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18.27.3.043
여말선초 목조건축 부재 묵서명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Mookseo-myeong Written at the Wooden Building Members in the Late Period of Goryeo and the Early Period of Joseon Dynasty
서 치 상*1) Seo, Chi-Sang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Abstract
This paper aims at researching on the substantial characters of the memorial address, namely the mookseo-myeongs(墨書銘), written at the members of the wooden buildings in the late period of Goryeo Dynasty and the early period of JoseonDynasty. In this paper, I pursued to declare the systematic origins by the comparison the Buddhist buildings with the other buildings, on the focused the written patterns. Furthermore, I tried to examine the transitional trends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The results are as follow:
First, it is supposed that the mookseo-myeongs of the Buddhist buildings were not used for the a memorial address for the ceremony of putting up the ridge beam, so to speak the sangryang-muns(上樑文), but the prayer address(發願文) to memorize the donations of the believers for the constructions.
Second, it is supposed that ‘the short sangryang-muns’ were originated in the mookseo-myeongs of Buddhist buildings and the other ancient prayer address. In the late period of JoseonDynasty, those were established in the formal literary styles.
Third, to the early period of JoseonDynasty, ‘the long sangryang-muns’ were partially used in the several royal palaces. In the late, those were widely used not only in the royal palaces but also in Buddhist buildings, but those literary patterns were rarely changed from the former types.
주제어 : 여말선초, 불교건축, 묵서명, 짧은 상량문, 긴 상량문, 발원문
Keywords: Late period of Goryeo Dynasty and early period of Joseon Dynasty, Buddhist buildings, Mookseo-myeong, Short sangryang-mun, Long sangryang-mun, Prayer address
1. 머리말
여말선초 목조건축의 해체수리 때 종도리 등 여러 부 재에서 묵서명(墨書銘)들이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확인 된 바로, 예산 수덕사 대웅전(1308)을 비롯한 6개의 불 교건축 20건, 서울 남대문(1396) 등 3개의 일반건축 12 건 등 9개 건물의 32건이다.1) 글자 수는 10여 자에서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이 논문은 부산대학교 기본연구지원사업(2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1) 아직 소개되지 않은 탓에 확인하지 못한 것들도 있을 것이다. 여 기서는 『韓國古建築上樑記文集』(考古美術同人會, 1964) 등에 수록 된 사례를 중심으로 검토한다. 또 일반건축이라 함은 편의상 서울 남대문, 온양 맹씨행단, 영주 소수서원 등 세 건물을 묶어 불교건축 과 대별하는 뜻에서 사용한다.
수 백 자까지 다양한데, 주로 공사일자와 관계자이름이 적혀 있다. 여기에다 불교건축 몇 건에는 원문(願文)이 들어 있고, 일반건축 1건은 5백여 자의 완전한 상량문 형식이다. 어떻든 건립연대의 확정 뿐 아니라 공사내용 과 공역활동 등 건축사 연구나 문화재의 가치 판별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예외가 없다.
묵서명들의 문장이나 묵서된 부재만 보면 상량 때 마 룻대에 적는 상량문과 흡사하다. 실제로 불교건축의 몇 건은 상량마룻대인 종도리나 종도리받침장혀에 입주․
상량일자와 관계자이름만 있어서 후대의 ‘짧은 상량문’
을 연상케 한다. 특히 일반건축 사례들은 모두 상량 때 의 글인 데다, 서울 남대문 묵서명 중 1건은 고려 이래
로 주요 건물에 사용되던 ‘긴 상량문’2) 형식의 글이다.
그래선지 학계에서는 여말선초의 목조건축 묵서명을 모두 상량문으로 취급한다.3) 또 후대의 ‘짧은 상량문’을
‘긴 상량문’이 크게 축약,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4) 그 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불교 건축 묵서명들 중에 상량문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많 다. 상량 외에도 지정․입주․제와․단청에 관한 글들이 다. 묵서부재도 종도리나 종도리받침장혀 외에 상량 전 이나 후에 결구되는 창방과 화반 등으로 다양하다. 문장 도 ‘긴 상량문’의 4․6언 대구(對句)식 변려체(騈儷體) 가 아니라 불교경전이나 회향문(廻向文)을 인용한 평서 체로 오히려 ‘짧은 상량문’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건축 묵서명은『시경』이나『예기』에 뿌 리를 둔 ‘긴 상량문’과는 계통이 달랐음이 분명하다. 오 히려 여러 공정에 걸쳐 공사일자와 관계자이름 또는 원 문을 적은 데서 상량의례의 도입 전부터 불교계에서 불 상이나 불화의 조성, 사리장엄 때 적는 발원문의 하나이 며, 일반에서 이를 따라 ‘짧은 상량문’으로 사용했을 가 능성이 크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긴 상량문’은 고려 궁 실건축 5건과 조선 전기의 서울 남대문 1건 등 모두 6 건에 불과하고, 불교건축에 사용된 예는 전무하다. 그나 마 17세기 후반부터나 ‘긴 상량문’을 사용했지만, 종전의 부재 묵서명도 함께 사용했다.5) 지금도 기왓장이나 목 부재 등에 시주자 이름을 적듯이 그런 관행은 남아 있 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한편 서울 남대문의 나머지 9건과 맹씨행단 안채, 소 수서원 강당의 2건 등 일반건축 묵서명에는 입주․상량 일자와 관계자이름 또는 공사배경만 적혀 있다. 후대의
‘짧은 상량문’과 비교하면, 상․하에 제액방지문자로 적 2) 한문학계에서는 수 백자에 걸쳐 序詞, 本詞, 六偉頌, 結詞 등의 네 단락을 갖추고, 4․6언 대구식의 변려체를 사용하며, 전고와 전 아의 멋을 최대한 갖추는 것을 ‘긴 상량문’으로 명명한다. 반면에 수 십여 자로 입주․상량일시만 적은 것을 ‘짧은 상량문’으로 명명 하는데, 본 연구도 이러한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현존 목조건물에서 발견된 가 장 오래된 상량문은 도리 바닥에 묵서된 부석사 무량수전의 고려 말 것’이라 했고, 또 이를 기정사실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여 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먼저 무량수전의 고려 때 묵서명은 만력 40년(1612)의 서까래 수리 때 건물의 배면 서북우 공포와 전 면 서북우 부재에 적은 두 건이다. 여기에 홍무 9년(1376)의 개건 사실을 옮겨 적었는데, 이를 당시 공사로 오인한 것 같다. 오히려 같은 경내에 있는 부석사 조사당의 장혀 하단 묵서명(1377)이 훨씬 앞선다. 예전 기록을 당시 것으로 오인했거나 조사당을 무량수전으 로 혼동한 것 같다. 또 현재로서 가장 오래된 묵서명은 1308년의 수덕사 대웅전 장혀 하단에 적힌 것이다.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5) 이에 대해서는 서치상, 「佛敎建築 上樑文 硏究」(2015년 제2차 한국건축세미나 자료집, 2015. 6, 31~73쪽) 등에서 참고된다.
는 용(龍)․구(龜)자가 없다. 불교건축 묵서명과 형식은 같지만 상량 때의 글인 점이 다르다. 어떻든 초시적인
‘짧은 상량문’이 분명하지만, 고려 때까지 일반건축의 사 례는 전무하고, 불교건축 사례는 대단히 많다. ‘짧은 상 량문’이 ‘긴 상량문’을 축약,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불교계에서 사용하던 발원문에 뿌리를 두고 있 었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말선초 목조건축 부재 묵서명들에 대 한 비교, 분석을 통해서 그 실체적 성격을 밝히는 한편, 후대의 상량문으로 이어지는 계통적 흐름을 규명할 필 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본 연구는 여말선초 목조건축 부 재 묵서명의 사례별 묵서형태와 내용, 문체형식 등을 살 펴보고, 이어서 불교건축과 일반건축 간의 공통점과 차 이점을 비교, 검토한다. 나아가서 여타 유형의 기문이나 명문과의 친연성(親緣性)을 대조함으로써 각기의 계통 적 원류를 규명하는 한편, 그 변천적 흐름을 규명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주제 에 대해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묵서명이 어떤 공정 때의 글이고, 어떤 부재에 적혔는지 등의 묵서형태를 분석한다. 이는 불교건축 묵 서명 중에서 지정․입주․제와․단청에 관한 내용이거 나, 상량마룻대 외에 적혀 있는 경우는 상량문으로 보기 어렵고, 나아가서는 불교계 특유의 묵서목적과 조영의례 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둘째, 묵서명의 문장구성과 내용, 문체형식 등을 비교, 검토한다. 특히 공사일자와 관계자만으로 된 불교건축 묵서명과 ‘짧은 상량문’의 계통적 유사성을 검토한다. 이 를 바탕으로 ‘긴 상량문’이 고려 궁실건축과 조선 전기 서울 남대문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불교건축은 전무한 것을 근거로 ‘짧은 상량문’의 기원을 유추한다.
이는 ‘짧은 상량문’이 ‘긴 상량문’을 축약,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불교계에서 사용되던 여러 유형의 묵서명에 뿌리들 두고 있음을 방증하는 근거가 된다.
셋째, 묵서명과 비슷한 시기의 여타 기문이나 명문과 의 친연성을 비교, 검토한다. 특히 불교건축 묵서명이 오래 전부터 탑 사리장엄이나 불화, 불상 등의 조성 때 적는 발원문과의 친연성을 검토한다. 이는 불교건축 묵 서명이 오래 전부터 불교계에서 사용되어 온 발원문의 하나였음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넷째, 17세기 후반부터 불교건축에서 종전의 부재 묵 서명 대신 사용하기 시작한 ‘긴 상량문’의 문장 구성과 내용, 문체형식 등을 검토한다. 이는 일반건축의 ‘긴 상
그림 1. 수덕사 대웅전(1308)의 화반 묵서명(杉山信三,『韓國の中世建築』, 相模書房, 1944, 도판)
그림 2. 수덕사 대웅전(1308)의 첨차 하단 묵서명(문화재청) 량문’과의 차이점 및 불교계가 ‘긴 상량문’을 수용하게
된 배경을 규명하는 근거가 된다.
본 연구는 여말선초 목조건축 부재 묵서명의 묵서형 태와 문장형식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그 실체적 성격을 규명하는 한편, 불교건축과 일반건축의 묵서명이 각기 다른 원류에서 발전되었음을 근거로 그 계통적 흐름을 밝히는 데 의의가 있다.
2. 부재 묵서명의 사례
2-1. 불교건축의 묵서명① 예산 수덕사 대웅전 묵서명(1308)
1937〜1940년의 수리 때 화반, 첨차, 계풍6) 등에서 5건 이 발견되었다. 그 중의 2건은 건립으로부터 한참 뒤인 1751년과 1803년의
글이므로 논의에서 제외한다. 먼저 화 반 하단에서는 38 자만 채록되었는데, 첫머리에 지대(至 大) 원년 무신 (1308) 4월 24일 수덕사 조성 때의 중목(衆目)7)을 초 기하면서, 대동량 효가화상( 曉 假 和 尙), ○○ 1명, 동
원 2명의 이름을 적었다.8) 이하 결락부에는 시주자나 승 려들의 이름을 적었던 듯하다.
첨차 하단에서는 28자가 채록되었는데, 첫머리에 대동 량과 동원, 도대목인 대지유(大指楡)를 각기 1명씩 적 고, 지대 원년 무신(충렬왕 34년, 1308) 4월 17일에 입 주했다고 적었다.9) 입주에 관한 글이지만 기둥이 아닌
6) 긴 부재에 단청할 때 머리초의 쇠첩먹당기에서 중간부의 재면 상하에 장획긋기한 사이를 말한다.
7) 『韓國古建築上樑記文集』에서 ‘象目’으로 적었는데, ‘衆目’의 오 기이다. 여러 事目의 抄記, 즉 佛事에 관한 사항 중에서 중요한 것 을 뽑아 적는다는 뜻이다.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69쪽) 8) “至大元年戊申四月卄四日修德寺造成衆目抄記 大棟梁曉假○○朴 仁璉 同願天白 同願英淑 (以下略)”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69쪽;
杉山信三, 『韓國の中世建築』, 相模書房, 1944, 253쪽 및 도판) 그런데 중수공사 때 쓰기야마 노부조오(杉山信三)가 ‘大棟梁朴仁 璉, 同願天白, 同願英淑’으로 잘못 채록한 것이 이후의 『韓國古建 築上樑記文集』등에서도 그대로 전재되고 있다. 실제 사진에는 ‘大 棟梁曉假 ○○朴仁璉, 同願天白, 同願英淑’으로 판독되므로 바로 잡 을 필요가 있다.
다른 부재에 적혀 있어서 작성시점이 불분명하다. 이하 결락부에는 시주자나 승려들 이름을 적었던 듯하다.
하중도리 계풍에 적힌 글은 195자의 글로 전문이 채 록된 듯하다. 첫머리에 ‘경자년(미상)의 개채 단청이 무 자년(1528)에 이르러 무색(無色)이 되었다. 가정(嘉靖) 7 년(1528) 무자 4월 축일(祝日)에 법당의 단청을 시작했 다’에 이어 여러 명의 단청화원․시주자․공양주 이름을 적고, 간략한 축수 원문, 1308년의 효가화상에 의한 중창 때의 대동량 2명의 이름에 이어 무자년(1528)의 단청일 자와 화원, 시주자, 공양주 등의 이름을 적었다.10) 간략 한 원문과 함께 1308년 중창 때의 일을 이서(移書)한 것 이다.
② 봉정사 극락전 묵서명(1363)
1972〜1975년의 해체․복원 때 종도리 밑면에서 전문 67자의 1건이 발견되었다. 첫머리에 ‘지정(至正) 23년 (공양왕 12, 1363) 3월 개개 중수했다’에 이어 시주 1명, 동원동량 1명, 공장을 뜻하는 지유(指楡) 1명, 상사(上 師) 6명, 공양주 1명, 수좌, 대목 등 모두 13명의 관계자 이름을 적었다.11) 지붕 수리 때 적은 글인 듯하다.
③ 부석사 조사당 묵서명(1377, 1488, 1490, 1573) 1916년의 수리 때 장혀와 도리 상단 등 4곳에서 각기 다른 시기의 4건이 발견되었다. 먼저 장혀 상단의 534자 는 전문인 듯한데, ‘머리 숙여 삼가 귀의합니다(稽首歸 命)’로 시작하는 154자의 원문에는 선왕과 왕비 등 왕실 9) 杉山信三은 ‘肘木下端の銘’이라 했다. 흔히 일본건축에서 ‘肘木(히 지키)’은 첨차를 지칭하지만, 신영훈은 ‘장혀 하단’으로 역주했으므로 이를 따르고자 한다. (杉山信三, 앞의 책, 254쪽; 考古美術同人會, 앞 의 책, 69쪽)
10) “庚子年丹靑改色至戊子○無色耳 嘉靖七年戊子四月祝日始法堂丹 靑畵員 ○道行修法正月○印全…志誾心月善熙施主信中布施大化主一 禪…寫念 供養主道○戒斤 金源信海裵文柱/祝壽千○萬○年生 後生發 願文 曉假和尙修生同願重創大棟梁之祖堪然朴仁璉 ○○七年戊子○
○丹靑○色○四月日始至五月○日○色丹靑畵員 ○○法正行修○○月
○○○○○心月善熙○○ 大化主 信中 ○○○ 化主 一禪 ○○○○
寫念 ○○○○信 供養主 戒斤道○○○○○○○○○善熙” (문화재 청, 『중요목조문화재 단청기록화 정밀조사-예산 수덕사 대웅전』, 2014, 89쪽)
11) “至正二十三年癸卯三月 日 改盖重修 施主中郞將 李深 同願棟樑 義琳 造成衆目 指楡戒岑 上師眞哲 權連 惠因 戒弘 淸戒 達心 供養 主◯◯ 首坐六閑 鑑院善見 大木宏介” (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鳳停寺 極樂殿 宗道里 墨書銘」,『鳳停寺 極樂殿 修理工事報告 書』, 1992, 52쪽)
인물을 비롯해서 모든 중생의 극락왕생과 성불, 부처의 가호을 비는 내용을 적었다. 이어서 선광(宣光) 7년 정 사(우왕 3, 1377) 5월 초3일 입주했으며, 시주질, 연화 질, 사중질 순으로 58명의 관계자이름을 적었다.12)
그림 3. 부석사 조사당의 장혀 상단 묵서명(1337, 문화재청) 도리 하단에 적힌 3건 중의 첫째 글은 「조사당중수 기」란 제목의 전문 138자로, 시주질․연화질․사중질 을 나열하고, 끝에 ‘홍치(洪治) 3년(성종 21, 1490) 경술 4월 17일 기록한다’13)고 적었다. 둘째 글은 39자로, 승 안(承安) 원년 임자(신종 5년, 1202) 3월 개채(開彩), 홍 치 6년(성종 24년, 1493) 개채한 사실에 이어 서화원(書 畵員) 2명과 화주 2명의 이름을 적었다. 1493년의 단청 때 1202년 단청한 사실을 이서한 것이다.14) 또 셋째 글 은 185자로, 첫머리에 만력(萬曆) 원년 계유(선조 6년, 1573) 2월에 갱연한 사실에 이어서 시주질․연화질․사 중질 순으로 38명의 관계자이름을 적었다.15)
12) “稽首歸命十方法界三寶之願我世世生生四生法王○○童眞出○遍遊 佛刹相隨供養願供法界天上人間先王帝王后妃諸王宗室上中下輩一切有 情地獄中陰畜生修羅各各諸輩等同成佛願我未登解脫者同受發願得生天 上及還生人間敬信三寶弘揚正法一切有情同生安養見佛聞法得悟无生法 忍各各還度衆生究竟解脫願以此功德普及於一切我等與衆生皆供成佛道 宣光七年丁巳五月初三日立柱 大施主寺住持國師圓應尊者雲山和尙同願 施主貞信翁主李氏大木禪師心鏡行衆達然自松海名佛惠普態天如寺在大衆 禪師行正禪師達因禪師信友首座信己禪師達根首座智識法玄智識惠直智識 惠淸觀芬智識信能道者彌道者行道者敬道者未道者念道者齊上道厶全房子 三因三剛色堂都監卜山副都監一山道者引孚道者信受道者法僧道者義圓道 者文生入室大德玉山住持智下鉅住持禪圭蘭若住持道兼法要住持惠祥佛岩 住持信○住禪住持信厸待者信安待者乳赤色掌院花岩住持定桓邇監惠晶大 維那智識思黑祖師改畵員禪師義厸禪師厸道者覺伊寺內下典色掌等椋公卜 重城上未應副監禾三常尺都監上公維生親侍金龍夫介”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09쪽)
13) “祖師堂重修記 大施主李玉兩主 大施主崔乙京兩主 同願施主金母 和 釘施主鄭南兩主 林近伊 金春同 今○ 金之伊 張去伊 朴順 李金伊 金莫同 林自○ 李之○ 李乙伊 合有禮 大木 禪師 月炭 行采 乃元 彐 正 供養主 一禪 義出 了義 乃識 持寺 大禪師 云修 結願香徒禹加伊 李元伊 孫生伊壽 大化主戒云 化主 彐正 丹生化主 性淡 弘治三年庚 戌四月十七日記”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12쪽)
14) “前開彩承安元年壬子三月 日 後開彩弘治六年四月 日書畵員禪師 義戒 惠淸 化主戒云 一禪”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13쪽)
건립연대가 1377년인데 承安 6년의 前開彩는 연대의 모순인지 아 니면 건립연대의 재고가 필요함.
15) “萬曆元年癸酉二月 日更椽記錄 施主幼學 黃德基兩位 幼學 安宅 兩位 大施主 金大臣兩主 鄭承祥兩主 安萬根兩主 大施主 林健兩主 朴石崇兩主 金莫同兩主 安世孫兩主 金八同兩主 崔每邑同兩 安逸孫 兩主 黃加伊同兩 同月保體 木手秩 大木 佛明比丘 副木 圓空比丘 惠
④ 도갑사 해탈문 묵서명(1473)
1957년의 수리 때 종도리받침장혀 윗면에서 발견된 119자의 전문이다. 첫머리에 ‘성화(成化) 9년(성종 4년, 1473) 5월 초7일 입주․상량’에 이어서 대공덕주 대왕대 비 이하 왕실인물의 축수 원문․시주질․연화질․사중 질 순으로 관계자 15명의 이름을 적었다.16) 대시주는 세조 때 왕사를 지낸 수미(守眉)이고, 대목은 대선사 각 여(覺如), 그리고 행중, 화주 등 여러 관계자이름을 적 었다. 종도리받침장혀에 입주․상량일자가 적혀 있어서 상량 때의 글인 듯하다.
⑤ 개심사 대웅전 묵서명(1484)
1941년의 수리 때 어칸 종도리 받침장혀에서 발견된 1건으로, 56자만 채록되었다. ‘성화 30년(성종 15년, 1484)17) 6월 20일 중창’에 이어 대목․공양시주․화 주․철화주․부연화주․성조화주 등의 이름을 적어나가 다가18) 그 이하는 생략했는데, 아마도 시주자 등의 이름 을 적었을 것이다. 부재의 위치나 ‘중창’으로 적은 데서 상량 때의 글로 보인다.
⑥ 성불사 응진전 묵서명(1530)
1912년에 수리 때 창방 하단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 12건으로, 1530년 공사 때의 여러 공정에 걸쳐 적은 글 들이다. 공사일자가 적힌 7건 중에서 후면 남측 6칸 째 창방 하단에 적인 46자의 글은 ‘태정(泰定) 274년19) 즉, 가정 9년(1530, 중종 25년) 2월 16일 착공해서 그해 5월 초10일 입주하고, 27일 상량’에 이어 대목․부대목 등 연화질 3명의 관계자이름을 적었다.20)
후면 남측 6칸 째 창방 상단의 37자에는 ‘태정 274년
明比丘 印冏比丘 大施主 戒旭比丘 大施主 智玄比丘 雪淳比丘 雪淸 比丘 禪德 性寬 前維那六行 信實 玄源 前維那 圓悟 社主 玉遲 思湜 寶敬 學齡 熙尙 供養主 弘識 大化主 智○ 彩熙 彦享 畵員 雪翁”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13~115쪽)
16) “成化九年癸巳五月初七日立柱上樑 大功德主 大王大妃殿下壽萬 歲 王大妃殿下壽萬歲 因壽王妃殿下壽萬歲 王上殿下壽萬歲 王妃殿下 壽諸年 王師判禪宗旺一都大禪師 守眉 兼大施主 兼都大木 大禪師覺 如 嗣(副)大木 大禪師義明 行衆 海明 省明 祖明 海宗 大化主 大禪 師 持寺洪月 書記入選 鷲資”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83쪽) 17) 成化三十年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成化二十年의 오기로 보인다.
18) “成化三十年甲辰六月二十日 瑞山地象王山開心重創 大木 學○○
○○山守○○ 供養施主 朴連○○道○…釘化主靖明...不明...化主 同 浮椽○主准堂 (汸)春 学禪 成造化主○○”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71쪽)
19) 元나라 晋宗의 연호인 泰定 원년은 忠肅王 11년(1324)으로 274 년 후는 宣祖 31년(1598)이므로 嘉靖 9년(中宗 25년, 1530)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오기로 보인다.
20) “泰定二百七十四年 嘉靖九年庚寅二月十六日始叱 五月初十日立 柱 又二十七日上樑 大木 賢事 扶大木 一云 古多”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72쪽)
건물명 연도 묵서 부재 공정명 채록 글자수
일 내용
자 원
문 관계자
시주질 연화질 사중질 명수
수덕사대웅전 1308 화반 하단 조성 38 ○ × ○ × × 4
″ 장혀 하단 입주 28 ○ × ○ ○ × -
1528 하중도리 계풍 단청 195 ○ ○ ○ ○ ○ 20
봉정사극락전 1363 종도리 하단 개개 67 ○ × ○ ○ ○ 13
부석사조사당
1377 장혀 상단 입주 534 ○ ○ ○ ○ ○ 58
1490 도리 하단 중수 138 ○ × ○ ○ ○ 31
1493 ″ 단청 39 ○ × × ○ × 4
1573 ″ 갱연 185 ○ × ○ ○ ○ 38
도갑사해탈문 1473 종도리 받침장혀 입주 상량 119 ○ ○ ○ ○ ○ 15
개심사대웅전 1484 ″ 중창 56 ○ × ○ ○ ○ 20
성불사응진전
1530 후면 남측 6째칸 창방 하단 입주 상량 46 ○ × × ○ × 3
″ 후면 남측 6째칸 창방 상단 입주 37 ○ × × × × -
″ 중앙칸 창방 하단 입주 상량 313 ○ × × ○ ○ 92
″ 중앙칸 도리 하단 ″ 783 ○ ○ ○ ○ ○ 160
″ 전면 남측 3째칸 도리 하단 와요조성 368 ○ ○ ○ ○ ○ 69
″ 정면 중앙칸 우측 초석상면 지정 13 ○ × × × × -
″ 정면 중앙칸 좌측 초석상면 ″ 16 ○ × × ○ × 1
미상 초중 홍량 받침장혀 상단 단청 9 × × × ○ × 18
″ 종도리 받침장혀 상단 미상 6 × × × ○ × 10
″ 전면 남측 1째칸 화반 ″ 10 × × ○ × × 1
표 1. 불교건축 묵서명의 형태와 내용
(1530)에 옛 건물을 중창했고, 가정 9년(중종 25년, 1530) 2월 15일 시작해서 5월 초10일 입주’라고 적었는 데, 그 이하는 채록되지 않았다.21)
후면 중앙칸 창방 하단의 313자에는 ‘태정 4년(1327, 충숙왕 14년)에 중창했고, 274년 후22)인 가정 9년(1530, 중종 25년)의 중창은 2월 16일 시작해서 5월 초10일 입 주, 27일 상량’이라 한 다음 연화질․화주질․사중질 순 으로 적었다.23) 3건 모두 입주 상량한 일자를 적은 탓 에 상량 때의 글인 듯하다.
그리고 정면 중앙칸 도리 하단의 783자는, 응진전의 입주 상량한 일자에 이어 원문과 함께 원당주 파원부원 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如弼, 1466-1555), 내금위나
21) “泰定二百七十四年 古開重創 嘉靖九年庚寅二月十五日始叱 五月 初十日立柱 泰定二百四”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72쪽)
22) 햇수를 잘못 산정한 듯하다.
23) “泰定四年丁卯重創 年數二百七十四年 嘉靖九年庚寅開重創 二月 十六日始叱 五月初十日立柱 又二十七日上樑 大木賢事 扶大木達凞 智行 大木主智坦 大木主學能 大木主智性 大木主學全 大木主 玲峻 大木主學根 大木主化主秩 供養大化主六行 材木化主學敏 初衣祿印 熙 立柱智眞 上樑玄覺 供養主智現 熟頭法林 院頭惠訔 宋印熙畢書 先〇秩 三十人畢執道熙 三寶衆目 禪宗大禪師玉蟾 校(敎)宗大禪師信 晶 老德 信浩 志浩 志勤 能岐 惠超 法主秩 祖敏 壽眉 戒黙 學田 法岐 仅惠 又法岐 智敏 八解 性淡 學全 性玉 智正 勝贊 信中 过中 黙熙 祖觀 八〇 道逢 〇熙 印千 玄熙 一行 能〇 智玄 信玲 元宗 省敏 智玄 了仁 克林 玉禪 〇輝 敏熙 祖熙 法見 又祖熙 致云 彐玉 性岑 天鑑 省云 天月 性熙 省玄 道千 垣黙 處峯 法崇 性見 寶訔 惠黙 祖心 覺明 性〇 幸者 〇仁 〇內 〇石 致元 文石 石巾 勝旨 戒尙”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73~174쪽)
상호장 등의 이름을 적었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 王后)의 부친인 윤여필 주도로 중창 때 적은 글이다.24)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제와․지정․단청 때의 글이다.
24) “聖殿〇〇〇〇 〇〇正月二十〇〇 〇〇月初四日立柱 〇月初四日 上樑〇〇 年腐敗潰落 嘉靖〇年庚寅二月十八日 山下始初 三月二十 八日 鳳頭菴山下終役 四月初一日大寺〇役 四月初六日羅漢移陪 同 月十六日破屋 五月初十日立柱 同月二十七日上樑 願堂主 坡原府院 君 尹如弼 勉力重創 內禁衛 金世榮 上戶長 李成武 前戶長 韓戒臣 李房 姜贊 寺內隋喜 衆目 前重奧住持 玉蟾 前重奧住持 信晶 參學 道禪 法師 祖敏 法師 戒熙 法師 義瓊 法師 敬修 法師 法峻 畵員 智訔 畵員 義惠 畵員 承贊 首座 能俊 首座 一禪 首座 首眉 咽導 智敏 咽導 學敏 咽導 道逢 咽導 性熙 咽導 八解 社主 志勤 社主 處峯 僧堂持寺 志浩 老德 信浩 老德 性通 惠超 學全 性玉 冏月 法 峻 冏重 信中 玉禪 淸雲 省敏 玉衍 處元 道熙 敬暉 性見 處林 法 宗 黙熙 祖觀 天月 印熙 祖熙 八〇 覺明 能惠 一行 坦黙 玄黙 冏 岑 惠黙 信玄 天鑑 性談 敏熙 敬熙 玄熙 智現 供養大施主 林大山 兩主 大施主 孝養 大施主 李〇兩主 大施主 欣非 大施主 比丘智凝 大施主 比丘智敏 大施主 比丘學田 施主 芿叱德 施主 比丘志冏 施 主 比丘靑雲 上樑大施主 金永信兩主 大施主 金哲兩主 大施主 金〇
〇兩主 大施主 洪鳳章兩主 大施主 張順兩主 大施主 李三福兩主 立 柱大施主 鄭香同兩主 大施主 金自致兩主 大施主 內〇技 大施主 李 德山兩主 大施主 李無金兩主 大施主 申末〇兩主 大施主 李達〇兩 主 施主 車順兩主 材木大施主 比丘義惠 大施主 朴貴〇兩主 大施主 比丘法崇 大施主 李莫山兩主 大施主 比丘智敏 初衣綠大施主 朴內 氏 施主 李世昆 大木秩 大木 玄思 副木 一雲 行副木 達熙 智行 智 坦 學能 智聖 學全 合峻 學根 飯頭 智玄 熟頭 法林 圓頭 惠訔 供 養大化主 六行 材木大化主 學敏 上樑大化主 玄覺 立柱大化主 智眞 立柱大化〇 談月 初衣綠化主 印熙 化主上座秩 供養 玄㣬 上樑 祖 熙 敏熙 立柱 法記 鐵釘化主 處仁 大匠 安寶安 同年 瓦窯大施主 金未貞兩主 大施主 比丘學田 朴成同 洪義尙 冏峻 瓦窯主慰秩 上手 戒先 副 玉順 副 信寬 惠峻 敬淳 性每 一悟 性訔 性超 飯頭 衍熙 供養化主 特超 上座 靈化 漢貞 布施化主过主 同願隨喜施主 今生無 病長生 後世同生安養 見佛聞法 同生極樂之願 以不朽之緣 幸幸甚 甚”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75~180쪽)
그림 4. 성불사 응진전(1530)의 초석 상 면 묵서명. ‘庚寅年四月十九日廿日至地 正’로 적었다.(문화재청)
그 중에서 전면 남측 3칸 째 도리 하단의 368자는, 첫머 리에 ‘가정 9년(중종 25년, 1530) 경인 와요(瓦窯)조성’이 라 적었다. 이어
서 시공질․시 주질․연화질․
사중질 순의 관 계자이름을 나 열하고, 경인년 2월 27일 ○○
5월 22일 완공 했으며, 불법의 가호를 비는 원 문에 이어 재차
시주자 등의 이름을 적었다. 와요 조성에 관한 내용으로 원문이 포함된 특이한 사례이다.25)
또 지정 때의 2건은 정면 중앙칸 우측 초석과 정면 어칸 좌측 초석의 상단에 각기 1건씩 적었다. 첫째 글은 13자로, ‘경인년(중종 25년, 1530) 4월 20일 지정에 이르 렀다’ 했고,26) 둘째 글은 16자로, ‘가정 9년(중종 25년, 1530) ○월 20일 지○(정)’에 이어, 대목 1명을 적었 다.27) 초석에 적혀 있는 만큼 정초 때의 글인 듯하다.
이 밖에도 초중홍량 받침장혀 하단, 마루도리 받침장 혀 상단, 전면 남측에서 첫째 칸 화반에도 각기 9자28), 6자29), 10자30)가 적혀 있다. 모두 공사일자가 없고, 화 원․대목․동원시주 등의 이름만 적었는데, 기술자의 직 명으로 보면 단청 때의 글인 듯하다.
25) “嘉靖九年庚寅 瓦窯造成 施工秩 大施主 前重興住持 大禪師 玉蟾 施主 玉淳 法峻 智敏 覺明 學田 法峻 祖敏 信浩 坦儀 洞仙上戶長 金 末貞兩主 金孫兩主 張致○兩主 李氏朴今 吳春兩主 吳界○兩主 法連兩 主 朴主張兩主 內○氏 召吏 朴貴存兩主 吳蒙古之兩主 吳敬○兩主 大 施主秩 平安道龍崗東面多尾 兪實中兩主 吳价山兩主 金達○兩主 許挨 孫兩主 金孝成兩主 吳剋敏兩主 金仲同兩主 兪千孫兩主 座首 金允甫兩 主 咸從鹽大施主 李孟枝兩主 瑞興 李永孫兩主 瓦窯化主秩 大施主 性 超 布施化主 卞中 主匠秩 上手 戒禪 副手 玉淳 邊手 信寬 乾瓦 惠峻 行伴 敬淳 性梅 性訔 性超 一悟 供養主 衍禧 熟顧 靈峻 漢貞 庚寅二 月廿七日 ○○ 五月廿二日 畢終 願成化主 隨喜施主等 同○淸淨妙土 華藏界中 永不退轉 親聞舍那之園 昔歲歲○道 廣濟渡來 群生之願 大匠 施主秩 安莫道 金末乙同兩主 田貴石兩主 金貴同兩主 孫莫山 金巨叱金 金吾音山 金順良 李玉順 鄭岩廻 禹仲孫 金聖同 先輩 孫致義 姜叔伊 張世旺 鄭柱元 鄭升石”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81~183쪽) 26) “庚寅年四月十九日廿日 至地正”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71쪽) 27) “嘉靖九〇〇〇〇〇廿日地〇 大木〇〇”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71쪽)
28) “畵員十五名色○三名”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84쪽) 29) “付本故大木十”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84쪽) 30) “同願○序三大知識心淡”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85쪽)
2-2. 일반건축의 묵서명
① 서울 남대문 상량문(1396, 1448, 1479)
1961~1963년의 해체 수리 때 태조 5년(1396) 초축 때의 2건, 세종 30년(1448) 개축 때의 1건, 성종 10년 (1479) 개축 때의 7건 등 모두 10건의 글이 발견되었다.
먼저 태조 5년의 2건은 2층 중도리받침장혀와 종도리 (이중도리 하측 상면)에 각기 271자로 글자 수나 내용 이 같다. 첫머리에 ‘홍무 29년 병자 10월 초6일(洪武二 十九年丙子十月初六日)’에 이어 판사 최유경(崔有慶) 이하 감역관과 기술자 이름을 적고, 끝에는 ‘군인 전라 도 완산부 관할 내 합 6,817명(軍人全羅道完山府任領內 合陸仟捌伯拾柒名)’으로 동원된 역군 수를 적었는데, 중 간 중간에 결락 부분이 있다.31) 어느 공정 때의 글인지 명기하지 않았지만, 묵서부재로 보면 상량 때의 글인 듯 하다.
세종 30년의 글은 2층 종도리(이중도리 상측 하면)에 적힌 340자로, ‘정통 13년 무진 3월 17일 임인 손시에 입주․상량하다(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壬寅巽時立 柱上樑)’에 이어 제조 정분(鄭苯) 이하 감역관과 기술자 이름, 역군을 뜻하는 방군(方軍)․사호자(司好子)․강군 (舡軍) 등의 인원수, 정포․목면․재주․진향주 등 상량 때 지급한 물품의 양을 적었다.32) 입주․상량일자가 있 어서 상량 때의 글이 분명하다.
성종 10년의 7건 중에서는 특히 2건이 주목된다. 즉, 2층 북측 하중도리 밑면의 423자로, ‘성화 15년 기해 4 월 초2일 묘시에 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
31) “洪武二十玖年丙子十月初六日 判事嘉靖大夫中樞院使崔有慶 正 憲大夫全羅道觀察黜陟使李茂 推忠翊戴開國功臣資憲大夫完山府尹孫 興宗 副判事前嘉善大夫開城府尹李之浩 前嘉善大夫戶曹典書石崇 使 前中直大夫司僕卿尹乙休 副使前司僕少卿景廉 判官前中郞將張仁哲 前中直大夫司僕卿朴理 前書雲副正張璡 前中郞將權乙奇 司損司直兪 英俊 前中郞將金建 前中郞將鄭壽山 前中郞將崔興國 前中郞將任富 前中郞將金渚 前中郞將金允甫 前中郞將庚鼇山 常務錄事 都評議錄 事前別將孫興夏 都評議錄事前別將張籍 別監役 前南部令朴貴生 石 手 某主 ○○ 鄭化 ○○…○賢布 富議 ○同…○天湜 金豆彦 王 持…○○ 軍人 全羅道完山府 任領內 合陸仟捌伯拾柒名” (考古美術 同人會, 앞의 책, 7~8쪽)
32) “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壬寅巽時立柱上樑 提調 正憲大夫議 政府參贊判戶曹鄭苯 資憲大夫刑曹判書閔伸 監役官 通訓大夫判繕…
(이하 미상)…啓功郎繕工監直長李命敏 三軍鎭撫司直李繼蕃 李○天 郡事副司直金副興 中孝原 移文化顯令司直辺大海 別監役 ○○○○
○○副司直○○○○○○ 副司直蔡均卿 李蔭 車仁德 高仰止 鄭晴 李生 李光富 權知直長承仕郞張春雨 李技生 修義副尉中軍司正李仁 敬 大木 司直崔健 都石手 司直申乃行 右辺木手 司正鄭金等二十二 左辺木手 副司正崔濟等二十二 耳匠二三番弁○ 右辺石手 朴永南等 十四 左辺石手 李義成等十四 各○○串錠匠一二三番合六十三 彫刻 匠 五名 爐冶匠 十三名 鞍子匠 十二名 方軍 九百名 司好子 五百名 戊辰二月十六日降下本京折左右道當領舡軍 五百名 上樑布施 正布 三十匹 木綿 二十匹 陳者酒 一萬七千三百七十五甁 滓酒 三千八百 東 海光 ○○○倂一千五百首”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9~10쪽)
日卯時立柱上樑)’에 이어 제조 한계순(韓繼純) 이하 감 역관과 목수와 석수 등 41명의 이름을 적었다.33) 앞서 태조와 세종 연간의 묵서명과 같이 입주․상량일자가 있어서 상량 때의 글인 듯하다.
그림 5. 서울 남대문(1479)의 ‘긴 상량문’ 일부(서울特別市敎 育委員會, 『서울南大門修理報告書』, 1966, 도판 155-2)
그런데 2층 북측 하중도리받침장혀의 574자는, 서 사․본사․육위송․결사의 4단락으로 구성되는 전형적 인 ‘긴 상량문’이다. 즉, 서사는 120자로, ‘복이(伏以)’로 시작해서 4, 6언 및 7언 대구식 변려체로 조선의 창업과 정도(定都)에 대해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 아름다 운 기운을 무성하게 끌어안네. 새 놀라고 꿩 나는 듯 웅 장하고 화려하여 ◌랑에 상서로운 빛 가득 찼네. 세상 현자와 호걸을 손님으로 맞이하고 온 세상 뭇 백성들을 모으네(龍蟠虎踞 擁佳氣之鬱葱 鳥革翬飛 挹祥光於蓼廊 賓四海之賢俊 納諸方之衆胥)’로 찬양했다.
본사는 179자로, ‘공유(恭惟)’로 시작해서 도성과 궁궐 을 완성했지만, 성문이 퇴락하므로 새로 짓게 된 배경과 함께 중국 고사의 명장인 장석(匠石)과 공수(工輸)를 전 고로 삼아 공역의 훌륭함을 읊었다.
육위송은 144자로, 6방에 걸쳐 ‘포량동(抛樑東)’으로 시작되는 7언 3구씩 모두 18수를 배당하고, 맨 끝의 결 사는 88자로, ‘복원상량지후(伏願上樑之後)’로 시작해서 나라의 평안과 농사의 풍년, 자손의 번성, 예악의 융성 을 빌면서 제수의 흠향을 빌었다.34)
33) “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 提調 輪忠保社炳機定 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正憲大夫知中樞府事淸監君韓繼純 資憲大夫 戶曹判書尹欽 純誠明亮佐理功臣資憲大夫工曹判書兼知春秋館事南原 梁誠之 資憲大夫知中樞府事鄭文炯 純誠佐理功臣嘉靖大夫工曹參判高
○君申瀞 通政大夫工曹參議韓千孫 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 贊官邊脩 通訓大夫行繕工監郎正宋叔淇 通訓大夫行繕工監正金雨畒 通訓大夫行工曹正郞趙永貞 精○○○敵○功臣資憲大夫○○○魚○簷 中直大夫行戶曹正郞鄭儧 中○大夫行兵曹正郞李堪 ○楨部將禦侮將軍 行忠佐衛後部將李箕 定略將軍行虎賁衛後部將李季禧 月令醫員承議郞 前典醫監判官朴孝善 衙前繕工監仍○○吏承仕郞朴成茂 戶曹書吏朴貴 忠 吏曹書吏金世達 工曹書吏李孝寶 兵曹書吏金孝山 大木 禦俉將軍 行義興衛○○○ 都石手 勵○校尉○義興衛副司勇金元繼 畵員迪順副 衛行虎賁衛副司猛令金汝文 木十五 木手 趙○○書十五 ○○(이하 미 상) 冶○ 赴功郞○○等四 領○使令迪及副尉尉幻義興衛別司猛○○○
杏○副尉行虎賁衛副司猛徐仲生 勤力○○○”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4~16쪽)
34) “維成化十五年 歲次己亥四月丁亥初二日戊子 知中樞府事韓繼純 謹奉敎旨 敢昭告于兒郞偉之神 伏以 淸都穆基恭敞基 億萬帝王之居
이러한 문장구성이나 문체형식은 고려 때의 ‘긴 상량 문’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다만 서사의 앞에 43자로 ‘유 성화 15년 세차 기해 4월 정해 초2일 무자에 지중추부 사 한계순이 삼가 교지를 받들어 감히 밝게 아랑위의 신께 고합니다(維成化十五年歲次己亥四月丁亥初二日戊 子 知中樞府事韓繼純謹奉敎旨敢昭告于兒郞偉之神)’고 적은 것이 크게 차이난다. 고려 때의 ‘긴 상량문’에는 없 는 이 문장은 ‘유세차 모년모월모일 〇〇가 감히 밝게 현고학생부군께 고합니다(維歲次 某年某月某日 〇〇敢 昭告 于顯考學生府君)’로 시작되는 집안 제사 때의 축 문과 같다. 다만 여기서는 조상 대신에 아랑(兒郞)이란 귀신에게 고하는 식이다. 흔히 육위송의 노래 첫머리마 다 적는 ‘아랑위’가 ‘어기여차’와 같은 의성어가 아니라 일종의 신위(神位)로 취급한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긴 상량문’은 불교건축에는 전무하고, 일반건축도 서울 남 대문 10건 중에서 1건에 불과하다. 일단은 고려 때 도입 된 ‘긴 상량문’이 궁실건축과 같은 극히 일부에만 드물 게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2층 장혀나 춘혀, 별창방, 대공 등에 4~38 자로 ‘춘여편슈’, ‘뎡셔방’과 같이 적은 5건이 더 있다.35) 목수 등이 공사 중에 부재의 위치를 표시하거나 자신의 이름을 낙서한 것인 듯하다.
② 온양 맹씨행단 안채 묵서명(1482)
重關屹乎 嵳峨據百二山河之險 譙樓矗○闠 而起銀傍面 陽火之墟 仁 宅義路之 當中闢揚闔陰 而不息龍蟠虎踞 擁佳氣之鬱葱 鳥革翬飛 挹 祥光 於寥廊賓 四海之賢俊納 諸方之衆胥 行行有伉者足見○之宛 翼 翼如苞如者 亦知結構之固 玆神京之常觀 寔萬物之恭瞻 恭惟 聖○應 千岭 而握符靖三朝 而定鼎建都 法乾坤之衆 卜地賞龜 莁之芝靑陽 總章之告成 朱雀神武之列 峙背華山 而控漢水形勢○雄飛樂浪而臨冥 蕃表裏○○惟崇禮之衆魏乃面南之皐門武啓扉 而以迎景風時縣全 以 濟淳佫比緣 年代之久 而致棟宇之傾 在今日之孝思當善繼 而善述念 前世之創造盍肯構 而肯堂 爰就龍見之辰 聿興子來之役鳩良材 而䂓 畵匠石 揮升因舊制 而用新工輸督墨 載涓吉日 將奉修樑 敢揚七偉之 聲 聏獻六方之頌 抛樑東 萬古神京氣像雄 坐見梯航來衮衮 太平佳氣 屬春風 抛樑西 葱嶺高太白低聞 道瑤池西王母獻 來鶴○志天齊○ 抛 樑南 瘴海朱方化己○ 解慍薰風敷聖澤 山呼萬歲定聞三 抛樑北 楡塞 黑山兵火息 鏘金鳴王擁千官 錯落星辰環北劇 抛樑上 創造神功歸郢 匠 欣聞○頌開○無 ○太平○有像○ 抛樑下 勤政邵農歲多稼 戎夷蕃 部變齊民 東西南北霑聖化 伏願上樑之後 龍圖有永鳳曆彌長敎化流 而孝悌行仁義興 而禮樂盛無一物之失 取水火土穀 惟修得二氣之協和 雨暘燠寒時 若邦○○○如松柏之茂 子孫萬如瓜瓞之綿酬播洪禧大庇 庶類 謹以淸酌庶羞式陳明薦尙 饗 (이상 문구상면에 반대방향으로 묵서된 글월이 있다. 軍人彭材○…이하 목재가 단절됨) 上樑布施生 淸丁 ○○條正布貳拾…(이하 목재가 단절됨)…”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1~14쪽)
35) 2층 장혀에 “左運褓○○書員齊副尉陳王○ 軍應書員金處○乃衙○
○”라 적었고, 이밖에 上層 東南隅 春舌에 “上一南”, “상칭춘여”, “춘 여편슈 한수○”로 적었다. 또 上層 西南隅 春舌에 “上四”, “李道○”
라 적었고, 上層 宗道里 下別昌枋에 “李忠臣予”, 臺工에 “古”, “뎡셔 방”, “서월리”, “시셩”, “大大子”, “당연댕방”, “金克金”, “金克”, “崔”,
“소”, “崔七福”, “崔七星”, “崔萬石”, “古시셩”, “김○”와 같은 글이 보 인다.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6~17쪽)
그림 6. 맹씨행단 안채 묵서명 일부(1482, 뉴스 파고) 현재로서 최고의 주거건축인 맹씨행단(孟氏杏壇) 안
채 대청의 종도리받침장혀에 적힌 글로 1964년 보수공 사 때 발견되었다. 채록된 47자의 2행 중에서 첫째 행은
‘성화 18년(1482) 임인 10월 초6일 입주․상량했다-이하 불명-10월 예전의 좌향은 건(成化十八年 壬寅十月初六 日 立柱上樑-以下不明-孟冬之月 前坐向乾)’이라 적고, 둘째 행은 ‘가주 소위장군호군 맹석준이-이하 불명- 좌 향을 고쳐 입주․상량한 후에는 계향으로 옮겨 앉혔다 (家主昭威將軍護軍孟碩俊-以下不明-改坐向 立柱上樑 后向癸移坐)’고 적었다.36) 성종 13년(1482) 중수 때 좌 향이 바뀐 사실을 간략히 적고, 입주․상량일자를 적은 것이다. 상․하에 적는 용․구자만 없을 뿐 후대의 ‘짧 은 상량문’과 같다. 또 종도리받침장혀에 적혀 있어서 상량문이 분명하나 ‘긴 상량문’과는 형식이 판이하다. 오 히려 글자 수만 적을 뿐 세종 연간의 남대문 묵서명 (1448)이나 부석사 조사당(1493), 성불사 응진전(1530) 등의 불교건축 묵서명과 형식이 비슷하다.
③ 영주 소수서원 강당 묵서명(1542)
1958년의 수리 때 강당 어칸 종도리에서 발견된 68자 의 글로, 첫머리에 ‘임인년 10월 20일 신시에 상량(壬寅 十月二十日申時上樑)’에 이어, 원장 1명, 도감 2명, 도목 수 8명, 인거 2명, 야장, 묘직, 기물을 지키는 성상(城 上) 각 1명씩 관계자 16명의 이름만 적었다.37) 여기서 임인년은 선조 35년(1602)에 해당한다고 보는 이도 있 다. 그러나 전란 직후여서 공사하기 어려웠고, 서원 연 혁에도 당시에 공사했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임인년 은 주세붕이 공사를 시작한 중종 37년(1542)이며, 당시 상량 때의 상량문일 것이다.38) 문장형식도 맹씨행단 안 채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불교건축 묵서명과 같고, 용․
구자만 없을 뿐 후대의 ‘짧은 상량문’과 같다. 그 무렵까 지 관아나 서원, 개인 살림집을 지을 때 상량에 한하여 불교건축 묵서명과 흡사한 형식의 글을 상량문으로 사 36) “成化十八年壬寅十月初六日立柱上樑…(以下不明)…孟冬之月 前 坐巽向乾(제1행), 家主昭威將軍護軍孟碩俊…(以下不明)…改坐向立柱 上樑後 向癸移坐(제2행)” (『考古美術』下卷, 韓國美術史學會, 1979, 31쪽)
37) “壬寅十月二十日申時上樑 院長 琴心宅 都監 李重慶 裵憲謀 都 木手 讚謙 印潭 軌祥 大機 元聖 明仁 圓應 軌明 引鉅 千三福 金龍 大 冶匠 全演三 廟直 朴於叱迷 城上 李儀章” (韓國美術史學會,『考 古美術 上卷』, 1979, 97쪽)이라 했다. 또 다른 1건은 종도리에 판 홈에 감입된 한지 묵서이다. 후대와 같은 수 백자의 ‘긴 상량문’으 로 연월일이 없고, 명종 연간에 퇴야(退爺), 즉 퇴계 이황이 증수 (增修)하고 국왕이 사액한 사실을 적고 있어서 조선 후기 작성으로 추정된다.
38) 韓國美術史學會, 앞의 책, 97쪽에서는 임인년을 선조 35년 (1602)로 추정했다. 그러나 考古美術同人會, 앞의 책, 123쪽에서는 중종 37년(1542)로 추정했다.
용했음을 짐작케 한다.
3. 불교건축과 일반건축과의 비교
3-1. 묵서의 목적과 부재 위치
상량 때의 부재 묵서명은 대부분 어칸 종도리나 종도 리받침장혀에 적는다. 다만 글자 수가 많고, 부재 면이 부족하면 협칸 종도리 등 다른 부재에 이어 적기도 한 다. 또 후대의 수리 때 옛 부재를 그대로 사용할 경우도 다른 부재에 당해 공사한 내용을 적고, 교체할 때는 옛 글을 새 부재에 이서한다. 어떻든 상량 때의 묵서부재는 어칸 종도리나 종도리받침장혀를 이용하고, 후대의 수리 때는 다른 부재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표 2>에서 보듯이 서울 남대문, 온양 맹씨 행단 안채 및 영주 소수서원 강당의 상량 때 묵서명은 모두 종도리나 종도리받침장혀에 적었다. 다만 서울 남 대문의 경우, 같은 공사 때의 글들이 여러 부재에 적었 다. 즉, 공사일자가 있는 5건 중 태조 연간(1396)의 2건 은 2층 중도리받침장혀와 2층 중도리에, 세종 연간(448) 의 1건은 2층 종도리에 적었고, 성종 연간(1479)의 2건 도 각기 2층 하중도리 등 여러 곳에 적었다. 옛 부재를 그대로 사용한 데다 글자 수가 많았기 때문으로, 여러 부재에 걸쳐 적었지만 모두 상량문에 해당한다.
반면에 맹씨행단 안채와 소수서원 강당의 묵서명은 각기 어칸 종도리와 종도리받침장혀 한 곳에만 적었다.
공사일자와 관계자 몇 명의 이름 또는 간략한 공사배경 이나 건물 좌향만 적은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일반건축 의 경우 상량 때에 한해서 어칸 종도리나 종도리받침장 혀에 묵서하고, 사정에 따라서는 다른 부재에 이어 적는 것이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표 1>에서 보듯이 불교건축의 경우, 상량 외 에 여타 공정에 관한 글들까지 다양하다. 상량 전의 지 정이나 입주에 관한 글 뿐 아니라 상량 후의 단청이나 기와제작 등에 관한 내용도 있다. 이 밖에도 ‘중수’․‘중 창’․‘조성’․‘개개’․‘갱연’ 등 후대의 수리 때의 글들까 지 다양하다. 묵서부재도 어칸 종도리나 종도리받침장혀 를 비롯해서 위치를 알 수 없는 부재까지 다양하다. 물
건물명 연도 묵서부재 공사명 채록 글자수
내용
일자 상량문 감역 공장 물자
서울 남대문
1396 2층 중도리 받침장혀 × 271 ○ × ○ ○ ×
″ 2층 종도리
(이중도리하측 상면) × ″ ○ × ○ ○ ×
1448 2층 종도리
(이중도리 상측 하면) 입주 상량 340 ○ × ○ ○ ○
1479 2층 북측 하중도리
받침장혀 상량 574 ○ ○ ○ ○ ○
″ 2층 북측 하중도리
하면 입주 상량 423 ○ × ○ ○ ×
미상 2층 장혀 × 24 × × × ○ ×
″ 2층 동남우 춘혀 × 15 × × × ○ ×
″ 2층 서남우 춘혀 × 5 × × × ○ ×
″ 2층 종도리 하별창방 × 4 × × × ○ ×
″ 대공 × 38 × × × ○ ×
맹씨행단 안채 1482 대청 종도리 받침장혀 입주 상량 47 ○ × × × ×
소수서원 강당 1542 어칸 종도리 상량 68 ○ × ○ ○ ×
표 2. 여타 건축 묵서명의 형태와 내용
론 사례 20건 중에서 공정을 알 수 없는 2건 외의 18건 중에 종도리(채록 때 ‘도리’로 표기한 것도 포함)와 종도 리받침장혀가 각기 5건과 3건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 한다. 그러나 창방 3건․장혀 2건․화반 2건․초석 2 건․홍량 1건 등도 있다. 상량에 한해서 어칸 종도리 등 에 적는 일반건축의 관행과 사뭇 다르다.
이처럼 불교건축에서는 상량 외의 공정들에 관해서도 적는 탓에 반드시 특정 공정에 맞춰 해당 부재에 묵서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상량을 뜻하는 ‘입주․
상량’을 적은 3건 중 종도리받침장혀에 적은 글은 1건에 불과하고, 나머지 2건은 창방에 적었다. 또 ‘중수’․‘개 개’․‘갱연’․‘중창’ 등 후대의 상량 때의 5건 중 1건은 화반에 적었다. 반대로 ‘입주’에 관한 3건 중의 2건은 장 혀에, 나머지 1건은 창방에 적었다. 상량에 관한 내용이 라도 종도리나 종도리받침장혀가 아닌 다른 부재에 적 고, 상량 외의 다른 공정의 내용을 상량마룻대에 적은 것이다.
따라서 불교건축 묵서명은 상량문을 비롯한 특정 공 정 때의 조영의례를 위한 축문으로 보기 어렵다. 실제로 개기․정초․입주 때의 축문은 나중에 소지(燒紙)해서 없앤다. 그런 탓에 극히 몇 편만 문집 등에 전해질 뿐 부재 묵서명은 전무하고 형식도 판이하다.39) 성불사 응 39) 세종 때 예문관제학을 지낸 尹祥(1373-1455)의「仁政殿立柱祭 文」,「仁政殿上樑祭文」,「仁政殿外南行廊開基祭祝文」등 조영의례 때의 제문 몇 편이 그의 『別洞先生文集』에 전해진다. 첫째 글은 4 언 20구의 80자이며, 둘째 글은 4언 12구의 48자, 그리고 셋째 글은 4, 7언 위주의 42자이다. 모두 건립 후의 덕업과 영속을 비는 내용 이어서 긴 상량문의 結詞와 흡사한 느낌이다. 이처럼 일반의 정초식 때는 축문 형식의 제문(祭文)을 읊고 의례가 끝나면 소지(燒紙)해
진전(1530) 지정 때의 2건, 수덕사 대웅전(1528) 단청 때의 1건도 해당 공정 때의 축문이 아니라 여러 부재에 적는 여러 묵서명 중의 하나였다.
불교건축에서 여러 공정마다 빠짐없이 묵서하는 이러 한 관행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모든 경우 시주 자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 데서 시주자 중심의 건축행정 이 주된 이유로 추측된다. 즉, 묵서명마다 공정별 또는 부재별로 시주자․발원자․공역자․승려 등 관계자이름 을 망라해서 적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 에서 재물을 희사하는 시주행위는 가장 큰 보시(布施) 이자 공덕으로 여겼다. 또 공장․감역․역군을 비롯해서 화주․사임(寺任)․소자․초삭까지 사찰대중을 빠짐없 이 적는다. 시주나 공역, 사임 등 조영불사에 참여한 모 든 이들의 공덕을 기리는 표백문(表白文)이자 발원문과 흡사하다. 일반과 다른 불교계 특유의 건축행정에서 이 러한 묵서관행이 생겨난 것이다.
3-2. 문장구성과 문체형식
묵서명들의 글자 수는 10여 자에서 8백여 자까지 다 양하다. 일부는 채록 때부터 결락되거나 생략되어 대체 적인 글자 수의 범위가 정해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전문이 채록된 경우, 공정별로는 입주․상량에 관 한 글들이 많다. 또 부재별로는 종도리나 종도리받침장 혀에 적힌 글들의 글자 수가 많고, 초석, 화반, 첨차와 같이 묵서면이 좁은 경우는 10~20여 자 정도로 적다.
대체로 상량 때의 묵서명이 글자 수가 많은 편이나, 같 버리므로 극히 일부 문건만 문집에 전해진다.
은 공정의 글이라도 건물에 따라 다르고, 특히 관계자 수나 원문의 여부 등에 따라 편차가 크다.
공사일자는 모든 묵서명에서 빠짐없이 적는데, 불교건 축에서는 주로 원나라 또는 명나라 황제의 연호에 이어
‘모년→간지→모월→모일→○○하다’는 식이다. 다만 수 덕사 대웅전 단청(1528) 때처럼 이전에 공사한 사실을 먼저 이서한 경우가 있고, 성불사 응진전 중창(1530) 때 처럼 ‘시질(始叱, 시작)→입주→상량’, ‘산하시초(山下始 初)→산하종역(山下終役)→나한이배(羅漢移陪)→파옥(破 屋)→입주→상량’ 식으로 상세하게 적기도 한다. 당해 시점의 상량 또는 입주․상량일자만 적는 것이 원칙인
‘짧은 상량문’에 비하면 내용도 다양하고 형식도 자유로 운 편이다.
일반건축도 비슷하지만 공사일자에 ‘모시’까지 적는 것이 다르다. 서울 남대문의 경우, ‘명나라 연호→모년→
간지→모월→모일→모시→입주․상량’ 식으로 적는 식 이다. 맹씨행단 안채도 마찬가지지만 ‘가주 ○○○가 좌 향을 고쳐 바꿔 앉혔다’고 하여 공사 전후의 변화를 덧 붙이고, 소수서원 강당에서는 원장 이하 관계자 16명의 이름을 이어 적었다.
이처럼 상량한 시간까지 적는 것은 사직단 제례나 일 반의 장례 때 택시(擇時)를 중시하듯이 상량의례의 택 시가 크게 중요했음을 뜻한다. 불교건축과 달리 여타 공 정에 관한 묵서명이 없고, 종도리나 종도리받침장혀에만 적은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일반건축의 경우 상량의례에 국한하여 묵서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물론 불교 에서도 상량의례를 중시하기는 일반과 다르지 않다. 오 히려 상량식 때 삼귀의․찬불가․권공의식․화엄성중성 근․축원․반야심경봉독 등의 순으로 법요식까지 치르 는 등 한층 다양하다.40) 다만 묵서목적이 시주․발원자 의 공덕을 기리는 데 있었으므로 시간까지 정하는 택시 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시주는 특정 공정이나 부재 외에도 불사(佛事) 전반에 걸쳐 행해진다. 시주자 등의 이름을 여러 부재에 적어 두었다가 적절한 시점에 결구하는 식이다. 입주에 관한 글이 장혀나 창방에 적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편 문장 중의 원문은 불교건축 묵서명이 상량문보 다는 발원문에 가깝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준다. 원문은 불상이나 불화 제작, 불탑 조성, 경전 간행 때 발원자의 원을 적은 표백문으로 발원문이라고도 한다. 발원자는
40)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불교의전편람 마련을 위한 기초연구-정부 및 조계종의 의전행사를 중심으로』, 2016. 9, 83~
85쪽
재물을 희사하여 큰 공덕을 세운 이들이다. 대동량이나 동원시주 등으로 표기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시 주자들이 발원자라 할 수 있다. 다만 왕실발원의 경우는 삼전하(三殿下)의 수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많고, 서민발 원에는 개개인의 장수나 치병, 성불, 극락왕생 등으로 다양하다.
왕실발원의 원문은 2건이다. 먼저 부석사 조사당 (1377) 묵서명에는 ‘머리 숙여 시방법계 삼보에 귀의하 여 원하옵기를(稽首歸命 十方法界 三寶之願)’로 시작해 서 154자로 선왕과 왕비 등의 명복과 수복을 빌고, 모든 중생이 불법을 믿고 공덕을 쌓아 해탈하며, 다시 인간으 로 환생하기를 비는 한편, 공민왕과 우왕 때 각기 국사 와 왕사에 봉해졌던 원응존자와 운산화상을 대시주로, 공양왕의 차녀 정신옹주를 동원시주로 적고, 대목인 선 사 심경 등 여러 승려들의 이름을 적었다. 흔히 ‘주상전 하수만세 왕비전하수제년 세자저하수천추(主上殿下壽萬 歲 王妃殿下壽齊年 世子邸下壽千秋)’식으로 정형화된 조선 후기의 축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다.
또 도갑사 해탈문(1473) 묵서명에서는, 전체 119자로 공사일자를 먼저 적고, 대공덕주 대왕대비, 왕대비, 왕 비, 왕상 전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내용에 이어 왕사 수미, 대목 각여 등 사찰 승려들 이름을 나열했다. 세조 연간에 왕사 수미의 중창 때(성종 4년, 1473) 적은 글 로, 대공덕주 대왕대비는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 왕대 비는 덕종 비 소혜왕후 한씨, 왕비는 공혜왕후 한씨, 그 리고 왕상은 성종을 지칭한다. 별도의 일반 시주자가 없 는 것은 왕실의 지원만으로 공사한 때문일 것이다.
서민발원의 원문이 있는 묵서명은 3건이다. 먼저 수덕 사 대웅전 단청(1528) 때는, 공사일자를 적은 다음 2명 의 일반신도에 이어 ‘축수천○만○년생후생발원문(壽千
○萬○年生後生發願文)’이란 10자로 짧게 장수를 빌었 다. 또 성불사 응진전(1530)의 2건 중의 1건은 상량 때 의 글로, 중종의 둘째 비 장경왕후의 부친인 원당주 파 원부원군 윤여필(1466∼1555)의 공덕을 치하하면서 ‘다 른 이의 좋은 일을 함께 좇아 시주하고, 지금 생에서는 무병장수하며, 다음 생에서는 함께 극락에 환생하기를 원하옵고, 부처를 뵙고 불법을 들으며 함께 극락에 태어 나기를, 불후의 인연으로 행행심심하기를 비나이다(同願 隨喜施主 今生無病長生 後世同生安養 見佛聞法 同生 極樂之願 以不朽之緣 幸幸甚甚)’라는 7구 37자로 무병 장수와 성불,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내용을 적었다.
다른 1건은 와요조성 때의 글로, 공사일자, 관계자이 름에 이어 ‘원하옵건대 화주를 이루어 다른 이의 좋은