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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빈센트 반 고호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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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s J Korean Psychoanalytic Study Group Vol. 8, No. 2, page 146~162, 1 9 9 7

빈센트 반 고호의 생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조명 *

李 武 石**

Psychoanalytic Study on the Life of Vincent Van Gogh*

Moo Suk Lee, M.D., Ph.D.**

서 론

Freud는 예술작품을 예술가의 개인체험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예술가를 욕구 의 주체로 보고 그의 욕구와 욕구불만이 예술작품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 서 예술가의 유년기 체험과 생활사, 가정환경,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Freud의 견해가 예술가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예컨대 Freud는 자신의 논문‘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유년기의 한 기억(“내가 요 람에 누워 있는데 독수리 한마리가 날아 내려와서 꼬리로 내 입을 벌리고 내 입술을 여러 차례 때렸다”)’에서 레오나르도가 어머니(생모와 계모)에게 가졌던 성적 애착을 밝혔고, 이 문제가 그의 동성애를 낳았고 예술작품‘성 안나’와‘모나리자’를 그리게 했다고 분석했다(Freud 1910).

빈센트 반 고호는 27세부터 37세까지 약 10년간 850여점의 걸작을 그렸다. 그 중 300여점은 마지막 일년 반(1889년 12월 아를르 시절부터 1990년 7월 오베르에서

*이 논문은 1997년 9월 22일 광주 비엔날레 행사의 일환으로 가진 한국정신분석학회의“예술 과 정신분석”세미나에서 발표되었음.

This paper was presented in the seminar of Korean Psychoanalytic Association in the title of‘Art and Psychoanalysis’which was held as an event of“1997 Kwang Ju Bien- nale”at September 22, 1997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및 전남대학교 의과학 연구소

Department of Psychiatr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Medical School & Chonnam University Research Institute of Medical Sceiences, Kwang Ju,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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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기 까지)동안에 그린 것들인데 이 기간은 그가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을 드나들 다가 자살하기 까지의 기간이었다. 그의 생애는 그림 만큼이나 극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또한 19세 때부터 30세로 죽기 까지 동생 태오와 편지를 교환했다. 600여통 의 편지를 태오의 부인이 보관했다가 책으로 출판했다(The Complete Letters of Vincent Van Gogh 1958). 그의 작품들, 극적인 인생사, 그리고 내면을 글로 표현한 편지들이 그를 잘 설명해 준다. Freud의 이론을 따라 한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을 분 석할 때 빈센트 반 고호처럼 풍부한 자료를 남겨준 예술가도 드물다. 한 예술가를 깊 이 이해하면 인간 정신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빈센트 반 고호의 생애를 사건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그의 성격을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았다.

본 론

1. 빈센트 반 고호의 생애

1) 어린시절에서 전도사 시절까지(1853-1880)

빈센트 반 고호는 1853년 3월 30일 네델란드 북쪽 구르트 준대르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칼빈주의 목사였고 친절하나 엄하고 선과 악을 강조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활달한 성격이었다. 바로 일년 전에 고호의 형을 낳았으나 이 아이는 일주일만에 사망 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보상하기 위하여 고호에게는 죽은 형의 이름을 붙 여주었다. 또한 이번 자식은 잃지 않으려는 심정으로 과잉보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호는 형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부담을 안고 태어났다. 형의 무덤이 교회 마당에 있 었다(Hammacher 1982;Tralbaut 1969).

1857년(4세) 5월 1일, 동생 태오(Theo)가 태어났다. 이 동생은 고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상이다. 평생 동안 형을 사랑했고, 세상사람들이 다 고호에게 등을 돌릴 때에도 형을 이해해주고 매달 생활비를 송금해 주었다. 19살때부터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가 652통이다. 형이 죽고 6개월만에 34살의 나이로 죽어서 형 옆에 나란히 묻혔다. Theo는 동생이었지만 너그러운 아버지와 같았다.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다(Lubin 1972).

1862년(9세)에 최초에 그린 그림, <개>와 <다리> 데생 두 점이 남아 있다. 이 무 렵 코끼리 상을 만들었는데 아버지가 칭찬하자 보는 데서 깨버렸다. 칭찬받을 만한 것 이 못된다는 이유였다. 빈센트의 성격중 칭찬을 못견디는 면과 충동적인 일면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Bonafoux 1995).

1864년(11세)부터 1868년(15세)까지 집을 떠나 기숙학교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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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가 받은 공 교육은 이 4년간이 전부였다. 11살까지는 목사인 아버지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다. 아버지의 도덕적인 교육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공부 는 잘했으나 아마도 아버지가 학비를 댈 수가 없어서 갑자기 공부를 중단시켰다.

1869년(16세)에 파리의‘구필’상회에서 미술상인 일을 시작했다. 빈센트가 자기 힘 으로 돈을 벌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직장생활은 이후 6년간이 전부였다. 인간관계의 어 려움으로 직업적응을 못했다.

1873년(20세) 5월에 런던으로 전근을 가다. 하숙집 주인 우르쉴라(Urshula)의 딸 유게니아(Eugenia)를 사랑한다. 런던 도착 한 달만인 6월에 구혼을 하나 거절당한다.

깊은 타격을 받고 우울에 빠져서 근무를 계속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고호의 생 애는 이 사건후로 병적인 길로 들어섰다(Hammacher 1982).

1874년(21세) 7월, 양친 밑에서 위로받고 런던에 돌아갈 때 부모가 여동생을 딸려 보냈으나 적응못하여 10월에는 파리로 전근시켜 준다. 12월에 파리에서 런던으로 달 려가 유게니아를 만나려 했으나 다시 거절당하고 실망한다(김세중 외 1975).

1876년(23세) 4월 1일, 마침내 직장을 그만 두었다. 동료 영국인과 성경공부만 하 고 근무 태만하고 고객들과 마찰이 많아져서 파면당했다.“장사는 조직적이고 합법적 인 도둑질이다”고 했다. 부모가 계신 에탠으로 돌아와서 기독교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그는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 한다. 동생에게 쓴 편지에 서“돌이켜 보면 우리 집안은 대대로 복음의 종들만 있어 왔다.”고 자랑스럽게 쓰고 있다. 22살 때는“아무래도 나도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고 싶다.”고 동생 Theo에게 편 지한다(김세중 외 1975;The Complete Letters of Vincent Van Gogh 1958).

1877년(24세) 5월, 신학교 입시공부를 위하여 암스텔담으로 갔다. 약 일 년간을 자 학적이라고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여러번 실패하고 결국 포기했다. 당시 암 스텔담에서 그의 선생님이었던 Mendes da Costa박사에 의하면, 공부를 하다가 자신 이 성실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면 막대기로 자신의 등을 쳐서 상처를 입히는가 하면 추 운 겨울에도 밖에서 잠을 자는 등 자기 처벌을 했다. 자학적이고 자기 처벌적인 성격 을 보여 준다(Bonafoux 1995).

1878년(25세) 11월에 Belgium의 탄광촌 보리나주(Borinage)에 전도사로 파견되 었다. 헌신적이었으나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당시 보리나주는 티푸스가 퍼지고 임금 은 내리고 탄광이 폭발하는 등 액운이 덮치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기 집을 빈민들에게 내주고 광부들처럼 오두막에서 살았고, 맨바닥에서 잤으며, 옷은 누더기를 입었고 음 식과 돈은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어버렸다. 가장 위험한 막장까지 광부들과 함께 내려 가기도 했다. 그는 쇠약할 데로 쇠약해진 데다가 교회 지도자들과 싸우고 결국 목사 되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복음을 전하는 본래의 의무를 수행하기 보다는 빈민을 동정 하고 구제하는 일과 탄광 소유자들과의 투쟁을 주업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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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상(ego ideal)인 예수그리스도와 자신을 동일화하고 있었다.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주는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렇게 행동했다(Lubin 1972). 그러나 이 생 활은 그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고 좌절감만을 주었다. 그는 교회의 권위주의와 위선 을 비난하고 교회를 떠났다.

1879년(26세) 7월, 교회당국으로부터 해임당했다. 이유는 지나친 집착과 열심 때 문이었다. 8월에 부러셀에서 수채화가인 신부를 만났다. 그는 고호의 데생 2점을 사주 었고 격려했다. 빈센트의 관심은 종교에서 그림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죽을 때까지 고 호의 경제적, 정신적인 후원자였던 동생 Theo와는 1872년(19살)부터 37살로 자살 할 때까지 수백통의 편지를 나누었는데 같이 살던 시기를 제외하고 1879년 10월부터 1880년 7월까지 9개월간 편지를 끊은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동생이 빈센트가 전도 사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며 방황하는 것을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의 지적을 비난으로 받아들였다. 타인의 충고를 못견디는 고호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래 도 동생 태오는 고호에게 아버지 이름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었다(김세중 외 1975).

2) 그림그리기 시작부터 네델란드 시절(1880∼1886)

1880년(27세), 광부의 집에서 기식하면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최악의 상태에서 그 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화가가 되는 것을 천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7월, 동생에게 9개월만에 편지를 보내서 화가가 될 결심을 알렸다.“나는 과연 쓸모있는 사람일까?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화가의 길을 택한다고 했다. Anthon Van Rappart(1856~1892)에게 원근법 등을 배 웠다. 그림을 배우려고 쥘부르통이라는 화가의 아틀리에게 갔지만(길에서 자면서 걸어 서 갔다) 멀리서 본 아틀리가 고급스럽고 냉랭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문도 두들겨 보 지 않고 돌아와 버렸다. 타협을 모르는 고호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 주는 에피소드이다.

1881년(28세) 4월, 에탠(Etten)의 부모에게 돌아와 농부들의 데생을 많이 했다.

이 때 두번째 사랑의 상처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휴양차 와있던 외사촌 케이 보스 (Kee Vos)에게 사랑을 고백하나 거절당했다. 케이가 여름 휴가차 그의 집에 왔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빈센트는 사랑에 빠졌다. 집요하게 구혼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케이의 입장에서는 남편을 잃은지 얼마 안되어서 남편 잃 은 슬픔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호가 집요하게 구혼을 하자 암스텔담의 자 기 집으로 피해 버렸다. 암스텔담으로 여러번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답장이 없었고 가족들도 고호를 좋지 않게 보았다. 고호는 화가 나서 암스텔담으로 쫓아갔다. 밤에 케이의 집에 도착했다. 케이는 그를 피해서 외출하고 없었다. 고호의 외삼촌인 케이의 아버지는 그의 끈질긴 태도에 화가나서 나무랬다. 그리고 케이의 편지(‘더 이상 자기 를 괴롭히지 말라’며 단호하게 거절하는 내용)를 고호에게 주었다. 편지를 읽은 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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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놀랍게도 타고 있는 석유램프 불 속에 손을 집어 넣고 케이를 데려오라고 했다. 방 안에는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결국 기절하여 쓰러졌고 쫓겨나고 말았다. 분노를 자학적으로 처리하는 고호의 모습을 볼 수 있다(Lubin 1972). 그후 화가 지망을 반대 하는 아버지와 싸우고 12월 헤이그로 가서 1883년(30세) 9월까지 머물었다. 거기서 사촌인 화가 모베(Anton Mauve)에게 그림을 배웠다.

1882년(29세) 1월,“위로와 생리적인 이유로” 그리고“그녀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린 딸을 데리고 사는 창녀 지엔(Sien Foornik, 크리스틴이라고도 부름)과 동거를 시작하여 20개월을 함께 살았다.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딛쳤다. 태오만 그를 이해 해 주었다. 이때(1882년 5월) 쓴 편지 중에 빈센트의 그림관을 보여 주는 내용이 있 다.“나는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볼 수 없었던 부분을 그림을 통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보 여주기 위해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어 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림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다시 말하 면 그는 자신을 그림을 통해서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남들이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 을 자화상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그림들을 통해서 보여주려 했다. 화가의 자기애와 자기노출 욕구를 보여 주는 내용이다(Bonafoux 1995).

1883년(30세), 창녀 Sien을 모델로한 <슬픔>, <위대한 여인>을 제작했다.‘위대한 여인(The Great Lady)’ 작품에서 고호는 젖이 축 늘어진 늙은 창녀 크리스틴을 그려 놓고 있다. 1882년 4월 헤이그에서 이 그림을 그리다가 동생 태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토마스 후드의 시에 양심의 가책으로 잠을 못 이루는 부잣집 부인의 얘기가 나 온다. 그 여인은 옷을 사러 갔다가 가난하고 결핵으로 창백한 여자 재봉사를 보았다.

부인은 자신이 호의호식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잠을 못이루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 그 여인을 표현한 것이다. 양심의 가책으로 잠을 못이루는 창백한 여인의 모습 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보는 고호의 마음을 읽을 수 있 다. 죄책감은 빈센트 자신의 핵심감정이었다. 9월 Sien의 불성실한 생활을 견딜 수 없 어서 관계를 청산하고 모베와도 관계를 끊고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부모가 계신 누 에넨(Nuenen)으로 돌아왔다. 모베는 그림을 지도해준 분으로 당시 헤이그파를 이끄 는 유명한 화가였다. 경제적인 도움도 주었고 무료로 그림지도도 해준 고마운 친척이 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도 항상 긴장감이 돌았다. 모베가 고호에게“챙피해서 사 람들에게 자네를 소개할 수가 없으니 제발 더럽고 떨어진 옷을 입지 말게”라고 말한 것 이 섭섭했고, 그림에 대한 비평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베가 고호에게 그림 연습을 위해서 석고상을 그리라고 하자 이를 거절하고 결별해 버린다.

자신은 죽어 있는 것을 반복해서 그리는 헛짓은 못한다고 했다. 남의 충고나 비평을 못 참는 고호의 성격을 볼 수가 있다. 그의 개성이나 자기 주장이 강했다고도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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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년후 아를르에 있을 때 모베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자기 그림 중 가장 좋은 그림에‘모베에게 드림(souvenir de Mauve)’이라고 써넣어 서 그를 애도했다. 빈센트의 인간관계의 일면을 보여 준다. 지적당하는 것을 못견디고 결별했지만 속마음에서는 정을 가지고 있었다.

1884년(31세) 1월, 어머니가 다리 골절상을 당하자 헌신적으로 어머니를 간호해서 부모와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 평소엔 하루 종일 가족과도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아버 지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너무 지나치게 세게 짖어대는 무뚝뚝한 커다란 개’ 같았던 고호가, 보리나주 탄광에서 헌신적으로 일한 것을 재현이라도 하는 것처럼 모친의 병 상에 밤을 새며 붙어 앉아 정성어린 간호를 했다. 빈센트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헌신 적이 되었다. 또 그는 가난한 농부들을 좋아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호 의 동정심은 유별나다. 창녀 지엔을 돌보아 준 것이며 다음에 소개할 고갱에 대한 동 정심을 보아도 그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형편을 돌보지 못하고, 천사처럼 헌신 적이 되었다. 정신분석에서는 취소(undoing)이라는 방어기제가 있다. 죄책감을 느끼 는 사람이 마음 속의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서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나의 속죄 행위인 것이다. 고호의 선행은 마음속의 죄책감에 대한 취소방어로 해석할 수 있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자아이상의 강요를 따르고 있는 행동일 수도 있겠다 (Pollock 1994;Tralbaut 1969). 그는 또 1884년 여름에 세번째 실연을 당한다. 10 세나 연상인 이웃여성과 사랑하여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양친이 반대했고, 여 자는 자살을 기도했다. 몇 번이나 구애에 실패한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서“너는 내게 돈은 보내 줄 수 있지만, 아내나 아이나 일은 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가정을 갖고 싶어하는 욕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평생 가정을 갖지 못하였고 직 업도 갖지 못했다.

1885년(32세), 3월 27일 목사인 아버지가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다가 교 회 문 앞에서 쓰러져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성실성을 볼 수 있다. 빈센트는 아버지 가 돌아 가신 후 그림에 더욱 몰두했다. 4월에서 5월까지 대작인 <감자를 먹는 사람들 potato eater>완성했고, 6월 <농사꾼 아낙네의 얼굴>을 그렸다. 이 해부터 빈센트는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렘부란트와 더불어 빈센트도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 중 하나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과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어떤 연관이 있을 것 이다. 일반적으로 화가가 자화상을 그릴 때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싶을 때 이다. 아버지의 죽음 후에 빈센트가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마음속에 큰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던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노력이었을 지도 모 른다(Silverman 1985).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빈센트의 창작생활이 더 욱 활발해졌다. 아버지의 죽음과 창작활동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Pollock (1987)은‘애도 후에 오는 자유로움(mourning liberation)’에 대해서 썼다. 대상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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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한 후에 심리적으로 자유로워져서 창조적이 된다는 주장이다.“나이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때 형제나 부모의 죽음 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서 내적인 성격구조의 재편이 일어나는 과정을‘애도후에 오 는 자유로움’이라 하겠다. 어떤 대상을 상실했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예 술가들의 생애를 분석해 볼때 대상의 상실이 꼭 병적이거나 나쁘게 작용하는 것은 아 니고 오히려 창조적이 되게 하였다.”고 하였고,“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형제 가 죽으면 창조성이 발휘된다. 상실한 빈 자리를 예술로 대치하는 것이다. 슬픔의 치 유과정으로 예술이 이용된다.”고 하였다(Pollock 1978). 다음 해에 파리에 가서 그의 그림의 색상이 밝아지고 창조적이 되는데 이것을 미술사가들은 파리에서 인상파의 영 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아버지 사망으로 얻은 빈센트의 심리내적 변화와 해방감이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3) 파리시절(1886년부터 1888년까지;33∼35세)

1886년 1월;안트워프의 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권위주의적인 선생과 싸우고 2월 28일에 파리로 와버렸다. 태오에게는 미리 알리지도 않았다. 동생의 입장보다는 주관 적 충동에 지배당하는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다. 태오와 함께 살았다. 꼬르몽(Fernand Cormon)에게 3개월간 미술을 배웠다. 파리생활 2년간에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 렸다.

빈센트가 그래도 화가동료들과 어울리며 사람들과 어울려 사교적인 생활을 한 것은 만 2년간의 파리 생활이었다. 파리생활에서 인상파 화가들 세잔, 고갱, 쇠라, 로트랙, 베르나르, 모네 등과 만났고 개인전도 하였다. 미술의 여러 기법을 배우기도 하였고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체를 사용하기도했다. 그러나 사생활은 싸움과 갈등, 무 질서, 독한 술로 엉망이었다. 베르나르와‘포세’라는 음식점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빈센트가 식당주인과 싸우는 바람에 전시회를 계속하지 못하고 뒷골목 선술집인‘탬버 랭’에서 작품을 전시해야만 했다. 그러나‘탬버랭’의 주인과도 싸우고 절교를 당했다.

동료 화가들은 그에게 반감을 느끼고 기피했다. 화가‘기욤’은“빈센트는 화가나면 옷 을 벗어던지고 무릎을 꿇기 까지 했는데, 말릴 수가 없었다”고 발작적인 고호의 분노표현 에 대해서 설명했다(Bonafoux 1995). 고호는 자신을 못마땅히 여기던 화방 주인‘탱 기’ 부인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고호는 파리에 도착한 뒤 처음에는“프랑스의 공 기는 나의 생각을 맑게 해준다. 작업이 더할 나위없이 잘된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났을 때는“인간적으로 구역질나는 화가들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 남 프랑스의 어딘가로 가고 싶다”고 하였다. 결국 동생‘태오’도“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아무도 우리 집을 찾아오지 않는다. 누구나 오기만 하면 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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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은 집안을 얼마나 어지러 놓는지 집에 와도 쉴 수도 없다. 형이 떠나주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Bonafoux 1995). 고호는 예고도 없 이 파리에 나타났던 2년 전처럼 갑자기 파리를 떠나서 아를르로 갔다. 다음날 보낸 편 지에서“원기를 되찾고, 안정감을 회복하고 균형감을 다시 찾을 피난처가 필요했다.

파리에서는 더 이상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곳에서는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 다”고 했다. 결국 고호는 사교적인 사회생활에서 실패한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 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전폭적인 지지자이며 다정한 동생까지도 가 까이에서는 참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4) 아를르 시절(1888년 2월부터 1889년 5월까지;35∼36세)

아를르 시절 190점의 유화를 그렸다. 아를르에서 빈센트는 창작생활의 절정을 이루 지만 고갱과의 갈등 끝에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1988년 2월 20일, 도시생활의 압박감에 지쳐서 남불 아를르로 이사했다. 3월에는 예술가들의 집단생활(colony)을 계획했다. 집단생활(colony)이란 화가들이 각자의 재 산을 내놓고 공동 관리하며 함께 사는 것이다. 기독교의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이다. 현 실감이 없는 낭만적인 계획이었다. 아무도 이 계획에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고 갱만이 아를르에 왔지만 그의 경우는 고호의 의도에 찬성해서라기 보다는 경제적인 이 유가 컸다. 모브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기 그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꽃이 만발한 복 숭아 나무>에다 (모브에게 드림)이라는 글을 써넣었다. 5월에 황색집(yellow house) 을 세로 얻었다. 열광적 제작 생활을 하였다. <해바라기>, <밤의 카페> 등 역사적인 걸 작을 그렸다. <해바라기>는 고갱의 침실을 꾸며주기 위해서 그린 것이었다. 10월 27 일에 고갱(Gaugain)이 도착했다. 고갱은‘태오’가 아를르에서 그린 그의 그림을 후한 값에 사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서 아를르로 고호를 찾아 왔다. 사실 고갱은 병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있을 곳도 없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못견디는 빈센트는 동생 Theo에게“고갱을 저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주어야 겠다”

고 썼다. 고갱이 도착한 후 고갱이 두 사람의 생활을 주도했다. 고갱이 요리도 했고 살 림살에 도사였다. 창녀에게 갈 예산을 포함한 예산도 세웠다.“고갱은 야망보다는 성 욕이 더 강한 사람이다”,“고갱과 나는 자주 창녀촌에 갔다. 그러나 그것은 창녀들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고 고호는 썼다. 한 달만에 두 사람 사이에는 불화가 생기기 시 작했다. 작품에 대한 토론이 과열되어 마찰을 빚었다. 고갱과 논쟁을 끝내고 나면 마 치 방전해버린 건전지처럼 기진맥진해 버린다고 동생에게 고백했다. 고갱이 고호의 초 상화를 그렸을 때는“이것은 틀림없는 나의 초상이다. 그러나 미치광이를 그려놓았 다.”라고 불평했다. 그 당시 고갱은 이미 작품 몇 점을 팔아서 돈이 생겼기 때문에 아 를르를 떠나려고 했었다. 고호는 다시 처절한 고독 속에 남겨지게 되는 것이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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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이 남아주기를 바랬다.“고갱이 사려깊은 결정을 내려주기만을 바랄 뿐이다”고 동생 에게 쓰고 있었다.

- 빈센트가 귀를 자른 사건과 정신질환의 양상

이 편지를 쓴 날 밤 1888년 12월 23일 밤에 두 사람은 몹시 다투었고“너와 같이 산다면 나까지 미치고 말겠다”고 화를 내며 고갱이 나가버린 후에 고호는 밤 11시 30분경에 자신의 귀를 잘라서 종이에 싸가지고 창녀촌으로 가서 고갱의 단골 창녀인 레이첼(Rachel)에게 갖다 주고“잘 간수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우체부 룰랭이 피 를 흘리며 침대에 쓰러져 있는 고호를 발견하고 아를르 시립병원에 입원시켰다. 담당 의사는 레(Rey)였다. 고갱은 병든 친구를 버려두고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일주일 후 지방 신문에 고호의 사건이 실렸다. 의사 레의 진단은 간질이었으나 그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시골 의사여서 의무기록은 부실하고 진단도 애매했다. 증상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고, 피해망상이 있었다. 자신을 때리며 딩구는 행동의 장애도 있었다. 증상은 발작처럼 삽화적으로 왔고 1~2주 만에 끝나면 곧 정상을 회 복하여 창작작업을 시작하였다. 의식의 장애는 없었다(Hemphill 1961). 빈센트의 병 에 대해서는 정신분열증, 조울 정신병, 알콜성 정신병, limbic epilepsy, 납중독증(납이 든 물감을 먹어서) 등 많은 논란이 있으나 적절한 진단명은 없다. 한 인간을 환자로 진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Monroe 1978). 그의 증상들은 가혹한 내적 대상의 투사로 설명할 수 있다. 환청은 내적 대상의 비난의 소리였고, 피해망상도 내적대상의 투사에 의한 것이다. 우울발작과 죄책감 그리고 자해행위도 자기처벌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 빈센트는 왜 귀를 잘랐을까?

reud는 인간의 행동이나 증상도 꿈의 발현몽처럼 낮의 잔재와 무의식적 동기가 숨 어 있어서 분석 가능하다고 했다. 빈센트의 귀 자른 행동은 어떤 낮의 잔재와 무의식 적 동기가 있는 것인가?

(1) 현실적 이유;낮의 잔재(day residues)

문헌에는 귀자른 행동의 뒤에 숨은 낮의 잔재들이 있다.

첫째는, 아를르의 투우가 있다. 투우사가 소를 죽이고 귀를 잘라서 관중 중 한 숙녀 에게 선물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빈센트는 이 의식을 빌려왔다는 것이다(Lubin 1972).

둘째, 당시 그 지방신문에는 창녀의 귀나 몸을 잘라내는 엽기적인 살인자 Jack Ripper의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Lubin 1972). 세째는 성경속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잡으러 온 군인 말고의 귀를 잘랐던 사건을 이용했다. 고호는 1888년 여름 이 장면을 그렸고, 그해 10월에 누이에게 그에 관한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고호는 흥분상태에서 겟세마네 장면을 재현하였고 자신이 희생자와 공격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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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nyan 1982).

(2) 비의식적 동기(unconscious motivation)

첫째는 공격성이 자기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라는(turning against self)주장이다. 귀 를 자를 무렵에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한 가지는 그를 돌보아주던 동생 Theo의 약 혼이었고, 다른 하나는 함께 살던 폴 고갱과 다투었던 일이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한 분 노와 공격 충동이 자신에게로 향하면서 귀를 자른 것으로 보았다(Tralbaut 1969).

둘째는 의존 욕구가 귀자르는 자해행동과 관련되었다는 주장이다. 먼저 태오에 대한 의존욕구이다. 정서적, 경제적으로 의존대상이었으며 늘 자신과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 를 보냈던 동생 Theo가 1888년 휴가때는 새애인의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 해 12월 23일 밤에 고호는 귀를 잘라 Theo를 아를르로 불러들여서 동생이 연인과 시간을 보내지 않고 자신을 돌보게 하였다는 주장이다. 우체부 룰랭 가족에 대한 의존 욕구와 관련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귀를 자를 당시 고호는 룰랭(Roulins)부인을 모델 로 흔들리는 요람속의 아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귀를 자른 직후 그는 룰 랭의 가족의 그림을 8장이나 그렸다. 고호는 자신의 귀를 자름으로써 룰랭(Roulins) 부부의 관심과 돌봄을 받고자 하였고 실제로 귀를 다친후 룰랭(Roulins)씨가 밤새 그 를 간호하였다. 우체부 룰랭은 고독한 아를르 생활 중에 유일하게 친근하게 지냈던 분 이었다. 좋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다른 도시로 전근을 가게 되어 헤 어지게 되었다. 이것도 사랑의 상실감을 주어서 자해행위를 하게 하는데 한 동기가 되 었다는 주장이다(Runyan 1982).

세째는 에디푸스 갈등과 관련되었다는 주장이다. 귀를 자른 것은 자신의 성기를 스 스로 자른 거세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네델란드어로 귀(lel)와 성기(lul)는 한자 만 다르다. 스스로 거세함으로 거세공포증을 해결한 것이다. 더욱이 자른 귀(상징적인 성기)를 고갱의 단골 창녀에게 갖다준 것은 상징적인 아버지의 부인인 상징적인 어머 니에게 성기를 맡기는 행동으로서 에디푸스 갈등을 보여준다는 주장이다(Schneider 1950).

네째는 귀자른 행동을 하나의 원인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동 기들이 관여했을 것이다(overdetermination).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자학 적이고 자기 처벌적인 성격 특성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면의 처벌적 초 자아가 스스로 귀를 자르게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5) 생레미(Saint-Remy) 정신병원 시절(1889년 5월부터 1890년 5월)

1889년(36세) 1월 7일, 빈센트는 퇴원하여 곧 그림 제작을 시작한다.“이빨도 없고 숨도 쉴 수 없을 때, 나는 그림을 발견했다”는 델라크로와(Delacroax)의 말에서 힘을 얻었다. 그러나 2월 초 재발하여 입원한다. 병원에서 <귀를 자른 사나이의 자화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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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렸다. 퇴원하였으나 3월 시민들이 빈센트를 위험한 정신병자로 보고 시장에게 진정 서를 내서 병원에 감금당했다. 빈센트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4월에 동생 태오가 결혼했다. 고호의 희망에 의해서 5월 9일 좀 더 크고 전문 정신병원인 생레미 (Saint-Remy)에 입원했다, 시골이고 시설도 형편이 없는 삭막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 감금되어 지내면서도 빈센트는 <아이리스>, <올리브 밭>, <별이 뜬 밤>,

<측백나무> 등 150점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서 사람의 자취가 사라졌다.

그때의 그림 속에 인물화가 없지 않으나 델라크로와나 렘브란트가 그린 인물을 다시 그린 것들이다. 인간관계가 결핍된 환경의 영향이거나 정신적 공허감이 원인일 것이다.

1890년(37세) 1월, 태오의 아들이 태어났다. 태오는 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 서 빈센트라 지어주었다.‘베르퀴르드 프랑스’신문에 고호에 관한 최초의 평이 알베르 오리에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고호는 기뻐했다. 그러나 수개월 후에는 오리에에게 자 신에 관한 평론을 쓰지 말도록 했다. 남의 평가를 못견디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3 월에는 빈센트가 그린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리다. 그의 생전에 공개된 장소 에서 팔린 유일한 작품이었다.

6) 오베르 시절(1890년 5월부터 7월)

오베르의 2개월 동안 그는 점점 쇠약해지고 결국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3일에 두 점꼴로 8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생레미에서 빈센트는 더 이상 견딜수가 없었다.“이곳 환경이 나를 참을 수 없이 짓 누른다. 사실 나는 일년이 넘도록 참아왔다. 이제 내겐 숨통을 틀 공기가 필요하다. 권 태와 슬픔으로 나는 망가져가고 있다. 참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더 이상 견딜 수가 없 다. 어떻게 해서든지 변화가 필요하다” 그의 증상이 좋아지지 않고 북쪽을 그리워하여 (*고향 네델란드는 아를르의 북쪽이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다.) 파리 근교인 오베르로 이사했다. 그림을 잘 이해하는 의사 가세(Gachet)가 있는 곳이 었다. 5월부터 자살하기까지 약 2개월간 오베르에서 살았다. 오베르에서 산 두달 동안 에 80점의 작품을 그렸다. 6월에 태오 가족이 방문했다. 7월에는 파리에 가서 오리에, 로트렉, 베르나르와 만났다. 7월 27일에 들에서 가슴에 권총을 쏘았다. 고호는 들에서 가슴을 권총으로 쏘아서 자살을 기도했다. 자신의 3층 다락방에 돌아온 고호는 피를 흘리며 혼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총알은 심장 바로 밑에 박혀서 수술할 수가 없었 다.‘태오’에게 연락하려 했으나 고호는 동생의 주소를 알려 하지 않았다. 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을 볼 수 있다. 인편으로 연락을 받은‘태오’는 다음날 낮 에 도착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1890년 7월 29일 새벽 한시 고호는‘태오’ 품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의 나그네길을 마친 것이다.‘태오’에게 보낸 미완성 의 마지막 편지는 “너의 동정 어린 편지와 50프랑 고맙게 받았다. ... 중략 ... 5층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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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제수씨가 아기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 일인지 나는 안다. ... 중략 ... 머리가 맑 지 않다. 그림장사 얘기라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이 되기도 힘들 것 같다. 이런 상 태가 공포를 주지만 숨기고 싶지도 않다. ... 중략 ... 사실 화가들은 장사꾼들과는 사고 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너는 장사꾼은 아니다. 너는 나를 통해서 많은 그림을 그린 셈이다. 네가 혹 파산을 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위로를 찾거라. 이 어려 운 시기에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사실 나는 그림에 내 인생을 걸었고, 지 금은 이성을 반쯤 잃은 지경에 와버렸지만 그래도 너는 장사꾼이 아니었고 나와 같은 화가로서 활동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할꺼나? ”

- 빈센트는 왜 자살했을까?

현실적인 이유도 분명이 있었다. 조카가 병이 들어서 제수씨는 기진맥진했고, 동생 의 월급도 시원치가 않아서 직장을 옮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호에 게 노골적으로 돈을 좀더 절약해 줘야겠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매달 꼬박꼬박 돈을 송 금할 수가 없어서 자살 당시에는 석달이나 돈을 못받고“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 당황하고 있었다. 고호는 생활의 위협을 느꼈다. 용병으로 가볼까도 생각했다. 그러 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불쌍하고 병든 동생의 짐이 되어 있는 현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그는 1879년의 편지;탄광촌에서 돌아와 무위도식하고 있을 때 태오에게 변명삼아한 편지에서 고호는 쓸모없이 의존적인 삶을 살아서 가족들의 짐만 된다면 죽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마음을 쓰고 있다.“어쩌면 요즘 내 모습은 일종 의 태만인지도 모르겠다. ... 만일 내가 너나 가족들에게 괴로움만 주는 존재라면 나 는 스스로를 쓸모없는 자로 느끼고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내가 네가 사는 방식과 다른 방향으로 계속 나간다면 심한 고통이 나를 엄습할 것이 고 절망감에 빠져서 정말 더 이상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을 거야”(The Complete Letters of Vincent Van Gogh 1958). 자살은 빈센트가 예견한 것이었고 그의 자존심 이 결정한 것이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만 이에 덧붙여서 정신분석학의 입장 에서 볼 때는 너그러운 아버지상(父像)인 태오를 상실하고 분노를 느껴서 자살한 것 이라는 설도 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이 분노를 자학적으로 처리하 는 성격특성을 그가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가 케이 보스의 집에서 했던‘손을 램프 불에 넣었던 행동’이나 귀를 자른 행동같은 자학적인 행동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고 했다(Tralbaut 1969;Runyan 1982).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동생의 후원과 도움을 상실한 것이 그의 자살의 중요한 동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귀를 자르는 자해 행동과 두 번의 정신병적 발작은 동생의 약혼, 결혼, 자녀의 출산과 동시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동생을 증오하거나 계수씨를 질투하는 내용은 그의 편지 어디에서도 찾 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병약한 동생을 걱정하고, 계수씨가 5층까지 걸어서 올 라다니며 아이를 키우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림이 잘 안 팔려서 재정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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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워진 동생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용병으로 지원해서 동생의 부담을 덜어줄까도 생각했다. 어느날 동생 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그의 죄책감을 이렇게 쓰고 있다.“돈을 벌려고 갖은 고생을 다하는 너를 생각하면 나 는 차라리 그림을 그만 두고 싶어진단다.... 나는 항상 내 그림이 그것을 위해 치른 댓 가만큼의 가치가 없다는 것 때문에 자책한다(The Complete Letters of Vincent Van Gogh 1958).” 평생을 동생에게 짐이 되어온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죄책감이 그를 자 살로 몰아 갔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내면에 있는 처벌적인 초자아가 그에게 죽음을 강요했다고 보겠다.

2. 빈센트 반 고호의 영광

빈센트가 살아 있을 때는 아무도 그를 찾아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들에 나가 그림을 그리다가 빈 하숙집에 돌아오는 배고프고 고독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그 는 유명해졌고, 그의 그림은 세계의 많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빈센트가 세상을 떠난 6개월 후 동생 태오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태오의 부인 조 안나(Johana)는 지혜로운 여인이어서 남편이 보관하고 있던 빈센트의 그림을 가지고 1905년 전시회를 열었다. 이 때는 별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9년 후인 1914년 전시회 에서부터 빈센트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인상파가 빛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그리는 창작이라면 빈센트의 그림은 자신의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그림이라는 수단을 이용 하여 표현하였다. 그래서 빈센트는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Rewald 1956;

Barrielle 1987). 빈센트를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린 사람은 전기작가인 어빙스톤 (Irving Stone)이었다. 수년간 빈센트의 행적을 추적하고 조사하여 전기소설,‘삶을 위한 정열 Lust for life:A novel of Vincent Van Gogh’를 1935년에 출간하였는데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또 하나 빈센트가 유명하게 된 계기를 만든 사건은 뉴욕 현 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in New York)에서 1936년 개인전을 연 것이었 다. 1958년에는 빈센트의 편지 모음인 서간집 세 권이 출판되었다. 1987년 3월 30일,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빈센트의‘해바라기’가 3,629만 2,500달러(약 370억, 2억 2천만 프랑)에 팔렸다. 이 그림은 고갱도 욕심을 냈으나 빈센트가 주지 않았던 그림이다. 빈센트가 가장 아꼈던 그림들 즉 <침실>,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중의 하나였다. 가난 때문에 커피와 마른 빵으로 며칠씩을 살며, 동생에게 물감이 떨 어졌다고 부탁하면서 미안해 하던 빈센트를 생각하면 이 그림 값은 오히려 그의 가난 을 더욱 드러내게 한다.

3. 빈센트 반 고호의 창작활동과 정신병 발작의 관계

빈센트 반 고호는 약 10년 동안에 1,50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중 유화가 87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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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다. 이 중 463점을 마지막 2년 6개월 동안에 그렸다(Pascal Bonafoux 1995;

Walther 1994;김세중 외 1975). 이 시기는 아를르에서 정신병이 발병하여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갇혀 살았던 1년간과 오베르에서 살던 마지막 2개월을 포함한다. 아를 르에서는 우울발작의 기간을 빼면 이틀에 한 점꼴로 창작을 했으며, 생레미 정신병원 에서는 발작 기간과 그림 금지 기간을 빼면 3일에 두 점꼴로 그렸다. 오베르에서는 2개월간 80점을 그렸다. 매일 한 점 이상을 그린 셈이다. 고독감과 우울이 심해질수 록 그는 더 많은 그림을 그렸다. 예술의 자기위로 기능을 보여 준다(Esman 1951;

Pollock 1978). 그리고 그가 정신분열증 환자라면 이런 창작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 이다.

빈센트는 발작기간 동안은 그림을 그리지 못했고, 발작이 지나가면 창조적이 되었다.

Lubin(1972)은 빈센트의 예술적 성공은 심리적 갈등을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발작후에 고호는 새로운 작품에 대한 영감이 벌떼같 이 밀려온다고 했다.“(발작후 나는) 긴장되고 마음 속에서 새로운 느낌이 올라오며, 작품구상이 벌떼같이 몰려온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과 정 열이 솟아오른다. 작품이 꿈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누이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우리는 모두 다소는 노이로제기가 있다. 그런데 이 노이로제기가 색갈 과 언어에 대한 민감성을 높여 준다.”

빈센트의 내적 갈등과 창조성이 관계가 있었다고 본다. 그의 내면세계를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분석해 본다면;도덕적 아버지(가혹한 초자아)의 압력에 지친 어린 빈센트 가 아버지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자책하고 있다. 내적 긴장이 참을 수 없이 높아졌을 때 발작적으로 우울발작이 왔을 것이다. 자학적이고 피해망상적인 환청과 망상은 내면 에서 들리는 내적 권위자의 비난의 소리를 투사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발작기간 동안 고통스럽지만 그는 이 대상에게 자기 분노와 공격성을 쏟아버리고 발산했던 것 같다. 억눌린 분노와 공격성이 발산되고 나면 어느 정도 갈등과 긴장이 풀리고 정신은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내적 갈등과의 싸움에 소모되고 있던 정신에너지가 풀리고 풍부해져서 자아는 창조적이 된다. 벌떼처럼 창조적인 영감이 몰려왔다는 고호의 글이 이것을 입증해 준다(Pollock 1994)

요 약

Freud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꿈의 발현몽(manifest content)처럼 숨은 낮의 잔재 (day residues)와 무의식적 동기를 갖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예술작품도 예술가의 개인체험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예술가를 욕구의 주체로 보고 그의 욕구와 갈등 이 예술작품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예술가의 작품과 생활사를 분석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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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성격구조를 알 수 있다(Freud 1901).

저자는 화가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1853~1890)의 생활사와 그가 남긴 편지 및 그에 대한 문헌들을 고찰하여 그의 성격특성을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알아 보았다. 그는 청교도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혹한 초자아를 갖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려는 높은 자아이상(ego ideal)을 갖고 살았다. 가혹한 초자아의 요구와 이드 충동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외롭고 가난하게 살다 가 그는 자살로 삶을 끝냈다. 그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이런 갈등의 산물들이었다. 예 컨대 환청(비난하는 내용)이나 피해망상은 가혹한 초자아의 비난을 투사한 것이었고, 우울발작을 일으키고 귀를 자르거나 자살한 자해행위는 스스로 자신을 벌주는 자기처 벌(self punishment)로 보인다. 그의 예술작품들은 내적갈등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기위로(self soothing)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빈센트 반 고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느꼈지만 현실과 타협하는 적응방 식을 거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켜 표현할 수 있었던 위대한 나그네였다(Lubin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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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Psychoanalytic Study on the Life of Vincent Van Gogh

Moo-Suk Lee, M.D., Ph.D.

Freud assumed that all human behavior is motivated by unconsciousness and day- residues as in the manifest contents of dream. He also tried to understand the works of art by understanding the personal experience of the artists. He considered that the artists were the subject of drives and that the drives and the conflicts of the artists were reflected in their works. With this view in mind(in terms of Freudian view), I assume that it is possible to find the personality structure of the artists through the anaylsis of their works.

The current study takes a psychoanalytic approach to appraising the personality of Vincent Van Gogh(1853-1890) based on the analysis on his life history including his letters and paintings. Vincent is considered to have a harsh super-ego under the influence of his father, a Calvinistic preacher who lived a life of a puritan. Vincent possessed the ego ideal of living of the life of Jesus Christ. He lived a miserable and lonely life without finding solution to the conflict between the demand of the harsh superego and id drives. In the end, he killed himself to terminate his life under the burden of the conflict. The psychopathologic symtoms of Vincent Van Gogh were the results of the conflicts. The auditory hallucination and the persecutory delusion are, for example, the projection of the harsh superego incessantly accusing him. His depression and self-mutilation such as cutting his earlobe and killing himself are considered to be a kind of self-punishment. His paintings reveal his inner conflict, and they functioned as a self soother in his troubled mind.

Vincent Van Gogh lived a miserable life with a continued conflict between the ideal and the reality. He lived a life of a great passer-by, however, who sublimated and incorporated his intolerable pain into the great works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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