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 News, Volume 23, No. 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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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유학의 체계를 바꾼 성리학의 완성자
❙이 상 은 교수 (상지대학교)
주희(朱熹, 1130-1200)의 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였고, 호는 가장 널리 알려진 회암(晦庵) 이외에 회옹(晦翁), 자양(紫陽),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 등이 있다. 시호는 문공(文公), 신 국공(信國公), 휘국공(徽國公) 등이 있는데, 주문공(朱文公)이라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공자나 맹자처럼 자 를 붙여 주자(朱子)라고 높여 불렀다. 그는 정이천(程伊川) 사후 22년 뒤에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 생했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안휘성(安徽省)의 휘주무원(徽州婺源)의 호족으로 아버지 주송(朱松)이 관직에 있 다가 전란을 피해 잠시 우계에 와서 머무를 때 태어난 것이다.
주희는 5세 때에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일찍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물을 대할 때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탐구하고 심각하게 사색하였다고 한다. 그는 10세 때 유가경전을 읽으며 공자나 맹자 와 같은 성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주희가 11세 되던 해에 아버지 주송은 당시의 재상이었던 진회 (秦檜)와의 의견 충돌로 관직에서 쫓겨나서 건안의 환계정사에 머물면서 아들에게 자신이 정명도(程明道) 문하 에서 배웠던 학문을 전수했다. 그러나 주희가 14세 되던 해 이곳에서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건안의 세 선생’이라고 불리는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였다. 한편 이 무렵 주희는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었는데, 훗날 그가 그의 사상체계 확립에 불교와 노장사상을 활용 하는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희는 24세 때 이동(李侗)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동은 연평(延平) 선생으로 불리며, 주자의 젊은 시절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그는 북송오자의 전통을 이어받아, 주희에 게 정이천(程伊川)의 학문을 전함으로써 주자학이 완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주희는 1158년에 다시 이 동을 찾아갔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송대의 성리학자들 가운데 불교 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철학 이론을 제창하면서 사상의 주도적 위치를 상실하였던 유학의 학문적, 사상적인 위상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주희는 이동의 영향을 받아 불교와 노장철학 에서 벗어나 유학연구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주희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 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주희는 28세 때 동안현 주부직의 임기를 마치고 귀향한다. 그 뒤로 도 간헐적으로 말단 관직을 받기도 했지만, 실권 없는 명목상의 직책이었다. 그는 임지에서 기근을 구하고 학 교를 재건하는 일들을 해서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주력한 것은 교육과 학문 연구였다.
그는 1179년에서 1181년 사이 강서성(江西省) 남강(南康)의 관리로 근무할 때,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으나 그 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이것은 그 후 서원이 인재 양성과 학문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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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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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3권 제5호, 2020에 큰 도움이 되게 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주희가 교육과 학문에 전념했다고 해서 현실 문제에 관 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희는 황제의 도덕 수양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고, 금나라와의 굴욕적인 화친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절동제거의 직책을 맡았던 53세 때 에는 악행과 불법을 일삼던 당중우를 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조정의 기득권 관료들의 미움을 사기 도 했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초청을 받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직언 을 하고, 늘 소신 있는 의견을 펼쳤으며, 부패와 사욕이 지배하는 정치판을 비타협적으로 공격하다가 파면되거 나 외진 지방의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 정적(政敵)인 한탁주가 주희의 학설과 행실에 대해 중상 모략을 하여 그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저서의 간행과 유포가 금지되었고 정치활동을 비롯한 모든 공 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다.
주희는 복건성 숭안현(崇安縣)에 있는 무이산(武夷山)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우고 제자를 교육했다. 무 이산은 복건성 최고의 명산으로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거대한 암석 그리고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가 8 km 에 걸쳐 아홉 굽이를 돌아나가는 절경이 있다. 주희는 그중에 다섯 번째 계곡을 택하여 정사를 세우고 제자들 을 가르쳤고,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어 부르며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다가 71세의 나이로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년과 1230년에 그에게 시 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주희의 성리학은 즉, 주자학은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고, 사서에 대한 그의 주석서는 과거에 합격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책이 과거 교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문 화를 경직시킴으로써 근대적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유학이 공자에서 집대성되고, 맹자, 순자로 계승, 발전되었으며 동중서(董仲舒)의 건의에 의해 한(漢)나라의 무제(武帝) 이후에는 국교의 지위를 가지고 내려왔으나, 학문적 전통은 끊어진 지 오래였다. 당(唐)나라 말의 한유(韓愈)가 맹자 이후로 끊어진 도통을 잇는다며 본래의 유학사상으로 돌아갈 것을 제창한 후, 유학 중흥의 분위기가 살아났다. 송나라 초기 북송오자(北宋五子)가 나와서 새로운 유학의 태동이 시작된 것이다.
주희의 학문은 이 북송오자 학문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정이천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주돈이와 장재의 사상도 주희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지 역의 강 이름을 따서 그들의 학문을 칭했다. 주돈이의 염학(溓學), 정호와 정이의 낙학(洛學)이나 장재의 관학 (關學)처럼 주희의 학문은 민학(閩學)이라 하였다. 이 넷을 합치면 염락관민(濂洛關閩)이 되는데, 이는 성리학 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공자가 유학을 창시하고 집대성한 분이라면, 주자는 유학의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꾼 인물로 평가된다.
패러다임이란 원래의 의미는 어떤 요인에서 다양하면서도 한편 무관한 듯한 사례가 나타나는 경우, 그 “연쇄 계열”을 패러다임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다양한 관념을 서로 연관시켜 질서 있게 하는 구조”를 일컫는 개념으로 쓰인다. 말하자면 “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 식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공자, 맹자, 순자 시대의 철학을 원시유학, 근본유학 또는 선진유학이라고 부른다.
이 유학의 전통이 대체로 당나라 말까지 답습되었다고 본다. 이에 대하여 송대 이후의 유학은 새로운 체계로 건립된 것으로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라고 부른다. 그 중심에 바로 주희, 주자가 있는 것이다.
주희는 이 신유학의 시발점인 성리학(性理學)의 집대성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북송의 성리학을 종합한 것이 아니었다. 송대의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여, 한대와 당대의 경전 해석을 종합 정리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 욱 풍부하게 했다. 또한 이론적으로 부족한 유학에 노장철학이나 불교의 논리를 취하여 유학사상의 철학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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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완성하였다. 어떤 이는 주자의 사상에는 노장철학과 불교사상이 많이 들어있으니, 순수한 유학이라 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사자가 토끼를 많이 잡아먹었다고 해서 사자를 토끼라고 할 수는 없다는 반론이 더 재미있다.주희는 철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문학과 사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성과까지를 자기의 사상체계 안으로 끌 어들여 종합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는 자신을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늘 독서와 학문 연 구에 열중했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까지도 《대학(大學)》의 주석을 다듬는 일에 몰두했다고 하 는 것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타고난 재능에다 이러한 성실성과 부지런함 이 몸에 밴 그가 아니면 그 이전까지의 모든 학술과 사상을 집대성하여 유학의 방향을 새롭게 바꾸는 일은 불 가능했을 것이다.
주희가 편찬한 책은 모두 80여 종에 이른다. 다른 사람들과 토론한 편지글이 2,000여 편이 남아있으며, 제 자들과 주고받은 대화록이 140편에 달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주희가 친구 여조겸과 함께 주돈이, 정호, 정 이, 장재의 글 중에서 성리학의 핵심을 말한 622개의 항목을 가려 뽑아 14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편찬한 《근사 록(近思錄)》이 있다. 또한 정호와 정이의 어록인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를 편찬하고, 자신의 학문이 이 두 사람으로부터 이어진 경위를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와
《통서해(通書解)》를 지어 주돈이의 사상을 해석했고, 《정몽해(正蒙解)》와 《서명해(西銘解)》를 지어 장재의 기철 학을 자신의 사상에 끌어들였다.
그중에서 주희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사서》에 대한 주석 즉, 《사서집주(四書集註)》였다. 앞서도 언급 했듯이 송대 이후 특히 원나라 이후에 중국의 과거시험 출제의 기본과목이 《사서》였고, 주희의 《사서집주》가 모범답안이었다. 그러므로 노자 철학을 공부하거나 불교를 공부하거나를 막론하고 《사서》는 중국의 지식인들 의 필독도서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 그가 완성한 새로운 유학은 서양문물과 사상이 들어오기 전 까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지식인들이 따르는 보편적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주희의 이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얘기할 수 있다. 첫째는 세상 만물의 발생과 존재근거를 설명하는 이기론(理氣論)이고, 둘째는 만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존재라고 하는 인간의 마음과 본성의 문제를 다룬 심성 론(心性論)이요, 셋째는 인간이 어떻게 완성된 인간인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공부론(功夫論)이다.
먼저 이기론을 살펴보자. 주희의 이기론이 완성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정이와 장재이다. 정이는 만물의 본질을 ‘리(理)’로 보았고, 장재는 ‘기(氣)’라고 보았다. 주자는 이 두 사람의 이론 조합하여 만물의 본 질을 리로 보는 정이의 사상을 중심에 놓고 만물의 변화를 기로 설명하는 장재의 이론을 첨가했던 것이다. 주 자는 모든 존재에는 리와 기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이나 어떤 사물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리 즉, 그 이치는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구체적으로 형체를 띠고 작용을 하는 것은 기 즉, 기운이라고 보는 것 이다.
주희의 이기론은 리와 기를 함께 언급하는 이기이원론 같지만 실은 궁극적인 리를 중시하는 리일원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리와 기의 관계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으며, 서로 섞일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물로 보면 리와 기가 함께 있는 것이지만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리가 먼저라는 생각이다. 주희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궁극의 이치를 태극(太極)으로 보았으며, 개개의 사물에도 각각의 이치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관계를 하늘에 있는 달과 수많은 강에 떠 있는 달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설명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 의 태극이지만 만물이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다음으로 심성론을 보자. 성즉리(性卽理)는 성리학의 기본 명제이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이 곧 이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치는 순수한 원리로 작용하는 능력이 없다. 운동하고 작용하여 드러나는 것은 기이 다. 감정은 기에 속한다. 그러면 이치인 본성이 어떻게 기운인 감정으로 드러나는 것일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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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3권 제5호, 2020심(心)이 필요하다. 심은 심장〔heart〕을 그린 글자이지만 심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라는 기 능을 가리키는 것이다. 본성은 리(理)이고, 감정은 기(氣)이지만 마음은 리와 기를 함께 갖추고 있는 존재로 본 다. 우리 마음속에 본성이라는 원리가 들어있다가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만나면 기인 감정으로 튀어나오게 된 다. 이때 본성을 감정으로 발현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성리학자들은 심통성정(心 統性情) 즉,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성된 성인이 될 수 있을까? 《중용(中庸)》에는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 問學)”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즉, 덕성을 높이는 공부와 학문을 넓히는 공부가 모두 중요하다는 논지이다. 주 희도 물론 이 두 가지 공부가 다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여기에 마음을 경건함으로 채우는 공부〔居敬〕과 사 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궁구해나가는 공부〔窮理〕를 연결했다. 나아가 대학에 누락된 격물치지(格物致知) 부분 에 대해 깊은 통찰과 사색을 통해서 한 장을 보충해 넣고 있다. 이것을 〈격물보망장(格物補亡章〉이라고 부른 것으로 앞서 죽기 사흘 전까지 주석을 손보았다는 부분이다.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의 사상적 체계는 그 깊이와 넓이가 실로 엄청났다. 북송오자를 중심으로 했지만 한나 라와 당대의 학설을 종합했으며, 불교와 노장 철학까지 필요한 부분은 끌어들였다. 거기가 자연과학의 성과까 지를 담아냈으니 과거를 아우르고 유학의 새로운 방향을 연 대단한 인물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칸트와 비견된 다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주희의 학문이 주자학으로 불리며 절대적 권위를 가지게 되면서 지대한 영향 하에서 장점과 함께 폐 단도 생기게 되었다. 주자학을 신봉하는 이들은 새로운 이론을 탐구하려 하지 않고, 설령 그런 시도들이 있어 도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싹을 끊기도 했다. 또한 주희 사상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지배 층들이 그의 이론을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폐단도 있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어서 가부장적 문화나 도덕 지상주의적 사고 등도 결국은 주자학의 이런 부정적인 흐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