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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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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대서양주의, 존슨의 가교정책

김 진 호

2014년 1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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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드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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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골은 미국의 일방적인 유럽통합정책에 대해 반대하고 연방주의에 기초한 초국 가주의를 배제했다. 그는 연방적 기구가 아닌 유럽 정부들 간의 협의체로써 유럽기 구를 구성할 것과 서독과의 연대를 추진해 유럽독자노선을 구축하려 했다. 이러한 유럽독자노선은 드골주의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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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드골주의

• 수에즈위기는 프랑스의 드골주의노선을 심화시켰다. 드골주의는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정책으로 나타났다. 수에즈 위기시 보여준 미국의 행태는 프랑스 정부의 불 신을 야기했으며 핵주권(force de trappe)에 대한 드골의 의지는 강했다. 또한 영 국은 미국의 유럽대륙 개입을 항상 찬성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1963년 영국의 공동시장 가입을 반대한 것은 이러한 드골주의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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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드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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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유럽분할에 기초한 데탕트를 추구했고 전략적 핵무기에 대한 통제수위를 강화하는데 소련과 협력했다. 드골은 케네디가 추진하는 미소간 초강대국들의 데 탕트 정책에 대해 반대했다. 드골은 이를 유럽의 희생을 전제로 한 새로운 알타회 담이라고 보았다. 그는 2차 대전에 의한 초강대국들의 유럽분할을 대체하고 대서 양에서 우랄까지라는 구호에 기반한 범유럽체제를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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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아데나워와 드골주의

• 아데나워와 드골은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유럽 을 보호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아 데나워는 초강대국의 존재로 인해 유럽통합이 필요하며 독일과 프랑스가 협력해야 할 당위성 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드골과 아데나워는 1958년 9월 14일 처음으로 콜롱베레되제글리 즈(Colombey-les-deux-églises)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했으며 유럽이 나아가야 될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서로 의견을 같이했다. 이러한 서독과 프랑스의 협력은 서유럽을 더욱 자주적 으로 동유럽을 소련의 통제에서 궁극적으로 벗 어나게 하는데 일조

1957년 9월 14일 드골과 아데나워의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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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아데나워와 드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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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나워는 미 케네디 행정부가 보여준 대(對)독일정책, (베를린 장벽 묵인)에 대 해 크게 실망.

• 프랑스의 드골의 유럽 독자 노선에 합류

• 서독의 드골주의자들은 부적절한 미국의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프랑스와의 관계를 희생시킨 에르하르트와 슈뢰더를 비판했다. 슈트라우스는 유럽이 핵없이 자주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슈트라우스와 같은 서독의 드골주의자 들은 프랑스의 독자적인 핵억제력(force de frappe)이 유럽 방위의 주축이라고 보았고 미국에 대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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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주의

아데나워와 드골주의

• 미 케네디 행정부의 등장은 독일이 할슈타인 외교원칙을 지키기에 불리해짐

• 1961년 11월 새로 외무부 장관에 임명된 게르하르트 슈뢰더 Gerhard Schröder 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의 서독의 고립을 탈피하고 동유럽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 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동독을 제외한 동유럽 국가에 무역대표부를 설치하 고 광범위한 통상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지난 날의 경직된 상 태에서 융통성과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움직임의 정책 Die Politik der Bewegung'이라고 불리며 이는 새로운 동방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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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주의

서독의 대서양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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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뢰더는 에르하르트와 더불어 움직임의 정책 (Politik der Bewegung)이라는 새로운 동방정 책과 동방무역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들 대서양 주의자들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편협한 유럽 이 아닌 영국과 대서양을 넘어선 보다 광대한 유럽과 자유무역에 기반한 대서양주의를 발전

슈뢰더(Gerhard Schrö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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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주의

서독의 대서양주의

• 대서양주의는 서독의 자유무역확대라는 강한 경제적 동기에 기초했다. 경쟁과 효 율을 통한 번영은 라인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원천이었고 이러한 시장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서독의 발전과 경제적 번영을 위해 영국과 미국과의 자유시장 확 보는 기필코 필요한 부분이었다. 이러한 에르하르트의 강한 경제적 열망은 대서양 주의로 나타났고 정치연합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로 나타났다. 그러나 드골은 영미 권의 헤게모니가 유럽에 작용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기 때문에 이러한 에르하르 트의 시도를 단호히 차단시켰다. 이러한 갈등은 서독 내 드골주의와 대서양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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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주의

서독의 대서양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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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뢰더와 비렌바흐 등 대서양주의자들은 서독이 프랑스에 의해 좌충우돌하게 되 는 것을 우려했다. 비렌바흐(Kurt Birrenbach)는 케네디 정부의 외무부 정책기획 위원장인 월트 로스토(Walt Rostow)의 말을 인용해 서독이 적어도 미국의 정책에 대해 우호적 입장을 보인다면 미국은 서독을 유럽동맹국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동 맹국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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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주의

서독의 대서양주의

• 드골은 에르하르트 수상에게 핵우산을 제공하고 공동으로 안보에 협력할 것을 보장했고 미국으로부터의 종속에서 탈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미국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면서 공조했다. 이러한 에르하르트의 외교적 노선 은 CDU 내에서 대서양 동맹을 선호하느냐 아니면 프랑스와 관계를 긴밀히 하느냐 라는 당내 갈등을 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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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우호조약

독불우호조약

12/38 드골의 1961년 5월 수도 본 방문시, 아데나워 정권 말기 아데나워는 프랑스와 안보

협력 관계를 수립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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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우호조약

독불우호조약

1963년 1월 22일 독불우호조약에 사인하는 양국 대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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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우호조약

독불우호조약

14/38 1963년 1월 22일 독불우호조약 조인 이후 포옹하는 아데나워와 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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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우호조약

독불우호조약

1963년 1월 22일 독불우호조약 조인 이후 포옹하는 아데나워와 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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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우호조약

독불우호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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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월 22일 독·불 우호조약 문서 독일어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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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쉐플랜

푸쉐플랜

• 1960년 드골은 정치통합을 다른 회원국들에게 제안하였 고, 1961년 파리에서 열린 유럽 정상회담에서 공동체 6개 회원국의 발의로 드골의 제안을 연구하기 위해 창설된 특 별 위원회의 장이었던 프랑스의 푸세(Christian Fouchet) 는 로마 조약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 정치 통합 의지에 형 태를 부여할 임무를 맡겼고, 1961년 11월 푸세위원회는 ' 국가연합‘을 설립하기 위한 초안을 작성했다.

푸쉐(Christian Fouch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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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쉐플랜

푸쉐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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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안은 4가지 제안을 포함하고 있었다.

• 첫째, 정부수뇌 또는 외상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만장일치로 의사 결정을 한다.

• 둘째 파리에 주둔하는 상임사무국 또한 각국의 외무부 고위 관료로 구성하여 정부 간 협조의 성격을 띠게 한다.

• 셋째, 외교, 방위, 상업, 문화 분야의 정책을 보호하기 위한 네 개의 상임 정부 간 위원회를 가진다.

• 넷째, 유럽의원총회의 의원들은 각국의 의회에 의해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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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쉐플랜

푸쉐플랜

• 1962년 1월 18일, 푸세플랜 개정안이 제출되었다. 개정안에서는 핵심적인 부분이 삭제되거나 수정되었다. 전문에 들어있던 NATO와 관계설정에 대한 내용 삭제, 유 럽이사회의 경제 분야로 권한 확대, 그리고 신규 가입의 만장일치 허가제 등이다.

• 드골이 구상하는 유럽이란 결국 현존하는 공동체의 역할을 하향조정하고, 공동체 에서 초국가적 성격을 없애며, NATO의 체계를 뒤흔들어놓으려는 의도로 해석되었 다. 한마디로 기존의 공동체 기구들의 존재와 운영에 커다란 위협이 되리란 것이었 다. 종국에는 공동체를 정부 간 협력기구로 재편할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 드골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다른 5개국들, 특히 서독과 이탈리아는 EEC와 NATO 를 약화시킬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으며, 프랑스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푸 셰계획에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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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쉐플랜

푸쉐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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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기를 찾는 계기가 된 것은 드골 대통령의 사임이었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퐁피두가 대통령이 되면서 유럽통합의 움직임은 다시 활발 해졌다.

• 1969년 헤이그 정상회담에서 퐁피두Pompidou 대통령의 발의로 유럽 건설은 재 개되었고 그 방향은 EEC의 <확대>뿐 아니라 초기 단계의 <완성>, 경제 통화 동 맹과 정치 연합의 <심화>였다.

• 이 회의에서는 공동시장의 완성, 경제통화연합의 창설을 목적으로 하는 계획 구상, 공동체의 확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구체적인 작업은 각료이사회에서 일임하 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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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EFTA

영국과 EFTA (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E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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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국가들간에 공산품 교역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 원회원국은 오스 트리아·노르웨이·스웨덴·스위스(리히텐슈타인 포함)·핀란드·아이슬란드 등 6개국 이다. 비회원국에 대해서 각 회원국은 독자적인 통상정책을 유지한다.

• 본부는 제네바에 있다.

연두색은 과거 EFTA 회원국이었다가 현재는 EU 회원국 녹색은 현재 EFTA 회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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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EFTA

영국과 EFTA (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E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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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경제협력기구(OEEC)의 회원국들은 유럽 경제공동체(EEC)에 가입을 원치 않 는 나라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 OEEC 자유무역권을 설치해 그 안에 유럽 경제공동 체를 한 단위로 포용하자고 제안했다. 1958년 11월 이를 위한 협상이 결렬되자 오스트리아 ·덴마크·노르웨이·포르투갈·스웨덴·스위스·영국 등 후에 7개국으로 알 려진 '아웃사이드' 집단은 장래에 보다 넓은 자유무역권이 형성될 경우 자국의 협 상권을 강화하기 위해 EFTA에 동참하기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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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EFTA

영국과 EFTA (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EFTA))

• 협약의 원안은 회원국들에게 공산품의 관세 감면과 할당량의 자유화를 허용하고 있다. 또한 EFTA 원안에는 자국의 경제에 가해지는 부담이 과중할 경우 조약규정 에서 제외될 수 있는 조항과 농산물 교역 개방을 위한 쌍무 협정들도 마련되었다.

• 결정사항들은 개별국 정부들의 자발적 이행에 맡겨지며, EFTA가 초국가적 권한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 EFTA는 1959년 11월 7개국이 서명한 스톡홀름 협약에 기초를 두었으며, 1960년 5월부터 가동되었다. 1961년 7월 핀란드가 준회원국이 되었고, 1970년 3월에는 아이슬란드가 정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1973년 1월 영국과 덴마크는 EEC 에 가입함으로써 EFTA에서 탈퇴했다. 포르투갈은 1986년에 EEC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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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EFTA

영국과 EFTA (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E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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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은 1차 EEC 가입신청서를 1961년 8월 10일브뤼셀에 제출하였다. 영국은 영 국 농업에 대한 본질적 이익뿐만 아니라 EFTA 국가들과 그리고 영연방과 특별관 계를 계속 주장하였다. 영국은 아직 EEC가입에 대한 절대적 의사는 없었고, '필요 한 것' 정도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태도는EEC회원국들로부터 진정한 영국 의 의도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베네룩스 3국들은 EEC 내의 프랑스-독일 축에 맞 설 수 있는 세력균형으로서 영국가입을 환영하고 있었지만, 유럽통합에 대한 영국 의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즉,영국의 의도가 임시방편 적인 편의 추구에서 나왔는지 아닌지에 대한 우려는 아직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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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EFTA

영국과 EFTA (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EFTA))

• 협상과정에서 영국은 영연방과 EFTA국가들과 관한 특권을 주장했다. 또 한편으 로 농업부문에서 예외적인 특혜를 부여해 달라고 주장했다.특히 후자는 프랑스를 자극하였다. 결국 영국의 입장은 지원자라기보다는 수혜자가 되려는 인상을 주었 기 때문에 EEC 내회의론자들은 영국의 EEC가입의도에 대해 더욱 강한 의심을 품 게 되었다.

• 결국 영국의 가입은 드골의 거부권 행사로 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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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위기

드골과 공석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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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골이 추구한 '국가연합의 유럽(Europe des Parties)' 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EEC계획이 지연되어야 했고, 프랑스는 그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푸셰계획은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은 쉽지 않았다.

• 푸셰계획은 실패했고, 아데나워의 후임인 에어하르트는 프랑스보다 미국을 선호하 였다. 드골의 로마조약 해석이 기존의 해석과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6개국은 로마조약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었다.

•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노력이 초국가주의에 입각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 한 정부간 협력체로 남을 것인지에 관해서였다. 드골의 프랑스는 후자를 선택하였 고, 다른 5개국은 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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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위기

드골과 공석위기

• 1965년에 표면화된 문제는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유럽의회의 EEC예산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 확대, 두번째는 EEC의 독자적 예산마련, 세번째는 공동농업정책이 다.

• 5개국들과 집행위원회는 공동농업정책과 재정문제를 연관지어 일괄타결을 시도했 고, 프랑스는 농업의 안정을 바라면서도 무국적의 초국가기구에 자국의 예산통제 권과 자원통제권을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 EEC가 CAP에 대한 재정적 조치에 합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프랑스는 1965년 7월 6일 각료이사회에서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빈 의자 empty chair'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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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위기

드골과 공석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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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골은 무엇보다도 일괄타결안에 내포되어 있는 초국가적 요소와 정치적 의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드골은 공동체 구조의 핵심내용을 공격하면서 주권국가들의 연 합으로 이루어진 유럽을 계속 추구하였다.

• 11월, 프랑스는 로마조약 개정을 포함한 공동체의 완벽한 변혁을 주장했고, 프랑 스의 반초국가주의적 입장을 더욱 분명히 했다.

• 이러한 프랑스의 입장에 대해 다른 5개국은 양보하지 않고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 했고, 드골 역시 이에 강하게 맞대응했다.1965년 말에는 공동체가 해체위기에 처 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결정과 지침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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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위기

드골과 공석위기

• 5개국들은 자신들만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든가 아니면 양보해야 했다. 프랑스 역 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프랑스가 5개국들로만 공동체를 구성할 것을 허용할 경우, 5개국은 영국을 가입시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될 것이 분명했다. 프랑스는 복귀해야 했다.

• 프랑스는 1966년 1월 공동체 복귀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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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위기

드골과 공석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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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위기

룩셈부르크 타협

• 1965년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EEC의 여타 5개국은 프랑스를 제자리로 돌려놓 기 위해 공동전선을 펼치게 되었다. 10월 26일에 5개국은 프랑스에 공동체로 복 귀를 종용하면서 문제의 해결은 조약과 (공동체) 기구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분명히 못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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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위기

룩셈부르크 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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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1월 룩셈부르크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회담이 개최되었다. 프랑스는 더 이 상 공동체 조약 개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대신, 가중 다수결 제도의 폐지, EEC 위원회의 역할 축소, 프랑스의 이익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분야에 대한 공동체 업무 일정표 작성을 요구했다.

• 다른 회원국들은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 크게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에, 프랑스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 가중 다수결 표결제도는 광범위한 사용이 금지되었다. 단 EEC 위원회는 그 역할과 독립성을 거의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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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위기

룩셈부르크 타협

• 그 밖에 프랑스의 파업으로 6개월간 마비상태에 있었던 공동체의 업무들이 빠르게 재개되었다. 구조적 위기라는 심한 몸살을 앓으면서도 CAP와 공동시장의 완성을 통해 EEC는 그 발전의 결정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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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위기

룩셈부르크 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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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행부 통합 조약은 1965년 4월 8일 브뤼셀에서 이루어짐. 1967년 7월 1일부로 통합하기로 함.

• ECSC, Euratom, EEC의 공동체 집행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단일위원회를 구성하 였다. 1967년 7월부터 업무에 들어간 이 단일위원회가 유럽공동체(EC :

European Commun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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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데탕트

존슨의 가교(bridge-building)정책

•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은 가교정책 을 통해 케네디가 추진했던 데탕트 정책을 계 승하려 했고 현상유지를 도모하려 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현상유지를 통해 긴장완화 및 데 탕트를 구현하려 했다. 존슨은 전후 동서무역 통제에 대해 대폭 완화하는 가교정책(bridge- building)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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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데탕트

존슨의 가교(bridge-building)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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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국무부의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그리피스(William Griffith)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기 직전인 1961년 7월 가교정책(the policy of bridge- build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평화적 공존을 강조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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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데탕트

존슨의 가교(bridge-building)정책

• 1966년 10월 7일 존슨은 그동안 가교정책을 위한 작업들을 언급하면서 무엇보다 평화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강조하고, 상호공존의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 소련과 동유럽과의 평화공존의 단계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슨은 냉전으로 인 한 분할을 종식시키는 가교정책의 추진을 강조했다. 데탕트와 평화적 공존이 독일 의 재통일보다 더욱 중요했다. 이는 독일의 재통일 포기와 소련과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을 의미했다. 존슨 정부는 독일 통일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는 없었으나 동서간 관계 증진을 위한 건설적인 접근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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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데탕트

존슨의 가교(bridge-building)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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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1월 10일 존슨은 신년 국정연설에서 “우리의 목표는 냉전을 지속하는 것 이 아니라 그것을 종식하는 데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통해 데탕트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드러냈다. 1955년 제네바 협정의 결렬 이후 미국정부는 데탕트에 대한 노 력을 경주해왔다. 또한 실질적으로 제네바 협상의 결렬은 냉전의 종식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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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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