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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공부와 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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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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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섭**

목 차 1. 머리말

2. 선비의 도학․이학․성학․심학 공부 3. 선비의 인격, 그들의 국가․사회적 책임 4. 맺음말

<국문초록>

선비의 앎과 삶의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교 사상의 본질에 대한 깊은 논 의와 해석이 필요하다. 유교 사상은 선비의 공부, 그 범주와 지향에 관한 정신적 좌표를 엄밀한 형태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 사상은 공자-맹자의 세계관에 성리학적 이론체계가 장착되면서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범주와 전망을 확고하게 제시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교 사상은 도학․이학․성학․심학을 기축으로 한 공부론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선비를 길러낸 나라 조선에서 지식인의 사명과 책임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적 논의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선비와 유교 사상의 역학, 그 실체를 판독하기 위해서는 삶의 일상 속에서의 가르침과 배 움은 물론, 국가․사회적 위기와 난국에 대응했던 선비의 모습도 유의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유교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 다산 정약용, 면암 최익현, 매 천 황현 등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선비의 공부와 인격, 그리고 그 인격으로부터 우 러나는 국가․사회적 책임의 문제에 대한 문맥을 짚어볼 수 있다.

* 이 논문은 2018 경북선비아카데미 교육프로그램 강의(2018.10.11. 문경문화원) 원고를 수정․가필한 것임.

** 경북대학교 교육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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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 선비, 다산 정약용, 면암 최익현, 매천 황현, 국가․사회적 책임

1. 머리말

조선시대 교육의 특징은 공부(工夫, 工扶, 功夫, 功扶, 用工, 用功)의 개 념을 통해 가르침과 배움의 범주와 지향을 설정․구축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공부의 성격을 말하자면, 유교 사상-성리학의 핵심을 형용하는 개념 인 도학(道學)․이학(理學)․성학(聖學)․심학(心學)의 세계를 다듬는 과 정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다. 공부의 범주와 지향은 공부의 힘, 공부의 쓸모 에 대해 제대로 논증할 수 있을 때에 그 의미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유교 공부의 기본 지향은 타인에게 나를 과시하는 학문(爲人之學, 向外 之學)이 아니라 응당 자신을 가꾸는 학문(爲己之學, 向裏之學)이어야 한 다는 데 있다. 유교 학문의 지향과 지평을 통해 헤아릴 수 있듯이, 배움과 공부의 근본 성질은 평생 동안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배움과 공부는 거창한 이념을 말하거나 초월적 세계를 다루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유교 사상의 핵 심과 공부의 본연은 일상(日用)―근사(近思)에 있음을 아는 것, 그 일상과 근사에 얼마나 충실하게 성찰과 논의를 보여주는가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 다. 그 일상과 근사를 바탕으로 삼아 도학과 절의의 핵심을 짚어내는 일,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앎과 삶의 세계가 도학과 이학과 성학과 심학 을 근간으로 삼은 것이었음을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유교적 가르침의 특별 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본고에서는 일생동안 삶의 일상 속에서 도학․이학․성학․심학 공부를 추구했던 선비의 공부법, 그 이론적 기반을 검토한 후, 선비의 공부와 이를 통해 형성된 인격은 국가․사회적 책임과 사명 앞에서 어떤 정신적 위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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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를 갖는지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국가․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운 국 면을 살았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면암 최익현(勉菴 崔 益鉉, 1833~1906),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등의 사례를 통해, 이들은 국가․사회적 사명과 책임 앞에서 어떤 존재론적 대응을 보여주었 는가에 대해 논술하고자 한다. 이들 대표 인물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조 선왕조 500년, 선비를 길러낸 나라에 대한 접근과 해석의 엄밀성을 높이는 가운데, 공부와 인격, 그리고 그 인격으로부터 우러나는 국가․사회적 책임 의 문제를 탐색하고자 한다.

2. 선비의 도학․이학․성학․심학 공부

인격 형성 및 함양의 과정은 덕의 축적 과정[德畜之]으로 규정할 수 있 다.1) 모든 삶의 주체는 선험적 자아가 부재한 상태로 태어나서 철저히 시 간성에 복속되는 앎과 삶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이다.2) 공부란 몸, 그 인 격 전체를 닦는 과정이며, 이를 수기(修己)-수신(修身)-수양(修養)이라고 일컫는다.3) 수기(修己)-수신(修身)-수양(修養)을 핵심 용어로 삼는 공부 론의 상징적 반영물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실은 공부에 대한 집 단무의식, 그 심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4)

1) 뺷道德經뺸 第51章.

2) 김용옥,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다」, 뺷한겨레뺸 2014년 6월 17일.

3) 김용옥, 위의 글.

4)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수양대군(首陽大君)-단종(端宗) 내러티브가 아닌 주공(周公)-성왕(成王) 내러티브를 지향하는 공부론적 기획이기도 했다. 1457년(세조 3)의 금성대군-단종-경상도 북부 사대부세력이 제거되는 정치적 참 상은 순흥부의 강등과 순흥향교의 폐지라는 교육문화의 붕괴로 이어졌다(이성무, 뺷선비 평전: 우리 시대에 던지는 오백년 선비의 역사뺸, 파주: 글항아리, 2011, 108~111쪽). 소 수서원(紹修書院)의 이름값은 1457년(세조 3)에 무너진 교학을 100년이 지난 1550년 (명종 5)에 다시 ‘이어(紹)’ ‘닦는(修)’ 데서 찾을 수 있다(뺷企齋集뺸, 卷1, 「紹修書院記 [應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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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일생은 기본적으로 10세가 되면 집밖을 나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 고(十年出就外傅), 40세가 되면 벼슬길에 나아가고(四十始仕), 70세가 되 면 벼슬길에서 물러난다(七十致仕)는 기준이 적용되었다.5)선비의 일생은 대체로 40세까지는 수교(1~9세)․수학(10~39세)의 단계를 거치고, 40세 이후로는 출사(40~69세)․은퇴(70세 이후)의 단계를 거친다고 말할 수 있 으며, 이 네 단계 중에서도 수학의 단계와 출사의 단계가 주된 관심과 논의 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6) 특히 수학의 단계에서 준비․대응해야 할 과거 공부의 문제는, 과거 급제와 정치적 진출의 성격과 의미를 고려할 때, 일생을 좌우하는 고민과 성찰의 주제이기도 했다.7)

출사의 단계에서 은퇴의 단계로 넘어가는 접속 지점에 유의한다면, 어떠 한 출사인가를 질문하는 일과 어떠한 은퇴인가를 질문하는 일은 사실상 동 일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비의 출사는 사서오경 중에서도 특히 뺷대 학뺸에 그 대강이 제시되어 있다. 뺷대학뺸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수 기(修己)․정가(正家)․위정(爲政)이라는 선비의 앎과 삶의 본질을 구성 하는 것이며, 뺷대학뺸의 “명덕을 밝힌다[明明德]”는 가르침도 그 자장 안에 서 작동하는 공부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명덕을 밝히는 공부를 통해, 선비들은 도가 밝아지고 덕이 이루어지며, 관직에 나가면 일에 맞추어 계책 을 내고 사리에 맞게 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다.8)

나이 70세가 되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난다[致仕]”는 뺷예기뺸의 구절은 벼슬하는 사람들의 은퇴시기를 한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정 년제도와 달리 강제성보다는 본인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물러나는 것을 특 징으로 한다. 하지만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은, 70세 이전이라 도 능력이 없거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면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야 한다

5) 뺷禮記뺸, 卷3, 「王制」, 卷5, 「內則」.

6) 뺷小學뺸, 卷1, 「立敎」.

7) 박균섭, 「선비의 앎과 삶」, 뺷한국학연구뺸 35, 2010, 275~301쪽.

8) 뺷大學뺸, 經一章, 「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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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면서 “70세가 되어 벼슬을 내놓는 것은[七十致仕] 성인이 정한 가르 침이다[聖人定訓]. 그러나 오늘날의 풍속을 보면[然今俗], 세력이 있는 자 는 8․90세가 되어도 물러나지 않고[勢力者八九十而不退] 측근이 아니거 나 직급이 낮은 자는[疏遠秩卑者] 외람되이 여겨 감히 청하지도 못하니[猥 不敢請], 이것은 무슨 의리인가[此何義理]”라고 비판한 바 있다.9) 대부분 의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에 상관없이 벼슬에 집착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선비의 염치 있는 행동을 주문한 것이다.

유교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벼슬에 대한 집착은 만절(晩節)을 지키기 어려운 주된 요인이기도 했다. 만절을 보전하는 일이야말로 선비의 앎과 삶의 세계를 온전하게 만드는 핵심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만절 의 어려움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9~1609)에 대한 인물평을 들 수 있다. 뺷선조실록뺸의 인물평을 보면 이산해는 “만절을 보전하지 못했으니[不保晩節] 애석한 일이다[惜哉]”10)는 평가에 이어 “젊 어서부터 문한(文翰)으로 자부하였고 청근(淸謹)하다는 이름이 있었기 때 문에 사류들이 추중하였으나 만절(晩節)에 이르러서는 벼슬을 잃을까 걱정 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평생 동안 세상을 속인 술책(欺世之術)이 탄로 나고 말았다. 그래서 비록 한 집안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로 진심으로 대하지 않 았고 그 속임수(詭譎)를 헤아리기 어려워 대중은 그를 등지고 친척은 멀어 져 비부(鄙夫)로 지목되었다”고 하였다.11)이를 이산해 한 개인에 대한 인 물평으로 볼 것이 아니라 유교 지식인 모두를 향한 경고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창사 손명래(昌舍 孫命來, 1664∼1722)는 1710년 증광 회시 에서 지은 「만절책」에서 만년에 이름과 절개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뺷중용뺸 에서 말하는 유정유일(惟精惟一)의 공부와 뺷논어뺸에서 말하는 극기복례 (克己復禮)의 공부에 전념할 것을 핵심으로 지적한 바 있다.12)유정유일의

9) 뺷星湖僿說뺸, 卷10, 「致仕」.

10) 뺷宣祖實錄뺸 1600年(宣祖 33) 2月 19日.

11) 뺷宣祖實錄뺸 1601年(宣祖 34) 6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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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인심은 위태롭기만 하고[人心惟危] 도심은 미약하기만 하니[道心 惟微] 정성을 다하여 하나로 하여야만[惟精惟一] 진실로 그 중심을 잡을 수 있다[允執厥中]”는 관점에 입각한 공부를 일컫는다.13)극기복례의 공부 란, “나를 극복하여 예를 되찾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는 관점과 이 에 대한 부연 설명인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非禮勿動]”는 관점에 입각한 공부를 일컫는다.14) 하지만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선비의 공부를 조망했을 때 만절의 삶을 제대로 보여준 선비 들이 그리 많지 못했다. 그만큼 공부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는 어렵고도 어려운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선비의 앎과 삶의 세계를 응축하여 제시한 글로 도산 윤최식(道山 尹最 植, ?~?)의 뺷일용지결뺸(1880)을 들 수 있다.15)퇴계 이황의 11대손인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1842~1910)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음식을 끊고 스 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였는데, 그 때 고인의 유품으로 남겨진 책이 바로 윤 최식의 뺷일용지결뺸이었다. 뺷일용지결뺸은 선비의 일상에 관한 지침을 제시 한 책으로, 하루를 12등분(昧爽, 日出, 食時, 禺中, 日中, 日昳, 日晡, 日 入, 黃昏, 人定, 夜半, 鷄鳴)하여 매시간 실천해야 할 일들을 언급하였 다.16)이만도는 윤최식의 앎과 삶의 세계에 대해 “실천에 옮겨야만 비로소 학문이라 할 수 있으며[踐實方爲學] 이는 말 잘하는 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易言豈足云]”고 요약하였다.17)선비의 삶은 이익이나 효율이라는 공

12) 뺷昌舍集뺸, 卷3, 「晩節策」.

13) 뺷書經뺸, 卷2, 「大禹謨」.

14) 뺷論語뺸, 第12, 「顔淵」.

15) 박경환, 「고문서…역사와의 대화(4). 일용지결」, 뺷동아일보뺸 2004년 5월 25일.

16) 뺷日用指訣뺸, 第1, 「昧爽」, 第2, 「日出」, 第3, 「食時」, 第4, 「禺中」, 第5, 「日中」, 第6,

「日昳」, 第7, 「日晡」, 第8, 「日入」, 第9, 「黃昏」, 第10, 「人定」, 第11, 「夜半」, 第12, 「鷄 鳴」)

17) 뺷響山集뺸, 卷1, 「挽道山尹丈[最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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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적 목적에 지배되지 않고 도덕적 가치를 지향하였다. 오늘날의 공리의 잣 대로는 이해되지 않는 풍경, 대의를 위해 자기 이익은 물론 목숨까지도 기 꺼이 희생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18)지금-여기의 일상생활(日用 之間) 속에서 도덕적 근거를 찾는 것이라면, 선비의 일상생활은 하루하루 의 일과를 스스로 검속하면서 보내는 수기․수신․수양의 연속이라고 말 할 수 있으며, 그 삶의 끊임없는 재구성 과정을 일컬어 선비의 일생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19)

선비와 선비정신을 논하는 기점으로 ‘동방 이학의 원조(東方理學之祖)’

로 칭송받는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를 들 수 있다.20)정몽 주는 일찍이 고려 말부터 성리학의 근원을 찾아 도통을 이어받았으며 유교 를 자임하는 가운데 배우는 이들의 사표가 되었다.21) 정몽주의 도는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의 도학정치와 지치주의로 이어졌고 이 는 조선시대 선비의 도를 규정짓는 원천적 의미를 갖는다. 도학정치와 지치 주의의 표방은 사람의 길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실천을 의미하며, 그럴 수 있 는 자라야만 진정한 선비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는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 弼, 1454∼1504)의 가르침을 받아 도학의 강고한 기준을 세웠다. 정몽주-길 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과 학맥의 핵심은 바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하는 공부의 자세였다. 1498년(연산군 4) 가을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 갔을 때 조광조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유배지를 찾아가 김굉필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김굉필이 가르침을 받고 떠나는 제자 조광조의 뒷모습을 보면서 했던 말은 “우리의 도가 동쪽으로

18) 박균섭, 「선비의 앎과 삶」, 뺷한국학연구뺸 35, 2010, 275~301쪽.

19) 박균섭, 위의 글, 275~301쪽; 윤성호, 「선비의 일과공부: 뺷일용지결뺸을 중심으로」, 뺷한 국교육사학뺸 41(3), 2019, 27~56쪽.

20) 뺷高麗史뺸, 列傳卷30, 「鄭夢周」.

21) 뺷牧隱文藁뺸, 卷5, 「圃隱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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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吾道東矣]”는 말이었다.22)

도가 동으로 간 내력을 살피기 위해 도(道)-도통(道統)-도학(道學)의 의 미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옛날의 선비들은 도의 실천을 보여 주었을 뿐 별도로 도학이라는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다. 후세로 내려 오면서 도가 쇠미해짐에 따라 성현의 도통이 전해지지 않아 말세의 부득이 한 일로 도학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도학공부는 진 퇴의 의리와 성정의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는 성찰과 궁리정심의 세계를 보 여주는 것이며 이를 주체적으로 실천하는 존재를 일컬어 참된 선비(眞儒) 라고 말할 수 있다.23)

선비의 학문은 신독(愼獨)과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종신사업(終身事 業)을 본연의 가치로 삼는다. 그 가치의 응결체를 일컬어 성인지학(聖人之 學) 또는 이를 줄여서 성학(聖學)이라고 일컫는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뺷성학십도뺸(1568)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뺷 성학집요뺸(1575)에는 선비가 수행할 성인(聖人)을 향한 공부의 핵심이 잘 갖춰져 있다.

퇴계 이황은 뺷성학십도뺸를 통해 공부의 근간에 대해 “생각하고 익히고 [思之習之], 참되게 실천하며[眞踐履之], 반복해 시종일관해야 한다[反復 終始]”는 점을 강조하였다.24) 이황은 「심통성정도」(제6도)에서 심학 공부

22) 뺷靜菴集뺸, 卷6, 「行狀[退溪]」; 뺷靜菴集뺸, 附錄卷6, 「神道碑銘[盧守愼]」; 뺷寒岡集뺸, 卷15, 「寒暄堂金先生師友門人錄」; 뺷栗谷集뺸, 卷13, 「熙川兩賢祠記[丁丑]」; 뺷敬亭 集뺸, 卷13, 「象賢書院記[在平安道熙川郡]」. 김굉필-조광조의 사승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우리의 도가 동쪽으로 간다[吾道東矣]”는 말이다. 도동서원은 그야말로 성리학적 도의 이동을 상징하는 서원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리학적 도의 이동 모습은 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정암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승관계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만남과 교육, 그 사승관계는 무오사화(1498)-갑 자사화(1504)-기묘사화(1519)의 발생사적 배경이기도 했다. 노재현․신병철, 「중용의 미학으로 살핀 도동서원의 경관짜임」, 뺷한국전통조경학회지뺸 30(4), 2012, 44~55쪽; 정 출헌, 뺷점필재 김종직, 젊은 제자들이 가슴에 품은 시대의 스승뺸, 서울: 예문서원, 2015, 1~197쪽 참조.

23) 뺷栗谷全書뺸, 卷15, 「東湖問答」; 뺷栗谷全書뺸, 卷28, 「經筵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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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본연은 마음으로부터 능동적인 도덕실천능력을 확인하는 작업에 있다 고 보았다.

이와 기를 겸하고 성과 정을 통섭하는 것은 마음이며[要之兼理氣統性情者 心也], 성이 발하여 정이 될 때가 곧 한 마음의 기미이며[而性發爲情之際乃一 心之幾微], 이는 온갖 변화가 일어나는 중요한 곳이고 선과 악이 나뉘는 곳이다 [萬化之樞要善惡之所由分也]. 배우는 사람이 진실로 경의 태도를 전일하게 취 하여[學者誠能一於持敬] 천리와 인욕의 구분에 어둡지 않고 이에 더욱 삼가는 자세를 갖는다면[不昧理欲而尤致謹於此], 미발시에는 존양 공부가 깊어지고 이발시에는 성찰 공부가 깊어져서[未發而存養之功深已發而省察之習熟] 참된 공부가 쌓이고 이에 힘쓰기를 계속하여 그치지 않는다면[眞積力久而不已焉], 소위 정일집중의 성학 공부와 존체응용의 심학 공부가[則所謂精一執中之聖學 存體應用之心法] 모두 밖에서 찾을 필요 없이 마음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 다[皆可不待外求而得之於此矣].25)

이황은 「심통성정도」(제6도)를 통해 마음의 구조를 해체적으로 드러낸 후 「심학도」(제8도)를 통해 마음의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경(敬)을 제시하 였다. 이황은 경(敬)을 삼선생사조설(三先生四條說)로 설명하지만 그보다 기본적․우선적으로 경(敬)을 일심주재(一心主宰)의 성격으로 풀이하고

“경이란 만병을 치유하는 약이어서[敬是百病之藥] 한 증상을 치유하는 데 만 쓰는 약에 비할 바가 아니다[非對一證而下一劑之比]”고 역설하였 다.26)이황은 「경재잠도」(제9도)는 삶의 모든 영역이 사람됨을 공부하는 공

24) 뺷退溪集뺸, 卷7, 「進聖學十圖箚幷圖」.

25) 뺷退溪集뺸, 卷7, 「進聖學十圖箚幷圖」.

26) 뺷退溪集뺸, 卷29, 「答金而精」. 경을 만병을 치유하는 약으로 보는 관점을 심병 치유의 관점에서 해석한 연구로는 이원진․이현진, 「퇴계의 심병(心病)과 그 치유법으로서의 경(敬)」, 뺷종교연구뺸 79(3), 111~139쪽 참조. 참고로 식민지 학문권력에 의해서도 퇴계 의 경의 철학/교육론이 강조되었는데, 그들은 경을 조선인의 병든 정신상태를 바로잡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악의적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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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배경(用工地頭)임을, 「숙흥야매잠도」(제10도)는 삶의 모든 과정이 사람 됨을 공부하는 시간 배경(用工時分)임을 설명하였다.

도는 삶의 일상 속에서 유행하여[夫道流行於日用之間] 어디를 가건 없는 곳 이 없다[無所適而不在]. 그러므로 어느 한 자리라도 이가 없는 곳이 없으니[故 無一席無理之地] 어느 곳에선들 공부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何地而可輟工夫].

도는 잠시라도 어쩌다 정지하는 일이 없다[無頃刻之或停]. 그러므로 한 순간도 이가 없는 때가 없으니[故無一息無理之時] 어느 때인들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何時而不用工夫].27)

율곡 이이는 뺷대학뺸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구도를 따라 뺷성학 집요뺸를 수신․정가․위정․성현도통의 체제로 구성하였고, 성현의 도를 이어받는 공부야말로 성학의 궁극임을 말하였다. 이이의 “후세로 내려오면

27) 뺷退溪集뺸, 卷7, 「進聖學十圖箚幷圖」. 퇴계 이황의 공부론과 관련하여, 뺷성학십도뺸에 는 천명(天命)―하늘의 명령이라는 개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황은 천(天)의 속성에서 인격적 주재자의 모습을 소거하면서 경의 철학/

교육론을 표방하였다. 경의 철학/교육론의 핵심은 마음의 주재력 확보에 있으며 이는 나의 모든 행위는 나의 책임일 뿐이라는 관점으로 이어진다(김용옥, 「공부란 몸, 그 인 격 전체를 닦는 것이다」, 뺷한겨레뺸 2014년 6월 17일). 유교 공부의 성격을 도학․이학․

성학 공부에 이어 심학 공부라고 규정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심학 공부의 목적지는 마음의 주체적 측면 혹은 우리의 몸짓에 대한 주재성 탐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황 은 주자의 “마음은 기이다”라는 명제를 “마음은 이와 기의 합이다”는 명제로 변형시킴 으로써, 주자가 마음으로부터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던 도덕의 필연성과 능동성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심학 공부는 퇴계심학이 보여준 것처럼 주자학의 자기 반성으로부터 성립한 것이기도 하였다(김기주, 「심학, 퇴계심학 그리고 뺷심경부주뺸」, 뺷 동양철학연구뺸 41, 2005, 5~30쪽). 반면 일본 에도시대의 심학은 이시다 바이간(石田梅 岩)에 의해 창시된 민중의 도덕교라는 특징을 갖는데, 이 심학의 근저에 유교가 작용하 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신도(神道)-유교(儒敎)-불교(佛敎) 3교를 절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심학의 전국적 유통을 위해 173개소의 심학사(心 學舍)를 설립․운영하였으며, 문자를 모르는 일반서민에게 심학을 유포하기 위해 음성 언어(問答, 講釋)를 활용하였다(노현미․김순전, 「도덕교로서의 심학과 뺷보통학교수신 서뺸 비교 연구」, 뺷일본어교육뺸 38, 2006, 327~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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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도가 쇠미해짐에 따라 성현의 도통이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28)는 지적 을 통해서도, 도학을 추구하는 선비를 참된 선비라 규정했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이이는 “공부를 비록 오랫동안 하더라도[用功雖久] 효과를 보려 는 생각을 하지 말고[莫求見效] 오직 날마다 부지런히 하여[惟日孜孜] 죽 은 뒤에야 그만 두는 것이니[死而後已],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학문이다[是 乃實學]”고 하였다.29)이이는 “공부하는 일은[用功] 늦추지도 급히 하지도 말고[不緩不急] 죽은 뒤에 그만둘 것이다[死而後已]. 만약 공부의 효과를 빨리 보고자 한다면[若求速其效]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則此亦 利心]. 만약 공부를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若不如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형벌과 치욕을 겪도록 하는 일이니[戮辱遺體] 이는 곧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便非人子]”고 하였다.30)삶의 모든 영역이 사람됨을 공부하는 공간 배경이라는 사실, 삶의 모든 과정이 사람됨을 공부하는 시간 배경이라는 사 실을 말한 것이다.

성현들은 자신을 성찰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조 선시대 선비들의 삶 속에서 시간의 소중함, 당일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공부 론으로 이어졌다. 금대 이가환(錦帶 李家煥, 1742~1801)의 아버지 탄만 이용휴(虆蚁 李用休, 1708~1782)는 공부의 중요성․연속성․일관성을 역 설하면서 당일(當日)을 공일(空日)로 만들지 말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 였다.

(1)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昨日已過]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明日未來], 무엇인가를 하려면[欲有所爲] 당일이 있을 뿐이다[只在當日].

(2) 하루가 모여 열흘이 되고 달이 되고 계절이 되고 해가 된다[夫日積爲旬 而月而時而歲成]. 사람도 날로 수양을 해 나가면[人亦日修之] 선한 사

28) 뺷栗谷全書뺸, 卷28, 「經筵日記」.

29) 뺷學校模範뺸, 第14, 「篤敬」.

30) 뺷栗谷全書뺸, 卷14, 「自警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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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 될 수도 있고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다[從可欲至大而化矣].

(3) 지금 그대가 힘쓰려는 그 공부는[今申君欲修者其工夫] 오직 당일에 달 린 것이다[惟在當日]. 그러니 내일은 말하지 말라[來日則不言].

(4) 힘쓰지 않는 날은[不修之日] 아직 생겨나지 않은 날과 같으니[乃與未生 同] 이는 바로 공일이다[卽空日也]. 그대는 모쪼록 눈앞에 환히 빛나는 하루를[君須以眼前之昭昭者] 공일로 만들지 말고 당일로 만들라[不爲空 日而爲當日也].31)

시간의 소중함, 당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선비의 몸가짐과 마음가짐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과 밖이 한결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말하는 것은 선비에 대한 최선의 규정이다. 선비의 덕성은 그 거처를 중심으로 펼 쳐지는 삶의 일상을 통해 알 수 있는바, 그 일상의 잔잔한 여운이 삶의 전체 를 규율하는 역동성을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비의 앎과 삶을 규정하는 도식으로 낮(晝)과 밤(宵)의 대비와 연속을 통한 공부법을 들 수 있다. 공자가 꿈속에서 주공(周公)을 만나보고자 했던 마음, 맹자가 야기(夜氣)를 길러야 한다고 말했던 장면은 꿈속에서도 공부 는 계속된다는 가르침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32)율곡 이이는 “낮에는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晝有爲] 밤에는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宵有得]. 눈 깜짝 할 사이에도 마음을 간직해야 하고[瞬有存] 숨 한번 쉬는 사이에도 본성을 길러야 한다[息有養]”고 하였다.33)이렇게 낮에 공부하고 잠을 잘 때 사색 을 통하여 낮에 한 공부를 정리하고, 밤에 잠을 자면서 깨끗해진 마음으로 다시 낮의 공부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선비의 공부가 갖는 일상성과 엄밀성을 동시적으로 보여준다.34) 하지만 선비들 모두가 항상 도학․이 학․성학․심학 공부에 입각한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니었다.

31) 뺷虆蚁集뺸, 記, 「當日軒記」.

32) 뺷論語뺸, 第7, 「述而」; 뺷孟子뺸, 卷11, 「告子章句上」.

33) 뺷學校模範뺸, 第14, 「篤敬」.

34) 박균섭, 「선비의 앎과 삶」, 뺷한국학연구뺸 35, 2010, 275~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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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독과 위기지학과 종신사업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학문을 탐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보여주는 일, 즉 사람다운 삶에 있다.

사람답다는 것은 곧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백호 윤휴 (白湖 尹鑴, 1617~1680)는 신독=위기지학=종신사업의 핵심을 행실의 돈 독함에 두면서 “학문이란 사람 되기를 배우는 것인데[學者學爲人], 사람에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人道行爲大]. 말만 능히 잘하면서 실천 하지 못한 경우를[能言不能行], 옛사람은 이를 광대에 비유하였다[昔人比 優俳].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신독을 하되[存誠愼其獨], 재계하듯이 마음을 경건히 하며[齋戒思敬時], 남들보다 백배 더 노력한다면[人一己百之], 그 것이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是之謂知恥]”고 정리하였다.35)성실한 마음가짐으로 신독을 행한다는 것[存誠愼其獨], 그것은 뺷중용뺸의 “숨기는 곳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莫見乎隱]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 나는 것이 없다[莫顯乎微]. 군자는 혼자 있을 때를 삼간다[故君子愼其獨 也]”36)는 말을 통해 그 본연적 의미를 살필 수 있다. 이처럼 윤휴의 공부법 을 통해 선비의 공부법, 그리고 그 공부를 통한 인격 형성의 문제, 앎과 삶 의 지향을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학문을 그 본질에 따라 실천하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교육의 세계가 정치․사회적 역학에 의해 흔들리는 상황이 너무도 많이 드러나 있었다. 누군가의 공부와 실천, 그 앎 과 삶의 세계가 정치적 격변에 휘말리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백호 윤 휴(白湖 尹鑴, 1617~1680)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 두 사람을 형용하는 말은 젊은 시절의 우정, 그리고 만년의 증오였다.37)송시 열이 윤휴를 참적(僭賊)=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죽게 만든 배경에 는 뺷중용뺸과 뺷논어뺸 해석을 빙자한 증오의 시계열이 자리잡고 있다. 송시열

35) 뺷白湖全書뺸, 卷32, 「白鹿洞規釋義」.

36) 뺷中庸뺸, 第一章, 「子思述所傳之意以立言」.

37) 이덕일, 뺷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뺸, 서울: 석필, 2003, 285~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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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결국에는 그 시비가 굴레가 되어 죽음을 맞았다. 윤휴를 사지에 내몬 자 는 송시열이었고, 그 송시열을 사지에 내몬 자는 주자였다는 얘기가 그리 터무니없는 얘기만은 아니었다.38)윤휴가 ‘주자의 주석(朱子註說)’을 틀렸 다고 말하고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여 ‘새로운 주(新註)’를 달았던 작업은 매우 특별한 일로 평가받는다.39)윤휴는 뺷중용뺸의 신주 문제에 이어 뺷논어뺸 의 마구간 기사40)에 대해서도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내놓았다. 공자가 마구 간에 불이 났다는 얘기를 듣고 했다는 말({傷人乎不問馬})에 대해, 주자는 {傷人乎-不問馬}로 구를 나누어 해석하면서 공자가 사람을 중히 여겼기에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해석하였고, 송시열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 들은 주자의 설을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윤휴는 {傷人乎不-問馬}로 구를 나누어 해석하면서 마구간에 불이 났으면 말이 다쳤는지를 묻는 것이 상식 이지 왜 사람이 다쳤는지를 묻느냐면서 주자가 살아온다면 나의 주장을 인 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나의 주장이 맞다고 할 것이라는 견해 를 내놓았다.41)하지만 송시열은 윤휴에 대해 학술의 잘못(學術之誤)을 넘

38) 三浦國雄, 이동희 역, 「17세기 조선에 있어서의 정통과 이단: 송시열과 윤휴」, 뺷민족문 화뺸 8, 1982, 162~201쪽 참조.

39) 뺷宋子大全뺸, 卷19, 「論大義仍陳尹拯事疏」. 윤휴의 뺷중용신주뺸는 1644년(인조 22)에 나왔지만 현재 이 책은 남아있지 않으며, 윤휴의 뺷중용뺸 관련 여러 보충 글(뺷白湖全書뺸, 卷35, 「中庸之圖」, 卷36, 「中庸章句次第」, 「分章大旨」, 「中庸朱子章句補錄」)을 통해 그의 견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윤휴의 주자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의하면(뺷白 湖全書뺸, 卷36, 「讀書記中庸序」), 주자는 학문적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가 아 니라 진리를 끊임없이 탐구해가는 충실한 한 학인이었다는 점이다. 한영국․이태진, 「백 호전서 해제」, 뺷백호전서뺸, 대구: 경북대학교 출판부, 1974, 2187~2188쪽 참조.

40) 뺷논어뺸의 마구간 화재사건 기사는 일반적으로 “마구간에 불이 났다[廐焚]. 공자가 퇴 청하여 이르기를[子退朝曰] 사람은 다치지 않았느냐고 묻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 다[傷人乎不問馬]”고 번역한다(뺷論語뺸, 第10, 「鄕黨」). 성호 이익은 뺷예기뺸의 “마구간 에 불이 났는데[廐焚] 공자가 향인에게 절을 하였으니[孔子拜鄕人], 불이 났다고 해서 찾아온 사람들에게[爲火來者] 절을 한 것이다[拜之]. 사에게는 한 번 절하고[士壹] 대 부에게는 두 번 절하였으니[大夫再], 이 또한 서로 조위하는 도리이다[亦相弔之道 也]”(뺷禮記뺸, 卷7, 「雜記下」)고 한 기록을 뺷논어뺸의 마구간 화재사건 관련 기사로 비정 했다(뺷星湖全集뺸, 卷18, 「答尹幼章別紙[己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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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하는 짓이 음험한 자라고 인신공격을 가하였다.42)이처럼 윤휴의 학 문세계는 도학․이학․성학․심학의 핵심과 지향에 입각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술활동에 대해 돌아온 대답은 참적=사문난적이었다. 이는 앎과 삶의 토대 상실로 이어지는 사건이자 조선시대판 공부의 실종이라고 불릴만한 불행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비의 공부를 도학․이학․성학․심학 공부라고 했을 때 이를 근본으 로부터 이탈한 현상과 문제가 주로 나타났다. 선비의 공부법에 입각한 앎과 삶의 세계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심각한 왜곡과 굴절 양상을 드러냈 다. 식민권력과 관변 지식인들은 유교사상을 식민교육과 세력 확장의 도구 로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병탄 당시, 노유(老儒) 9천여 명을 대상으로 상치 은전(尙齒恩典)이라는 명목으로 금전을 뿌린 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유림의 회유에 집중했던 일,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총독의 “덕 육상 유교정신이 오늘날처럼 필요한 때가 없다”는 발언 등은 유교정신으로 조선인의 정신세계와 민족의식을 뭉개려는 간교한 술책이었다. 이는 친일 유림의 서식공간을 제공하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그 후로 유교정신의 이탈, 유교를 빙자한 친일변절행위는 가속화되었다. 그 친일과 변절의 문제를 둘 러대는 중요한 장면으로 뺷중용뺸 해석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중용(中庸)-시 중(時中)-시의(時宜)의 개념에 대한 무분별한 왜곡 해석이야말로 당시 유

41) 이덕일, 뺷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뺸, 서울: 석필, 2003, 286~287쪽. 정조는 조선시대판 공부의 실종, 그 배반의 계열에 대해 지적하였다. 주자집주({傷人乎-不問馬})에 갇혀 또다른 해석의 가능성({傷人乎不-問馬})을 차단해버린 사람들을 향해 “우리나라 선비 들이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으면[東儒有爲此說者] 온 세상이 시끄럽게 공격해 대는데 [一時紛然攻斥],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如彼看解] 우리나라 선비들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고[非東儒刱說] 예로부터 그렇게 본 사람이 많았다[自昔已多有之]”고 지적하면서 이는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목이 좁고[蓋東人眼目小] 읽은 책이 많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所見書不廣故爾]”고 비판하였다(뺷弘齋全書뺸, 卷163, 日得錄三, 「文學[三]」).

정조의 비판에 유의하자면, 조선시대 공부의 문제는 닫힌 학문의 세계(폐쇄적 정통론)와 수험유교의 현실(과거제도의 강박)로 인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좁은 데 있었다.

42) 뺷宋子大全뺸, 卷125, 「寄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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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지식인의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에게서 공자 이래 로 강조되었던 덕행의 강함, 그 꿋꿋함을 찾아보기는 어렵다.43) 조선후기 뺷논어뺸-뺷중용뺸 문구 하나도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수 없었던 숨막히는 상 황을 감안한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이처럼 유교정신 그 본연을 흔드는 한심 한 작태가 아무렇지 않게 벌어졌다는 점에 유의할 일이다. 소위 참적=사문 난적을 찾는다면 윤휴 계열에서 찾을 일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친일유림 이 사실상 참적=사문난적에 딱 들어맞는 경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야말 로 식민지판 공부의 배반이었다.

3. 선비의 인격, 그들의 국가․사회적 책임

선비의 도학․이학․성학․심학 공부는 신독과 위기지학과 종신사업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고, 그 공부의 범주와 지향은 국가․사회적 책무와 소임 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갖춘 것이었다. 유교 지식인의 국가․사회적 책무와 소임이란 무엇인가. 이는 유교 본연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학적 재구성의 과 정을 거치는 것이겠지만, 특히 조선 후기․말기에서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

43) 일제 강점기의 가짜 유교 지식인―친일유림은 그들의 변절과 반역을 정당화하는 방편 으로 중용(中庸)-시중(時中)-시의(時宜)의 개념을 악용하였다. 그들은 공자가 중용을 말하면서 진정한 강함―꿋꿋함에 대해 말했던 그 취지를 제대로 헤아릴 생각이 없었다.

자로가 강함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남방의 강함(南方之强)과 북방의 강함(北方之 强)과 자로의 강함(抑而强) 어느 것인지를 묻는다. 공자는 자로에게 혈기의 강함(血氣 之剛)보다 덕행의 강함(德義之勇)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면서 그 강함을 ‘꿋꿋함(强哉 矯)’으로 해석했는데, 그 꿋꿋함이란 인화(人和)․중립(中立)․의지(意志)․지조(志 操)를 변치 않는 일이라고 보았다(뺷中庸章句뺸 第10章). 남방의 강함이나 북방의 강함 이 남을 이기는 것을 강함으로 삼는 것이라면 유교 지식인이 취해야 할 강함, 그 꿋꿋함 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과정이자 심성의 수양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박재휘, 「뺷중용뺸 의 강함[强]에 대한 주희와 정약용의 해석」, 뺷태동고전연구뺸 31, 2013, 85~107쪽). 강한 의지와 지조, 그 꿋꿋함을 잃어버린 존재라면 그야말로 유교 지식인의 기본과 근간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의 가짜 유교 지식인―친일유림이 황도유학 에 놀아났던 장면이야말로 유교의 기본과 근간을 놓친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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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까지의 지점을 살았던 유교 지식인들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문제의식 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500년 왕조의 피로도와 문란상에 맞서 일생을 우국애민의 삶을 살았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국가 패 망의 위기 앞에서 노구를 이끌고 의병투쟁에 나섰던 면암 최익현(勉菴 崔 益鉉, 1833~1906), 그리고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정순국의 길 을 택했던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에 대한 논의를 통해 그들의 국가․사회적 책임, 그 정체를 탐색하고자 한다.44)

3.1. 다산 정약용: 청렴은 세상에서 가장 수지맞는 장사이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독서공부야말로 집안을 일으 키는 근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불행을 만난 집안, 폐족의 처지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독서공부 한 가지밖에 없음을 되새겼다. 정약용이 유배지 에서 아들이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곳곳에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상한 가르침이 들어있다. 정약용은 중풍을 앓고 고생하면 서도 어느 때고 독서공부를 멀리한 적이 없었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長 鬐: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로 유배 갔을 때에 이미 중풍의 전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1800년(순조 즉위년) 9월 3일자의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쓸 때에도 편지를 길게 쓰기 힘들 정도로 팔이 저리는 증상을 보였 다.45) 1810년 봄의 시점에는 이미 중풍을 앓고 있었고46), 1811년 겨울에는 중풍으로 인해 건강상태가 매우 나빴다.47)하지만 정약용은 그 악조건에도 독서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독서공부 중에서도 특히 뺷주역뺸 연

44)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유교 지식인이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접근법(處變三 事)으로는 ① 의병투쟁[擧義掃淸], ② 국외망명[去之守舊], ③ 자정순국[自靖遂志]을 들 수 있다(뺷毅菴集뺸, 卷27, 「雜錄」). 여기서 최익현은 ①에 해당하고 황현은 ③에 해 당한다.

45)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21, 「寄二兒[辛酉三月初二日到荷潭書]」.

46)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8, 「贐學游家誡」.

47)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20, 「上仲氏[辛未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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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를 통해 자신의 각고의 현실과 간난의 삶이 바뀌어 언젠가 좋은 시절이 다시 올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뺷주역뺸 공부를 통해 세상사와 인생사를 상수학이 아닌 의리학의 차원에서 풀이하는 가운데 현재의 어려 움이 언젠가는 반전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어갔다.48)

정약용이 1818년(순조 18) 다산초당에서 집필한 뺷경세유표뺸는 경세학에 관한 대표적인 저술에 해당한다. 뺷경세유표뺸의 계책과 방안은 “털끝 하나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一毛一髮無非病耳].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及今不改]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必亡國而後已]”49)는 통렬한 인식을 바탕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정약용은 뺷경세유표뺸의 저작 목적이

“오래된 나라를 개혁하는 일[新我之舊邦]”에 있다고 분명히 말하였다.50) 정약용은 뺷경세유표뺸와 함께 지방관리들의 도덕성을 강조하기 위해 뺷목민 심서뺸를 저술하였고, 법 집행의 공정성 확보와 형벌의 신중한 적용을 위해 뺷흠흠신서뺸를 저작하였다. 정치 원론은 “통치자는 백성을 위할 때만 존재 이유를 갖는다[牧爲民有也]”는 사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 이다.51)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장차 임금을 섬기는 원칙과 표준에 대해서도 언급 하였다. 이 또한 유교 지식인에게 공부란 무엇인가, 어떤 공부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 것인바, 그것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임금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라는 지적이었다. 정약용은 아들 학연에게, 임금은 시와 글을 잘하고 기예를 가진 사람, 글씨를 민첩하게 잘 쓰는 사람, 얼굴빛을 살펴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벼슬을 버리기 어려워하는 사람, 위 의가 장엄하지 못한 사람, 권력자에게 이리저리 붙는 사람들을 쉽게 여겨 첩을 대하듯 하고 노비를 부리듯 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임금의 잘못을

48) 장승구, 「다산 정약용의 자기치유와 행복관」, 뺷철학연구뺸 139, 2016, 213~238쪽.

49) 뺷經世遺表뺸, 「序」.

50)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6, 「自撰墓誌銘」.

51)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0, 「原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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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삼고 바로잡는 바른 정치의 길을 걷는 자만이 진정 임금의 존경을 받 는 사람이 될 것임을 충고하였다.52)

정약용은 천하 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 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53)공자 이래의 유교사상에는 항상 나 자신(己, 吾, 我, 余, 予)을 문제 삼는 독특한 사유가 있다. 삶을 둘러싼 외면적 영향 력을 궁극적으로 무화시키고 내면적 자발성에 전적인 힘과 책임을 부여하 였다.54)인격자의 학문은 자기 내면의 완성을 위한 것이지만[爲己], 비인격 자의 학문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다[爲人]. 인격자는 모든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지만[求諸己], 비인격자는 모든 원인을 남에게 덮어씌운다 [求諸人]. 정치를 위한 표준과 역량과 포부를 확보하는 일도 결국 나 자신 의 마음의 문제임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정약용은 성리학에 대해 “도를 알고 자신을 알아서[所以知道認己] 올바 른 도리를 실천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以自勉其所以踐形之義也]”고 규 정하였다. 정약용이 문제 삼은 대상은 성리학이 아니라, ‘요즘 성리학을 공 부하는 사람들(今爲性理之學者)’이었다. 정약용은 당시 성리학을 공부하 는 사람들을 향해 “주자가 언제 그런 식으로 했느냐[朱子何嘗然哉]”고 꾸 짖었다.55) 그 차원에서 정약용은 도학․이학․성학․심학 공부에 입각한 도덕적 삶이 진정한 삶의 기쁨을 가져다주고 행복으로 인도한다고 보았다.

도덕적 삶의 결과로 행복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삶 자체가 행복이라는 얘기이다. 정약용은 행복의 성질을, 세속적 부귀와 영화 를 누리는 복인 열복(熱福)과 자연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복인 청복(淸福) 으로 나누었다. 정약용은 청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하늘이 매우 아 끼고 주려 하지 않는 것은[若天之所甚惜而靳予之者] 바로 청복이다[乃淸

52)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8, 「示學淵家誡[庚午處暑]」.

53)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3, 「守吾齋記」.

54) 뺷論語뺸, 第14, 「憲問」, 第15, 「衛靈公」.

55)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1, 「五學論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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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是已]”고 하였다.56)열복을 얻은 이는 세상에 흔하지만 청복을 얻은 이 는 얼마 없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청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은, 유교 지식인이 어떤 공부를 통해 어떤 인격-교양을 갖춘 존재로 나아갈 것 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제시한 것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성리학의 기간 정신에 입각한 힘찬 공부(猛下功夫)를 주문하 면서 “몸을 닦는 일은 효도와 우애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修身以孝友爲 本]”는 점을 강조하였다.57)정약용은 불효자도 가까이 하지 말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지 못한 자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유교에서 효를 각별히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 연대에 대한 긴밀한 관심 때문이다. 유 교적 전통사회에서 그 사람의 인격은 그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 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 의해 판정되었다. 가장 가까운 혈육을 사랑할 수 없 는 자라면 그에게서 보편적으로 피어나는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혈육을 사랑하는 일(親親)에 대해, 그 부작용과 역 기능으로 가족제일주의, 편협한 족벌주의, 정치적 부패상과 파벌주의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58) 하지만 그 문제현상은 유교적 사랑법(親 親→仁民→愛物)이 갖는 구조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유교 공부의 본연이 욕망체계에 의해 흔들렸던 유교 지식인들의 삶의 문제였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저술한 뺷목민심서뺸가 절실한 호소력을 갖는 것은 그가 일찍이 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지방의 실정을 체험했으며, 관직에 나아가서는 정조의 어명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일대 농민들 의 고통을 직접 살폈기 때문이다. 강진의 오랜 유배 기간에는 지방 관리의 횡포와 무능, 아전들의 농간과 농민들의 억울하고 가엾은 사정을 소상히 체 험하였다. 정약용은 당시 지방행정의 문란상에 대해 “요즈음의 지방장관이

56)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3, 「兵曹參判吳公[大益]七十一壽序[己未]」.

57)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8, 「示學淵家誡[庚午處暑]」.

58) 신옥희, 「내면적 윤리의식의 부정적 측면」, 뺷정신문화뺸 15, 1982, 50~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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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자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하고 어떻게 백성을 다스려야 할 것 인지는 모르고 있다”,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하여 서로 떠돌다가 굶어죽 은 시체가 구렁텅이에 가득한데도 지방장관이 된 자들은 한창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다”, “남쪽 시골은 전답의 조세(租稅) 가 나오는 곳이어서 간악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그에 따른 여 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59)정약용이 유교 학문을 수기치인학으로 규정하면서, 수기학에 이은 치인학의 성격을 “백성 을 다스리는 것이 학문의 절반[其半牧民也]”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憂國愛民, 憂世恤民)을 실질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다.

정약용은 오랜 귀양살이로 시간과 공간이 저당 잡힌 몸이었지만 그 처지 에서도 도탄에 빠진 백성과 나라를 구하는 일에 노심초사하였다. 정약용은 1809년(순조 9)의 글에서 당시 호남지방의 근심스러운 일을 ‘백성들의 소요 (民騷)’와 ‘관리의 탐학(吏貪)’에 있다고 말하면서 탐관오리의 불법 자행이 해마다 늘어나고 갈수록 심해진다는 점을 지적하였다.60) 정약용은 나라가 처한 사회경제적 문란상의 심각성에 대해 “호남지방이 이러하니[一路如 此] 다른 여러 지방의 형편도 알 수 있으며[諸路可知], 모든 지방이 그러하 니[諸路如此] 나라가 장차 어찌 되겠는가[國將何爲]”라고 지적하고, 이러 한 현실에서도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마음속에 서려 있는 우국충정의 마음을[唯是憂國之誠耿耿在心] 발산할 길이 없어 갈수 록 응어리가 마음속에 맺혀 있다[無以發洩轉成痞結]”고 한탄하였다.61)정 약용의 한탄을 통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참혹한 삶의 현실 앞에서 한없 이 무기력했던 유교 지식인의 한 초상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유교 지식인 의 국가․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전혀 작동될 수 없었던 한계상황을 여실

59)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2, 「牧民心書序」.

60)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9, 「與金公厚」.

61)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9, 「與金公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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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뺷목민심서뺸에서는 특히 수령의 청렴을 주문하고 아전들의 횡포를 단속 할 것을 강조하였다. 수령은 몇 년의 임기가 끝나면 떠나지만 아전들은 바 뀌지 않는다. 게다가 수령은 선비로 자처하여 행정실무에 어둡다 보니 지 방사정을 잘 아는 아전들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기 일쑤였다. 정약용은 그 실상을 “목민관의 직분을 제수받으면[授之以牧民之職] 사무에 깜깜하여 오직 아전이 지시하는 대로 따른다[則蒙蒙然唯吏指是承]”고 지적한 바 있다.62)

선비의 공부와 인격, 이는 유교 지식인이라면 모두가 챙겨야 할 청렴․

청백․청빈의식을 통해 그 심층을 설명할 수 있다. 정약용은 유교 지식인 이자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청렴․청백․청빈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63)

(1) 청렴이란 것은[廉者] 목민관의 본연의 의무이며[牧之本務] 모든 선정의 근원이고[萬善之源] 모든 덕행의 뿌리이다[諸德之根]. 청렴하지 않고서 목민을 할 수 있었던 자는 일찍이 없었다[不廉而能牧者未之有也].

(2) 청렴이야말로[廉者] 세상에서 가장 수지맞는 장사이다[天下之大賈也].

그런 까닭에 크게 탐하는 자는 반드시 청렴한 것이니[故大貪必廉] 사람 들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이다[人之所以不廉者 其智短也].

(3) 예로부터[自古以來] 무릇 지모가 깊은 선비는[凡智深之士] 청렴을 교훈 으로 삼지 않거나 탐욕을 경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無不以廉爲訓以貪 爲戒].

(4) 청렴한 벼슬아치를 귀히 여기는 것은[所貴乎廉吏者] 그가 지나가는 곳은 산림과 천석도[其所過山林泉石] 맑은 빛을 받기 때문이다[悉被淸光].

62)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1, 「五學論四」.

63) 뺷與猶堂全書뺸, 政法集卷17, 牧民心書卷1, 「淸心[律己第二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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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은 「임술의책」(1862)을 통해 시대 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여 당시의 문제를 풀 수 있 는 방법을 왕에게 제시하였다. 기정진은 삼정 문란의 원인인 무능한 수령과 간악한 아전들의 횡포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면서, 그 모든 문제가 정약 용의 뺷목민심서뺸에 나와 있으며, 백성들이 당하는 질고의 해결책과 나라를 좀먹는 온갖 악을 제거할 방법이 뺷목민심서뺸에 들어 있다고 안내하였다.64) 기정진이 주목했던 것도 그 핵심은 목민관의 청렴에 관한 것이었다.

선비의 청렴을 형용하는 문구는 선정비(善政碑), 송덕비(頌德碑), 공덕 비(功德碑), 영모비(永慕碑), 불망비(不忘碑), 유애비(遺愛碑), 거사비(去 思碑),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영사불망비(永 思不忘碑), 유혜불망비(遺惠不忘碑), 선정애민비(善政愛民碑), 청덕거사 비(淸德去思碑), 추사타루비(追思墮淚碑), 대동인정후세불망비(大同仁政 後世不忘碑), 경요보민인덕불망비(輕徭保民仁德不忘碑) 등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65)하지만 선비의 청렴에 관한 역사적 점검을 통해 볼 때, 선정 비는 선정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응당 백성들의 원망이 클 수밖에 없었다.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뿐 그것을 굳이 공덕이라고 칭하 거나 찬양할 일은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정약용은 돌에 새겨 덕정을 칭송 하는 선정비는 마음속으로 반성하여 부끄럽게 여길 일이며, 나무로 만든 비 마저도 세우지 않는 것이 낫다고 지적하였다.66)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18년을 더 살았다. 정약용은 만년 에 호를 사암(俟菴)이라 하였다. 사암(俟菴)이란 “백세토록 성인을 기다리 더라도 미혹함이 없으리라[百世以俟聖人而不惑]”는 뜻이다.67) 백세토록

64) 뺷蘆沙集뺸, 卷3, 「壬戌擬策」; 뺷勉菴集뺸, 卷25, 「蘆沙先生奇公神道碑銘幷序」.

65) 박균섭, 뺷선비와 청빈뺸, 서울: 도서출판 역락, 2019, 109쪽.

66) 뺷牧民心書뺸, 卷14, 「遺愛[解官第六條]」.

67) 뺷與猶堂全書뺸, 詩文集卷16, 「自撰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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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을 기다리더라도 그 학문이 지극히 정밀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자신할 수 있어야만 선비의 앎과 삶의 세계가 마땅히 짜여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정약용의 언명에는 어떤 성인을 만나더라도 자신이 쌓는 학문만큼은 질책 받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배어있다. 자신을 버린 불의의 시대를 넘어 다음 시대에서나마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줄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겠다 는 뜻이었다. 그 자신감과 학문적 업적은 그의 평소의 꾸준한 독서와 공부 가 이루어낸 성과였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말기의 정치사회적 문란상에 대응하기 위해 고군 분투하는 유교 지식인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런 정약용이 1930년대에 실 학사상가의 대표인물로 소환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 른 식민교육이 한창이던 시점에서 실학이라는 이름의 신화가 조립․유통 되고 그 담론의 대상으로 정약용이 소환되었다는 것은 분명 특징적인 장면 이다.68)당시 식민지조선에서 가능한 운동영역은 학술뿐이었는데, 그 학술 연구가 전근대사상 관련 사실을 선택적․현재중심적으로 왜곡하거나 실제 역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인식론적 폭력(epistemic violence)이 자행되었다 는 사실에 유의할 일이다.69)우리는 인식론적 폭력이 자행되기 전의 정약 용 텍스트를 제대로 검토할 수 있어야만 그가 어떤 나라와 세상을 꿈꾸었 는가에 관한 보다 정확한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 정약용은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고 그들의 부정․부패․불법행위를 폭로하는 가운데 사회․경제적 으로 어렵고 고통 받는 백성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가슴을 태웠다.70)

68) 박노자(Vladimir Tikhonov), 「Sirhak and Tasan as seen by 1920-30’s Korean Socialist Intellectuals」, 전주대학교 HK+연구단 제3차 국외전문가 초청강연(2019.8.7.

전주대학교 한지산업관), pp.1~19, 특히 p.16;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뉴스레터 뺷옛글과 새길뺸 11, 2019년 9월, 1쪽 참조.

69) 박노자(Vladimir Tikhonov), 위의 글.

70) 문관규, 「역사와 선비 정신의 소환 그리고 진실의 힘: 양우석의 <변호인>(2013)」, 뺷현 대영화연구뺸 17, 2014, 69~93쪽; 박균섭, 뺷선비와 청빈뺸, 서울: 도서출판 역락, 2019, 1~

138쪽; 박석무, 「우국애민으로 가슴 태우던 다산」, 뺷풀어쓰는 다산이야기뺸 1006, 2018년 4월 2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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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유교 지식인의 본연은 국가․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돈독히 하 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3.2. 면암 최익현: 폐하는 어떻게 집도 없는 사람이 되셨습니까 선비는 명분과 의리를 행위의 근본으로 삼는다(義以爲質/唯於義/捨生 取義). 의리를 좇는 선비의 행적에는 부끄러움이 없다. 이 순수함, 이 때 묻 지 않음으로 해서 선비는 난관과 위기에 직면할수록 강한 의리사상과 절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의리사상과 절의정신의 대명사로 흔히 정암 조광 조(靜菴 趙光祖, 1482~1519)를 드는 경우가 많다. 1519년, 지치주의 정치 를 표방했던 조광조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으면서 중 종에 대한 충심을 가장 지극한 형태로 드러냈다. 그 지극함은 “임금 사랑하 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 듯 하였다[憂國如憂家]”는 말에 담겨있다.71)

조광조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했던 기조에 가장 근접했던 대응 행동을 찾는다면, 아마도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의 임금과 나라에 대한 지극한 마음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최익현이 외세의 침략본능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 임금 고종에게 했던 말은 “폐하는 나라도 없고 땅도 없고 백성도 없는데다가[陛下非但無國無地無民而已] 이제는 집도 없는 사람입니다[並亦無家矣]”라는 말이었다.72)

최익현은 개화파가 준동하고 그들이 큰 목소리를 내는 현실에 누구보다 도 비분강개했던 인물이었다. 유길준이 위정척사파를 향해 “변고가 겹쳐 일어나는데 말 한마디 없다”고 지식인의 도리에 대해 훈수 두듯 내뱉는 것 에 대해 최익현은 “기가 산처럼 솟아오른다[氣湧如山]”는 말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드러냈다. 최익현은 “변고는 시역보다 더 큰 것이 없고[夫變莫大於

71) 뺷中宗實錄뺸 1519年(中宗 14) 12月 16日.

72) 뺷勉菴集뺸, 卷5, 「請討五賊䟽[再疏][乙巳十一月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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弑逆], 죄는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罪莫大於 不報君父之讐]”는 말로 유길준 일파를 문제삼았다. 그렇다면 “갑신년 (1894)부터 금년(1895) 8월까지[使甲申至今年八月]”의 “역적들이[逆賊之 輩] 조정에서 마음대로 날뛰며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둔 현실[任其跳踉肆行於朝廷之上]”에 대해 스스로도 지식인으로서의 책임 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왕법(王法)을 가지고 논죄한다면, 최익현 스스로가 마땅히 이 역적들(유길준 일파)보다 먼저 벌을 받아야 한 다는 역설을 스스로 제시한 것이다.73)최익현은 을미년(1895)의 국가가 체 모를 잃어버린 현실에 대해 뺷주역뺸 「박괘」74)를 통해 설명하였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로는 우리나라는 또 뺷주역뺸 박괘(剝卦) 상구(上九)의 석 과불식(碩果不食)75)의 상과 같다. 불행하게도 하늘이 재화를 내려서 더러운 왜

73) 뺷勉菴集뺸, 卷14, 「擬答兪吉濬[乙未十二月七日]」. 최익현이 지적했던 ‘우리 안의 역적 들(我賊臣輩)’의 원조격은 박영효와 유길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뺷勉菴集뺸, 卷4, 「請討 逆復衣制疏[乙未六月二十六日]」; 뺷勉菴集뺸, 卷14, 「擬答兪吉濬[乙未十二月七日]」;

뺷勉菴集뺸, 卷4, 「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䟽[丙申正月十一日]」; 뺷勉菴集뺸, 卷4, 「宣 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䟽再䟽[丙申正月十六日]」). 개화파 지식인들은 일본의 선의 를 맹목적으로 신뢰하였으며, 조선은 일본의 지도를 받아 자강을 이룩해야 한다는 입장 을 취하였다. 일본의 절대적 후원을 받았던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을 모델로,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과 근대국가 수립을 추구하였고, 조선의 왕권을 근대화의 걸림 돌로 생각한 나머지 왕권과도 대립하는 구도를 설정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어둠의 역사였다.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은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주 진오, 「박영효 vs 유길준(하)」, 뺷서울신문뺸 2012년 10월 8일; 최덕수, 「최초의 유학생, 유길준의 세계인식」, 뺷서울의 근대, 세계의 만남뺸(서울역사박물관대학, 2017.9.27.), 13쪽.

74) 뺷周易뺸, 卷1, 「剝卦」.

75) 석과불식(碩果不食)은 크고 좋은 열매는 먹지 않고 다음 해를 위해 씨앗으로 남겨둔다 는 의미를 담고 있다(뺷周易뺸, 卷1, 「剝卦」). 국가․사회적 위기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 에서 석과(碩果)의 비유를 드는 뜻은,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엄혹한 역경과 위기의 상황 에서 크고 좋은 열매―석과는 희망의 표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희망을 만들 어내는 일은 그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듬해 봄에 싹을 틔워 나무로 자라고 숲을 만들 어내는 일, 거기에는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하는 협동적․지성적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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