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일_2018.10.10 심사기간_2018.11.01-18 게재확정일_2018.11.28
신라 금제 관식의 이미지를 활용한 티아라의 응용 사례 연구 - 신라금관의 세움 장식을 중심으로 -
A Case Study on the Application of Tiara Using The Image of Silla Gold Diadem Ornament - focused on the upright ornament of Silla gold crown -
사분금, 홍익대학교 대학원 금속조형디자인학과
Sa, Bun geum_Metal Art and Design, Graduate School of Hongik University
차례 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1.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2. 티아라의 일반적 고찰 2.1. 티아라의 기원
2.2. 티아라의 형태적 특징과 상징성
3. 신라금관의 일반적 고찰 3.1. 신라금관의 기원
3.2. 신라금관의 형태적 특징과 상징성
4. 신라금관과 티아라의 비교 분석
5. 서양의 티아라를 응용한 사례연구
6. 작품제작 및 분석
6.1. 작품의 모티브와 바탕이 되는 이론 6.2. 작품의 분석
7. 결론
참고문헌
신라 금제 관식의 이미지를 활용한 티아라의 응용 사례 연구 - 신라금관의 세움 장식을 중심으로 -
A Case Study on the Application of Tiara Using The Image of Silla Gold Diadem Ornament - focused on the upright ornament of Silla gold crown -
사분금, 홍익대학교 대학원 금속조형디자인학과
Sa, Bun geum_Metal Art and Design, Graduate School of Hongik University
요약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의 문화유산 중 금속 공예적 요소가 가장 뛰어난 신라 금제 관식 중 신라금관(新羅金冠) 을 중심으로 조형성을 분석하고 이를 현대 예식 장신구의 하나인 티아라(Tiara) 디자인으로 재해석 하고자 한 다. 오늘날 결혼예식이 대부분 서양식으로 행해지고 있고, 결혼예복 중에서도 티아라는 고귀함과 신선함을 상징 하는 신부의 머리 장식으로써, 결혼예식에 있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장신구이다. 이와 같은 결혼예식용 티 아라를 우리의 문화유산인 신라의 금관과 결합시켜, 결혼예식 장신구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우리의 문화가 담긴 디자인으로 재해석하여 자주성과 독창성을 확보해 나가려고 한다. 연구자는 신라시대의 다양한 금제 관식 가운 데 신라금관의 역사적 상징성과 조형적 독창성을 면밀히 살펴보고, 분석과 작품제작을 통해 새로운 형태와 문화 적 맥락의 티아라 디자인을 시도하려한다. 특히, 신라금관에서 특징적으로 돋보이는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의 세움 장식, 드리개와 달개, 곱은 옥 등을 주요 모티브로 차용해 그 공예적 유산을 티아라에 접목시키고자 한다.
더불어, 동양을 대표하는 신라금관과 서양의 왕관인 티아라의 역사적 변천과 의미를 비교 분석하고, 왕권의 위 엄과 지위, 신성한 권력을 상징하던 왕관이 어떻게 일반적인 결혼예식의 머리 장식으로 정착되었는지 그 과정도 함께 짚어 볼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formativeness with focus on a golden crown among the Silla golden diadem ornaments, which is the most excellent in metal craft elements out of the cultural heritage of Korea, and to reinterpret Silla golden crown as Tiara(modern (wedding) ceremony accessory) design. Today’s wedding ceremony is held mostly in the Western style. Among the wedding dress, tiara is a bride’s hair accessory symbolic of nobility and freshness, forming an important part of a wedding ceremony. This study is intending to secure inde pendence and originality of our wedding ceremony accessories by combining such a Tiara form with Silla gold crown as our traditional culture. This researcher is attempting at Tiara design of a new form and cultural context through production and analysis while carefully looking into the historical symbolism and formative originality of the Silla golden crown among diverse golden diadem ornaments during the Silla Dynasty period. Particularly, this study is intending to graft the polytechnic heritage onto Tiara by borrowing a branch & antler-shaped seum jangsik(upright ornament), which characteristically stands out from the Silla golden crown, deurigae(pendant) and dalgae(ornamental metal hung on a golden crown) and curved jade, etc. as a major motif. In addition, this study will do comparative analysis of the historical transition and meaning of a golden crown in the East and West, and also address the process together about how a golden crown, which used to be symbolic of the dignity, status of royal authority, and holy power, came to get established as a ordinary wedding hair accessory.
중심어
신라금관 티아라
금속 공예 디자인 세움 장식 초현실주의
ABSTRACT Keyword
the silla gold crown tiara
metal art design upright ornament surrealisme
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오늘날 결혼예식이 대부분 서양식으로 행해지고 있고, 그에 따라 결혼식 예복도 서양의 것을 그대로 답습해 사용하고 있다. 특히, 서양의 예복 중에서 금속 장신구 부분인 티아라(Tiara)는 서양의 결혼예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부의 머리 장신구이다. 티아라는 서양의 대표 적인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한국적인 조형미로 재해석하려는 의도가 본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연구자는 이러한 티아라의 장신구적 고유 지위에 신라금관의 조형적 상징성 과 예술성을 입히고, 그 주요 모티브를 접목해 새로운 형태와 문화적 맥락의 티아라 디자인을 탐구하고자 한다. 먼저, 신라금관 모티브의 역사적 상징성과 조형적 특징을 분석하고, 티아라 에 대한 일반적 고찰로 티아라의 기원과 형태적 특징, 상징성을 살펴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창적인 신라금관의 금속 공예 유산을 어떻게 현대 장신구 디자인으로 재해석하여 계승하고 발전시킬 것인가에 연구의 목적을 두고 있다.
1.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연구자는 신라시대의 다양한 금제 관식 가운데, 오늘날 전해지는 금관에 대해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 그리고 조형적 특징을 면밀히 살펴보는 연구에 초점을 둔다. 더불어 신라금관의 독창 성과 우수성을 부각시켜 보고자 서양의 왕관이었던 티아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제2 장에서는 서양에서 기원한 티아라에 대한 기원과 형태적 특성에 대해 고찰해 보고, 제3장에서 는 본 연구의 초점인 신라금관의 기원 및 형태적 특징과 상징성을 살펴본다. 제4장에서는 신라 금관과 서양 티아라는 각각 어떤 특성이 있고, 어떻게 대비가 되는지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동양의 대표적인 왕관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신라금관을 중심으로 서양의 왕관 중 대표적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의 티아라를 대비시켜 분석해 본다. 제5장에서는 서양 티아라를 재 해석하여 오늘날 디자인 된 관련 사례 연구 중 미스 코리아 같은 미인대회용 티아라에 대해 살펴본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각 금관의 특징적인 형태와 장식 구성 요소를 재해석하고, 그 상징적 의미와 예술성을 검토한다. 특히, 신라금관에 주로 보이는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 의 세움 장식의 주요 모티브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구체적인 조형성을 어떻게 현대적 티아라 디자인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지 고민 해본다. 이러한 연구 과정은 차후 연구자의 티아라 작품 조형 연구의 주요 근간이 될 것이다.
2. 티아라의 일반적 고찰 2.1. 티아라의 기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티아라는 결혼식에서 신부가 착용한 결혼예복에 있어 머리 장식을 하는 장신구이다. 티아라는 원래 교황관(敎皇冠)을 부르는 라틴어 낱말로 쓰였는데 그 어원을 살펴보면, 그리스어 ‘티아라(τιαρα)’의 음역이다. 하지만 그리스어 ‘티아라’의 사전적 의미는
‘특별한 장엄한 기회에 사용하던 페르시아의 머리 두건’이다.1)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유럽의 고대에서 중세시대까지 ‘서양의 왕관’이라 할 수 있는데, 교황이 쓰는 교황관을 비롯하여 유럽 각 왕조국가의 왕과 왕비가 착용하던 왕관을 ‘티아라’라고 하였다. 이후 시대적 상황에 따라 왕조시대의 몰락과 함께 왕관으로써의 개념이 퇴색하게 되었고, 대신에 티아라는 왕관의 지위, 혹은 왕실을 상징하는 전유물에서 특별한 행사와 자리의 패션의 아이콘으로 대중화되어 오늘 날 결혼식 장신구로 주로 사용되면서 티아라의 개념이 재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티아라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집트 피라미드의 무덤 안에서 출토 된 유물 중에는 고귀 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미이라의 머리에 장신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B.C 3200-B.C 332)에서 귀한 왕족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표시하기 위해 머리 위에 장신구를 착용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명 발상지 이집트의 고대 국가에서
1) Henry George Liddell and Robert Scott(compiled by), A Greek-English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1994), p.1789. / 변종찬, 『서양중세사 연구 제34호』, 「교황관(tiara)을 통해 본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자의식」편, 2014, p.147.
왕을 상징하는 머리 장식으로 쓰이던 관(冠)이 티아라의 원류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알렉산더 (B.C 356-B.C 323)대왕의 동방원정을 통해 고대 이집트 왕이 쓰던 작은 왕관이 유럽으로 유입되었고, 알렉산더 대왕 자신이 이것을 모방하여 제작하고 착용하면서 서양의 왕관인 티아 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후 로마제국으로 계승되어 이때부터는 황금에 의존하던 재료에서 더하여 화려한 보석위주의 관으로 변모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중세 유럽의 왕조국가에 이르러 서는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는 보석들로 화려하고 더 무겁게 형태가 변모해 가게 된다.
티아라는 특별함과 고귀함을 보여줄 수 있는 표식으로 자존감을 극 대화 시킬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닌 머리 장식인데,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표현 방법의 하나이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착용해 왔고, 그 시대의 대표적인 티아라 작품들은 부와 권력,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들 중 주로 왕실이나 권력계층 대부 분이 소장하였다.3) 기록에 의하면 중세시대에 유럽 각 왕실에서는 왕이 왕비를 맞이할 때 티아라를 선물하는 것이 관례이며 대를 이어 서 물려줄 정도로 상징적인 의미가 컸었다. 이 당시의 티아라의 개 념은 남녀 구분이 없이 왕과 왕비가 모두 착용하는 왕관인데, 다만 왕은 더 크고 무거운 반면에 왕비의 것은 왕보다 작고 가볍다는 차 이가 있다. 왕비들이 쓰는 티아라가 오늘날의 현대식 티아라의 원형 이라 볼 수 있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비싼 보석과 금제 장
식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던 부류는 각 유럽 왕실의 여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당시 시대의 장신 구를 포함하는 패션에 있어 리더이자 당시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라 할 수 있었으며, 유행의 출발지라 할 수 있었다. 그 패션의 한 부분에서 티아라는 호화롭고 아름다움을 완성해 주는 패션적 기능과 동시에 신분적 상징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4) 당시 왕실의 결혼은 정략결혼이 대부분이서 오늘날 티아라가 상징하는 ‘사랑의 징표’보다는 왕가의 신성함과 신분의 상징성 역할이 주된 것이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티아라가 여성의 전유물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데, 유럽 중세시대에는 남성이 대다수였던 왕들도 화려한 티아라를 착용하고 대관식을 통해 왕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다 티아라의 역할과 개념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천했는데, 18세기 프랑스 나폴레옹의 왕비 조세핀<그림 1>은 수많은 티아라를 사용했고, 이것이 당시 왕가와 교류가 깊었던 귀족 층의 여인들이 동경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차츰 유행이 되어 당시 귀족 여성들 사이에 티아라 는 패션의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이후 차츰 티아라는 왕가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오늘날 결혼예식에서 중요한 예식 장신구로 자리 매김하면서 여성의 전유 물처럼 인식되게 되었다. 따라서 티아라를 평소에 착용하길 즐겼고 많은 티아라를 보유 했던 유럽 왕실의 여인들과 특히, 나폴레옹의 왕비 조세핀(Josephine)은 티아라가 대중화되는데 비중 있는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본 연구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결혼예식에 쓰이는 현대적인 티아라의 개념을 중심으로 연구를 하고, 작품 디자인에 있어서도 왕관 형태가 아닌 결혼식 티아라에 초점을 맞춰 반영 하고자 한다.
왕관(Crown) 혹은 티아라(Tiara)를 나타내는 관련 된 단어들도 많은 게 사실인데, 따라서 이와 관련된 단어들을 열거해 보고 사전적 개념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 가면 다음 <표 1>와 같다.
2) 출처: 홍지연, 『시간이 만든 빛의 유혹』, 앤티크 주얼리, 2006, p.32.
3) 한민경·권기형 공저, 「티아라 디자인을 형상화한 웨딩 업스타일연구」,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제22권 2호, 2016, p.677.
4) 원종옥, 『그림에서 보석을 읽다』, 이다미디어, 2009, p.62.
<그림 1>
Jacques Louis David의 작품
<나폴레옹의 대관식>의 세부 ,1804, 유화, 610×931).2)
2.2. 티아라의 형태적 특징과 상징성
티아라의 형태나 디자인 장식은 시대에 따라 변모했지만 명예의 상징이나 신분의 자존감을 나타내는 상징성으로서의 역할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장신구라 할 수 있다. 중세시대에는 최고 권력자들인 왕이나 왕비가 대관식에서 착용하는 왕관의 개념에서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는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를 상징하는 결혼예식에 있어 정점인 머리 장식으로 변천해 온 티아 라는 상당히 특수성을 지닌 장신구이다. 왕조시대가 붕괴된 근대에 이어 오늘날에 있어서는 웨딩에서 신부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심벌(symbol)로 자리 잡았는데, 상징성 을 포함해서 신부의 우아한 자태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장신구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또한 결혼식 외에 미인대회 우승자에게 착용되어 당사자를 빛나게 하는 최상의 심벌 장신구로 자리를 확고히 잡고 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티아라는 형태적인 면에서도 많은 변천을 했다. 티아라의 형태는 고대 사회에서는 월계수 잎을 만들어 머리에 착용한 것과 같이 대체로 화관형(花冠形)의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주로 식물과 꽃의 모양에서 많은 모티브를 가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중세에 서 현대로 넘어 오면서 많은 보석의 발견과 금속세공 기술의 발달, 그리고 다양한 소재의 사용 으로 인해 티아라는 형태적인 면에서 왕관의 모습에서 변모를 거듭하여 대중성이 가미된 주얼 리의 한 컬렉션을 차지하는 장신구로써 위치를 잡았다. 디자인적 요소에서도 역시 더 세련되게 변하였다. 특히 유럽의 왕조시대의 티아라가 비싸고 고귀한 보석들로 장식된 반면에 오늘날은 대중성에 바탕을 둬 다이아몬드를 큐빅으로 대체하거나 금속 프레임을 플라스틱성 재료로 대 체하는 등 다양한 소재와 액세사리용 재료 등을 사용하여 제작함으로써 비용적인 면에서 훨씬 낮아졌다. 다만 일부 연예인이나 비용적인 면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티아라를 갖고 싶어 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티아라의 테를 백금으로 사용하고, 여러 가지 비싼 보석 장식을 하여 디자인 된 특별해 보이는 자기만의 티아라를 원하는 수요층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은 디자인이나 비용 적인 측면이나 종류 면에서 한 층 다양해졌으며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구분 영문명 사전적 설명
왕관 Crown
라틴어 화관을 의미하는 코로나(corona)에서 유래, 앵글로 프랑스어의 쿠론(cour onne)이다. 장식 또는 명예의 상징인 화관(wreath)이나 머리띠(fillet)가 변해 보석으로 장식된 왕 ·왕비의 관(冠).
티아라 Tiara
원래는 교황관을 부르는 라틴어이며 그리스어 ‘티아라’의 음역으로, 특별하고 장 엄한 기회에 사용하던 페르시아의 머리 두건, 오늘날은 보석을 세팅한 왕관 형태로 관형(冠形)의 여성용 두식(頭飾).
금관(金冠) golden crown
금으로 만든 관모(冠帽). 사용 재료 기준의 분류로 일반적으로 금속으로 만들어진 모든 관모를 포함시켜 금관으로 통칭.
보관(寶冠) coronal 보석으로 장식한 왕관, 특히 불교의 관으로 말하는 천관(天冠), 주로 엄청난 보석 으로 장식한 영국 왕실의 왕관을 지칭하기도 한다.
화관(花冠, 리스) corona 그리스·로마에서 환상의 꽃·나무줄기·잎으로 된 화관을 일상생활, 결혼식에 남녀가 썼으며 올림픽의 승리자는 월계관을 씀
코로넷
(小冠) coronet
소형화된 크라운, 국가행사에 벨벳 캡 둘레에 쓰는 좁은 금속 밴드, 금, 은, 보석 으로 장식되고, 왕실의 소관(小冠)이나 귀족계급의 보관(寶冠)으로 여성의 정장용 머리장식.
다이아뎀 diadem
5~8세기 귀금속제의 전형적인 왕관 형으로 이마 중앙의 뾰족한 부분에 보석 장식을 한 헤드밴드 형태로 ‘둘러서 묶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다이아데인(diadein)’
에서 유래.
미트라 mitre 고대 페르시아의 왕관, 유럽에 전래되면서 카톨릭의 주교가 종교 의식을 행할 때 쓰는 머리장식으로 변모 됨.
스테파니 stephane 고대 그리스 여장의 머리 장식, 이마 쪽은 넓고 양 옆은 좁은 관.
서클릿 circlet 꽃이나 귀금속 등으로 만든 머리에 쓰는 관.
채플릿 chaplet 머리에 쓰는 화관(花冠).
쉔트 pshent 상(上)이집트, 하(下)이집트의 모자가 합쳐진 모양의 이집트 왕(王)의 모자.
<표 1> 왕관 종류와 관련된 단어의 사전적 구분
주요 티아라의 형태를 보면 유럽 왕조국가의 왕가 여인들이 착용하고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온 역사성과 왕가의 존엄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담고 신분적인 면을 형태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 로 인해 티아라의 형태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다만 크고 화려한 왕관의 형태에서 착용의 편리성에 주안점을 둔 형태로의 변모한 공통점이 있다. 착용의 편리는 곧 대중화의 시작점이라 할 수도 있다. 티아라의 형태는 우선 역사성에 의해 왕관 형태의 티아라와 현대 결혼식용 티아 라로 구분 할 수 있으며, 오늘날 보편적인 티아라의 원형이 되는 유럽 왕실의 티아라는 대체적 으로 아치형과 밴드형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림 2-1> 대영제국, 성 에드워드 왕관 (St Edward's Crown)
<그림 2-2> 대영제국 제국왕관
(Imperrial State Crown)
<그림 2-3> 프랑스, 루이15세의 왕관
<그림 2-4> 이탈리아(로마), 황제의 왕관(카롤루스 대제)
위의 그림들5)은 유럽 왕실의 왕이 착용하던 왕관 형태의 티아라의 예이다. <그림 2-1>은 현재 영국의 왕실에서 사용하는 왕관(Imperial State Crown)으로, 황실을 대표하는 것으로 17세기 중기의 찰스 2세 이후로 전하는 ‘성 에드워드 왕관’이다. 이 왕관은 순금제로 무게가 무려 3Kg이나 되어 지나치게 무거운 관계로 대관식 때만 의식용으로 쓰인다. <그림 2-2>는 19세기 초기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때 사용한 ‘제국왕관(帝國王冠)’으로 이 왕관은 백금 관에 ‘제2의 아프리카의 별’이라고 불리는 309캐럿의 컬리넌(Cullinan) 다이아몬드를 포함한 2,783개의 다이아몬드 등을 세팅한 보관(寶冠)이다. <그림 2-3>은 프랑스의 왕관으로 1722년에 제작된 루이 15세의 왕관이다. 이 왕관은 백금 테에 273개의 다이아몬드(140.64캐 럿 포함) 등을 세팅한 보관(寶冠)으로 프랑스의 전성기인 르네상스 시대의 것이다. <그림 2-4>는 오늘날 빈 미술사박물관의 ‘세속의 보물실’에 보관된 ‘로마 황제’의 황제 왕관이다.
여덟 개의 금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팔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제작 시기는 대략 10세기~12세 기 사이로 추정된다. 카를 대제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탈리아(로마제국 포함)를 대표하 는 왕관이다.
<그림 3-1> Queen Victoria’s Sapphire Coronet Tiara
<그림 3-2>
Essex tiara
<그림 3-3>
Strathmore Rose Tiara
<그림 3-4>
Vladimir Tiara
위의 그림들은 유럽 왕실 여인들이 착용했던 밴드형 티아라의 형태를 보여주는 티아라의 예이 다. <그림 3-1>은 마삭줄기 모양과 흡사한데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알버트공이 직접 디자인 해서 아내인 빅토리아 여왕에게 준 것으로 유명한 티아라이다. 1840년대 제작되었으며 한 때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린 대영제국의 위풍이 느껴지듯 화려한 다이아몬드들이 장식되 어 있다. <그림 3-2>는 1902년 제작된 것으로 햇볕을 좋아하는 하트 모양의 식물 세로페기 아(ceropegia)와 유사한데 에색스(Essex) 백작부인을 위해 까르띠에가 만들었고, 현대에 와 서는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착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림 3-3>은 장미꽃을 본
5) 출처: 위키백과 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왕관
따 만든 것으로 대영제국의 엘리자베스 2세가 아버지 스트라스모어 킹혼 백작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1923년 제작된 것으로 친정가문의 이름을 따서 ‘스트라스모어 로즈 티아라 (Strathmore Rose Tiara)’로 불린다. <그림 3-4>는 1890년 러시아 제국에서 제작된 다이아 몬드 장식의 티아라로 원래 러시아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의 고모인 블라디미르 대여 공작이 사용하던 것이다.
<그림 4-1> Fife Tiara <그림 4-2>
Marie Josephe’s Tiara
<그림 4-3>Boucheron Daisy Leaves and Flowers Tiara
<그림 4-4>
Queen Mary’s Tiara
위의 그림들6)은 아치형 티아라의 예이다. <그림 4-1>은 잎이 두껍고 아름다운 후추과의 식물로써 행운과 함께하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기도 한 페페로미아(Peperomia)의 형태 와 흡사한데 1889년 영국에서 제작되어 루이즈(Louise) 공주가 착용했고, 그 후 파이피 공작 부인이 되면서 ‘파이피 티아라(Fife Tiara)’라고 불린다. 1981년 스펜서(Diana Spencer)가문 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영국 황태자인 찰스와의 결혼식에서 착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림 4-2>는 이파리 모양의 형태 선을 갖춘 것으로 1823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이다. 조세핀 공주가 스웨덴의 국왕 오스카 1세와 결혼하면서 스웨덴으로 건너오게 된 또 다른 티아라로 현재는 스웨덴 왕가에서 소유하고 있다. <그림 4-3>은 데이지 꽃을 본 따 만든 것으로 1907 년 조지아 귀족이었던 아밤알랙(Abamalek)공주를 위해 프랑스 보석점(Boucheron)이 만든 티아라이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폴 왕자의 부인이 된 올가(Olga)공주가 즐겨 착용하였고, 티아라 밑 둘레에 장식된 다이아몬드들은 올가 공주의 주문으로 덧붙여진 것이다. <그림 4-4>는 영국의 조지 6세와 메리 왕비의 대관식을 위해 까르띠에가 제작한 27개의 티아라 중 하나인데 ‘행복’과 ‘영원한 젊음’을 상징하는 신선하고 아름다운
담청색의 보석 아쿠아마린을 사용한 티아라이다.
이처럼 위에서 살펴 본 중세시대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왕가에서 왕실 여인들이 사용했던 티아라의 형태는 오늘날 결혼식에서 혹은 미인선발대회에서 사용되는 티아라의 원형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 날의 웨딩 티아라의 형태는 공예기술의 발달과 소재의 다양성, 그리 고 시대의 트랜드에 맞춰 여러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표 적인 형태를 보면, 아치형, 밴드형, 미니형, 화관형, 코사지 형태의 티아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3. 신라금관의 일반적 고찰 3.1. 신라금관의 기원
뛰어난 황금 공예술과 찬란한 황금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신라금관은 천년 왕국 신라의 대표적 인 황금 문화의 산물이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신라금관의 탄생 배경이 되는 뛰어난 황금 공예술이 중심인 황금숭배문화는 대체적으로 북방 대륙에서 전해져 온 것으 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신라금관에 대한 연구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학설들이 충돌하는 게 현실인데, 그 중에서도 주류를 이루는 학설은 식민사관의 관점에서 출발한 북방기 원설(北方基源設)이다. 이는 금관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것에서 볼 때 북방의 시베리아(스키타 이계 문화)나 몽골의 무덤과 신라의 무덤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돌무지덧널무덤인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란 방식의 무덤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6) 출처: 위키백과 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왕관
<그림 5> 현대 결혼식에서 많이 사용되는 보편적 형태의 티아라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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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황금 문화와 이들 북방 문화 간에는 시·공간적인 차이가 크고, 두 문화의 본질도 형태상 으로 사실 다르다. 적석목곽분 무덤 양식만 해도 신라는 최종적으로 봉토(封土)를 하는 방식으 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7) 다행스럽게도 신라금관이 오늘날 온전히 1,500년이란 시간을 거 슬러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요인은 도굴이 쉽지 않은 이런 돌무지덧널무덤의 독특한 구조 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황금문화에 북방성과 서역성이 엿보이는 것은 맞지만 이는 당시의 시대적, 문화적 보편성에 의한 것으로 무덤 양식이 비슷하다 하여 무조건 북방이 원류 라는 주장은 편견으로 보여 진다. 신라금관이 세계적으로 독창적이다 라는 찬사를 받는 이유는 바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이 뒷받침 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신라금관의 독특한 외형적인 형태와 구조를 놓고서도, 특히 신라금관의 사슴 뿔 모양의 세움 장식을 두고 ‘시베리아 자작나무’라는 등의 북방기원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이와 달리 우리나라 고유의 신수신앙의 신단수(神壇樹)에서 기원한다는 학설도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인 임재해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신라금관의 ‘出’자형 세움 장식은 신라 건국신화 중 하나인 김알지(金閼智)8)의 신화에서 그 배경이 되는 계림(鷄林)의 나무와 숲을 나타내는 것이고, 더욱이 고대 고조선에서 맥을 잇는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나무는 신성함을 나타내는 신단수이자 생명수라는 것이다. 또한 ‘出’자형 세움 장식 끝의 ‘♤’모양은 나무의 생명성을 나타내는 새순이자 움(싹)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건국의 시조 신화와 왕관은 서로 유기적 관련성을 지닌 문화적 구조물이라는 것으로, 결국 신라금관의 세움 장식은 신라 김알지의 건국신화의 바탕이 되는 계림의 신수를 나타낸다는 것이다.9) 이러한 여러 학설과 역사 사료를 종합하여 보면, 북방으로부터 신라로 황금숭배문화가 전파되 어 온 것이고, 전 단계 전파자로는 북방 유목민족으로 유럽을 평정했던 훈족 혹은 흉노(匈奴) 족이라는 학설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들의 근거지였던 알타이산맥 주변은 황금이 풍부했 고 황금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되고 타 지역에 비해 앞선 공예기술을 바탕으로 황금문화를 꽃피 웠음은 역사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중국이 황금 문화에서 소외되는 것도 흉노족이 전파자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신라의 김씨 왕족도 문무왕릉 비석에서 자신들이 흉노족의 후예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10) 흉노족 후손으로 이주 세력인 신라 김씨 왕족이 왕위를 세습하기 시작한 것은 내물마립간(A.D 356-A.D 402)부터이다. 이후 마립간 시대에 신라는 변혁이 일어나고 대외적인 진출과 국력의 신장이 이뤄진다. 이 당시 신라금관의 등장은 신라 지배층의 변화를 확고하게 보여주는 것이다.11) 당시 삼국 중 최약체인 신라는 중앙집권국가로 도약이라는 과제가 핵심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왕권강화가 절대적이었다. 그 래서 왕의 위용을 과시하고 존엄성을 상징해 주는 무엇인가가 필요하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왕이 하늘과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의 주관자로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를 이끄는 사람이었다. 왕이 왕관(금관)을 착용한 채 대중들 앞에 나서는 것은 백성들을 하나의 국가 구성원으로 묶고,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하여 하나의 강력한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통치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백성들의 생활 속에는 샤머니즘적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김알지 신화 에서 알 수 있듯이 이주민인 김씨 세력은 이러한 백성들의 문화를 이미 파악했고, 건국 신화를 만들어 신라의 중앙 기득권에 진출하여 왕권을 얻고 세습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김씨 왕가의 왕권 세습이후 신라는 중앙집권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국력이 신장해 갈 수 있었으며, 삼국통일 을 이루는 주체 세력이 된다. 이들이 이주민으로 신라의 왕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7) 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새녁출판사, 2012, ‘북방기원설 재론 편’ 요약.
8) ‘알지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이주민 집단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정보와 실력을 가지고 신라에 나타나 지배 세력에 편입될 수 있었고, 왕을 배출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종욱, 『신라가 한국인의 오리진이다』, 고즈윈, 2012, p.268.
9) 임재해, 「맥락적 해석에 의한 김알지 신화와 신라문화의 정체성 재인식」, 비교민속학회 제33권 33호, 2007, pp.575-622.
10)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서 신라로 내려왔고’라는 내용 : 여기서 투후 (秺侯)는 ‘오로도스 지역의 제후’, 제천(祭天)은 ‘하늘에 제사 올리던’이라는 뜻이며, 지윤(之胤)은 ‘흉노왕족(김일제)의 후손’이란 의미.
11) 조유전·이기환 ,『한국사 미스터리』, 황금부엉이, 2004, p.88.
이주해 오며 들고 온 우수한 황금 문화와 기마전투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곧 신라의 황금 문화를 꽃피우는 것을 주도하였고, 그 상징물이 바로 신라금관의 탄생이다. 신라금관은 이러한 왕권의 권위와 신라의 건국이념을 잘 상징하고 있는데, 특히, 나뭇가지형 세움 장식과 사슴 뿔 모양의 세움 장식 등은 김알지 신화와 계림에서 그 주요 모티브를 가져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모티브는 당시 하늘과 자신들을 이어 주는 매개체로 나무에 대한 신앙이 깊었던 백성들을 하나의 국가 구성원으로 묶기 위해, 경주의 ‘계림’을 나타내는 신단수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신라금관은 비록 북방에서 황금숭배문화가 전파되어 와서 우수한 공예 술의 바탕 위에 탄생했지만, 구조와 그 형태의 상징성은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담아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북방에서 기술은 전해져 왔지만 우리의 문화까지 북방이 원류 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삼국 중 최약체로 고립되어 있던 신라가 우수한 것은 받아 들이고 기존의 문화와 정신은 계승하는 유연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삼국을 통일하여 천년역사 의 왕국으로 남을 수 있었고, 신라가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는 그 시기에 신라금관이 있었다.
3.2. 신라금관의 형태적 특징과 상징성
전 세계적으로 확인된 고대 금관(金冠)은 현재 총 10여 점에 불과한데 그 중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이 무려 8점이다. 가야 금관 2점을 제외하면 모두 신라의 것이다. 가장 먼저 출토 된 금관이 금관총의 금관이다.12) 이를 비롯해 금령총·서봉총의 금관은 일제시기에 우연하게 발굴되어 출토된 것이다. 당시 일제는 식량을 수탈하여 철도로 수송하기 위해 경주역 건설에 착수했는데, 흙이 모자라 그 대안으로 고분의 흙을 퍼 나르게 했다. 그 과정에서 금관이 출토된 것이 금령총과 서봉총의 금관이다. 당시에도 금관의 출토는 세계적인 큰 관심사였고, 서봉총 발굴 때에는 스웨덴 황태자의 참관 하에 진행되기도 했다. 이후 해방 후에는 1973년에 황남대 총을 발굴하려다 너무 규모가 커서 그 옆의 작은 천마총을 시험 삼아 먼저 발굴하였는데 기대 하지 않은 천마총 금관이 출토되었다. 그 후 확신을 갖고 황남대총을 발굴했는데 황남대총 금관은 1974년에 출토되었다. 그 밖에 1969년 경주 교동에서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교동 금관 이 있다. 신라금관 6점에 대한 현황과 특징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다음 <표 2>와 같다.
12) 임재해, 『신라 금관의 기원을 밝히다』, 지식산업사, 2008, p..36.
No 구 분 국보/보물 발굴고분 출토년도 조형적 특징 크기
1
금관총 금관 (그림 15-1)
국보87호 금관총 1921년
- 가운데 빈 금옥 10개가 매달려 있고,
- 맨 아래 수식에 달린 금옥은 누금세공기법으로 장식된 금모 가 있음.
- 정면에 3단으로 ‘출(出)’자형의 대생지(對生枝) 수목형 입식 3개와 뒤쪽 좌우에 두개의 녹각형 세움 장식.
- 외관과 절풍형 내관의 셋트형.
높이44.4cm, 지름19cm
2
금관총 금관 (그림 15-2)
보물338호 금령총 1924년
- 4단의 ‘출(出)’자형으로 금관을 비롯한 6세기 금동관의 특징 (크기가 작은 형태).
-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
- 신라 금관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지만 곱은옥 장식이 없음.
- 금으로만 이뤄진 게 특징.
- 신라 금관 중 가장 정제된 조형을 보여줌.
높이27cm, 지름15cm
3 서봉총
금관 보물339호 서봉총 1925년
- 내면에 금관을 십자형으로 교차시킨 모자 형태로 교차된 지 점에 3개의 수지형 입식, 그 위에 봉황 3마리 장식.
- 양 옆의 세움 장식이 우의형, 비상형인 것이 특징.
- 봉황의 이미지를 금관 착용자인 왕에게 이입하는 중요한 의미.
-최근에 와서 진평왕의 것이란 연구가 주목을 받음.
높이30.7cm, 지름18.4cm
4 교동 금관 교동
고분 1969년 - 신라 금관 중 가장 형태가 단순하고 오래 된 것으로 추정됨.
- 사실적 자연수지형의 세움 장식. 높이12.8cm
<표 2> 주요 신라 금관의 현황과 특징
306
아래의 <그림 6-1>에서 <그림 6-4>는 새(鳥)형 장식이 있는 서봉총 금관을 제외한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춘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 황남대총(북분) 금관의 모습으로 크기 가 작은 교동 금관을 제외한 나머지 금관의 기본적인 형태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림 6-1> 금관총 금관 (측면), 국보 제7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13)
<그림 6-2> 금령총 금관, 보물 제33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6-3> 천마총 금관, 국보 제188호,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그림 6-4>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보 제191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기본적 세공 기법은 금판을 오려 붙여 만든 형태이며, 아래쪽에 둥근 관테가 있고 그 위로 5개의 솟은 장식을 부착하는 방식이다. 세움 장식은 나뭇가지모양(樹枝 形)과 사슴뿔모양(鹿角形)이다. 각 가지의 끝에는 ‘♤’모양의 보주(寶珠)형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금관의 표면에는 비취색 곱은 옥(曲玉)과 금판을 둥글게 오려 만든 달개가 많이 달려 있다. 특히 황남대총(북분)금관은 전형적인 신라금관의 조형미와 세계적인 금세공기술을 보 여 주기에 적합한 대표적인 신라의 금관이다. 화려한 금장식과 곱은 옥과의 조화는 마치 종교 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비취 곱은 옥이 무려 77개나 달려 있다. 황남대총 금관의 크기는 높이 27.5cm이고, 수식의 길이는 30.4cm이며, 5-6세기경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신라금관의 독특한 형태는 북방 문화와 연계하는 학설이 많은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들 의 견해를 살펴보면, 미술사학자 존 코벨은 북방 유목민들이 순록 사슴과 우주 수목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해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즉 신화에 따르면, 순록의 황금 뿔 때문에 해(太 陽)가 빛나고 순록 사슴 그 자체가 햇빛의 운행 과정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그리고 금관에 있는 나무는 영험한 힘을 가진 나무로 하늘(天)을 향해 뻗어 오른 나무를 말하는데 존 코벨은 이들 나무가 북방지역에 많은 흰 자작나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신라의 문화와 시베리아의 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으며, 금관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14)
한편으로, 동양대 김운회 교수는 ‘신라금관은 스키타이 문화에도 나타나는 녹각수지형(鹿角樹 枝形: 사슴뿔 모양)과는 달리 사슴의 뿔과 나무를 동시에 형상화한 느낌이 있고, 요즘 고고학 자들은 신라금관의 형식을 직각수지형(直角樹枝形: 나무 가지 모양)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지
13)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idx/index.do 14) 존 카터 코벨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학고재, 1999년, pp.150-155.
No 구 분 국보/보물 발굴고분 출토년도 조형적 특징 크기
5
천마총 금관 (그림 15-3)
국보188호 천마총 1973년
- 3개의 수지형, 2개의 녹각형 장식 접합.
- 신라금관 중 곱은 옥과 영락이 가장 많이 달려 있어 화려함.
- 앞쪽의 가는고리에 코일 모양의 샛장식과 펜촉 모양의 드리 개를 매달았음.
- 다른 금관에 비해 금판(金板)이 두꺼움.
- 외관과 절풍형 내관의 셋트형.
높이32.5cm, 지름20cm
6
황남대총 (북분)금관
(그림 15-4)
국보191호 황남대총 1974년
- 전형적인 신라금관 중 가장 오래된 형태의 금관으로 초기에 제작됨.
- 신라금관의 전형적인 ‘出(출)’자 모양 세움 장식을 갖춘 금 관으로 세움 장식 단위에 맑고 푸른 곱은 옥을 매달아 황금 색과 조화를 이룸.
- 婦人帶(부인대)’라는 명문의 금제 허리띠가 함께 출토 되어 왕비의 금관으로 보임.
높이27.5cm,
지름17cm
만, 자신이 보기엔 단순히 나무만을 형상화 했다기 보다는 순록의 뿔 도 함께 형상화하여 우두머리(長)를 동시에 의미했을 것으로 생각되 고, 금관은 수목숭배(樹木崇拜)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며, 타브가츠의 금관 장식(서하자향(西河子鄕) 출토)의 경우를 봐도 사 슴의 뿔과 나무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 다.15)
반면에 안동대 민속학과 임재해 교수는 출자형 및 녹각형 세움 장식 을 두고 나뭇가지가 변형된 형태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무 모양 세움 장식을 줄기 중심으로 유형화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출(出)자형 세움 장식을 ‘곧은 나무 모양’으로, 녹각형 세움 장식을 ‘굽은 가지 모양’으로 변이한 형태라고 분류했다.16) 숲에는 전나무처럼 곧게 뻗 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소나무처럼 휘어지게 뻗는 나무도 있는 것처 럼 이러한 의견도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신라금관에 있어 세움 장식의 형태 외에 나뭇가지를 형상화 한 ‘출(出)’자형과 녹각형의 끝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연꽃 봉오리 모 양의 ‘♤’모양이 마무리 되어 있고, 영락(달개)을 비롯해 특히 중요 한 구성 품으로 금관에 신비감을 더해 주는 비취색의 곱은 옥(曲玉) 도 많은 연구대상이다. 더욱이 영락과 곱은 옥은 왕이 착용해 움직일 때마다 음향적 효과를 내는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나뭇잎 이 바람에 날리거나 열매가 흔들리는 모습과 유사해 보일 수 있고,
음향적 효과도 내는 것으로 신라금관의 독특함을 더해 준다. 학계에서는 이 곱은 옥의 기원도 북방에서 찾는 학설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동물의 태아를 연상케 한다 하여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대동소이하다.
한편, 이화여대 강우방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곱은 옥은 영기(靈氣)무늬를 삼차원적으로 표현 한 것으로 용의 초기 형태를 형상화한 ‘옥룡(玉龍)’이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금관의 비밀은 바로 곱은 옥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강우방 교수는 곱은 옥의 기원을 우리나라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기원을 찾는다. 특히, ‘모자곡옥(母子曲玉)’에 주목을 하는데 큰 곱은 옥에 작은 곱은 옥이 등이나 옆이나 배에 붙어 있는 형태이다. 이 ‘모자곡옥’을 보았을 때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기무늬의 결합 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모자곡옥’의 형태의 기원을 고구려 고분벽화의 무늬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강 교수는 곱은 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곱은 옥이 영기의 싹, 더 나아가 용의 원초적 형태일 가능성이 좀 더 커졌다. 이에 따라 신라의 금관에 그렇게 많은 곱은 옥이 장식된 까닭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금관에 곱은 옥을 장식한 것은 영기의 싹, 더 나아가 그것이 형상화된 용의 원초적 모양을 만들어 장식함으로써 왕과 왕비가 발산하는 영기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곱은 옥이 아니고 옥룡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이다.17)
신라금관의 세움 장식을 갖고 수많은 기원설이 난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곱은 옥 역시 저마다 자기 문화권으로 끌어 들여 해석하려는 경향이 많아 학설이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곱은 옥은 생명에 대한 신비감, 영속함, 존엄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면 무리 없을 것이다.
신라금관의 조형에 나타난 상징성과 추구하는 개념을 정리해 보면, 가장 핵심적 조형요소는
‘산(山)’자, ‘출(出)’자형 세움 장식으로, 신성수(神聖樹)를 상징하고 있다. ‘山’자가 두겹, 세겹 겹처서 ‘出’자형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는데, ‘出’자형 세움 장식은 우주목(宇宙木)18)으로 도 볼 수 있어서 우리 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다. 사슴뿔모양(鹿角形) 세움 장식은 당시 시대적인 신앙의 중심인 샤머니즘 숭배 사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
15) 김운회, 프레시안 2005. 08. 30일자, ‘금관의 나라, 신라'대쥬신’을 찾아서’.
16) 임재해, 『신라금관의 기원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8, p.433.
17) 강우방, 동아일보, 2005. 09. 12. ‘신라금관의 비췻빛 曲玉’.
18) The tree of life, 우주의 기원과 구조 및 삶의 근원을 상징한 나무.
<그림 8> 비취색 곱은 옥과 영락(황남대총 금관)
<그림 7-1> 出자 모양의 수지형 세움 장식
<그림 7-2> 녹각형 세움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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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안동대 임재해 박사는 사슴뿔이 아니라 나뭇가지의 변형된 형태라고 주장하는데 전체적인 맥락으로 봐서는 일견 타당성이 높아 보인다. ‘♤’ 모형의 보주형(寶珠形)은 불로장생, 장생불 사(長生不死), 광명, 권위의 불변에 대한 염원을 나타낸다. 영락(달개)은 정신적 고향의 의미 이며, 금관을 착용하고 움직였을 때 울리는 음향효과는 벽사(辟邪)의 의미로 악귀와 재앙을 물리치고 싶은 염원이 담겨 있다. 곱은 옥(曲玉)은 생명의 탄생과 다산의 의미를 내포하며, 앞서 언급한 영기(靈氣)19)의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신라금관은 세계적 왕관들 중에서도 독특한 조형미를 갖추었고, 외형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국가의 통치철학과 신성한 왕권의 상징성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또한 예술적 가치 및 공예 기술적 관점에서도 신라금관은 고대 금관유물 중에 단연 최고로 여겨지고 있다.
신라금관의 형태를 두고 많은 연구가 있고 해석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지만, 하나로 귀결되는 중요한 점이 있다. 바로 앞서 언급했듯이, 신라금관은 이러한 각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도 우리 고유 문화정신을 기본으로 삼고, 중앙아시아, 알타이 및 몽골 지역에 나타난 황금숭배 문화의 기술을 더하여 여러 형태의 금관의 아름다운 요소들로 모두 소화해내면서 독특하고 가장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는 측면이 중요하다. 오늘날 역사나 문화를 자신의 민족 에 유리하게 해석하려는 경향 속에서도 신라금관의 우수함은 모방하기 힘든 것이며 우리문화 의 우수성을 나타낸다.
4. 신라금관과 티아라의 비교 분석
이 장에서는 시, 공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왕관인 신라금관(新羅金冠)과 서양의 대표적인 몇 점의 티아라(Tiara)를 대비시켜 비교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 서양 티아라 와 대비해 신라금관의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형태와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림 9-1>
금관총 금관 (金冠塚金冠)
<그림 9-2>
Tiara of Strawberry Leaf Hesse
<그림 9-3>
The George IV State Diadem
<그림 9-4>
Josephine’s Coronation Tiara
<그림 9-5>
Eugenie Tiara
<그림 9-6>
The Russian Nuptial Tiara
서양의 티아라는 신라금관과는 형태적으로나 재료적인 면에서 많이 대비가 된다. 또한 역사적 으로 제작된 시기를 보아도 신라금관은 기원후 4~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현대적 웨딩 티아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서양 티아라의 주요 제작 시기는 1700년대에서 1900년대 사이 로 최소 1,300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다. 다만 최고 권력자 혹은 왕가의 존엄을 표시하기 위한 상징성을 담고 있는 왕관으로써의 지위와 용도에 대해서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중세 서양 (유럽)에서 왕관의 개념으로 쓰이던 티아라는 왕가의 여인들이 착용하다가 시대적 상황에 따 라 차츰 대중화되어 현대적 개념의 티아라로 오늘날까지 계속 사용되고 발전된 반면에, 우리나 라 신라금관은 역사적 유물로의 역할에서 멈춰진 게 또 하나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금관은 신라의 삼국통일 직전에 중국 당나라의 복식으로 전환하면서 이후 왕조인 고려, 조선에 서도 신라금관을 잇는 왕관은 사용되지 않아 비교적 많은 양을 보유한 서양 티아라와는 양적으 로도 큰 차이점이 될 수 있다.
서양에서 티아라가 발달했던 나라는 한 때 세계의 중심 왕조국가였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가 대표적이다. 특히, 서양에서는 왕권이 교체되면 대관식(戴冠式)을 통해 새로운 왕이 티아라 를 착용하고 권력으로의 진입을 인정받았다. 또한 대관식에서는 왕비나 공주 등 왕가의 여인들 도 왕의 권위를 뛰어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티아라를 착용하였는데 화려한 보석을 세팅한 형태 가 대부분이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의 경우 이러한 대관식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활용한 권력자
19) 신령스러운 기운. 우주 만물의 생성, 약동하는 기운. 우주는 영기가 가득 차 있고, 인간에게도 영기가 있다.
라고 할 수 있고, 나폴레옹의 왕비 조세핀은 티아라를 즐겨 착용하여 대중화에 물꼬를 트기도 하였다. 한 때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던 영국 왕가에서는 현재까지도 사용되어 온 ‘성(聖) 에드워드왕관’과 빅토리아여왕의 대관식 때 만든 ‘제국왕관’의 2개의 왕관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영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의 상징인 여왕이 존재하고 의회 개회식 때 여왕이 왕관을 착용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국가행사 이외에는 여왕은 왕관이 아닌 티아라를 주로 착용 하였다. 이처럼 절대 권력의 상징인 왕관은 그 수가 제한적인 반면에 티아라는 양적으로 많아 영국 왕실에서는 현재까지도 다양한 티아라를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티아라는 오늘날 웨딩 티아라의 원류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라금관과 서양의 티아라 중 역사성 이 있는 몇 점의 티아라와 대비해 비교 분석해 보면 <표 3>과 같다.
신라금관과 서양 티아라의 대체적인 차이점은, 첫째, 관(冠)의 크기 차이로 신라금관의 전형적 인 형태를 보여주는 금관총 금관의 높이가 44.4cm인데 반해, 왕관 형태와 티아라의 형태를 공유하고 있는 영국의 조지 4세 제국왕관(The George IV State Diadem)의 경우는 높이가 7.5cm로서 무려 36.9cm의 높이 차이가 있다. 이는 신라금관이 왕관의 형태로 평소 착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국가행사에서 착용을 하는 왕관인 반면, 서양 티아라20)는 평상시에도 착용하는 장신구로써의 역할로써 착용의 편리성에 주안점을 두어 크기가 작고 가볍게 제작되 었기 때문이다.
둘째, 사용 재료의 차이로, 금관총 금관은 순금(24K)을 사용한 금판과 옥을 사용한 그야말로 금관(金冠)이고, 서양의 티아라는 백금(Platinum) 프레임을 기초로 하여 귀하고 화려한 보석 들을 세팅한 보관(寶冠)이다. 더욱이 신라금관과 서양 티아라의 제작 시기의 차이가 무려 1,300년 이상인데, 이는 다이아몬드 같은 귀한 보석을 신라시대에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고, 반면에 서양의 티아라는 세계의 중심국가로 활약하며 세계 각국의 식민지 등을 통해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진주 같은 귀한 보석을 조달할 수 있는 환경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재료 면에서 서양 티아라는 풍부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제작시대의 차이는 제작 기법의
20) 여기서 말하는 티아라는 여왕이나 왕비가 평상시 착용용 쓰는 일반적인 티아라를 말함.
구분 우리나라 서양(유럽)
신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비교 대상
<그림 17-1>
금관총 금관 (金冠塚金冠)
<그림 17-2>
Tiara of Strawberry Leaf
Hesse
<그림 17-3>
The George IV State Diadem
<그림 17-4>
Josephine’s Coronation Tiara
<그림 17-5>
Eugenie Tiara
<그림 17-6>
The Russian Nuptial Tiara
종류 금관(金冠) 티아라(寶冠) 티아라(寶冠) 티아라(寶冠) 티아라(寶冠) 티아라(寶冠)
제작
년대 A.D.4~5세기 1862년 1820년 1804년 1823년 1810년
용도 국가행사,
사후 안장
빅토리아여왕의 결혼식 사용 외
조지4세 및 빅토리아여왕의
대관식 외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용 외
외제니 왕후의 결혼식 사용 외
러시아 황실의 결혼식 황후 착용
주요 사용 재료
24K 순금, 순금으로 된 영락,
곱은 옥
백금 프레임, 다이아몬드,
에나멜, 루비, 사파이어
백금 프레임, 1,333개의 다이아몬드(4캐럿 옐로우 다이아몬드
포함),진주
백금 프레임, 다이아몬드
백금 프레임, 물방울 모양의 약 500캐럿의 에메랄드
11개
백금 프레임, 13.335캐럿의 천연
핑크 다이아몬드, 총1,000캐럿 다이아몬드, 보석 제작
기법
누금세공(細金細工) 기법
보석 세팅 (밀그레인 기법)
보석 세팅 (밀그레인 기법)
보석 세팅 (밀그레인 기법)
보석 세팅 (밀그레인 기법)
보석 세팅 (밀그레인 기법) 크기 높이:44.4cm
둘레:19.0cm
높이:7.5cm 둘레:19.0cm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영국 왕실 영국 왕실 루브르박물관 루브르박물관 국립 러시아박물관
<표 3> 신라금관과 티아라의 비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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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도 있게 만드는데, 신라금관이 누금세공(細金細工)기법으로 제작되었다면, 발달된 금속 공예술의 힘을 빌린 서양 티아라는 각종 보석을 세팅해 화려함을 추구할 수 있는 밀그레인 (Millgrain, 강철 끝 장식)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에도 플레티넘과 다이아몬드의 조합은 최상의 조화로운 세팅이다. 하지만 신라금관도 당시에는 최고의 황금 공예술인 누금세 공기법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공예술이 우수했다는 반증이다. 황금빛 웅장함과 비췻빛 곱은 옥의 조합은 오늘날에도 표현하기 쉽지 않은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셋째, 신라금관은 주로 왕이 착용하는 왕관의 개념으로 그 착용자의 사후에 무덤에 함께 안장 되어 사용기간이 유한한 반면, 서양 티아라는 주로 왕실의 여인들이 착용하는 보조 왕관의 개념으로 패션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장신구의 역할을 하며 오늘날까지 사용되어 오고 있다.
특히 서양 왕실의 티아라는 개인이 소유할 수 없으며 지속적으로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 이 있다. 그로 인해 서양 티아라의 일부는 중간의 새로운 보석이 추가되어 교체되는 경우도 있다. 19세기 후반이 되어 보석을 세팅하는 새로운 금속과 재료의 등장은 티아라의 형태와 종류의 다양성을 높이고 양적으로도 풍부해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넷째, 신라금관은 그 형태를 만들면서 왕의 존엄성과 국가이념을 내포하는 상징성을 담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出’자형 나뭇가지 세움 장식과 곱은 옥 및 달개 등은 여러 가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한 머리 장식이 아닌 백성들이 믿는 신수신앙을 표현하고 국가구성원을 하나로 묶고 왕권 강화를 통해 강력한 국가로의 도약을 암시하는 상징성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서양 티아라는 꽃이나 식물의 가지 등에서 주로 모티브를 얻어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화려한 보석 위주로 세팅하였는데 주로 황실의 고귀함과 위엄을 상징하고자 화려함에 치중되 어 있다. 또한 착용의 편리성과 장신구의 역할로써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신라금관은 형태적인 면에서 국가와 왕권 그리고 백성과 민족 문화를 담은 상징성을 내포하기 위한 모습에 중점을 두면서도 황금 문화의 화려한 정점으로 보이는 예술성을 지녔으며 미적 가치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반면에 서양 티아라는 황실의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만 착용하는 차별성을 상징하기 위해 화려함에 치중한 형태이며, 한편으로 착용의 편리성에 중점을 둔 형태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패션의 한 부분으로써 장신구의 역할을 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사용되 어 오고 있다.
5. 서양의 티아라를 응용한 사례연구
앞서 서양 왕관으로서의 티아라, 그리고 오늘날 현대적 개념의 결혼예식용의 원류로써의 티아 라에 대해 살펴보았다. 티아라는 중세 유럽의 왕조국가의 왕이 대관식에서 착용하던 왕관에서, 이후 왕조국가의 쇠퇴와 때맞추어 유럽 왕가와 귀족 여인들 사이에 패션의 아이콘으로 사용되 기 시작하였다. 이후의 티아라는 차츰 대중화의 길로 들어섰고, 현대에 와서 티아라의 개념은 결혼예식의 머리 장신구로서의 역할로 정립된 가운데, 우리나라나 외국에서 종종 있는 미인대 회 우승자용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일반 결혼식용 티아라에 비해 미인대회 우승자용 티아 라는 중세 유럽 왕가 여인들이 쓰던 형태 혹은 서양의 왕이 쓰던 왕관으로서의 형태를 많이 담고 있는 편이다. 미스 코리아(Miss Korea), 미스 월드(Miss World) 대회 같은 미인대회 우승자가 착용하는 티아라가 그러한 것들이다. 티아라의 원형에도 가깝고 화려했던 형태의 역사성과 신분의 상징성을 동시에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나 착용할 수 없는 화려함과 우아함이 있는 그야말로 ‘왕’을 위한 티아라처럼 보인다. 이러한 티아라의 예를 볼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