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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연구론총 11집> 이헌영의 정보 획득 전략과 근대 일본의 형상화-박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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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례>

Ⅰ. 서론

Ⅱ. 대화를 통한 정보 획득 전략 1. 事實의 確認을 통한 정보 획득 2. 反論을 통한 정보 획득

Ⅲ. 近代 일본의 형상화 1. 박람회를 통한 물산 장려 2. 부국강병에 대한 관심

3. 제한적 의회정치의 도입과 서양에 대한 관심

Ⅳ. 결론

국학연구론총 제11집 택민국학연구원. 2013.6.30.

이헌영의 정보 획득 전략과 근대 일본의 形象化

- 日槎集略 중 問答錄을 中心으로 -

朴 灘

1)

<국문초록>

본고에서는 이헌영의 일사집략 중 문답록 의 내용을 대상 으로 “대화을 통한 정보 획득 전략”과 “근대 일본을 형상화”한 모습의 이면에 담긴 이헌영의 생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헌

* 강원대 강사. 문학박사.

영은 1881년 4월 고종의 밀명을 받아 박정양 등 12명의 조사 (朝士)들과 함께 일본에 갔다. 그는 사행을 통해 일본의 시세․

풍속, 다른 나라와 수교․통상하는 방법, 관세 업무에 관한 사 항을 두루 조사하였다. 이헌영의 일사집략은 당시 12명의 조 사들이 행하였던 조사방법(調査方法)을 알 수 있는 예로써 중 요한 자료이다.

이헌영은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 외무경 이노우 에 가오루(정상형)를 비롯한 고위 관료, 해관에서 근무하는 하 위 관료, 서세동점의 현실을 근심하는 청나라 관리 등 다양한 국적과 계층의 인물을 만나 개화의 실익과 통상 업무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였다. 이들과의 대화를 모은 책이 바로 일사집 략 가운데 문답록 이다.

이헌영은 앞서 말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직접 면담과 문헌 자료 조사 방법을 병행하였다. 특히 면담 방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하였다. 첫 번째는 직접적 인 질문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이었고, 두 번째는 반론을 통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대답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었다.

이헌영은 이처럼 자신이 얻은 정보를 일기와 문답록에 기록 함으로써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대화의 상황을 보여주 고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직접 대화에 참여하는 듯한 현장감 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이헌영의 문답록에는 근대 일본의 다양한 모습이 반영되어 있었다. 특히 이헌영은 박람회를 개최하여 물산을 장려하는 모 습과 부국강병에 몰두하는 일본의 모습, 또 명치유신을 통해 폐 번치현을 한 후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한 일본의 정치체제와 서 양의 여러 나라와 근대적인 외교를 벌이는 모습에 주목하였다.

<핵심어>

(2)

이헌영, 일사집략, 정보 획득 전략, 근대 일본, 박람회

Ⅰ. 서론

조선은 1876년(고종 13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조약(병자수호 조약)을 맺음으로써 서세동점의 제국주의적 세계체제에 편입되 었다. 고종은 그 해(1876) 김기수를 1차 수신사로 파견하여 일 본의 정세와 통상과 관련된 세관업무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그 후 김홍집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김홍집 또한 일본의 정세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아보았다. 흥선대원군의 퇴진과 2 차례의 수신사행으로 국내적으로 통상과 개화에 대한 논의가 많아졌다. 이때 러시아와 미국 등과 구미 열강이 계속하여 조 선에 대하여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 왕실은 이들 나라와의 통상 을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보다 먼저 통상 협정을 체결한 일본의 실정을 광범위하게 조사할 필요가 생겼다. 1) 이에 조선에서는 1881년 조사시찰단(일명 紳士遊覽團 2) 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 때 일본에 파견된 이들이 바로 박정양, 엄세영, 강문형, 조 병직, 민종묵, 조준영, 심상학, 어윤중, 홍영식, 이원회, 김용원,

1) 1881년 수신사행의 임무는 그 이후 조선의 역사를 통해 보았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기적으로 이들의 수신사행 이후 1882년 한미수호조규(한미조약, 1882. 5. 22), 조영통 상장정(한영조약, 1882. 6. 6), 조덕조약(한독조약, 1882. 6. 28) 등이 맺어진 점으로 보 아, 이들의 사행이 구미열강과 잇단 통상조약을 맺기 위한 기초자료로 이용되었을 것 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2) 허동현은 자신의 여러 논문에서 신사유람단 보다는 조사시찰단이라는 용어가 학술적으 로 더 온당함을 밝히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들의 사행이 근대화된 일본의 제 문물을 시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점에 동의하여 조사시찰단이라고 칭하였다. 허동현은 여러 논문에서 1881년 사행에 참가하였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보고서에서 발견되는 근대화의 양상에서 논하고 있다. 그러나 사행일기 자체의 문체적 특성과 주제에 대해 서는 논의가 다소 미흡하였다.

이헌영 등 12명이었다. 李金憲永(1837~1907, 자는 景度, 호는 敬 窩․東蓮)은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의 세관 업무 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 日槎集略 3) 을 남겼다. 그는 사행의 목 적에 대하여 “일본 사람의 조정 논의와 시세 형편, 풍속․인물 과 다른 나라들과의 修交․通商의 대략을 염탐” 4)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稅關이 관장하는 바의 사무와 그 밖의 다소(多 少)를 듣고 보” 5) 는 등 세관 업무 파악을 통해 통상에 대한 다 양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의 일사집략에는 일본의 제도와 풍속을 조사하는 과정에 서 목격한 근대화되어 가고 있는 일본의 모습이 잘 담겨 있 다. 6) 조선은 외국과 통상조약을 먼저 체결하고 통상을 시작한 일본의 변화를 반면교사로 삼아 외국과의 통상조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헌영의 일사집략 가운데, 대화체로 기록된 문 답록을 중심으로 면담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는 정보 획 득 전략과 이들과의 대화 속에 나타난 근대 일본의 특징적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대화를 통한 정보획득 전략

3) 이헌영, 일사집략, 해행총재11 민족문화추진회, 1977년. 이하 일사집략의 내용은 모두 이 책을 참고함.

4) 일사집략 천, 봉서, 국역 해행총재 11, p.15.

5) 상게서.

6) 이헌영의 일사집략은 天·地·人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天편에서는 봉서, 경로, 문견록, 해관총론, 8월 30일 왕에게 복명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지편은 그날그날의 행적과 간 장소, 만난 사람 등 사행의 전체 내용이 전통적인 日記體 형식으로 쓰여 있다. 그리고 인편에서는 일본에서 만난 인사들과 한 대화를 수록한 문답록, 그들과 주고 받은 서찰을 담은 ‘書札錄’, 또 여러 인사들과 주고 받은 ‘詩句錄’, 함께 사행한 사람을 기록한 ‘동행록’, 일본을 탐방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3)

이헌영의 문답록 은 4월 11일부터 7월 28일까지의 3달 간 일본에서 여러 인사들과 만나 대화한 기록이다. 7) ‘問答’이란 글 자그대로 묻고 답하는 형식을 뜻한다. 8) 문답의 상황에서는 정 보를 얻고자 하는 사람과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데, 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정보의 유무이다. 이헌영은 일본의 시세와 형편, 풍속의 변화 또, 다른 나라들과 修交․通商하는 방법 등의 정보를 알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주로 질문자의 입장인 경우가 많았다. 정보를 어떻게 물어보느냐에 따라 정보 를 제공하는 사람의 대답이 달라지므로, 얻고자 하는 정보를 어 떻게 얻었느냐 하는 정보의 획득전략을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이헌영이 訪日 기간 중에 만난 인물은 다양했다. 즉 명치유신 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조선과의 외교에서 전권을 지녔던 이노 우에 가오루( 정상 형),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같은 정치가 와 개화에 적응한 기술관료 그리고 명치유신를 부정적으로 인 식하는 일본인도 있었으며, 서세동점의 현실을 근심하는 청나라 관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헌영은 일본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과 계층의 인물들과 함 께 이야기한 대화를 통해 근대 일본의 모습을 파노라마식으로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대화의 상황이다. 이때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 관계가 복구된 지 5년밖에 되지 않 았던 상황으로 일본 측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 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리고 모든 대화의 상황에서 일본 측은 만나는 사람과 대화의 내용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 확한 일본의 사정과 의도, 개화의 실익을 알아보기 위해서 적절

7) 일사집략, 문견록 , pp. 27~28. 문견록에는 이헌영이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8) 문답은 요즘 용어로 “인터뷰”이다. 특히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개인이나 집단을 만나 정보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연세대학교 언어정보개발연구원, 1998)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부합된다.

한 정보 획득 전략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1. 事實의 確認을 통한 정보획득

이헌영은 기존의 일본 사행 기록을 통해 변화한 일본의 정치 제도에 대하여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일본에 도착하였다. 즉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봉번제도(封藩制度)를 혁파하고 폐번 지현(廢藩置縣)을 하여 통치 체제가 중앙집권적 관료 제도로 바뀌고 군사 제도부터 문물까지 많은 부분이 변화되었다는 사 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던 지식과 실제로 접하 여 알게된 사실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헌영은 기존의 사행기록과 다른 현상에 대하여 확인하는 질문을 많이 하였다.

다음은 일본의 개화와 제도에 대한 생각을 묻는 예이다.

이헌영 : “통상은 비록 사세가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고 하겠 지만, 귀국의 모든 제도가 한결 같이 서양의 법도를 좇는 것은 무슨 때문입니까? 그리고 기차ㆍ기선ㆍ금은 광산, 여러 가지 기 술공(技術工) 등 전에 없던 것이 오늘날에는 많아졌습니다. 각각 재화를 생산해서 부족한 것에만 한계 지우지 않는데 어떤 사람 은 말하기를, ‘밖으로 많은 재정을 소모하고, 안으로는 축적이 없어서 민간의 곤궁함이 전일에 비해 심하다.’고 하니, 참으로 그러하며 통상이 귀국의 이해에 있어, 또 어떠합니까?”

모환이항 : “인민이 아직도 개화되지 못해서 모든 사무를 정

부에 일임하고 있으니, 정부에서 재정의 괴로움을 겪는 것이 또

한 당연하지 않습니까? 인민이 이미 개화되어 모든 사무를 정부

와 분담한다면, 재정의 부족함을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세계 대

세를 살펴본다면, 통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일찍이

항구를 연 것이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앉아서

그 폐해를 입었을 뿐입니다. 인민은 결코 빈곤한 것이 아닙니

다.” 9)

(4)

모환이항(毛丸利恒)은 요코하마(횡빈)항의 세관 문서과원이 다. 그는 일찍이 막부 시기부터 관료를 했던 인물로, 막부의 편 에 섰다가 2년간 옥살이를 하고 현재 요코하마 항에서 세관원 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와 세관 업무에 대하여 파악하는 중 간중간, 이헌영은 일본의 재정 상태에 대하여 탐문하였다.

이헌영은 일본이 부국강병과 산업화를 위해 재정을 지나치게 사용하여 일본재정이 적자인데도 망하지 않고 운영되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10) 모환이항(毛丸利恒)은 개항과 일본 재정에 대 하여 긍정적인 전망을 이야기하였다. 통상의 장점에 대하여 이 야기하면서 “항구를 연 것이 좋은 계책”이었고, 정부는 비록 빚 이 많지만, 민간 부문에 돈이 많아서, 국가 경제가 커지고 민간 의 힘이 길러지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모환이항은 외국과 통상을 하면 국내의 부가 외국으로 빠져 나가 백성들이 가난해 질 것이란 부정적 생각에 대하여 반대하 고 있다. 이헌영은 이렇게 통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꾸 밈없이 그대로 문답록에 실어 통상에 대하여 다양한 생각을 유 도하고 있다..

그는 일본 관료들과 만나면, 외국과 통상하면서 생기는 문제점 에 대하여,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질문을 통해 정보를 획득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만든 통상과 무역제도와 관련된 용어의 뜻도 확인하고 있다.

이헌영 : “돈세(噸稅)란 어떻게 따지는 것입니까?”

미야모토 : “배마다 실려 있는 물품은 계산하지 않고, 오직 돈

9) 일사집략, 문답록 , p. 223.

10) 일사집략, 문견록 , p.23. “부국이니까, 또한 강병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매년 경비가 전에 부과한 것보다 갑절 이상으로 늘어서 한 해의 세수입으로는 실로 계속 공급하기 어렵다. 이에 국내로부터 외국에 이르기까지의 공채가 점점 쌓여, 지금은 3억 6천 3백 32만 7천 9백 70여 원이나 되어서, 해마다 이자를 갚는 것도 적지 않다.”

수(噸數)만을 가지고 계산해서 세금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 이 하는 것이 비록 분쟁(紛爭)의 폐단은 없으나, 그중에 만약 물 건은 작으면서도 값이 비싼 것이 있다면 세금 거두는 데에 잃는 것이 많게 됩니다. 청국(淸國)에서는 몇몇 나라에 대해서 이같은 법을 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11)

이헌영 :“연표(年標) 중에 재수법(再輸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승청풍 : “외국에서 일단 수입했던 물건을 다시 외국에 수 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헌영 : “세금 없는 물건이란, 세금을 받을 만하지 못한 물건 입니까?”

오승청풍 : “그렇지 않습니다. 미곡 또는 의복 같은 것은 세금 없는 물건이 됩니다.”

이헌영 : “의복이 세금이 없다는 것은 혹 그럴 듯하지만, 미곡 은 어째서 세금이 없습니까?”하니, 그가 말하기를,

오승청풍 : “미곡이라는 것은 사람의 목숨이 여기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으로서,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금이 없는 것입니다.” 12)

위의 예는 돈세와 재수법이란 용어의 뜻에 대한 질문과 대답 이다. 무게를 재는 단위인 톤(ton, 1000kg)으로 세금을 매기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다. 그리고 배에 실린 물품의 무게 만으로 세금을 매겼을 때의 단점에 대해서도 미야모토를 통해 얻고 있다.

재수법과 무관세 물품에 대한 질문 같은 것도 직접적인 질문 을 통해 정보를 얻은 예라 할 것이다. 재수법은 중계무역 물품 에 대한 부과세를 말하는 것이며, 일본의 경우 의복과 미곡에 대하여 관세가 없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 당시 쌀에 대한 관세

11) 일사집략, 문답록 , p.147.

12) 상게서. pp.136~138.

(5)

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미국과의 통상에 있어서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그 때문에 미국과의 통상 조약을 앞두고 일본의 예 를 물어 본 것으로 보인다.

이헌영 : “귀국의 세법을 정할 때에 각국의 속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이제 몇 해가 되었는데 아직도 개정하지 않았습니까?”

오승청풍 : “세법을 제정할 당시에는 관세(關稅)의 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덕천씨(德川氏)가 집정(執政)했을 때이니, 비록 그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18~19년 전이 될 것입니다.

이제 와서 정부와 국민이 모두 그 불리함을 알게 되어서, 금년 가을에 개정하자는 약속이 있었으나, 각국이 전례를 핑계하여 개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단호한 태도로 나 올 것이니, 틀림없이 개정될 것으로 믿습니다.” 13)

일본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을 당시, 잘못 맺은 불평등한 조 약을 고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승청 풍은 초창기 잘못 맺은 조약을 개정하려고 하지만, 20여 년이 되어 가는 현재에도 고치지 못하고 있지만, 개정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헌영은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일본 현지의 관료와 직접적으로 면담함으로써 정확한 정보를 확인했다. 이를 통해 세관 업무와 세금을 매기는 문제 등 근대적인 통상 제도에 대 하여 알아가는 과정을 알 수 있었다.

2. 反論을 통한 정보 획득

이헌영이 근대적 세금 제도와 통상 제도에 대하여 일본인에 게 물었을 때, 이헌영과 일본인 관료 사이에서는 지식에 있어서 상하관계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헌영이 부국강병과 통상의 일

13) 상게서, pp.136-137.

반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는 일본 관료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문답록에 있는 모든 대화 속에는 통상의 실익을 극대화하기 할 수 있는 조약을 만들고자 하는 조선의 입장이 드러나 있다.

또 일본의 부국강병을 부각시키려는 일본의 의도와 일본의 정 확한 국력을 확인하고자 하는 조선의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이노우에 : “군대가 강하고 나라가 부유한 뒤에야 남의 나라 의 침략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라가 비록 부유하다 하더라도 군대가 강하지 못하면, 또 무엇을 가지고 침략을 막겠습니까. 그 렇기 때문에 나는, ‘군대가 강한 것이 나라의 부(富)에 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헌영 : “나라가 부유하지 못하면 군대를 양성할 수 없습니 다. 나라의 부(富)와 군대의 강한 것이 병행(並行)되어야 합니 다.”

이노우에 : “나라가 부유해지는 길은 오직 농업과 광산 개발 에 힘쓰는 데에 있습니다. 농업으로 말한다면, 내가 연전에 귀국 의 심도(沁都 강화(江華)의 별칭(別稱))를 가본 일이 있는데, 그 때에 어디서든지 개간해서 정착할 수 있는 많은 공한지(空閑地) 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곡식 종자도 한 가지를 가지고 해마다 심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다른 나라의 곡식 종자를 가져다가 바꾸어 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음은 광산 개발을 가지고 말하겠습니다. 귀국의 북쪽 대륙으로 이어진 곳에는 광 산이 없지 않습니다. 장사꾼들의 말을 들을 것 같으면, 광산 개 발이란 한갓 기계를 소비시킬 뿐, 이익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중략> 귀국 항구에서 이리로 들어온 물품의 액수를 알고 계십 니까? 작년 이후로 사금(沙金)이 들어온 것만도 60만원(圓)어치 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헌영 :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길은 농업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농업이 아니라면 무엇을 가지고 입고 먹겠습니까? 그

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작(耕作)을 게을리해서 개간하지 않

은 땅이 많이 있습니다. 곡식 종자를 다른 나라에서 가져다가

(6)

심으라는 말은 이치에 맞는 말 같습니다. 광산에 있어서도, 우리 나라에서 아직도 어떤 산이 광산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광산 에 대한 공(公)의 말도 역시 옳습니다.” 14)

이헌영은 부국강병의 방법에 대하여 外務省의 관료인 이노우 에 가오루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노우에는 부국강병에서 부국 과 강병을 나누어 이야기하면서, 특히 부국보다 강병이 앞서야 한다고 하여 일본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있 다. 또한 이노우에는 나라의 부를 늘리기 위해 농업과 광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입된 사금의 양을 통해 조선의 광산 개발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였다.

이처럼 광산 개발과 간척사업을 통한 나라 재정의 확충 방법 에 대하여 관심 있게 듣고 있다. 이를 통해 근대적인 광산 기 술을 배우기 위해 중국과 일본으로 유학생을 보내었는데,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을 선택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농업의 발전 방법으로 다양한 곡식 종자를 수입하는 것에 대 해 쉽게 수긍을 했다. 그 이유는 5월 12일 우수한 품종을 고르 는 방법에 대하여 농무국 육종장을 견학하여 알아보았기 때문 이다. 육종장에서는 외국에서 가져온 여러 과일의 씨앗으로 다 양하게 육종해 보고 우수한 것을 취하여 농부들에게 나눠준다 고 했다. 15)

이노우에 : “여러분이 이미 우리나라에 와 있지만, 의심이 없 다고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수신사가 온 일이 있었지만, 역시 여러분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은 아직도 친숙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귀국과 통상 한 뒤로 곧 공사(公使)를 파견하려 했으나, 1~2년을 미루어 오다 가 간신히 허락되었으며, 공사가 서울에 부임했을 때에도 영접

14) 상게서. p.153~156.

15) 상게서, p.88.

한 사람은 예조의 관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마음대로 나다 니지도 못하게 하니 이것이 모두 의심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 다.”

이헌영 : “우리가 근년에 귀국과 더불어 다시 이웃 나라의 정 의를 펴서 두텁게 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만약 수백 년 전의 일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또한 의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 기 때문에 백성들이 아직도 따르고 믿지 않아서 졸연히 개화하 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미 통상조약을 맺었으니, 마땅히 점차적 으로 모방해 가서 마침내 화호(和好)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인 데, 귀국에서 매양 급히 서두르는 뜻을 보여서 경동시키는 말을 한다면, 의심하지 않으려 해도 도리어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렇지만 앞으로 두 나라가 서로 뜻을 같이한다면 믿지 않으려 해 도 저절로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과 통교가 없기 때문에 비록 귀국과 같은 교린(交鄰)하는 사이에도 만일의 의심이 없을 수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대개 각각 제 나라에 안정해서 남에게 구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오늘날 시대 의 정세를 본다면 옛날과 다릅니다. 우리나라도 고립할 수 없고, 귀국도 혼자서 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두 나라가 서로 붙들어 주고 서로 사랑하여 영구한 우호를 보존해서, 다른 나라 의 업신여김을 받는 데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 다.”

이노우에 : “비록 그렇다고 하지만, 또한 한갓 이웃 나라의 도 움만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헌영 : “귀국이나 우리나라를 막론하고 마땅히 자주자권(自 主自權)해야 할 것이지, 어찌 한갓 이웃 나라의 도움만을 믿겠습 니까? 그렇지만 교린하는 사이에는 또한 서로 돕는 도리가 없지 않습니다.” 16)

이노우에는 일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조선의 외교

정책에 대하여 비판한다. 그러자 이헌영은 조선의 현실과 과거

의 역사적 경험을 들면서 의심을 품게 만든 것은 바로 일본이

16) 상게서, pp. 153~156.

(7)

라는 점을 주지시켰다. 그에 비해 이헌영은 조선의 자주자권 즉, 국제법상의 자주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국 제 정서를 들면서 일본과 조선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 며, 일본의 도움이 필요한 현실에 대하여 완곡히 이야기하였다.

이헌영은 각계각층의 일본인과 대화하면서 통역과 중역의 어 려움을 토로하였다. 즉 조사인 자신이 일본어에 능통하지 못하 여 일본인 통역관의 입을 빌어야 했기에 말을 할 때 모호함이 있었다고 했으며, 글자 또한 일본어로 된 책을 일본인이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게 하여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여 했기 때문에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언어의 한계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살피지는 못했음을 한계로 지적하였다. 17)

①귀국이나 일본이 모두 한문(漢文)으로 문장을 만들고 있습 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이 한문을 읽는 데에 있어서는 새겨서 읽고 그대로 읽지 못하니, 그래서 번거롭게 새겨 읽는 데만 많 습니다. 근일에 들으니, 귀국의 독법(讀法)은 곧장 내려 읽으며, 구절 끝에 몇 자의 俗語(토를 말함인 듯 함)를 붙여 읽을 뿐이 라고 했습니다. 일본에 비해서 매우 간편합니다. 나는 이 일이 매우 옳다고 생각합니다.

②“《통상조약유찬(通商條約類纂)》을 한문으로 번역해서 등 사하려 하는데, 실로 그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공이 만약 마땅한 사람을 천거해 준다면 보수는 남이 주는 예(例)에 의해 서 지급하겠습니다.”

③“《유찬(類纂)》은 외무성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공이 외무 성에 부탁하면 반드시 번역해서 등사할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나도 이것을 외무성에 말하겠습니다.” 18)

17) 일사집략, 별단 , p. 18. “저 나라 말에 통하지 못하여 타인의 입을 빌었으므로, 말을 교환할 때마다 모호함을 한탄했고, 글자 또한 어려워 타인이 대신 풀어 베끼어 억지로 이해를 하여, 역시 의심이 되어 마음에 현혹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널리 많은 의견을 얻으려 했었으나 그 속내평을 깊이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①은 중촌정직 19) 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가 이헌영에게 한 이야기이다. 그가 조선의 한문 읽는 법과 일본의 그것을 비교 하면서 조선의 현토하는 읽기 방법이 한문문장을 일본어로 읽 는 것보다 편리하다고 했다. 이헌영도 이 점에 대해서는 “음독 에 있어서는 청국과 음이 다르지만, 문자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해득하지 못할 걱정은 없” 20) 다고 하면서 긍정 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문명의 수입처가 청에서 일본으로 바뀌는 순 간, 한문에 대한 문자해득력은 그 효용성이 떨어지고, 일본어에 대한 해독력이 중요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들이 한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을 전통적으로 무시했던 조선인의 입장 에서 한자에 대한 효용성이 떨어진 상황은 이들 조사들에게 중 요한 시사점을 준다할 것이다.

일본어에 대한 해독력이 떨어져 통상에 관계되는 책을 읽지 못하여 번역가를 찾아야 하는 상황으로 변화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정보를 얻어야 했던 조사들에게는 언어가 통하지 않 아 생기는 어려움이 컸었다.

이헌영은 문답록 에서 이와 같은 상황을 모두 보여줌으로써 앞서 말한 한계를 뛰어넘어 정보의 시의성과 객관성을 높이고 있다. 21) 조선과 일본이 이미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통해 수

18) 일사집략, 문답록 , pp.244~252..

19) 그는 일찍이 창평학교의 교관으로 있을 때 영국유학생관리라는 벼슬을 얻어, 유학생 14명을 데리고 유학했었다. 그리고 사정이 있어 귀국하지 않고 영어를 배워서 영어로 번역한 책이 있는 학자였다.

20) 상게서, p.247.

21) 일사집략, 별단 , “신은 생각하옵건대,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다시 닦았으나, 아직껏 저 나라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무역의 길을 이미 텄으면서도, 아직껏 양쪽 항구간의 세칙(稅則)을 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번의 명령이 계셔서, 두루 의견을 물어서 듣고 본 것을 기록케 하여 수교상(修交上)에 도움 이 있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송명진은 개화기 대화체 서사와 계몽의 수사학 (시 학과 언어학 제2호, 2006)에서“개화기에 이르러 이러한 대화체 형식이 보편적으로

(8)

교를 시작한지 5년이 지났으나 일본의 문물제도와 정치적 사정 을 아직 잘 알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또 일본과 조선 양쪽 항 구 간의 세칙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못하던 때였다. 이러한 상 황 속에서 일본의 사정과 세관 업무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 집단인 관료와 정치인을 만나 질문하고 일본 측, 중국 측 인사들의 답변을 그대로 적음으로써 그들의 의견이 가 공되지 않고 고종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질문법”과 “반론을 통해 정보를 획득”하는 방법을 통해 아직 정보가 부족한 조선의 입장에서는 더 현장성 있는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본에 있는 다양한 계층 의 사람들과 開化와 時勢 변화라는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함으 로써 그들에게 미치는 개화의 영향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즉 일본인과의 대화를 통해 개화된 일본의 장점과 단 점을 드러냄으로써 開化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 던 것이다.

Ⅲ. 근대 일본의 형상화

담론이란 실제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발화된 언어와 그 발화 의 방법을 의미한다. 사회적 상황은 언어소통과정에서 가장 핵 심이 되는 부분이다. 22) 담론이라는 것이 어떤 가치와 신념을 드러내는 글쓰기 또는 말하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

사용된 것은 ‘개화와 자강’이라는 시대적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구의 새로 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개화의 기조는 낯선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데에 대화체를 사용했으며, 서구 열강과의 대면 속에서 마주치게 된 독립에 대한 불안은 대화체를 통해 국민 개개인들이 국가를 위한 ‘충(忠)’이라는 개념을 보급 했다. 또한 신문, 잡지 등과 같은 근대적 매체의 출현은 그 계몽적 성격으로 인해 빈번 하게 대화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22) 권영민, 서사양식과 담론의 근대성,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pp.10~11.

념과 가치란 세계를 보는 관점과 태도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경험을 구성하는 방법도 여기서 비롯된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본 사행을 기록한 일사집략은 새로 운 담론이 기존의 담론들과 치열하게 서로 부딪치면서 갈등하 던 모습을 보여준다.

1. 박람회를 통한 물산 장려

이헌영이 일본에 도착하여 받은 첫 번째 인상은 산업화된 일 본의 모습이었다. 기계와 산업이 정밀해져서 수많은 물건이 대 량생산되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산업화된 일본을 대표하는 행 사가 박람회였다. 이헌영은 도쿄와 교토에서 개최된 박람회를 관람하였다. 그는 박람회의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 였다.

박람회(博覽會)나 박물관에는 일본과 각국의 물건들이 모여 있다. 그 천 가지 만 가지를 다 기록하기는 어려운데, 조선의 옷 ㆍ띠ㆍ갓ㆍ신 등이 그 안에 끼어 진열되어 있다. 박람회의 목적 은 하나는 상품 판매를 돕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국이 라는 이름을 자랑하기 위해서다. 일본국왕은 친히 그 박람회에 나가, 기물을 잘 만든 사람에게 상을 주어, 공장(工匠)의 업을 흥하게 함을 장려한다고 한다. 23)

발길을 돌려 박물회에 갔더니, 다만 국산품만 모았다고 하는 데, 국(局)마다 진열한 규모가 굉장하며, 기이 정교하고 사치 화 려한 물건이 없는 게 없었다. 기계류 중에 직조기ㆍ탈부기(脫稃 機 정미기) 등은 실용성이 있을 만하였다. 각 국(局)을 다 구경 하려면 3~4일은 걸린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만 두어 국만 보았 다.

또 박물회가 있었는데, 거기엔 각국의 물건들이 수집되어 있

23) 일사집략, 문견록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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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했다. 24)

박람회와 박물관에 여러 물건을 진열한 목적이 첫째, 상품의 판매를 돕는 것이고, 둘째 일본의 물품의 정미함과 풍부함을 자 랑하기 위함에 있음을 간파한다. 이러한 박람회의 물건 가운데 조선의 물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가 교토에서 박람회를 둘러 보았을 때의 일이다.

또 한 곳에 이르니 조선의 물건들을 진열하여 놓았는데, 명주 ㆍ춘포(春布)ㆍ북포(北布)ㆍ미선(尾扇)ㆍ백립(白笠)ㆍ백혜(白鞋 흰 가죽신)ㆍ창의(氅衣)ㆍ소창의(小氅衣)ㆍ목청상(目靑裳)ㆍ행전 (行纏)ㆍ토수(吐手)ㆍ청옥 초합(靑玉草盒 청옥 답배 갑) 따위였 다. 그런데 질이 낮은 등품으로만 골라서 이렇게 진열한 그 의 도가 또한 괴이했다.

한 모퉁이에 여인상(女人像) 한 폭을 걸어 두었는데, 들으니 이 여인은 삼한(三韓)때 일본에 들어와 길쌈을 가르쳤으므로 그 공을 잊지 못하여, 유상이 지금껏 전래한다고 했다. 25)

그러나 조선에서 생산된 제품은 질이 낮은 옷, 띠, 갓, 신 등 일뿐이어서 일본의 여러 제품과 비교가 되었다. 일본에서 조선 의 질이 낮은 조선의 물건을 접함으로써 조선의 현실을 더욱 잘 깨닫게 된다. 일본에서 전시하고 있는 조선 물건을 통해 만 들어진 조선의 이미지는 “낙후”였다. 그러면서 이처럼 질이 낮 은 물건을 골라서 진열한 의도에 의문을 품고 있다. 비록 그날 조선의 朝士들이 둘러볼 것을 의도하고 그처럼 진열해 놓은 것 이 아니라면, 일반 일본인들 많이 찾아오는 박람회를 통해 조선 의 낙후함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인 식한 듯 보인다.

24) 일사집략, 신사년 . pp.83~84.

25) 상게서, pp.75~76.

일본이 서양에 수출하는 주요 제품이 면사였다. 그러나 일본 에서 생산된 제품의 수출은 적은 상황이었고 생활이 서구화되 면서 생필품의 수입이 많은 현실 속에서 일본의 광업 개발과 증기기관에 의한 공업화에 대하여 의심을 가졌다. 이헌영은 일 본의 이러한 공업화의 목표가 바로 서쪽의 조선을 겨냥하고 있 음 생각하고, 조선이 상품의 판매지로 전락할 수 있음을 우려했 다.

이처럼 이헌영이 일본 사행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보다 일 찍 시작한 통상으로 세계 체제 속에 편입된 서구화된 명치 일 본이라는 대상을 통해 조선의 정체성을 더욱 절실히 인식하였 다는 점이다. 26) 비록 이 사행이 공무로 간 여행이었지만, 여행 은 익숙하던 자신을 버리고 낯선 곳의 견문을 살핀다는 점에서 남과 다른 자기 同一性을 확인하고 正體性을 형성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2. 부국강병에 대한 관심

일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본 두 번째 모습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이 모습이었다. 이헌영은 일본에 대 한 탐방을 통해 일본이 물질적으로 개화되고 발전된 모습을 살 필 수 있었다. 부국강병에 힘써 무기가 날로 날카로워 지고 병 사들의 훈련도 정밀해 지는 등 군사력이 날로 커지는 것도 탐 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 일본인의 입을 통해 일본의 부국강병 정책의 단점, 명치유신의 폐해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헌영은 중촌정직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26) 쑨꺼(孫歌),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류준필 외 옮김, 창비, 2003. 그는 국경을 넘을 여행에 대하여 “진정한 비교는 국경을 넘나드는 지식공간을 창출하고 문화 차이를 이해하는 것에서 가능하다. 국경을 넘나든다는 것은 국민국가 단위를 넘어서서 자유롭 게 사고하고 실천하는 개인 주체를 생각하게 한다”고 하여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기회라고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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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귀국은 무진년 이후 政體가 일변되고, 모든 제도가 새로워 졌습니다. 본 것이 듣던 바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변혁 중에는 나의 소견에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얻어 들을 만한 고견이 없겠습니까? 27)

② 귀국에서 통상한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웃사람과 아 랫사람의 제도가 한결 같이 서양 것에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통상에 이로와서 그와 같이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통상의 利害는 어떤 것입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각국 물자가 오고 가고 해서 크게 이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도 또한 그 런 것입니까? 28)

그리고 다른 인사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질문을 반복하고 있 다.

① 외국과 통상해서 실적이 전일에 비해서 배나 늘어났습니 다. 통상에 국한된 것만 아니라, 위로 조정에서부터 아래로 여항 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일, 한 가지 물건이 모두 서양의 제도에 서 나오고 있습니다. 과연 부강의 정도가 전일에 비해서 배가 되는 것입니까?”

② 귀국의 근일 실정을 들어 본다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용적으로는 빈곤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틀리는 것입 니까? 맞는 것입니까?”

③ 당초 귀국에서 서양의 나라들과 통상할 때에 이것을 주장 한 자가 누구이며, 연래로 한결 같이 서양의 제도에 따르게 한 것은 또한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그리고 오늘날 정 권을 잡아서 나랏일을 전담하는 이가 누구인지 얻어들을 수 있 겠습니까?”

위의 질문은 청나라의 이사서에서 역원을 하는 임우육에게

27) 일사집략, 문답록 , p.248.

28) 상게서, p.249.

한 질문이다. 임우육은 청나라 관리를 하고 있으나 본래 일본 사람으로 막부 시절 병사였던 인물이다. 29) 그는 스스로를 “일찍 부터 견양(犬羊 서양 사람을 가리킴)의 발호를 분개하는 사람 으로 완고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요 개화된 사람이 아니”라고도 한 인물이다.

그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대하여 신문을 통해 알고 있을 정도로 대외 정세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갖고 있다. 이헌영은 개화에 대하여 비판적인 일본인과의 대화를 통해 메이지 일본 의 경제 및 정치 및 문화의 변화가 가져올 폐해에 대하여 비판 적으로 보여준다.

① “서양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그들이 기술이 있다고 보아서 이고, 서양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서였습니다. 이 같이 각각 생각을 달리하여 서로 다투는 것 이 지금까지 20여 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일에 죽은 자가 3~4천 명에 이르고 있으니, 마치 귀국의 오늘날과 같은 것입니 다.” 30)

② “일본 사람이 웃사람이나 아랫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이처 럼 새로운 제도로 고쳤으니, 이것은 좀 그릇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 사람의 조종이 아니고, 그들 자신이 즐겨서 하는 것입니다. 현재 의복을 비롯해서 모든 용품을 서양의 것을 쓰기 때문에 근일의 통상에서는 전국에 있는 금은을 거의 다 서 양 사람이 가져가서 재정이 빈곤하게 되었습니다. 31)

③ 일본 사람이 서양의 제도로 고쳐서 군대를 훈련하고 기계

29) 상게서, pp.207~216. “소인은 본적이 이세주(伊勢州) 사람입니다. 고향을 떠난 지 20여 년이며, 사방을 두루 다녔습니다. 8년 전에 일찍이 청(淸) 나라에 가서 놀다가 돌아왔으 며, 청관(淸館) 안에 머물러 있은 지도 이미 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3년 전 덕천 막부(德川幕府)가 무너지자, 천하의 제후들이 봉토를 잃고 사졸(士卒)들이 해산되었습 니다. 소인은 고향을 떠나서 떠돌이의 신세가 되고, 주가(主家)는 파산되어 돌아갈 곳 이 없어서,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었습니다.”

30) 상게서, p.214 31) 상게서, p.241.

(11)

를 만들며, 기선․기차를 운행하는 것은 모두 유익한 일입니다.

그 잘못은 의복 등의 제도를 고쳐서 일용 음식의 물품을 모두 서양 나라에서 구입하여, 금은을 유출시키는 것입니다.

①은 일본인의 주장이고, ②와 ③은 청나라 일본공사 하여장 의 일본의 제도에 대한 평가이다. ①을 통해 보았을 때,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서로 동의하였으나, 개화당과 그 반 대편 사람들의 대립은 서양의 종교를 어떻게 봐라 봐야하는가 의 문제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동도서기의 차원에서 서양 문명의 이기는 받아들이되, 서양의 종교와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갈등이 있었음 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②에서는 일본의 임금부터 일반백성까 지 서양식으로 옷을 입고 먹는 것이 서양이 강제한 것이 아니 라 일본인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광산을 채굴하여 모은 금과 은이 서양으로 유출되는 것이 많아 재정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이헌영은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에서 낙척한 인사들의 일본에 대한 평가와 중국 측 인사들의 일본에 대한 평가를 일 사집략에 함께 실음으로써 공업화에 매진하고 개화된 제도를 가진 일본의 숨겨진 측면을 잘 보여 준 것으로 보인다.

3. 제한적 의회정치의 도입과 서양에 대한 관심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해 기존의 행정구역을 현으로 고치고 의회정치를 시작하였다. 이헌영은 의회가 열리는 날, 의회의 모 습을 보고 의회정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이헌영 : “장기현(長崎縣)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현(縣)의 의 회(議會)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다 함께 가서 참석해 보았습니다. 현 의회는 곧 하정(下情)의 상달을 위함이라고 들었

는데, 좋은 법이라 생각합니다. 그 자세한 설명을 듣기를 원합니 다.”

이노우에 : “이는 서양 여러 나라의 법입니다. 현 의회에서부 터 국회(國會)에 이르고 있는데, 국회는 우리나라 정부에서 아직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으로 하여금 정부의 정령(政令)은 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려서 오직 승복하게 하여, 점차 익숙한 후에 비로소 국회를 열어야만, 위와 아래가 서로 소통될 것입니 다. 만약 국회를 먼저 연다면, 그것은 마치 《소학(小學)》도 읽 지 않고서 먼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2)

그러자 이노우에는 이 의회정치가 아직 제한적인 과정임을 알려준다. 서양의 정치제도를 모방하고 있으나 아직 국회를 개 회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 준다. 그리고 국가의 통치권 이 일반 백성에게까지 미쳐야 성숙한 의회정치가 행해질 수 있 다고 하여 제한적인 의회 정치를 실시하고 있음을 실토하고 있 다.

“조선에서 일찍이 미국 배 한 척을 불태우고, 그 사람들을 죽 였을 때에 이 신문지(新聞紙)를 번역하는 사람이 그 일의 시말 을 번역했기 때문에, 서양 사람이 일패도지(一敗塗地 다시 일어 나지 못할 만큼 여지없이 됨)한 것을 알고, 마음에 통쾌하게 생 각했었습니다. 미국 병선(兵船)이 조선으로 갔을 때에 소인은 이 곳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그 승부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갔을 때에도 그 승부가 어떻게 되는가를 살폈습니다. 그러나 서양 신문들은 이따금 허위 보도 를 많이 했습니다. 조선과 싸워 이겼다면서 노획한 바 기계ㆍ궁 시 등속을 사진으로 실어서, 실지로 이긴 것처럼 보여주었습니 다. 일본 사람은 지금까지도 이 전쟁의 승부에 대해서, 열 사람 에 한 사람도 실상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33)

32) 상게서, p.157.

33) 상게서, p.208.

(12)

위의 글은 청나라에서 역원으로 일하고 있는 일본인 임우육 에게서 나온 말이다. 그는 신문을 통해 조선의 사정을 살피고 있는데, 조선에 대한 소식이 서양에 의해 허위 보도되는 것이 많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양의 신문으로 인해 조 선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많아 일본인들은 그 사건의 실상을 아는 사람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과 청나라에서는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 서구의 여러 나 라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이 파악하고 있는 서구에 대한 정보를 이번 사행을 통해 탐문하고 있다.

① 근래에는 유럽 사람들이 기선을 가지고, 지구 위 여러 나 라로 다니면서 통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보와 철도를 가지 고 그 속도를 돕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통상의 국 면은 지난날과 전연 서로 같지 않습니다. 이른바 공평이라는 것 은, 세관의 세칙을 내 나라에서 자율적으로 제정하고, 또 내 나 라에 와서 거주하는 상인은 내 나라의 법을 준수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가장 중대하고도 요긴한 것입니다. 34)

② 미국이 비교적 공평하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국토가 새로 개 척되어 온 나라 국민의 생계가 풍족하여 굳이 다른 나라의 이익 을 모두 차지하려 하지 않는 때문입니다. 35)

③ 명치 무진년에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 14년의 세월이 흘렀 습니다. 다만 내가 영국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 나라의 정치의 규모가 굉장히 크고, 그 풍속이 아름다우며, 그 인민이 부지런하 고 인내성이 있으며, 그 종교와 제도가 찬한 것임을 느꼈습니다.

영국이 강대한 것이 과연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습니 다. 다만 함정이나 화기의 소치는 아닌 것입니다. 36)

34) 상게서, p.238.(하여장과의 대화).

35) 상게서, p.239.

36) 상게서, p.245.

④ 프랑스는 변란(大革命)이 있은 뒤 국세가 날로 향상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동양에 대하여 침을 흘리고 있으니, 가장 두 려운 존재입니다. 화기(合衆國)는 그 위치가 동양 여러 나라와 함께 교제하여 서로 친해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37)

①과 ②는 청나라 일본공사 하여장의 말이며, ③, ④는 중촌 정직의 말이다. 중국 측 인사와 일본 측 인사의 진술들을 통해 중국과 일본이 서구 열강에 대하여 갖고 있는 태도와 서양의 제도, 국제 정세의 변화를 살펴본 것이다. 미국에 대해서는 청 나라 영사인 하여장의 언급이 주목된다. 그는 미국은 멀리 떨 어져 있고 국력이 강하여 통상에 있어서 공평하게 협정을 맺는 다고 알려 주고 있다. 이러한 정보가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 을 맺으면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서 오랜 시절 유학하고 돌아온 중촌정직의 말을 통해 영국이 강한 것이 단순히 함정과 무기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물이 있게 한 영국의 제도가 가운데 특징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이 사람도 러시아의 위험에 대하 여 서양의 정세를 이야기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제도 변화와 국제정세의 변화를 대화를 통해 탐문하였 고, 이러한 대화의 결과인 일사집략은 이후 조선이 구미열강 과 일본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Ⅳ. 결론

본고에서는 이헌영의 일사집략 가운데 문답록 을 통해 정

보를 획득하는 전략의 특징과 근대 일본의 모습을 어떻게 형상

화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문답록 속에서 사실을 확인하는

37) 상게서, p.251.

(13)

질문하기와 반론을 통한 대답 이끌어 내기를 통해 일본의 근대 화가 가지는 의미와 조선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하여 각계각 층의 일본인의 입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글을 읽 는 독자에게 일본의 현실을 마주 보고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또 문답록의 내용 가운데, 근대 일본의 모습을 형상화한 부분 을 통해 일본의 개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근대화되어 가는 일본과 조선의 낙후된 기술이 대비적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부국강병을 위 해 재원을 쓰는 가운데, 생기는 문제점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제한된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하는 일본의 모습과 서양의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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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Information Acquisition Strategy of Lee, Hun-Young and Image of Modern Japan

The Lecture of kangwon National Univ. Park Tan

This study examined the information acquisition strategy which is shown in Lee, Hun-Young's ILSA JIPRYAK and shape of modern Japan. Lee, Hun-Young have visited Japan with 12 persons, such as Park, Jung-Yang by the secret order of Emperor Gojong in 1881 to search culture and method of diplomatic relationship and trading with other countries. And he returned after investigating overall tariff task.

Lee has met various persons who leads the Meiji Restoration as well as general governmental officers, persons who has negative point of view for the Meiji Restoration, and officer of Old China, Empire Chung who concerned current situation to complete the secret order and to acquire information regarding to the benefit of opening of Korea and trading task. The book which collected those communication is MUNDAP ROK .

Lee used 2 strategies to find information about current

Japanese situation, economy, cultural changes and making

relationship and trading method with other countries. The

first was to verify fact by direct question and answer, and

(15)

투고일 2013. 5. 1.

심사시작 일자 2013. 5. 20.

심사완료일 2013. 6. 20.

the other is to derive more aggressive response using argument.

In this book of Lee, various appearance of modern Japan was reflected. Especially, the appearances of Japan which he is focused by communication are: First, encourage trading by holding Exhibitions, Second, focus on national growth and economic development. The last one, political system which make centralization of government and various information about foreign countries. Lee wrote the book using communication style along with diary style to describe Japanese appearance and to give the reader feeling of joining the communication directly by providing the communization status indirectly.

Key Words : Lee, Hun-Young, ILSA JIPRYAK,

Information Acquisition Strategy, Modern Japan, Exhibition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