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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연구론총 23집> 이광수와 근대적 문체 형성 - 초기문장을 중심으로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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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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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광수와 근대적 문체 형성 - 초기문장을 중심으로 -

85 )

정혜영

**86 )

<목 차>

Ⅰ. 서론

Ⅱ. 일본어 소설 〈사랑인가(愛か)〉와 언문일치에 이르는 길

Ⅲ. 번역이 만들어낸 문체

Ⅳ. 근대적 문체에 이르는 길

Ⅴ. 결론

<국문초록>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다. 여기에는 근대적 내용과 더불어 근대적 문체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정」의 근대적 문체는 여전히 불안정한 형태였다. 시점은 제대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고, 삼인칭 과거형시제의 언 문일치체 역시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문과 순한 글로 이원화되어 있던 개화기의 문자체계에서 「무정」의 언문일치체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 성과는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언문일치체가 안정적으로 확립되어 있던 일본어 창작, 역시 언문일치체가 안정적으로 확립되어 있던 일본어 로 번역된 서양문학의 조선어 번역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1908년부터 『태극학보』에 게재된 이광수 문장의 변화를 시작으로 일본 어 소설 「사랑인가」의 창작,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일본어 번역을 「검둥의 셜음」

의 조선어로 중역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체의 변화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이광수가 언문일치체의 근대적 문체를 어떻게 만들어내었는가를 고찰하였다.

* 본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2016S1A5A2A02925449)을 받고 연구되 었음.

**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2)

<핵심어>

무정, 이광수, 언문일치체, 한문, 한글, 번역, 일본어 창작

Ⅰ. 서론

「무정」 결말부에는 삼랑진 수해 이재민 돕기 자선 음악회 장면 이 등장한다. 미국 유학을 떠나는 형식, 선형, 영채, 병욱 등이 우 연히 한 기차에 타서 부산을 향해 가던 중, 삼랑진에서 수해 때문 에 잠시 쉬게 된 것이다. 이들은 즉석에서 수해 이재민을 돕기 위 한 자선 음악회 개최를 결정하는데 마지막 순서가 선형, 영채, 병 욱의 합창이다. 이들이 부른 합창곡은 익히 알고 있던 찬송가에 영 채가 즉석에서 지은 한시를 이형식이 한글로 번역하여 붙인 것이 다. 우리 근대 문체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한시로 사고를 표현하면 이 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여 일반 대중에서 전달한다는 것, 「무정」 이 발표된 1917년의 조선에서는 이처럼 언어표현과 관련해서 상당히 복잡한 상황이 발생되고 있었 다. 일종의 이중언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한문으로 사고 를 하고, 글을 쓰되, 말은 조선말을 하는 것이다. 한글로 사고하 고, 그 사고가 즉각적으로 글과 말로 나오는 지금 우리 세대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소설을 살펴 보면 영채는 한글보다는 한문에 익숙한 사람이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 박진사의 교육신념에 따라 영채는 어릴 때부터 아버 지 문하 서생들 틈에 끼어서 함께 한문을 익힌다.

이와 같은 영채의 한문소양에 대해서는 소설에서 여러 차례에

(3)

걸쳐서 언급되고 있다. 실제로 영채의 한문 실력은 상당했던 듯, 신여성 병욱의 집에 머물면서 병욱에게 한시를 가르쳐 한시의 재미 에 빠져들게 했을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언어표현과 관련한 이 혼 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문학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 이 탄생하 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광수는 영채로 상징되는 한문을 주된 표기 문자와 한글을 표기문자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던 시대적 상 황 속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서 근대적 문체를 만들어갔던 것일까.

본 연구에서는 이광수 초기문장을 중심으로 그 점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Ⅱ. 일본어 소설 〈사랑인가(愛か)〉와 언문일치에 이르는 길

이광수의 「사랑인가(愛か)」는 1909년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교 교우지 「시로가네학보(白金学報)」에 발표된 일본어 소설이다. 당시 이광수는 열여덟 살로 메이지학원중학교에 유학 중이었다. 「사랑인 가(愛か)」는 이광수 최초의 창작물이자 최초의 일본어 소설로서 내 용은 간단하다. ‘동성애’, ‘소년 간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라는 기존 지적처럼 이 소설은 유학생 문길(文吉)이 귀국을 앞두고 학우 마사 오를 방문하면서 겪는 소년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해 서 ‘사랑’의 시작에서 결말에 이르는 일종의 감정의 기승전결, 예를 들자면 상호 간의 감정교류, 갈등, 사랑의 쟁취 혹은 실패와 같은 명확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소설은 물론 고 전소설의 주된 특징인 ‘이야기’성은 상당히 약화되고 있다.

“못난 자아의 기원”

1)

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사랑인가(愛 か)」 의 주인공 ‘문길’은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다. 소설 을 통해 볼 때 문길의 “지질한 내면”

2)

은 나름의 이유를 지니고 있

1) 강우원용, 「일본문학의 수용과 변용-이광수의 「사랑인가」와 「무정」을 중심 으로」, 『일본학보, 제 103집, 2015. 5, 133쪽

(4)

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진 것만으로도 대부 분 지질해지는데, 그 사랑의 대상이 변심했을 경우 그 강도는 강해 질 수밖에 없다. 문길은 운동회에서 동급생 마사오를 처음 본 순간 마음이 끌린 이후, 그와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애정을 확인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마사오가 냉담해져 버린 것이다. 그러 므로 귀국인사를 핑계로 마사오를 방문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문길 은 마사오의 얼굴을 보고, 그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마사오를 찾 은 것이다. 냉담해진 애정의 상대를 만나 사랑을 확인해보려는데 그 누가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있을까. 지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랑인가(愛か)」 는 한국문학이 지금까지 가 져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을 창조한 문학으로서 평가받게 된다. 말 인즉, 「사랑인가(愛か)」의 문길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이광수는 기존 문학적 전통에서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만들어 내 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기존문학적 전통속의 영웅적 인물들처럼 흔 들림 없는 신념 아래 역경을 개척하기는커녕 짝사랑과 같은 사소한 감정에 발목이 잡혀 끊임없이 멈칫대며 갈등한다. 아울러 지질하다 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우유부단하고 모자란 측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 과 운명을 들여다보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운명을 자 신이 쥐고 있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이라고 부를 수 있 는”인간, 즉 “사고능력에 의해 독립적인 주체”

3)

로서 탄생되게 된 다.

문길의 우유부단함을 그대로 빼닮은 또 다른 근대적 ‘자아’ 이 형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무정」이 발표된 것이 1917년. 「사랑인가

2) 강우원용, 「일본문학의 수용과 변용-이광수의 「사랑인가」와 「무정」을 중 심으로」, 『일본학보, 제 103집, 2015. 5, 133쪽

3) 임영봉,「이광수 문학과 식민지 근대체험」, 『어문연구』, 한국어문교육연구 회, 2003. 가을, 250-253쪽

(5)

(愛か)」 발표로부터 8년이 지나서였다. 그렇다면 이광수는 어떻게 해서 「사랑인가(愛か)」를 통하여 이전의 문학적 전통과는 다른 ‘근 대적 자아’, ‘자율성을 지닌 독립적 주체’를 지닌 새로운 인물유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아울러 일본어 소설 「사랑인가(愛か)」

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무정」의 창작에 이르게 된 것일 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사랑인가(愛か)」 창작 1년 전 조 선어로 발표된 세 편의 논설 「국문과 한문의 과도시대」(1908)와 「隨 病投藥」(1908), 「혈루(血淚)」(1908)의 문체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우리聖朝가亞細亞東半島의樂園을開拓하샤우리民子로하여곰此 에居며此를守하며此를발전케 시니, 此土를 文明케 며 此土를 守야 萬一外人이 此土를 犯 者 有거든 生命을 犧牲야셔 라도 固守야 一步라도 退지 못ㄹ 것은 大韓民族의 義務라.

然 한 則 國民의 精粹되 國語를 발달 거슨 不待多言이로대 此 를 有形게 발표 國文을 維持發達도 亦是國民의 義務가 아 닌가.

4)

2) 嗟哉라. 三千里 錦繡江山에 四千餘年 彬彬 역사를 有 我 大韓民族이 今日 塗炭魚肉의 悲慘 暗黑洞中에 陷 거시 果然 何에 由엿가. 獨立旗를 눕히 달고 自由鐘을 크게 울일 方針이 果然 何에 在뇨. 此를 講究은 實로 我韓 同胞의 急務라.

5)

3) 君等이 余를 指야 屠獸者의 首領이라 도다. 然하다, 余 實노 屠獸者의 首領이며, 兼야, 屠人者의 首領이로라. 余가 惑은 猛獸로 더부러 惑은 同胞로 더부러 格鬪이, 임의, 數千餘回 에 至호대, 일즉, 한번도, 敗 時가 無고 戰必勝, 攻心取라. 余 의 此名을 得이, 엇디, 偶然리오.

6)

세 편의 글은 모두 『태극학보』에 실린 것으로 문체는 국한문

4) 이보경, 「국문과 한문의 과도시대」, 『太極學報』21, 1908. 5.( 『이광수초기 문장집』1(최주한 하타노 세쓰코 엮음, 소나무, 2015, 23쪽)에서 재인용) 5) 이보경, 「隨病投藥」, 『太極學報』25, 1908. 10.( 『이광수초기문장집』(앞의

책, 25쪽)에서 재인용)

6) 이보경, 「혈루(血淚)」,『太極學報』26, 1908. 11.( 『이광수초기문장집』(앞의 책, 28쪽)에서 재인용 )

(6)

혼용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한문에 한글 조사만 붙인 한주국 종체(漢主國從體에) 가까운 국한문 혼용체이다. 특히 2)번 글의 경 우는 제목부터 ‘隨病投藥’으로 한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 아 니라 글 구성 양식 역시 한문의 일반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자면 한시나 한문산문의 시작부분에 흔히 사용되는 감탄사 ‘嗟哉’

를 동일하게 채택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런데 흥미롭 게도 이광수는 ‘국문’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문체혁명과 관련 한 그 내용을 한주국종체에 가까운 국한문혼용체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이광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 『태극학보』에는 한문의 폐 해를 지적하고 국문 사용을 주창하는 여러 편의 논설이 게재되어

“한문이라는 표기체제로서의 문자만이 아니라 한문 고전의 세계관 을 동시”

7)

에 비판하고 있었는데 이들 논설이 모두 한주국종체에 가까운 국한문혼용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드물기는 하지만 기고문의 경우 국문으로 작성된 것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1907년 4월 24일에 실린 회원 이원붕의 모친 백씨가 쓴 「불학무식 집안의 가 홈을 구경함(긔셔)」가 그것 이다. “나는 본래 무식 녀인이라.”로 시작되는 이 글은 “셰월의 가고 오 것도 아지 못고 초토에 뭇치여”

8)

라는 문장에서 나타 나듯 이 글은 가정에 묻혀서 육십년을 보낸 한 여인이 느낀 조선의 전근대적 가정의 문제점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이외 대부 분의 글은 ‘국한문혼용문’이라고는 하지만 한주국종체, 즉 한문의 문장구성에 한글조사가 덧붙여진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순한글 기 고문이 게재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 쪽에서는 한문한주국종체로 ‘국 문중심의 국한문 혼용’을 주창하는 글이 게재되는 역설적이고도 이 율배반적인 상황이 『태극학보』에서 발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7) 노춘기,「근대계몽기 유학생집단의 시가 장르와 표기체계에 관한 인식연 구」, 『한민족문화연구』제40집, 2012, 181쪽

8) 회원 리원봉 모친 백씨, 「불학무식 집안의 가 홈을 구경함(긔셔)」,

『태극학보』 9호, 1907. 4. 24, 19쪽

(7)

이광수 역시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 상황을 만든 장본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광수는 한문의 완전한 배제보다는 국한문혼용을 대 안으로 제시하고 나선 다른 필진들 중에서 유일하게 “국문전용의 정당성을 주장”

9)

하고 있었다. 그는 국문과 달리 학습과 보급력에서 제한적이었던 한문의 문제점을 주장하는데 그 주장을 담은 문체가 주목할 만하다. 문장 중 “漢文으로 經을 삼고 國文으로 緯를 삼

者라. 此 비록 漢文을 專用함보다 優하리로대, 역시 漢文 不可 不學의 廢가 有니 其宜를 得얏다 하지 못하리로다”

10)

라는 부분 을 예로서 거론할 수 있다. 이처럼 이광수는 순한글 사용의 주장을 한주국종체(漢主國從體)의 국한문혼용체로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 다. 물론 이광수를 비롯한 대다수 필진들이 한문교육을 받은 세대 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태극학보』의 표기문체와 주장 내용 간에 발 생하는 이 간극이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11)

그러나 이광수의 경우, ‘한문 독서체험’에 기반한 ‘관습적 태도’

에 깊이 함몰되어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왜냐하면 불과 1년 만에 발표된 첫 창작소설 「사랑인가(愛か)」 에서 ‘삼인칭 ㅆ다’의 언문일치체를 구사하며 내면과 근대적 자아의 형성을 이루 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성과가 언문일치체가 이미 달성된 일본어의 힘 덕분이었을까. 일본어로 창작했다고 해서 갑자기 이광 수가 그때까지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한문의 언어적 관습과 한문이 불러일으키는 이데올로기의 관습에서 갑작스럽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 점에서 「사랑인가(愛か)」에 이

9) 노춘기,「근대계몽기 유학생집단의 시가 장르와 표기체계에 관한 인식연 구」, 『한민족문화연구』제40집, 2012, 185쪽

10) 이보경, 「國文과 漢文의 過渡時代」, 『太極學報』21, 1908. 5( 『이광수초기 문장집』(앞의 책, 24쪽)에서 재인용)

11) 노춘기는 이를 두고 “기존의 한문중심의 독서체험과 관련한 한문의 유용 성에 대한 옹호라는 관습적 태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노 춘기의, 「근대계몽기 유학생집단의 시가 장르와 표기체계에 관한 인식연 구」( 『한민족문화연구』제40집, 2012, 185쪽)를 참조했음

(8)

르는 이광수 의식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한주국 종체로 이루어진 이광수의 또 다른 글 「血淚」는 중요한 근거가 된 다.

「血淚」는 ‘희랍인 스팔타쿠스의 연설’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나라를 잃고 로마의 노예가 된 검투사 스팔타쿠스의 연설을 담은 글이다. 그래서 연설문을 읽고 있으면 나라를 잃은 이광수의 슬픔과 노예 상태로 전락한 스팔타쿠스의 슬픔이 자연스레 중첩되 어 전해져 온다. 波多野節子도 말하듯 “국한문으로 쓰여지고 있으 면서 한자(漢字)의 건너편에서 음성이 울려 퍼져 오는 듯”한데 그 소리는 “나라를 잃은 고아 이광수 자신의 소리”

12)

인 것이다.

그러나 波多野節子의 지적과 달리, ‘나라 잃은 고아’ 이광수의 음성은 그의 슬픔의 크기에 비해서 아주 미미하게만 울려오는데 그 이유는 ‘한자(漢字)’에 그 목소리와 슬픔이 갇혀있기 때문이다. 「血 淚」에서 이광수는 6달 전 발표한 논설 「國文과 漢文의 過渡時代」에 서 사용하던 감탄사 ‘嗟哉’를 ‘슬프다’로 바꾸는 등, 한글체로의 변 환을 위한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어제밤, 余의 게, 아러따온, (키)스를, 주신, 慈母난 馬蹄에, 발폇고”

13)

란 구절에 서 나타나듯 한글로 표기된 영어 ‘키스’라는 용어와 한자 ‘馬蹄’가 뒤섞여서 상당히 혼란스러운 형태를 초래하고 있다. 이 문체의 혼 란 속에서 나라를 잃은 고아 이광수의 슬픔은 독자에게 이르지 못 한 채 표류해버린다. 여기에 더하여 「血淚」를 이루는 한주국종체의 문체가 이광수 개인의 분노와 슬픔의 소리를 ‘집단의 소리’로 몰아 가버리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음성중심 언문일치체의 대척지점에, 선험적 관념이 지배하는 형상적 세계로서 한문체를 두고 “형상(漢字)의 억 압”이라는 용어로서 그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14)

한자중심의 표기

12) 波多野節子, 「無情の表記と文体について」, 『朝鮮学報』 제 236집, 2015.

7, 1쪽

13) 이보경, 「血淚」, 위의 책, 29쪽

(9)

체계에는, ‘民’이라고 표현하는 순간 ‘經世濟民’이라는 한문학적 세 계의 ‘民’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것과 같은 선험적 관념성을 내포한 기묘한 ‘형상의 억압’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태극학보』 수록 가사 표기체계의 일관된 특징, 즉 한문문투의 표기체계는 이 점에 서 주목할 만하다. 『태극학보』 수록 가사들은 “경치에 대한 묘사에 서부터, 사적 감정으로 이어지는 구성, 단순한 한자 어휘의 노출이 아니라 한문투의 구절들을 적극 삽입하고 있는 점 등 한시의 형식 과 관습으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

15)

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를 논자에 따라서는 주된 독자층과 연결시켜 분석, 설명하기 도 한다. 『태극학보』 수록 가사의 표기체계는 “창작주체의 동기 및 화자의 발화방식이 독자로서의 일반 대중을 크게 의식하지 않”

16)

은 것으로서, 청자의 범위를 한문독서 습관에 익숙한 유학생을 염 두에 둔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 분석을 뒤집어 말한다면 필자 역시 한문을 주된 표기체계로서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 된다. 즉 『태극 학보』 수록 가사의 작가들은 ‘한문’을 습득하면서 성장했고 ‘한문독 서습관’에 익숙하여 한글표기보다 한문표기를 편하게 구사할 수 있 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태극학보』 수록 가사 의 작가들의 주된 표기체계였던 한문의 문맥이 대변하는 사고나 감 각의 형태가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고의 문제와 문체의 문제를 분리해서 논하기란” 불가능한 것으 로 “한문이야말로 천하국가를 논함에 적합한 문체였고, 이것이 아 니고서는 천하국가를 말하는 틀 자체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17)

14)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민음사, 1997, 95 쪽

15) 노춘기,「근대계몽기 유학생집단의 시가 장르와 표기체계에 관한 인식연 구」, 위의 책, 199쪽

16) 노춘기, 「근대계몽기 유학생집단의 시가 장르와 표기체계에 관한 인식연 구」, 앞의 책, 201쪽

17) 사이토 마레시, 황호덕 외 옮김, 『근대어의 탄생과 한문』, 현실문화,

(10)

한문맥은 “사람으로서의 삶의 방식이 아닌 사(士)로서의 삶의 방식”

18)

을 말하고 있었다. 이 때 ‘사(士)’의 자기인식의 중요한 측 면을 이루는 것이 ‘통치를 향해가는 유학’이었으며 ‘공(公)’

19)

을 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태극학보』 수록 가사들이 일관되게

‘조선동포의 계몽’과 같은 집단의 문제, 즉 공(公)의 세계를 논하고 있었음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한문을 표기체계로 선택 한 순간 “한문이 내포하고 있던 사대부의 에토스”

20)

가 작가의 의식 속에서 강하게 발현되고, 이와 같은 의식의 발현이 내용으로서 표 현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혈루」에서 발견되는 표기문체의 사소한 변화를 감안할 때 이광수는 한문 중심 표기체계의 이와 같은 본질 을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혈루」의 경우, 국권 상실이라는 공적 영역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집단의 문제를 스파르타쿠스라는 한 개인의 삶 속에 집약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사적 영역’을 다루는 글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문맥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감정을 드러내는 감탄사 ‘嗟哉’를 ‘슬프다’라는 한글로 바꿈으로써 스파르타 쿠스의 ‘슬픔’이 집단 전체의 슬픔을 상징함과 동시에 개인의 감정 으로 국한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 ‘키스’라는 개인적 관계를 의미하는 영어와 ‘아러따온’이 라는 한글 형용사까지 더해지게 되면서 「혈루」는 기존 한문맥과는 다른 세계를 보이고 있다.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언문일 치의 힘과 공적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한문맥의 세계가 서로 충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인가」에서 이루어낸 ‘근대적

2010, 55쪽

18) 사이토 마레시, 황호덕 외 옮김, 『근대어의 탄생과 한문』, 앞의 책, 45쪽 19) 사이토 마레시에 따르면 한문은 “근세 일본의 여러 가지 문체 가운데 가

장 격조 높은 문체로 간주”되었으며 “천하국가를 논하는 문체”였는데, 여 기서 천하국가를 논함이란 바로 “공(公)”을 논하는 것이라고 한다.(이상의 내용의 대해서는 사이토 마레시의 앞의 책, 65쪽을 참조하였음) 20) 사이토 마레시, 황호덕 외 옮김, 『근대어의 탄생과 한문』, 위의 책, 131

쪽.

(11)

자아’와 ‘내면’의 확보는 「혈루」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도 좋을 듯하 다. 「혈루」에서는 어머니의 키스가 준 따뜻한 기억, 말발굽에 밟혀 삶을 마감한 어머니의 죽음이 일으킨 비애와 분노, 절망 등 노예 스파르타쿠 개인의 내면적 슬픔과 혼란이 ‘한문’에 갇혀 제대로 분 출되지 못하고 있었다. 슬픔, 그리움 등 한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 라는 것은 ‘천하국가’를 논하는 ‘사(士)의 삶의 방식’에서는 배제되 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발산을 바라고 있던 평범한 개인의 이야기

21)

가 비로소 언문일치가 달성된 일본어를 만나, 발현 된 것이 「사랑인가(愛か)」였다고 할 수 있다.

Ⅲ. 번역이 만들어낸 문체

「사랑인가(愛か)」에서 이광수가 근대적 자아와 내면을 지닌 인 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언문일치체가 이미 형성되 어 있던 일본어 속에서 달성된 것이었다. 조선어를 통해 그와 같은 근대적 인물을 만들어내기까지는 아직은 더 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 다. 여기에 ‘번역’은 중요한 하나의 과정이 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하타노 세쓰코(波多野節子)는 단편 「무정」과 번역작 「어린 희생」간 의 차이를 거론하면 “번역은 이광수가 조선어 문장을 만들어감에 있어서 큰 도움”

22)

이 된 것으로서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을 감안하면서 단편 「무정」과 번역작 「어린희생」을 살펴보면 두 소설은 일단 문체에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1) 以上, 부인이라 여온 사람은 松林 韓座首의 子婦라. 本是

21) 야나기다 구니오가 일본 최초의 근대소설로 언급되는 후타바테이 시메 이의 〈뜬구름〉을 읽고 영웅호걸이 주인공이 아니라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 인 것에 놀랐다고 언급한 것은 이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민음사, 1997, 77쪽

22) 波多野節子, 「無情の表記と文体について」, 위의 책, 21쪽

(12)

同郡 某齋長의 獨女로셔 일즉 父親을 여의고 母親과 老祖母下에 其 아우 하나로 더부러 길너 사람이라. 家勢도 有餘야 女婢男僕 에, 물 길어 본 적 읍스며, 또 其母 五十 너문 喪妻ㅅ꼴에 싀즙 와 二十五에 寡婦가 되야 다문 두 子息을 바라보고 白髮이 되도록 사라 왓니, 別노 敎育잇 이도 안이요, 다못 ‘무던 사’이러 라.

23)

2) 老人은 그릇보지난 안엿난가 하야 다시금 보더니 電報를 국 여주이고 눈이 둥굴하야 왼편 억개에 손 집고 섯난 少年을 본다.

少年도 그 적은 몸이 불불 떨니며 눈에 이슬이 매쳐 사람이 아모 말도 업시 서로 보고 잇난 것이 精神일흔 것 같더라.

24)

단편 「무정」은 「어린 희생」과 거의 동시기 조선어로 발표된 이 광수 첫 창작소설이다.

25)

같은 시기 발표된 두 소설이 문체와 내용 에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낸 것에는 일단 발표지면의 차이가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편 「무정」은 「태극학보」에, 「어린 희생」은 『소년』잡지에 게재되었다. 알려진 바대로 「태극학보」는 한 문독서체험을 지닌 독자층을 주된 대상으로 한 잡지였던 반면, 『소 년』은 “국주한종과 언주문종체를 처음으로 쓴”

26)

최남선이 자국어 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발행한 잡지이다. “이광수의 초기 문필활 동이 최남선이 짜놓은 자국어 글쓰기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

27)

라는 지적처럼 『소년』이라는 발표지면과 이광수의 한글 중심문체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글’에 대한 이광수의 인식을

『소년』 잡지의 자장(磁場) 속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보기만은 어려울 듯하다. 내용에 따른 문체의 차이가 두 편의 소설에서 발견되고 있 기 때문이다.

23) 孤舟, 「無情」, 『태극학보』11, 1910. 3. (『이광수초기문장집』(앞의 책, 78 쪽)에서 재인용)

24) 孤舟譯, 「어린 犧牲」, 『少年』2, 1910. 2.( 『이광수초기문장집』(앞의 책, 64쪽)에서 재인용)

25) 「무정」 1910년 3월부터 4월까지 『태극학보』에 연재되었고 「어린 희생」은 1910년 2월에서 5월까지 『소년』에 연재되었다.

26) 이광수, 「조선문단의 현상과 장래」, 『동아일보』, 1925. 1. 1.

27) 신지연,「소년의 문체연구」, 『민족문화연구』제 42호, 192쪽

(13)

단편 「무정」은 조혼의 악습이 횡횡하던 전근대적 조선을 살아 가는 한 여자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전근대적 의식을 지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탓인지 「무정」은 고전소설의 상투적 형식인, 주 인공의 집안 이력 설명과 같은 전통적 서술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여기에 “前者에 屬 可憐 뎌 婦人은 孤獨의 悲哀가 其極點에 達야 愛를 失 時에 其幸福과 깃붐을 일코, 其至에 其生命지 바리려 하도다”처럼, 한주국종체와 국주한종체가 뒤섞인 문체는 이 소설의 전근대성에 한 몫 한다. 그 결과 이광수가 주제로 삼은 조혼 폐지의 근대적 의식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채 한 여자의 기 구한 삶의 여정을 다룬 구슬픈 고전 소설 한 편이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소설은 도입부에서 더 이 상 내용이 전개되지 않고 갑작스럽게 끝내버리고 만다.

「무정」은 조혼한 남편이 오입에 눈을 돌리게 되고, 이 와중에 갑작스레 임신을 하게 된 여주인공이 뱃속의 아이에 마음을 붙이며 살아가려는 그 지점에서 소설이 갑작스럽게 끝나버린다. 이처럼 어 이없는 결말에 대해서 이광수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지 소 설 말미에 나름의 이유를 덧붙이고 있다. ‘이 편은 사실을 부연한 것이며, 장편이 될 재료로서 학보에 게재하기 위하여 대략적인 줄 거리만 적은 것’

28)

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소설의 전반적 전개를 볼 때, 단편 「무정」은 대략적인 줄거리도 제대로 담지 못한 채 끝나고 있다. 거의 동시기 발표된 「어린 희생」이 완결된 이야기 로서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적 어도 발표지면의 차이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가 없을 듯하 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광수는 「어린 희생」에 대해서 ‘번역’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28) 이광수는 단편 「무정」말미에 “(作者曰) 此篇은 事實을 敷衍한 것이니 맛 당히 長篇이 될 材料로대, 學報에 揭載키 爲야 梗槪만 書 것이니 讀 者 諸氏 諒察하시”라고 덧붙이고 있다.(孤舟, 「無情」, 『태극학보』11, 1910. 3. (『이광수초기문장집』(앞의 책, 86쪽)에서 재인용)

(14)

관련해서 하타노 세쓰코는 「어린 희생」은 “영화를 번역”한 것

29)

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정확하게 무엇을 번역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광수와 하타노 세쓰코의 언급, 그리고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어떤 외국 지역에 사는 한 소년의 비극적 삶을 담은 내용 등 에 비추어 볼 때, 「어린 희생」이 서구 문학의 번역 혹은 이광수가 관람했던 영화를 再서술한 것이었던 점은 분명했던 듯하다. 그래서 인지 소설은 서사 구조에서부터 주인공 이력 설명으로 시작되던 고 전소설의 일생형의 서사구조에서 탈피해서, 주인공 소년이 아버지 의 전사소식을 듣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 은 한 인간의 전 생애를 다루던 고전 소설과 달리, 적국 러시아 군 들에게 대항하다가 희생당한 한 소년의 비극적 삶의 부분을 집중적 으로 다루고 있다. 이광수는 이 비극적 삶을 국주한종체의 문체를 통해서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같은 시기 발표된 두 편의 소설의 문체와 서사구조에서 왜 이 런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어린 희생」 이 ‘번역’이라 는 점을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 소설의 번역이 었건, 관람했던 서구 영화의 再기술이었던 간에 이광수는 서구 근 대문예물인 「어린 희생」의 번역과정에서 표현 문체의 문제에 직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존 ‘한주국종체’로는 갈등에 빠 진 소년의 내면 변화를 묘사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혈루」 주인공의 개인적 갈등 묘사를 통해서 직면했던 문제이 기도 했다. 「어린 희생」의 주인공 소년 역시 기존 고전소설의 영웅 적 주인공들과 달리 개인적 갈등에 휘말려 있다. 그는 조국을 위해 서 목숨을 바치고자 하면서도 나이든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연민 으로 멈칫대고 있다. 이와 같은 주인공 소년의 ‘내면’의 갈등을 조 선어로 ‘再구성’하고 ‘再기술’해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체가 필요했 던 것이다. ‘한주국종체’는 바로 이와 같은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었

29) 波多野節子는 위의 논문에서 「어린희생」은 영화를 번역한 것으로서 명시 하고 있으나 그 영화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15)

다. 말하자면 근대적 내용이 근대적 문체를 형성해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편 「무정」의 불완전한 결말과 같은 서사구조의 결함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주국종체’의 한문맥이 상투적 내용과 서사구조를 만들어낸 것인지, 상투적 내용과 서사구조가 ‘한 주국종체’의 한문맥을 불러낸 것인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단편「무정」이 전통적 고전소설의 상투적 서사구조와 내용을 그대로 답습해가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던 듯하다. 일본어 소설 〈사랑인가(愛か)〉와 조선어 번역작 「어린 희생」의 근대문학적 성과를 감안할 때, 단편「무정」의 이 문제는 이광수 스스로도 예측 하지 못한 일이었던 듯하다. 도입부에서 갑자기 소설이 끝나버리는 것과 같은 극단적 선택을 취한 것에서 그의 당황스러움을 읽을 수 있다. 이광수에게 있어서 전근대적 세계로 급하게 회귀해가던 단편

「무정」에 급(急)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창작을 끝내는 것, 그 이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광수는 이질적 내용을 담은 두 편의 소설, 단편「무 정」과 「어린 희생」을 동시에 창작하면서 근대문학의 성립과 관련한 시행착오 과정을 겪고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지향 하는 새로운 문학이란 단편「무정」의 문학적 전통, 정확하게 말해서 문체 및 전통적 서사구조와 완전하게 결별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결별의 빈자리를 서구의 근대 문학적 관습으로서 채워야 한다는 것을 함께 깨달을 수 있었던 듯하다. 즉, 「어린 희생」을 통해서 불완전하지만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구 근대문학 적 관습을 익히는 데에 서구소설의 번역은 유효한 한 방법이었다.

이 점에서 번역작 「검둥의 설움」은 주목할 만하다. 「검둥의 설움」은

미국 여성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 1852년 발표작, 「Uncle Tom’s

Cabin; or Life Among the Lowly」

30)

, 한국어 번역명 「톰 아저

씨의 오두막」을 조선어로 번역한 것이다.

(16)

「톰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경우, 서문에서 “흑 인에 대한 동정심을 자극해서 노예제도를 무너뜨리는 것이 소설을 집필한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 대한 일반적 평가 역시 집필 목적에 따라 “합법적인 노예제도와 법의 정당성을 문제로 제기”

31)

한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광수가 「검둥의 설움」

이라는 제목으로 「톰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조선 어로 번역한 것 역시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평등과 박애에 기초 한”

32)

원작의 주제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듯하다.

33)

물론 소설에 내재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강조”와 같은 부정적 면모가 다수 논자들에 의해서 지적되기도 하지만, 이광수는 이 소 설에 등장하는 흑인 노예들의 비참한 상황을 조선의 상황과 중첩시 켜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다.

일단 이광수는 원작에 근접한 일본어 번역을 저본으로 하여, 원작의 내용을 가능한 한 살리는 선에서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은 번역태도는 당시 조선에서는 의외였다. 일본어 번역을 저본으로 하

30) 이하 본 논문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톰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원제로서 사용하기로 함.

31) 김봉은, 「이바와 톱시:『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이분법적 만화경」, 『미국 소설』19권 1호, 2012, 47-48쪽.

32) 최주한, 「『검둥의 설움』과 번역의 윤리-정치학」, 『대동문화연구』제84집, 390쪽

33) 「톰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은 발표 당 해인 1852년에만 32만부가 팔려서 “성경 다음의 세기적인 베스트셀러”였으며 “1855년에는 오늘날의 가장 대중적인 소설로 공인”될 정도, 미국대중들에게 파고든 작 품으로서 평가된다. 백인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이 소설이 이처럼 열렬한 대중적 환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에는 이 소설이 “표면적으로는 노예제도 에 반대하면서도 백인우월주의를 크게 위협하지 않는” 태도를 표명하여, 다수의 백인 독자들이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유도”했다는 점이 중 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지적된다. 실제로 「톰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은 후대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흑인을 백인이 원하는 모습 으로 왜곡 묘사”한 것, 즉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비판을 받는다.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는 김봉은의 「이바와 톱시:『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이분법적 만화경」( 『미국소설』19권 1호, 2012, 48쪽.)을 참조했음.

(17)

되, 중역(重譯) 과정에서 인명, 지명 등을 조선의 상황에 맞추어 변 용하거나, 내용을 과다하게 축약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번안’이 조 선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번역태도는 당시 의 조선독자 대중의 수준 및 문학수용능력을 고려하면 당연한 것이 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완역에 가까운 번역을 선택한 이광수의 번역 태도는 오히려 당시 조선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무시한 비현 실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광수는 번역과 관련해 서 왜 이처럼 비현실적 선택을 했던 것일까.

「검둥의 셜음」의 서문에서 이광수는 “글이라 면 음풍영월인 줄만 알고 책이라 면 세닙 자리 신소셜이라는 것으로만 녀기 는”

34)

조선 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학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면서 새로운 문학의 성립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이 큰 글을 올글게 우리 글로 옴기고 십흐나 힘과 세가 허락지 아 니야 겨오 대강에 대강을 번역”

35)

하였다면서 새로운 ‘문체’의 성 립을 향한 열망 역시 함께 보이고 있다. 이처럼 「검둥의 셜음」번역 에는 근대문학성립을 향한 이광수의 열망과 강력한 소명의식이 강 력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통적 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문학양식, 새로운 문체의 형태를 이광수는 「검둥의 셜음」 번역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둥의 셜음」은 당시 조선인들이 알 리가 없었던 ‘켄터키’라 는 지명을 비롯한 미국의 여러 지명, 그리고 미국 인명 등이 원작 그대로 번역되는 등, 가능한 한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살리고 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수의 말을 빌자면 ‘힘과 세’ 즉, 이광수 가 사용하는 당시의 조선어나, 조선의 문체로 번역될 수 없는 것들 은 그에 근접한 조선어, 조선 문체로서 번역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어 번역을 중역하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언 문일치체가 확립되었고, 번역어가 확실하게 성립되어 있던 일본어

34) 이광수,「검둥의 셜음」, (『이광수초기문장집』, 위의 책), 151쪽.

35) 이광수, 「검둥의 셜음」, 앞의 책, 151쪽.

(18)

와 달리 조선어 경우, 번역어는 물론, 표준어라거나 언문일치체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원작 의 ‘quadroon woman’이 일본어 번역에서는 ‘相の子の女’로 번역 된 후, ‘자그마한 쿼드룬 흑인아이’라는 설명을 첨가하고 있었다면 조선어 번역에서는 당시 혼혈을 지칭하여 속되게 사용되던 ‘퇴기’로 변환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큰 글을 올글게 우리 글로 옴기고 십 흐나 힘과 세가 허락지 아니야 겨오 대강에 대강을 번역”할 수밖 에 없었다는 이광수의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근대어로서의 성립과정을 거치지 않은 조선어 속에서 이광수가 느낀 한계를 정확 하게 드러낸 말이었다.

이외에도 「검둥의 셜음」은 묘사보다는 지문 중심 형태로 번역 된다든가, ‘더라’체를 사용하는 등, ‘언문일치체’확립과 관련해서 여 러 가지 문제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검둥의 셜음」에서 이광수는 「혈루」와 단편「무정」의 주된 표기문체였던 ‘한주국종체’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한글체로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이야기를 언술해가고 있다. 그 새로운 세상의 이야 기에는 자유라든가, 평등, 박애와 같은 근대적 의식을 비롯하여, 낯선 이국의 풍물과 관습까지 근대적 세계와 관련한 모든 것이 포 함되어 있다. 그 결과 한문체에 갇혀서 제대로 표출될 수 없었던

「혈루」의 내면적 갈등이라거나 한문체와 연결되는 순간 전통문학적 관습으로 곧장 회귀해 버리던 단편「무정」의 형식적 한계 모두, 한 글체의 「검둥의 셜음」에서는 그럭저럭 해결되고 있었다.

Ⅳ. 근대적 문체에 이르는 길

물론 「검둥의 셜음」이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살리는 선에서 한

글체로 번역되었다고는 해도, 은 인물, 풍경 묘사에서부터 내면묘

사에 이르기까지 원작의 세밀함을 따라가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에

(19)

는 일단 미국과 당시 조선 간의 문화적 차이와 이 문화적 차이를 이해할 정도로 조선 대중이 미국문화에 익숙지 않았다는 것이 한 요인으로 거론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내 드레스의 후크나 좀 잠 가 둬”라는 원작의 표현이 조선어 번역에서는 “이 옷이나 개여라”

라고 번역되는 것이다. 의복의 차이가 번역에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이는 「검둥의 셜음」이나 그 비슷한 시 기 발표된 번역물의 시대적 한계였다기보다는 식민지 시기 번역의 공통적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식민지 말기까지 조선에 서 서구문학의 번역과정에서는 독자 대중의 수준과 취향을 고려하 여 서구문화나 생활습관, 난해한 학문적 용어와 관련한 ‘묘사’의 경 우, 생략 내지 축약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검둥의 셜음」은 식민지 시기 번역서구문학과 비교할 때 내용 및 묘사가 원작에 가까운 형태로 번역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근대소설로서의 원작의 성과를 제대 로 번역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가 저본으로 삼은 일본어 번역 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근대적 언문 일치체가 성립되지 않은 조선어의 한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제기될 수 있다. 서두부에서부터 이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1) Late in the afternoon of a chilly day in February, two gentlemen were sitting alone over their wine, in a well-furnished dining parlor, in the town of P——, in Kentucky. There were no servants present, and the gentlemen, with chairs closely approaching, seemed to be discussing some subject with great earnestness.(켄터키 주 P 마을의 어느 저택, 차가운 2월의 어느 늦은 오후에 두 신사가 가 구가 잘 갖추어진 거실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두 신사의 주위에는 하인들이 없었고, 의자를 바싹 붙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 어떤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토론하는 듯했다.)

36)

36) Harriet Beecher Stowe, 「Uncle Tom's Cabin or, Life Among the Lowly」, CANTERBURY CLASSICS, 2012, 3쪽.

(20)

2) アメリカ合衆国 南方諸州と北方諸州との丁度 中程にあるケ ンタッキのビイー町で頃は二月のある寒さの昼から奇麗に飾られたあ る家の食堂で二人の紳士が葡萄酒を飲みながらなんやら熱心に相談し て居る。

(아메리카 합중국의 남방주와 북방여러 주와의 중간에 있는 켄 터키 주의 P 마을에서 때는 2월의 어느 추운 날의 오후 기려하게 장식된 어떤 집의 식당에서 두 사람의 신사가 포도주를 마시면서 무언가 열심히 서로 이야기 하고 있다.)

37)

3) 미국 켄터키도 엇던 고을에 한 사람이 잇스니 일홈은 셀비 라. 학식도 매우 잇고 사람도 단졍며 가세도 유여야 조흔 집 에 살고 죵도 만히 부리더니, 무슨 일에 랑패야 빗을 만히 졋는 고로 일업시 집에셔 부리든 죵을 팔아 그 빗을 갑흐려 더라.

때는 이월이라, 이 산 져 산에서 아즉 녹다남은 눈이 잇고 치운 바 람이 옷속으로 솔솔 불어들어오는 날에 셀비가 하레라는 사람을 다 리고 썩 화려게 꾸며 노흔 식당에 마조 안져서 단 포도쥬를 마 시며 무슨 니야기를 더라.

38)

인용 예문 중 1)은 원작을 직역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시 작 부분이고, 2)는 이광수가 저본으로 삼은 것으로 알려진 1903년 일본어 번역본의 시작 부분이며

39)

, 3)은 1913년 신문관에서 발행된 이광수 「검둥의 셜움」 의 시작 부분이다. 원작의 경우, 켄터키의 2 월 늦은 오후 신분을 알 수 없는 ‘두 신사’가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 서 시작되어 서서히 두 신사의 이름 및 이력, 만난 이유가 드러나 고 있다. 일본어 번역 역시 원작을 직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광수

「검둥의 셜움」은 원작은 물론 저본으로 삼은 일본어 번역과는 달리 두 신사의 신분을 명확하게 밝히면서 시작한다. 일본어 번역 과정 에서 직역되었던 소설 도입부가 조선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바뀌 어 버린 것이다. 주된 인물의 이력을 밝히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와 같은 소설의 시작은 한주국종체로 이루어진 단편 「무정」, 더 멀리

37) 堺利彦編, 志津野叉郞譯述, 「仁慈博愛の話」, 內外出版協会, 4-5쪽 38) 피쳐 스토우 원져, 리광슈 초역, 「검둥의 셜음」, 신문관, 1913. 2.(최주

한 하타노 세쓰코 엮음, 「이광수초기문장집」, 앞의 책, 151쪽)

39) 이와 같은 시작 부분은 또 하나의 저본으로 추정되고 있는 百島冷泉의

「奴隸トム」( 內外出版協会, 1907)에서도 동일하다.

(21)

는 전통적 고전소설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던 것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고전소설의 구조적 관습을 답습하고 있던 단편 「무정」 도입부 의 문제점을 한글체의 「어린 희생」에서 완전하게 극복하고 있던 이 광수였다. 그런 이광수가 「검둥의 셜음」을 순한글체로 번역하면서 무슨 이유에서인가 다시 고전소설의 관습적 구조로 돌아가 버린 것 이다. 저본으로 삼은 두 편의 일본어 번역이 모두 원작과 동일하게

‘두 신사’에 대한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면서 시작하고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이광수는 첫 줄에서 인물의 신원을 명확하게 밝히는 형태로 바꾸어서 번역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입부의 구조적 한 계에 대해서는 이미 단편 「무정」을 통해서 뼈저리게 실감한 바 있 던 이광수였다. 게다가 한주국종체로 작성되어, 전통적 고전소설의 관습적 형태로 회귀해버린 단편 「무정」 과 달리 「검둥의 셜음」은 순 한글체로 작성되어 그와 같은 문학적 관습의 지배를 받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검둥의 셜음」의 번역과정에서 일어난 도입부의 변화는 이광수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광수는 왜 번역과정에서 이와 같은 변화를 만들어낸 것일까.

1919년 이광수가 일기에 기록한 그해의 독서목록은 이에 대한 하나 의 답이 될 수 있다. 명시된 독서 목록을 대략 옮겨보면 다음과 같 다.

40)

40) 이 일기는 1909년 12월 31일날 기록된 것으로 『조선문단』 1925년 4월호 에 이광수가 게재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최주한 하타노 세쓰코의 『이광 수초기문장집』(위의 책, 39쪽)에서 재인용한 것임.

『虞美人草』,『海賊』,『バイロン』,『プシキン』,『ゴルキ短篇集』,『春』,

『思出の記』,『アンナカレリナ』,『イカモノ』,『復活』,『湖上の美人』,『建築 師』,『破戒』,『ナポレオン言行錄』

(22)

목록에 적혀있듯 이광수는 바이런, 푸시킨, 고리키, 톨스토이 의 『안나 카레리나』 등 세계문학을 비롯하여 나쓰메 소세키 등 일 본근대문학작가들의 작품을 모두 일본어로 읽고 있었다. 이광수만 일본어번역을 통하여 세계문학을 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검둥의 셜음」이 번역, 발표된 1910년대 중반, 조선은 이미 일본어 와 조선어를 함께 배우는 이중언어 상황 속에 있었을 뿐 아니라 다 수 조선 엘리트들은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어 활용이 능숙한 상태 였다. 여기에서 식민지 시기 조선의 이중언어 상황 및 독자층과 관 련한 중요한 가정을 할 수 있다. 그 가정이란 첫째, 당시 조선의 엘리트 들은 일본어 교육과 일본유학을 통해서 일본어로 세계문학 을 접하고 있었던 만큼 둘째, 조선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의 독자층 이란 이들 엘리트층을 제외한 사람들, 예를 들면 일본어 해독이 불 가능하면서 조선어 해독이 가능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식민지 시기 조선의 이중언어 상황을 감안한 후, 조선 어로 번역된 세계문학 독자층을 상정할 경우, 번역 과정에서 나타 나는 이광수 「검둥의 셜음」 도입부의 변화 역시 설명 가능하다. 「검 둥의 셜음」의 독자층은 일본어 해독이 어려운 자로서,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자, 혹은 한문과 한글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자로서 상정될 수 있다. 그 독자층은 일반적으로 당시 널리 유통되고 있던 구활자 본 고전소설을 즐겨 읽던 사람들이다. 등장인물의 신원을 명시하면 서 시작하는 「검둥의 셜음」의 서술방식은 바로 당시 일반적 대중들 에게 선호받고 있던 구활자본 고전소설의 일반화된 서술형태였다.

즉, 이광수는 서구소설 「톰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조선 대중들에게 익숙한 구활자본 고전소설의 서술 구조를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광수는 번역문체로서 ‘ㅆ다’의 과거시제를 서술된 일본어 저본과 달리 고전소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현재형 ‘더라’체를 채 택하고 있었다.

이처럼 「검둥의 셜음」은 번역과정에서 구활자본 고전소설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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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구조와 문체로 바뀌어 번역되면서 조선대중들에게 익숙한 문학으 로서 재탄생된다. 재탄생한 문학에서 화자는 현재진행형의 시제 속 에서 여전히 자신의 존재감을 독자들에게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전체적인 이야기성이 강조되므로 개인의 은 밀한 내면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검둥의 셜음」이 흑인 노예들의 비극적 삶을 현재진행형으로 절절 하게 전달하고 있었던 원작과 달리 한 편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의 형태를 띠게 되어 버린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검둥의 셜음」의 번역목적을 근대문체의 확립보다는 조선 대중을 계몽하여 독립을 향한 힘을 모으는 것에 두었던 이광수의 의중에 기인한 바 크다.

「검둥의 셜음」의 번역은 조선의 지식인 이광수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중국과 일본에만 익숙해있던 조선 대중들에게 있어서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의 문화적, 역사적 상황을 담은 소설이란 이 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낯선 나라의 이야기를 가능한 한 조선대 중들이 쉽게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익숙한 서술구조 나 문체 속에 그 이야기를 담아 전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광수가 문학가로서의 자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랑인가(愛か)〉에서 확보했던 근대적 문체와 근대 적 자아와 관련한 성과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근대문학성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체류하면서 발표한 시 「이샹타」에서는 “太白의 靈 ”이라는 한문맥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관용적 문구를 통 하여 지사로서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한편, “엉긔엉긔 누더기 지고 이거리 져골목 우리 지게군”

41)

과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하충 민을 ‘태백’과 같은 존엄한 인물이 등장한 바로 그 시에 등장시키기 도 한다. 한문맥의 형상적 세계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그 형상적 세계에서 조금씩 ‘현실’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41) 외배, 「이샹타」, 『권업신문』94, 1914. 1. 18.( 최주한 하타노 세쓰코 엮 음, 「이광수초기문장집」, 앞의 책,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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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양제국의 조계가 즐비하게 늘어선 상해 풍경을 다룬 기행문 「上海서」는 주목할 만하다.

얼마를 안가서 鐵柵을 구디 두르고 奇樹異草가 조는 듯 盛한 데는 上海에 有名한 黃浦灘公園이오, 門에 서서 졸니는 듯 흔들흔 들 그니는 키 크고 얼골 검고 수염을 이 귀 밋헤선 저 귀 밋까지 꼬아 부치고 다홍 수건으로 삐죽하게 머리를 동여맨 이는 물을 것 업는 印度巡査라. 英米 兩租界는 每事를 聯合하야 印度巡査-차라 리 巡査補-로 境內를 護衛하게 하고 西端에 잇는 法租界만 安南人 巡査를 쓰나니, 말하자면 앵글로색손族은 앵글로색슨族끼리 聯合하 야 그네의 共同한 榮光인 印度正服을 表象하기 위하야 印度人으로 街路와 門戶를 護衛케함이오,

42)

「上海서」에서 이광수는 여전히 ‘더라’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 지만 국주한종체의 언문일치에 가까운 문체를 통해 현실을 묘사하 고 있다. 이 문체의 힘 덕분일까. 이 기행문에서 이광수가 포착해 내는 상해의 풍경은 사실적이다. 황포탄 공원을 둘러싼 조계에는 각 제국의 식민지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고, 거리 곳곳에는 제국의 은행이 늘어서 있다. 이광수는 중국의 한 도시, 상해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그 중국은 더 이상 오랜 세월 조선을 지탱해온 정신적 이상향이 아니라 서구 제국들에 점령당한 초라한 식민지일 뿐이었 다. 이광수에게 있어서 상해 기행은 자신이 알아왔던 모든 가치, 윤리가 전도되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치와 윤리 의 전도 속에서 그의 시선에 포착된 세계는 전통적 ‘한주국종체’로 는 묘사해내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 세계는 ‘太白의 靈’이라든가,

‘保國忠魂’과 같은 형상적 언어의 지배를 벗어날 때 비로소 포착 가 능한 것이었고, 국주한종체는 이에 합당한 문체였다.

42) 㨭上夢人, 「上海서」, 『청춘』3, 1914. 12.(최주한 하타노 세쓰코 엮음, 「이 광수초기문장집」, 앞의 책, 312쪽)

(25)

Ⅴ. 결론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다. 여기에는 근대 적 내용과 더불어 근대적 문체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 나 「무정」의 근대적 문체는 여전히 불안정한 형태였다. 시점은 제 대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고, 삼인칭 과거형시제의 언문일치체 역시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문과 순한 글로 이원화되어 있던 개화기의 문자체계에서 「무정」의 언문일치체 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 성과는 순식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 었다. 언문일치체가 안정적으로 확립되어 있던 일본어 창작, 역시 언문일치체가 안정적으로 확립되어 있던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문학 의 조선어 번역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낸 것 이었다.

1908년부터 『태극학보』에 게재된 이광수 문장의 변화를 시작으 로 일본어 소설 「사랑인가」의 창작,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일본어 번역을 「검둥의 셜음」의 조선어로 중역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체의 변화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 일련의 과정 을 통해서 이광수가 언문일치체의 근대적 문체를 어떻게 만들어내 었는가를 고찰하였다. 그러나 일본처럼 순차적으로 근대와 근대문 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근대조선에서 언문일치체의 성립 역시, 순차적으로 진행되지는 못했다. 이광수가 「무정」에서 불완전한 형태 이기는 하지만 언문일치체를 이루어내었다고 해도, 또 다른 작가들 은 여전히 이전 시대의 문체를 소설에서, 시에서, 수필에서 답습하 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작가들은 번역의 경험을 통해서 근대적 문체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근대문학의 언문 일치체 형성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초기 조선에서 이루어 진 다수 서양문학의 번역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체와 시점의 변화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26)

<참고문헌>

1. 기본자료

『동아일보』, 『조선문단』, 『태극학보』

2. 단행본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민음사, 1997 사이토 마레시, 황호덕 외 옮김, 『근대어의 탄생과 한문』, 현실문화, 2010 최주한•하타노 세쓰코, 『이광수초기문장집』1, 소나무, 2015

3. 논문

강우원용, 「일본문학의 수용과 변용-이광수의 「사랑인가」와 「무정」을 중심으로」, 『일본 학보, 제 103집, 2015. 5, 131-144쪽.

김봉은, 「이바와 톱시:『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이분법적 만화경」, 『미국소설』19권 1호, 2012, 47-65쪽.

노춘기,「근대계몽기 유학생집단의 시가 장르와 표기체계에 관한 인식연구」, 『한민족문 화연구』제40집, 2012, 177-215쪽.

신지연,「소년의 문체연구」, 『민족문화연구』제 42호, 177-214쪽.

임영봉,「이광수 문학과 식민지 근대체험」, 『어문연구』,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03. 가 을, 245-264쪽.

최주한, 「『검둥의 설움』과 번역의 윤리-정치학」, 『대동문화연구』제84집, 387-420쪽.

波多野節子, 「無情の表記と文体について」, 『朝鮮学報』 제 236집, 2015, 1-28쪽.

4. 외국서

Harriet Beecher Stowe, 「Uncle Tom's Cabin or, Life Among the Lowly」, CANTERBURY CLASSICS, 2012.

堺利彦編, 志津野叉郞譯述, 「仁慈博愛の話」, 內外出版協会, 1903.

百島冷泉, 「奴隸トム」, 內外出版協会, 1907.

(27)

■ Abstract

Gwang-su Lee and the Formation of the Modern Writing Style

Interim Professor in Daegu University, Jung, Hyeo-young

In <無情(Heartlessness)>, the first Korean modern novel written by Gwang-su Lee, a modern point of view takes an important role along with modern content. However, the usage of the third person point of view and the past tense was still unstable and the unification of writing and speaking was poorly developed.

Nevertheless, it was almost a miracle to write a novel in a tone that people speak, because previously the writing styles were separated into Chinese or Korean. This miracle wasn’t built in a day. It benefited from foreign literature. Japanese literature had already developed a style that synchronizes speaking and writing, and Western literature, which was translated into Japanese, and then into Korean, had already developed the synchronization, and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literature’s modern writing style. The change starts with Gwang-su Lee, who wrote his <Takgeuk Hakbo> in modern sentences in 1908. Then there follows a variety of writings and translations such as a writing of Japanese novel <Is It Love>, the retranslation from Japanese

<Uncle Tom’s Cabin> into Korean. In this study, we will look into the process Gwan-su Lee had gone through to create a modern style of writing.

Key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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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jeong, Lee Kwang-soo, Eomun-mun-matched body, Chinese writing, Hangeul, translation, Japanese creation

* 본 논문은 2019년 4월 16일에 투고되어 2019년 6월 5일에 심사를 완

료하였고 2019년 6월 7일에 게재를 확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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