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역사, 제 2학기 - 제 14주차
외세하의 외세하의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 - 슬라브 슬라브 의식 의식 증대와 증대와 스렘스키 스렘스키 카를로브찌 카를로브찌
조약 조약 - -
제 제
22항 항
. .슬라브 슬라브 의식 의식 증대와 증대와 스렘스키 스렘스키 카를로브찌 카를로브찌 조약 조약
크로아티아에 대한 합스부르그 지배 정책 1.새로운 지배 지역에 대한 지배 체제 확립
-> 행정구역 정비/ 중앙 관료파견/ 귀족 의회 사보르 권한 약화
19세기 반 옐라취치가 크 로아티아 사보르에서 연 설하는 장면
2. 오스만 터키의 공격 대비를 위한 완충지대(buffer zone)구축 ->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경계로 한 강력한 방어선 구축
-> 제국 내로 피신한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남슬라브인 정착촌 형성 (헝가리인들을 관료로 임명)
=> 국경 방어임무/ 종교적 자유(세르비아 정교), 토지개간, 집 과 세제 혜택 등 고도의 자치권 허용
완충지대 구축의 주요 목적 및 배경
A. 국경지대의 황폐와 방지 및 방어진지 구축을 위한 인력 수급 B. 제국내 흩어져 있던 남슬라브인들에 대한 통제 필요성
16세기 당시, 합스부르그 제국 <-> 오스만 터키 상황
: 1529년 제 1차 비엔나 전투에서 슐레이만(Suleiman:
1494-1566)이 이끄는 터키군에 대항해 합스부르그 승리 -> but) 터키는 1526년, 1529년에 이어 1541년 헝가리의 수
도 부다를 점령하는 등 중부 유럽에서 위세
1529년 비엔나 전투 장면 1541년 부다 전투
당시, 유럽은 15세기-16세기말 농민전쟁(크로아티아, 슬 로베니아의 마티아 구베쯔 봉기…)과 종교 전쟁이 16세 기 말에 종결
/ 화포 기술을 비롯한 전쟁 무기 기술을 터키로부터 확보함.
=>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게 됨.
스렘스키 카를로브찌 조약(1699)의 역사적 배경과 결과 : 1683년 오스만 터키의 제 2차 비엔나 포위의 실패
-> 합스부르그 제국이‘진정한 유럽의 수호자’로 인정됨.
(but, 오스만 터키는 이때 이후로 ‘유럽의 병자’로 전락) -> 합스부르그 제국은 크로아티아/ 헝가리의 실질적 지배권 확립 -> 1687년 새로운 기본법 발표
(크로아티아, 헝가리의 모든 지배권이 제국에 있으며 제국 지 배에 대한 저항권 폐지/ 이 모든 영토의 왕위 계승 또한 제국내 가문의 남자에게서 나옴)
1699년, 합스부르그와 오스만 터키간의 스렘스키 카를로브찌 (Sremski Karlovci) 조약 체결
⇒ 양 제국간의 경계선(Vojna granica) 설정
Vojna granica: 18세기 당시, 면적은 18,772 ㎢, 방위군인 graničar 은 최소 25,000에서 10만명 까지 거주.
17세기, 슬라브 의식 증대
:오스만 터키의 위협 약화
=> 합스부르그 제국의 직접 통치 욕구 증대
(서유럽의 프랑스, 영국처럼 강력한 중앙집중 및 중상주의 정책 을 추진)
but)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인, 헝가리 귀족들은 보다 많은 자치권 확보를 추진
크로아티아에선 1663년 즈린스키 형제와 프란코빤 봉기로 이어짐 => 1671년 봉기 실패
즈린스키 형제와 프란코빤 봉기의 역사적 의미
: 봉기의 동기는 자신들의 경제권과 토지 확보를 위한 고유책.
-> but) 보이나 그라니짜내에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안간의 문화적 정체성 연대 가능성과 인식 확대를 보여줌.
=> 훗날, 류데비트 가이와 부크 카라쥐치 간의 언어적 통합 운동 에 영향을 미침. (슬라브 민족 통합의 의식 증대)
니콜라 즈린스키 / 프란 프란코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