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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연구론총 16집> 신라 경애왕 죽음에 관련한 몇 가지 문제 - 박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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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 景哀王 죽음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기록을 중심으로

三國遺事

― ―

박순교1)

목 차

< >

머리말 .

비교

. 史記 遺事 史論

경애 경순왕조와

. 史記 遺事 金傅大王

견훤 열전과 후백제 견훤

. 史記 遺事

맺음말 .

국문초록

< >

경애왕 죽음을 두고 三國史記 三國遺事는 세 곳에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서술의 문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 까닭에는. 三國遺事만의 독특한 해석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어진다. 三國遺事 三國史記 사론에 나타나는 경애 경순 두 인물을 놓고 경애에게만 왕을 붙이고 있다 또 이전 차례나 있은 백고좌회의 전례, . , 6 를 모두 생략했던 三國遺事가 유독 경애왕의 백고좌회만, 月日까지 밝혀 特記하고 있다 결국. 三國遺事는 경애왕의 죽음을 주연과 연관지은 三國史記 史論에 회의적 입장이었다 불교에 대해 호도 폄훼한. , 三國史記 사론을 포폄없이 인용한 것은 불교 찬양을 염두에 둔 三國遺事로선 일대 파격이며 그 이면에는, 三國史記 사론 전체 에 대한 거부감이 담겨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三國遺事는 경애왕 치세의 내용 특히 죽음과 관련한 부분을 모두 경애왕 편, 이 아닌 김부편에 설정하여 죽음의 원인이 김부와 연결됨을 시사한 것은 물론 경애왕, 주검에 대한 김부의 장례마저도 의도적으로 삭제하여 행위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 다 또한. 三國遺事 후백제 견훤조에선 근품성 공격 직후 곧 견훤의 대공세 초반에, 이미 경애왕이 고려에 대한 구원 요청을 하였음을 밝혀 경애왕 죽음이 왕건의 방관과 연관이 있으며 시림 이라는 회합 지점을 제시하여 신라 내 견훤의 내응 세력이 김씨, ‘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특임연구원.

(2)

세력의 일부임을 드러내고 있다

핵심어

< >

경애왕 위응 경순왕 김부 견훤 왕건 신덕왕 경명왕 백고좌회 시림 해목령 게눈, , , , , , , , , , , 바위 포석정 유상곡수 사적 호 고적 호, 1 , 1

머리말 .

일 조선의 대 임금 세종은 술의 병폐를 겨냥해

1433 10 28 , 4 亡國

이라 규정했다.

主因 1) 언필칭 항간에서 聖君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이 내린 에는 옛날 신라가, “ 에서 하고 백제가, 에서 멸망한

戒酒敎書 鮑石亭 落花巖

것이 술 때문이 아닌 것이 없다 라는 일갈과 술이야말로 패가망신 망국의 , “ , 첩경이며 나아가 그 장본인이 다름 아닌 신라 경애왕과 백제 의자왕 이라는, "

정죄로 채워져 있다 이로써 의자왕은 차치하더라도 경애왕은 최후의 신라왕. , 이 아님에도亡國의 왕 이란 사슬에 묶이게 되었다 .

저간에 시인묵객들은 다투어 포석정의 酒宴을 힐난하였고 경애왕 자신의, 죽음 혹은 신라 멸망의 원인과 결부지어 왔다, .2) 특히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이후 나라를 벼랑의 위기로 몰고 가 망치게 한 포석정 사건 의 면모를 더욱, 생생히 들춰내고자 포석정을 고적 호 로 삼아 회한의 신라 역사를 뚜렷이, 1 부각시켰다.3)

1) 조선왕조실록 세종151028 .

2) 김영숙,詠史詩의 신라멸망기'鮑石亭宴 史話' 수용 양상과 의미, 대동한문학회지22, 2008, 12

3) 조선의 멸망 원인을 당쟁에서 찾은 일본은 신라 멸망의 가닥을 포석정 사건에서 찾으, 려 했다고 여겨진다 그 이면에는 적이 쳐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과 중신들이. 질탕하게 퍼마시고 놀았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다.’

는 패배주의를 조선인들에게 은연 중 심어주기 위해 이 비운의 장소를 정비하고 복원 한 뒤 고적 호로 지정했다 조유전 이기환1 ( , , 2004,한국사 미스테리, 황금부엉이, p.

지금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사적 호로 포장된 포석정을 찾아 뒤엉킨 천년 왕

148). 1

조의 씁쓸한 종말을 감상하려는 일본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히 이어지고 있음은 그냥 지 나칠 일이 아니며,國格과도 심히 관계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

이런 인식은 초 중 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재ㆍ ㆍ 4), 심지어는 대학 교 5)뿐만 아니라 학위논문6), 대백과사전7)에조차 포석정 사건의 묘사는 다르 지 않았다 경애왕이 흥청망청 주연을 베풀었고 그런 와중 후백제 견훤에게. 피살되었다는 三國史記의 기록은 서울 용산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의 그림 에 곁들여져 일반에게 상시 게시되었음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경애왕 위응, 이야말로 신라의 쇠락을 자초한 무책임한 왕이란 질타가 공공연히 언론을 장 식하기도 했다.8) KBS 드라마 태조 왕건(2001.9.30)에선 경애왕이 견, 훤이 거느린 叛軍을 지척에 두고 질펀한 酒宴을 벌이던 중 王都가 함락되었 으며 왕 자신은 온갖 수모 끝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것이 방영되었다 이, . KBS는 박씨 대종회를 위시한一門의 거센 비난에 휩싸여 사과 성명을 발 9)하는 난맥상을 연출했다.

한데927년의 전체 전황의 흐름을 살펴보면 이러한 일련의 해석에는 의문, 이 있다 곧. 927년 정월~8월까지 왕건에 의한空前의 대공세가 개시되었으 며 이에는 경애왕의 적극적 제안, 10)과 조장11), 개입12)이 뒤따랐다. 927

4) 일례로 지난 차7 (2002~2010발행 교육인적자원부 국정 중학교 국사교과서 국사편찬) ( 위원회 국정도서 편찬위원회 발행-<교과서 박물관 및 우리 역사넷 자료 제공>) 일신라와 발해 단원의P. 82왼쪽 아래에는<포석정 터>題下에 포석정의 여름 사, ‘ 진 들을 번갈아 싣고 확인된 종류만 종 ( 3 ), “신라 경애왕이 향연 중에 후백제의 견훤에 게 습격을 받은 곳이다 라고 서술함으로써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의 청소년을 대상으.” , 로 경애왕의 주연을 기정사실화하여傳習하였다 더욱 문제는 견훤의 포석정 습격이 음. 11월에 있었음에도 위의 국정 교과서 및 그 뒤를 이은 검인정 교과서에서는 공히, 한겨울 포석정 사진 을 게재하지 않음으로써 학생들이 경애왕의 에 대해 가질 수

, 酒宴

있는 합리적 의심의 기회마저 철저히 박탈했다.

5) 경애왕대에도 정사는 돌보지 않고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며 놀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 이하기까지 하였다.” (전수병 외, 주제별로 본 한국역사,서경문화사, 2005, p 85.) 6) 신라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경애왕대 (924~927)에도 정사는 돌보지 않고 비빈 군

신들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잔치하고 놀다가 결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기까지 하였다.”

김갑동 나말 려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 , 1989, , . p. 10)

7) “927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궁궐을, 노략질하면서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갔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경애왕조).해방 이후 한국학 연구 성과를 집약했다고 자부하는 한국민족문화대 백과사전 에서조차 이러한 인식은 계승되고 있는 셈이다 연구의 저변 근간 역할을 한. , 다고 자처하는 대백과사전의 기술조차 이럴진대 향후 이런 인식의 확대 재생산은 불, 을 보듯 명백하다.

8) 김종성,신라 재앙의 날 박씨는 연락 두절 상태였다, . , 오마이뉴스, 2014.8 9)KBS,낮 시12 ,김종선PD의 사과 회견, 2001.11.3.

10) 경애왕이 사신을 보내 왕건에게 이르기를 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그와 화친해서는 안 될 것이오.(王聞之 使謂太祖曰 甄萱反覆多詐 不可和親, , .)”라고 하

(4)

여덟 달에 걸친 왕건의 도발 이면에는 경애왕의 충동 연합이 전제되었고, 13), 견훤이 이를 인지한 상태였기에 견훤의主敵이 왕건 경애왕이었을 것임은 의, 심의 여지가 없다.14) 경애왕이 견훤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분명해진 상황에 , 912월 사이 견훤은 강력한 대응을 이어갔고 급기야 예봉은 서라벌, 왕도를 향하였다.15)

치열한 후삼국 쟁패의 頂點에서 견훤의 포위망이 좁혀오고 일각일각 자신, 을 향해 복수의 칼날이 죄여드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경애왕이 주연에 빠져, 시종 흥청거렸다는 것은 해괴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포석정에서 주연을 열었. 다는 927년 음력 11월은 양력으론, 927 12월 일2 ~12 31일의 한겨울이 며 포석정은, 南山寒氣머금은谷風을 마주하는 야외에 있었다.16)

였다.(삼국사기 권12신라본기12경애왕 년2 11월조)

11) 경애왕이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견훤은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 ) 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한 번 북을 울려 진격해 위풍을 보인다. 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 (三國史記12 신라본기12 경애왕 년 월조3 4 , 高麗史권 세가 태조 년조1 1 9 )

12) 삼국사기 권12신라본기12경애왕 년 정월조4 .

13) 견훤과 왕건의 각축을 천착한 성과로는 다음이 참고가 된다 문경현. , 고려태조의 후 삼국통일 연구, 형설출판사, 1987, 고려사연구, 2000,경북대출판부에 재수록 문수.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통일과정연구, 성균관대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1. 권진철, 고려태조의 민족통합정책연구, 강원대 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7. 류영철,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연구,경인문화사, 2004.

14) 포석정 사건을927년 한 해의 전체적 상황 속에서 조감해야 할 필요성은 이미 본인이 제기한 바 있다. (“927년 후삼국의 미묘한 역학 관계에서 배태된 포석정 사건을 직전, 직후 상황의 연속선상에서 조감할 필요가 있다 왕건의 공세와 견훤의 반격 와중에. 학살 전투 전투가 발생했고 포석정 사건과 경애왕이 이

( ) , ,

品城 近巖城 公山 桐藪 古昌

긴박한 변전과 얽혀 있음이 주목된다 박순교.”( ,경애왕의 대내외 정책과 포석정 변란, 한국고대사연구회 제출 논문, 2007, PP. 1-2.)

15) 그간 궁예와 견훤은신라 정책에서 공통점이 있었고 신라는 고립당한 처지였다 그, . 러나 경애왕이 새로운 고려의 집권자 왕건과의 결속을 강화하였고 신라와 고려의 연대, 라는 전혀 새로운 전략 앞에서 무용을 앞세운 견훤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국. 金雄廉과 경애왕이 왕건에게 접근할수록 견훤은 더욱 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신라에 강경책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927년 예순의 나이에 견훤이 마치 환갑잔치를 벌이기라도 하듯 군사를 일으켜 상주 영천을 지나 서라벌을 접수한 다음 경애왕을 죽, 이고 몸소 왕비를 겁간하고 병사를 풀어 방화와 노략을 일삼은 것은 신라와 연맹이 될 수 없는 간극을 실감시킨 사건이었다 동시에 궁예가 살아있었다면 저질렀을 법한 이. 해괴한 사건은 경애왕의 친 고려 정책의 결과 그의 자조와 자괴(自愧)가 빚은 하나의 참극이었으며 견훤이 경애왕을 더 이상 화해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대상으로 본 뚜렷, 한 방증이다 박순교.( , 대구 경북의 혁신 인물 ,견훤,경상북도청, 2007.)

16) 지금까지927년 포석정 사건을 직 간접적으로 다룬 논문으로는 다음이 있다 .申虎澈, 신라의 멸망과 견훤, 충북사학2,1989 ; 후백제 견훤정권 연구, 曺凡煥, 신라말

(5)

경애왕 죽음을 둘러싼 의혹의 원천에는三國史記가 자리하고 있다. 三國 는 ‘

史記 荒樂17), ‘燕衎18), ‘出遊19), ‘ ’20), ‘宴娛21)’, ‘置酒22)’, ‘娛樂23) 등으로 압축되는 일련의 문구들을 잇달아 사용함으로써 경애왕의 죽음을 철, 저히 최후의 酒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못 박았다 이러한 기록들에. 대해 의문이 증폭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후대에 쓰인, 三國遺事의 인식은 어떠했으며 어떤 형태로 사실을 조합하고 편집하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 없다 경애왕의 죽음 곧 단일한 사건을 놓고. , , 三國遺事

기록이 각기 존재하고 있다면 양자 간, , 와 같은 차이를

三國史記 相似 相異

파악 분석할 필요성이 대두하는 셈이다, . 三國遺事가 시기상 三國史記 다 후대에 간행되었고 三國史記 기록을 저본으로 서술했던 점에서 경애왕, 죽음을 둘러싸고 드러난 양자 간 자구와 편집의 미묘한 차이 속에는 三國遺 만의 뚜렷한 함의 해석 나아가 포폄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포석정, , .

에 얽힌 경애왕 죽음에 관한 사실 을 수렴하는 동시에 三國遺事가 어떤 해 석을 지녔는지의 편린을 얻을 일단일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경애왕 죽음을. 놓고 드러나는 三國史記 三國遺事, 양자의 차이를 살펴보고, 927년 당 시 상황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지逐次的으로 고찰하려 한다.

비교

. 史記 遺事 史論

박씨왕의 등장과 그 정치적 성격, 역사학보129, 1991. 신라말 경순왕의 고려 귀부 이기백고희기념논총 신라말 화랑 세력과 왕위계승 효종과 김부의 활동을

, , 1994. -

중심으로- , 사학연구57, 1999. 강돈구,포석정의 종교사적 이해, 한국사상사학4 합집 정우락 포석정 혹은 신라의 빛과 그늘 남명원보 이명식

5 , 1993. , , 30, 2003. ,

신라말 박씨왕대의 전개와 몰락, 대구사학83, 2006.

17) 三國史記 권12敬順王 史論. 18) 三國史記 권12敬順王 史論. 19) 三國史記 권12敬順王 史論.

20) 三國史記 12신라본기12경애왕 년조4 . 21) 三國史記 12신라본기12경애왕 년조4 . 22) 三國史記 50열전10견훤.

23) 三國史記 50열전10견훤.

(6)

경애왕의 죽음에 관한 한, 三國史記에서 경애왕의 죽음을 논한 것으로는 경애왕조 경순왕 논왈조 열전 견훤조 등 세 곳이 있다

1) , 2) , 3) . 三國遺事

에선 全篇에 걸쳐 세 곳의 史片이 있다 순서상으로. 1) 김부 대왕조, 2) 부 대왕 항목 말미에 붙어있는史論, 3) 후백제 견훤조가 그에 해당한다 대. 三國遺事 三國史記를 저본으로 하고 있음이 드러나며 양자는 상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三國遺事 경애왕조全文은 다음 과 같다.

가) A)卽位. B)同光二年甲辰二月十九日 皇龍寺說百座說經 兼飯禪僧三百. . .

. .

大王親行香致供 此百座通說禪敎之始

24)

위에서 三國遺事)-A)는 경애왕이 동광 년 곧2 , 924년 음력 월2 19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강설한 것과 선승 백을 함께 초치 공양하고 겸하, 3 , , 여 친행 치공했음을 얘기하고 있다 나아가. 三國遺事는 이러한 행위가 선종 과 교종 승려를 통합하여 행한 백고좌회의 효시라고 밝히고 있다. 三國史記 에 의하면 경애왕 이전 백고좌회의 강설은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6 .25) 한데

에는 이전 차례에 걸친 백고좌회는 아예 생략한 채 경애왕의 백고6 三國遺事

좌회만 三國遺事에 특기되어 있으며 구체적 월일까지 이례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경애왕 위응의 백고좌회에 한하여만 높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 이 실증된다.

더욱 이상한 것은 가)-B) 924 (同光) 219일의 시점이다 이는 경명. 왕 재위 기간(917년 월8 924년 월 으로8 ) 26), 당시의 왕은 경애왕 위응일 수 없다 그렇다면 위. B)의 기록은 왕에 버금가는 존재 곧, 世弟와 같은 왕 위 계승자로서 벌인 施政 행위의 연장선에서A)의 즉위와는 구별하여 B) 내용을 소급 기록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三國遺事가 구체적 연 월일을 포함한 기록을 남기면서 경애왕의 즉위 전후의 일을 혼동했을 리 없

24) 三國遺事 기이 경애왕조2 .

25) 이전의 백고좌회는 三國史記를 전거로 할 때 진평왕, 35 (613), 선덕여왕 5 헌강왕 년 헌강왕 정강왕 년 진성여왕 즉위년 (636), 2 (876), 12 (886), 2 (887), (887) 등 차례에 걸쳐 행해졌으며 주로 치병과 호국이 주된 목적이었다6 , .

26) 三國史記 12신덕경명왕조 .

(7)

다 그렇다면. 三國遺事 A) B)기록을 구별하되, A)의 즉위를 기록하고 이전에 있은B)의 일을 시간을 역행하여 補記한 셈이 된다.27) 또한A)의 즉 위 사실만을 가지고 하나의 독립된을 만들 수 없었기에, 三國遺事경애왕 편은 오직B)의 내용을 대서특필하기 위해 의도된 편찬임이 분명하다28).

가 경애왕에 대해 지극히 호의적인 사실은 가 인용한

三國遺事 三國遺事

사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29) 三國遺事 三國史記 전체( )史 論31개 중 개만을 선택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처럼 개의 사론 중에서

3 . 三國史記 31

굳이 개만 인용한 이면에는3 三國遺事만의 깊은 의도와 해석이 작용했다고 봄이 옳으리라 여겨진다30).

에 인용된 사론 중 개의 사론이 신라 말에 집중되어 있으며2 , 三國遺事

이에는 경애왕과 관련한 사론 역시 포함되어 있다 아래에서 경애왕의 죽음을. 다룬 三國史記 三國遺事의 사론을 적시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나-1) [A]論曰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 , ,

. , .

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 之實事

[B]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 輔行, , . , .

, . ,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27) 어쩌면 三國遺事가 백고좌회가 경애왕 즉위 이후 이루어진 일로 생각하였고 이러한 착간이A) 다음B)의 내용으로 나타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예외적으로. 정확히 월일을 기재한 기록인 만큼, 924년 월에 해당하는9 A)924년 월2 19일에 해 당하는B)는 별개의 내용으로서 상호 구별을 기했다고 봐야 한다 결국, . 三國遺事 는 경애왕 치세의 내용이 아닌 만큼 경애왕 치세의 일은 전부 공백으로 비워둔 셈

B) ,

이 된다 그리고 경애왕 치세의 내용들을 하나같이. 三國遺事 김부대왕조에 삽입되어 있다 이는 경애왕의 죽음을 담고 있는 포석정 사건과 김부와의 연관성을 함축하는 한. 단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28) 가)-B가 경애왕 즉위 이전의 일이므로 가, )-A의 즉위 이후 경애왕 치세의 내용은 공백인 셈이 된다 즉위 이전의 사실을 넣어 독립된 편 경애왕 을 설정한 것은 경애왕. ( ) 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하대의 왕 상당수가. 三國遺事에서는 생략되 어 있음을 생각할 때 이러한 상정은 전혀 억단은 아니다.

29) 경애왕은 순식 지배하에 있던 명주의 고승開淸을 초치하기도 했고 지장선원 낭원대( 사 오진탑비),또한 후백제 견훤의 세력권 하에 있던智回惠居국사를 서라벌 분황 사에 초치 갈양사 혜거국사비 하기도 하는 등 일련의 호불 정책을 구사했다 이러한( ) . 제반 사정이 三國遺事로 하여금 더욱 경애왕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게 한 것인 지도 알 수 없다.

30) 三國史記 전체 사론31개 중, 稱元法을 다루고 있는 三國史記 권 남해차차웅조1 의 사론 신라사를 총평하는, 三國史記 12경순왕 년 궁예 견훤의9 , 無道不仁 책하는 三國史記 권 의 궁예 견훤전의 사론만이31 三國遺事에 실려 있다.

(8)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 , . , ,

, , .” ,

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 娠賢肇邦

, . ,

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C]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 ,

, , , , , ,

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而宿衛 入學而②

, , , . ,

講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

, , .

句麗 取其地郡縣之 可謂盛矣

[D]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 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 , , , ,

, , ?

農浸小 而國家日衰 則幾何其不亂且亡也哉

[E] 於是時 也 景哀 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 出遊鮑石亭 置酒燕 , , , ,

, , , .

衎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韓擒虎 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 之歸命太

, , . , , ,

祖 雖非獲已 亦可 嘉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

, . , , , ,

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 . , , ,

有德於生民 甚大 昔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遠

. , , , , ,

矣 我太祖 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 卽寶位 此後繼統

, , ( 12 )

者 皆其子孫 豈非陰德 之報者歟 三國史記 敬順王

나-2) [A]史論曰 新羅朴氏昔氏 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 . . .

. . .

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 實事 생략

[B]

[C]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 . . . .

. . , . , [ ] .

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 而 宿衛 入

. . . . .

學而 誦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

. . .

百濟高句麗 取其地郡縣之 可謂盛矣

[D]然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 . , .

. . .

農浸小 而國家日衰 幾何其不亂且亡也哉

[E] 於是時.景哀 王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出遊鮑石亭 置酒燕衛 . . .

. , . . .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韓擒虎 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 之歸命太祖

. . . . .

雖非獲已 亦可 佳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 ( )家 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 . . , .

, . . . ,

廷 有德於生民甚大 昔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

. . . . .

遠矣 我太祖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顯宗自新羅外孫卽寶位 此後繼統者

. .

皆其子孫 豈非陰德 也歟

[F] 新羅旣納土國除 阿干神會 罷外署還 見都城離潰 有黍離離嘆. , . . . 기이

. .( 2 )

乃作歌 歌亡未詳 三國遺事 金傅大王

사론 나( -1) 사론 나( -2)은 총 11곳을 제외하곤

三國史記 三國遺事

동일하다 기본 골격상 이는. , 三國遺事 三國史記 사론을 전재했다고 볼

(9)

근거가 된다 여기서 차이가 확인되는. 11곳에 대한 천착이 새삼 필요한데 이, 에서 三國遺事 三國史記 기록에 대한 나름의 포폄을 찾을 수 있을 거 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선. 三國史記에서論曰로 시작하는 김부식의 사론 三國遺事에서 史論曰 史記에서 논하기를 이라는 의미로 ‘ ’자가 따로 부기되어 있다 나머지. 10곳에 보이는 양자의 차이를 일별 표로 작성하, 면 다음과 같다.

위의 내용 중 주목되는 것은 ⑤ ⑥, 이다. 을 보면 三國史記에서 분명 경애 ’, ‘경순 이라고만 명기되어 있음에도 , 三國遺事 에서 경애 ’, 에서는 경순 이라고 하여 엄격히 차별하고 있다 .31) 곧 경애만을 높여 특별히 왕을 부가하고 있는 셈인데 이는 모든 종류의, 三國遺事 판본에서 동일하다 결국. 三國遺事는 동일한 三國史記 사론을 전재하면서도 경애, 경순에 대해 엄격한 구별 또는 획정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 三國 가 경애왕에 대해 각별한 호의를 지니고 있다면 경애왕의 죽음에 대해, 遺事

서도 이전 기록과는 다른 접근 방법 내지는 인식의 틀을 보여줄 것이라 믿어

31) ① ③ ④ ⑦ ⑨ ⑩, , , , , 은 문맥,語義大同하다 나머지. ② ⑤ ⑥ ⑧ ⑪, , , , 에 대해서 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②의 경우 숙위학생이 당에서 스승의 입장으로 청중에게 강경했을 리 없어 스스로 외우고 익혔다는, 三國遺事의 송습이 학습자의 지위 상 옳 다고 여겨진다.

연번 내용 나( -1) 三國史記 내용 나( -2) 三國遺事

1 爲之實事. 爲實事.

2 講習 誦習

3 而奉浮屠之法 然而奉浮屠之法

4 於是時也 於是時

5 景哀加之以荒樂 景哀王加之以荒樂

6 若敬順歸命太祖 若敬順之歸命太祖

7 亦可嘉矣 亦可佳矣

8 則必覆其宗族 則必覆其 家 宗族( )

9 而顯宗自新羅外孫 顯宗自新羅外孫卽寶位

10 陰德之報者歟 陰德也歟

11 敬順王 金傅大王

(10)

진다.

이런 맥락에서 三國遺事 編名에선 三國史記 )-1 의 경순왕을 굳이 나)-2 에서 김부 대왕이라 하여 달리하고 있다 고래로 중국과 한국. 에선忌諱의 전통이 있었고역시 그런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

한데 연대상 앞선 전적을 인용하여 옮기면서 굳이 전술되어 있는 왕명을 빼 고 새로이 姓名 大王+ 으로 명명한 데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고 보인다32). 김부의 고려 귀부를 다룬에서도 김부의 종족 나( -1)이 가족 나( -2)로 되어 있다 가족이 종족보다 협의의 개념인 점에서 귀부 자체가 자신을 포함한 가. , 까운 혈족의 영달과 보신에 있었다고 볼 여지를 남기며 이 경우 김부의 행위, 신라적이며 신라왕의 범주에 넣기 힘든 존재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三國遺事 三國史記 사론을 인용하면서 나름의改書는 물론이 고 나아가 일정한 해석의 틀 속에서 경애왕김부와 관련한 글자를 달리 사용, 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다 또한 편집 체제에 있어. , 三國遺事 三國史

사론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더욱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나-1)으로 표기된 三國史記 사론은A, B, C, D, E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이 중. A는 박 석 김의, , 誕降 전설, B는 송에 체재할 때에 견문한 선도산 성모여신, C는 신라 중대 왕실의 찬양, D는 숭불의害毒에 따른 왕조 의 쇠락, E는 경애왕의 황락과 김부의 고려 귀부에 대한 찬양 등으로 정리된 다 이러한. 三國史記 사론은 나-2)로 표시되는 三國遺事에 선택적으로 인용되고 있는데 곧, A, C, D, E 三國遺事에서 재인용되고 있으나 유독 만은 생략되어 있다 는 나 사론을 나 의 사론으로 인용하

B . 三國遺事 -1) -2)

는 과정에서, B 仙桃山 관련 내용을 과감히 배제했다 심지어 나. -2)에서 배제된 B의 내용은 三國遺事에서 독립된 항목 곧 仙桃聖母隨喜佛事(감통 조로 설정 그 의미가 확대 부연되고 있다 요컨대 나 의 사론이 김부

7) , , . )-1

32) 경순왕은 고려 왕조에서加號한 것이다 그렇다면. 三國遺事에서 경순왕의 시호를 사 용하지 않고 김부의 이름에 왕을 붙인 데에는1) 경순왕이라는 시호는 고려에서 추존 한 것이기에 고려조에서 추존한 왕명으로는 신라 왕계에 넣을 수 없다는 인식, 2)신라 인에 의해 가호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부의 이름을 사용하여 신라 왕계에 편입하였고, 그렇다면 이것은 신라왕으로서의 정통성에 근본 약점이 있다고 본 인식3)견훤에 의 해 옹립된 김부는 권지국사(三國史記 12 경애왕 년조 였기에 정통 신라왕으로 인4 ) 정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11)

식의 견문에 입각한 선도산 성모에 관한斷想이라면, 三國遺事는 별도로 선 도산 성모조를 마련하여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선도산 성모의 의미 위상에 관, 해 나름의 서술과 판단을 보태고 있는 셈이다.

선도산 성모조의 구성은 크게 1)진평왕 때 라는

三國遺事 智惠 比丘尼

게 나타난 선도산 성모의 현몽(眞平王朝 而法事廢矣~ ), 2) 선도산 신모의 출 자와 중국 부황과의 서신 왕래 서연산의 유래, (神母本中國帝室之女 秩在群望~

경명왕의 선도산 신모의 대왕 책봉

), 3) ( ~

之上 第五十四景明王 因封爵大王

선도산 신모와 혁거세 알영과의 관계

), 4) , ( ~ ), 5)

其始到辰韓也 始知神驗

김부식이 入宋하여 선도산 신모의 화상을 견문한 일(又國史 文有娠賢肇邦之~

선도산 신모에 대한 일연의 찬 등의

), 6) ( ~ .)

今能施金奉佛 故謁金仙作玉皇

배열을 이루고 있다.33) 이렇듯 三國遺事는 선도산 성모조를 서술하며, )-1의 내용 외에 특히 위의 1), 3), 4), 6) 같은 내용을 추가하여 논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三國遺事 三國史記가 구명하지 못한 제반 사실에 대해 밝히고 있다 우선 선도산 신모의 이름을. 娑蘇라 구체적으로 밝혔으며, 선도산 신모의 아들에 대해서도 4)에서 혁거세와 알영과 잇는 한편 출자에, 서도 五行 12를 근거로 계림 백마 계룡 등을 추론 서쪽 중국과 잇고, , , 있다 이는 김부식이 신모의 아들이 언제 왕위에 올랐는지 알 수 없다 고 단.

33) 아래 원문을 위의 논지에 의해 단락으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6 . 1)眞平王朝 有比丘.

. . . . , . .

尼名智惠 多賢行 住安興寺 擬新修佛殿而力未也 夢一女仙風儀婥約 珠翠飾鬟 來慰曰

. . . . .

我是仙桃山神母也 喜汝欲修佛殿 願施金十斤以助之 宜取金於予座下 粧點主尊三像 壁

, , , .[ . , , ,

上繪五十三佛 六類聖衆 及諸天神 五岳神君 羅時五岳 謂東吐含山 南智異山 西雞龍

, , .] . . ,

北太伯 中父岳 亦云公山也 每春秋二季之十日 叢會善男善女 廣爲一切含靈 設占察法

.[ . . . . .]

會以爲恒規 本朝屈弗池龍 託夢於帝 請於靈鷲山長開藥師道場 平海途 其事亦同

. . . . . .

乃驚覺 率徒往神祠座下 堀得黃金一百六十兩 克就乃功 皆依神母所諭 其事唯存 而法

. 2) . . . . .

事廢矣 神母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得神仙之術 歸止海東 久而不還 父皇寄書繫

. . . . . .

足云 隨鳶所止爲家 蘇得書放鳶 飛到此山而止 遂來宅爲地仙 故名西鳶山 神母久據玆

. . . . . . 3)

山 鎭祐邦國 靈異甚多 有國已來 常爲三祀之一 秩在群望之上 第五十四景明王好使

. . . , . . .

鷹 嘗登此放鷹而失之 禱於神母曰 若得鷹 當封爵 俄而鷹飛來止机上 因封爵大王焉 4) 其始到辰韓也 生聖子爲東國始君 蓋赫居閼英二聖之所自也 故稱雞龍雞林白馬等 雞. . . .

. . . . . 5) . .

屬西故也 嘗使諸天仙織羅 緋染作朝衣 贈其夫 國人因此始知神驗 又國史 史臣曰

. . . . . . .

軾政和中 嘗奉使入宋 詣佑神館 有一堂 設女仙像 館伴學士王黼曰 此是貴國之神 公

. . . . . . .

知之乎 遂言曰 古有中國帝室之女 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祖 女爲地仙 長在仙桃山

. . . . .

此其像也 又大宋國使王襄到我朝 祭東神聖母 文有娠賢肇邦之句 今能施金奉佛 爲含生

, . . 6) . . .

開香火 作津梁 豈徒學長生而囿於溟濛者哉 讚曰 來宅西鳶幾十霜 招呼帝子織霓裳

. . (

長生未必無生異 故謁金仙作玉皇 三國遺事 感通 第七仙桃聖母隨喜佛事)

(12)

언했던 부분과 배치됨과 동시에 정확한 일연 자신의 견해를 여과 없이 드러, 낸 것이다 더불어 선도산 성모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로서. 1) 진평왕대 ‘智 와 관련한 사적 박씨 경명왕이 선도산 성모를 대왕으로 책봉한 사실

, 3)

등을添記하고 있다 결국 위의. 3) 4)를 종합하면, 三國遺事는 선도산 성 모가 박혁거세의母系, 경명왕에 의하여 대왕에被封되는 등 박씨 집단과 시, 종 긴밀한 관계하에 있음을 밝힌 셈이 된다.

일연이 선도산 성모와 박씨 집단의 관련을 유념했음은 다음에서 더욱 굳어 진다 아래 다. -1)에서 일연은 서술성모는 선도성모이며 혁거세와 알영의 출 생 역시 선도성모와 유관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다-1)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 盖鄕言也. . . . .[ .

. . . .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

. . . ]

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乃至雞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34)

이처럼 박씨와 관련있는 선도성모는 경명왕대 대왕에 추봉되었다 선도산. 성모가 경명왕에 의해 대왕에 책봉된 까닭이 단지 솔개의 귀환 으로 설명되 고 있으나 그것은 표면적 이유일 뿐 앞서 나라가 있은 이래 항상, , 三祀 으뜸이었다 는 사실에서 그간 존숭되어 오던 신모에 대한 공식적 追崇, 박씨 왕에 의한 가계의 존숭이자 세력 결집의 일환이라 비쳐진다 주목할 것은 경. 명왕대 정국 운영과 관련한 자료에서 뒷날 경애왕이 되는 위응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다-2) 元年 八月 拜王弟伊湌魏膺爲上大等 大阿湌裕廉爲侍中, , , .

35)

-2)에 의하면 917 ,년 위응은 신덕왕의 아들이자 동복형인 경명왕의 아, 우로서36) 경명왕 즉위 원년 상대등에 임명되고 있다. 53대 신덕왕은 49 헌강왕의 사위이자 52대 효공왕의 처남이라는 복잡한 역관계 하에서 아달라

34) 三國遺事 新羅始祖 赫居世王. 35) 三國史記12신라본기12경애왕 원년. 36) 三國遺事 권 왕력 경명왕 경애왕조1 , .

(13)

왕 이래728년만의朴氏王으로 즉위하였다 또 사위로서의 왕위 계승일 경우. 당대에 그치는 원칙을 깨고 아들인昇英이 다시54대 경명왕이 되었다 그런. 만큼 경명왕의 비상적인 집권과 즉위과정에서 위응의 일정한 역할은 절실했, 을 것이며 현실적으로도 동원됐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 결과 경명왕 원, . 년의 상대등 임명에 위응이 발탁되었다고 해석된다.37) 위응은 919 上大等 으로 교체되었는데 이로 보면 경명왕 초반 년의 정국에서 위응의 위상, 3 金成

은 짐작된다 또한 이때로부터 년 뒤인. 5 924 ,년 경명왕의 뒤를 이어 위응은 즉위하고 있다 경명왕대 정국의. 始末에서 모두 위응이 간취되는 만큼 거꾸, 로 경명왕대 운영에서 위응의 역할은 컸다고 생각된다.38) 특히 선도산 성모

37) 유렴은 김부의 종제 또는 당제로 확인된다 고려사 세가( 2 태조14년 월2 ). 왕건이 서라벌 왕도를 방문했던931년 당시 유렴은相國의 지위에 있었다 상국은 백관의 우. 두머리에 속한다 이 점에서 견훤이 세운 괴뢰 정권 김부의 치세에서 유렴은 핵심 실. , 세였다 이는 바. -1)에서 견훤이 경애왕의 동생 효렴을 압송하는 것처럼 왕검의 유, 렴 압송은 유렴의 정치적 기반이 김부와 일정한 관련이 있으며 나아가 유렴이 견훤과, 의 밀접한 연대를 지녔기에 제거 혹은, 懲治차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정리( 는 정선용, 고려 태조의 신라왕경 방문과 존왕론, 한국사상사학47, 2014, P.121).

또 왕건을 왕도의 성문 밖에서 맞이할 만큼 외교 의전에 밝은 인물이었다 유렴이 경 . 명왕 원년 왕명 출납을 담당한 시중의 직에 있은 점도 이런 짐작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한데 유렴은 년 만인2 919년 시중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언옹이 후임을 맡는다 이후. 유렴의 정치적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유렴이 시중으로 있은 년간 위응 경애왕 은 상. 2 ( ) 대등으로 있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 간에는 어느 정도 교통이 있었을 것이다 한데 경. . 애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그의 활동은 없다 이것은 그가 경애왕대 핵심 권력에서 배제. 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견훤의 후광에 힘입어 김부가 즉위하자마자 유렴. 은 곧바로 상국으로 활약했다 그렇다면 박씨왕대 부침을 거듭했던 그가 다시 부상한. 데에는 견훤의 후광 김부의 신임이 작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

이런 맥락에서 유렴은 가장 경애왕에 적대적 태도를 보인一人임이 입증된다 김부와. 유렴은 혈연적 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에서도 서로 결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유렴이 포석정 음모에 긴밀히 연결되어 암약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높. 다 이 점은. 931년 왕건이 왕도를 방문한 직후 상국 유렴을 인질 로 잡아간 것에서도 짐작된다 아무리 신라가 약소국이라 해도 일국의 상국을 왕건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인. 질로 잡아갔다는 것은 의문이 간다 왕건은 전군을 왕도 외곽에 주둔시키고. 50여기만 데리고 입성할 만큼 신라인을 자극하지 않으려 매사를 용의주도하게 행동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섣불리 평화 무드를 깨뜨리며 상국을 인질로 삼아 데려갔을 리는 없다 이. 점에서 왕건의 유렴 압송은 포석정 사건에 대한 왕건의懲治였다고 보인다 박순교.( , 애왕의 대내외 정책과 포석정 변란,한국고대사연구회 제출 논문, 2007, P. 18). 조범 , 신라말 경순왕의 고려 귀부, 이기백 고희기념논총,1994. p. 415에서 유렴의 파 견이 양국 병합 절차의 논의라 보았다 그렇다면 그의 중요한 행적이 이후 고려 기록에.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또 김부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하기 위한 압송이라 보기도 하. 지만 김부의 굴종적인 태도로 보아 굳이 그렇게 했어야 할 필요성조차 의심스럽다, . 38) 正史에서는 뚜렷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으나 전승되는 박씨 족보에 의하면 경명왕에

게는 명의 왕자가 있었다고 한다 곧8 . 彦忱 密城大君( ), 彦成 高陽大君( ), 彦信 速咸大(

), ( ), ( ), ( ), ( ), ( )

彦立 竹城大君 彦昌 沙伐大君 彦華 完山大君 彦智 江南大君 彦儀 月城大君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