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목사와 봉정사를 품에 안은 산으로, 그리 높진 않지만 안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이다.
이번 여정은 안동시 북후면 광평리에서 개목사를 지 나 봉정사를 답사하고 태장리로 하산하는 길이다.
저전리 저전 버스정류장에서 서후면 소재지인 성곡 리로 이어진 924번 지방도로를 따라 500여m쯤 가다 보 면 보이는 곳이 안동삼베공장이다. 이곳에서 광평리 가 야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 길이고, 2km쯤 가다 가야저수지를 지나면 바로 가야 마을이다.
태장리와 인접한 광평리는 넓은 들이 많았으므로 너 븐돌이라고 부르다가 그 말이 변하여 ‘너븐들’ 또는 ‘광 평’이라고 하였다.
너븐들 서쪽 골짜기에 있는 개실마을은 가야, 가야곡 또는 가야곡촌으로 불리는데, 마을이 그리 크지는 않지 만 삼태기에 담긴 것처럼 바라보기가 평온하다.
한편, 너븐들 북쪽에 있는 가래실 마을은 가래나무 가 많아서 추동 또는 추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선조 때 의 학자인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이 이 마을에서 태 어났다. 가야마을에서부터 개목사로 가는 길은 한가롭 고도 고적하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사이를 벗 삼아 오 르면 사과과수원이 보이고, 사과과수원 위로 난 길을 잊 어버리고 오르다 보면 평지가 나타나는데, 그곳에 개목 사가 있다.
17세기 초에 안동의 지리지인 ‘영가지’를 편찬한 권 기는 안동의 지세를 “산은 태백으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로부터 흘러온 것을 알 수 있으며…… 산천의 빼어 남과 인물의 걸출함과 토산의 풍부함과 풍속의 아름다 움과 기이한 발자취가 이곳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멀리 로 낙동강의 물줄기가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천등산 중 봉정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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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에 자리 잡은 고색창연한 절이 개목사다.
신라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개목사(開目寺)는 창 건에 얽힌 설화가 재미있다. 의상이 출가하여 천등산 정 상 근처의 큰 바위 밑에서 수도를 하였는데, 하늘에서 큰 등불을 비춰주어 99일 만에 도를 깨치게 되었다. 의 상은 지금의 터에 99칸의 절을 창건하고 “하늘의 등으 로 불을 밝혔다”라는 뜻으로 천등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고려 말에는 포은(包銀) 정몽주가 이 절에서 공부를 하 였고, 조선 초기에는 안동부사로 와 있던 맹사성이 중수 하였다. 그 무렵 안동지역엔 유난히도 장님이 많아 맹사 성은 이 절의 이름을 ‘개목사’라고 지으면 장님이 더 이 상 안 생길 것이라고 하여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후부터 안동지역에 장님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의상이 지을 때 99칸이었다는 전설과는 다르게 현 존하는 당우는 법당인 원통전과 요사채 그리고 문을 겸 한 종루가 있을 뿐이다. 허물어져 가는 농촌의 빈 집이 나 여염집 같은 문루에 들어서자 한가롭게 서 있는 원 통전(보물 제242호)이 보인다. 마당에 피어난 온갖 꽃 들에 눈을 빼앗기고 있는데 어디서 왔느냐는 소리가 들
님이 나오시고 그 옆방에선 나이 드신 보살님이 나물을 다듬고 있다.
소박하지만 마음속에 울림을 주는 원통전은 정면 3칸 에 측면 2칸의 건물로, 조선 초기에 지어진 주식포식 맛 배지붕이다. 건물 전면에 툇간을 놓고 마루를 깐 점이 독특한데 옆에서 보면 지붕 앞쪽의 처마가 다소 무거워 보인다. 앞뒤의 높이가 비대칭이기 때문에 주두부터 시 작되는 일반적인 주심포와 달리 허점 차에서부터 보아 지가 튀어나와 퇴보와 중도리를 받도록 하며 특별히 고 안한 공포구성이 특이한 조선 초기의 건물인 원통전을 보고 나오자 푸르른 은행나무 사이로 안동 시내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개목사에서 봉정사에 이르는 길은 장 마로 인하여 조금씩 패인 것을 제외하고는 산책길처럼 부드럽다.
이렇게 한적하고 조용한 길은 천천히 가는 것이 좋다 고 여기면서도 마음이 바쁘니 몸도 바쁘다. 송이 향기가 물씬 풍길 듯싶은 소나무 숲길을 헤쳐 나오자 보이는 암 자, 바로 봉정사의 영산암(靈山庵)이다.
영산암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지인의 집을 찾아가 는 느낌이다.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있다가 옮겨진 우화 루의 작은 문을 지나 영산암의 마당에 들어서면 큰 바위 곁에 잘 드리워진 소나무가 한 그루 있고, 목백일홍 나 무와 여러 가지의 나무들이 요사채, 삼성각, 응진전 등 다섯 채의 건물들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지난 날 봉정사 스님들의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절 영산암에는 상주하는 스님이 없다.
영산암은 지조암과 함께 봉정사에 딸린 부속암자이 지만, 사람들에게는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의 촬영지로 이름이 더 높다. 이 영화는 1989년에 4개 의 해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비롯 특별상을 받아 한 국영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작품이다. 늙고 어린 승 려 3명의 구도적 삶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투철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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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목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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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몹시도 어두우니 마음의 심지에 불을 밝히고 갈 길 을 비추어라”라고.
하얀 고무신 두 켤레가 놓인 요사채 마루에 기대 앉 아 세상에 찌들고 상처 받은 마음을 풀어 놓는다. 풀어 진 내 마음은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으로 봉정 사로 향한다.
영화가 촬영되기 전에는 천등산에서 흐르는 골짜기 그대로가 길이던 것이 영산암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 자 골짜기를 메우고 계단을 만들었다.
‘무량해회(無量海會)’라는 현판이 붙은 요사채를 돌아 가면 봉정사(鳳停寺) 화엄강당이다.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의상이 세운 절인데 창 건설화가 재미있다.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고서 부석 사에서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 보냈다. 그 종이로 만든 봉황새가 내려앉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고, 의상은 이곳에 절을 지어 봉정사라고 이름 지었다. 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히고 청마가 앞길을 인 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 이 름을 봉정사라고 지었다 한다.
창건 이후의 확실한 역사는 전해오지 않는데, 이 절 이 참선도량으로 이름이 높았을 때는 부속암자가 9개 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사찰에 있 던 경전과 사리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제대로 알 수 가 없다.
봉정사를 처음 답사했을 때 ‘이렇게 보석 같은 절이 숨어 있다니’ 하고, 이후 안동 일대를 오게 되면 꼭 들르 는 답사처가 되었다. 내가 그렇게 수없이 오가던 시절에 도 이 절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엘리 자베스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회마을과 이 곳 봉정사를 찾고서부터 급변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 절은 입장료를 받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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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이어지고 있다.
봉정사에는 고려 때 지은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 불어 조선 초기 건물인 대웅전과 조선 후기 건축물인 고 금당 및 화엄강당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목조건축 의 계보를 고스란히 이어온 건축박물관 같은 특성을 지 니고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으 로 나라 안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72 년 9월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였다.
중도리에 홈을 파고 ‘기문장처(기록이 들어있는 곳)’
라고 표시한 곳을 열어보자 극락전의 상량문이 들어있 었다. 상량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동부 서쪽 30리쯤 천등산 산기슭에 절이 있어 봉정사라 일컬으니 절이 앉 은 자세가 마치 봉황이 머물고 있는 듯하여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이 절은 옛날 능인대덕이 신라 때 창건하고…… 이후 원감 안충 등 여러 스님들에 의 해 여섯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 어져 1363년(공민왕 12년) 용수사의 대선사 축담이 와
상량문이 밝혀짐으로써 봉정사의 극락전은 그때까지 가 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알려졌던 1376년에 중건된 무량 수전보다 13년이나 앞선 1363년에 중수했다는 것이 밝 혀졌다.
그러나 극락전은 1972년의 해체와 복원공사 때 금, 은, 구리의 옛날식 삼색 단청이 지워져 버렸고, 귀중한 벽화 일부가 뜯겨 포장된 채로 내버려져 옛맛을 상실하 고 말았다. 이 건물은 배흘림기둥에 기둥 위에만 포작 이 있는 주심포식 맞배지붕이고, 법당으로서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어진 필요한 구조만 있지 장식이 거의 없는 고려 중기의 단아한 건물이며, 바닥에는 검은 전돌을 깔았다. 이런 방식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극락전 앞에는 아담하면서 새까만 석탑이 있으며, 극 락전 우측에 고금당(보물 제449호)이 있다. 고금당은 이 름 그대로 옛 금당이었고, 삼국시대에 금당은 절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봉정사 스님들이 거 처하는 요사채로 쓰이고 있다. 고금당 앞쪽에는 화엄강 당이 서 있다. 한때는 강당으로 쓰였을 이곳 역시 스님 들의 요사채로 쓰이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주 심포식 맞배지붕이다.
화엄강당 좌측에 대웅전이 자리 잡고 있다. 1625년 과 1809년에 대대적인 손질을 거친 대웅전은 앞이 열려 있는 일반적인 건물들과는 다르게 건물 앞쪽에 조선시 대 양반집 사랑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툇마루가 설치 되어 있다. 처음 볼 때는 어색해 보이지만 볼수록 정감 이 간다. 대웅전에는 가운데 석가모니불과 양쪽에 관세 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셨는데, 그 뒤편의 후불벽화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후불벽화를 보수하려고 걷어낼 때 발견된 이 벽화는 4m가 넘는 거대한 벽화로 강진 무위사의 벽화보다 앞서는 조선 초기의 벽화로 보 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1882년(고종 19년)에 새로 입힌 대웅전의 단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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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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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주목 받고 있는 그림이다. 그 이유는 조선 이후 황 제를 상징하는 용은 발가락이 5개, 임금은 4개, 왕세자 는 3개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찰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봉정 사는 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을 너무 새 집 같이 보 수를 하는 바람에 세월 속에 몇 백 년간 묵어온 온갖 풍 상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찾는 이들의 마음을 섭섭하 게 한다.
대웅전에서 전면에 보이는 누각은 덕휘루(德輝樓)의 누마루다. 법고와 목어 사이로 봉정사의 오랜 역사를 적 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부석사의 안양루와는 다르게 지 은 덕휘루를 지나면 봉정사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소나 무 몇 그루가 그늘을 드리운 길이 이어지고, 참나무 숲
퇴계 이황이 봉정사에 묵을 당시 공부하다가 자주 나가 쉬었다는 정자의 옛 이름은 낙수대였다. 퇴계는 정자에 서 듣는 물소리가 옥을 굴리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이름 을 명옥대로 바꾸었다. 바위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 소리 가 멎으면 봉정사 들목이다.
“나는 마침내 동쪽으로, 서쪽으로, 또 모든 방향으로 바람결에 실려 가는 낙엽처럼 나를 움직이는 것이 바람 인지(내가 객체인지), 내가 바람을 타는 것인지(내가 주 체인지) 알지 못한 채 길을 떠났다.” ‘열자’에 실린 글처 럼 개목사를 지나 봉정사에 이르는 길은 길 위에서 잃어 버린 나를 찾아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찾고 자 했어도 아직도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며 찾는 그 길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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