試析吳又可“溫疫學說”之病因觀
殷晳玟
又石大學校 韓醫科大學
本文針對吳又可的“溫疫學說”分析闡述了其別樹一幟的病因觀. 吳又可的生存年代時値疫病盛行蔓延于世, 傳統學說認爲疫病流行多因時氣的異常變化所致, 而吳氏却否認了這一傳統的觀念, 將疫病病因歸結爲由某 種病源性物質, 卽雜氣所致. 吳氏將疫病歸屬于溫病的範疇進行論述, 他所主張的‘溫病’槪念, 主要是由雜氣 所致, 而雜氣爲主因的‘溫’所致之病, 環境因素屬次要的致病原因. 這種觀點與傳統上將寒溫變化視作外感病 之病因的醫學思想論点有所不同. 首先可推斷這一病因觀的形成與吳氏的實際臨床經驗密不可分. 但本文就 吳又可否認氣候之異常變化爲疫病病因的傳統學說, 認爲其根源不僅僅是因爲他的臨床經驗, 他的主張很有 可能與當時思想界對自然之變化的認識論有着某種關聯, 從這一角度推論, 詳析吳氏的病因觀具有一定意義.
因爲吳又可活動的時期, 在傳統的‘宇宙論’及自然哲學思潮領域發生了很大的變化, 他的論據亦反映了自然變 化中時常存在的不規則性變化. 這種思惟具體于17世紀開始形成, 對傳統的自然哲學進行了直接批判的觀點.
本文就這一時代變化, 槪述了反映當時思潮的明末淸初代表性人物王廷相, 王夫之, 胡渭, 黃宗羲等的學術思 想, 借此透析吳又可的學術思想, 推斷吳氏的論点與當時自然哲學的思想變化一脈相通.
Key Words : 吳又可, 溫疫, 溫病, 韓醫學, 傳統醫學, 宇宙論, 醫學哲學
吳又可 “溫疫學說”의 病因觀 분석
은석민*56)
우석대학교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Ⅰ. 서론
吳又可 는 明代 말의 의가로서, 그의 溫疫學說은 淸代 溫病學 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 다. 吳又可는 疫病의 대유행을 경험하면서 그 病因으 로 雜氣說을 제기하였으며, 나아가 이 雜氣에 의한 병 이 六氣에 의한 병보다 훨씬 많다고까지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疫病을 溫病의 틀 안에서 논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인 傷寒과 溫病의 구분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논 해진 것일 뿐 그가 언급한 溫病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溫疫 이고 이를 雜氣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기존의 寒溫의 변화에 의한 것으로서의 溫病의 개념과
* 교신저자 : 은석민 전북 완주군 삼례읍 우석대학교 한의과대 학 063-290-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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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 틀을 달리 하는 것이다. 즉 吳又可가 말한 溫病 에서의 ‘溫’의 개념은 그 자체가 직접적인 병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雜氣가 병을 일으키도록 환경적 요 인을 제공하는 이른바 誘因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吳又可의 溫疫學說에서 제 기된 雜氣說은 病因으로 六氣의 변화를 논하던 전통적 인 의학사상과는 확실히 그 틀을 달리 하는 것이었으 며, 이런 이유로 그의 주장은 후대에 의학사상의 주류 에 놓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吳又可 가 疫病의 유행을 설명하기 위해 제기한 雜氣 說 은 기후의 이상변화가 곧 疫病의 病因이 된다는 전 통적인 학설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吳又可 는 疫病의 발병원인과 관련하여 기후의 이상변
화를 배제하는 한편으로 나아가 六氣의 틀을 벗어나
병원성 물질의 의미로서의 雜氣의 개념을 제시한 것인
데, 본 연구는 吳又可가 疫病의 病因과 관련하여 六氣
의 변화를 부정한 것이 그의 임상적 관찰로부터 비롯
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六氣의 변화를 기술하는 전통적인 이론체계에 모종의 내적인 한계가 있었고 그것이 결국은 吳又可에 의해 疫病의 병인을 논함에 있어 六氣를 배제하는 결과로까지 나타 났다는 관점 하에 진행된 것이다. 즉 기후의 이상변화 를 논한다는 것은 계절의 시간적 질서와 같은 어떤 기 준에 따르는 것이며 그 기준에 따라 기후변화의 常과 變 의 경계가 정해질 수 있는 것인데, 만약 그 기준이 모호하다면 그에 따라 정해져야 할 기후변화의 常과 變 의 경계 역시 모호해질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연구는 吳又可가 활동하던 당시 즉 17세기 무렵 이후 로 전개된 비판적 우주론 및 易哲學이 지니고 있는 사 상적 의의에 주목하고자 한다. 물론 吳又可가 그 사상 적 흐름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를 통해 吳又可의 학술사상이 당시의 사상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면이 있었음을 짚어보는 것 으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본 문장에서는 먼저 吳又可의 溫疫學說의 학술적 의미를 살펴본 다음 그것과 관련하여 당시의 우주론 및 易哲學의 흐름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吳又可의 溫疫學說吳又可 는 그가 활동했던 당시에 대규모로 유행했던 疫病 의 병인을 논함에 있어 전통적인 外感六淫의 설을 배제하고 이른바 雜氣病因說을 주장하였는데, 이와 같 은 그의 주장은 疫病이 주로 계절의 시간적 질서에 맞 지 않는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라는 종래의 관념을 벗 어난 것이었다. 즉 그는 『溫疫論․原病』에서 “病疫之 由, 昔以爲非其時而有其氣. …… 余論則不然, 夫寒熱溫 凉, 乃四時之常, 因風雨陰晴, 稍爲損益, 假令秋熱必多 晴, 春寒因多雨, 較之, 亦天地之常事, 未必多疫也.”,
“傷寒與中暑, 感天地之常氣, 疫者, 感天地之厲氣. 在歲 有多寡, 在方隅有厚薄, 在四時有盛衰. 此氣之來也, 無論 老少强弱, 觸之者卽病, 邪自口鼻而入.” 이라 하여 기후 의 寒熱溫凉의 변화에 다소 틀을 벗어남이 있더라도 이는 天地 간의 통상적인 변화일 뿐 疫病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한편으로 天地 간의 모종의 厲氣 가 疫病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吳又 可 가 부정한 疫病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이란 것은
『傷寒論․傷寒例』 에서 時行之氣라 한 것이 그 대표적 인 예라 할 것이다. 『傷寒論․傷寒例』에서 말한 時行 之氣 에 의한 발병이란 계절에 맞지 않는 기후변화에 의한 것으로서, “凡時行者, 春時應暖, 而復大寒, 夏時
應大熱, 而反大凉. 秋氣應凉, 而反大寒, 冬時應寒, 而反 大溫. 此非其時而有其氣, 是以一歲之中, 長幼之病多相 似者, 此則時行之氣也.” 라 하였고, 또 이는 “氣候亦 有應至而不至, 或有未應至而至者, 或有至而太過者, 皆 成病氣” 라 한 것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隋代 巢元方 의 『諸病源候論』에서도 “此皆因歲時不和, 溫凉失節, 人感乖戾之氣而生病, 則病氣轉相染易, 乃至滅門, 延及 外人.” 이라 하여 『傷寒論․傷寒例』의 경우와 같이 기 후의 이상변화가 疫病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고 보았 다. 그런데 吳又可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疫病學說을 부정하고 疫病의 원인으로 雜氣의 개념을 제시한 것이 며, 이 雜氣는 戾氣, 厲氣, 疫氣 등으로도 불리웠다. 그 가 이처럼 疫病에 대한 전통적인 학설을 부정한 것은 일단 그의 실제적인 임상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吳又可는 그가 활동했던 당시에 대규모로 유 행하던 疫病을 목도하면서 그것이 계절적 변화의 측면 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는 여전히 전통적인 時行之氣 내지 乖戾之氣의 개념으 로서의 雜氣, 戾氣 등의 용어를 쓰기는 하였으나 이를 계절변화의 소산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질병을 일 으키는 모종의 물질적 존재로 보았으며, 나아가 이 雜 氣 에 의한 병이 실질적으로 六氣에 의한 병보다 압도 적으로 많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吳又可의 疫病學說은 外感病을 논함 에 있어 六氣의 병인을 배제함으로 인해 外感病의 병 인으로서의 寒溫을 논하던 기존의 의학사상과는 분명 히 틀을 달리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온 병학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킨 면이 있었다. 이는 비록 吳又可 가 外感의 寒溫을 논하는 기존의 학설과는 전혀 다른 틀의 논의를 펼치긴 했지만 그가 疫病을 기본적 으로 온열성질환으로서의 溫病의 틀에서 논했기 때문 이었으며, 결국 吳又可의 疫病學說은 『傷寒論』의 틀 을 보충 내지는 벗어나려는 기존의 溫病學說의 연장선 상에 있으면서 새로운 차원의 溫病學說을 제시한 것이 었다. 그리고 그의 溫病學說에서 가장 주목할 만 한 점은 溫病이 四時에 모두 있다고 주장한 것이며, 따라 서 그가 제기한 雜氣의 개념도 溫病의 병인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즉 기존의 溫病의 개념은 그 병인이 아직 상당부분 寒邪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또한 봄철의 병이라는 時令의 개념적 속박 하에 있었 는데, 吳又可는 그 개념적 틀을 벗어나 溫病을 병인 면에서 전적으로 온열성질환으로 간주하고 그 발병시 기도 사계절 모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 는 『溫疫論․傷寒例正誤』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구체 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十二經絡과 奇經八脈은 營衛氣血이 온몸에
분포되어 百骸를 영양하는 것이다. 이런 까 닭으 로 天眞元氣가 퍼져 있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렇 지 않다면 麻木不仁의 증상이 나타난다. 조화의 기틀은 일각이라도 멈춰질 수 없으며, 멈추어지면 氣血의 순환이 뒤집혀지고 어지럽게 된다. 그런데 風寒暑濕의 邪氣는 몸 안의 營衛之氣와 그 세가 양립할 수 없으니, 일단 邪氣의 침범이 있으면 질 병이 생기게 되며, 만약 질병이 물리쳐지지 않으 면 생명이 위태롭거나 죽게 된다. 앞에서 논한 바, 겨울철에 심한 추위에 상하여 바로 발병하는 경우는 傷寒이라 하고 바로 발병하지 않으면 봄 이 되어 溫病으로 변화하거나 여름이 되어 暑病 으로 변화한다. 한편 風寒에 상한 바가 가벼우면 感冒라 하고 심하면 傷寒이라 하는데, 즉 感冒라 하여 風寒에 상한 바가 가장 가볍다 할지라도 頭 疼身痛, 四肢拘急, 鼻塞聲重, 痰嗽喘急, 惡寒發熱 등의 증상이 있으며, 風寒에 상한 후 바로 발병하 는 것이지 邪氣가 숨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겨울철에 심한 추위에 상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닌데 도리어 邪氣가 잠복해 있다가 시일 이 지나 발병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邪氣를 감수하여 바로 발병하고, 어떻게 邪氣를 감수하여 바로 발병하지 않는 것인지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이유로 邪氣를 감수하여 바로 발병하는 경우에 깨질듯 한 두통과 몽둥이로 맞는 듯한 身 痛, 惡寒, 項强, 불로 달구는 듯한 發熱, 喘, 嘔 등 이 나타나고 심하면 發痙, 六脈疾數, 煩躁不寧이 나타나며 이후로 전변되는 것이 매우 다양하여 제때 다스리지 못하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가?
또한 무슨 이유로 邪氣를 감수하여 바로 발병하 지 않는 경우 邪氣를 감수한 직후에는 조금도 느 끼지 못하고 봄여름이 되기까지 邪氣가 몸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邪氣를 감수한 후 증상 이 발현하기 전까지 음식과 기거가 정상적이고 神色聲氣에 조금의 변화도 없으며, 증상이 발현해 서는 그 병세가 傷寒에 비해 조금도 덜하지 않다.
하물며 風寒에 상함은 邪氣가 肌表를 통해 들어 오지 않음이 없으니 상하는 부위가 모두 營氣와 衛氣이고 감수한 것은 모두 風寒으로 같은데도 어찌 하여 어떤 사람은 아무 감각이 없이 邪氣가 체내에 藏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민감하여 邪氣를 감수한 즉시 발병하게 되는가? 발병의 근원이 모두 寒邪를 감수한 것으 로 같으나 양자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다 른 양상을 보이는데도 어찌 그에 대한 說法이 없 는 것인가? 마땅한 說法이 없는 바에야 溫病, 熱 病의 병인이 風寒에 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寒毒이 肌膚 사이에 藏한다고 하는데, 肌 는 肌表이고 膚는 皮의 얕은 부분으로서 그 사이 의 어떤 부분도 營衛之氣가 통행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즉 조금이라도 風寒에 의해 感冒가 있으 면 바로 발병하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겨울철에 심한 추위에 의한 殺厲之氣를 피부의 가장 얕은 곳에서 감수한 후 그 邪氣가 가만히 숨어 있을 수 있겠는가? 앞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寒邪 가 肌膚에 藏하여 있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 다.
客邪를 다스리는 大法은 表裏를 분명히 아는 것인데, 이른바 腑에 들지 않았다 하는 것은 邪氣 가 經에 있는 것으로서 汗法을 쓸 수 있으며, 腑 에 들어간 후에는 邪氣가 裏에 있는 것으로서 下 法을 쓸 수 있다. 진실로 寒毒이 肌膚에 藏해져 있다면 비록 시일이 지나서 발병하더라도 邪氣가 여전히 表에 있을 것이므로 그 치법은 發散을 통 해 邪氣가 發汗과 함께 풀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후세에 溫熱病을 치료하면서 만약 肌膚의 表에 있는 邪氣를 치료한다는 생각으로 일률적으 로 發散을 시킨다면 이는 무익할 뿐 아니라 오히 려 해가 되는 것이다.
무릇 병에는 먼저 병인이 있은 후 비로소 병증 이 있으므로 병인과 병증을 함께 참고한 이후에 야 비로소 병명을 정할 수 있으며, 脈을 살핀 이 후에 가히 치료를 논할 수 있다. 만약 傷寒과 中 暑가 각기 病邪의 개념을 통해 병명을 정한 것이 고 지금의 熱病이라 하는 것이 병증의 개념을 통 해 병명을 정한 것이라면 앞에서 말한 暑病은 도 리어 熱病이라 불리는 것만 못한데, 이는 다소 모 호한 점이다. 만약 暑病이라 명명하고 暑氣가 病 邪가 된다 할 때 한여름의 暑氣를 감수한 것이 아니라면 暑病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暑病이라 하면 香薷飮으로 치료하는 병증에 불과한데 양자 가 어찌 서로 섞일 수 있겠는가?
무릇 客邪에 의한 병증은 邪氣를 감수함이 重 하면 즉 병이 심하고 그 열도 또한 심하며, 邪氣 를 감수함이 가벼우면 병도 가볍고 그 열도 역시 미약한 것이다. 열의 미약함과 심함은 邪氣를 감 수함의 경중에 따른 것이다. 2, 3월 또는 8, 9월에 도 병이 중하여 大熱이 그치지 않으면서 적절치 못한 치료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고, 5, 6월이라 도 병이 가볍고 열이 미약하여 약을 복용하지 않 아도 나을 수 있다. 무릇 溫病은 사계절에 모두 있는 것이며, 다만 仲夏에 이를 감수하는 경우가 많고 봄가을이 그 다음이며 겨울철이 또 그 다음 일 뿐으로서, 時令에 따라 병의 다소를 나눌 수 있을 뿐 時令에 따라 열의 경중을 나눌 수는 없
다.”
이상의 내용에서 吳又可는 傷寒의 개념에 대해서는
「傷寒例」 의 관점을 그대로 따라 겨울철에 寒邪에 상 하여 바로 발병한 것이라는 관점을 지녔으나, 溫病과 暑病 등에 대해서는 그것이 겨울철에 寒邪에 상한 후 일정한 기간을 거쳐 봄여름에 발병하게 된다는 전통적 인 관점을 부정하였다. 즉 溫病과 暑病 등은 風寒의 邪氣 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인데, 이런 관점을 통해 吳又可는 溫病과 暑病 등의 溫熱病을 진정한 의 미의 온열성질환으로 인식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溫病 이 四時에 모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존에 溫病 의 개념을 규정지었던 時令적 요소의 틀을 부수었다.
吳又可 이전의 溫病의 개념은 사실상 溫熱之邪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봄철이라는 時令의 틀 안에서 보려는 면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吳又可 이전에 溫病 에 대해 주목할 만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던 宋 代 의 郭雍의 경우, 그는 봄철에 발생하는 外感熱病은 伏氣, 新感, 時邪 등을 막론하고 모두 溫病이라 했는 데, 이는 봄철에 風寒에 상한 경우도 포함하는 개념이 었다. 즉 郭雍은 그가 제시한 溫病의 개념이 『傷寒 論』 에서 말한 “發熱而渴, 不惡寒”한 특징을 벗어나 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병인에 의한 것이든 봄철에 발병한 경우는 봄철의 溫氣를 따라 溫 病 이라 했던 것이다. 이런 면은 傷寒과 溫病의 개념을 보는 시각에 있어 실질적인 증후상의 특징보다는 발병 한 계절에 따라 병명상의 寒溫을 나눈 것으로서, 吳又 可 의 시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편 吳又 可 는 비록 溫病이라는 병명을 쓰기는 하였으나 이는 사실상 傷寒과는 다른 溫熱性질환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며, 실질적으로 그의 주장이 지니는 더 핵심 적인 요지는 병인을 논하는 데 있어 계절의 시간적 질 서에 따른 寒溫의 변화를 중심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 다. 이 점은 전통적인 의학사상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 에서 病因을 논한 상당히 급진적인 성격의 것이며, 이 에 따라 본 문장에서는 吳又可의 관점이 그의 임상적 관찰에 기초한 것임을 넘어 그가 활동할 당시의 자연 관의 변화와의 모종의 연계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吳又可 당시의 자연관의 변화란 明代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자연관 내지 우주론의 변 화와 그를 체계화시킨 易哲學 상의 변화를 말하는데, 본 문장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계절의 시간적 질서를 논하던 엄격한 경계의 획정이 明代 말 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앞에서 논했듯이 吳又可는 疫病의 병인이 계절의 시간적 질서에 맞지 않는 기후의 이상변화라는 전통적 인 관점을 부정하였는데, 이는 다른 한편으로 계절의
시간적 질서를 엄격하게 획정하여 논할 수 없다는 것 과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계절의 시간대를 엄격하게 나누지 않는다면 기후의 이상변화라는 개념 도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한 즉 吳又可의 학 술적 관점과 관련하여 당시의 우주론 내지 易哲學의 주된 흐름을 살펴봄으로써, 吳又可가 淸代에 크게 발 전했던 溫病學의 본격적인 막을 연 것이 그의 임상경 험과 아울러 당시의 사상적 경향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면이 있었음을 논하고자 한다.
2. 전통적 우주론의 象數學的, 相關的 思 惟
明末淸初 에 걸쳐 진행되었던 우주론의 변화를 살펴보 기에 앞서 먼저 그 이전의 전통적인 우주론의 주된 사 상적 특질을 살펴보면서 그 어떤 점이 후에 비판의 대 상이 되었는지를 논하고자 한다. 이는 吳又可에 의해 부정된 疫病에 대한 전통적인 학설 즉 『傷寒論․傷寒 例』 등의 관점이 전통적인 우주론의 사유방식에 기초 하고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서, 「傷寒 例」 나 『內經』, 『難經』 등의 고전의서들이 지니는 사유방식이 동시대의 사상계에서 주류의 위치에 있었 던 상수학적, 상관적 사유의 틀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 는 것이다.
고대의 상수학적, 상관적 사유는 세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 조화, 비율, 감응 등의 개념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와 같은 사유양식은 인체, 국가체제, 천체 등과 같은 우주의 여러 영역들 내지는 그 안의 다양한 실체들 사 이의 우주적 감응을 전제로 하는데, 즉 서로 감응하는 실체들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서로 같은 부류이며, 이 로 인해 특정한 측면에서 서로 간에 감응의 관계가 존 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상수학 적 사유체계가 정립되고 그것이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 치에 놓였던 漢代에 들어 『淮南子』, 『春秋繁露』,
『黃帝內經』, 『白虎通義』 등의 문헌들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감응 개념이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체계
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漢代의 우주론에서는
사회적, 지적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인간과 우주 사이
의 상관관계가 철학적으로 체계화되기까지에 이르렀
다. 예를 들어 班固가 『白虎通義』에서 인간 통치의
정치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상수학적 상관관계를
적용했던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런 면에서 五行說
역시 그 사유방식의 틀 안에서 핵심적인 구성요소로
자리잡았다. 漢代의 우주론은 여러 가지의 시간적 주
기 즉 계절적 주기나 인간사의 주기 등의 변화를 설명
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이 五行說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 五行說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변화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많은 면에서 견강부회함을 면하지 못하는 면이 컸다. 예를 들어 五行을 사계절 내지 네 방위와 대응 시키려 한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는데, 이처럼 4로 표현되는 분류개념과 五行의 5의 분류개념을 대응시키 는 문제는 실제로 漢代 우주론의 큰 난점이었다. 그래 서 대부분의 漢代 우주론은 五行에 대해 이를 주로 수 비학적인 방식으로 사계절과 연관시키면서 五行의 개 념을 새롭게 설정하였는데, 즉 五行 중 土의 위상을 특별하게 다루면서 土를 다른 네 개의 위상들과 구별 하여 물리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놓았 던 것이다. 특히 班固는 『白虎通義』에서 土와 관련 하여 수비학적으로 대칭을 이루도록 五行의 또 다른 배열방식을 제시하였는데, 이 또한 土를 다른 위상들 에 비해 우주론적으로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방 식이었다. 즉 木․火․金․水가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土 가 필요하다는 원리 하에 사계절의 기간에서 각각 18 일씩을 빼 土에 배당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18×4=72, 72×5=360 이 되기 때문에 1년의 날수가 五 行 에 똑같이 배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방식도 1년 의 날 수 중의 나머지 5와 1/4일을 설명하는 데에는 실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白虎通義』에 서 처음 제시되고 唐代의 대학자 孔穎達에 의해 계승 된 이런 수비학적 방식은 4단위의 분류와 5단위의 분 류를 자연스럽게 대응시키는 문제 중에서 가장 만족스 러운 해결책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漢代 이후에도 사 계절을 五行과 대응시키는 문제는 계속해서 또 다른 방식으로 강구되었다.
한편 漢代 우주론의 상관적 사유체계에 있어 가장 두 드러진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漢代 역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상수학적 역학체계이다. 특히 孟喜, 京房에 의해 체계화된 卦氣說은 漢代 상수역학의 주류를 형성 한 것으로서, 易의 형상인 卦와 曆法의 주기들 사이에 상호감응의 관계가 있다는 수비학적 관념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漢代의 상수역학은 한마디로 말해 역학을 음양오행화한 성격의 것이었는데, 역학이 본래 『周 易』 古經 의 占筮體例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형성, 발 전된 것이라는 역학 본래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漢代 의 상수역학은 「易傳」에서 비록 占筮의 형이상학적 哲理 를 당시의 새로운 天道觀과 결합하여 占法의 이론 적 구조를 밝혔지만 실제적 조작과정을 거치는 筮法에 있어서는 아직 체계화된 방법이 형성되지는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당시의 새로운 天道觀 이란 고대사상의 최고범주였던 ‘天’의 개념이 외재 적, 절대적, 불가해한 神性의 실체로부터 점차 내재적 구조를 지니며 만물을 안고서 특정한 방식으로 체현하 는 궁극적 실재라는 개념으로 바뀌면서 실제적인 天道
의 이해가 더욱 天道의 자연변화규율에 대한 인식과 파악에 기반을 두게 된 것을 말한다. 이런 기초 위에 서 본래 神意를 헤아리는 데 쓰였던 卜筮는 점차 이성 적 인식을 따르게 되었고, 天人之間의 교통에 있어 모 두가 공유하는 이론적 기초에 의한 방법 즉 새로운 점 술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漢代의 상수역학 은 『易經』의 卦의 순서구조에 변화를 주고 여기에 律曆之學 을 더하여 陰陽之氣의 변화에 기초하여 陰陽 五行 의 구조적 변화를 헤아림으로써 ‘一陰一陽’의 易道(天道) 를 체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孟 喜, 京房 의 卦氣說은 그 영향이 가장 큰데, 卦氣說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天文曆法, 陰陽五行, 人事災異의 占測 을 일체로 하는 역학과 점술의 통일적 체계를 이 룩했다는 것이다. 특히 상관적 사유체계들의 가장 주 요한 목적이 인간의 몸, 국가체제, 지리적 통치구역과 같은 인간세계의 여러 측면들을 당시에 시간과 공간의 근본적인 질서를 바라보는 매개체였던 천문학적 하늘 의 구조와 상수, 그리고 주기들로 표현된 우주의 패턴 과 체계적으로 연관짓는 것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卦 氣說 은 漢代 상수역학의 핵심적인 사유가 잘 반영된 것이었다. 초기의 卦氣說은 제일 먼저 西漢代의 孟喜 의 『孟氏周易章句』(佚)에 보인다고 한다. 즉 『新唐 書․曆書』 에 의하면 十二月卦가 『孟氏章句』에 나온 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孟喜의 卦氣說의 핵심적 내용은 陰陽之氣의 消長으로 『周易』을 해석하고,
『周易』 의 卦象으로 1년 절기의 변화를 해석하면서 이로써 人事의 길흉을 추측하는 것이다. 陰陽의 消長 과 사계절의 寒暑의 변화의 내재적 관계에 대해서는 漢代 에 이미 상당한 인식이 쌓여 있는 상태였고, 아울 러 曆法 가운데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曆法은 천 지운행의 도와 관계가 가장 밀접한 전문적인 지식계통 으로서, 陰陽五行의 사상이 자연의 변화를 헤아리는 기본적 이론으로 자리하였던 시대에 曆法의 수리적 모 형은 陰陽五行적인 해석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이처 럼 曆法과 陰陽五行이론이 서로 융합하는 과정에서 曆 法 의 수리적 모형은 陰陽五行의 수량화에 가장 합리적 인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卦氣說은 天文 曆法 의 지식이 융합된 일종의 새로운 상수이론인데, 이는 상수역학의 두 기반인 卦象과 蓍數의 外延에 유 효한 것이었고, 易道를 관념적인 것으로부터 주기적인 천지운행과정의 구조적 도식에 기반을 두도록 변화시 켰다. 이로부터 通天의 수단으로서의 易占은 비로소 一事一應 의 具象적인 분석으로부터 구조화된 형태로의
‘道 의 數理적 분석’으로 발전한 것이다. 孟喜의 설
은 후에 京房에 의해 더욱 발전되는데, 京房 역시 陰
陽 의 두 기운의 승강변화를 卦爻象의 변역의 근본원인
으로 여겼다. 또한 이후 卦氣說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爻辰, 納甲 등의 설 역시 실질적으로 모두 易道의 구 조를 陰陽五行化시키는 것이었다. 京房은 八卦 및 六 十四卦 를 세계가 운행하는 기본모형으로 보고 세계가 변화하는 기본적 법칙인 陰陽二氣의 운행과 五行之氣 의 生克이 『周易』의 八卦, 六十四卦, 384爻 가운데 표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는 西漢代 이래의 자연철 학을 더욱 체계화한 것으로서, 비록 京房은 『周易』
의 筮法을 占候之術로 끌어들여 天人感應의 다소 의도 적인 사고를 뒷받침했지만, 그가 제시한 상수모형은 후대의 철학자들이 세계변화의 보편적 모형을 탐색하 는 데 대단한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한편으로 京房 등과는 약간 다른 노선이기는 하지만 揚雄 역시 易으 로부터 추론된 상징적인 수비학적 체계를 천문학의 상 수들과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 다. 그의 『太玄經』은 이런 의도에서 저술된 것으로 서, 卦氣說과 納甲說 등에 기반한 수비학적 조작보다 더욱 정교한 계산들을 담고 있었으며 그 체계는 宋代 의 司馬光 같은 후대의 사상가들에게 이어졌다.
이후 孟喜, 京房의 상수이론은 더욱 발전하여 최종적 으로 『易緯』에서 종합되었다. 『易緯』는 漢代에 經 書 를 陰陽五行적으로 해석했던 緯書의 일부분으로서, 언어의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易緯』는 「易傳」에 서 易을 해석하는 형식을 모방하는 면이 많았다. 그러 나 일부 다른 각도에서 『周易』을 해석하는 면이 있 었는데, 즉 그 이론적 기초가 주로 「易傳」, 孟喜와 京房 의 易學사상 및 今文經學의 神學目的論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天人之道를 점험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 로 하면서 도식구조를 기본형식으로 하는 상수점술이 론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이론들은 여러 구조적 모형 을 낳았는데, 四正四維說, 六日七分說, 九宮數說, 九卦 主歲術 등이 그것이다. 『易緯』에서는 八卦를 四正四 維, 太一九宮, 節氣, 占星 등과 결합시켜 八卦卦氣의 점술을 만들었고, 六十四卦를 1년 중의 매달, 절기와 결합시켜 卦氣 및 風雨寒暑를 헤아리는 점술을 만들었 다. 이와 같이 『易緯』 역시 「易傳」 중의 새로운 天道 에 기반을 두고 六十四卦를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되도록 漢代에 유행하던 天文曆法 등의 測天之學과 결 합시킨 것이다. 이후 鄭玄, 荀爽, 虞翻 등이 역학을 깊 이 연구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달리 새로운 것은 없었다 고 할 수 있다. 이는 『易緯』에서 극치에 이른 天道 의 도식적 구조가 역학 내지는 전체적인 사상문화에서 점차 구조화됨으로써 일종의 공식적인 사상적 배경으 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록 漢代 이후 魏晋 시대에 이르러 玄學의 흥기로 상수역학이 퇴조하면서 易道 의 이념적 건설이 형식으로부터 내용 즉 본체의 문제로 복귀하는 면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이후에도 여 전히 역학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漢代 상수학의 사상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五行 체계가 그러했듯이 상수역학의 체계 안에서도 易의 내 용을 다른 범주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 었으며 다소 의도적인 경우가 많았다고 볼 수 있다.
漢代 우주론은 易의 형상과 하늘의 형상이 상호 대응 한다는 관념을 바탕으로 易의 형상인 卦의 조작으로부 터 달의 수라든가 1년의 날수와 같은 상수뿐만 아니라 천문학적 상수까지도 추론해 내었는데, 예를 들어 윤 달의 주기 19와 같은 경우 19라는 숫자는 「繫辭傳」
에서 주어진 음수 10과 양수 9의 합이었다. 또한 漢代 의 저명한 학자들인 孔安國(B.C.156-B.C.74), 劉歆 (B.C.46-A.D.23), 馬融(79-166) 등은 河圖를 『周易』의 八卦 와 연관지었고 洛書는 『書經․洪範』의 九疇와 연 관지었으며, 이와 같은 연관관계를 통해 漢代의 학자 들은 河圖와 洛書의 기원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는 열 쇠가 가장 숭배받는 유가의 두 경전에 있음을 피력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상관적, 상수학적 사유체계는 漢代 이후 로 다소 쇠퇴의 길을 걷기도 하였으나 宋代에 周敦頤, 邵雍 등과 같은 신유학자들에 의해 다시금 圖書之學과 先天易學 등의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되었으며, 이는 고대의 사유체계의 전통을 다시 강화하면서 그 이후의 사상계에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3. 明末淸初의 비판적 우주론과 易哲學
1) 전통적 우주론에 대한 회의
- 엄격한 경계의 획정에 대한 비판
상술한 고대로부터의 상수학적, 상관적 사유체계의 기본개념들은 후대에 점차 비판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 비판이 많은 수의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직접적으 로 행해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서였다. 그러 나 이와 같은 비판적 논의는 사실상 그 사유체계가 정 립된 시기인 後漢代부터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 다. 예를 들어 王充은 五行의 위상이 相生과 相克의 원리에 따라 순환한다는 믿음을 비판했는데, 이는 우 주적 氣가 단일하며 다섯 가지로 분리될 수 없다는 생 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후 南北朝시기의 王弼도 상 수학적 역학을 바탕으로 한 우주론을 부정한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후 상수학적 사유체계에 기반한 우주론이
가장 큰 비판에 직면했던 것은 새롭게 발전해 가는 천
문학 지식과 기존의 우주론상의 개념의 괴리에 의한
것이었다. 천문학 지식과 우주론적 개념 사이의 괴리
는 이미 일찍이 漢代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漢代의 曆算家들은 물리적 천체의 운 동과 주기가 수비학적으로 구성된 간단한 순환적 모델 을 엄밀히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 이다. 천체운동과 천문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한 복잡한 모델들이 표면적으로 무력해지자 결국 後漢代 의 曆算家들은 우주 내에서의 불가사의한 사건이나 예 측할 수 없는 변칙들이 영구적인 曆法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曆法상의 계산의 부정확함 은 曆算家의 기술부족이라기보다는 예측할 수 없이 변 화하는 우주적 패턴 자체의 본성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曆法과 실제의 우주 사이의 이러한 불일 치는 처음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나중에 부정확함 이 드러날 때에는 그 오차가 상당히 누적되어 커졌을 때이다. 이로 인해 改曆의 필요가 대두되는데, 그 과정 에서는 천문상수와 주기들을 산출하기 위해 사용되었 던 이전의 상관적 사유의 수비학을 그대로 활용할 수 는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수비학적 원리를 포기하고 예전의 마지막 改曆 이후에 계산치와 관측치 사이에 벌어진 오차비율을 경험적으로 산출하는 것이 필요하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漢代 이후로 曆算家들은 점점 曆法체계는 천체운동을 실제 그대로 반영할 수 없으며 천체운동에 대한 인위적인 근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우주에는 다양한 실체들 사이에 규칙성, 평형, 그리고 조화 등이 구현되고 있다는 생각을 견지했던 漢代 우주론자들의 세계상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이처럼 漢代의 사상가들이 그들의 우주론적 도식을 당시의 천문역법 지식과 융합하려 하고, 동시에 漢代 의 曆算家들도 우주론적 기초에 기반을 둔 수비학을 참고하여 曆法의 상수와 주기 계산들을 정당화하려 했 던 노력은 漢代 이후로 천문학이 발전함에 따라 그러 한 지식과 계산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이 점차 밝혀 지게 되었다. 천문학의 진보는 논리적으로 漢代 우주 론에 대한 비판을 낳았으며, 아니면 적어도 후대의 우 주론자들과 曆算家들로 하여금 새로운 천문학 지식과 부합하도록 정형화된 우주론을 수정하도록 하였다. 그 러나 漢代 이후의 曆算家들은 관찰에 의해 천체운동의 불규칙성을 발견했으면서도 종종 漢代 우주론자들만큼 이나 거리낌없이 기존의 우주론을 끌어안았다. 그들은 경험적 관찰에 대한 발견을 통해 과거의 정형화된 우 주론을 본격적으로 비판할 만한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 다. 이 점은 송대에 들어 歐陽修(1007-1070)나 蘇洵 (1009-1066) 같은 학자들에 의해 漢代 우주론의 근본양 식이 매우 직접적으로 공격받았을 때도 결국 마찬가지 였는데, 당시의 학자들은 특히 문헌학적인 면에 있어 고전의 핵심적인 내용을 고대 이후로 흘러들어간 이질 적인 것들과 명확하게 구분해 낼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같은 시대에 일어난 신유학의 등장은 전통적 우주론의 기본적인 교의들을 재확인해 주었으며, 이러한 경향이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지니 고 전파되었다. 기존의 우주론에 대한 충분한 수정은 17 세기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明末淸初 의 시기는 기존의 전통적인 우주론이 본격적 으로 비판에 직면하면서 실질적인 수정이 가해진 시기 로서, 天文曆算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17세기의 학자 들은 종래의 曆法의 상수와 주기가 상수역학에 근거해 도출되었던 것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들은 역사적으 로 자주 改曆이 이루어지고 또한 天文曆算이 퇴보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종래의 전통적인 曆法 계산이 易의 형상과 律管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던 사실에서 찾았다.
즉 그들은 상수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조화와 감응의
질서를 추구했던 전통적인 천문사상을 벗어나서 과학
지식으로서의 天文曆法을 중시하는 경험적 학풍을 좋
았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청대의 천문학적 사고에서
자주 거론되었던 주제로 주목할 만 한 점은 불확정성
을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인식하고 또한
그에 상응하는 부정확성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식체
계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관찰을 열심히 하
고 계산을 정확하게 해도 천체운행의 변칙적인 현상은
결국 계산치와 실제 현상 사이의 불일치를 낳는다. 결
국 영원한 천문학 체계의 완성은 요원한 희망일 뿐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청
대 초기의 사상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청대 초기의
학자들이 천문학적 변칙들에 대한 인지에서 그치지 않
고 그로부터 우주론적 결론들을 도출했던 것이다. 즉
청대의 천문학자들이 천문학적 변칙과 관측의 오류로
부터 추론해 낸 우주론적 관점은 천문역산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예측과 현상과의 미세한 오차는 항상
존재할 것이며, 그러한 오차는 더욱 커져 결국엔 改曆
을 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
측과 실제 현상과의 불일치는 전적으로 인간의 한계
탓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현상
에는 정확한 측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불규칙
성과 아무리 노력해도 헤아릴 수 없는 측면이 존재하
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가 항상적으로 변하고 있음
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항상성의 개념에만 집
착한다면 세상의 질서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보게
되었다. 결국 많은 청대 학자들은 그들이 인지한 천문
학적 이변들을 불확정적인 것으로 규정했으며, 우주의
패턴은 본질적으로 불규칙적이고 심지어 예측할 수 없
는 방식으로 변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그들
은 그런 이변들을 예측가능한 질서로부터의 이탈로서
뿐 아니라 그것 자체를 우주의 근본적인 질서를 구성
하는 요소로 간주하였다. 이런 관점은 기존의 曆算家 들에 의해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는 하였으나 漢, 宋代 우주론자들의 세계관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明末淸初의 학자들이 제시했던 새로운 우주론 적 질서에서는 엄격하게 정의된 경계의 구획을 부정하 는 상당히 급진적인 내용이 포함될 수 있었다. 과거에 漢代 나 宋代의 학자들이 『周易』에 근거해 구성해 낸 우주론 체계는 종종 현실의 시간단위를 매우 엄밀하게 규정하곤 하였다. 邵雍이 『皇極經世書』에서 보인 元 會運世 의 시간단위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으며, 의학에서도 이런 면은 『內經』 이래로 특 히 運氣이론과 같은 경우에 있어 주된 학술적 전통이 었다. 그런데 16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일부 학자들이 그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이런 관점은 기존의 이론들이 담고 있었던 생성과 변화의 질서에 대한 개념들은 인정하면서도 그 질서를 불연속 적이고 엄격하게 정의된 시간적 변화의 단계로 계량화 시킨 것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자연의 변화가 일정한 질서를 보이는 한편으로 서서히 점진적 으로 그리고 불규칙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면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판적 관점을 지닌 초기 인물이었던 王 廷相 은 1년을 陰의 달과 陽의 달로 나누는 구도를 비 판하였는데, 이와 같은 구도는 단지 易의 象과 數로부 터 추론된 것일 뿐 실제적인 음양의 패턴을 연구하여 얻은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보았던 것이다. 明代 말 의 呂坤(1536-1618), 江永(1681-1762) 등도 이와 부합되 는 논의를 펼치면서 자연에는 엄밀한 시기구분이 존재 하지 않으며, 따라서 불연속적인 갑작스런 변화는 거 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王夫之 역시 陰 과 陽의 범주로 나누는 명확하고 엄밀한 비율의 획 정에 의문을 표하였는데, 그에게는 이분법적으로 나뉘 어 있는 거의 모든 우주론적 어휘들, 즉 天과 地, 理와 氣, 陰 과 陽 등이 서로 내적으로 얽혀 있어 어느 것 하나도 다른 대응물과 명확하게 구분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2) 明末淸初 시기의 象數學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