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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말은 엉뚱합니다. 학벌은 언제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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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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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학벌사회』저자, 전 학벌없는사회 이사장)는 사교육걱정없는세 상이 주최한 6월 10일과 17일의 강연에서 한국의 학벌 문제는 영속할 것이라며 경고했습니 다. 식민지 지배부터 군부독재사회를 거쳐 자본의 지배가 극심해지고 있는 오늘날까지 지속 되고 있다면서, 학벌 차별 문제는 한국사회가 현재 상태라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습 니다. ‘학벌이란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어떤 기능으로 작용하는가? 왜 유독 한국사 회에서 학벌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더 심해지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김상봉 교수님의 두 차례 강연 내용을 요약 정리해 공개합니다.

■ 학벌없는사회 전 이사장 김상봉 교수의 강연 주요 내용 녹취 보도자료(2016.7.6.)

자본이 학벌을 이겨서 학벌 사회가 끝났다

는 말은 엉뚱합니다. 학벌은 언제나 최고

권력(식민지배→독재→자본)을 위한 도구

였습니다. 그 본질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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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벌사회 출발 시점 : “학벌 교육의 시작은 일제 식민지 통치를 위한 도구”

학벌이 일본에서 등장했을 때는 합리적인 보상기제로 등장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천하의 모든 영재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서 자기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신분제를 철폐하면 서 대학들을 세웠거든요. 그것이 동아시아적인 의미에서 학벌 체제의 시작이었고 우리는 거기 에 나중에 편입되었던 것입니다. 근데 이게 처음 출발할 때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무엇인가 공동체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도록 출신을 따지지 않고 머리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면 우대하 는, 그래서 이른바 개천에서 용도 날 수 있게 해주는, 말하자면 ‘보상체계’로서 학벌이 작동했 던 것입니다. 즉 일본 편에서는 “공부를 통해 국가의 근대화에 이바지하도록 우대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라고 말할 입장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지요.

■ 일본과 한국의 학벌 시스템 목적 차이 : “일본은 국가의 이익, 한국은 지배의 도구”

한국의 근대적인 공교육은 식민지 지배와 함께 그 기초가 세워졌습니다. 일본은 여러 개의 제 국대학을 만들 때부터 국가가 분명히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목적이 있었고, 국가의 이익을 위 해 그런 학교를 세우고 그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보상체계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우리 도 그런 시대가 있었죠. 그때는 조선 교육령이 반포되기 이전입니다. 원래 한국의 신교육운동 인 학교설립운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사재를 털어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그것을 절반 이상을 없앤 것이 바로 일제의 조선교육령이에요. 그러면서 공립 학교 체제로 갑니다. 여러 층위의 서열화가 그때부터 시작이 되는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일류 대학 시스템, 학벌 시스템이 있어도 그 시스템의 동기가 다른 것입니다. 즉, 일본의 경우에는 자기 나라, 국가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이 자기 나라와 유사한 신교육체제를 우리나라에 도입한 목적은 식민지 관료를 키우기 위함이었습니 다. 이것은 천양지차에요. 우리 교육이 여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파행을 겪을 수밖 에 없었습니다.

해방된 뒤에도 자유로운 시민적 주체를 양성하지 않고 우리는 국가가 호명하는 양순한 개체 신민을 키우는 것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교육은 개개인의 자아실현이나 혹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교육체제를 운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교육은 본질적으로 ‘도구적’입니다. 지배의 도구란 말입니다. 한국의 상 황이 이럴진대, 앞으로 학벌은 그렇게 쉬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이 아니라 무엇이 지배 자가 되더라도 학벌은 적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영속적일 수밖에 없어요.

■ 학벌 수혜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 : 수혜자는 모르고 박탈당한 사람만 느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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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은 ‘학력’하고도 다르고 ‘학연’과도 다릅니다. 그 까닭이 학벌은 권력을 향유하는 집단적인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학력은 개인의 속성이자 능력이고요. 학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립 적인 관계입니다. 같은 학연으로 엮인다 해서 무조건 학벌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제가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거기서 함께 공부한 한국 학생들이 있었지만, 마인츠 대학을 학 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대학 출신이라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권력을 향유하는 집단적 주체로서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벌사회』 책을 2004년에 쓰면서 자본주의의 계급과 학벌이 어떻게 다른가도 분석했 습니다. 재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구성에서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재 벌이 망해서 하루 아침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계급이 바뀌는 셈이지 요. 제일 꼭대기에 있는 자본가 계급에서 비정규 노동자, 제일 밑바닥에 있는 계급으로 바뀌어 요. 그런데 학벌은 안 바뀐단 말이죠. 학벌이 갖는 간판의 불변성 때문에 계급으로 환원시킬 수 없습니다. 그럼 불변적이면 봉건사회에서의 신분 같은 것이 아닌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어떻든 자기가 획득한 거니까 신분이 아닙니다.

학벌사회에서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있을 뿐이고 나와 너 사이의 공동의 이익은 없습니다.

내가 1점이라도 올라가면 내 친구가 그만큼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학벌사회의 작동 원리는 자기 긍정이 아니라 타자 부정이며, 자기실현이 아니라 타자와의 경쟁입니다. 학벌체 제는 보편적 적대 관계의 확립입니다.

학벌의 위력, 학벌의 수혜는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학벌 가진 사람들은 학벌이 무슨 위력이 있느냐, 내가 무슨 수혜자인가, 반문합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지배 학벌에 속하 는 사람은 결핍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 SKY 출신들은 원래부터 결핍이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습니다. 학벌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의 조건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기가 수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을 안 합니다. 학벌의 실제적 위력은 수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 편이 아니라 그런 학벌이 없는 이들의 박탈감을 통해서만 측정이 되는 것입니다.

■ 학벌은 최고 권력(‘식민정부→군사 독재→자본’)을 위한 유능한 하인을 만드는 도구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나라 권력은 식민지 시대의 일본 제국주의를 거쳐 군부독재와 자본의 순서로 교체됩니다. 이처럼 최상위 권력은 바뀌지만 학벌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지배 자가 누가 되든지 상관없습니다. 학벌은 그것과 무관하게 그 최고 권력을 돕고 지원하고 섬기 는 보조적 권력입니다. 지배자가 누구든 식민 통치 주체든 군부 독재든 자본이든지 즉, 누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든지 간에 공교육은 그 지배에 동원되어야할 양순한 객체를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그것이 학벌시스템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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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누가 지배하든 식민지든 군부독재든 자본이든 그것과 무관하게 교육 시스템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습니까?’ 라고 묻고 싶으시겠죠. 저의 대답은 “예! 같습니다.”입니다. 이것이 한국 의 학벌체제가 온존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교육이 무엇에 의해서 도구화 수단화되든 한국 교 육에서 그 도구화의 형식은 하나 즉, 학벌경쟁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을 거기에만 집어넣어 버리면 그 다음에는 누가 주인이 되든 한국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리 는 것입니다.

학벌주의의 특징은 지배자가 누가 되든지 간에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건데 일제 식민시 시대 때도 박정희 시대 때도 자본의 시대에도 똑같습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처음보다 학벌 경쟁이 더 격화되었습니다. 왜 격화되었냐 하면, 과거에는 소수만 참여했지만 이제는 모두가 다 학벌 경쟁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경쟁의 압력이 더 강 해진 거죠. 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학벌 경쟁이란 사람들을 무한 경쟁의 틀 속에서 가두어 버 리면서 시민적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아주 좋은 장치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키우는 거죠. 다시 말해서 학벌 교육은 유능한 하인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유능한 하인이 란, 묻는 말에 대답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질문하지 말라는 것이고, 모 든 것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어서, 잘 외우고 있다가 검색하면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노예교육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먼저 질문하면 안 됩니다. 수첩 들고 고개 처박고 열심히 쓰기만 하면 되요. 그리고 시키는 대로 잘 하는 것, 그것이 한국 교육의 본질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일 좋은 것이 시험 경쟁입니다. 내부적으로는 시민교육이 이 루어지지 못하게 언제나 반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동료가 적이 되도록 만들 어야 합니다. 그걸 체화시키고 내면화시켜야 됩니다. 시민적 연대, 그걸 위한 토론, 그걸 위한 소통, 이런 거 못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을 위해 저런 시험 제도가 있는 것이지요.

■최근학벌상황: 국가권력과CEO들의12년전출신학교점유비율과최근상황에달라진것없어

그리고 이런 학벌 사회의 본질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 학벌 실상이 여전하다는 것을 제가 통계자료로 증명하겠습니다. ‘학벌사회’(한길사)라는 제 저서가 2004년에 처음 나왔으니까 그때에 최신 통계가 2002년 정도까지였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보완하기 위해 대학교육연구소의 2014년 최신 통계를 살펴보니, 놀랍게도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2010년~ 2014년 신규 법관 임용자들을 보니, SKY 대학으로 보면 80%요, 서울대학 교만 보면 절반을 넘는 52%입니다. SKY 대학 출신 검사 임용자는 68.7% 서울대학 출신은 36.2%입니다. 2014년 정부부처 3급 이상 국장급 인사를 볼 때, SKY 대 출신은 48.8% 즉 절반 에 해당하고 그중 서울대학 출신은 29.5%입니다. 2007년~ 2014년까지 외무고시 합격자의 81%

가 SKY 대학교 출신이고 서울대학 출신은 46%입니다. 같은 걸 반복해서 말씀드리려하니,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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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플 지경입니다. 국회는 선출직 공무원이니 전통적으로 SKY 대학 지배가 적은 편입니다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대 국회의원의 경우 43%가 SKY 대학 출신이고, 서울대학 출신은 4명 중의 1명으로 26%입니다. 학벌사회가 안 끝났다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국가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국가 권력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곳이 서 울대 또는 SKY 대학 출신입니다.

민간 영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의 CEO 자리와 관련 대학교육연구소 최신 자료를 보니, 500대 대기업의 CEO가 586명인데 그중에 SKY 대학 출신자들이 50.5%이고 서울대학 출신이 26.3%였습니다. 제가 10여년 전 제 책에서 인용했던 통계는 500대 기업의 50.5%가 SKY 대학 출신이고, 26.3%가 서울 대학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조사가 10여년 조사 결과보다 내 려갔네? 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아닙니다. 제가 10년 전에 조사했을 때는 500대 기업 이 아닌 100대 기업이었습니다. 그때 100대 기업은 SKY가 70%였어요. 그때도 500대 기업으 로 넓혀 조사했다면 최신 조사와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학벌 지배력은 권력 중심으로 갈수록 강고하고 권력의 주변부로 갈수록 약한 법입니다. 그래서 100대 대기업으로 조사 대상 을 좁힐 때는 SKY 대학 출신자들이 70%이지만 500대로 넓혀 잡으면 50%로 엷어지고 라면집 사장님까지 포함해 전국 모든 기업들을 조사대상으로 더 넓히면 SKY 대학 출신 CEO는 1%

도 안 될 것입니다. 지금이나 10년 전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언론계의 경우도 그렇습니 다. 25개 주요 신문 방송 통신사 간부 104명 간부들(편집국장, 보도국장 및 부장들)의 75%가 SKY대학 출신자들, 서울대 출신자는 36.5%입니다.

권력에서 학벌의 영향력은 하나도 바뀐 게 없습니다. 그것이 공정한 판단입니다. 학벌 추세가 바뀌면 제 책의 개정판을 내야 할 판인데, 세상이 하나도 바뀌어진 것이 없으니, 개정판이 별 의미 없는 상황인 셈입니다.

■ 균열의 시작점 오해와 진실 : ‘SKY대 출신이 갈 곳 없다’는 균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경쟁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굳이 양상의 변화가 그래 도 좀 있지 않느냐 묻는다면, 한가지 징조는 있습니다. 학벌 경쟁이 과거에는 극소수만 참여하 는 것이었지만 차츰 이 참여율이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조금 씩 내려옵니다. 정점이 꺾이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이제 돈이 없어 그 경쟁 에 뛰어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수능 입시 경쟁에 뛰어드는 때가 찾아오면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다 사교육을 합니다. ‘없어서 못할 뿐이지!’라며 모두가 모든 것을 다 걸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사교육 경쟁에 같이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집니다.

자본이 문제라면 이게 문제인거죠. 즉, 학벌이 있어도 자본의 패권주의에 맥을 쓰지 못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학벌의 프리미엄은 여전합니다. 다만 돈이 부족해서 학벌 경쟁에 끝까지 가 보질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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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학벌 경쟁에서 경제적 이유 때문에 낙오되는 사람들이 많아지 면서 학벌의 정당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학벌의 정당성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 람들이 공부 경쟁에 들어서서 나름 공정하고 정당한 기준에 의해 경쟁하고 탈락할 때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학벌의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공부를 안했잖아, 공부를 열심 히 해서 좋은 학벌 얻게 된 것이니 뭐가 문제냐!”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경쟁의 트랙에 애초부터 낙오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학벌 정당성의 신화에 금이 가기 시 작하는 것입니다.

학벌 경쟁의 둔화 두 번째 양상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자발적으로 입시 경쟁에서 비켜서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변화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변화인데 요. 그런 자발적인 낙오가 늘어났습니다. 말하자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초래된) 타의에 의 한 낙오와 자발적인 낙오가 많아지면서 학벌 경쟁의 양상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학벌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똑같이 경쟁을 해 야 합니다. 학벌사회의 가장 큰 적은 ‘나 경쟁 안할래! 너희들이나 해!’ 이게 제일 무서운 것이 에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학벌사회는 흔들리게 됩니다. 권력은 다 쥐 고 있죠. 그런데 왜 흔들립니까? 정당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모두가 ‘하면 된다’는 신화가 있었고 실제로 위로 올라갈 관문이 넓어져 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제적 성장기에 가정마다 한명 대학 보내던 것 둘 보내고 둘 보내던 것 다섯 보내고……. 계속 이런 식의 방향 으로 가고 있을 때는 ‘너는 왜 언니처럼 못 하냐’ ‘너는 동생처럼 못 하냐’ 이런 식의 이야기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 짧은 시간에 원하지 않는 낙오 자들이 학교에서 너무 많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도덕적인 부채의식이 없어요. ‘네가 공부 잘했다고?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가출하시고 나는 할머니랑 살았다. 그래, 어쩔래? 너는 부모 잘 만나서 좋겠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렇게 대드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게 학벌사회의 균열의 출발입니다. 학벌 사회의 균열이라면 이게 균열입니다. 저기 학벌 상층부에서는 요즘

‘SKY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없다’ 혹은 ‘SKY대를 나왔는데 자본에 꼼짝하지 못 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벌 사회가 퇴조한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좋은 학벌을 가진 이들의 자 조(自嘲)이지 학벌 사회의 퇴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 학벌 사회 정당성의 균열 : 경쟁에서 타율적 자율적으로 낙오하는 사람들로부터.

학벌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일어나야합니다. 제도와 법률의 혁신이 필요합 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정신의 혁명입니다. 구한말 농민운동의 기수 전봉준이 나타난 것은 동학사상을 설파한 최제우와 최시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최제우와 최시형이 없는 한 전봉준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신의 본질은 현실에 반역하는 겁니다. 페리클레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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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리더십을 쥐고 있었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것도 역사이지만, 헤롯 왕 아래의 로마 식민지였던 유대 땅 저 바닥 지역인 갈릴리에서 예수 같은 정신이 출현하는 것도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장 어두울 때 반전이 마련됩니다.

그때가 지금입니다.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역으로 만남을 묻기 시작합니 다.

만남, 특히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고 공감하는 것은 변화의 첫 걸음입니다. 한국사회가 보편적인 만남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조짐을 세월호 참사가 보여줍니다. 배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 7시간 딴 짓한 사람들에 대해서 저는 관심도 없습니다. 원래가 늘 그래왔기 때문에 그렇지요. 배를 버려두고 도망가는 것은 임진왜란 때 임금이 도망갈 때부터 늘 하던 일이었습니다. 6.25 때 다 리 끊고 대통령이 도망가는 것도 다 하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도 놀랍지 않습니다. 놀랍지 않은 놀라움, 늘 보던 놀라움이었습니다. 제가 놀라운 것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었습니다. 저는 그게 더 큰 충격이었기 때문에 실은 그동안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2년 이 지났잖아요. 제가 또다시 놀라고 있는 건, 애도가 끝나지 않는구나, 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 이 남의 슬픔을 2년이나 지났으면 잊어버릴 때가 되었는데, 안 잊어버리는구나, 그 사실이 놀라 웠습니다. 남의 상처를 자기의 상처로 아파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변화입니다. 한국사회 는 그 힘으로 지금까지 변화되어 왔습니다. 그걸 믿으면서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광장이 아닌 정신의 광장에서 만나야 됩니다. 학벌운동이면 학벌운동, 노동자의 경영참여이면 노동자의 경 영참여, 기본소득운동이면 기본소득운동, 또는 지방분권운동이면 지방분권운동, 서로 반목하지 않고 모아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다른 활동들이 본질상 하나인 보편적인 만남의 광장을 열어가야 되요. 우리 민족은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놀라운 민족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물과 불의 큰 시련을 겪을 것이라 예측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지혜와 용기로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희망을 여러분의 모 임 속에서도 봅니다. 그래서 매번 한 걸음 더 앞으로 온 것도 있고, 사실은 어리석어서 실수 한 것도 있잖아요. 죽 쒀서 개 준 적이 많죠.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 과정을 우리가 차분하게 돌이켜 보면서 앞으로는 더 잘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저런 것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과 무 관하게 뜻과 이상이 같은 사람들끼리 깨끗한 마음으로 모여서 ‘우리가 이런 방향으로 우리 사 회를 만들어 나갑시다’라고 모색하게 되지 않겠어요? 저도 그 길에 힘을 보탤 것이고 저도 학 자로서, 여러분들께서는 각자가 선 자리에서 그래서 언젠가는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이 역사를 또 바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2016. 7. 6.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송인수, 윤지희)

※ 문의 : 교육 코디네이터 최재영 (02-797-4044/내선번호 4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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