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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賀의 ‘神絃’ 3首의 계승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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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賀의 ‘神絃’ 3首의 계승관계

― 南朝 「神絃歌」와 「九歌」를 중심으로* ―

20)

박 혜 경**

❙국문초록❙

李賀의 「神絃曲」·「神絃」·「神絃別曲」은 南朝 「神絃歌」의 제목을 빌려와 唐代의 민간 제사를 묘사한 작품 으로서 南朝 「神絃歌」의 민간 가요로서의 본질을 계승하면서도 시의 구조와 언어, 표현방식에 있어서 고유의 독창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다. 李賀는 「神絃」 3首를 창작하면서 민간 제사의 풍경을 입체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신과 무당, 제사의 참관자 사이의 정서와 분위기를 감각적 이미지들로 구체화 하였다. 李賀의 「神絃」 3首는

「九歌」 속에 나타난 신과의 소통에 대한 열망이라는 본질과 민간의 巫歌를 재창조한 屈原의 정신을 그만의 방 식으로 계승하였다.

[주제어] 李賀, 「神絃曲」, 「神絃」, 「神絃別曲」, 南朝 樂府, 「神絃歌」, 「九歌」, 屈原

❘목 차❘

Ⅰ. 머리말

Ⅱ. 南朝 「神絃歌」의 계승과 차별성

Ⅲ. 「九歌」의 계승과 차별성

Ⅳ. 맺음말

Ⅰ. 머리말

뺷全唐詩뺸 卷

393

에는 李賀의 「神絃別曲」

·

「神絃曲」

·

「神絃」

3

수가 수록되어 있다

.

1) 뺷全唐詩뺸 전체를 통 틀어

神絃

을 詩題로 한 작품은 李賀의 이

3

수뿐이며 詩文 중에

神絃

을 포함한 작품도 路德延의 「小兒詩」

1

수뿐이다

.

2)

神絃

이라는 명칭은 뺷宋書뺸 卷

19

「樂志」에 최초로 나타나는데 吳나라 宗廟 祭歌로 기록되어

* 본 논문은 2016년 단국대학교 대학연구비 지원으로 수행된 연구임.

** 檀國大學校 연구전담 조교수 / zheneugean@hanmail.net

1) 표기상의 편의를 위하여 以下 「神絃別曲」·「神絃曲」·「神絃」은 「神絃」 3로 지칭하겠다. 2) 뺷全唐詩뺸 卷719, “筋撥賽神絃.”

(2)

있으니

神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연주되는 음악

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3) 北宋 의 郭茂倩이 편찬한 뺷樂府詩集뺸의 「淸商曲辭」 중

吳聲

부분에는 「神絃歌」로 분류된 樂府詩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李賀의 「神絃曲」과 「神絃別曲」 두 수가 수록되어 있다

.

「神絃歌」에 수록된 시가들은 민간 의 제사에 사용된 노래들로서 그 성격은 뺷楚辭뺸 「九歌」와 유사하다고 평가된다

.

4) 현재 확인할 수 있는 李賀 의 「神絃」

3

首의 연원은 屈原에 의해 「九歌」로 기록된 楚 지역의 巫歌로부터 시작되어 「神絃歌」에 수록된 民歌에 이르는 유구한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唐代 시인으로서 李賀는 이와 같은 이전 詩歌의 영향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독창성을 발휘하여 唐代

神絃歌

를 창작하였던 것이다

.

李賀의 「神絃」

3

首에 대한 역 대 비평에는 세 가지 경향성이 보인다

.

첫째 南朝 「神絃歌」와 동일한 성격의

祭歌

라는 설

,

둘째 唐代의 미 신 풍속을 비판한 것이라는

풍자설

’,

셋째 「九歌」의 영향을 받았으나 奇怪하고 荒誕한 표현으로 풍격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평이 그것이다

.

본고에서는 기존의 李賀의 「神絃」

3

首에 대한 평가들에 대하여 詩文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분석과 南朝 「神絃歌」 및 「九歌」와의 비교를 통하여 그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봄으로써

「神絃」

3

首의 본래적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지 탐구해보도록 하겠다

.

Ⅱ. 南朝 「神絃歌」의 계승과 차별성

李賀의 「神絃曲」에 대하여 王琦는

「神絃曲」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絃歌로 娛神에 쓰는 악곡이다

(

神絃 曲者

,

乃祭祀神祗絃歌以娛神之曲也

).”

라며 이 작품을 樂府民歌의 「神絃歌」와 같은 성격과 용도의 작품으로 보았다

.

5) 李賀의 「神絃」

3

首가 민간의 제사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은 시의 내용상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

그러나 李賀의 「神絃」

3

首와 뺷樂府詩集뺸에 수록된 「神絃歌」 사이에는 여러 측면의 유사성과 차별성이 존재 한다

.

이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

첫째 발생 지역과 풍속

,

둘째 시어의 구성과 작품간의 구조

,

셋 째 표현과 풍격의 차이가 그것이다

.

1. 발생지역과 풍속

먼저 李賀의 「神絃」

3

首의 배경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시문을 통하여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長安을 포함한 그 일대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

「神絃」

3

首 중에 그 위치가 명시된 작 품은 「神絃」

과 「神絃別曲」 두 작품이다

.

먼저 「神絃」은 長安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李賀는

808

년 3)뺷宋書뺸 卷19, 「樂志」, “하승천이 말하기를 세인들이 말하기를 오나라 조정에 아악이 없다고 전한다. 손호가 아버지의 상을

명릉에서 맞이할 때 오로지 여광대가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는 것을 보건데 금석과 같은 등가악기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 .’ 승천은 지금의 「神絃」은 손씨가 그것으로 종묘의 제사노래를 삼았다고 말하였다(何承天曰: ‘世咸傳吳朝無雅樂, 案孫皓迎 父喪明陵, 唯云倡伎晝夜不息, 則無金石登歌可知矣. 承天曰: 或云今之 「神絃」, 孫氏以爲宗廟登歌也).”

4) “觀其歌詞, 蓋民間祠神之樂章, 與 뺷楚辭뺸之뺷九歌뺸, 性質正同.”, 蕭滌非, 뺷蕭滌非說樂府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2, 75. 5) 王琦 等 評注, 뺷三家評注李長吉歌詩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9, 160.

(3)

(

元和

3

)

고향 昌谷을 떠나 洛陽으로 가서 河南府試에 응시하고

809

년에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잠시 長安 을 머물렀는데 이 시기를 제외하고 그가 長安에서 비교적 장기간 머물던 시기는

810~813

(

元和

5~8

)

사 이 太常寺에 소속된 奉禮郞이라는 말단직에 있던 때이다

.

「神絃」에 등장하는

終南

은 長安城 남쪽의 終南山 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제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그 일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吳企明은 「神絃」

3

首가 모 두 그가 長安에서 奉禮郞 직에 있던

811

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

그가 장안에 머물며 접한 황실의 신선에 대한 추종과 세간의 미신의 풍속을 반대하고 惑世誣民하는 무당들을 비판하기 위하여 「神絃」

3

首를 지었다는 것이다

.

6) 「神絃別曲」에도

巫山

蜀江

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이 등장하나 이것이 이 작품이 실제 巫山 선녀를 대상으로 한 시라는 확증으로는 부족하다

.

宋玉의 「高唐賦」 이래로 巫山仙女의 전설은 중국 문 학에서 수많은 시인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典故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神絃別曲」 속의 이 지명이 반드시 실 제 巫山과 蜀江

,

巫山仙女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

아니면 신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비유로서 사용되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

7) 다만 최소한 「神絃別曲」을 비롯한 「神絃曲」과 「神絃」이 吳越 지역의 신과 제사와는 관련이 없다는 근거로는 충분할 것이다

.

8)

뺷樂府詩集뺸 「淸商曲辭」의 吳聲에 수록된 「神絃歌」의 서두에는 뺷古今樂錄뺸의

「神絃歌」

11

곡은 一 「宿阿」

,

二 「道君」

,

三 「聖郎」

,

四 「嬌女」

,

五 「白石郎」

,

六 「青溪小姑」

,

七 「湖就姑」

,

八 「姑恩」

,

九 「採蓮童」

,

「明下童」

,

十一 「同生」이다

.”

라는 解題가 부기되어 있다

.

9)10) 「神絃歌」는 吳나라때부터 이미 존재하였으며 東晉

,

南朝시기에 유행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

蕭滌非는 靑溪

·

白石

·

赤山湖 등의 지명을 근거로 이들이 建 業

(

지금의 南京

)

일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본다

.

11) 靑溪는 「青溪小姑」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建業의 유명한 水道 중 하나로서 이 곡은 청계의 여신을 위한 娛神曲

(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노래

)

이며 赤山湖는 「湖就姑曲」

에서 보이는데 지금의 江蘇省 句容縣 남쪽에 있는 호수로 이 노래는 적산호의 동과 서에 사는 여신을 위한

6) 「李賀年譜新編」, 吳企明 箋注, 뺷李長吉歌詩編年箋注뺸, 北京: 中華書局, 2012, 859.

7) 「神絃別曲」에 등장하는 巫山의 소녀와 蜀江은 그의 짧은 일생 동안의 생활터전이었던 長安이나 昌谷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 었으며 朱自淸이 뺷李賀年譜뺸에서 주장한 이하의 東南之行의 지역과도 거리가 먼 蜀지역이다. 그러나 이 장소가 당시 문인 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장소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宋玉이 지은 「高唐賦」의 楚 襄王과 巫山 선녀의 이야기는 이후 수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蜀 지역의 자연 묘사나 人神 戀愛의 모티브로서 애용되었기 때문이다. 李賀 역시도 그의 시에서 이 전고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巫山高」라는 작품에서는 큰 강 뒤집히며 신녀는 안개를 끌고 오니, 초왕의 혼 이 찾아오는 꿈길에는 바람이 소슬하네(大江翻瀾神曳煙, 楚魂尋夢風颸然).”과 같이 직접적으로 그 전고를 사용한 예도 볼 수 있다. 따라서 李賀의 「神絃歌」가 반드시 실재 蜀 지역의 淫祀를 관찰하고 이를 묘사한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인은 신이 인간을 떠나 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을 상상으로 묘사하면서 자연풍광과 떠나는 신의 모습을 중첩시킨다. 때문에 신의 모습은 대자연의 모습에 융합되어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는 원시 신앙적 색채를 느끼게 한다. 남방의

「神絃歌」에 비하여 언어 형식과 표현 기교에 있어서는 세련화 되었지만 신을 전송하는 노래라는 본질적인 성격과 정서는 보전되어 있다.

8) 李賀는 「湘妃」에서 무산 구름과 촉나라 비는 멀리서도 서로 통하네(巫雲蜀雨遙相通)”라며 湘君과 湘夫人을 楚 襄王과 巫山 선녀에 비유하기도 한다.

9) 뺷樂府詩集뺸, 「淸商曲辭」(), 뺷古今樂錄뺸, “「神絃歌」十一曲:一曰「宿阿」, 二曰「道君」, 三曰「聖郎」, 四曰「嬌女」, 五曰「白石 郎」, 六曰「青溪小姑」, 七曰「湖就姑」, 八曰「姑恩」, 九曰「採蓮童」, 十曰「明下童」, 十一曰「同生」.”

10) 뺷樂府詩集뺸에는 이 11곡과 李賀의 「神絃曲」·「神絃別曲」외에도 王維의 「祠漁山神女歌二首」의 「迎神」·「送神」과 王叡의

「祠神歌·迎神」·「祠神歌·送神」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11) “노래 속의 청계·백석·적산호 등의 지명으로 볼 때 건업에서 멀지 않은 주변에서 발생하였을 것이다(以歌中靑溪, 白石, 及赤山湖等地名考之, 知其發生仍不離建業左右).”, 蕭滌非, 뺷蕭滌非說樂府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2, 75.

(4)

것이다

.

「白石郞曲」은 白石에 사는 남신을 대상으로 하는데 白石은 建業 인근의 지명으로 建業은 삼국시기 吳나라의 도성으로서 吳越 지역에 속한다

.

12) 뺷樂府詩集뺸에 수록된 祭歌 속의 모든 신과 귀신들이 어느 지역 의 어떤 신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이상의 몇 가지 실마리와 시문 속에 묘사된 배경 및 신의 묘사를 통해 그들이 건업을 중심으로 하는 吳越지역 일대의 민간신앙과 관련이 있으며 이 노래들이 민간 신 앙 속 神鬼 들을 대상으로 한 노래일 것이라는 것이 현재까지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民歌란 한 지역에 서 자생한 고유의 노래들로서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기 미련이다

.

長江 이남의 吳越 지역은 고대부터 미신과 巫風이 성행했던 지역으로서 북방에 비하여 온화한 기후와 풍요로운 자연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리적 문화적 특징이 南朝 「神絃歌」의 가사와 리듬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

13) 그 대표적인 예로 「嬌女詩」를 살펴보자

.

北遊臨河海, 遙望中菰菱. 북으로 河海에 이르러 멀리 물 속 줄과 마름을 바라보네. 芙蓉發盛華, 渌水清且澄. 부용은 꽃잎을 활짝 터뜨리고 녹수는 맑디맑아라. 弦歌奏聲節, 仿佛有餘音.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연주하니 메아리 울리는 듯하여라.

蹀躞越橋上, 河水東西流. 자박자박 다리 위를 지나가니 강물은 동으로 흐르네.

上有神仙居, 下有西流魚. 그 위에는 신선의 거처가 있고 아래에는 물고기가 서로 헤엄치네. 行不獨自去, 三三兩兩俱. 행인도 혼자 가지 아니하고 셋씩 둘씩 짝지어 가네.

李賀의 「神絃」

3

首에는 神鬼로 보이는 존재와 무당이 그들을 영접하거나 전송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뚜 렷하게 등장하지만 「神絃」

3

首 속 神鬼 역시 그 정체가 명확하지 않다

.

神絃曲

西山日沒東山昏, 서산으로 해 지고 동산이 어두워집니다. 旋風吹馬馬踏雲. 회오리바람에 날려 온 말이 구름을 밟습니다. 畫絃素管聲淺繁, 금슬과 피리 소리 잦아들 듯 다시 뒤섞입니다. 花裙綷䌨步秋塵. 꽃무늬 치마를 사각거리며 가을 먼지를 지르밟습니다. 桂葉刷風桂墜子, 계수 잎에 바람 이니 계수나수는 열매를 떨어뜨립니다. 青狸哭血寒狐死. 푸른 삯이 피 쏟으며 울고 한기 서린 여우가 죽어나갑니다. 古璧彩虯金帖尾, 옛 벽 이무기 단청의 황금빛 꼬리가 번쩍입니다.

12) 「青溪 小姑曲」, “문을 열면 백수요, 옆으로는 다리라. 아가씨가 사시는데 외로이 임도 없이 지낸다네(開門白水, 側近橋梁. 姑所居, 獨處無郎).” 「湖就姑曲」, “적산호 언덕으로 나아가니 이른 봄 이 삼월에 초록으로 뒤덮을 듯 물풀이 돋아나네. 호수 에서 적산기로 나아가니 큰 아가씨는 호수 동쪽에 떨쳐계시고 둘째 아가씨는 호수 서쪽에 살고계시네(赤山湖 就頭, 孟陽二 三月, 綠蔽賁荇藪. 湖就赤山磯, 大姑大湖東, 仲姑居湖西).” 「白石 郎曲」, “백석랑은 강가에 살고 계시네. 앞에서는 강백이 인 도하고 뒤로는 물고기들이 따르네. 옥 같은 돌들이 쌓여있고 비취 같은 소나무가 늘어섰네. 백석랑의 고운자태 유독하기가 세상에 둘도 없다네(白石郎, 臨江居. 前導江伯後從魚. 積石如玉, 列松如翠. 郎豔獨絕, 世無其二).”

13) 馮天瑜·何曉明·周積明, 뺷中華文化史뺸,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2011, 281.

(5)

雨工騎入秋潭水. 우공이 잡아타고 맑은 연못 속으로 뛰어듭니다. 百年老鴞成木魅, 백년 묵은 올빼미는 나무귀신으로 둔갑하였습니다. 笑聲碧火巢中起. 웃음 소리 속에 푸른 불꽃이 둥지에서 치솟습니다.

「神絃曲」의 경우 신으로 보이는 대상은

雨工

한 명 뿐이며 나머지는 인간에게 해를 끼는 악귀들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

14) 「神絃」에는

海神

山鬼

와 함께 그 존재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이라는 호칭이 등장할 뿐이므로 이들 신이 어느 지역의 신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가 없다

.

神絃

女巫澆酒雲滿空, 무녀가 술을 뿌리니 구름이 온 하늘에 자욱합니다. 玉爐炭火香鼕鼕. 옥로의 숯불 위로 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海神山鬼來座中, 해신님 산귀님이 내려와 자리에 앉으십니다. 紙錢窸窣鳴颴風. 지전이 회오리바람에 바스락거립니다.

相思木帖金舞鸞, 상사목 비파에는 금빛 춤추는 난새가 새겨있습니다. 攢蛾一啑重一彈. 미간을 찡그리며 한마디 읊고 다시 한 번 줄을 퉁깁니다. 呼星召鬼歆杯盤, 별에 호소하여 귀신을 모셔오니 술잔과 소반을 흠향하십니다. 山魅食時人森寒. 산도깨비님이 잡숫자 사람들의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終南日色低平灣, 종남산 위 노을이 산등성이 밑으로 내려앉습니다. 神兮長在有無間. 신께서는 오래도록 有와 無 사이에 계십니다.

神嗔神喜師更顏, 신께서 성내고 신께서 기뻐할 때마다 무당의 낯빛이 바뀝니다. 送神萬騎還青山. 만 기 말 타고 청산으로 돌아가시는 신을 전송합니다.

「神絃別曲」에는 「神絃曲」이나 「神絃」에 비하여 그 존재가 뚜렷한

巫山小女

가 등장한다

.

그러나 이 존재 역시 이미 唐代 이전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신으로서 남조 「神絃歌」의

靑溪女神

이나

白石郞

과 같은 지역적 특색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

神絃別曲

巫山小女隔雲別, 무산 소녀와 구름을 사이에 두고 헤어집니다. 春風松花山上發. 봄바람에 소나무 꽃이 산 위에 흐드러집니다.

綠蓋獨穿香徑歸, 초록 수레덮개가 홀로 향기로운 오솔길을 질러 돌아갑니다. 白馬花竿前孑孑. 백마와 꽃장대를 우뚝하게 앞세우고 가십니다.

蜀江風澹水如羅, 촉강 위에 바람 잦아드니 수면이 비단처럼 펼쳐집니다.

14) 雨工에 대해서는 李朝威의 뺷柳毅傳뺸에 柳毅過涇陽, 見有婦人牧羊於道畔, 詢之, 知是洞庭龍君之小女. 毅曰:子之牧羊, 何所 用哉? 神衹豈宰殺乎? 女曰:非羊也,雨工也. 曰:何為雨工? 曰:雷霆之類也.”이라는 기록이 있다. 雨工은 洞庭湖 용왕의 딸이 부리는 양의 모습을 한 신으로 이 전설에 따르면 번개를 부리는 신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李賀의 작품 속 우공이 금 빛 규룡을 잡아타고 물에 들어간다는 이미지는 이 전설 속 번개과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어 보인다.

(6)

墜蘭誰泛相經過. 떨어진 난초는 그 누가 띄웠는지 스치고 지나갑니다. 南山桂樹為君死, 남산의 계수나무는 임 때문에 죽어버립니다.

雲衫淺污紅脂花. 하얀 구름 적삼이 붉은 꽃물에 옅게 물들어버립니다.

이상 「神絃曲」의 신은

青狸

寒狐

로 차갑게 묘사된 맹수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악귀를 몰아내며

雨工

를 잡아가는 驅魔의 신으로서 신의 등장으로 인해

木魅

와 같은 요괴들이 처단된다

.

「神絃曲」 속의 제사 는 이처럼 특정되지 않는 여러 신들의 존재를 불러내어 악귀들로 은유된 현실 삶 속의 위협과 공포를 몰아내 기 위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

「神絃」 속의

海神

山鬼

는 무당의 지극한 대접을 받는 존재들로서 구경꾼 들은 무당을 통하여 신의 뜻을 전달받는다

.

이 神鬼들은 인간들의 「神絃曲」의 신들과는 달리 인간에게 위로 와 대접을 받는 존재들로서 그 제사의 목적이 신귀에 대한 위무를 통해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

「神絃別曲」의

巫山小女

는 앞의 두 작품 속의 신들과는 다른 아름다운 여성적 존재로 그려지며 전고의 영향으로 신과의 이별의 장면또한 아름답고 애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

특히 이 작품의

南山 桂樹為君死

는 南朝 「神絃歌」의 「姑恩曲」 속

높디높은 산꼭대기 측백나무 겨울여름 잎이 쇠지 않네

.

홀로 하늘의 은혜를 입었으니 나뭇가지 위 잎과 꽃은 무성하여라

(

苕苕山頭柏

,

冬夏葉不衰

.

獨當被天恩

,

枝葉華葳 蕤

).”

라는 구절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

王運熙는 「姑恩曲」의

明姑

태양의 여신

이 아닐까 추정하는데 巫 山의 선녀가

구름과 비

의 여신이며 이 전고가

이별

의 정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

,

또한

送神

의 성격의 노 래라는 점에서 이하가 「姑恩曲」의 이 구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계수나무가

무산 소녀와의 이별 때문에 죽 는다

로 변형시킨 것은 아닌가 한다

.

이렇듯 李賀의 「神絃」

3

首는 그 배경이 長安일 가능성이 크며 묘사된 자연 환경을 통해 보건데 남방의 청신함이나 윤택함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

이와 같은 창작의 배경과 풍속이 차이

,

그리고 제사의 목적과 분위기의 차이로 인하여 「神絃」

3

首는 南朝 「神絃歌」와는 다른 고유의 분위기 와 색채를 띠는 것이다

.

작품 간의 구조에도 차이가 있다

.

뺷樂府詩集뺸의 편집자는 李賀의 「神絃曲」과 「神絃別曲」을

迎神

送神

의 구조로 파악하였다

.

그러나 이것이 李賀 본인이 의도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

그 이유 는 李賀의 「神絃」

3

首가 뺷樂府詩集뺸에 수록된 王維와 王叡와의 작품과는 달리 하나의 詩題 아래

迎神

送 神

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神絃曲」과 「神絃別曲」의 내용으로 보더라도 「神絃曲」의

4, 5

구를 보 면 제사가 이루어지는 절기가 가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神絃別曲」의 배경은 봄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묘사된 신 역시도 다르다

.

따라서 이 두 시를 한 날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동일한 제사에 대한

迎神曲

送 神曲

이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2. 시어의 구성과 내부 구조

李賀는 唐代에 유행한 近體詩의 형식보다는 비교적 활용이 자유로운 樂府體나 古詩體를 즐겨 사용하였 다

.

15) 그러나 시어의 조탁과 감각적인 이미지의 창조와 같은 언어 수사적 측면에 있어서는 독창적인 일면을

(7)

드러냈다

.

李賀의 「神絃」

3

首는 모두

7

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수는 세 수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

남조의

「神絃歌」에 실린 곡들은 그 구성이 다양하다

.

「宿阿曲」

5

4

·

「道君曲」

4

3

·

「聖郎曲」

5

6

·

「嬌女詩」

2

수는 모두

5

6

·

「白石郎曲」

2

수는 각각

3-3-7

·4

4

·

「青溪小姑曲」

4

4

·

「湖就姑 曲」

2

수는 모두

5

4

·

「姑恩曲」

2

수는 각각

5-5-5-7·5

4

·

「采菱童曲」

2

수는

5

4

·

「明下童曲」

2

수는 모두

5

4

·

「同生曲」

2

수는 모두

5

4

구로 구성되어있다

. 5

4

구의 형식이 가장 많으며 雜言의 형태도 보인다

.

악부시는 자유로운 형식에서 후기로 갈수록

5

言化 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神絃歌」는 南朝시 기에 속하므로 그 형식이 五言絶句에 가까운 것은 樂府 詩體의 발전의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

16)李賀는 樂府 古詩體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다른 악부시 중에는 雜言으로 지어진 작품도 있으나 「神絃」

3

首는 모두

7

언으로 구성하였으며 각운을 맞추었다

.

각운에 있어서는 시의 중간에 운을 바꾸는 轉韻의 수법을 통해 음악적 분위기 의 전환도 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神絃曲」은

1-4

구까지는

‘-n’

으로

5-10

구까지는

‘-i’

로 각운하였으며 「神絃」

1-4

구까지는

‘-ng’

5-12

구까지는

‘-n’

,

「神絃別歌」는

1-4

구까지는 入聲韻으로

5-8

구까지는

‘-a’

로 각운 하여 운의 전환에 따라 내용에도 변화를 주었다

.

「神絃曲」은 운의 변화에 따라

[

迎神 – 驅魔

(

혹은 축원의 내 용

)]

으로 구성되어 있고 「神絃」은

[

迎神 – 接神 – 送神

]

으로 구성되어 있다

.

「神絃別曲」은

[

送神 – 送神

]

으로 구 성되어있다

.

운의 전환에 따라 제사 절차를 전환시킴으로써 새로운 분위기와 정서의 환기를 꾀한 것이다

.

3. 표현과 풍격

南朝 「神絃歌」는 민가 고유의 소박하고 담백한 언어와 풍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민중이라는 작가적 특 성과 민중의 삶 속 소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

「神絃歌」는 민간에서 구전되었다가 문인을 통해 문자로 기록되 었지만 유사한 성격의 「九歌」와는 다르게 문인의 수정이나 개작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

아울러 그 노 래의 대상이 당시 백성들의 생활공간에 깃든 신과 귀신들이기 때문에 신의 묘사나 그들을 대하는 백성의 태 도와 제사의 모습이 꾸밈없이 소박하여 문인들의 조탁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

「靑溪小姑曲」과 「嬌 女詩」에 등장하는 신의 모습은 외로운 인간 여인과 다름없는 모습이며 「宿阿曲」과 「聖郞曲」

·

「採蓮童曲」에 등장하는 신들은 백성의 삶의 터전에 속에 함께 살고 있는 친숙한 정령의 모습처럼 그려져 있다

.

17) 심지어 노래 속의 대상이 신과 정령의 모습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道君曲」의

道君

은 道敎의 신이지만 시에 묘사된 것은 집안 뜰에서 자란 오동나무의 모습이다

.

15) 李賀의 시가 중 2/3 이상의 작품들이 ··등의 제목을 가지고 있거나 음악과 관련된 작품들이다. 그 중 「傷心行」·

「湖中曲」·「羅浮山人與葛篇」·「堂堂」·「致酒行」·「長歌續短歌」·「難忘曲」·「綠水詞」·「莫愁曲」·「有所思」 등은 樂府詩 題를 그대로 빌려오거나 변형한 작품들이다.

16) 김학주, 뺷樂府詩選뺸, 서울: 명문당, 2002, 16.

17) 李賀의 작품 중 「綠水詞」에는 「採蓮童曲」의 동쪽 호수 줄풀 뜯는 아이, 서쪽 호수 마름 따는 악공(東湖扶菰童, 西湖採菱 ).”를 모방하여 동쪽 호수에서는 연잎을 따고 남쪽 호수에서는 창포 뿌리를 캐네(東湖採蓮葉, 南湖拔蒲根)”라고 한 구절 도 있다. 李賀가 악부의 형식뿐 아니라 악부 속에 나타난 이미지와 민가의 언어적 표현을 좋아하고 학습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中庭有樹, 自語梧桐, 推枝布葉.

집 마당에 나무 한그루, 스스로 말하기를 오동이라고, 가지를 펼치고 잎사귀를 펴고 있네.

이러한 「神絃歌」 속 신귀들의 특성에 대하여 박정숙은 南朝 「神絃歌」에 등장하는 신들이 마을과 그 주민 을 수호하는

성황신

의 성격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

18)

李賀 「神絃」

3

首에 등장하는 신들도 신화 속의 大神이나 道敎의 신들이 아닌 정체가 뚜렷하지 않은 지방 신이거나 잡귀들의 모습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南朝 「神絃歌」 속 신들과 같은 친숙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

「神絃曲」 속

6-10

구에 등장하는 잡귀들은 공포스러운 존재로 그려져 있으며 「神絃」의

7, 8

구에 등장하는

海 神

山鬼

는 구경꾼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

南朝 「神絃歌」의 신들이 백성의 삶의 터전과 그 주변 자연에 깃든 친숙한 모습인 것에 비교하면 李賀 「神絃」

3

首 속의 신과 잡귀들은 이질적인 존재로서 사람들에게 경외와 공포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묘사된 것이다

.

南朝 「神絃歌」 속 신과 인간

,

그들 이 소통하는 제사가 자연스럽고 다정한 것이라면 李賀가 사는 唐代의 신과 인간의 관계는 다소 긴장되고 이 질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

4. 풍자성

李賀의 「神絃」

3

首의 창작 동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

첫째 직접 민간의 제사를 보고 그것을 시로 옮긴 것이라는 견해와 둘째 당시 전 사회에 만연했던 미신과 무술을 숭상하는 풍조를 풍자하기 위한 것 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

이외에도 李賀의 악부가 종종 雲韶院의 악공들에 의해 악곡에 붙여져 연주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실제 제사 악장으로 쓰기 위해 지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

19) 실제 제사를 위한 노래로 해석되는 작품으로 李賀의 「綠章封事」를 들 수 있다

.

이 시에는

오도사의 야초를 위해 짓다

(

爲 吳道士夜醮作

)’

라는 간략한 序가 남아 있는데

夜醮

란 밤에 올리는 도교 제사의 이름이다

.

20)

綠章

은 푸른 종이에 붉은색으로 쓴 奏文을 가리키며

,

21)

封事

는 신하가 밀봉하여 올리는 상소문을 말한다

.

22)시문 중

綠 章封事諮元父

라는 구절은 이 작품이 天帝에게 상소하기 위한 목적의 작품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

朱自淸은 이 제사가 元和 元年 長安에 역병이 돌아 사망자가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올린 제사였 으리라 추정한다

.

23)그러나 시문 중 장안성 안 부호의 저택과 가난하고 고독한 문인의 방을 대조적으로 묘사 18) 박정숙, 「南朝樂府神絃歌와 城隍信仰」, 뺷東洋學뺸41, 서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7.2, 101.

19) 뺷新唐書뺸 卷203 「李賀傳」에는 樂府數十篇, 云韶諸工皆合之弦管.”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뺷唐才子傳뺸 「李賀」편에서는 이를 받아 樂府諸詩, 云韶衆工, 諧於律吕.”라고 기록하고 있다.

20) 뺷隋書뺸 卷35, 「經籍志」, “而又有諸消災度厄之法, 依陰陽五行數術推人年命, 書之如章表之儀, 幷具贄幣, 燒香陳讀云, 奏上天 , 請為除厄謂之上章. 夜中於星辰之下, 陳設酒脯䴵餌幣物, 歴祀天皇太一, 祀五星列宿, 為書如上章之儀以奏之, 名之為醮.”

21) 李肇, 뺷唐國史補뺸, “凡太淸宮道觀薦告詞文, 用靑藤紙朱字, 謂之靑詞.”, 吳企明 箋注, 뺷李長吉歌詩編年箋注뺸, 北京: 中華書局, 2012, 306.

22) 封事에는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밀봉한 奏書로서 서신의 입구를 봉하여 그 내용이 누설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蓋封 其書函之口, 不欲令其事泄露).”, 王琦 等 評注, 뺷三家評注李長吉歌詩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9, 47.

23) “뺷新書뺸 36 뺷五行志뺸謂元年 夏浙東大疫, 死者大半’.”, 朱自淸, 뺷李賀年譜뺸, 吳企明, 앞의 책, 311쪽 재인용.

(9)

하면서 揚雄으로 대표되는 문인들의 혼을 위로해주기를 청하는 내용은 이것이 당시 역병으로 고통 받는 백성 을 위한한 실질적 용도로 지어진 작품이라기보다는 민간의 제사 노래 양식을 빌려와 시인의 서정을 기탁한 서정시로서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

어찌되었든 그것이 실제 용도를 위해 지어진 것인지 개인의 서정을 의탁 한 것인지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그 안에는 제사 행위에 대한 풍자의 어조는 찾아볼 수 없다

.

「神絃」

3

首 역 시 실제 제사 음악의 용도라는 견해는 직접 민간의 제사를 참관하고 이를 시로 옮겼다는 의견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어떠한 비판적인 시각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

그러나 실질적으로 李賀의 「神絃」

3

首에 대한 해석 중에는 이 작품들이 당시 풍속을 풍자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 것을 볼 수 있다

.

“당대 풍속은 무술을 숭상하였다. 숙종 조에 왕여가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총애를 받았는데 황제가 그 말을 중용하여 여무당을 왕령으로 파견하여 천하 명산대천에서 각각 기도를 하게 하였으니 무당들 이 모두 얼굴과 치장을 화려하게 꾸몄다. 파견된 곳에서는 뇌물이 횡행하였으며 망령되게 화복을 말하 는데도 전국에서 이를 숭상하였다. 진의 풍속이 유독 심하여 李賀가 이 세 수를 지어 그것을 풍자한 것이다(唐俗尚巫. 肅宗朝王璵以禱祈見寵, 帝用其言, 遣女巫乘傳, 分禱天下名山大川, 巫皆美容盛飾, 所 至橫恣賂遺, 妄言禍福, 海内崇之, 而秦風尤甚, 賀作三首以嘲之).”(淸 姚文燮, 뺷昌谷集註뺸 卷4)24)

“神絃詩는 모두 淫祀를 나무라는 것으로 모든 편이 훌륭하다(凡 뺷神絃뺸詩皆譏淫祀, 篇篇皆佳).”(淸 方世擧, 뺷李長吉詩批註뺸 卷二)25)

“이 시는 무녀가 신에 기도하는 망령됨을 나무라는 것이다(此曲譏巫女禱神之妄).” (「神絃曲」에 대하 여, 淸 明于嘉刻本 뺷李長吉詩集뺸, 無名氏의 批語)

「神絃別曲」에 대하여

“무당의 황탄함과 그것을 숭배하는 자들의 우매함을 형용한 것이다. 깊이 믿으면서 복이 내릴 것을 희망하는 것이 매우 가소롭다(總以形容巫之荒誕而崇之者愚昧. 深信以望福之自來, 大可笑也).”(淸 姚文 燮, 뺷昌谷集註뺸 卷4)26)

“이는 오로지 送神을 이야기 한 것이다. 신기한 말이 하나도 없다. 스스로 허무를 본 것이다……즉 무녀가 요망하게 사람들을 미혹시켰음을 알 수 있다(此專言送神也. 無一奇語. 自見虛無.……則女巫之 妖妄惑人可知矣).” (淸 方世擧, 뺷李長吉詩批註뺸 卷二)27)

“귀신과 신을 희롱하면서 허상에 울고 웃으니 실로 시인 중의 동박삭이요, 鬼史의 동호이다. 이와 같은 문심을 상제께서 어찌 선뜻 내어 줄 수 있었겠는가(謔鬼嘲神, 笑空啼影, 眞詞家之曼倩, 鬼史之董 24) 王琦 等 評注, 뺷三家評注李長吉歌詩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9, 275.

25) 王琦 等 評注, 위의 책, 311. 26) 王琦 等 評注, 위의 책, 270. 27) 王琦 等 評注, 위의 책, 311.

(10)

狐, 如此文心, 上帝那能割愛).”(淸 董伯英 뺷協律鉤玄뺸)

반면 이러한 풍자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의견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王琦의 의견을 살펴보자

.

“姚仙期는 秦 지역 풍속이 비천하고 속되어 음양과 귀신 지간에 경박하고 황음한 잡스러움이 없을 수 없었기에 장길이 그 가사를 개정하여 무당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며 거듭 그것을 풍자한 것이라 고 말하였다.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장길의 시의 맥락은 본디 「離騷」에서 왔으니 「離騷」에 대한 해석으로 이 세 수를 풀이한다면 소위 풍자의 말을 찾으려 한들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姚仙期 曰:秦俗鄙俚, 其陰陽神鬼之間, 不能無褻慢荒淫之雜. 長吉更定其辭, 以巫不可信, 故言多諷刺云. 琦謂不 然, 長吉詩脈本自楚騷, 以楚騷之解解三詩, 求所謂諷刺之言, 竟安有哉).”28)

王琦는 李賀의 연원을 「離騷」로 보는 주류적 관점에 의거하여 「神絃」

3

首가 「離騷」를 모범으로 삼았다면 풍자의 뜻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

현대 중국의 李賀 연구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吳企明은 풍자설에 동의하고 있다

.

“중당시대에 제왕들은 신선에 미혹되어 양생을 추구하였는데 그 분위기가 점차 귀족관료 집단에까 지 미쳤으며 심지어 민간에도 영향을 미쳐 사회적으로 신선에 대한 미신과 무풍이 일시에 성행하였다. 李賀는 이에 대하여 심각한 혐오와 통절함을 느꼈기에 「神絃曲」 3수를 써서 그 모습에 우의하여 무술 을 숭상하는 풍속을 풍자하고 무술의 우매함과 요망함을 폭로한 것이다.(中唐時代, 帝王迷神仙, 追求長 生, 此風漸漸浸及貴族官僚集團, 甚至影響到民間. 社會上迷信神仙, 崇尙巫風, 盛行一時. 李賀對此深惡痛 絶, 寫下3首神絃曲, 寓意於象, 嘲諷尙巫之風, 掲露巫術之愚妄).”29)

李賀는 당시 황실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神仙術과 巫術에 대한 애호의 폐단을 목격하고 이를 풍자하는 작 품들을 다수 창작하였다

.

이와 같은 맥락에서 「神絃」

3

首 역시 민간의 淫祀를 소재로 하면서 무당의 제사 절차와 神接의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여 그 허무맹랑함을 폭로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

그러나 李賀의 작품 중에는 唐代 이러한 풍조를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풍자하는 작품들이 있지만 반면에 신선과 신선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하며 이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는 작품도 존재한다

.

李賀 스스로 南朝의 민요에서 온 「神絃歌」

라는 제목을 채택하고 그 조촐한 민간의 제사를 감각적으로 묘사한데에 과연 오로지 풍자의 목적이 위주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

중국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이루었던 漢과 唐 제국 멸망의 발단을 권력자들의 불노장생의 추구와 같은 사적 욕망의 추구로 학습하고 이를 경계해 왔던 지식인들의 시각에서 민 간에서 자생한 제사의 풍속과 그에 대한 작품을 지나치게 견강부회하여 해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28) 王琦 等 評注, 위의 책, 152. 29) 吳企明, 앞의 책, 398.

(11)

Ⅲ. 「九歌」의 계승과 차별성

1. 역대 뺷楚辭뺸 계승론

南朝 「神絃歌」는 娛神을 위한 巫歌라는 측면에서 「九歌」와 동질의 것으로 이야기 되어 왔다

.

이에 대해 안동환은 戰國時期 末 楚 지역이 三國時期에는 吳나라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楚나라의 풍속이 建業으로 전래 되었고 그 노래 또한 함께 전래되어 南朝의 「神絃歌」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

30) 李賀는 樂府 古題의

神 絃

을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자신의 창작이 南朝의 「神絃歌」를 모티브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으므로 그 의 작품에서 「九歌」의 영향을 찾는 것은 문학사의 수용과 발전의 측면으로 볼 때 필연적이다

.

비단 「神絃」

3

首 뿐 아니라 李賀의 시 세계에 대한 비평과 논의에서 그의 시의 연원이 뺷楚辭뺸에서 왔다는 것은 오래된 주류적 견해이다

.

뺷楚辭뺸가 李賀 시 풍격의 연원이라는 설은 최초로 李賀 시집에 대한 서문을 작성한 杜牧의 뺷李賀集序뺸에서 시작되었다

.

그리고 이는 이후 논자들에 의해 지속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

杜牧은

대개

「離騷」의 후예로서 文理는 「離騷」에 미치지 못하지만 李賀의 文辭는 때로 「離騷」를 넘어서기도 한다

(

蓋騷之 苗裔

,

理雖不及

,

辭或過之

).”

31)라고 하면서 더 나아가

李賀는

27

년을 살고 죽었는데 세간에서 모두 말하기 를

李賀가 일찍 죽지 않아서 문리를 조금 더할 수 있었더라면 「離騷」를 종으로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

라고 한다

(

賀生二十七年死矣

,

世皆曰

, ‘

使賀且未死

,

少加以理

,

奴僕命騷可也

).’”

라는 말을 덧붙였다

.

이 말이 이후 논자들에 의해 李賀의 연원에 대한 재론 뿐 아니라 그의 시의 우열론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키게 된 것인데 여기서는 더 자세히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

그 논쟁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차치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대다수 의 논자들이 李賀 시의 연원을 「離騷」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

“(「神絃曲」·「神絃別曲」) 두 시에는 「湘君」과 「山鬼」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중편의 말은 지나 치게 천박하고 직설적이다. 예를 들어 ‘呼星召鬼歆杯盤, 山魅食時人森寒’의 구절은 그 형용이 특히 저열 하다. 이 두 시는 이미 그 신기함을 다하지 못하였는데 「離騷」에 어찌 쉽게 미칠 수 있으며 하물며 「離 騷」를 노복으로 삼을 수 있으랴(二詩真有 뺷湘君뺸、뺷山鬼뺸之遺. 但中篇語太淺直, 如‘呼星召鬼歆杯盤, 山 魅食時人森寒’, 形容殊劣. 二詩已不能盡奇, 뺷騷뺸豈易及, 況‘奴僕’耶).”(賀裳, 뺷載酒園詩話又李賀뺸)32)

“뺷神絃뺸 3수는 모두 「九歌·山鬼」를 학습하였는데 다소 경박한 흠이 있다. 무릇 「神絃」詩는 모두 淫祀를 풍자하는 것으로 매 편이 빼어나다(뺷神絃뺸3首, 皆學 뺷九歌·山鬼뺸, 而微傷於佻,……凡 뺷神絃뺸 詩皆譏淫祀, 篇篇皆佳).”(方世擧, 뺷李長吉詩批註뺸)33)

30) 안동환, 「南朝樂府 神弦歌 小考」, 뺷中國人文科學뺸 10, 중국인문학회, 1991.12, 574. 31) 杜牧, 「李賀集序」, 吳企明, 뺷李賀資料彙編뺸, 7.

32) 吳企明 箋注, 뺷李長吉歌詩編年箋注뺸, 北京: 中華書局, 2012, 297. 33) 王琦 等 評注, 뺷三家評注李長吉歌詩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9, 311.

(12)

賀裳과 方世擧는 「神絃」

3

首가 「九歌」의 영향을 분명하게 받았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공통적 으로 「山鬼」를 지목하였다는 점이 눈에 띤다

.

아마도 「神絃」의

海神山鬼來座中

山魅食時人森寒

의 구절 에 보이는 산귀신과 산도깨비가 「山鬼」를 연상시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그러나 실제 「神絃」의 산도깨비들 과 「山鬼」의 산 속 鬼女의 모습은 판이하다

.

「九歌」의 산 속 귀녀는 울창한 숲 그늘에서 외롭게 짝을 기다리 는 순진한 처녀와 같은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九歌」의 영향설을 주장 하면서 동시에 「神絃」의 언어가 경박하다는 점을 지적한다는 면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

李賀의 시에 대한 비 평 중 자주 언급되는

晦澁

하고

怪誕

한 언어와 표현에 대한 비판이나 폄하와 같은 맥락의 평가인 것이다

.

34) 한편 董淳耀은 李賀의 「神絃」

3

首가 뺷楚辭뺸와 매우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

「神絃」에 대하여 : “뺷楚詞뺸와 섞어놓는다면 어찌 굴원과 송옥의 것이 아니라고 분별할 수 있겠는가 (雜之 뺷楚詞뺸, 何以辯非屈, 宋).”(黃淳耀, 뺷黎二樵批點黃陶庵評本李長吉集뺸 卷一)35)

중국 문단에서 뺷楚辭뺸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위의 賀裳과 方世擧에 비해 매우 후한 평가를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杜牧의

奴僕命騷

의 영향을 받아 「神絃別曲」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평가하는 이도 있었다

.

“미언으로 마무리 지었으니 실로 뺷離騷뺸를 노복으로 삼아 부릴 만하다(一結微詞, 眞可奴僕命 뺷騷뺸 可也).”(淸, 明于嘉刻本 뺷李長吉詩集뺸, 無名氏의 批語)36)

「神絃別曲」의 마지막

南山桂樹為君死

,

雲衫淺污紅脂花

를 隱微한 뜻이 담긴

微言

으로 판단한 것이다

.

王 琦는 李賀 시의 연원을 「離騷」로 보는 관점의 맥락에서 姚佺의 풍자설을 반박한다

.

“姚仙期는 秦 지역의 풍속이 비천하고 속되어 음양과 귀신 지간에 경박하고 황음한 잡스러움이 없을 수 없었기에 長吉이 그 가사를 개정하여 무당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며 거듭 그것을 풍자한 것이라 고 말하였다.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李長吉의 시의 맥락은 본디 「離騷」에서 왔으니 「離騷」에 대한 해석으로 이 세 수를 풀이한다면 소위 풍자의 말을 찾으려 한들 어디에 있단 말인가(姚仙期曰:秦俗鄙 俚, 其陰陽神鬼之間, 不能無褻慢荒淫之雜. 長吉更定其辭, 以巫不可信, 故言多諷刺云. 琦謂不然, 長吉詩 脈本自楚騷, 以楚騷之解解三詩, 求所謂諷刺之言, 竟安有哉).”37)

그가 구체적으로 「九歌」나 「九歌」 속 구체적인 작품을 지목하지 않은 점은 다소 의문스럽지만 「神絃」

3

首도 「離騷」로 대표되는 뺷楚辭뺸의 맥락으로 보았다는 점은 위의 견해들과 차이가 없다

.

曾智安은 晩唐 시인 34) 대표적인 예를 들면 淸 陳廷焯은 뺷白雨齋詞話뺸에서 역대 「離騷」를 학습한 시인들을 총평하면서 李賀는 뺷騷뺸를 배웠지만

괴이하고 허망한 것으로 지나치게 흘렀다(長吉學 뺷騷뺸, 益流怪誕).”라고 평가하였다. 35) 吳企明, 뺷李賀資料彙編뺸, 211.

36) 吳企明, 위의 책, 392.

37) 王奇, 뺷李長吉歌詩彙解뺸, 王琦 等 評注, 뺷三家評注李長吉歌詩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09, 152.

(13)

들의 「神絃歌」 류의 작품들에 보편적으로 뺷楚辭뺸의 영향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

그는 晩唐 시인들이 난리 를 피해 강남으로 이주하면서 吳越 지역의 문화를 직접 접촉하였고 이것이 「神絃歌」 류의 작 품을 창작 하는 모티브로 작용하였다고 설명한다

.

그러나 창작에 있어서 그들은 南朝의 「神絃歌」가 아닌 그들에게 있어 전 통적인 경전 중 하나로 여겨졌던 「九歌」를 참고하고 학습하였다는 것이다

.

38) 李賀는 「神絃」

3

首 뿐 아니라 그의 작품 세계 전체

,

더 나아가 시인으로서의 자아의식의 근원이 뺷楚辭뺸에 닿아 있었다

.

그러나 李賀의 「神 絃」

3

首는 뺷楚辭뺸의 형식에 대한 학습이 아니라 「離騷」와 「九歌」 속에 담긴 屈原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

李賀의 「神絃」

3

首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뺷楚辭뺸 「九歌」를 학습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

曾智安은 晩 唐의 시인들이 제사 악장을 지을 때 뺷楚辭뺸를 모범으로 삼은 근거 중 하나로

자의 삽입을 들었다

.

39) 뺷全 唐詩뺸에 수록된 제사와 관련된 시가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실제로 「九歌」의 구식이나 표현 등을 모방하는 경 향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뺷樂府詩集뺸 「神絃歌」에 함께 수록된 王維의 작품에는 「九歌」의 형식과 표현에 대한 학습의 흔적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다

.

뺷樂府詩集뺸의 편집자는 「神絃曲」과 「神絃別曲」이

[

迎神 – 送 神

]

으로 구성되도록 임의로 짝을 이루게 하였는데 王維와 王叡는 스스로 각각 「魚山神女祠歌」

·

「祠漁山神女 歌」라는 시제 아래

[

迎神 – 送神

]

으로 작품을 구성하였다

.

王維의 「魚山神女祠歌」는 開元

11

년에서

13

년 사이 그가 濟州

(

지금의 山東省 荏平縣

)

司倉參軍으로 재임해 있던 시절에 지은 작품이다

.

40)漁山은 뺷太平寰宇記뺸 의 기록에 따르면 지금은 山東省에 속하는 鄆州 東阿縣에 있는 산이라고 하니 王維가 濟州에서 직접 그 지역 에서 보고 들은 漁山 여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묘사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41)

坎坎擊鼓, 漁山之下. 둥둥 어산 밑자락에서 북을 두드립니다. 吹洞箫, 望極浦. 피리를 불며 저 멀리 물가를 바라봅니다. 女巫進, 紛屢舞. 여무가 들어와 연거푸 춤을 춥니다. 陳瑤席, 湛清酤. 고운 자리를 깔고 맑은 술을 그득 따릅니다. 風凄凄兮夜雨, 소슬한 바람 불고 밤비 떨어지는데

神之來兮不來. 신께서는 오시렵니까, 아니 오시렵니까. 使我心兮苦複苦. 내 마음을 쓰리고 또 쓰리게 만드십니다.

(王維, 「魚山神女祠歌·迎神」) 紛進舞兮堂前, 분연히 들어와 당 앞에서 춤을 춥니다.

38) “一旦他們涉及現實中吳越「神絃歌」詞的創作. 就極有可能以楚辭而不是傳統的「神絃歌」歌詞作為借鑑的首選對象.……中晚唐時

,是以吳越之現實文化而喚起了楚搔之傳統精神.”, 曾智安, 「中晩唐人對吳越「神絃歌」的接受與楚騷精神的復蘇」, 뺷文學硏究뺸, 170.

39) 曾智安, 「中晩唐人對吳越「神絃歌」的接受與楚騷精神的復蘇」, 뺷樂府學뺸 2, 文学研究, 2007, 181. 40) 楊文生, 뺷王維詩集箋注뺸, 四川人民出版社, 2003, 3.

41) 뺷太平寰宇記뺸, “鄆州東阿縣有漁山, 一名吾山.”, 뺷十道志뺸, “漁山一名吾山. 漢武帝過漁山, 作 「瓠子歌」云, ‘吾山平兮巨野溢 .”, 楊文生, 위의 책, 3쪽 재인용.

(14)

目眷眷兮瓊筵. 눈은 옥 자리 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립니다. 來不言兮意不傳, 오셔도 말씀이 없으시니 뜻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作暮雨兮愁空山. 저녁 비가 떨어지니 텅 빈 산은 수심에 찹니다.

悲急管, 思繁弦, 슬픔에 피리소리 다급해지고 그리움에 현 소리 어지러워집니다. 神之駕兮俨欲旋. 신이 탄 가마가 빙빙 돌고 있는 듯합니다.

倏雲收兮雨歇, 일순간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칩니다. 山青青兮水潺潺. 산은 푸릇푸릇하고 물은 졸졸 흐릅니다.

(王維, 「魚山神女祠歌·送神」)

山東 지역은 魏晉南北朝 시기 魯 지역에 속하므로 吳越 지역의 「神絃歌」와는 관련이 없으나 뺷樂府詩集뺸에 서는

어산의 여신에게 올리는 제사

와 관련된 이 두 노래를 수록하였다

.

王維의 「魚山神女祠歌」는

3

·4

·6

·7

言이 혼합되어 있는 雜言으로

6

言과

7

言에는

자로 리듬을 조절하였다

.

첫 수인 「迎神」은 신의 강림을 기다리며 연주되는 음악소리와 무녀의 춤사위

,

음식을 올리는 모습 등이 관찰자의 시점으로 묘사되지 만 마지막

2

구에서는 신의 강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王維 자신의 주관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

.

王叡의 「祠漁山 神女歌」도 漁山 신녀를 제사의 대상으로 한 노래로서

7

言의

4

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

王維와는 달리 형식 이나 풍격에 있어서 「九歌」보다는 남조 「神絃歌」에 가까운 소박한 풍격을 담고 있다

.

蓪草頭花椰葉裙, 통초를 머리에 꽂아 꾸미고 야자 잎 치마를 두릅니다. 蒲葵樹下舞蠻雲. 포규 나무 아래에서 남방의 구름이 춤을 춥니다. 引領望江遙滴酒, 옷깃 끌어당겨 멀리 강을 바라보며 술을 따릅니다. 白蘋風起水生文. 흰 개구리밥에 바람일어 수면에는 무늬가 생깁니다.

(王叡, 「祠神歌·迎神」)42)

棖棖山響答琵琶, 쟁쟁 산 메아리가 비파소리에 화답합니다.

酒溼青莎肉飼鴉. 술을 푸른 향부자에 뿌리고 고기를 까마귀에게 먹입니다. 樹葉無聲神去後, 나뭇잎 소리 멎었으니 신께서는 떠나신 후입니다. 紙錢灰出木綿花. 지전을 태우니 목면화 같은 재가 피어나옵니다.

(王叡, 「祠神歌·迎神」)

「九歌」는 다양한 句式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

[3-

-2]

의 형식이 가장 높은 빈도로 출현하며 이를 기본 모 델로 하여 조금씩 변화를 주었다

.

그러나 李賀의 「神絃」

3

首는 「九歌」의 구식을 따르지 않고 虛字가 포함되 지 않은

7

언으로 한 구를 구성하였다

.

다만 각운의 경우에 「神絃」

3

首는 「九歌」에서 많이 보이는

[-n], [-ng]

을 각운으로 애용한 것은 눈에 띠지만 의식적인 학습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

42) 뺷全唐詩뺸, 505.

(15)

「神絃」

3

首와 「九歌」는 내용과 풍격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화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 다

.

「九歌」는 애정시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

神 – 巫

], [

男神 – 女神

]

의 구도로 만남에 대한 간절한 희망과 이 별에 대한 비애를 표현한다

.

그러나 「神絃」

3

首는 「神絃別曲」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형식이 뚜렷하게 나타나 지 않는다

.

「九歌」의 화자는 무당이거나 신으로 분한 남녀무당이이다

.

43) 이 때문에 「東皇太一」

·

「東君」

·

「禮魂」을 제외하면 제사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아니라 마치 남녀 사이에 사랑의 증표와 선물을 전하는 모 습으로 제사의 과정이 은유된다

.

반면 「神絃」

3

首는 제사의 모습과 절차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며 무당의 주 문이나 神接

,

送神 절차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

더욱이 「九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구체적인 驅魔의 행위가 「神絃曲」에 나타나며 「神絃」에는 神鬼의 歆饗을 구경하는 구경꾼들의 모습도 함께 묘사되어 있다

.

「九歌」는 직접 남녀 무당사이에 연주된 노래이기에 그 화자가 무당인 경우가 많으나 李賀의 「神絃」의 경우 에 화자는 李賀 자신으로

[

巫 – 神鬼 – 民

]

으로 구성된 제사 전체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으며 「神絃別曲」에서는 신과 이별하는 무당

,

혹은 送神의 과정을 지켜보는 시인 자신으로 화자가 설정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이 렇듯 「神絃」

3

首는 각 작 품마다 화자와 풍격에 조금씩 변화를 주었다

.

2. 「九歌」 본질의 계승

李賀의 「神絃」

3

首의 창작은 제사라는 집단적 유희의 성격에 대한 공감과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이는 고대 「九歌」에서부터 屈原에 의하여 자각되고 보존되어 온 것이다

.

“옛날 초나라 남영의 고을과 원상 사이에서는 귀신을 믿고 제사지내기를 잘 하였다. 그 제사에는 반 드시 歌樂을 짓고 鼓舞를 하여 신을 즐겁게 했다(昔楚國南郢之邑, 沅、湘之間, 其俗信鬼而好祠. 其祠 必作歌樂鼓舞以樂諸神).”(王逸, 뺷楚辭章句·九歌序뺸)44)

禇斌傑은 뺷山海經뺸 속

계는 구변과 「九歌」를 노래했건만 그의 아들 태강은 멋대로 놀아났다

(

啓 「九辯」

與 「九歌」兮

,

夏康娛以自縱

).”

라는 구절과

「九歌」를 노래하며 구소를 춤추며 애오라지 한갓진 틈을 즐겨봅 니다

(

奏 「九歌」而舞 「韶」兮

,

聊假日以婾樂

)”

라는 구절을 통해 원시 「九歌」가 매우 강한 오락성을 가지고 있 었다고 말한다

.

초나라의 「九歌」의 명칭은 夏의 「九歌」를 인습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楚 지역 민간 제사에 서 온 것이다

.

楚의 「九歌」는 교외에서 열리는 祭典에서 쓰이는 가무희로 이것은 집단적인 유희의 성격을 가 지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남녀의 성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

45) 신이라는 추상적인 존재와 인간의 관계가 남녀의 관계로 구체적으로 상상되면서 인간의 신과의 소통의 열망이 남녀 사이의 성적 갈망으로 비유 되어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오락성을 가질 수 있었다

.

이러한 고대 「九歌」의 본질이 후대에 유전되면서 李賀 43) 「雲中君」과 「河伯」은 신과의 만남과 이별을 신과 무당 사이의 연애 행위처럼 묘사하고 있다. 내용의 구성에 있어서는 한

작품 내에 迎神送神을 함께 그렸는데 李賀 「神絃」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44) 金開誠·董洪利·高路明, 뺷屈原集校注뺸, 北京: 中華書局, 1999, 185.

45) 禇斌傑, 뺷楚辭要論뺸,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3, 299.

(16)

「神絃」

3

首에 이르러서는 두 가지 특질로 나타나게 된다

.

첫째 제사의 집단적 유희적 측면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그것이고 둘째 애정시에 내재된 남녀의

갈구

가 신에 대한

희구

의 형태로 구체화되는 방식의 독특성 이 그것이다

.

李賀의 「神絃」

3

首는 남조 민가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 唐代 민간에서 벌어지는 굿판을 감각 적으로 묘사하였다

.

무당의 음악과 춤

,

제사를 통하여 사람들이 소원하는 내용들이 「神絃曲」에서는 마치 악 귀를 쫓는 신의 모습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이 묘사되어 있다

.

「神絃」에서도 신의 강림의 환상이 마치 실재하는 듯이 묘사된다

.

신들이 강림하여 차려놓은 음식을 흠향하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하는 구경꾼들에 대한 묘사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굿판에 참여하고 있는 무당과 구경꾼들의 기대와 두려 움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

「神絃別曲」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떠나는 신과 이를 전송 하는 이들의 애수를 자연의 이미지에 녹여낸다

.

신과의 소통이 이루어진 기쁨과 또 다시 소통이 단절될 것에 대한 슬픔을 텅 빈 숲과 고요한 강물

,

신과의 이별에 대한 애달픔으로 죽어가는 계수나무로 형상화한 것이 다

.

이와 같이 李賀는 한바탕 굿판의 가시적인 풍경뿐 아니라 이에 참여한 무당과 구경꾼들

,

인간에 강림한 신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와 정서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

「九歌」에는 남녀 사이 만남과 사랑에 대 한 갈구처럼 그려진 신과의 소통에 대한 인간의 간절함이라는 정서가 李賀의 「神絃」

3

首에서는 감각적인 이 미지들로 구체화되고 해소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神絃曲」에서는 푸른 늑대와 피울음을 우는 여우

·

고택의 벽에 깃든 교룡

·

요괴로 변한 올빼미들과 같이 기괴한 형상으로 그려진 악귀들은 현실세계의 불의와 고통을 형상화하며 이를 일거에 해소하는 신의 묘사는 나약한 인간이 현실의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신과의 소통을 소망하는 이유를 형상화 한 것이다

.

李賀가 만들어낸 두려운 악귀들의 이미지와 신의 이미지는 이러한 욕망 이 구체화된 것으로서 이러한 이미지들과 이로써 조성된 분위기가 더욱 기괴하고 두려울수록 이를 해소하고 자 하는 욕망의 크기와 해소 뒤에 오는 안도와 평화의 파고는 더욱 강렬해 질 수 있다

.

李賀는 고대 「九歌」

가 불려 지던 시절부터 인간들의 본능과도 같은 이상 세계로의 복귀와 단절된 신과의 소통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의 노래

,

즉 祭歌의 정신을 이해하고 그 나름의 감각과 언어로서 이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그려낸 것으로 서 이는 李賀가 屈原의 뺷楚辭뺸를 통해 얻었던 屈原과 그의 작품의 본질을 개성적인 방식으로 계승한 것이다

.

3. 屈原의 정신에 대한 계승

고대 「九歌」의 창작자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의 설이 존재한다

.

王逸의 설에 따른 屈原 창작설과 朱熹의 屈原이 민간의 祭歌를 윤색했다는 설

,

屈原과 전혀 무관한 순수한 초나라의 민간 祭歌라는 설이 그것 이다

.

그러나 「九歌」의 언어가 민중들의 자연 언어라기에는 매우 정제되어 있으며 「離騷」의 언어적 특성과 유사하다는 점에 근거하여 屈原이 민간의 노래를 개작했다고 보는 설이 설득력을 인정받고 있다

.

屈原 창작 설을 주장한 王逸은

밖에서 속인들의 제사의 예를 보던 중에 그 가무 음악의 가사가 매우 비루하여 「九歌」

라는 곡을 지었다

(

出見俗人祭祀之禮

,

歌舞之樂

,

其詞鄙陋

,

因作 「九歌」 之曲

).”

라며 屈原의 「九歌」 창작의 동 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유가중심적인 관점으로서 周나라 이후의 楚歌에 대한 인식

,

즉 종묘에서 쓰이는 雅樂의 관점에서 민중에서 발생한 음악이 가사가 비루하다고 평가한 것을 제외하면 屈原이 민간의 제사 음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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