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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론 제12강 초기 한국정부의 체제유지 전략과 정권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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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부론 제12강

초기 한국정부의 체제유지 전략과 정권변동

-Weber의 권위의 정당성 원천과 Bachrach & Baratz의 권력의 양면성 적용-

고광용(한국외대 시간강사)

Ⅰ. 서론

초기 한국정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상당한 혼란을 겪은 가운데 한국전쟁을 겪으며 복잡 한 대내외적 환경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부수립 이후 특히 초기 한국정부가 대 응했던 체제유지 전략은 크게 국가안보적 측면의 반공과 경제발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편, 이승만 초대 정부는 체제 유지에 실패하고 결국 붕괴되고, 장면 정부라는 유약하고 우유 부단한 내각제 정부가 등장했다가 얼마 안있어 군부쿠데타가 발생되고 군인이었던 박정희가 권력을 잡으면서 약 18년에 가까운 장기독재를 맞이하였다. 그래서 초기 한국정부사는 전쟁과 더불어 정권붕괴 및 변동과정을 거치며 극심한 혼란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본 발제의 주된 연구관심은 과연 초기 한국정부의 체제유지 전략으로써 반공과 결제발전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극심한 정권변동에 가장 결정적으로 미친 요인이다. 일반적으로 교과서나 한국현대사 관련 독서를 통해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반공국시를 내걸고, 전후 복 구와 경제발전을 위해 친미정부를 건설하고 대미 원조경제를 강력히 추진했지만, 결국 독재와 부정선거로 인해 4.19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정권붕괴가 진행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승만 정부 붕괴이후 장면 정부는 극심한 체제혼란에 직면하고 시민사회운동을 제대로 통제할 능력이 없 는 상황이었다. 또한 제대로 군부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박정희 비롯한 군대 내부의 정부 비판 세력이 있었고 이를 육사 8기들이 승진적체에 대한 불만이 있는 가운데, 전후 남북 휴전 상황에서 체제안정은 어렵다는 판단아래 박정희를 위시로 한 군부세력이 쿠데타를 모의 및 실행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쿠데타의 목적을 국가안보와 경제발전 맥락 에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 인지의 문제는 한국정부의 체제유지 전략과 정권변동 원인을 모두 국내적 요인에만 한정하여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철옹성 같던 독재자 이승만은 왜 그렇게 쉽게 무 너졌을 까? 초기 한국정부 시기에는 2차 세계대전 직후 구소련과 미국의 긴장관계 속에서 한 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냉전이라는 커다란 국제질서가 고착화된 가운데(김명섭, 2003),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남한(한국)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한미관계 즉, 대외적․국제적 측면 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한국정부의 체제유지 전략과 붕괴의 원인을 찾는 것은 반쪽자리 혹은 그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즉, 냉전의 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최종적인 초기 한국정부의 정권변동을 냉전의 틀에서 살펴보면서, Max Weber의 국 가권력의 정당성에 따른 권위의 유형론과 Bachrach & Baratz 무의사결정론의 권력의 양면 이론을 활용하여 정권변동과정과 원인을 체제정당성과 권위의 상실, 정권붕괴와 탄생과정에서 의 권력의 양면적 영향력을 분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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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냉전과 초기 한국정부의 체제유지 전략 : 반공과 경제발전 전략 1. 이승만 정부의 반공과 대미 군사․경제원조(발전국가 지연)

냉전적 국제질서 아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부의 기본적 이데올로기는 반공이자 멸공이었다. 미국의 그늘아래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가치를 내세웠다.

전쟁의 상처와 증오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 공산주의를 멸하는 데 큰 지향을 두었다.

후지이 다케시(2008)는 이승만 정부의 반공주의를 ‘배제와 포섭의 역학’으로 논하고 있다.

배제에 대해서는 주지되어 왔기에 여기서는 의아스러울 수 있는 포섭의 차원만 다루기로 한다.

분단국가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최대과제는 ‘국민’의 형성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군대 반란 사건은 지역주민들의 호응 속에 순식간에 전남 동부지역 전역으로 확산되는 등 초기 한 국정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 부재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대응 책을 논하는 과정에서 공산주의를 사상적으로 극복하고 새롭게 등장한 것이 일민주의였다(서 중석, 2005; 후지이 다케시, 2008: 119 재인용). 일민주의란 민족의 일체성을 강조하고 한민족은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관점이다. 양우정을 통해 새로 정립된 이대통령 건국정치이념을 보면,

“이승만의 노선은 민족주의이며, 민족주의 원칙은 민족전체의 복리에 행복을 목표하는 사회민 주주의적 이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진정한 민족주의는 계급차별의 제도와 자본주의적 동족 착취 제도를 용인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을 지지한다면 자본주 의 비판도 허용한다는 것으로 좌익경력자들을 포섭하였다. 국가형성(state building)은 인종, 민족, 언어, 지역 등이 있는데 이승만 정부는 민족차원에서 국가형성을 도모코자 한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의 반공이 멸공봉공을 구호로 내건 전체주의 이념이며,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북한을 민족’에서 배제하고 남한만이 민족을 전유한다는 측면에서 전체주의적 민족주의라 평가되기도 한다(이하나, 2012). 하지만, 커밍스(1990: 196)는 일민주의를 민족일체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전체주의(파시즘)적이긴 하나 식민지 사태에서 갓 벗어난 한국에서 대중적인 것이며 좌우가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라고 옹호한다(후지이 다케시, 2008: 124 재인용).

한편, 이승만 정부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미국에 크게 의존했다(정일준, 2013). 휴전상황 에서 팽팽한 군사적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전후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황폐화된 상황에서 자 원도 없는 나라였고 군사적 대치를 대등하게 유지할 수 있는 군비나 산업 등 국가경제를 충 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휴전반대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유엔군의 통제서 벗어나 남한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고 미국에 공표하며 벼랑끝 전술을 활용했다. 이 러한 이승한 정부의 강한 북진통일론은 결국 더욱더 원조경제에 집중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한 한국전쟁 기간 우리나라는 통화량 증가와 엄청난 인플레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국의 지원을 받아 경제발전계획을 실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본투자를 통반하는 경제개 발계획의 경우 통화량 증가를 초래할 것이고 곧 인플레이션 악화로 이어질 거라는 판단이 있 었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시기를 ‘원조경제’ 시대이자 수입대체공업화를 추진한 시기로 평가하 는 데 한국 정부의 세입구조에서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대충자금은 1953년 17.1%

에서 급격히 증가해 1957∼58년에는 54%에 육박하였다(한국재정 40년사; 정인준, 2013: 469).

동시에 이승만 정부가 원조를 더욱 크게 받은 것은 국방비였다. 한국재정 40년사에 따르면 국 방비 중 원조구성비는 1953년에 5%에 불과했으나 급격히 증가하여 1956년 48%, 1960년 36%에 서 1961년에는 92%가지 증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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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는 냉전 질서와 한미관계라는 체제외적 환경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는 가운데 일 부 엘리트집단이 국가형성작업을 주도했으며, 행정체제 확립에 필요한 지식과 인력, 자원이 역 부족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체제유지전략을 뒷받침할만한 제1공화국 행정기구개편을 살펴보고 자 한다. 다음 <표1>은 대한민국 최초 중앙행정기구를 나타낸 것으로 우선 관재청은 해방이 후 귀속재산 처리를 위해 임시적으로 설칭되었던 재무부의 외청기관으로 이 기관을 통해 일 본이 패망이후 버리고 간 각종 귀속재산의 관리와 매각, 불하를 통해 산업경제의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부흥부, 외자청, 외자구매처, 부흥위원회가 가장 눈에 띄며 이는 전후 복구와 미국 중심의 대외경제원조 가 행정기능의 제일 목적이었음을 나타낸다. 부흥부는 산업경제 부 흥에 관한 종합계획과 그 실시의 관리 및 조정에 관한 업무를 맡았다. 정부의 외자도입과 도 입된 외자관리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부흥부 산하에 외자청을 두고, 구매국과 경리국 을 두었다. 또한 사회적 혼란 수습을 위한 국방과 경찰 기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였고 정치권 내 권력을 대통령에 결집시켰다.

<표1> 제1공화국의 행정기구개편 (1948-1959) 12부 3청 1위원회(건국초기 11부 4처 3위원회)

구분 국가관리기능 산업경제기능 사회복지기능

부서 내무부, 외무부, 법무부, 국방부, 해무청(5)

재무부, 농림부, 상공부, 교통부, 체신부, 부흥부, 전매청, 외자청(8)

문교부, 보건사회부(2) 신설 해무청, 관재청, 외자구매처, 부흥부,

전매청, 부흥위원회 보건부

폐지 기획처, 감찰위원회 경제위원회, 관재청 개편

공보처→대통령직속공보실 총무처→국무원사무국 법제처→법제실 고시위원회→고시과

외자구매처+임시외자관리청

= 외자청(통합)

보건부 + 사회부

= 보건사회부(통합)

반면, 미국에 입장에서는 당시 70만명이 넘는 한국군에 대한 막대한 군비지원과 경제원조를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뉴룩정책을 시행하여 한국에 대한 군사원 조를 줄이고, 남과 북에서의 분쟁을 동시에 봉쇄하여 결국 한반도에 추가적인 군사개입이 필 요 없게 하는 것 이었다(박태균, 2009:97). 그러나 이에 이승만 정권은 “대한원조 삭감은 자유 아세아에 중대한 위협을 초래”하며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건전한 경제가 절대 불가결하며 방위에 필요한 자원 없이 우리는 증강일로에 있는 공산침략군과 대항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정일준, 2013:471). 이에 미국은 석유지원을 끊는 등 강경한 대책을 펴거나 이승만 정권에 대해 한국군을 감축하고 국방비 지원을 축소하는 대신 경제원조를 증가시키겠다고 했 다. 하지만 이승만은 북진통일 외에는 경제발전에는 별 관심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러한 미 국의 설득과 회유책에도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국에 대한 원조를 최소화하고자 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반대와 갈등, 한국전쟁 이후 엄청난 피해 로 인해 폐허가 된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쉽게 줄일 수 가 없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1950년대 북한의 성공적인 전재 복구는 미국 행정부 입장에서 한반도에 뉴룩정책 시행이 어 렵게 되었다(박태균, 200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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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대한 원조정책과 이후, 뉴룩정책 아래 미국과의 갈등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국내 산업과 경제의 부흥 및 고도화를 통한 경제발전 지향보다 미국으 로부터 “더 많은 달러” 즉 더 많은 원조를 얻는 데 집중하였고, 미국을 위시로 한 대외 의존 경제를 탈피하지 못하면서 발전국가는 지연되게 되었다.

2. 박정희 정부의 반공과 경제발전지향 (발전국가)

박정희는 남북대치 상황에서의 사회혼란과 장면정부의 무능, 경제발전의 필요성을 명분으로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감행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쿠데타의 이념과 성격을 밝히 6개 혁명공약의 ①반공 ②한미동맹 ③부정부폐 청산 ④경제발전 ⑤체제경쟁과 국토통일

⑥과업달성 후 민정이양이었다(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그 중 반공은 첫 번째이며, ⑤도 동 일하게 강조되고 있어 그만큼 중요했다. 첫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를 통해 알 수 있듯 1960 년대 박정희 정부의 반공 캐치프레이즈는 체제경쟁을 통한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 즉, 승 공에 있었다. 혁명공약에 명시되어 있는 승공의 요지는 “절망과 기아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 급히 해결하고 민족의 숙원과제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는 것이었다(김상겸, 1962: 21∼22; 이하나, 2012: 216). 즉,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반공은 적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소극적인 반공이었다면, 적을 이기는 ‘승공’이야말로 능동적·적극적 의미의 반공이라 보았다(윤원구, 1966: 82∼89; 이하나, 2012: 216).

1961년 5월 19일, 쿠데타를 성공시킨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 제18호를 발포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이 포고는 민주당 정부의 반공임시특별법안을 계승한 것 으로 1961년 7월 3일 반공법으로 변모되었다(후지이 다케시, 2011:21). 그 내용은 공산주의 활 동이 국헌을 문란케 하고 국가안전에 명백한 위험이 된다고 보았으며, 반국가단체를 공산당 및 이와 동조한다고 인정되는 단체로 규정하였다. 이 포고 제18호는 1963년 9월에 위헌판결을 받아 폐지되었지만, 박정희 군부 정권 초반 치안관리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으며 단전인 결 국 체제유지를 위한 중요한 전략 혹은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박정희는 ‘지도자의 길’

에서 공산주의를 병마로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후지이 다케시(2011)가 지적했든, 쿠데타 세 력이 혁명공약의 첫째로 반공을 강조했으나 당시 1961년 6월, 정부 여론조사 결과 ‘신정부 요 망사항’으로 국민들은 반공보다는 생활고 해결 및 경제개발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이에 5․

16 주도세력은 비록 혁명공약의 네 번째를 차지했지만, 생활과 반공이 연결될 수 있는 측면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군인출신이었기에 경제개발에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믿을 건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학자들과 경제관료들 뿐이었고, 가지고 있는 건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 장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었다. 근대화 논리로서 반공주의의 등장은 자립경제 달성을 본격 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이하나, 2012), 장면 정부의 반공입장은 박정희 정부의 반공과 유사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직전인 1961년 1월 출범한 케네디 행정부는 미국의 제3세계 정책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마상윤, 2002:228~229). 기존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 외원조정책이 오히려 제3세계 구가들의 경제접라전과 정치불안정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하고 반공보다는 경제적 성장이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대외원조전략은 군사적 목적에서 경제발전 지향적으로 일대전환하여 경제발전 가능성 있는 국가에 장기적 자금대출을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제3세계 정책방향 달성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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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담당한 핵심인물이 근대화이론을 정립한 로스토우였다(박태균, 2004;마상윤, 2002). 그는 제3세계 국가의 경제발전이 정치사회적 안정과 평화를 도모하고 민주주의 제도 발전에 필요 조건이며, 결국 이것이 공산주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박태균 (2004)은 케네디 행정부의 대한정책 변화가 5.16 쿠데타와 한국 경제발전에 결정적인 역할 했 다고 보고 있으며, 특히 로스토우는 미국의 정책입안 과정에 깊숙이 개입되어 박정희 정부의 경제고문 역할을 담당했다. 로스토우 경제개발 장기원조 기조아래 1963년부터 시작된 경제개 발계획의 수정과 관세․금리․수출진흥을 위한 조치 등 정책에서 국제개발처(USAID) 파견 자문단이 적극적인 활동을 수행했다. 또한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정권은 균형성장론에 근 거하여 내자이용 경제개발계획과 국내자본 동원 관련 통화개혁을 꾀하고자 했으나 미국이 강 하게 반대하고 선진국 외자 도입 및 불균형 성장의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에 영향력을 끼쳤다(박태균, 2004).

<표2> 제3공화국의 행정기구개편 (1961-1971) 2원 13부 1실 4처 12청 1위원회

구분 국가관리기능(+4)* 산업경제기능(+8)* 사회복지기능(+3)*

부서

국토통일원, 내무부, 외 무부, 법무부, 국방부, 총무처, 법제처, 무임소 장관실, 검찰청, 병무청 (10)

경제기획원, 재무부, 농림부, 상공부, 건설부, 교통부, 체신부, 과학기술처, 전매청, 농촌진흥청, 철도청, 국세청, 관세청, 수산청, 산림청, 조달청, 원자력청(17)

문교부,보건사회부, 문화공보부, 원호처, 노동청(5)

신설

중앙정보부, 공보부, 무 임소장관실, 검찰청, 국 토통일원, 병무청, 행정개혁조사위원회

감사원, 경제기획원, 국토건설청, 중앙경제위원회, 농사원, 농촌진흥청, 수산청, 산림청, 과학기술처, 조달청, 철도청, 국세청, 관세청

노동청, 군사원호청

폐지 공안위원회, 감찰위원

회, 해무청 농사원, 외자청, 중앙경제위원회 개편

국무원사무처→내각사 무처→총무처

법제국→법제처

부흥부→건설부 국토건설청 →건설부 부흥위원회→경제장관회의 원자력원→원자력청

군사원호청→원호처 공보부→문화공보부

박정희 정부의 전반기인 제3공화국의 행정기구개편을 보면 위 표와 같다. 5․16 쿠데타 이후 1961~1963년 까지 변혁기에 걸맞게 정부조직을 12회 개편하였다. 특히, 부흥부를 건설부로, 건 설부를 경제기획원과 국토건설청으로 바꾸는 경제개발에 초점을 맞춘 정부조직을 구성하였다.

미온적 수준의 전후 복구 및 부흥에서 적극적인 경제개발을 의미하는 건설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에너지 확보를 위한 원자력원(청) 또한 경제발전에 따른 가정 및 산업의 팽창 하는 에너지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해 신설된 것이다. 전체적인 경제개발 기획 및 수행은 경제기획 원에서 국가․사회공안기능 특히, <반공>은 중앙정보부에서 담당하고 수행에 필요한 정부조 직 확대와 조정을 꾀하였다. 산업경제기능 측면의 부처인 국세청, 수산청, 산림청, 과학기술처, 관세청 등을 신설하였다. 이러한 부처들의 발전국가 지향의 각 분야별 업무를 담당하였다.

결론적으로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제3세계 경제발전 외교정책 아래 북한과의 체제경쟁을 통한 승공을 목표로 로스토우의 근대화이론을 바탕으로 국가경제발전을 지향하며, 발전국가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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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냉전과 초기 한국정부의 정권변동

1. 이승만 정부의 붕괴 : 미국의 적극적 대응

홍석률(2010)은 이승만 정권의 붕괴 원인을 분석하면서 4․19 민주항쟁, 민주당, 미국, 한국 국의 대응을 차례로 검토하였다. 이승만의 퇴진이 민주항쟁의 필연적 결과라는 기존의 단선 적․직선적 접근을 비판하고, 당시 민주항쟁의 진행과정에 대한 학생과 시민․민주당(제1야 당)․학계의 이승만 퇴진 운동의 양상을 주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주요 일간지를 활용하 여 분석하였다(홍석률, 2010:151~156;160~167). 결론적으로 4월 민주항쟁이 미국과 한국군의 태도에 영향을 주는 등 이승만 정부의 붕괴에 간접적 영향을 주긴 했으나 실제 직접적․결정 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보았다. 오히려 미국의 개입과 한국군의 중립적 태도가 이승만 정부의 붕괴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고 보았다(홍석률, 2010:149).1)

우선 미국의 적극적 개입이 이승만 정부 붕괴에 미친 중요한 영향이다(홍석률, 2010:156~

159;167~174)2). 당초 미국은 한국의 노골적인 부정선거의 실상을 일찍부터 인지했으나, 내정 불간섭 원칙에 따라 직접 개입할 의사는 없었다. 하지만 3.15선거날 부정과 유혈사태가 나타 나면서 미국은 대한원조 일정을 중단하는 등 이승만 정부와의 거리두기 및 타협정책을 펼쳐 조금 더 적극적인 액션을 취했으나 구체적․직접적 개입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4월 11일 2차 마산봉기 이후, 미 국무부는 한국에 대한 직접 개입정책으로 전환되었고, 부정선거 책임자 퇴 출 및 선거법 개정 등 5가지의 권고사항을 한국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 개입으로 의 전환은 마산봉기 보다는 상황이 잘 대처되지 않을 경우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이용될 수 있다는 마산상황을 본 대사관의 위험성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 4월 19일,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며 미국(매카나기 대사)은 당일 성명을 통해 시위에 대해 ‘정당한 울분(justifiable grievances)'이라 평가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는 등 적극적인 액션을 취했다. 급기야 아이 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에게 강하게 나가라고 지시했다. 4월 25일 교수단 시위와 재점화 된 민주항쟁이 26일 아침까지 이어지자 매카나기 대사는 이승만 사퇴 촉구라는 직접 개입으로 전 환하였다. 매카나기(대사관) 대사는 매그루더(주한민군 대표) 유엔군사령관을 설득하여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확실한 압박을 하였다. 결국 김정렬 국방장관은 경무대에 가서 이대통령을 만 마 미국의 뜻을 전하고 이대통령은 하야를 결정하게 된다. 김정렬장관은 이대통령이 자신의 사퇴와 재선거를 결심했다고 대사관에 알렸다. 결국 이승만 정부의 붕괴에 미국의 적극적 개 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급박상황을 보니 흡사 오비이락의 속담이 생각 난다. 4.19 민주항쟁이 있은 후 불과 1주일이 지나 이대통령이 하야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이승만의 개인적 성격과 전제형 리더십을 생각하면 금방 간파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2. 5.16 쿠데타(장면 정부의 붕괴와 박정희 정부의 탄생) : 미국의 미온적 대응

5.16 쿠데타의 성공은 바로 장면 정부 붕괴와 박정희 정부 탄생을 의미한다. 물론, 쿠데타세 력은 혁명공약 ⑥에서 민정이양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고, 결국 박정희가 정권을 잡는 것 으로 나아갔다. 장면 정부의 붕괴와 박정희 정부의 탄생에 미친 미국의 영향력은 무엇일까?

1) 이재봉(1996) 또한 이승만 정권 붕괴에 대한 미국의 개입 및 영향력 행사를 분석함.

2) 주로 미국 기밀문서 Telegram from...을 인용하여 분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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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의 발생원인과 성공은 바로 미국의 불개입 혹은 미온적 대응에 기인한 바 크다 (홍석률, 2000;홍석률, 2001:329~351). 4.19를 전후하여 한국 주둔기관 간 역관계의 변동은 실 제 한국의 탈전쟁화, 탈군사화 경향을 반영하긴 했으나 경제개발도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일 뿐 여전히 미국의 대한정책의 초점과 우선순위는 안보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면 정 권은 이승만 정부와 달리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우며 한국군 감군, 국방예산 감축을 주장하고 미국과 행정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정권의 정책방향은 대부분의 미국관료 들에 의해 너무 지나치다는 인상을 주었고, 특히 미국의 군지도자들의 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미 합참의장 렘니쩌는 냉전대립의 상징인 휴전상태의 한국이 감군을 하면 미국과 동맹국들의 군비증강을 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았다. 장면 정권에 대한 미국 군부세 력의 불만은 1961년 1월 대사관의 그린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도 들어나는 데 군부 장성 들은 장면 정권의 유약함과 불안정성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강력한 지도력의 창출을 주장했다.

반면, 감군문제는 육사8기를 위시로 한 한국군의 젊은 소장파 장교들의 입장에서 볼 때도 승 진적체현상에 감군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정군운동을 주도한 박정희와 김종필은 명확한 반대를 표하고, 국방과 경제건설의 동시 추진을 주장했다. 장면 또한 이런 미국 군부장성, 정군운동을 주도한 국내 구분세력의 비판과 압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 군부세력이 직접 쿠데타를 사주하지 않았더라도 미국 군부세력이 보여준 장면 정권에 대한 반감은 쿠데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홍석률, 2001:336).

이어 1961년 초 한국에는 쿠데타라는 3, 4월 위기론이 감돌았고 여기서부터 한국에서 군부 쿠데타와 미국의 대응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한국에서 군부쿠데타 발생 시 진압을 포함한 핵심결정을 내리는 주체는 당연히 미국(대통령)에 있었다. 그러나 케네디 행정부는 국 내외적 복잡한 문제와 제3계 혁명과 무력분쟁에 시달리면서 한국문제에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일어난 팔리보고서 소동은 워싱턴에 중앙관료집단, 특히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위기의식과 더불어, 장면 정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5.16 쿠데타가 발생되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지도자로 하고 육사 5기와 8기가 주도하였으며 당시 헌정질서를 분명히 유린한 불법적인 것이었다. 당시 한국군 통수권은 내각제하 장면 총리에게 있었으나 한국군 작전지휘권은 유엔군사령관하에 놓여 있 었다. 그러므로 유엔군사령관이 쿠데타 처리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쿠데타 발생시 대사관(그린)과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은 합헌정부를 명확히 지지하는 성명을 내고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관련 의혹을 씻고자 했다. 그러나 오히려 워싱턴의 중앙관료집단은 이들의 성명 에 비판적이었고, 정권이 긴급교체되는 사태 발생에 대비해 국무부와 상의없는 성명은 내지말 라고 건의 햇다. 당시 미국 방첩대가 쿠데타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50대50의 팽팽한 의견이 있었다. 한편, 쿠데타 세력을 압박하고 무혈진압이 불가능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장면은 도주한 것이 아니라 매그루더에게 상황을 처리해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매그루더는 장면정권 도 싫어했고, 좌익경력이 있는 박정희도 싫어한 상황이었다. 한편, 미 합참의장 렘니쩌는 한국 정부에 불간섭하고 공산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는 것으로 유엔군사령관의 임무를 한정했 다. 즉, 북한이 침공하지 않는 한 미국(군부)은 더 이상의 개입과 언급은 하지 말라는 불개입 정책의 천명이었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 케네디 대통령의 입장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 다. 이에 따라 반쿠데타 진압작전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매그루더나 그린은 강력한 대응 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장명 총리와 1군사령관 이한림은 매그루더와 그린을 접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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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였고 결국 장면 정권은 붕괴하엿다. 홍석률(2011:348)은 이에 대 해 권한과 책임의 불일치라는 한국과 미국 간의 군사동맹 관계의 특수성은 결국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무책함을 조장할 수 있는 구조적 원인을 제공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예상되고, 극소수 군인들이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5.16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 했다고 주장했다. 추가적으로 서론에서 문제제기 했던 바와 같이 박정희 정권 붕괴 이후 전두 환의 12․12 쿠데타 또한 이러한 문제에 기인한 결과로 보았다.

Ⅳ. 결론 및 소고: 베버의 합법적 권위와 권력의 양면성론을 중심으로

- 초기 한국정부 정권변동과정에서의 정부권위의 상실과 미국의 양면적 권력행사 -

막스 베버는 (국가)권력이 정당성을 갖는 권위의 3가지 유형을 전통적 권위, 카리스마적 권 위, 합법적 권위로 구분하였다(Weber, 1978). 그 중 합법적 권위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권위 를 집행할 때 권력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대통령(내각총리)이나 정부관료제는 정당 한 방식의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당선되어야 권력을 갖게 되고, 통치 중에서 법치를 실현 할 때 정당성을 갖는다. 초기 한국정부가 냉전적 국제질서에서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 었지만, 미국은 기본적으로 반공과 체제만 안정이 된다면 독재조차도 일부 수용하는 등 불간 섭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사사오입개헌, 부정선거, 장기독재 등을 통해 합법적 권위를 잃게 되고 국민들의 극심한 저항이 지속되자 체제안정이 불안한 가운데 공산주의자의 침투를 우려한 미국이 적극적인 개입을 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붕괴가 미국의 적극 개입에 따른 결과라는 것에 인정하지만, 이승만 정부가 부정선거를 실시하지 않 고 정당한 법집행을 했더라면 미국의 개입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박정희 정부 또한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불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초반에 정당성을 상실했으나 형식적으로 나마 반공 과 경제발전을 국시로 강력한 카리스마적 권위도 한몫을 더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은 결과 합 법적 권위를 갖는 듯 했다. 그러나 유신헌법을 통과시키고 제4공화국이 들어서면 독재는 장기 화되고 법은 철저히 국가에 유린되면서 박정희 정권은 합법적 권위를 상실하게 되고 이후 박 정희 정부를 이승만 정부처럼 쉽게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학 분야 정책형성론의 무사의결정론에 따르면, 진짜 권력은 양면성(Two Faces of Power)을 갖고 있다(Bachrach, P. & Baratz M.S, 1962;). 바로 진짜 권력은 정책형성과정 혹은 정치적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Influence To Make) 힘뿐만 아니라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Influence Not To Make) 힘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정책결정에는 경험이나 측정이 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힘(Invisible Influence or Power)이 상존한다. 초기 한국정부의 급격한 정권변동과정에 바로 이러한 미국의 진짜권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승만 정부의 붕 괴과정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결국 즉각적인 이대통령의 하야로 이어진 반면, 5.16 쿠데타를 막고, 장면 내각을 유지 및 보호할 수 있었는데도 미국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5.16 쿠데타는 성공하고 박정희 정부가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냉전과 초기 한국정부의 체제유지 전략과 정권변동 과정을 살펴보면서, 체제내 적 합법적 권위를 얼마나 가져가면서 반공과 경제발전을 실현했었느냐가 우선이고, 그러한 합 법적 권위가 붕괴됐을 때 국민들의 큰 저항에 의하기보다 최종적인 정권변동의 결정은 진짜 무서운 미국의 권력발휘 여부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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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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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