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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인국민회와 도산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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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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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의 유래

< 로스앤젤레스 문장 > < 로스앤젤레스 기 >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는 1781년 스페인 총독 Felipe de Neve에 의해 건설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명칭은 1781년 당시 정착민들이 ‘천사의 여왕의 마을 (The Town of Our Lady the Queen of the Angels)’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하면서 로스앤젤레스는 멕시코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후 1848년 미-멕시코 전쟁 결과로 로스앤젤레스도 미국령이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문장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미국의 31번째 주인 캘리포니아를 상징하는 성조기, 캘리 포니아의 곰, 스페인의 통치를 상징하는 문장, 멕시코의 지배를 상징하는 뱀을 물고 있는 독수리가 그려진 방패와 그 둘레에 캘리포니아주에서 나는 포도, 올리브, 오렌지가 그려져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깃발은 로스앤젤레스 150주년을 기념 하여 1931년에 만들어졌다. 올리브 나무의 초록색, 오렌지 과수원을 상징하는 노란색, 포도원을 상징하는 빨간색 배경에 로스앤젤레스의 문장을 포함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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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도산의 꿈

1. 미 본토 최초의 한인타운 파차파 캠프 ··· 2

2. 대한인국민회와 도산의 꿈 ··· 4

Ⅱ. 한국전쟁과 캘리포니아 1. 미 해병대 1사단 ··· 8

2.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 ··· 10

3. 원산・흥남 철수와 Lane Victory호 ··· 12

4. 전쟁 고아 입양과 LA 총영사관 ··· 14

Ⅲ. 한국과 LA 1. LA 한인타운 :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 18

2. 1992년 4.29 폭동 ··· 20

3. LA에서 일군 ‘한강의 기적’ ··· 22

4. 할리우드와 한류 ··· 24

5. 미주 동포 - 민간 공공외교의 산실 ··· 26

Ⅳ. 도전과 과제 1. 동포사회 자산 공동 활용 ··· 30

2. 한인 정치력 신장 ··· 32

3. 입양인 시민권법 제정 ··· 34

4. 복수국적자의 국적 선택 ··· 36

5. 대한인국민회 사료 한국 이관 ··· 38

6. LA 한인타운의 현재와 미래 : 서울특별시 나성구 ··· 40

첨부: 로스앤젤레스시 약황···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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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도산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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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1 미 본토 최초의 한인타운 파차파 캠프

“오렌지 하나를 따도 애국하는 마음으로”

< 오렌지 농장의 도산 안창호 선생 >

LA 인근 리버사이드(Riverside) 지역에는 미 본토 최초의 한인타운 파차파 캠프(Pachappa Camp)가 있다.

1903년 1월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최초로 하와 이에 간 7,204명의 한인들 가운데 일부가 하변(河 邊)이라 불리던 리버사이드 지역의 오렌지 농장에 일하게 되었다.

리버사이드 지역에 한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05년에 직업소개소를 열어 한인 노동자들에게 철도부설 공사장, 오렌지 농장 등에 일자리를 주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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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도산의 꿈 ∙ 3

< 보험사 Sanborn Max의 주택필지 지적도에 표시된 파차파 캠프 (1908년) >

이후 직업소개소를 중심으로 2.96 에이커(약 3,624 평)의 땅에 커뮤니티 센터등 16개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는 타운이 조성되었고, 거리 이름을 따서 파차파 캠프라고 불렸다.

이러한 집단촌의 형성은 당시 한인노동자들이 백인 사회에서 주거지를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낮에는 오렌지 농장에서 일을 했고, 밤에는 야학을 열어 영어를 배우고 일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렸다.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5년 공립협회 창립의 중심 역할을 한 인물 중 상당수가 파차파 캠프에 거주했으며, 1907년 서울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는 파차파 캠프에서 태동 되었다. 1911년에는 파차파 캠프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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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2 대한인국민회와 도산의 꿈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조선 독립을 위해서”

<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신축 개관식 (1938년 4월) >

미주 독립운동의 본산인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된 후, 1937년 12월 한인 수가 600-700명에 달하는 LA로 이전하였다.

창립 발기인들의 상당수는 파차파 캠프 등 리버 사이드 지역 거주자들이었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상해 임시정부 수립(1919년 4월) 이전에 해외의 유일한 실질적 정부로서 독립공채 발행, 일본 여권과 일본 영사관의 보호 배척 운동 등을 주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상해 임정에 그 권한을 일임하고 독립자금 모금 등에 전념하였다.

1919년 한해 동안 대한인국민회는 8만8,013 달러를 모금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인국민회 지원금 으로 임정 청사 건물을 임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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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도산의 꿈 ∙ 5 대한인국민회가 미주 동포사회를 대표하는 정치 단체였던 반면,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단된 흥사단은 국권 회복을 위한 청년 혁명 단체였다.

1914년 이후 흥사단은 그 활동 기반을 LA로 옮겼다.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LA를 중심으로 활동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공적을 기려 안창호 선생이 태어난 날인 11월 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지정하여 매년 안창호 선생을 기념하기로 결정(2018년 8월) 하였다.

또한, 미 연방의회는 2004년 LA 한인타운내 우체국을 ‘도산 안창호 우체국’으로 명명하였다.

최근 동 우체국 건물 일대를 재개발하는 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우체국 존속 여부가 불투명했으나, LA 지역 동포 사회의 관심과 노력으로 우체국 이전 이후에도 기존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2018년 3월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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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한국전쟁과 캘리포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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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1 미 해병대 1사단

“한국과 미국, 함께 피흘린 전우, 혈맹”

< 인천상륙작전 중인 미 해병 1사단 >

LA시 남쪽에는 한국전쟁의 전세를 극적으로 반전 시킨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16일)의 주력 부대인 미 해병대 제1사단(1st Marine Division)의 주둔지인 ‘캠프 펜들턴(Camp Pendleton)’이 있다.

미 해병대 1사단은 맥아더 장군이 후일 성공 확률은 1/5000에 불과했다고 술회했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시키고, 서울 탈환작전(1950년 9월 19일-28일)에서도 승리를 거둔다. 이후 연전연승 북으로 진군하였다.

1950년 11월 함경남도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하던 미 해병대 1사단은 중공군 9병단 예하의 7개 사단과 격돌하여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전사상자 3,637명 등 7,000명이 넘는 피해를 기록했으나, 중공군 9병단도 4만명 가까운 피해를 입고 사실상 무력화되어 후방으로 철수하였고, 미군 또한 함흥으로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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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한국전쟁과 캘리포니아 ∙ 9

< 장진호 전투중 미 해병 1사단 >

한국전쟁 후반기인 1953년 3월말 중공군은 경기도 연천군 매향리 일대를 방어중이던 미 해병대 1사단을 기습 공격하였으나, 미군은 약 1,000여명의 전사상 자를 내면서도 중공군의 공세를 이겨내 정전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 내었다.

미 해병대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여 매년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한편,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33,642명중 캘리 포니아주 출신이 2,611명으로 가장 희생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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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 한국전쟁 당시 김영옥 당시 소령 (사진 왼쪽) >

2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

“나는 미국인으로서 영예로우며 동시에 한국인이어서 자랑스럽습니다.”

김영옥(1919~2005) 대령은 LA에서 독립 운 동 가 의 아 들 로 태어나 미국 육군 장교로 제2차 세계 대 전 에 참 전 하 여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나치 독일과 싸운 전쟁 영웅이다.

1946년 예편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발발후 미국 육군장교로 재입대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중부전선 60km 북상의 주역이 됐다. 그 와중에도 전쟁고아 500명을 돌보아 인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72년 전역후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하여 LA에서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등의 설립을 지원 하였으며, 아시아계 여성 지원을 위한 ‘아시아태평양 여성보호센터’를 설립, 운영하였다.

미국 정부는 1944년 특별무공훈장을 김영옥 대령 에게 수여했고, 프랑스 정부는 2002년 한인에게는 유일하게 최고 무공훈장인 레종 도뇌르를 수여했다.

한국 정부는 2005년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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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한국전쟁과 캘리포니아 ∙ 11

<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 표지판 시공식 >

세계 최대 포털 사이트 중 하나인 msn.com은 2011년 미국 역사상 최고 의 전쟁 영웅 16 명을 선정하면서 조지 워싱턴 대통 령 등 백인 15명 과 함께 유색인인 김영옥을 선정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2018년 7월 5일 LA시를 관통하는 5번 고속도로의 일부 구간을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로 지정했다.

LA 한인타운에도 ‘김영옥 중학교(YOUNG OAK KIM ACADEMY)’가 있다. 이 학교는 한인 이름을 딴 미국 최초의 공립 학교로 ‘전쟁 영웅 김영옥’의 정신을 배우고 기리자는 취지로 명명되었다.

한국에서는 2018년 주한미군사령부 본청 주회의 실을 ‘김영옥 회의실’로 명명하고, 사령부 건물 하나를 ‘김영옥 빌딩’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김영옥 대령은 자신을 “100% 미국인, 100%

한국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평생을 미국인이자 한국인으로 살아온 김영옥 대령은 미주 한인들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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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 Lane Victory호의 피난민 >

3 원산・흥남 철수와 Lane Victory호

“자유와 생존을 위한 여정”

1 9 5 0 년 1 1 월 함경남도 장진호 지역에서 중공군 과의 전투로 피 해를 입은 국군 과 유엔군은 군 함과 상선을 동 원하여 아군 10 만여명과 민간인

9만여명을 원산, 흥남으로부터 철수시키는 철수 작전을 단행하였다.

인민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유엔군은 원산 등 지역에 폭격을 가하였으나, 결국 원산은 적의 수중에 넘어갔고 퇴로가 차단된 미 해병 1사단을 시작으로 흥남에 집결,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이것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원산과 흥남 부두에 집결한 피난민들을 남쪽의 부산과 거제도로 수송한 대표적 화물선이 Meredith Victory호와 Lane Victory호였다.

1950년 12월 7일 원산 부두에서 Lane Victory호는 7,010명의 피난민을 남쪽으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했고, 얼마 후 12월 23일 흥남 철수 작전에서 Meredith Victory호는 약 14,000명의 피난민을 남쪽으로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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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한국전쟁과 캘리포니아 ∙ 13 시켜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배를 타는 과정에서 뿔뿔이 흩어져서 이산가족이 된 사례가 많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고 현인 선생이 불렀던

‘굳세어라 금순아’(1953년)는 이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잘 나타내주는 노래이다.

< 산페드로 항만의 Lane Victory호 >

이미 중국에 고철로 판매된 Meredith Victory호와 달리 Lane Victory호는 당시 철수 작전에 참여한 화물선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선박으로 현재 LA 인근 산페드로 항만에 정박되어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한국전쟁 관련 사진도 일부 전시 중이다.

한편, 원산・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거제도로 온 피난민 중 일부는 후에 LA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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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4 전쟁 고아 입양과 LA 총영사관

“미국에 온 검은 머리 아이들”

< 민간인이 입양한 최초의 전쟁 고아에 대한 LA Times 기사

(1953년 12월) >

< 홀트 부부의 한국전쟁 고아 입양 (1955년) >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기독교적 전통의 미국 사회에서 한국전 참전 군인의 전언과 한국전쟁에 대한 언론 보도가 늘어남에 따라 한국전쟁 고아 입양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증대되었다.

초기에 민간인이 입양한 전쟁 고아는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후 버려진 아동’인 G.I. Baby였다. LA Times 1953년 1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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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한국전쟁과 캘리포니아 ∙ 15 보도에 따르면 서울에서 입양된 Patricia Lea가 민간인이 입양한 최초의 전쟁 고아로 LA 인근 글렌데일 지역에 입양되었다.

한국전쟁 고아에 대한 미국내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고아, 특히, G.I. Baby가 한국에서 적응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이유로 이들의 미국 입양을 지원했다.

1955년 8월에 홀트 법(Holt Act)이라고 불리는

‘한국전쟁 고아 구제에 관한 법(Bill for Relief of Certain Korean War Orphans)’이 통과되고, 홀트 부부가 1955년 10월 8명의 한국전 고아를 입양하면서 한국전 고아 입양에 대한 미국내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LA 총영사관에는 아동의 성별, 나이 등 희망 입양 조건과 입양 동기를 적은 서한들이 코네티컷, 아이오와, 미시건, 텍사스 등 미 전역으로부터 계속 접수되었고, LA 총영사관은 입양 신청을 한국 기관 들에 전달하고, 고아의 정보를 입양 신청자들에게 다시 전달하는 등 한국전쟁 고아의 미국 입양 절차 수속을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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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한국과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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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1 LA 한인타운 :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1970년대 초반 LA 한인타운(올림픽가), 사진 왼쪽

‘올림픽식품’은 한인타운 첫 한국식품점>

1965년 이전의 한인 이민은 국내외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 초래된 이민이었다. 해방 이전에는 노동자, 결혼할 여성을 초청하는 ‘사진 신부’가 주 이민자 였다. 해방 이후 1964년까지의 이민 대부분은 미국 가정에 입양된 한국전쟁 고아들(5,348명), 미군과 결혼한 신부(6,423명), 유학생(5,348명)이었다.

1965년 하트-셀러법(Hart-Celler Act)으로 불리는 이민법 개정으로 가족이민이 본격화됐다. 당시 이민은 의사, 간호사, 수리공 등의 취업이민, 시민 권자나 영주권자가 초청하는 초청이민 등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파독 광부들의 이민도 증가하였다. 광산 근로자들은 광산에서 다져진 강한 의지와 동지애로 초창기 LA 한인타운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 한인들의 미국 이민은 급증하였다.

2만명의 쿼터를 초과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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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한국과 LA ∙ 19 이민은 연 3만명 이상으로 증가하였고, 대량 이민 추세는 198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1960년대말-1970년대초 ‘친구 따라’, ‘친척 따라’ 지금의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LA 한인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60년대 후반 흑인들이 남쪽 에서 올림픽가로 북상하고, 백인들이 떠나면서 주거 비도 저렴했다. 1972년 대한항공의 LA 취항으로 LA는 본격적으로 미국내 한인의 거점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78년 ‘나성(羅城)에 가면’

이라는 노래가 발표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시대상을 반영하여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예쁜 차를 타고 행복을 찾아요”라고 헤어짐의 아쉬움과 아메리칸 드림을 노래하고 있다.

1980년 12월 LA 시의회에서 한인타운 구획 결의 안이 통과되고, 1982년 8월 톰 브래들리 LA 시장은 올림픽가와 버몬트가에 한인타운 표지판을 설치하였 으며, 이로써 세계 최대 한인타운이 공식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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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2 1992년 4.29 폭동

“미주 한인 이민사의 최대 비극”

< 4.29 폭동 당시 한인타운 >

1992년 4.29 폭동은 한인 이민사 중 가장 불행한 사건이다.

4.29 폭동은 교통신호를 어긴 흑인 로드니 킹을 집단폭행한 백인 경찰관에 대한 무죄 판결(1992년 4월 29일)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1992년 4월 29일 발생한 후 6일이 지난 5월 4일에 가서야 완전히 진압되었다.

공교롭게도 로드니 킹 사건이 발생한 1991년 3월 흑인 빈민지역인 남부 LA의 상점에서 한인 주인 두순자씨가 흑인 소녀를 절도범으로 오인하여 총격을 가해 사망하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4.29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은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인 사회가 폭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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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한국과 LA ∙ 21 원인을 제공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흑인들이 공격의 화살을 한인들에게 향하게 하였다.

시위대는 약탈과 방화로 한인타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한인 사회는 약 2,300개 업소가 전소되는 등 3억8천만 달러 규모의 재산피해를 입었다.

폭동이 진행되는 동안 부유한 백인 거주 지역에는 경찰력이 일찍이 배치되었으나, 정작 흑인가에 가까운 한인타운에서는 경찰들이 초기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치안 당국은 흑인들이 그들의 분노와 갈등을 한인들을 향해 표출하도록 방치한 셈이 되었다.

4.29 폭동을 계기로 한인들은 ‘한국인’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거듭났다.

< 4.29 폭동 25주년 한인타운내 평화 행진 >

정치력 신장 운동을 통해 주류사회 지역 정치인이 당선되고 2018년 11월 중간선거에서는 두 번째 연방의회 의원 탄생도 바라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인종화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능동적으로 타민족 과도 어울리며 더불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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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3 LA에서 일군 ‘한강의 기적’

< 대한항공이 투자한 LA 다운타운내 윌셔그랜드센터 (높이 333.53m로 캘리포니아내 최고층) >

60년대 이후 LA에 정착한 한인들은 일자리가 없어 상당수가 일용직 노동자(jobber, 한국식 표현 : 자바)로 시작하였다. 특유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당시 LA 지역 상권을 주름잡던 유태인들로부터 상점, 업체를 인수 하였으며, 이곳에서 창출한 자금이 한인 경제의

‘젓줄(cash cow)’로 한인 금융 기관과 한인타운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민 초기에는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최소한의 신용도 없는 상태에서 ‘계’를 통해 소규모 자금을 조달하였으나, 이후 1980년대 윌셔은행(1980년)과 한미은행(1982년) 등 한인은행의 설립을 계기로 제도권으로부터의 금융 지원이 본격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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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한국과 LA ∙ 23 한인 봉제・의류 업체로 형성된 ‘자바 시장’은 현재 미국 최대의 패션 지구(fashion district)중 하나로 성장했다. 또한 미주에서 영업중인 한인 은행(17개: 우리은행, 신한은행 제외) 중 11개 은행의 본사가 있고 이들 한인 은행의 총 자산규모는 2018 년 8월 현재 270.5억 달러(미주 전체 한인 은행 총 자산의 85.8%)에 달해 LA는 사실상 미주 한인들의 경제수도라고 할 수 있다.

봉제・의류 업계와 한인 은행들이 LA 지역 한인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 온 ‘견인차’가 되었다면, 2012년 발효된 한-미 FTA는 LA 지역 한인 경제 구조를 보다 고도화시키고 주류 경제로 통합되도록 하는 새로운 발전의 ‘도약대’가 되었다.

한-LA간 물동량 또한 한-미 FTA 발효 이후 크게 증가하였다. LA항과 인근 롱비치항을 포함하고 있는 LA 세관구역은 전체 46개 미국 세관구역 (Customs District) 중 대한국 교역 1위(20.8%)를 차지하고 있다. LA 세관구역 기준으로 2017년 교역 액은 예년 대비 8.55% 증가한 248억 달러에 달하는 등 한국은 LA의 제3위 교역상대국이며, 캘리포니아 주의 제6위 교역 상대국이다.

현재 남가주 지역에는 CJ, 현대기아차, 대한항공, 금호타이어 등 306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으며, 직접 고용만도 10,029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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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4 할리우드와 한류

< LA Staples 센터에서 개최된 KCON (2018년 8월) >

매년 2월 아카데미상(오스카상) 시상식이 개최되며, 유명 배우들의 손도장이 새겨진 명예의 거리(Walk of Fame)가 있는 할리우드는 전세계 영화산업 및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지이다.

아카데미상은 약 8천여명의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데, 2015년 임권택 감독, 최민식 등 5명이 최초로 아카데미 회원으로 영입된 것을 시작 으로 30명의 한국계 영화인이 회원으로 추가되는 등 할리우드내 한국영화의 영향력이 계속 확대되고 있다.

또한, 2017년에 개봉된 <택시운전사>, <군함도>,

<특별시민> 등과 같이 미국내 극장에서 매년 40여편 정도의 한국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으며, <수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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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한국과 LA ∙ 25 그녀>, <굿 닥터> 등 다양한 한국 작품들이 할리우드 영화나 TV 드라마 시리즈로 리메이크되고 있다.

한국 영화의 미국진출과 더불어, K-POP으로 대표되는 한국 음악이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미국진출에 성공한 이후 EXO, BTS 등으로 이어 지면서 K-POP 인기는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2012년 전세계중 LA에서 최초로 시작한 KCON은 2018년에는 뉴욕, 일본, 태국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LA 공연(8월)에서는 이틀 동안 한류팬 9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BTS는 빌보드 차트에서 두 번이나 1위를 차지하고, LA공연을 시작으로 총15회에 걸친 북미 지역 월드 투어에서는 22만명의 한류팬이 운집하는 등 한류 열풍은 현지 주요 언론 매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K-POP 중심의 한류 열풍에 더하여 최근 에는 K-POP 공연의 성공 자체로만 만족하던 초창기와 달리 한류 문화가 K-Food, K-Beauty 등의 다른 한류 산업과 결합하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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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5 미주 동포 - 대미 공공외교의 산실

< 115주년 미주 한인의 날 선포식 (2018년 1월) >

LA 인근 리버사이드에 1905년 최초의 한인타운인 파차파 캠프가 세워진 이래 LA 지역은 각계에서 활약하는 한인들의 주무대가 되어왔다.

약 35만명의 LA 지역 동포 등 60만여명의 남가주 한인들은 스스로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주류사회에 영향력 확대 등 정치력 신장을 위해 노력해왔다.

특히, LA 지역 한인들은 등 모국과 미국의 가교가 되는 민간 공공외교 사절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LA 지역 동포들은 한인이 처음 하와이에 도착한 날인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로 제정할 수 있도록 미 정치인들을 설득해나갔다. 그 결과‘미주 한인의 날 지정 결의안’이 LA 시의회에서 2003년 10월 만장일치로 통과된데 이어 2004년 1월 캘리 포니아 주의회에서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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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한국과 LA ∙ 27

‘미주 한인의 날 지정 결의안’은 미 연방 의회 에서도 2005년 12월 통과되었다. 동 결의안을 주도한 연방의원은 LA 인근 한인 밀집 지역이 지역구이고 한인 1.5세를 보좌관으로 두며 한인 사회와 소통해 온 에드 로이스 연방 하원의원이었다.

2018년초에도 LA 지역 동포들은 오렌지카운티, LA시, 캘리포니아주 상하원 등 총 7개 한인 밀집 지역의 시정부, 시의회, 주의회가 각기 ‘평창동계 올림픽 평화 결의안’을 채택토록 하여 미국내 북미 대화 분위기 조성 노력을 선도하였다.

LA 지역 한인들은 각 지역의 연방의원, 주의원, 시정부 등과 협력하여 남가주 각지역에서 한미 FTA 지지 결의(8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날 결의, 입양인시민권 법안 지지 결의, 김영옥 고속도로 표지판 설치 결의 채택을 주도해 나가면서 우리나라 대미 공공외교의 큰 자산으로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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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도전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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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1 동포사회 자산 공동 활용

< 정상화 과정중인 한미동포재단 >

1965년 미 이민법 개정으로 미주 이민이 본격화 되면서 LA에 한인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LA에는 남가주 한인센터(1962년), 남가주 한인회(1965년), 재미한인거류민회(1968년), 한미동포재단(1973년) 등이 조직되고, 동포 2세 교육을 위해 1972년 현 남가주한국학원의 전신인 무궁화학원이 세워졌다.

한인 사회를 위한 한인들의 건물을 갖고, 차세대를 위한 학교를 운영하고 싶다는 숙원을 가진 한인들은 한푼 두푼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았다. 한국 정부도 LA 한인 사회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1975년 한미동포재단 건물 구입비의 절반에 달하는 15만 달러를 지원하였고, 동포 차세대 교육을 위해 1982년부터 남가주한국학원에 총 349만 달러를 지원 하여 학교 건물 매입 등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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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도전과 과제 ∙ 31 하지만 미국 주류사회내 한인들의 진출과 성공을 돕기 위해 동포들의 피땀으로 마련된 이러한 한인 사회 자산을 둘러싸고 분쟁과 이권 경쟁이 재연되고 있어 안타까운 점이 없지 않다.

한미동포재단 건물은 소유권 분쟁에 휩싸였고 이사회는 두 개로 나뉘었으며, 남가주한국학원이 운영하는 윌셔 초등학교는 폐교(2018년 5월)되었다.

동포사회와 힘을 모아 한국 정부가 구입을 위해 재정 지원한 한국교육원 건물도 소유권 분쟁 위기에 봉착하였고, 1992년 폭동 성금의 일부로 구매한 구 MBC 건물은 매각, 소실되었다.

다행히, 현재 폐교된 윌셔 초등학교는 차세대 뿌리교육을 위한 한인 커뮤니티 센터로 조성하는 방안이 동포사회에서 논의되고 있고, 법정관리 중인 한미동포재단도 임시이사회가 구성되어 정상화 수순 으로 접어들었다.

한미동포재단, 남가주한국학원과 같은 동포 자산 문제 해결은 동포 사회가 직면한 공동의 과제이다.

향후 100년을 내다보는 시각을 갖고 동포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활용 방안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고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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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2 한인 정치력 신장

< 한인타운 노숙인 쉘터 반대 5차 시위 (2018년 6월) >

가세티 LA 시장은 2018년 5월 2일 한인타운 내 노숙인 쉘터 조성 계획을 발표하였다. LA시가 한인 사회와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한인타운내 쉘터 후보지를 지정함에 따라 한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LA시의 한인타운 노숙인 쉘터 발표 시점과 겹치는 5월 2일-3일 이틀 동안 한인타운 구역의 일부를 리틀 방글라데시 구역으로 분리, 지정하는 안건을 주민투표로 결정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우리 동포들이 주류 사회뿐만 아니라 여타 이민 사회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한인 사회는 1992년 흑인 폭동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한인타운 노숙인 쉘터에 대해서는 최대 1천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는 가두 시위가 7차례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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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도전과 과제 ∙ 33 되었고, 주요 동포인사들과 LA시와의 협상에 따라 쉘터 후보지를 한인타운 외곽으로 옮기기로 결정 하였다.

리틀 방글라데시 구역 별도 획정에 대해서는 주민 투표 참여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어 2만명 이상의 동포가 주민투표에 참여, 98.45%의 반대로 동 안건을 부결시켰다.

한인타운 노숙인 쉘터 협상, 리틀 방글라데시 구역 획정 부결은 동포 사회의 자긍심을 고양하고, 동시에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2018년 11월 중간선거 유권자로 등록한 캘리포니아주내 한인 유권자 수는 총 16만 4,143명 으로 2016년 대선 대비 15% 이상 증가하였다.

현재 한인들은 법조, 정치, 회계,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류 사회에 진출해 있다. 그러나 정계 진출은 데이빗 류 LA 시의원, 최석호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 미셸 박 스틸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등 일부 인사 이외에는 주류사회 진출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한인 사회의 목소리가 주류 사회에서 온전히 존중될 수 있도록 한인 사회 전체가 정치력 신장에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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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3 입양인 시민권법 제정

< 글렌데일 시의회 입양인 시민권법 지지 결의 선포 (2018년 7월) >

미국내 한인 입양은 현재까지 113,000여명이나 입양 기관을 통하지 않은 경우를 포함하면 16-17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양부모의 정보 부족 또는 해태로 인해 입양 절차를 완료하지 않아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한인 입양인 수가 수천명에 달하고 있다.

특히, 시민권 미취득 입양인들은 법적으로 미국 시민이 아니어서 미국내 지위가 취약하고, 범죄에 연루될 경우 원래의 출신 국가로 추방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실제로 지난 2009년부터 2016년 기간중 6명의 한인 입양인이 한국으로 추방되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한국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중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다.

미 정부와 의회는 시민권 미취득 입양인의 문제를 인식하고 2000년에 입양인에게 시민권을 자동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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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도전과 과제 ∙ 35

< 시민권미취득 입양인 세미나 (2018년 9월) >

부여하는 아동 시민권법(Child Citizenship Act)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동 법은 발효(2001년 2월) 당시 미성년인 입양인들에게만 적용되어 시민권이 없는 다수의 성인 입양인은 여전히 ‘법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LA 총영사관은 그간 캘리포니아주 상하원(2018년 8월 29일), LA 시의회(2018년 7월 3일), 글렌데일 시의회(2018년 7월 24일)에서 입양인시민권법 지지 결의를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세계한민 족여성네트워크 (KOWIN) LA 지 회의 시민권 미 취득 입양인 지 원 행사(2018년 6월 16일), 시민권 미 취 득 입 양 인 지원을 위한 한 인입양인 세미나 (2018년 9월 15일) 등을 후원하였다.

시민권미취득 입양인 문제는 미 연방의회의 입법 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현재 미 연방 상하원에 각 각 입양인시민권법(Adoptee Citizenship Act)이 상정 되어 있으며, 동 시민권법 통과를 위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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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4 복수국적자의 국적 선택

“한국에 출생신고도 안 했는데 복수국적자라구요?”

깜짝 놀라서 질문을 던지는 민원인들에게 이 렇게 답한다.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한국 국 적을 가지고 있을 때 미 국에서 자녀가 태어났다 면 자녀는 미국 시민권 과 한국 국적을 동시에 갖는 복수국적자1)입니다.”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은 시민권자로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어, 한국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대한민국 국적자임에는 변함이 없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사람 대부분이 국적 선택 기간 내 국적을 정리하지 않아2) 법적으로는 복수국적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특히, 부모가 미국에서 영주할 목적으로 체류하다 남자 아이를 출산한 경우 출생 이후 만 18세 되는

1) 부계혈통주의가 적용되던 1998.6.14.일 이전에 출생한 사람은 출생 당시 어머니의 국적은 관계없이 아버지의 국적이 한국일 경우에만 한 국 국적이 부여됨

2) 남성의 경우 한국 국적을 이탈하려는 경우 출생 이후부터 18세 되는 해의 3월31일까지만 가능하며, 그 이후에는 한국의 병역의무를 해소 하지 않는 한 37세까지 국적 이탈이 제한되어 복수국적이 유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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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도전과 과제 ∙ 37 해의 3월31일까지 언제든지 한국 병역과 관계없이 국적 이탈을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지나면 만 37 세까지 한국 국적 이탈이 제한된다.

국적 선택을 제때 하지 않아 발생하는 불이익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대외비밀과 고급 정보를 다루는 연방공무원, 군장교 등은 비밀취급 인가를 받아야 하며, 복수국적자는 비밀취급인가 발급이 제한된다. 이러한 보직에 임용을 희망할 경 우에는 복수국적자의 지위가 불이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출생 당시 아버지는 시민권자, 어머니는 영주권자여서 복수국적자였으나, 본인이 복수국적자임을 모르고 지내다 미국 육국사관학교 입학이 좌절된 사례가 최근 발생했다.

국적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문제 이다. 총영사관은 동포들이 국적 선택 제도를 잘 몰라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관련 제도를 적극 홍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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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발견된 태극기 >

5 대한인국민회 사료 한국 이관

LA 소재 대한인국 민회 총회관에서 지 난 2003년 7월 복원 공사 중에 유물이 발 견된 이후 세 차례에 걸쳐 20여 상자의 독 립운동과 관련된 사 료가 발견되었다.

이들 사료에는 장 인환, 전명운 의사 재 판 지원 서류 및 모 금 내역, 3.1 운동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 회의 외교 및 재정 문건, 상해 임시정부

주요 공문, 태극기가 포함되어 있어, 미주 독립운동사 연구에 있어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당초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측은 사료의 보존 처리를 위해 한국으로 이송하려 했으나, 일부 LA 지역 동포는 미주 한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이민 선조의 유산은 미주에 남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20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 등을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였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측은 사료의 한국 이관을 반대하는 측과 2016년 1월 중재재판을 통해, ① 사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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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도전과 과제 ∙ 39 디지털화하기 위한 남가주대학교(USC)의 스캔 작업 후 한국으로 이송한 후, ② LA에 사료를 보관할 수장고가 설립되면 LA로 반환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하였다.

<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

<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내 전시실 >

이 합의에 따라 현재 USC 한국전통문화도서관 측은 대한인국민회 사료에 대한 스캔 작업을 진행 하고 있다. 총영사관은 사료의 스캔 작업이 완료되는 대로 독립기념관에 이관될 수 있도록 USC 및 관계 이사진과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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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6 LA 한인타운의 현재와 미래 : 서울특별시 나성구

< 한인타운의 새 중심지 윌셔 대로 전경 >

‘서울특별시 나성구’ 라고 불리는 LA 한인타운은 세계 최대 규모로 LA내 차이나타운과 리틀도쿄를 합친 것보다 5배나 큰 규모와 상권을 자랑한다. 한인 타운은 그간 올림픽가와 그 일대에서 성장해왔으나 현재는 시내와 더욱 가까운 윌셔 대로가 중심이다.

한인타운은 여러 편의시설이 모여 있고, 복수의 지하철역이 있으며, 주택가격이 합리적이라는 이유 등으로 LA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지역이다.

요즘에는 타인종들이 식당 등 한인 비즈니스의 고객으로 한인타운을 즐겨 찾고 있다.

그러나 한인 이민 1세대들이 고령화되고, 신규 이민자의 유입이 감소하면서 점점 이민 2세 이하의 세대들이 주류로 등장하고 있는데, 미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한인 중 이민 2세 이하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0년 36%에서 2016년 42%로 증가하였다고 한다.

또한, 혼혈 한인 인구도 지난 20년간 증가하여 전체 한인의 약 1/4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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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도전과 과제∙41 한인 차세대 및 혼혈 한인 인구의 증가 추세는 한인들의 주류사회 진출 확대라는 긍정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모국과의 유대감 약화라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미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미국 출생 2세대 한인 중 58%

이상이 영어만 구사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아울러, 지난 10년간 한인 신규 이민자가 5만 명이 채 안되는 등 한인 유입이 감소하고 있고, 동시에 한인 차세대와 혼혈 한인이 증가 추세에 있어, 한인 2세, 3세들의 정체성 유지가 한인 사회의 큰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문제를 앞서 겪었던 일본 이민 사회의 경우, 미국 사회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동화되어 살고 있으며, LA 다운타운내 리틀도쿄 지역은 일본 커뮤니티의 주거 지역이라기보다는 관광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이민 사회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한인 사회 또한 현재의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한인 타운의 미래를 고민해야 할 혜안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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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LA 바로알기 한국밖의 한국 [첨부]

로스앤젤레스시 약황

■ 일반사항

◦ 인 구 : 약 400만명 (2018, 미국 2위) - 히스패닉(48.6%), 백인(非히스패닉

28.5%), 아시안(11.6%), 흑인(9.0%)

◦ 면 적 : 1,291 ㎢ (서울 605㎢의 2배) - 미국 서남부 태평양 연안 위치

※ LA카운티 (LA시는 LA카운티내 한 지역) - 인구 : 1,016만명 (히스패닉 48.5%,

백인(非히스패닉) 26.5%, 아시안 15.1%(한국계 2.9%), 흑인 9.1%) - 면적 : 12,308㎢ (경기도 10,172㎢의

1.2배)

■ 정치현황

◦ 시 장 : Eric Garcetti(민주, 2013.7월 취임)

◦ 시의장 : Herb Wesson(민주, 2012.1월 취임)

◦ 시의원 : 15명(민주 14, 공화 1), - 2015.7월 한인 최초로 David Ryu 취임

(아시안계로는 1985년 이래 두 번째)

■ 경제현황

◦ GDP(LA 및 인근지역) : 10,017억불 (2016) - 미국 내 도심(metropolitan area) 중 2위

◦ 1인당 국민소득 : 55,624불 (2016) - 미국 전체 평균 : 49,264불 (2016)

◦ GDP 성장률 : 4.9% (2016-2017)

◦ 실업률 : 4.6% (2018.10월)

◦ 총교역액 : 약 3,981억불 (2016) - 수출액 : 약 1,187억불 (2016) - 수입액 : 약 2,794억불 (2016)

※ LA세관구역(LA customs district) 기준

◦ 주요산업 : 국제무역, 엔터테인먼트 (TV, 영화, 음악), 석유, 항공, 패션 및 관광

◦ 경제특징

- 미 서부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로서 뉴욕 지역에 이어 미국 제2의 도시권 형성

※ 2017년 캘리포니아주 GDP는 2.7조불로 세계 5위 경제규모 (그중 LA가 1조불 차지) - LA카운티의 1천만명의 소비인구,

교통망, 연구중심의 인프라 등은 외국기업, 특히 아시아 기업에게 최적의 투자환경 제공

- 미국 내에서 가장 큰 산업생산 기지로서 운송, 의류, 철강, 컴퓨터, 식품산업 발달 - 뉴욕,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보스톤, 워싱턴 DC에 이은 미국내 금융중심 - 향후 LA를 이끌어갈 新경제 분야는

바이오ㆍ의약, ICT, 환경관련 기술 기반 산업과 기술ㆍ창작이 혼합된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

■ 우리나라와의 관계

◦ 20세기 한인 미국이민과 해외독립운동의 중심이며, 해외 최대 한인 사회 형성 - 캘리포니아 남부에 동포 약 60만명

(LA카운티에 약 35만명) 거주 (우리 국민은 약 20만명)

※ 캘리포니아 중ㆍ북부에 동포 15만명 거주 - 연간 LA방문 아국인 34만명(2017)

◦ LA세관구역을 통해 한-미 교역 물동량의 약 40% 처리, 우리나라 대미교역의 관문 - 한-LA 교역액(2017) : 248억불

(아국, LA 3대 교역국)

※ 對韓 수출 : 106억불 / 수입 142억불

◦ 한-LA 주요 인사교류

- 2013. 1월 Villaraigosa LA시장 방한 - 2013. 5월 박근혜 대통령 LA방문 - 2014.10월 정의화 국회의장 LA방문 - 2014.11월 Eric Garcetti LA시장 방한 - 2017.12월 정세균 국회의장 LA방문 - 2018. 7월 Eric Garcetti LA시장 방한

◦ LA시 자매결연 현황

- 부산시-LA시 자매결연 체결 (1971.4.5.)

※ 서울시-LA시 우호교류 관계 체결 (200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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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

당시 언론에는 Blinder 부의장 등의 대안설 등도 보도되었으며, 재무장관을 역임한 루빈의 회고록은 백악관 내부에서 통화정책의 적정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을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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