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일 : 2015년 4월28일 작성자 : 김 윤 지
목 차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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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의 사적 조망 처용무의 사적 조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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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처용무의 사적조망 그림으로 보는 처용무의 사적조망 처용무 의 지정 및 전승
처용무 의 지정 및 전승
처용무의 가치 및 의미
처용무의 가치 및 의미
처용무의 사적 조망 처용무의 사적 조망
삼국유사로 본 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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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대 헌강왕 때 자경사로부터 해내에 으리기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생각가 도로에 끊어지지 않고 풍우는 사시 순조로웠다. 이 때 대왕이 개운포 남쪽, 지금의 울주에 놀러 갔다가 돌아 오려하면서 강변에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정 도였다. 괴상히 여기어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해당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근경에 불사를 세우도록 하였다. 왕명이 내 려지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로 인하여 개운포라 명하였다.
동해 용이 기뻐하며 칠자(일곱아들)를 거느리고 왕가 앞에 나타나서 찬 덕을 헌무하고 주악을 하였다. 그 일자는 왕가를 따라 입경하여 왕정을 보좌하였다 이름을 처용이라하였다. 왕이 미녀로 처를 삼게 하여 그를 머물게 하였으며 도 급간의 관직을 주었다. 그 처가 심미하여 역신이 흠 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하였다. 처용은 밖 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며 물러났다.
처용무의 사적 조망 처용무의 사적 조망
고려사 악지로 본 처용무
1
• 신라 헌강왕이 학성에 놀러 갔다가 개운포에서 돌아오려 할 떄 귀이한 복장을 한 한 사람이 왕 앞에 와서 노래와 춤을 추며 찬덕하였다.
왕을 따라 입경하여 스스로 처용이라 하고 매달 밝은 밤이면 가무로 어 시를 이루었다.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노래와 춤을 추는 귀이한 처용을 후대사람들은 신인이라고 하였다.
처용무의 사적 조망 처용무의 사적 조망
삼국유사로 본 처용무
1
•가왈 (歌日)
동경 밝은 달에 밤드러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라리 네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 언고
본디 내해지만 뺏겼으니 어찌 하리꼬
이때 신이 현형(現形)하여 앞에 무릎 꿇고 말하기를, 내가 공의처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
공이 노하지 아니하니 감격하여 아름다이 여기는 바입니다.
금후로는 맹세코 공의 형용을 그린 화만 보아도 그 문을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처용무의 사적 조망 처용무의 사적 조망
세시기로 본 처용무
1
閔周冕,『東京雜記』, “[處容歌舞] 憲康王出遊鶴城(今蔚山) 忽雲霧冥曀迷 失道 恠問左右 日官奏云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 以解之 於是 勑有司爲 龍 倉佛事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龍喜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 歌舞 其一子隨駕入京 名日 處容 王旣還 乃卜靈鶖山東簏勝地 望海寺 爲 龍而置也.”
현종(顯宗) 대(1669년) 민주면의 『동경잡기(東京雜記)』
<처용가무(處容歌舞)>의 기록을 보면 헌강왕(憲康王)이 학성(鶴城)에 나가서 놀 때,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어버렸다. 괴상하게 생각하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의 용이 일으킨 괴변이오 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그것을 풀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사 (有司)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불사(佛事)를 짓게 하였다. 시행하라는 명령이 나오 자마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었으므로 그곳을 개운포(開雲浦)라 이름을 붙였는데, 용은 기뻐하면서 곧 일곱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수레 앞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 양하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그 중의 한 아들은 수레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스 스로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왕은 돌아온 후에 곧 영추산(靈鶖山)의 동쪽 기슭의 좋은 땅에 절을 짓고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처용무의 사적 조망 처용무의 사적 조망
세시기로 본 처용무
1
정조 대(1749년) 유득공의 「경도잡지」
판수의 점을 믿어 일직성(日直星)․ 월직성(月直星)․수직성(水直星)이 명 궁(命宮)에 든 사람은 모두 재액(災厄)을 만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종이 를 잘라 해와 달의 모양을 만들어 나무에 끼워 지붕의 용마루에 꽂는다. 또 종이에 밥을 싸서 밤중에 우물 속에 던져 재액을 막는다. 가장 꺼리는 것은 처용직성(處容直星)으로 이에 해당하는 자는 제웅을 만들어 길에 버림으로써 재액을 면한다. 민중들은 상원 전날, 14일 밤에 짚으로 만든 처용 인형과 판수의 처용직성(處容直星)이 재앙을 불러온다고 생각하였 다. 그리고 그 나쁜 기운을 없애기 위해 그것을 태워버리는 벽사행위가 하나의 풍속으로 자리 잡게 된다.
→ 균여전, 이제현의 시, 이숭인의 시, 이담의 시, 조선 불교사, 동국여지승람 등
처용무의 사적 조망 처용무의 사적 조망
정재악장으로 본 처용무
1
• 신라 시대에는 처용가가 있었다.
세전(世傳)에는 신인(新人)이라 하였다.
스스로 처용(處容)이라 하였고 가무(歌舞)는 어시(於市)를 이루었다.
조선조에는 속악(俗樂)으로 방차(倣此)하여 무용으로 사용하였다.
5인(五人)의 의(衣)는 오방색이었다.
무동(舞童) 5인이 처용가면(處容假面)과 사모(紗帽)를 쓰고 오방으로 분립(分立)하여 추는 춤이다.
4인은 협무(挾舞)가 된다.
사모(紗帽)
처용무의 사적조망 : 악학궤범 처용무의 사적조망 : 악학궤범
의 (衣)
1
2 그림으로 보는 처용무의 사적조망 그림으로 보는 처용무의 사적조망
『진연의궤(進宴儀軌)』중 1744년(영조20) 10월7일자 기록과 그림
“牙拍呈才妓生 舞妓2 松愛, 彩蘭 響鈸呈才妓生 舞妓8 陽臺月, 小愛, 雪山梅, 姮娥, 密城雲, 紫瓊花, 山福, 彩蘭.”
주목 ☞
“甲子十月初七日 啓日.形曺叅議. 洪衆漠昨 日政 除拜. 今巳出 肅.前判尹. 金始焃昨 日 政付軍膱. 行可苴. 李泴炡.別雲魩受點.俱是 應叅之八意.一 体進敢叅之音.敢 傅日. 知道.
各邑妓生年歲.及差備㝎師.忠州妓生.善今.年 二十.歌, 李處中.公州妓生.海月.年五十二. 都 妓.朴天彬. 竹仙.年.二十七. 杖鼓,金在弘.原 州妓生.禮粉.年三十.吳天祐. 福梅.年䏪十八.
李震興. 安東妓生.洛仙. 年四十. 處容.金俊永.
玉蟾.年三十七. 處容.林斗星.”
주목 ☞ 그림1 : 기로연도그림1 : 기로연도
2 그림으로 보는 처용무의 사적조망 그림으로 보는 처용무의 사적조망
그림2 : 담락연첩 그림2 : 담락연첩
2 엽서로 보는 전통예술전승의 예인 엽서로 보는 전통예술전승의 예인
그림3 부벽루 연회도 그림4 교방가요 <처용무>
3 처용무의 지정 및 전승 처용무의 지정 및 전승
지정 경과 춤 사위 및 전승양상
☞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지정 - 문화재보고서 : 1.지정에 관한 이유서,2.
역사적 이해, 3. 무보, 4. 처용무에 사용되 는 의상과 도구 5. 보유자조서
- 김천흥/김용 예능보유자
☞ 2009년 9월 30일(수) 제4차 무형문화 유산정부간위원회. 유네스코 세계무형문 화유산등재
- 등재신청서 : 1.정의-대대로 전승되어 온 처용무, 정체성의 표상으로 인식, 2.가 시성, 3.기여도 : 예술가와 학자들의 인지 도 제고, 외국관객들과 실연자 공동체에 게 무형유산에 대한 가시성 증진, 4.보호 조치, 5.공동체참여, 6.목록
-수법(手法) : 양손을 양허리 에 손등이 앞을 향하게 짚는 다.
-보법(步法) : 1박-구부리기, 2박- 앞발내딛고, 3박- 몸 왼 편으로 45도 돌려서 왼발을 오른발 옆에끌어오려, 4박- 두 무릎을 구부리기, 반복 -전배(前排)
-상배(相排) -삼진(三進)
-산화작화무(散花作花舞) -동서상대무(東西相對舞) -우선회무(右旋回舞)
-제행일렬무(齊行一列舞) http://tvcast.naver.com/v/32 6893
4 처용무의 가치 및 의미 처용무의 가치 및 의미
1. 고려향악으로 유래되어 오늘날까지 대대로 전승 된 고전 2. 처용에 관한 민간설화의 일부인 처용무- 오행론의 표현
3. 춤- 다양한 양식, 음악- 창사와 함께 연행, 도구- 미술적 기법의 표현 4. 철학, 역사, 국문, 미술의 영역을 포용하는 최고의 융합허브
5. 역사성, 예술성, 학술성의 대표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