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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단색화’론에 제시된 ‘한국성’과 이의 자연 과학적 해석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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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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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_2020.12.10 심사기간_2021.01.01-14 게재확정일_2021.02.08 DOI https://doi.org/10.47294/KSBDA.22.1.19

한국 ‘단색화’론에 제시된 ‘한국성’과 이의 자연 과학적 해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Koreanness’ Presented in the Discourses on ‘Dansaekhwa’ and Naturalistic Interpretation of It.

원영태, 인천대학교 조형연구소

Won, Yung Tae_Arts Research Center, Incheon National University

차례 1. 서론

2. 정체성 논의의 타당성 2.1. 개인의 정체성 관련 논쟁 2.2. 공동체 및 집단의 정체성 논쟁

3. ‘타자성’으로서의 한국성과 그 극복 3.1. 야나기 무네요시와 ‘비애의 미’

3.2. ‘졸박(拙撲)’과 ‘회사후소(繪事後素)’

3.2.1. 졸박 3.2.2. 회사후소

3.3. 한국성과 그 타자성 논쟁

4. ‘범 동아시아적 세계관’의 자연과학적 해석 4.1. 주객 동일계(同一界)의 원칙

4.2. 인과율과 연기론(緣起論)

4.3. 공(空, sunyata)과 무아(無我, anatman) 5. 결론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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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단색화’론에 제시된 ‘한국성’과 이의 자연 과학적 해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Koreanness’ Presented in the Discourses on ‘Dansaekhwa’ and Naturalistic Interpretation of It.

원영태, 인천대학교 조형연구소

Won, Yung Tae_Arts Research Center, Incheon National University

요약

중심어 단색화 한국성 졸박 회사후소 비애의 미 범 자연적 세계관 범 동아시아적 미학 양자역학

이 논문은 한국 단색화론에서 제시된 기존의 ‘한국성’에 관련된 논의를 역사적, 문화적 문맥에서 비판 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현대 양자역학의 기본원리와 비교 검토하여, ‘범 동아시아적 미학’이라는 새로 운 논의의 틀을 제시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연구의 방법은 이를 조선시대의 미학과 연관 지은 통 시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아울러 ‘애상의 미’, ‘비애의 미’라 일컬어지는 식민지 미학을 근대 일본문화 의 맥락에서 파악하여 비교 분석한다. 이를 통해 단색화가 “식민지 미학의 현대적 현현”과 ‘타자성’을 가졌다는 비판을 검증하고, 이에 대한 연구자의 대안을 제시한다. 연구자는 우선, ‘한국성’이 가지는 소박함의 원천을 조선 성리학의 정점인 퇴계 이황의 ‘졸박(拙樸)’에서 찾았다. 이는 고유섭의 ‘무기교 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그리고 이일의 ‘범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제시되는 한국성의 원천이 된다. 특히 주요논점인 ‘흰색’의 기원을 공자의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에서 찾았다. 이 말은 본바 탕 즉, ‘흰색’을 먼저 칠한 후에 그림을 그린다는 본래의 의미를 넘어서 인격을 도야하는 과정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예를 갖출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인격의 도야 혹은 수행과정은 현대 단색화에서 나타 나는 ‘반복성’을 통한 ‘수신’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애상의 미’, ‘비애의 미’는 ‘와비사비’와 ‘모노노아와레’라는 일본의 전통미학으로부터 기인했음을 밝혀, 조선의 ‘졸박’을 일 본인들은 ‘무상’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애상의 미’로 읽은 것으로 분석했다. 단색화론에서 제시된 범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20세기에 들어 확립된 양자역학의 몇몇 기본원리와 일맥상통함을 밝힘으로써, 연구자는 단색화론이 국제무대에서 보편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ABSTRACT

Keywords Dansaekhwa Koreanness Jol Bahk(졸박, 拙撲) Hoisahuso(회사후소 繪事後素),

beauty of sadness pan-east Asian

world-view quantum physics

This thesis is intended to explore the nature of ‘Koreanness’ presented in the discourses of Dansaekhwa from critical perspective and suggest a new interpretation of the concept based on some findings of modern quantum physics. Historical and cultural analysis of ‘Koreanness’ is conducted in the context of traditional aesthetics of Joseon Dynasty, namely ‘Jol bhak’(졸박, 拙 撲), compared with that of Yanagi Muneyoshi, namely ‘the aesthetics of sadnes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I delve into the notion of Jol bhak, or the artless art of Korea first to trace the origin of this tradition that prevailed the art of Confucius Joseon Dynasty. Yi Hwang, one of the greatest scholars of this period, found the ultimate beauty of Jol Bahk in the pristine nature, which reveals that human beings are only a small part of the great Mother Nature. Jol bahk is not only a principle of living for a hermit scholar with a humble attitude, but also a principle of Korean aesthetics often characterized by the term ‘artless art’ and ‘unplanned plan.’

In particular, the notion of Hoisahuso(회사후소, 繪事後素) is interpreted not only as painting the surface in white for preparation, but also as a process of cultivating one’s mind. This process could be interpreted as the ‘repetitive actions’ that signify ‘cultivating one’s mind’ in the practices of Dansaekhwa in the 70s. On the other hand, Yanagi’s interpretation of this simple and naive beauty of Joseon artifacts comes from the traditional Japanese aesthetics of Wabi-sabi, and Mono-no-aware influenced by Japanese Buddhism. This artless art of the nameless craftsman of Joseon gave Yanagi an religious inspiration of “enlightenment of everyday people.” I also find that this idea of pan-East Asian aesthetics shares three common features with modern quantum physics: subject and object as inseparable parts in the same system, continuous chain of causality, and the notion of emptiness. This would be an universal aesthetic value that Dansaekhwa of modern Korea presents.

이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연구비를 지원받아 수행되었습니다.

과제번호:

2019S1A5B5A0710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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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일반적으로 ‘단색화’라는 용어는 1970년대에 한국화단의 주류를 이룬 단색계열의 추상회화 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미술사학자 김영나는 이 용어가 당시 ‘모노크롬화’로 불린 것에 대한 번역에 불과하며 학술적으로 확립된 것이 아님을 지적했고, 더 나아가 장준 영의 경우는 이를 “엉터리 합성어”라고 혹평하며 이것이 가진 개념의 결여를 지적했다.

실제로 ‘단색화’는 최근 2000년대에 만들어져 사용된 용어로서 심지어 단색화의 대표적 미 술가 중의 하나인 박서보 본인도 초기에는 단색화라는 용어에 동의할 수 없음을 피력하기도 했었다. 특히 1970년 당시 ‘한국적 미니멀리즘’으로 불리기도 했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 용어 가 가지는 이론적 혹은 개념적 결핍은 더욱 두드러져 보이기도 한다.

2011년 <이우환 : 영원의 창조(Lee Ufan: Making Eternity)>전이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에 열렸고 이어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의 단색화전> 전이 있었다. 그런데, 국내 이론 및 비평계에서 이러한 용어사용의 적절성 그리고 학술적 개념의 정립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2013년 재미 미술사학자인 조안 키(Joan Kee)의 영문 저서 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 가 출간되면서 단색화라는 용어는 국제무대에서 한국 현대를 대표하는 추상미술로 서구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 다. 단색화는 서구 미술시장의 이례적 주목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로 미디어와 미술시장에 서 단색화 작품들이 재조명되면서 연이은 가치상승이 이어지게 되었다. 심상용 교수는 이 현상을 단색조 회화를 재조명할 국내 학계, 비평계의 필요나 움직임이 생기기 전에 시장이 인위적으로 과도하게 개입하여 만들어낸 신화로 분석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 용어가 관례 화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했다(Shim, S., 2016, p.74).

그러나, 진휘연 교수가 이미 지적했듯이 21세기 현대미술에서 이론과 비평의 위상은 과거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한 예술의 사조를 마치 수학적 법칙성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고, 그 법칙성에 의거해 미술의 향배를 결정하고 이끌려 했던 1950년대와 60년대 형 식주의 시대와는 특히 거리가 멀다. 언어의 한계, 즉 기표와 기의가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는 점에 바탕을 둔 후기구조주의의 적 접근법에 따르면 언어로 된 진술은 그 타당성이 필연 적으로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평과 이론의 권위와 타당성은 회의 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Jin, W., 2015, p.374). 진휘연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론과 비평이 가진 분석적, 학문적 논의 대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쉬운 언어의 저널리즘 이 이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하에 작품의 가치를 측정할만한 유일한 객관 적 근거는 가격, 판매지수 일 수밖에 없게 되고 작가의 평가는 이러한 미술시장에서의 수치 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고 그는 밝혔다.(Jin, W., 2015) 따라서 심상용의 비판은 단지 단 색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어쩌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이 당면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인 지도 모른다.

단색화는 또한 이를 분석하는 이론가에 따라 ‘단색조 회화’, ‘한국의 모노크롬 페인팅’ 등으 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이들 용어의 적절성 여부가 아닌 그것이 가지는

‘한국성’과 관련된 논쟁과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 라서, 이 논문에서는 현재 일반적으로 국, 내외에서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단색화’라는 용어 를 통일해 사용하기로 한다.

1970년대의 단색화는 주로 당대의 이론가, 비평가들에 의해 모더니즘의 한국적 수용 혹은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이해되어 소위 ‘한국성’을 구현한 한국의 대표적 현대미술로 미술로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성’에 관한 논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이러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시대착오 적이며, 회의적이라는 분위기도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는 우선 이러한 정체 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의 정당성을 논의할 것이다.

1970년대를 주도한 ‘단색화’ 작가들과 동시대 비평가들에 의해 제시되는 단색화의 한국성 논의는 그 배경에 있어서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책에 부응하려는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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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의 움직임과 관계가 깊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 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에 의해 규정된 ‘타자성’이 강하 다는 논조가 두드러진다. 윤난지 교수는 1970년대 해당 시대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단색 화’의 ‘백색’ 논의를 일본 비평가의 관점을 답습하고 있다고 보았고, 심상용 또한 “일본인의 시각에서 탄생한 담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시했다(Shim, S., p.67). 이러한 일본인에 의해 부여된 ‘타자성으로서 한국성’에 관한 논의는 과거 일제 강점기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미술론> 비판에서부터, 1975년 일본 동경에서 있었던 <한국의 5인의 작가, 다섯 가 지 흰색> 전을 기획한 야마모토 다카시(山本孝)의 비평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시되 었다.

이 논문은 한국 단색화론에서 제시된 기존의 ‘한국성’에 관련된 논의를 역사적, 문화적 문맥 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이를 현대 양자역학의 기본원리와 비교 검토하여, ‘범 동아시아적 미학’이라는 새로운 논의의 틀을 제시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연구의 방법은 ‘한국성’ 논의를 조선 시대의 미학 전통과 연관 지어 통시적 관점에서 분석하 고, 아울러 ‘애상의 미’, ‘비애의 미’라 일컬어지는 식민지 미학을 근대 일본문화의 맥락에서 파악하여 비교 분석한다. 이를 통해 단색화가 “식민지 미학의 현대적 현현”과 ‘타자성’을 가 졌다는 비판을 검증하고,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모색하여 연구자의 대안을 제시 하고자 한다.

2. 정체성 논의의 타당성

한국성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논의들이 있다.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의 광풍에 영향을 받은 최근의 현대미술에서 “지역, 혹은 특정한 공동체의 정체성 의 논의가 과연 타당한가?”라는 질문에 관한 것이다.

2.1. 개인의 정체성 관련 논쟁

우선 첫 번째로 고정된 자아, 주체의 정체성에 관한 담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로 대변되었던 서양 근대의 확고했던 것으로 믿어졌던 인식과 실존의 일치는 근대 과학과 그 객관성의 토대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일체의 의식적 사유를 조정하는 ‘무 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한 해체를 시도했었다. 이어 라캉의 주체론에 따르면 명석 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코기토는 거울 이미지일 뿐이며 환상, 기만 이라는 것이다. 주체는 더 나아가 유동적이고, 또한 욕망으로 인한 분열을 겪게 된다. 이렇 게 해체된 주체에게 기존의 자율적, 절대적 성격을 갖는 개인의 정체성은 더 존재하기 힘들 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공동체의 정체성 이전에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정의 자체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이후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은 하나의 정교한 추론에 근거한 사변적인 (speculative) 논리체계로, 사실 그 타당성을 자연 과학적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자연 과학적 언어로 본다면 하나의 가설에 해당할 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 식’의 개념을 통해 충동적 주체의 개념을 설정해 이것이 기존의 이성적 주체와 갈등이 있을 때 분열이 생긴다는 통찰력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의 지평 넓혔다.

그러나, 서구와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한국에서 이러한 이론체계 전체를 도식적으 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를 들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 스’는 한국의 남성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다. 세계화가 많이 진행되어 서구문화에 더욱 익숙한 오늘날 한국 남성들도 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는 힘들다.

라캉은 주체라는 개념의 형성과정을 정교하게 분석해 인간의 욕망하는 주체는 불완전하며, 파편적이고 인간의 의식은 영원히 실재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언어라는 기표에 의해 정의되는 상징계의 자아는 실재계의 진정한 실제와 괴리되어있기 때문에, 개인 은 분열적이고, 끊임없이 욕망한다. 그런데, 실재계의 진정한 자아의 실체는 과연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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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사상, 특히 불교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모든 개체와 현상은 끊임없는 인과관계 속 에 존재하며, 따라서 이러한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개체는 존재하 지 않는다고 보고 이를 제법무아(난法無我)라 칭한다. 이러한 존재하지 않는 실재를 상정하 기 때문에 아상(我相)이 생기고 이로 인해 집착이 생김을 불교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모든 현상은 생성, 변화, 소멸한다고 보는 불교의 제행무상(난行無常)이나 노자(老 子)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의 원리를 생각해 본다면, 범 동아시아 사상에서는 고정 불변하는 실재를 상정하지 않기에 이러한 라캉식의 유동적 주체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면 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이 논문의 4장에서는, 현대 물리학에서 전자나 빛 알과 같은 소립자의 경우 측정을 통 해 그 물리량을 얻으려 할 때, 이들이 보여주는 데이터의 값을 분석해 보면 이들을 하나의 고정된 실제로 정의할 수 없었음을 논증한다. 따라서, 이러한 결과들을 고려할 때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정의가 필요함이 요구된다. 이 논문에서는 한 개체의 정체성은 변화 속 의 특정한 시점, 특정한 문맥에서의 특질로 정의하기로 한다.

2.2. 공동체 및 집단의 정체성 논쟁

오늘날 포스토모던 사회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은 근대의 자율적이고 절대 적 실체로서의 주체인 개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Jin, H., 2015, p.385).

사회적 조건, 제도와 관행, 그리고 특정한 주변과의 문맥 속에서 개인은 더 이상 독립된 주 체로서 기능할 수 없고 상호 유사한 형태의 반응을 재생산하는 존재라고 진휘연은 분석한 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가변적 개인의 주체 상태를 전제할 때 지역의 ‘공동체가 가지는 정체 성’ 문제는 따라서 회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진휘연은 “특정 지역의 민족, 종교, 인종의 공동체는 가상의 개념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축하려는 상상적 작동을 요구하는 시 도 위에 존재”하게 된다고 본다(Jin, H., 2015). 보다 근본적으로 라캉식의 가변적, 유동적 인 주체성을 가진 개체들이 모여, 집단으로서 어떠한 공통적 특성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집단적인 믿음 혹은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가지는 허구성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를 믿는 집단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하다. 종교의 예를 들면, 하나님이라는 인격신의 존재를 믿 는 것은 한 개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상의 경우도 현실 세계에서 주체 사상체제나 공산주의 체제가 가진 이념과 현실과의 괴리, 그리고 그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강하게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정체성 의식을 제공하지 않는가? 진휘연이 언 급한 케스터(Grant Kester)의 수정주의적 견해, 즉 “지역 혹은 공동체를 대표할 수 있는 통 일된 성격의 도출에 대한 미온적인 긍정”은 이러한 관점을 지지해 준다고 본다(Jin, W., 2015).

이미 연구자는 앞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논함에 있어 라캉이 실재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정불변한 ‘실재’라는 것을 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전통적으로 상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 을 지적했다. 끊임없는 다른 대상과의 상호작용과 이로 인한 인과관계 속에 개인의 정체성 이라 믿어지는 특징은 다르게 읽힐 수 있다. 노자(老者)식으로 말한다면 어떠한 대상의 정 체성을 언어로 정의하는 순간, 즉 그것을 도(道)라고 하는 순간, 그 언어로 된 진술은 그것 의 변화하는 속성을 더는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道可道非常道). 라캉식의 상징계의 언어 로 기표 되는 것과 본질 혹은 실재계와의 간극에서 오는 분열, 그리고 이에 기인한 지속적인 욕망에 의한 유동적인 주체개념은 결국은 고정적인 주체를 부정하기에 동아시아의 변화하는 정체성의 개념과 상통할 수 있다.

실재를 상정하지 않는 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는 본디 모든 개체는 타자와의 상호관계와 이 로 인한 인과관계 속에 자리 잡고 있고, 시간과 문맥에 따라 변화하거나 다르게 읽히는 속성 을 가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 가지 방식의 사유법을 고려한다면 개인이나 공동체의 정체 성은 역시 다음과 같은 형태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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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개체나 집단의 정체성은 유동적, 가변적이므로 정체성의 의미는 특정 시점에서 특정한 개인, 혹은 공동체의 사회문화의 문맥에서 파악된 특질을 말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그 리고 이러한 특정한 성질의 변화과정을 통시적으로 추적해 그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타자성’으로서의 한국성과 그 극복

단색화가 가진 한국성은 1970년대 한국이라는 특정한 조건을 필연적으로 상정한다. 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민족주의 분위기 하에, 정치 분야에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로 당 시의 정치체제를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색화는 당시에 ‘한국적 모더니즘’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용어가 상징하듯이 당시의 최신 사조였던 서구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형식, 그 중에서도 미니멀리즘을 한국의 전통문화의 맥락과 사상으로 해석하여 이일, 오광수 등의 비 평가들은 단색화가 한국적 미감과 정서를 반영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최근 미술사학자 김정희 교수는 ‘한국적 미’라는 개념이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분석 해 “백색의 미학은 일본인에 의해 주조된 한국적인 미에 대한 해석”이고, 이것이 한국 미술 계에서 수용된 것이라 보고, “백색 담론을 한국성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일본적인 것”이라 보았다(Kim, J., 2006. pp.195-236). 심상용 교수는 이어 1975년 일본 동경에서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에 의해 개최된 <5인의 한국작가, 다섯 가지 흰색> 전, 그리고 1977년의 도쿄 센트럴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을 계기로 공식화된 ‘한국적 미감’

을 식민지 시기 “야나기 무네요시의 1920년대적 오리엔탈리즘의 현대적 현현”으로 보았다 (Shim, S., p.71). 그뿐만 아니라 심상용은 재미 미술사학자 조안 키(Joan Kee)도 “백색, 흑 색, 황색이 한국의 자연과 하늘 땅을 표상한다”라는 분석과 이해가 일본 비평가들의 분석에 의한 것임을 언급했다(Shim, S., p.72).

사실 이러한 관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문학 평론가 김윤수와 문명대가 야나기 의 분석을 식민사관이라 규정한 이래 야나기를 연상시키는 ‘백색’ 과 이와 연관된 ‘비애의 미’ 그리고 그와 연관된 일체의 논의는 일본의 미학이라는 등식이 기정사실로 되었다. 조선 의 미술을 이러한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은 야나기가 1922년 출간한 ‘조선과 그 예술’에서 출발하는데 3.1 운동 이후 일제의 조선탄압이 극심해진 시기에 그의 ‘비애의 미’는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 대한 연민과 동정으로 해석되었고 더 나아가 일본의 문화통치에 대한 암묵적 동조라고 비판받게 되었다(Choi, Y., 2009, p.80). 그렇다면, 한국의 문학, 미술계가 당연시 하는 이러한 관점은 과연 타당한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비애의 미”가 가지는 의미를 일본 미학의 문맥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3.1. 야나기 무네요시와 ‘비애의 미’

‘비애의 미’는 한국의 비평가들이 분석한 의미와는 달리 일본문화의 맥락에서는 특정한 대상 에 느끼는 찰나적, 순간적인 종교적 깨달음과 연관되는 아름다움의 의미가 강하다.

최유경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종교철학을 전공했고 그가 󰡔시라카바(白樺)󰡕라는 문학 동인지 의 동인이었다는 점에 착안해 그가 조선의 미를 종교적 관점에서 분석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Choi, Y., 2009). 야나기는 1913년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의 신비주의자이자 낭 만주의 시인, 화가이기도 한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 평전을 출간한 다. 이를 계기로 그는 블레이크의 상상, 직관, 자연관에 영향을 받는다. 특히 블레이크의 “의 미 없는 존재는 없다.”라는 일체의 존재에 대한 긍정적 관점에 영향을 받아 동양 사상, 특히

‘상상(想像)’이라는 개념과 무(無), 공(空)의 개념과의 연계점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불교와 도교, 특히 선에 몰두하며 동아시아의 고전과 예술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Mari, N., The Times and Thought of Yanagi Soetsu, pp.89-93, 여기서는 Choi, Y., 2009, p.87).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많은 일본인 학자들이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서양에 대한 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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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렉스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기존의 서양에 대한 맹목적 추종에서 벗어나 일본의 사상과 미의식 연구로 회귀했던 시대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이 시기부터 이들은 재 일 교포 역사학자 이성시(李成市) 와세다대학 교수의 지적대로 일본(혹은 동양) 대 서양이 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 속에 일본문화를 분석했다(Kim, Y., 2007, p.220). 구체적으로는 다도, 선 사상, 일본의 전통 예술 등을 서구와 비교 연구하며 일본, 나아가 동양 문화의 우수 성을 발견하려 했다.

야나기는 서구의 논리적 관점에서 벗어나 동양의 ‘직관’으로 사물을 인식할 때 일본적인 것 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고, 대상과 주체가 일치되는 찰나에, 초월적 그 무엇을 느끼는 순간이 미적이며 종교적 순간이라고 보았다(Choi, Y., 2009).

이러한 찰나와 순간에 관한 관심은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이러한 일본의 전통 사상을 서양철학의 방식으로 설명하려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양 근대의 주체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 이를 넘어서자는 ‘근대초극론’을 주장하였던 교토학파의 수장 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유럽의 제임스(W. James 1842~1910)의 근본적 경험론(Essays in radical empiricism), 마하(E. Mach 1838~1916)의 경험비판론(Empiriocritizismus), 아베 나리우스 (R. Avenarius 1843~1896)의 순수경험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Kosaka Kunitsugu,

About An Inquiry into the Good

, 小坂国継 「󰡔善の研究󰡕について」, 西田幾 多郎 󰡔善の研究󰡕, 講談社学術文庫, 2006, p.474).

선불교에 심취해 실제로 평생 선(禪)을 수련했던 니시다는 주체와 대상일 일체가 되는 물아 일체의 특정한 순간을 아베나리우스의 용어를 빌어 ‘순수경험’이라 칭했고 ‘주(主)도 없고 객(客)도 없는 지식과 대상이 완전히 합일한 상태’로 보았다.(Won, Y., 2017, pp.360-361) 그는 이러한 찰나적 순수경험상태를 불교적 용어라 할 수 있는 ‘절대무(絶對無)’라고 정의했다.

일반적으로 일본 전통 불교미술이 내포하는 ‘극락정토’의 세계관과는 달리, 근대화기의 일본 학자들은 서양철학의 방식으로 일본의 전통적 불교 사상을 표현하려 했다. 따라서, 당시 일 본은 자신들의 불교적 사유방식과 가장 근접한 하이데거나 실존주의의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신체의 지각을 통해 주체와 대상이 만나는 찰나에 초점을 맞춘 현상학적 접 근법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특정한 찰나에 관한 관심은 근대 일본의 철학 적 사유가 가지는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니시다 본인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13인의 제자 들은 <근대초극회의>에 참여하였고 이들의 이념은 전시 이념적 총력전의 형태로 태평양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최유경은 소설가 나쯔메 소세키의 소설에서도 이러한 “찰나의 순간이 가지는 초월적 그 무 엇인가를 만나는 미적이며 종교적 순간”을 묘사하는 장면을 언급한다. 소설 󰡔산시로(三四 郞)󰡕라는 작품에서 하라구치라는 화가가 모델 미치코를 그리는 장면에서 그려진 그림 속의 여인과 모델로서의 여인이 일치하는 것을 느끼는 찰나가 그것이다.(Choi, Y., p.99) 이러한 종교적인 순간을 ‘견신(見神)의 경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찰나에 보는 이는 자신의 존 재는 잊은 채 대상에 몰두하게 된다. 이 찰나는 주(主) 와 객(客), 물(物) 과 아(我)가 합일 된 순간으로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순간이며, 찰나이기 때문에 금방 사라지게 되어 무상(無 常)하다. 따라서 ‘아와레’ 즉, 애상(哀傷)하다. 애상함은 또한 애달픔, 고독감, 쓸슬함과 연관 이 되며, 여기에 비애(悲哀)의 미(美)가 있는 것이다.

근대 제국주의 시대 이전의 에도시대의 미학도 마찬가지의 문맥에서 파악할 수 있다. 에도 시대 하이쿠의 대표적인 시인 바쇼의 가장 널리 알려진 하이쿠도 근대의 나쯔메 소세키와 마찬가지로 찰나적 순간의 종교적 깨달음을 읊고 있다.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古池や蛙飛び込む水の音)”

오래된 연못이 상징하는 변함없는 영겁의 시간과 개구리가 물속에 뛰어드는 그 생생한 순 간, 즉 살아있는 생명의 순간이 대비된다. 영겁의 시간과 찰나를 대조하고 이를 통해 삶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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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동시에 대조시키며 삶은 순간일 뿐이며, 결국 ‘무상함’을 깨닫는 순간을 나타내는 것 이다(Won, Y., pp.356-357).

이러한 불교적 색채를 띤 ‘비애의 미’는 일본인의 미의식의 저변에 깔려있다. 특히, 일본인들 이 어떠한 의미 있는 사물에 대해 몰입하고 공감하면서 순간적으로 물아일체의 감정을 느낄 때 이를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사물의 애상미)’라고 칭한다. 봄의 정취를 맘껏 느끼게 해주는 만개한 벚꽃은 그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주곤 곧 시들어 떨어진다. 무상하고 애상 하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벚꽃은 더 아름답다.

이러한 찰나적 물아일체를 통해 느끼는 제법무아(난法無我)와 제행무상(난行無常)의 분위 기는 야나기가 민예품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도 볼 수 있다. 그는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무명(無名)의 조선 장인들이 어떠한 미적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로 생활 속에 만들어 낸 이러한 물건들을 보고 범부성불(凡夫成佛)의 큰 깨달음 얻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기물에서 무명 장인들의 손길을 느끼며 애상함(아와레)을 느낀다. 최유경에 따르면 아와레는 “비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연민, 마음속 깊은 감동, 사물에 대한 정취, 어찌 할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야나기에게 있어서 조선 도자기나 민예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닌 설법이며 부처이며 깨달음의 순간”인 것이다.(Choi, Y., 2009, p.101) 야나기는 순수미술과 공예라는 근대 서양식의 장르 구분에서 벗어나 동양의 전통적 관점을 유지한다. 즉, 천재적 예술적 능력을 갖춘 작가 개인이 아닌, 조선의 무명의 도공들이 만든 소박한 일상용품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미감이라 할 수 있는 ‘모자라고 부족함’이 주는 ‘와비 (侘び)’, 외롭고 쓸쓸한 ‘사비(寂び)’의 정서, 그리고 사물의 애상미, 즉 ‘모노노아와레’를 느 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야나기는 공예를 ‘믿음(信)의 세계를 구하는 마음의 기 록’으로 보고 종교는 곧 미(美)로 보며, “미와 종교는 불이(不二)의 문제”로 이해했다(Choi, Y., p.80).

찰나의 순간의 물아일체 적 미적 체험을 종교적 깨달음의 순간과 동일시 하는 태도는 연구 자는 일본 지배층 사무라이 문화의 특징에 기인한다고 본다. 사무라이는 항상 크고 작은 전 쟁 속에 죽음 곁에 있다. 진검승부는 항상 찰나에 의해 결정되며, 촌각의 시간이 곧 삶과 죽 음을 결정한다. 임박했을지 모르는 죽음의 운명은 한잔의 차를 마시는 의식과 함께 불교의 깨달음, 즉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거쳐서 열반적정의 평안한 마음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다.

지배층 사무라이의 문화는 일반 장인들, 농부에게도 영향을 주어, 일본인들은 ‘열심히 노력 한다’라는 말을 ‘잇쇼겐메이(一生懸命)’ 즉 ‘한평생 목숨을 걸고 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본디 一所懸命에서 온 것으로 한 장소(一所), 즉 조상으로 물려받은 영지를 목숨(命) 을 걸고(懸) 지킨다는 사무라이의 결기를 의미하는 것에서 왔다고 한다.

한가지의 일을 함에 있어 일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한, 따라서 지나치게 손이 많 이 간, 정교하나 기계적 인공미가 보이는 일본의 공예품에 비해 조선의 백자, 민예품에 두드 러진 천연덕스러운 자연스러움, 소박함이 야나기의 종교적 미감을 자극한 것이다. 일본 민예 운동의 아버지라 불린 그가 “조선의 미는 고유하고 독특하여 결코 범할 수 없다. (중략) 의 심할 여지 없이 누구의 모방도 추정도 허용하지 않는 자율의 아름다움이 있다”라고 말한 것 은 이러한 이유이다.

이러한 점은 미국의 일본 문화사 전문가 폴 발리(Paul Varley)가 정의한 일본 미학의 특징을 통해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인은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beauty in nature)’에 최고의 미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본다(Varley, P., 2011, p.6).

특히 그가 말하는 ‘자연스러움(naturalness)’이란 특정한 일본문화 맥락을 말하는 것인데,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것보다는 ‘덧없는 것(the fleeting)’, ‘스러져 가는 것(the perishable)’,

‘깨어지기 쉬운 것(the fragile)’, ‘단순하고 소박한 것(the simple and plain), ‘우아한 것 (the elegant)’, 절제된 것(the restrained)’, ‘미묘하고 암시적인 것(the subtle and suggestive)’, 그리고 더 나아가 ‘시들고 차갑고 외로운 것(the withered, cold and lonely)’, 불규칙한 것(irregularity), ‘비대칭적인 것(asymmetry)’ 등에 예민하며 특히 “시간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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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Varley, P., 2011). 폴 발리의 ‘자연스러움’이 라는 개념과 상술한 대부분의 미적 가치 및 기준은 사실 많은 부분이 뒤에 상술할 조선 미 술과 공예의 특징과 유사하다. 야나기는 그들 기준으로 보아 모방할 수 없는 조선백자와 민 예품이 가진 자연스러움과 소박함에서 더욱 탁월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야나기가 일본 공예와 예술의 영감의 원천이자, 뛰어난 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조선의 예 술품을 보며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의 현실과의 괴리에 대해 연민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말한 ‘비애의 미’, ‘애상의 미’가 식민지 조선의 미술 자체를 열등한 것으로 깎아내림으 로써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그는 조선의 백자와 민예품에서 일본인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찰나적, 초월적 종교적 깨달음의 요소들이 함축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3.2. 졸박(拙樸)과 회사후소(繪事後素) 3.2.1. 졸박(拙樸)

일본의 학자들이나 한국의 일본 전문가들은 흔히 삼국시대와 불교가 국교였고 말기에 무신 정변이 있었던 고려 시대의 사회와 문화가 일본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본다. 특히 야나기 무 네요시가 직접 언급하였던 교토의 나라의 박물관이나 호류지의 유적은 이 시기의 일본에 도 래한 한반도 문화의 살아있는 화석이다.

이 두 나라의 문화의 차이 벌어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유교를 중심으로 하며 불교를 배척한 조선왕조가 성립되면서다. 특히, 신유학은 남송의 주희(朱熹)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중국에 서는 미미하였고 조선에서 만개하게 된다. 조선에서 이러한 성리학 중심의 지배계층문화가 약 500년 가까이 지속 되면서 조선과 일본과의 문화의 차이는 벌어지게 된다. 조선 사회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등 어느 것 하나 성리학적 사유를 벗어 나 존재하기 어려웠다(Shin, D., 2006, P.137).” 한학자 신두환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 자인 퇴계와 율곡을 비롯한 많은 성리학자에게는 졸박(拙樸)이라는 취향”이 존재한다고 본 다(Shin, D., p.135).

졸(拙)은 ‘꾸미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박(樸)은 ‘순박하다’라는 의미로 朴과 의미가 통한 다. 이와 연관 지어 ‘拙朴’은 ‘박실하나 꾸미는 지혜는 부족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신두환은 이러한 졸박의 미학적 개념을 역사적 문맥에서 파악해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예술을 분 석하는 핵심어로 활용했다.

신두환은 역사적으로 졸박의 시초를 老子로 본다. 노자는 ‘대교약졸(大巧若拙)’라는 말을 통 해 “크게 교묘한 것은 졸렬한 듯 보이고, 아주 잘하는 말은 더듬는 듯 보인다”고 하여 최고 의 꾸밈은 꾸미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Shin, D., 2006).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자연의 미학’이며 ‘달관의 미학’이며 꾸밈이 없는 ‘비인공성의 미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졸박은 단순히 예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장자(壯者)는 제자가 처신에 관해 묻자 撲의 의미를 얘기하며 “나는 材와 不材 사이에 있으련다.” 하여 지나치게 자신의 재능 을 드러내지도, 혹은 모자라 보이지도 않게 하려는 고도의 처세관을 보여줬다.(Shin, D., Ibid) 주자(朱子)의 “드러내는 것은 못남이요 감추는 것은 재주”라든가, “졸(拙) 할 지언정 교(狡)하지는 말라.”라는 원론은 행실과 처세의 원리같이 작용하기도 한다(Shin, D., 2006).

그러므로, 졸박은 노자와 장자, 유가를 아우르는 행실의 방식, 혹은 처세술부터 예술의 원리 까지 다양하게 쓰임을 볼 수 있다.

중문학자 팽철호 국민대 교수는 도연명(陶淵明)과 당송 8대가 중의 하나인 한유(韓愈)의 예 를 들어 “젊고, 출사하여 벼슬에 있을 때는 유교를 따르며, 나이 들고 궁(窮)하게 되었을 때 는 자연으로 돌아와 도가와 불교에 심취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팽철 호 교수와의 인터뷰, 2020년 11월 29일) 조선의 정약용의 경우 유배지에서 불교의 승려와 교류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치세(治世)의 원리로서 학문을 닦고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오르고, 이를 통해 이름을 남기거나 후손을 통해 죽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 했던 유가 들도 궁극적으로 도가와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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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유교와 도가 및 불교는 상호 보완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팽철호 교수는 분 석한다.

중국에서 미약했던 성리학이 조선에서 꽃을 피웠듯이, 졸박이라는 개념도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영향으로 조선의 미학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퇴계는 시 「차황중거원일운 병진 次黃仲擧元日韻丙辰」에서 졸박을 직접 언급한다.

졸박유래득자천 拙朴由來得自天 졸박은 본래 하늘에서 얻는 것이라, 추심방촉매흔연 追尋芳躅每欣然 선현의 자취 좇아갈 때면 매번 기쁘네.

총명차일비전일 聰明此日非前日 총명함은 오늘이 어제와 같지 않지만, 습기금년사거년 習氣今年似去年 습기는 올해가 작년 같구나.

(‘習氣’는 불교 용어로 ‘남아 있는 기운’ 또는 ‘버릇’을 의미한다.)

위는 원문인 퇴계의 시 앞부분을 한문학 전공인 신두환의 논문에서 재인용한 것이나, 정확 한 의미 전달을 위해 중문학자 팽철호 교수의 해석에 따랐다. 첫 행의 得自天에서 天의 개념 을 팽철호는 “원초적이고 인간의 손이 닿기 이전의 자연상태”로 보고 있다. 이를 미학적 개 념으로 해석하면 ‘자연미’를 말하는 것이며, 신두환은 이를 소위 ‘무교지교(無巧之巧)’ 즉

‘무기교의 기교’의 원천을 말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특이한 점은 성리학자인 퇴계도 ‘습 기’라는 불교식 용어를 사용함을 볼 수 있다.

퇴계는 졸박을 ‘천성의 회복’과 ‘인격의 수양’과 연관 지어 인식하고, 이것의 수행장소를 산 수 공간, 즉 자연에서 찾았다(Shin, D., 2006, p.150). 율곡 이이 역시 석담구곡을 경영하며

<고산구곡가>를 지은 영향으로 조선 후기까지의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유생이 온통 구곡 의 이미지를 가진 시를 추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두환은 율곡의 시를 분석해 ‘달관’, ‘담 박’, ‘진솔’, ‘청아’, ‘안분지족’, 순박, ‘비인공성’ 등을 그 특징으로 정의한다(Shin, D., 2006).

고유섭은 조선의 미술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등의 용어로 정의했다.

이일의 단색화론도 “무기교의 기교, 무작위성”을 강조함으로써 고유섭과 일맥상통한 해석을 내 놓고 있다.

현재, 이러한 용어는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이며, 따라서 조선의 미술을 일본식민지 미학의 영향 속에 두었다는 비판 속에 있다. 그러나, 앞에서 논증했듯이 이일의 ‘범자연주의 적 세계관’과 고유섭의 조선미술론의 원류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로부터 찾아야 함이 마 땅함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졸박의 원 개념이 노자로부터 시작되었고, 성리학 역시 주자(朱子)에서 씨앗이 뿌려 진 것을 예로 들어 이를 중국 미학이라 칭하며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유래에만 국한된 것이다. 일국의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이러한 졸박의 ‘자연미’를 가장 잘 구현한 것은 조선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같은 자연 미를 말하지만, 중국의 것은 과장되기 일쑤고, 일본은 지나치게 인공적, 기계적인 자연미를 제시한다. 주자의 신유학도 중국은 발상지였지만 미미했고, 조선에서 만개했다. 예도합일(藝 道合一)의 원칙에 따라 성리학과 졸박의 개념은 조선에서 국가의 행정, 법률, 사회, 문화 전 반을 지배하는 보편적 원리가 된 것이고, 이들은 지배계층의 생활원리가 되었으며 시, 서, 화, 등을 지배하는 미학의 원리가 되었다. 이는 또한 조각, 건축, 도자기나 민예품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즉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에까지” 이러한 성리학적 질서와 미 적 감수성이 미치게 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러한 졸박의 개념과 실천은 범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분석한 야나기의 전통미학은 비록 그 사상적 배경이 주로 불교가 된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부족한 것에서 만족을 구하고 화려한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 속성상 졸박과 상통하는 측면이 많다. 따라서, 졸박은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가짐과 동시에 조선에서 지배적 인 특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미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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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得自天”은 선비들에게 자연으로 귀의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회 화에서 산수화를 통해 인간을 자연의 보잘것없는 작은 부분으로 위치시켜 이러한 이념을 일 반적으로 표현한다. 조윤제는 특히 “조선 중종에서 선조 임진년에 이르는 약 90년간의 시기”

를 주목하며, “당쟁과 사화로 인해 강호의 경치에 묻혀 졸박을 실천하며 ‘자연의 진경’에 몰 입하여 지냈던 일련의 작가군이 ‘자연미’를 발견한 시대”로 보고 있다(Shin, D., 2006). 조선 의 사림들은 졸박의 미학을 이렇게 ‘賞自然詩家의 美’로 파악했다. 이들은 ‘담백’, ‘절로절로’,

‘비인공성’, ‘세련된 단순성’, ‘여백’ 등으로 표현되는 ‘고도의 이념미’로 파악했다(Kim, D.

W. & Lee, W. S. & et al., 1982, pp.152-167). 따라서, 흔히 조선의 미를 표현하는 속성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여백의 미’의 본류도 졸박에서 찾음이 타당하다.

특히 ‘고도의 이념미’와 ‘여백의 미’가 두드러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조선 졸박 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세한도의 제목은 논어의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 松柏之後凋)’ 즉,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긴 유배 생활 중 그가 갈망했던 많은 서책을 청나라로부터 가져와 큰 도움을 준 제자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과 사제지간을 초월한 우정을 극한의 갈필법인 초묵법으로 하 얀 화선지에 그렸다.

졸박의 미학을 이해하면 화려한 불상과 대조되는 소박한 석불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 고, 한옥의 내부 구조에서 발견되는 거의 자연상태 그대로 휘어진 상태로 사용된 나무기둥 과 서까래를 이해할 수 있다. 소박한 흙벽, 초가삼간, 오두막, 사립문, 그리고 돌담이 가진 유유자적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분청사기나 막사발, 찻잔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그리 고 김정희의 세한도가 지닌 아름다움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퇴계와 율곡에서 조선 미학의 정수인 졸박(拙撲)의 이념적 완성과 시가(詩歌)를 통한 구현 을 볼 수 있다면, 추사의 세한도는 졸박미의 이상적인 회화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3.2.2. 회사후소(繪事後素)

앞에 언급하였듯이 미술사학자 김정희는 “백색의 미학은 일본인에 의해 주조된 한국적인 미 에 대한 해석”이라 보았고, 평론가 심상용은 70년대 백색회화를 “야나기 무네요시의 1920년 대적 오리엔탈리즘의 현대적 현현”으로 보았다.

그런데 백색은 이미 야나기가 이 색을 그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명명하기 이전부터 조선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백자나 분청사기, 의복, 그리고 한옥의 창호지나 선비들이 서화 를 즐긴 화선지 등에서 보편적으로 쓰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강렬 한 색채를 가진 민화나 불화보다는 지배층인 사대부들이 색을 배제한 수묵화를 애호하였다 는 점을 상기한다면 조선 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학과 흰색과의 관계는 명확해진다. 왜 냐하면, 신두환이 지적했듯이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에도 성리학의 질서”가 스며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사대부의 수묵화와 백자 등에서 발견되는 흰색에 대한 취미는 공고한 근본주의적 유교 문화의 패러다 임 아래에서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개념과 연관 지어 해석할 수밖에 없다.

‘회사후소(繪事後素)’는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서, 직역하면 “그림은 바탕 을 하얗게 칠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하는 일”로 번역이 된다. 종이 이전에 나무판에 그림을 그릴 때는 먼저 하얗게 바탕을 바른 후 시작한다. 유학자 심현섭에 따르면 이에 대한 해석은 唐 이전의 古註와 宋 이후의 新株가 다르다. 고주에서는 “뒤 두 글자를 後素로 보고 신주에 서는 後於素로 해석한다.” 고주는 繪事를 ‘인간의 아름다움’ 혹은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 과 정’으로 보고 素를 禮로 이해한다(Shin, D., 2006). 특히, 이러한 ‘완성되는 과정’의 의미는 앞서 언급한 퇴계 이황이 졸박을 ‘천성의 회복’과 ‘인격의 수양’으로 해석한 점과 일맥상통하 며, 현대 한국의 단색화가들이 작품 제작 시 보이는 반복적 행위를 “수행의 과정”으로 보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예(禮)는 인간이 완성된, 혹은 인간의 아름다움 이후의 일로 해석되는 것이다. 신주는 繪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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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禮로, 素를 ‘인간의 본바탕’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禮는 인간의 본바탕, 즉 어진 성품 인 (仁)을 가진 이후의 일로서, 먼저 인간은 어진 성품 혹은 바탕을 가진 후에야 진정한 형식으 로서의 예를 갖출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두 해석 모두 禮는 素 뒤의 일로 파악하고 있다. 일상 용어로 풀어 보자면 예(禮)이건 예술이건 먼저 어진 본바탕, 품성의 형성 이후의 일임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조선문화의 전통적 가치관과 상통하고, 현대 한국문화에서 인 성이 강조되는 바탕이기도 하다.

흙으로 빚고, 말리고, 유약을 발라 가마에서 구워가는 과정에서 함유한 수분이 빠지면서 백 자나 달항아리는 형태가 축소되며 변형을 겪고, 또한 유약과 칠의 산화, 환원 과정을 거치며 흰색을 얻는다. 한지 또한 닥종이를 두드려 섬유질을 추출하고 불순물을 정제하여 발로 적 절한 두께로 떠서 말리는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흰색이 형성된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흰색 바탕의 종이를 준비해 그 위에 본인의 사상을 시로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백자를 두고 향유 하는 과정은, 어진 성품을 형성하고 그 후에 예를 실행하는 하나 의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유교가 국가적 이념이었던 조선에서 화선지와 백자의 흰색, 흰옷은 화려하지 않은 소박함, 즉 졸박(拙撲)과 더불어 어진 인품 (仁)의 도야를 우선시하는 상징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백자는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이들의 소박함 은 하나의 공예품으로서 오히려 더한 기품을 가진다. 손으로 빚는 백자나 좀 더 큰 달항아 리는 가마 속 구워지는 과정에서 불규칙한 수축을 통해 완전한 대칭이 무너지게 된다. 따라 서 이들은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대상으로서 보는 이의 위치를 바꾸거나 이를 책상 위에 놓고 돌려가며 감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시간을 매개로 한다. 폴 발리에 따르면 일본인은 이러한 시간에 민감한 미감을 가지고 있다. 시간에 따른 대상의 변화는 불교적 관점에서 지금 현실의 무상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기 그지없는 빈방 탁자 위에 놓인 하나의 흰색의 백자(와비사비)에서 야나기는 물아 일체의 찰나적, 종교적 깨달음과 그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모노노아와레) 특히, 이름 없는 도공이 빚은 막사발에서 야나기는 “범부성불의 이치”를 깨닫고 있지 않은가?

3.3. 한국성과 그 타자성 논쟁

앞의 백자의 예에서 보듯이 같은 대상이라도 보는 이의 문화와 미감, 그리고 그 문화적 문맥 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시대는 다르나 단색화의 백색 미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진경은 1975년에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린 <5인의 흰색전>보다 훨씬 앞선 시점인 1960 년대 말부터 국전을 중심으로 백색의 미술은 이미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구체 적 사실을 들어 논증했다(Koo, J., 2016, p.49).

그가 발견한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969년 18회 국전에서 박길웅의 작품 <흔적 백(白)>

은 대통령상을 받았고, 김형대는 일체의 형상이 사라지고 화면의 재질감만 존재하는 완전추 상의 <백의민족 白衣民族>으로 추천작가상을 수상했다. 1970년에는 이용의 <백의민족의 순수성 B-070>과 이반의<Instant 폐문 (白)>은 입선을 수상했다. 1971년의 20회 국전에 서는 고화흠의 <백안송>이 추천작가상을 수상했고, 기타 흰색을 주제로 한 추상작품들이 다수 출품되었다. 특히 박길웅은 <흔적 백 F-75>로 비구상 부분에서 첫 대통령상을 수상 했고, 당시 국전의 심사위원장인 남관은 “이 작품을 계기로 비구상은 외국의 것이라는 고정 관념이 깨지게 된 것도 큰 소득이다.”라는 심사평을 내렸다(Koo, J., 2016, pp.52-53). 또 한,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여성 작가 5인의 백색동인회가 참여하는 <백색 白色> 전이 매년 개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야나기 이전에 조선에서 흰색의 문화가 보편적이었듯이, 1975년 이전에 이 미 한국 현대미술에서 흰색은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국전을 중심으로 미술계에 서 확고하게 받아들여진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1961년 5.16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강력한 관 주도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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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개발과 산업화를 실행하며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고도성장의 기틀을 이루게 되었다. 이 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서 권위주의 정부의 관전(官展)인 국전에 출품한 미술가들은 당 시 전위(前衛)라고 여겼던 추상, 특히 미니멀리즘 적 추상을 통해 ‘근대성’을 성취하려 했다.

이들은 또한 색채의 선택에 있어 백색을 ‘백의민족’과 동일시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 여 ‘한국식 모더니즘’을 달성하려 했다. 조안 키(Joan Kee)는 이러한 추상의 움직임을 권위 주의 정부에 대한 일종의 항거로 볼 수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의 지배 적 분위기는 근대화, 산업화를 위해 관, 군, 민이 합심하여 일종의 ‘총력전’을 벌이는 상황이 었다. 5.16. 이후 국가혁신과 민족문화 창달 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서 국전에서 추상이 적 극적으로 수용되었고, 이후 추상 미술가들이 화단과 대학교육의 주류가 되었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분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례로 대표적인 추상미술 운동가 박서보조차 활발한 수 출항구 전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당시 정부의 수출주도 무역정책과 당시의 사회 분위기 를 담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주류 미술가로 자리 잡은 추상 미술가들 또한 국가적 대의에 부응하여 정부의 <민족기록화> 프로젝트에 참여하곤 했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시대 분위 기 또한 단색화가 가지는 “한국적 정체성의 획득” 담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례적으로 동양화 전공자인 권영우는 1962년부터 “바탕 재료가 아닌 독자적인 조형재료”

로 한지를 활용하기 시작했다(Kim, J., 2006, p.199). 그에게 한지는 친숙한 재료였고, 특히 동시대 추상 열풍에 동양화 전공자들은 수묵을 중심으로 한 ‘묵림회’ 활동 등을 통해 현대미 술운동에 동참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한지를 찢거나 붙이거나 하는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콜라주와 데콜라주의 방법을 활용하였다. 특히, 피에로 만조니(Piero Manzoni)의 “고령토를 발라놓은 듯한 반색조(achrome)의 종이 콜라쥬”작품을 언급하며 미술사가 김정희는 한지를 바탕제가 아닌 물성을 이용해 매체의 자율성(autonomy)을 전제로 한 형식주의적 관점의 수 용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김정희는 권영우가 고암 이응노의 프랑스 화단에서의 성공에 자 극을 받아 “서양인들의 ‘눈’을 고려해 작업했음”을 지적하며 오리엔탈리즘 적 접근법으로 평 가했다.

70년대 들어서 한지의 흰색이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것과 더불어 ‘빛’과 ‘정신성’으로 설명 되기 시작한다. 사진가들이 특히 금욕을 상징하는 절간의 문 등을 찍은 작품이 등장하는데, 특히 이러한 한지 작업에서 빛은 미술가들의 유년기 창호지가 발라진 창문을 통해 바라보던 빛과 연관되면서 그의 작품은 “마크 로드코의 회화와 같은 초월적이고 종교적 느낌”을 주기 도 한다(Kim, J., 2006, p.213).

반면에, 1975년 일본에서의 전시는 이러한 한국 현대 회화의 새로운 경향이 다른 문화적 문 맥에서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특히 흰색에 대해 일본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한국의 미술가들에게 볼 수 있는 색채의 부정은…. (중략) 그들이 회화에 관한 관 심을 색채 이외의 것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평한다. 특히 그는 “우주적 비전의 틀 그 자체”로 표현하여 비애의 미를 연상하게 하는 어떠한 표현도 사용하지 않았다 (Koo, J., 2016, p.56).

특히, 전시 후 가진 좌담회에서 이우환은 “전체적으로 매우 금욕적인 느낌이 드는 특이한 회 화세계”로 보고 이를 “전통적으로 색을 싫어하는 유교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좌담회, 미술 수첩, 1977년 10월, pp.169-88). 유년기에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학습하기도 한 이우환은 한국의 유교적 문화 배경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점을 언급한 것이다. 이들 대담에 서 구진경의 지적대로 ‘흰색’과 ‘비애의 미’를 연상시키는 야나기식의 해석은 볼 수 없다.

앞서 열거한 모든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일본인 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에 의해 기획된 1975년 일본 동경에서의 전시 이전에 이미 민족주의적 색채가 문화의 저변에 깔린 한국에 서는 백색에 관한 논의와 작품들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또한, 나카하라 유스케 자신도 백색을 식민지 시대의 미학과 연관 지으려는 시도도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흰색의 유행은 한국화단 내의 분위기와 더 관련이 있어 보인다. 1950년대 말에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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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국의 Time지나 일본의 미술수첩 등을 통해 서구 최신 미술의 동향은 젊은 작가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고, 특히 1960년대를 거치는 화단에 팽배한 전위 미술 운동 또한 이러한 세계적 트렌드를 추종했던 한국의 젊은 현대미술운동가들의 성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60년 대 말 서구 사조의 맹목적 추종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반성, 그리고 당시 사회 전반에 흐 르는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 속에 흰색은 백의민족을 상징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미술가로서 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국전 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며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면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흰색계열 의 회화작업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이후, 1982년의 교토 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현대미술의 위상>전에 참석한 <미술수 첩>의 편집자 기무라는 이후 대담(對談會)에서 “서구의 모노크롬 회화와는 다른 한국 그림 이 일본 그림처럼 기술적인 완벽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감 없이 포근하게 다가오는 것”을 아마 “표현을 절제하려는 한국인의 소박한 감성” 혹은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본성” 때 문으로추측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다분히 기계적이고 조작적인 것 은 서구 문명을 일찍이 접하면서 사회 전체에 합리주의, 이기주의, 획일주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으로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작가들의 기계적 인공미는 앞서 분석하였듯이 산업화 이전 일본의 전통사회의 미술과 공예품에도 발견되는 특징으로서, 연구자는 앞서 이를 일본 사회의 ‘잇쇼겐메이’ 문 화와 더 관련이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비평가들은 한국작가들의 회화를 분석하면서, 굳이 일본의 앞선 서구화, 산업화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을 culture에 놓고 한국을 nature 상태로 놓는 일본 특유의, 여전히 남아 있는 제국주의적 오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점은 일본 비 평가의 관점의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를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일본의 눈을 의식해 제작되었 다는 타자성의 문제로 본다는 것은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이들 한국작가는 문화적으로 조선 말기의 유교 문화, 일본식민지, 그리고 근대화 과정의 대 한민국이라는 세 가지의 문화적 영향권에 동시에 속해 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식민지 시대의 근대 사회제도나 법률, 행정 등의 국가 시스템적 등 외적인 요소 들을 제외하 고, 이들의 정신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우환의 지적대로 500년 동안 지속한 유 교 문화의 관성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70년대까지 한국의 정신문화에 가장 큰 영향 력을 행사한 유교 문화를 고려할 때, 당시 한국작가들이 보여준 “소박함”,“포근함”, “자연 회 귀적 본성”은 이들 작품에 내재한 조선 시대 성리학적 ‘졸박(拙撲)’의 전통적 문맥에서 파악 하는 것이 합리적 분석일 것이다.

일본 이론가들이 이날 대담회에서 제시한 관점 및 의문은 이미 앞장에서 상세히 분석한 조 선의 졸박의 미와 일본의 와비사비 및 모노노아와레에 관련된 연구자의 비교분석으로 설명 될 수 있다.

당시 나카하라의 “우주적 비전 그 자체”라든가 이일의 “백색은 색 이전에 정신이고 우주”,

“범 자연주의적 세계관”이라는 표현은 그 당시 한·일 이론가들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범 동 아시아 문화적 표현이다. 여기서 우주는 앞서 퇴계가 졸박에 관해 언급했듯이 인간의 손길 이 미치기 이전의 자연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은 커다란 우주, 혹은 자연의 작은 한 부분 이라는 세계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현시점의 일부 이론가, 비평가들에 ‘추 상적’이고 ‘애매모호’하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과거 조선의 유교 문화의 연장선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단색화 작가들이 보여주는 양식과 작품 제작의 방법론은 저마다 달라 일반화가 어렵다. 그 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국의 전통사상을 언급하고, 이에 바탕을 둔 회화 방식에 현대적 재료와 조형 어법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박서보는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서 본인이 ‘선비’가 되고 싶다는 점을 피력하고, 어려서부 터 영향을 받아온 유, 불, 선의 사상을 언급하며, 단색화가 가진 반복성에 깃들은 ‘정신성’과

‘수행성’을 강조한다(Seoul Newpaper, 2020.12.9).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