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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11주차 교안- 해방과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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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11주차 교안- 해방과 분단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림으로써 초래된 해방과 그 후 전개된 해방정국은 현대사의 분기점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존재를 규정․ 제약하고 있습 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현대사는 해방정국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아직도 그 유산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현대사의 파악은 해방과 해방정국으로부터 출 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해방의 의미를 규명하고 해방정국의 전개를 객관적으로 분 석하는 것은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이해하고 나아가 앞으로 전개될 정국의 추세를 가늠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의 식민통치의 종식과 더불어 한민족은 해방되었고, 한반도에는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 습니다. 그러나 사상 유례없이 강압적이었던 식민통치의 해체가 갑자기 도래했기 때문에 한민 족은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해방정국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해방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지 못했기에 해방의 의미를 놓고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 고, 해방정국에서 수행해야 할 과제에 대해서도 민족적 총의를 모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해방정국에서의 혼란과 분열은 어느 면에서는 예견된 것이기도 했으며, 바로 이 점에서 현대 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속에 이번 시간에는 먼저 해방의 의미 와 과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점인 민족분단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분단의 원인에 대한 여러 주장들 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분단의 기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어떻게 발전하였 으며, 최종적으로 어떻게 구조화되었는지를 단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방정국에서 우리 민족이 분단으로 가지 않을 수 있었던 가능성이 과연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 신탁통치문제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이후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 련한 것이 모스크바3상회의였고, 이를 집행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모 스크바3상회의 결정안은 관변학계나 언론의 왜곡에 의해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 왔습니다. 그 러나 최근의 연구를 통해 볼 때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안은 임시정부 수립과 5개년 신탁통치 실시라는 상이한 내용이 함께 들어 있었다. 즉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안은 소련의 즉시 독립안 과 미국의 신탁통치안의 협상 결과물로서 신탁통치보다는 즉시 독립, 또는 통일임시정부의 수 립에 보다 주안점을 둔 결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방직후의 찬반탁 논쟁 역시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1. 해방의 의미와 과제

(1) 해방의 전제

(2) 해방의 의미 (3) 해방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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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단, 어떻게 볼 것인가?

(1) 분단을 보는 관점 (2) 분단의 원인

3. 신탁통치문제와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

(1)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과 의미

(2) 국내 정치 세력의 대응 (3)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

1. 해방의 전제

한국의 전후처리에 대한 연합국간의 논의는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으로 부터 시 작되었다.

1)카이로 회담 (1943. 11. 12.)은 연합국이 전쟁 후의 세계문제를 의논하면서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 절차는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독립이 허용될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서가 붙은 채로 마무리되었다.

2) 얄따회담(1945. 2. 11)에서도 한국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으로부터 한국의 신탁통치안에 대한 비공식적 승 인을 얻어냈다. 한편 소련은 이 회담에서 남부 사할린의 반환, 쿠릴열도의 할양, 외몽고의 현 재상태 보호 등을 연합국으로부터 보장받고,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2~3개월 이내에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결정했다.

3) 포츠담 회담(1945. 7. 17)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마지막 연합국 회담으로 여기에서도 한 국 문제가 언급되었으나 카이로 선언이 재확인되는 수준이었다. 여기에서 연합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한편 “카이로선언의 조항들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우 (本州) · 홋까이도오(北海道) · 큐우슈우(九州) · 시꼬꾸(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 에 국한될 것이다”고 밝혀 조선의 독립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4) 이후 일본의 패전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1945.7.16)한 미국이 히로시마(廣島, 1945. 8. 6)와 나가사끼(長崎, 1945. 8. 9)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은 8월 8일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8월 9일 웅기를 폭격하고 경흥으로 진공하였으며, 8월 13일에는 청진으로 진격하였다. 소련군의 빠른 진격에 미국은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그 이북은 소련군이 그 이남은 미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시키자는 군사적 편의에 의한 분계선 설정을 제안하였다. 소련이 이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38선은 군사분계선이 되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의 수락을 통보하고, 8월 15일 무조건적 항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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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게 되었다.

2. 해방의 의미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이 한민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세계사적으로 전개된 갈등구조에 대한 철저한 이해로부터 재조명되어야 한다. 해방의 과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해방 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1) 주어진 해방론 : 타율적․수동적 해방론 [남한 공식 입장]

1) 이 이론은 해방의 직접적 원인이 미소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승리이며, 연합국이 일제 를 패망시킴에 따라 한민족에게 해방이 주어졌다고 본다.

2) 해방은 연합군이 한민족에게 준 ‘조건부 선물’이며, 따라서 해방 후 국가수립과정에서 외 세의 영향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3) 이것은 한민족의 해방이 미소 연합국의 힘에 의해 국제적으로 규정된다는 결정론적 견해 이며, 해방 직후 대부분의 우익정치세력과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공산당도 한동안 인정했던 입 장이다.

(2) 자율적 해방론 [북한 입장]

1) 한민족의 해방을 ‘싸워서 쟁취한 해방’으로 규정하며, 싸움의 주체를 항일 무장투쟁세력으 로 본다. 그런데 이 이론은 시기적으로 그 내용을 달리한다.

2) 북한정권이 수립된 후 북한학계는 김일성이 소련군의 일원으로 해방작전에 참여했다고 주 장한다.

3) 1960년대 : ‘조선혁명군’이 별도의 자주적인 부대를 편성하여 소련군과 제휴하여 해방전 쟁에 참여했다고 주장한다. “동반해방설”

4) 1975년 : ‘조선인민혁명군’이 총공격 개시 1주일만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고 주장한 다. “조선자주해방론” 즉 “쟁취한 해방론”

이 이론의 취약점은 이처럼 북한 학계의 주장이 시기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며, 아울러 객관 적 사실을 너무 무시한다는 것이다.

(3) 복합적 외인론 : “해방에의 자주적 기여론”, “해방준비론”

1) 이 이론은 타율적 해방론과 자율적 해방론을 절충한 것이다.

2) 이 이론은 국내외의 독립운동이 해방에 대해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 로는 연합국의 기여까지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다.

3) 따라서 해방의 주인(主因)은 연합국의 승리였지만 한민족 스스로 전개한 독립투쟁도 부차 적이긴 하지만, 해방을 성취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인이었다고 간주한다.

3. 해방의 과제

해방이 한민족에 제시한 과제는 민주주의적인 통일 자주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 민족은 가장 먼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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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문제 - 반민족 친일세력 청산

1) 민족문제 해결이란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친일파나 미군정하에서 비양심적인 행동으로 민족의 명예와 발전을 손상시킨 반민족행위자를 단죄하는 것이었다.

2) 민족문제 해결에 대한 좌우의 입장

① 우익진영 : 친일파 민족반역자는 일소되어야 하나 우선 힘을 뭉쳐 정부를 수립한 후에 처 리해도 늦지 않다는 입장이었다(대동단결론). 이들은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소극적이었다.

② 좌익진영:우익세력이 주장하는 대동단결론이란 결국 일본제국주의자와 친일파를 옹호하는 노선으로, 무원칙에서 출발한 비민주적인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단 호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2) 토지문제 - 공평한 토지분배

1) 해방 당시 전 국민의 85%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에게 해방이란 일제에 빼앗긴 땅 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은 공평한 토지분배를 기대했다. 토지문제의 해결이 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경작지 이외의 토지는 국유화하여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 토지문제 해결에 대한 좌우의 입장

① 좌익진영: 토지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는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적 발전은 기 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토지에 대한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을 내세웠다.

② 우익진영: 토지문제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농민의 토지소유욕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정 책을 제시했으나, 수세적인 입장이었고 구체적으로 이를 실현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우익은 대체로 지주(地主) 출신들이 많았다. 지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민당은 ‘무상몰수 무 상분배’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하고 ‘유상매수 유상분배’원칙을 고수하였다.

1. 분단을 보는 관점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점인 민족분단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분단에 관한 국외, 주로 미국에서의 연구시 각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으로 나누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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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의 대 수정주의

1) 전통주의(Traditionalism)

전통주의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소간 대립, 갈등현상, 이른바 냉전의 책임을 소련의 호 전적이며 공격적인 팽창정책에서 찾는 시각이다. 한반도 분단에 관한 전통주의적 시각은 미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한반도의 분할점령은 단순히 군사적 편의를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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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로 이루어졌으나 미․소공위 및 UN에서 소년의 적화야욕이 표출됨에 따라 한반도에서 미 국측 의 통일정부 수립노력이 좌절되었고, 소련은 한국전쟁을 통하여 이 같은 야욕을 충족시 키려 했다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2) 수정주의(Revisionism)

전통주의적 시각에 수정(修正)을 가한 것이 수정주의 이다. 수정주의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 창정책이 냉전구조를 낳았다는 주장이다. 수정주의적 해석에 따라 한반도문제를 조명해 볼 때 소련은 한반도에 별 관심이 없었으며, 오로지 한국만의 자율적 의사에 따라 독립국가를 수립 하도록 도와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련군의 점령지역에서는 이 같은 목표를 달성 하였으나 미국의 방해와 책동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국제적 결의사항이 지켜지지 않고, 미 군점령지역에 미제국주의자의 하수인들이 단독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반도가 분단되었다는 것 이다.

(2) 외인론 대 내인론

한반도의 분단에 관한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적 논의가 ‘왜(why)’라고 하는 상황 논리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에 반하여, 국내학자들의 논의는 그 책임이 ‘누구(who)’에게 있느냐는 책임논리 에 중점을 두어 왔다.

1) 외인론(外因論)

한반도 분단의 원인과 책임을 외부에 돌리는 이론이 ‘외인론’이다.

① 전통적 외인론: 전통주의 해석에 따라서 소련에 분단 책임을 돌린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 분단은 세계를 공산화하려는 소련의 팽창주의적 야욕에 맞서는 과정에서 냉전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가 분단되었다는 것이다.

② 배타적 외인론 : 한반도 분단을 미국와 소련의 세력갈등이 빚어낸 산물로 보고, 이 양대 세력에 공동책임을 묻는 분단외인론이다. 이는 미국과 소련 모두를 분단의 주역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입장을 취한다.

2) 내인론(內因論)

분단 외인론은 분단의 책임을 외세에만 전가하여 민족 주체적 역사의식을 상실하게 된다는 비 판을 받게 된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분단의 책임을 우리 스스로에게서 찾고자 하는 이론이

‘내인론’이다.

① 복합적 내인론

‘복합적 내인론’은 분단원인을 국내외적 측면에서 동시에 구한다는 점에서 ‘복합적’이고, 그러 면서도 궁극적 책임은 민족내부에 묻고 있다는 점에서 ‘내인론’이다. 즉 “한반도 분단의 1차적 책임은 미․ 소에 있지만, 본질적이고 궁극적 책임은 우리 민족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 복합적 내인론자들의 공통점

i). 이들은 민족사의 주체적 정립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ii) 이들은 민족해방운동과정에서의 방법론적 대립과 분열이 국가수립과정에서는 극좌와 극우 의 적대관계로 이어짐으로써 분단이 초래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iii) 이들은 좌․우익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중간파의 합작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중간파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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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민족해방’의 규범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 복합적 내인론자들의 한계성

i)분단의 대내적 책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분단구조화에 작용한 외압력을 과소평가한다는 점.

ii) 국내정치세력의 분열을 독립변수로 보고 미․소의 정책대립을 종속변수로 파악한다는 점.

iii) 주체적 역사인식에 대한 주관적 해석에 빠져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② 수정주의적 내인론

한반도 분단의 원인은 미국에게 있고, 그 책임은 이러한 미국에 동조하고 결탁한 국내 우익 정치세력에게 있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와 지주계급으로 구성된 우익세력이 그들 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미군정과 결탁하였고, 이들 양자의 이해관계가 분할점령의 영구화라 는 점에서 일치하였기 때문에 분단이 초래되었다는 주장이다.

2. 분단의 원인

우리는 어떻게 분단 원인에 대한 타당한 접근을 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우선 분단 원인 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총체적이라 함은 분단 상황을 창출했던 세 측면, 즉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측면, 국내적 측면, 그리고 이 양자 사이의 정치적 측면 등을 종합적 으로 고찰해야 된다는 것이다.

(1) 국제적 측면

분단 원인과 관련하여 국제적 측면에서는 일본 중심의 대동아 공영권이 붕괴된 위에서 새롭게 조성되었던 미 · 소 중심의 냉전적 갈등이 미친 영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냉 전의 세계적 차원, 동북아 차원, 남북한 차원 등이 포함된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 소 양군은 한반도의 남북한에 진주하게 된다. 그렇지만 한반도에서 그들이 취한 정책적 목표는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한정되든지, 좀 더 나아간다면 새로이 수립 될 자주정부 수립에 도움을 제공하는 정도에 한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남북한에서 진주한 미소 양군은 그 점령지역에 자신의 체제를 부과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분단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 민족 분단의 외적 원인

①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일본의 식민통치.

②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방지하기 위한 미국의 제의와 그것을 수락한 소련의 책략.

③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폐기하고 한반도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간 미국의 책략.

④ 제2차대전 후 미 · 소 양국을 중심으로 한 동서냉전의 심화.

(2) 국내적 측면

일제 식민지지배가 남한 사회 경제적 토대와 해방 이후 분단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여파가 미 친 영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히 분단 과정에서 민중들이 취한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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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의 식민지지배의 영향 [원인(遠因)]

① 일제의 식민지지배는 잠재적으로 한국사회를 양극적으로 균열시켰다. 그것은 한편으로 강 력한 식민관료체제의 유산을 남긴 동시에 친일파 및 지주 등 사회 기득권층을 만들어냈고, 다 른 한편으로는 이에 저항하는 항일세력과 식민지지배에 고통을 받는 민중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같은 균열은 일제 시기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표출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게 되자, 친일파 및 지주 등 일제시대의 기득권층과 좌파 항일운동세력 을 중심으로하는 민중세력 사이의 갈등은 좌우대결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단의 단초는 일제하 사회균열로부터 찾지 않으면 안된다.

② 일제 지배는 민족적 분열과 강력한 국가기구의 유산을 남겨 놓았다.

일제는 가혹한 탄압을 위해 고도의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한 관료체제를 유지시켰다. 일제의 식민관료체제하에서 부일하였던 한인 관료들은 자신의 동족을 핍박하였고, 해방 후 민중들의 처벌 요구에 위협을 느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은 오히려 미군정과 결탁하여 반혁명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 일제가 남긴 강력한 관료체제의 유산은 미군정의 물리적 수단이 되었다.

③ 일제 지배는 민족해방투쟁세력들의 활동을 고립시키고 분산시켰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한국 사회의 계급적 · 민족적 분열 이외에도, 해방 후에 새로운 사회 건설 의 통합적 지도부가 순조롭게 형성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즉 일제 말기에 민족해방운동의 각 세력은 고립적으로 활동함으로써, 해방 후에 특히 남한에서는 미국의 개입과 더불어 통합 적인 지도부의 형성을 어렵게 만들었다.

2) 민족 내부적 요인

① 패전국의 식민지라는 국제정치상의 냉엄한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전승국으로 자처하여 즉 각적 독립 이외의 어떤 유예기간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던 일부 ‘국민감정’.

② 그것을 이용하여 분단국가의 지배권만이라도 확보하려 한 일부 정치세력의 책동과 일부 대 중들의 추종 등.

(3) 정치적 수준

미국과 소련의 정책 속에서 남한에서는 미국의 이해를, 북한에서는 소련의 이해를 추종했던 정치세력들만이 강화되었고 이에 저항했던 세력들은 약화되었다. 남한에서는 극우파만이, 북 한에서는 극좌파만이 강화되었고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는 모두 약화되었던 결과는 바로 이 같 은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극우:이승만 *중도우파:김구,김규식 *중도좌파:여운형 *극좌:박헌영,김일성]

그 결과 일제하의 잠재적 사회균열은 이제 남북의 대결, 좌우의 대결로 확대되게 되었다.

1. 모스크바 3상회의( 1945. 12. 28)의 결정과 의미

(1) 주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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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영국 · 소련 외상(外相)이 모인 이 회의에서는 다음 내용과 같은 ‘한국문제에 관한 4 개항의 결의서’(이른바 신탁통치안)을 결정했다.

1) 민주주의적 원칙 아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남북한을 통한 임시 조선 민주주의정부 를 수립할 것.

2)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

3) 미국 · 영국 · 소련 · 중국 등 4개국 정부가 공동관리하는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 할 것.

4)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할 것.

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신탁통치 5년 후 친미 · 친소 및 중립적 정부가 수립될 가능성 이 모두 열려 있는 조건 아래서 미 · 소 양국이 각각 한반도에서 자국의 영향권에 드는 정부 를 수립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얻으려 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2) 신탁통치안에 숨겨진 의미

1)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문제 처리방안의 골자는 ‘한국임시정부의 참여하에 미․

소․영․중 4개국이 주도하는 신탁통치협정을 미․소가 체결한다’는 것이다.

최장 5년간이라는 것은 소련측 안의 요소이고 미․소․영․중 4개국 주도의 신탁통치라는 원칙은 미국측 안의 요소이다. 미국은 신탁통치라는 자국의 기본의도를 관철시키는 가운데 유엔주도 하의 신탁통치를 4개국 주도형식으로 양보하면서도 신탁통치주도 4국에 비교적 친미적 국가 (영국과 중국)를 포함시켜 자본주의 국가의 수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소련은 즉시 독립안을 양 보하고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인을 참여시키는 것이 현상황으로 보아 소련에 유리하 다는 판단하에 최장 5년간이라는 것과 한국임시정부수립 조항을 첨가함으로써 신탁통치의 성 격을 “강대국의 영향이 비교적 약하고 국내정치세력의 참여가 보장된 후원제”로 규정하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3대 1의 불리한 조건을 수락하였다.

2) 신탁통치안이 현실화된다면 어느 쪽이 정말로 유리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미국과 소련 모두 자신들에게 우호적 정부 수립이라는 목적에 종속되는 수단으로서의 신탁통치안은 결정되 었던 것이다.

2. 국내 정치세력의 대응

(1) 우익세력은 대대적인 신탁통치반대운동[반탁운동]에 나섰다.

1) 김구는 즉각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반탁운동을 주도하였다.

2)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반탁에 동조하였다[→1946년 6월 3 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주장]

(2) 좌익세력은 처음에는 반탁을 주장하였으나, 소련의 의도와 지령에 의해 신탁통치에 찬성하 였다[찬탁운동].

결국 1946년~47년은 신탁통치문제로 좌우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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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

1) 대한민국의 수립과정

①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 서울에서 개최 (1946. 3. 20)

②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1946. 5. 6)

③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7. 5. 21)

④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1947. 10. 21) ;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이관.

⑤ 유엔은 “가능한 지역만에서의 총선거”를 가결 (1948. 2. 26)

⑥ 38도선 이남만의 선거 실시 (1948. 5. 10)

⑦ 선거 후에 구성된 국회에서 헌법 제정 (1948. 7. 17)

⑧ 정부수립 선포 (1948. 8. 15) ;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분단국가 대한민국이 성립.

*1948년 12월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 승인 및 3가지 결정을 하였다.

(i) 압도적 인구가 사는 그 부분에서 합법적 정부(대한민국정부)가 들어섰다.

(ii) 유권자들의 자유의사의 유효한 표현인 선거에 기초하고 있다.

(iii) 한반도에서 그러한 정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투표를 통해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대한민국을 승인하 였다. 결의안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i) 한국 인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한국 지역에 효과적인 통치와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 부(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ii) 이 정부는 유권자들의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이고 UN임시위원단이 감시한 선거에 기초 하고 있다.

(iii) 이 정부가 한국 내의 이러한 유일한 정부이다.

임시위원회가 관찰하고 상의한 그리고 모든 한국 거주자의 절대 다수가 살고 있는 한국의 그 지역에서 실질적으로 통제되고 관할권이 있는 합법적인 정부(대한민국정부)가 설립되었음;

이 정부는 임시위원회에 의해 감시된 한국의 그 지역의 유권자의 자유 의지에 의해 유효하게 표현된 선거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에서 앞에 이미 언급한 정부가 유일하다.

2) 북한정권 수립과정

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1946.2.8)되어 토지개혁 실시 (1946. 3. 5)

② 북조선노동당 결성 (1946. 9. 28)

③ 정식으로 북조선 인민위원회[최고 행정기관] 성립 (1947.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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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조선인민군을 창설(1948.2.8)

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실시 (1948. 8. 25)

⑥ 헌법[인민민주주의 헌법] 통과(1948.9.8)

⑦ 분단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포(1948. 9. 9)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은 장기간에 걸친 한민족의 독립투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연 합국이 승리한 결과 초래된 것입니다. 35년간 억눌려왔던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여, 합심 단결하여 주권을 회복하고 식민통치의 잔재를 청산하여 새로운 국가건설의 도정에 나서야 했 습니다. 그러나 금지되고 억압되어 왔던 정치행위가 해방과 동시에 그 고삐가 풀리자 어느 누 구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말았습니다. 권력을 둘러싼 대립투쟁은 이론 및 노선투 쟁과 병행하여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양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해방의 의미를 놓고 서였습니다. 해방이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리 두 가지 요인으로 초래되었다는 것에 는 인식을 같이했지만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달랐던 것입니다.

해방은 어떠한 요인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며 이와 관련하여 그 대응방 안도 크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모든 대립과 분열은 이로부터 기인했 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남북한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도 결국은 해방의 의미와 과제로부터 그 원인이 제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해방의 의미와 과제를 바르 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절실한 문제점인 민족분단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해명하기 위한 여러 논의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국내연구자들 이 한반도분단 그 자체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38선의 설정 및 미․소 군정체제의 성격규명에 연구의 초점을 두었던 반면, 국외연구자들은 한반도 분단과정, 특히 한국전쟁을 통하여 냉전 구조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연구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이에 따라 한반도 분단에 관한 국내외 학계의 초기 연구동향은 국외에서는 냉전의 전통주의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국내에서는 국 제적 분단책임론, 즉 분단외인론이 주류를 이루어왔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197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시각들이 냉전의 수정주의적 해석과 분단내인론입니다. 그러나 분단 원인에 대한 검토 는 분단의 기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어떻게 구조화 되었는가를 단계적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단의 결정적 계기가 어느 한 순간에 갑 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분단의 단초를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해방의 공간에서 ‘과연 우리는 분단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문제의식 속에 서 신탁통치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신탁통치논쟁은 국내적, 국제적 갈등관계의 분수령을 이 루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탁통치문제를 돌이켜 볼 때 신탁통치안을 둘러싼 의견통일이 통일 을 위한 최초의 실천단계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견대립이 결국 분단을 향한 단초가 되 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좀 더 현명한 대응을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 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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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해방과 분단’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자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시킨 ‘6․ 25 한국전쟁’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 겠습니다.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 비평사.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 ③>>, 풀빛.

한국정치학회 편, <<한국현대정치사>>, 법문사.

지병문 외 , <<현대한국정치의 展開와 動學>>, 박영사.

손호철, <<한국정치학의 새 구상>>, 풀빛.

한국역사연구회, <<한국현대사>>1, 풀빛.

조순형, <<한국분단사>>, 형성사.

이완범, <한반도 신탁통치문제 1943~46>, <<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국사편찬위원회 http://kuksa.nhcc.go.kr 서울대학교 규장각 http://kyujanggak.snu.ac.kr 역사학회 http://www.hongik.ac.kr/~yoksa 한국역사연구회 http://www.koreahistory.org 한국민족운동사학회http://www.hknm.or.kr 한국근현대사학회 http://kmch.or.kr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