된 상황이라 표현한다. 그 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어떤 필연적이고 영속적인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기록의 기술, 그리고 그 기술의 구조와 방식을 매체론 의 핵심으로 보는 그가, 사라짐을 속성으로 하는 인간의 신체와 본연의 지각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키틀러에게 기록체계를 궁극적으 로 결정하는 요소는 데이터 생산과 재생산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 이 유일하게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기록체계’는 사회의 제반 담론 들과의 연관 속에서 구축된다. 교육학적 혁신과 기록체계 1800, 생리학과 정신물 리학적 성과와 기록체계 1900의 관계가 그것을 보여준다. 다만 다른 매체이론가 들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 본연의 역할이 기록체계의 영향 하에서 구성되고 있는 것임을 보다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키틀러의 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키틀러는 1990년대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 운영체제의 독과점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며 학생들에게 리눅스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등 지배적 코드를 자기 목적에 따라 코딩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행위 주체성을 강조하는 의외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며37) 기술과 권력의 결탁에 반대하며 디지털 시대의 문명에 직면한 우리에게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자율성과 인간이 기술발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강하게 우 리를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해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기록체계 개념을 중심으로 한 ‘지각’에 관한 논의는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담론 36) G. Winthrop-Young, 앞의 책, p. 121 참조.

37)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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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대한 분석과 그에 대한 폭로를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38)

* 논문투고일: 2015년 4월 15일 / 심사기간: 2015년 4월 16일-5월 20일 / 최종게재확정일: 2015 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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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